하예정이 웃으며 대답했다.“시간 날 때마다 문자 보내긴 하는데 매일 연락하는 건 맞아요. 우리 사이가 음...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어요.”전태윤과 싸운 사실을 언니에게도 숨겼는데 이모네 가족에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이모가 걱정하면 안 되니까.“감정은 키우는 거야. 이젠 혼인 신고한 지도 두석 달이 돼가니까 감정이 점점 깊어지는 것도 당연해.”성소현이 바짝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이 물었다.“소정남 씨랑 효진 씨는 잘 돼가? 요즘 가장 궁금한 게 두 사람의 소식이야.”소정남은 전태윤이 가장 믿는 사람인데다가 정보 집안 출신이다. 그런 그가 심효진과 소개팅을 하다니.성소현은 이 소식을 연예부 기자에게 팔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심효진과 친구가 되었으니 절대 친구를 배신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소정남이 공개적으로 열애를 밝히기 전까지는 성소현도 끝까지 비밀을 지킬 것이다. 혹시라도 기자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어 심효진을 졸졸 따라다닌다면 피해를 보는 건 심효진이니까.하예정은 전태윤에게 답장을 보낸 후 가볍게 웃었다.“이모가 내일 파티하겠다고 하시잖아요. 새언니더러 효진이한테 초대장을 보내라고 하고 기현 오빠더러 소정남 씨한테 초대장을 보내라고 해요. 두 사람 모두 파티에 오게 하면 되잖아요.”성소현의 두 눈이 빛이 날 정도로 반짝였다.“역시 네가 꼼꼼해. 안 그래도 효진 씨를 초대할 생각이었어. 효진 씨는 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내가 새로 사귄 친구니까 초대하지 않으면 너무 미안할 것 같더라고. 문제는 소정남 씨가 올지 모르겠어.”어쨌거나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전씨 그룹의 이사이니까.하예정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일단 기현 오빠더러 소정남 씨한테 얘기해보라고 해요. 효진이가 오면 소정남 씨도 올 거예요. 내일 파티는 저랑 언니를 사람들한테 소개해주는 자리라서 일 얘기는 안 할 거 아니에요. 그럼 소정남 씨도 소씨 가문 도련님의 신분으로 오면 되죠.”성
유청하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하예정에게 물었다. 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 후 대답했다.“언니가 안 나오길 다행이네요. 그런데 뭐 이젠 주형인이랑 이혼했으니까 얘기해도 괜찮겠네요. 그때 주형인이랑 언니가 자주 싸웠었는데 그게 저 때문인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초고속 결혼을 했어요.”하예정이 초고속 결혼을 택한 이유를 유청하에게 말하자 유청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거였군요. 남편분의 할머니를 구해줬었다고 했죠? 할머니도 아가씨한테 보답할 겸 아가씨도 마음에 드니까 두 사람을 서로 소개해줬겠네요.”유청하는 전씨 어르신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남편에게 듣기로 어르신은 온화하고 다정한 분이라 다가가기 쉽다고 했다. 그리고 신분을 숨기고 여기저기 다니는 걸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하지만 유청하는 단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전씨 어르신 같은 엄청난 분이 하예정의 도움을 받다니... 뭔가 더 숨겨진 사실이 있는 듯싶다.전씨 어르신이 먼저 하예정을 찍은 후 일부러 함정까지 파서 전태윤의 아내로 만든 게 아닐까?“남편분이 전씨 그룹에 다닌다고 했죠?”“네.”“남편분도 성이 전씨예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유청하를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언니, 설마 저의 남편이 최고 재벌가인 전씨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저의 남편은 그저 일반 직장인이에요. 하지만 능력이 뛰어나서 전씨 그룹의 대표 자리까지 앉은 거예요. 사실 전씨 그룹에 대표들이 참 많대요. 저의 남편은 회사에서 전씨 도련님의 얼굴도 보기 어렵다고 했어요. 일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던 건... 음, 아무튼 머리가 아주 비상해요.”사실은 소정남의 덕이 컸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전태윤과 소정남이 이 얘기를 들었더라면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대체 누가 누구의 덕을 보는데.“남편분이 마침 전씨 그룹에 다닌다고 하니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유청하가 물었다.“남편분 성함이 어떻게 돼요?”“전태윤요.”“전태윤?”“네. 전
