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혁은 단지 꿈속에서 그에게 치근덕거리는 여자를 현실 속에서 만나 그녀를 화나게 했을 뿐이다. 사실 전이혁도 상대방의 이름도 몰랐다.오히려 상대방이 전이혁의 이름을 알고 관성으로 찾아올 줄은 몰랐고 전씨 그룹으로 찾아갈 줄은 더더욱 몰랐다.도둑이 제 발 저리다더니...전이혁은 자신이 한 일이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전이진에게 속아서 진실을 말해버릴까 봐 마음이 켕겼다.전태윤은 하예정을 데리고 입원 병동으로 들어갔다. 하예정의 손에는 꽃다발이 쥐여있었고 전태윤의 손에도 크고 작은 가방들로 가득했다. 전태윤 부부는 경호원들을 거느리지 않고 조용히 들어갔다.두 사람은 일부러 누구도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검은색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산부인과 입원 부로 올라갔고 하예정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전태윤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여보, 너무 빨리 가지 마. 가까운 거리인데 왜 그렇게 빨리 가?”“청하 언니가 오늘 퇴원한단 말이에요.”전태윤은 낮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퇴원하시면 이모 댁에 가서 아기를 볼 수도 있잖아.”하예정은 아기를 무척 좋아했다.워낙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임신한 뒤로도 모성애가 더 넘쳐나는지 아기들을 더 많이 귀여워했다.“저는 볼 수 있죠. 그런데 태윤 씨는 아기가 한 달 되어서야 볼 수 있는걸요. 저는 매일 보러 갈 수 있어요.”하예정은 걸음을 늦추어 고개를 돌려 전태윤에게 웃으며 말했다.“그 아기는 성 대표님 아들이지 내 아들이 아니잖아. 나는 한 달 동안 볼 수 없어도 상관없어. 만약 내 아들이라면 매일 보고 싶을 테지만. 예정이 네가 내년에 산후조리할 때 내가 40일 동안 휴가를 내서 집에서 널 돌볼 거야. 그리고 우리 아기도 매일 자라는 모습을 볼 거야.”하예정이 입을 열었다.“태윤 씨가 산후조리 할 필요도 없는데 그렇게 긴 휴가를 쓸 필요 없어요. 집안에 가족들이 많아서 그런 장기 휴가를 내서 우리 모자를 돌볼 필요까지 없다고요.”“난
“언니가 오늘 퇴원하신다고 해서 꽃다발을 주려고 가져왔죠. 다들 저와 같은 생각을 할 줄은 몰랐죠. 물건은 다 챙겼어요? 제가 도울 일은 없어요? 없으면 제가 언니를 도와 꽃다발을 안아 줄게요.”하예정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웃으면서 대답했다.유청하가 퇴원하는 날은 그야말로 성대했다.전태윤 부부는 사람들 속에서 각자의 품에 꽃다발을 안고 걸었다. 두 사람은 걷다가도 서로를 마주 보면서 달콤함과 행복함을 만끽했다.그들은 입원 병동에서 나와 병원 주차장으로 향했다.주차장은 진찰실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전태윤 일행은 자연스럽게 진찰실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 전태윤 부부는 여운별과 마주쳤다.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전태윤 부부는 여운별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운별이 감옥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기 때문에 하예정은 여운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단지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그런데 전태윤 부부가 지나갈 때 여운별은 하예정의 말소리를 듣고 갑자기 멈추어 고개를 돌리며 하예정을 바라보았다.원수끼리 만나면 눈에 핏발이 선다고 여운별은 바로 달려들어 단칼에 하예정을 찔러 죽이고 싶어 했다.그녀는 발을 몇 걸음 옮겼다가 또다시 멈추었다.그대로 돌진하면 안 되었다.여운별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칼은 물론 몸에 펜도 없었다. 게다가 충동적으로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법이다. 여운별은 자유를 잃은 적 있기에 지금 밖에서 마음대로 다니는 자유를 무척 소중히 여겼다.복수를 위해 다시 미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여운별은 하예정의 뒷모습을 한사코 주시했다. 하예정은 전태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올랐고 곧 전태윤이 차에 올라탄 뒤로 그들의 차는 멀리 떠나갔다.“하예정!”여운별은 이를 갈며 말을 내뱉었다.“언젠가 내가 널 무너뜨리고 말 거야!”그녀는 하예정이 떠난 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고 따라서 그녀의 등 뒤에 난 상처도 더 아파 났다.여운별은 아침에 여씨 가문으로 달려갔다가 여천우가 돈을 가지러 위층으로 올라간 틈을
전이진은 흉악한 표정으로 여운별을 향해 꺼지라고 소리쳤고 손에 잡히는 대로 모든 물건을 그녀를 향해 뿌렸다.겁에 질린 여운별의 얼굴은 바로 창백해졌고 본능적으로 일어나 빨리 도망쳤다.여운별이 그렇게 빨리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이진이 던진 접시에 등을 몇 번이나 맞았다.무척 아팠다!그녀는 필사적으로 뛰쳐나와 멀리 도망친 후에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또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감히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차를 몰고 셋집으로 돌아갔다.원래는 아무 약이나 바르고 견뎌내려 했지만, 등이 너무 아프다고 느낀 여운별은 어쩔 수 없이 병원으로 달려와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병원에서 줄을 서면서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야 여운별은 그곳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전태윤 부부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비록 전태윤 부부는 경호원 팀을 데리고 오지 않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했지만, 하예정의 목소리를 들은 여운별은 그 목소리가 곧 하예정의 목소리임을 눈치챘다. 여운별은 하예정의 목소리가 이가 갈릴 정도로 듣기 싫었고 또 기억에 남았다.“하예정! 여운초! 기다려! 내가 받은 고통을 모두 두 배로 돌려줄 거니까!”여운별은 하예정이 임신했다고 들었다.전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임신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릴 때 하예정이 감히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모습을 보더니 사람들은 하예정이 임신했음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여운별은 하예정이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여운별은 질투로 인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감옥에서 나온 여운별은 두 고모에게서 하예정이 결혼 후 오랫동안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모두가 하예정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뒷말까지 했다.하지만 지금 하예정이 임신했다. 하예정은 어렵게 품은 아이가 정말 소중할 것이다. 이때 그