유청하는 하예정과 함께 별장을 한 바퀴 산책한 후 낮잠을 자겠다는 핑계로 들어가려 했다.“언니는 들어가서 쉬세요. 전 여기 앉아서 풍경 좀 감상할게요.”하예정은 별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화려한 집안보다 마당의 풍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아까 산책하다가 담장 옆의 텃밭을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이모가 직접 가꾼 텃밭인 듯싶다.이경혜가 지금은 재벌 집 사모님이긴 하지만 어릴 적엔 보육원에서 힘든 가난을 겪으면서 자랐다. 이젠 퇴직하고 회사 일을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직접 채소를 기르는 것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추워요? 추우면 도우미한테 제 옷 좀 가져다주라고 할게요.”하예정네 자매는 이모 집에서 밥을 먹고 수다나 떨다가 가는 줄 알고 다른 여벌 옷을 챙겨오지 않았다. 며칠 머무르라는 이경혜의 제안에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 갈아입을 옷을 챙길 생각이었다.“고마워요, 언니. 안 추워요.”유청하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럼 전 이만 들어가서 눈 좀 붙일게요. 낮잠 자는 습관이 있어서 이 시간만 되면 졸려요.”하예정의 생활 패턴도 비슷하여 이해는 되었다.유청하가 별장 안으로 들어간 후 하예정은 휴대 전화를 꺼내 카카오톡을 열어 전태윤의 프로필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프로필사진이 함께 찍은 결혼반지 사진으로 바뀌어있었다.하예정의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고 그에 대한 불만도 점차 사라졌다. 그에게 영상통화를 걸자 전태윤이 바로 받았다.“예정아.”그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와 달리 맥이 축 처진 목소리에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걱정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그녀가 홧김에 술집에 간 바람에 출장 중에도 그녀가 걱정되어 밤새 달려왔다가 다시 돌아가느라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잘 못 잤어요?”“아니, 감기 걸린 것 같아.”한겨울에도 계속 찬물로 샤워하니 몸이 버틸 리가 있나.하예정이 한마디 했다.“옷 많이 입고 밥 제때 먹어요. 난 괜찮아요. 술 몇 잔 마시고 마음속의 답답함을 털어내면 멀쩡해져요.”
그리고 소통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알았어.”전태윤도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감기 걸렸으면 따뜻한 물 많이 마시고 퇴근 후에 병원 가봐요. 아니면 그냥 지금 가요. 괜히 끌다가 더 심해지면 어떡해요. 지금 열은 나요?”전태윤이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았다.‘진짜 열나네? 어쩐지 머리도 무겁고 윙 하더라니.’하지만 하예정에게는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았다.“열은 안 나. 체온은 정상이야. 나 몸은 건강하니까 걱정하지 마. 이따가 약국에 가서 감기약 사 먹으면 괜찮아져. 이모 집에 가니까 어때? 이모부랑 사촌 오빠, 언니들이 잘해주지?”“태윤 씨 지금 안색이 안 좋아요. 입술도 조금 빨갛고. 정말 열이 안 나요?”하예정이 꼼꼼하게 살폈다.“이모부랑 사촌 오빠들이 잘해줘요. 소현 언니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태윤 씨, 혈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해요. 나랑 소현 언니 서로의 존재도 몰랐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엄청 잘 통하더라고요.”전태윤이 씩 웃었다.“나 대신 이모님한테 인사 전해줘. 당분간은 인사드리러 못 가고 구정 휴가 때 시간이 돼. 그때 같이 이모님한테 인사드리러 가자.”그는 성씨 가문에 인사하러 가기 전에 하예정에게 자신의 신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하예정이 무슨 반응을 하든 모두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이건 그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우리 이모도 이해해요. 이모가 내일 파티를 열어서 사람들한테 나랑 언니를 소개하겠대요. 태윤 씨가 옆에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난 그런 자리가 싫거든요. 태윤 씨가 옆에 있었더라면 훨씬 더 마음이 놓였을 거예요. 태윤 씨가 나한테 얼마나 큰 안전감을 주는지 모르죠? 나한테 무슨 어려운 일이 닥치든 항상 방법을 생각해서 해결해줬어요. 태윤 씨는 나만의 슈퍼맨 같아요.”전태윤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그건 내가 운이 좋아서 매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거야. 앞으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 그리고 파티
“알았어요. 어차피 학생들이 방학이니까 나도 그리 바쁘진 않거든요. 태윤 씨가 말을 듣지 않으면 바로 달려가서 공처가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동료들 앞에서 망신이나 당하게.”전태윤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네가 그러니까 더 일부러 병원에 안 가고 싶잖아. 네가 바로 달려오게.”“그랬다간 가만 안 둬요!”전태윤은 일부러 겁먹은 척했다.“아이고 무서워라. 내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됐어요. 그만 얘기하고 얼른 병원 가봐요. 다 큰 어른이 자기 몸도 잘 못 챙기면 어떡해요.”하예정은 한마디 투덜거린 후 영상통화를 끊었다.“예정아.”“언니.”하예정은 가까이 다가오는 언니를 바라보았다.“우빈이 자?”“응. 잠든 거 보고 운동도 할 겸 나왔어. 나 요즘 매일 세 번 뛰고 식단 관리도 시작했어. 열심히 다이어트 해보려고.”하예진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3년여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해보니까 여자는 자기 관리도 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야 하더라고. 남자한테 너무 기대선 안 되고 ‘내가 먹여 살릴게’ 같은 어처구니없는 말은 절대 믿어선 안 돼. 그랬다간 언젠가는 내 꼴이 돼. 남자는 돈이 생기면 나쁘게 변해. 주형인도 사장직에 오른 후부터 변했어. 돈이 많아지니까 그런 거야.”하예정은 다이어트 하려는 언니를 응원했다.“하루에 세 번이나 뛰어? 아침저녁으로 두 번만 뛰어도 돼.”식사할 때도 하예진이 탄수화물을 별로 먹지 않고 얘기를 나눌 때도 디저트엔 손도 대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전에는 디저트라면 사족을 못 쓰던 언니였는데.“매일 세 번씩 뛰면 다이어트 효과도 더 빨리 나타나겠지.”날씬한 몸매로 돌아오기 위해 하예진은 큰마음을 먹었다. 최대한 토스트 가게를 오픈하기 전에 결혼 전의 몸무게로 돌아와야 했다.그녀는 아직 31살밖에 안 됐고 아직 한창이었다. 이혼 한번 했다고 인생을 포기해선 안 되고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예정아, 언니랑 산책 좀 할까?”하예진의 말에 하예정이 웃음으로 답했다.
성기현은 속으로 전태윤을 몇 마디 욕했다.하예정이 초고속 결혼한 남편의 이름을 얘기했을 때까지만 해도 같은 전태윤인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출장 갔다는 소리에 성기현은 전태윤이 바로 하예정의 남편이라고 완전히 확신했다.“언제 돌아오는데요?”“그렇게 저한테 커피 사주고 싶으세요?”“전태윤 씨, 시치미 좀 그만 떼요. 저 다 알고 있어요. 예정이가 낀 반지랑 태윤 씨 반지가 커플 맞죠? 손만 공개하고 얼굴은 공개하지 않은 아내가 예정이 맞죠?”전태윤은 입을 꾹 다문 채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에 성기현은 그가 인정한 것으로 여겼다.“두 사람 언제 혼인신고 했어요? 예정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 전인가요? 유부남이 됐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우리 소현이는 그것도 모르고 태윤 씨네 회사 앞에 가서 공개 고백까지 했잖아요! 그 바람에 소현이는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했지만 태윤 씨는 여전히 고상하게 그런 소현이를 바라만 봤어요. 걔가 아무리 대시해도 받아주지 않을 거잖아요. 그리고 저랑 태윤 씨가 라이벌인 것도 뻔히 알면서도 태윤 씨를 좋아한 소현이를 웃었고 스스로 고생을 찾아서 한다고 웃었겠죠. 그나저나 예정이한테는 왜 당신이 최고 재벌가인 전씨 가문의 도련님이란 신분을 숨긴 거예요?”성기현은 성소현이 맨날 전태윤에게 매달렸지만 사실 전태윤은 진작 하예정과 몰래 혼인신고 했다는 것만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었다. 여동생이 저도 모르게 남의 가정에 끼어든 제삼자가 돼버렸다.만약 전태윤이 계속 아무런 정보도 흘리지 않고 결혼반지도 끼지 않았더라면 성소현은 아마 아직도 그에게 미쳐있었을 것이다.“예정이한테는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에요? 예정이랑 소현이가 절친인 거 몰라요? 이젠 사촌 사이가 됐는데 예정의 남편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전씨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소현이가 알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예정이는 또 뭐라 생각하고 사촌 자매끼리 어떻게 지내야 하냐고요!”“기현 씨.”남편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유청하가 재빨리 다가와 남편에게 귀
전태윤이 전화를 뚝 끊자 오히려 화가 가라앉은 성기현이 싸늘하게 웃었다.“전태윤, 언제 날 형님이라고 부르는지 똑똑히 지켜볼 거야. 내가 너 하나 어쩌지 못할 것 같아?”그에게 물을 가져다주러 온 유청하가 그의 뒷얘기를 듣고 한마디 했다.“이젠 가족이 됐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전태윤 씨가 무슨 이유로 신분을 숨겼든 예정 아가씨의 남편인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내가 전태윤이랑 얼마나 오랜 시간 경쟁했었는데요. 지금까지도 그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어요. 어쩌다가 전태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갈 기회가 생겼는데 놓쳐서야 하겠어요?”성기현이 물을 받고 두어 모금 마셨다.“내가 지금 전태윤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데요. 전태윤이 출장 갔다 돌아오면 그대로 갚아줄 생각이에요. 나한테 밥을 사줄 때 예정이도 불러서 예정이 앞에서도 날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두고 볼 거예요. 여보, 나의 라이벌인 전태윤이 날 형님이라고 부르는 모습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와요.”“당신 정말 어지간히 화난 게 아니네요.”유청하가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같은 연배인데 전태윤 씨가 기현 씨를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협박이라도 할 셈이에요?”“날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하예정 앞에서 난처하게 할 거예요. 예의 없이 형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고요.”유청하는 어이가 없었다.왠지 남편과 전태윤이 곧 한바탕 기 싸움을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성기현에게 모든 비밀을 들킨 전태윤은 처음에는 걱정됐지만 성기현의 전화를 끊은 후 잠시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성기현이 이토록 화를 내는 건 그의 친여동생 때문이지, 하예정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성소현이 아직 그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기 전까지 성기현은 그의 진짜 정체를 하예정에게 얘기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그뿐만 아니라 어쩌면 갖은 방법으로 그를 도와 계속 숨기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앞으로 성기현 앞에서도 대놓고 하예정과 애정행각을 해도 된다.전태윤은 출장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서
소정남이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들어와.”서재 문이 열리고 한 경호원이 초대장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소정남은 누군가 파티에 소지훈을 초대한 걸로 생각했지만 경호원은 곧장 그의 앞으로 다가와 초대장을 그에게 건네며 깍듯하게 말했다.“도련님, 이건 성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 보낸 초대장입니다. 성씨 가문에서 내일 저녁에 파티하는데 도련님을 초대했어요.”“내 거라고?”소정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성씨 가문의 파티 초대장을 성기현 씨가 특별히 보냈다고? 그것도 내일 저녁에? 이렇게나 급하게?”다른 가문에서 파티를 열 땐 며칠 전에 미리 초대하거나 심지어 십여 일 전에 초대하는 가문도 있었다. 그래야만 손님들도 준비할 시간이 있으니까.성씨 가문에서는 임시로 급하게 파티하는 것 같은데?이경혜가 두 조카를 찾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소정남은 성씨 가문의 이번 파티의 진짜 목적을 대충 짐작했다. 그녀가 두 조카를 관성의 상류 사회에 들이려는 게 아닐까?‘하하, 전태윤 인제 어떡하지?’“성씨 가문 큰 도련님께서 도련님한테 전해달라는 말씀이 있어요.”“뭔데?”“심효진 씨도 초대장 명단에 있답니다.”소정남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씩 웃으며 경호원에게 물었다.“성씨 가문에서 보낸 그 사람 갔어?”“아직 밖에서 도련님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어요.”소정남은 초대장도 열어보지 않고 경호원에게 말했다.“가서 전해. 나 내일 저녁에 시간 맞춰서 꼭 간다고.”“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공손하게 대답한 후 자리를 떠났다. 소정남은 초대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왠지 앞으로 성기현 씨를 만나도 함부로 대들지 못할 것 같아.”“심효진 씨랑 성기현 씨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 아까 그 말은 전태윤 씨한테 했어야지.”소지훈은 일을 마무리한 후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웃을 듯 말 듯 했다.“내가 왜 아직도 결혼할 생각이 없는지 알겠지?”“그건 형이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 거야. 태윤이 봐봐, 예전에는 얼마나 고집이 셌는데 지금은 순순히
“이씨 가문을 잘 꾸려나가려면 젊은 세대에게 의존해야죠. 우리 가문의 젊은 세대들도 능력만 있으면 모두 중히 여겨야 하는 거죠. 숙모님들, 맞죠?”이씨 가문의 셋째 삼촌 이지후는 야망이 있지만 이제 분투할 정력이 없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다만 그들의 후손의 앞날일 뿐이다.하예진이 방금 한 말은 승낙한 거나 다름없다.하예진이 방금 한 말은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가 하예진 쪽으로 돌아간다면, 가문의 젊은 세대들은 능력만 있다면 모두 적당한 자리에서 빛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의미이다.하예진은 자신이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 셈이다.두 사모님이 눈을 마주치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씨 가문의 넷째 숙모 김연희가 입을 열었다.“맞아요. 역시 전임 가주의 후손답네요. 전임 가주가 이씨 가문을 다스릴 때 우리 이씨 가문은 강성에서 그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존재였죠.”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이씨 가문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전임 가주 이은숙이 여전히 이씨 가문을 운영했을 때 김연희와 최순자는 아직 이씨 가문으로 시집오지 않았다. 당시 그녀들의 나이는 6세에서 12세 사이였고 가문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그러나 그녀들의 남편들은 어느 정도 기억에 남을 것이다. 적어도 학창시절에 이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면 아무도 괴롭히지 못했다.그 후, 가문의 어르신들 이야기를 통해 자주 듣게 되었다.전임 가주 이은숙의 인간 됨됨이나 일 처리 방면에서는 매우 훌륭했지만 늦게 결혼하고 늦게 아이 낳은 탓으로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하루가 멀다고 병으로 앓게 되어 이은화에게 기회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그리고 두 숙모분께서도 안전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씨 가문에서 떠벌리며 다니지 않는 한 강성에서의 안전은 제가 보장해 드릴 수 있어요.”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무슨 일을 하든 너무 날뛰지 않고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으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그들이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한다면 하예진이 보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감히 협력하지
몇 분 후, 방에서 하예진을 기다리고 있던 전호영은 예진이 도착하자 바로 나와서 문을 열었다.“예진 누나.”“고마워요, 호영 씨.”“우리 사이에 무슨, 천천히 얘기 나눠요, 저는 일 보러 나가볼게요.”방을 나온 전호영은 하예진을 방으로 들여보내고는 일구를 포함한 경호원들에게 아무도 못 들어가게 단단히 지키고 있으라고 지시했다.펜트하우스가 출입이 통제되긴 하나 경각심을 높여서 나쁠 것은 없었다.일구와 다른 경호원들은 전호영의 말에 깍듯이 응했고 전호영은 자리를 떴다.하예진이 방으로 들어가자 두 숙모님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들을 위한 과자와 과일들이 놓여 있었고 따뜻한 물도 준비해져 있었다.“예진 씨.”하예진이 들어오자 두 숙모는 소파에서 일어나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인사했다. 하예진 라인에 서기로 했으니 두 사람은 이제 본모습을 보일 때가 된 것이다.두 분은 나이가 있는 분들이셨지만 보양을 잘한 덕분에 겉보기에는 훨씬 젊어 보였다.“두 분 앉아계세요.”하예진은 차를 내와 찻잔에 부으면서 말했다. “차를 마시면 정신도 맑아지고 좋더라고요.”“우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차를 별로 안 마셔요. 차를 마시면 저녁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셋째 숙모가 웃으면서 답했다.하예진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간식을 권했지만 두 분은 사양했다.“두 분께서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하예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분과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니 다룰 얘깃거리도 별로 없었다.“예진 씨가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라고 우리 그이가 그러더군요. 우리 두 집안이 기꺼이 힘을 합쳐 도와드리겠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셋째 숙모가 입을 열자 넷째 숙모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속으로는 하예진 앞에서 이 가주에 대해 불평하고 싶었지만 집을 나설 때 남편이 그러지 말라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했기에 꾹 참고 있었다. 그저 두 집안의 의사를 전달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고 얘기했다.하예진은 관성의 대표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하루 호텔은 안전 레벨이 아주 높은 곳으로 그곳에 가면 숙모님들이 마음을 좀 더 내려 놓을 수가 있었다.이에 하예진도 동의를 표하였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방을 예약 해놓을게요.”그녀는 뒤돌아서서 휴대폰을 꺼내어 전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루 호텔에서 제일 안전한 방이 어느 방이에요? 누가 엿듣거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으로 빌리려고요.”전호영은 일 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그야 무조건 펜트하우스에 있는 스위트룸이죠. 지금 제가 묵고 있어요, 누나가 필요하다면 제가 빌려드릴게요.”“고마워요, 이씨네 숙모님 두 분이 먼저 가실 거예요,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서 조용히 두 분을 방까지 모셔드리도록 해줘요. 카메라에 찍히지 않게 주의해 주시고요.”전호영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안배할게요. 두 분 호텔로 이동하시게 하세요, 거의 도착할 때 저희 쪽에 연락 주시면 돼요.”그러고는 하예진에게 번호 하나를 알려주었다.“누나, 조금 있다가 이 번호로 연락 주시면 돼요, 펜트하우스까지 에스코트해 줄 거예요. 저도 조금 있다가 바로 돌아갈게요.”현재 그 방은 전호영이 지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방문을 열 수가 없었기에 호영이 호텔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부탁드릴게요.”“별말씀을요.”하예진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 하던 일 계속 해요, 제가 두 분께 말해놓을게요. 여기서 호텔까지 가려면 약 20분 정도 걸릴거에요. 저는 30분 뒤쯤에 도착할 것 같아요.”“알겠어요.”통화를 마친 예진은 두 숙모한테 다가가 말했다.“제가 이미 말해놓았으니 두 분께서 지금 그쪽으로 출발하시면 되세요. 거의 도착할 즈음 이 번호에 전화하시면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그분들이 두 분을 방까지 에스코트해 주실 거예요.”하예진은 전호영이 알려주었던 번호를 셋째 숙모한테 말해주었다.“먼저 가 계시면 돼요. 저는 십 분 뒤에 바로 출발할게요.”“그래요.”두 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지체없이 바로 출발했다.
“그 분들이랑은 어떻게 되는 사이신지?”하예진이 물었다.두 사람은 자신들의 남편 정체를 말한 후 하예진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녀가 침묵하자 두 사람은 하예진이 자신의 남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서둘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넷째 숙모고 이분이 셋째에요.”하예진은 그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실 때 뒤따르는 사람이 없었나요?”“없어요, 뒤처리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예진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예진은 미소를 지었다. “저야 아무 걱정이 없지만 두 분께서 저를 찾아온 일이 이 가주님의 귀에 들어가 두 분께서 불리해질까 봐 걱정이에요.”하예진은 원래부터 이씨 집안을 노리고 있었으니 이씨 가족 사람들과 접촉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오히려 아무 접촉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씨 집안 사람들이 그녀를 먼저 찾아왔다면 이 가주가 그 사실을 알고 응징할 수도 있기에 그 후과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두 사람의 눈빛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보였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예진 씨, 잠깐 따로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좋아요, 저는 아무 때나 괜찮아요. 어디서 얘기할까요? 장소를 알려주시면 제가 곧 갈게요. 함께 이동하면 눈에 뜨일 수 있으니까 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진의 말에 그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 주는 마음이 담겨 있어 두 사람은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의 남편들은 집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며 지냈다. 이 가주는 그들을 비롯한 직계가 아닌 가족들에게 아주 인색하고 발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오히려 이 가주의 억압을 받아 두각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두 가족은 몰래 모여 이틀 동안이나 상의를 했고 결국에는 하예진 라인에 서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하예진이 이길 것이라고 배팅을 한 것이다. 만약 하예진이 이긴다면 그들이 하예진을 처음부터 지지해 온 사람들로서 앞으로의 발전이 나쁘
하예진은 경계심에 차 물었다.“날 스토킹하기라도 하는 건가?”그녀는 단지 공장을 보러 왔을 뿐 오래 머물지 않을 텐데 이씨 집안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니, 그녀가 이씨 집안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곳 강성에 온 목적은 하나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고 이씨 집안을 장악하는 것이다.이는 큰 이모가 그녀에게 맡긴 중대한 임무였다.곧 하예진은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이씨 집안에서 아무런 경계가 없다면 더 이상한 것이었다.“내가 나가 볼게.”그녀는 아마도 이씨 집안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의 부인이겠거니 생각했다.그날, 만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남녀 반반이었고 예진은 일구랑 함께 참석했었기에 만찬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일구는 얼굴이 익을 것이었다.예진은 경호원과 함께 나갔다.공장 입구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차에 앉은 사람들은 내리지 않았다. 하예진이 나오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아마도 남들이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하예진은 그녀들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강성 시민 중에는 그녀들을 알아볼 사람이 많았다.하예진이 다가가자 한 분이 눈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건네왔다.“예진 씨,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예진은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구신지? 얘기를 나누려면 누구신지 알아야죠”그들은 예진이랑 같이 따라 나온 사람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여전히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성분이 말을 건넸다.“혹시 이씨네 셋째 큰아버지랑 넷째 큰아버지를 기억하시나요?”그 두 사람은 이 가주랑 동년배지만 직계가 아니고 데릴사위도 아니기에 자신들의 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엄격히 말하면 셋째 큰아버지는 이 가주의 집안 동생이고 이 가주는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데릴사위를 들이기 때문에 그녀의 자식들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보, 나도 이십몇 년 간의 남매 정을 생각해서 도와준 거야. 갈 데도 없고 돈도 없는데 불쌍하잖아. 당신이 싫다면 내가 내보낼게.”정일범은 아내 조윤이 엄마한테 이를까 봐 겁이 났다.외도 사실이 들통난 후 윤정이가 오빠들을 도와줬기에 조윤은 윤정이를 무척이나 미워했다.윤정의 처지가 딱하게 된 지금, 조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더욱 심하게 굴 것이 뻔했다.하지만 조윤 탓을 할 수가 없었다. 반병 남짓 남았던 술을 아버지에게 갖다준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조윤은 차갑게 쏘아붙였다.“지금 당장 내보내요. 이후에도 연락하지 말고요, 그 애는 당신들의 동생이 아니잖아요. 당신들의 동생은 윤미라고요. 그 애 친아빠 때문에 당신들이랑 윤미가 이십 년이나 떨어져 살았는데 당연히 그 사람들을 싫어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윤미가 그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 사람들이 윤미한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봐요. 일범씨, 당신도 딸을 가진 아빠잖아요. 우리 딸이 다른 집에 바뀌어 가서 학대를 당했다고 생각해 봐요, 어떨 거 같아요?”정일범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그는 곧 하인 부부에게 지시했다. “가서 윤정의 짐을 모두 정리해서 줘.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해, 다시는 여기에 나타나지 말고.”윤미의 둘째 형수랑 셋째 형수도 자기 남편에게 눈치를 주었다.두 남자는 와이프한테 찰싹 붙어 실실 웃어대며 낮은 목소리로 다시는 윤정이를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사과했다.윤정이는 절망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이제 진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오빠들도 도와주지 않고 일전한 푼도 없는 상황에 어떡하지?이제 진짜로 친엄마한테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형편이 나쁘지 않다고 하더라고 시골과 도시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어릴 적부터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그녀가 시골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클럽에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기
이윤정은 조윤을 노려보며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조윤은 이윤정에게 더는 해명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이윤정에게 알려준 다음 두 동서에게 걱정스레 말했다.“가요. 우리 들어가요. 밖이 추워 죽겠어요.”조윤은 몸을 돌려 뒤따라 나오는 김숙자에게 지시했다.“앞으로 제 동의 없이 이 천한 X을 우리 별장 안에 들여보내지 마세요. 일범 씨가 다시 감히 윤정이를 여기로 끌어들인다면 우리 어머님의 노여움을 감당할 수 있는지 한 번 물어 보세요.”이윤정은 넋을 잃고 주저앉아버렸다.얼마 후 정일범 형제가 도착했다.그들은 땅바닥에 앉아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 이윤정을 보았다.그녀의 얼굴은 손가락 자국들로 가득했고 빨갛게 부어올랐다. 그리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었으며 머리는 헝클어진 채로 옷도 너무 얇게 입어 입술이 퍼렇게 변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정일범은 무척 가슴 아팠다.“윤정아.“세 형제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구경꾼들은 조윤이 자리를 뜨자마자 흩어졌다.물론 이윤정에 대한 소문은 곧 강성에서 널리 퍼졌다.정일범은 양복 외투를 벗어 이윤정의 몸에 걸쳐주었고 그의 두 동생은 이윤정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오빠.”이윤정은 정신을 차리더니 정일범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형수님, 형수님들이 나를 이렇게 때렸어.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내가 오빠들이 바람피울 때 오빠 편을 들었다고 지금 내가 초라해진 틈을 타서 나에게 복수하는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분명 이윤미일 거야. 이윤미와 형수님들이 연합해서 나를 상대하는 거라고. 오빠, 나와 아빠는 단지 오빠가 준 술 반병을 마신 것뿐인데 그렇게... 오빠가 나와 아빠를 함정에 빠뜨릴 리가 없잖아. 그럼 분명 형수님이 우리 술에 약을 탔을 거야.”정일범은 다급하게 이윤정의 말을 끊었다.“윤정아. 이런 일은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마. 엄마는 아직도 화가 안 풀리셨거든.”정일범도 조윤이 이윤정을 함정에 빠뜨린 사실을 알고 있다.지금 이윤정은 이
“넌 내 남편의 친동생이 아니야. 혈연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내 남편이 널 여기로 데려와 살면서도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어. 첩을 이 별장에 몰래 감춘 게 아니면 뭔데! 이 별장은 우리 어머님께서 우리에게 사주신 신혼 별장이고 부동산 소유증 위에도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나도 알 권리가 있어. 둘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내 남편이 몰래 여기로 널 데려온 것으로 보면 너희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야?”조윤은 이윤정이 이씨 가문에서 쫓겨난 이유를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윤정에게 죄를 덮어씌웠다.이윤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해명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억울하다고 누군가의 음모에 말려든 것이라고 울부짖을 뿐 감히 다른 말은 내뱉지 못했다.이런 모습은 오히려 사람들이 조윤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했고 이윤정을 보는 눈빛에는 혐오와 비난이 물들게만 했다.어떤 사람들은 이씨 가문의 예전 집사였던 이윤정의 친아버지가 나쁜 심보로 딸을 바꾸는 바람에 진정한 이씨 가문의 후계자인 이윤미가 고생하고 구박받으면서 자랐다고 여겼다. 하여 그 집사의 근본적인 인성부터 나쁘다고 비난했고 따라서 이윤정도 그 집사의 핏줄을 이어받아 아무리 이씨 가문에서 자랐다고 해도 환경과 상관없이 그 유전자가 나쁘다고 수군댔다.뿌리에서부터 상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이윤정은 악랄한 표정으로 과거 그녀의 비위를 맞추던 조윤 일행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이제 만족해? 당신들은 날 무너뜨리고 싶어서 날 당신들의 계략에 빠지게 한 거지? 당신들이 진범이지?”사건이 일어난 뒤로 이윤정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약을 타서 자신을 모함한 사람이 바로 조윤 일행이라고 추측했다.정군호의 술은 정일범이 준 술이고 가져왔을 때 이미 반병밖에 남지 않았다.그럼 정일범이 아니라면 분명 조윤일 것이다.조윤은 차가운 웃음을 날렸다.“윤정아,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울어도 소리쳐도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 엄청 화나지? 얼마 전에 우리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 안
예전에는 우아하고 오만하던 이씨 가문의 후계자였던 이윤정은 지금은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강아지처럼 어디로 가나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욕만 먹었다.“윤정이는요?“조윤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뒤 정원에서 그네에 앉아 계세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저대로 한참을 앉아 계세요.”김숙자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조윤 일행은 기세등등하게 뒤 정원으로 걸어갔다.김숙자는 정일범에게 알릴지 말지 고민하다가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남편에게 알렸다. 그녀의 남편도 정일범에게 알릴지 말지 고민했다.결국, 두 사람은 정일범에게 전화를 걸었다.“큰 도련님, 큰사모님께서 둘째 사모님과 셋째 사모님과 함께 여기로 와서 다짜고짜 둘째 아가씨가 여기에 머물고 계시는지 물어보셨어요. 지금은 뒤 정원으로 둘째 아가씨 찾으러 가셨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요. 큰 도련님, 얼른 돌아오세요.”정일범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어떻게 아셨대요? 지금 바로 돌아갈게요.”조윤은 지금 이윤정을 무척 원망하고 있어서 과거의 감정이 사라진 지 오래다. 만약 정일범이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이윤정은 아마 조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김여희와 박수아도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정일범은 두 남동생도 불러 함께 별장에 갔다.김숙자 부부는 정일범과의 통화를 마친 뒤로 밖으로 나갔는데 이윤정의 울부짖음과 욕설 소리를 들었다. 물론 욕설 퍼붓는 사람들은 조윤 일행이었다.김숙자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서둘러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대로 달려갔다.조윤 일행과 이윤정의 소리가 너무 컸는지 이웃들은 울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내밀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걷다 보니 결국 정일범 별장 입구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역시 남의 가십거리를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본성인가 보다.이윤정이 아무리 오만하고 조윤 일행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고 해도 그녀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이윤정은 조윤에게 머리채까지 잡혀 비참하게 뒤 정원으로부터 앞 정원까지 끌려갔다.아파 죽을 지경이다!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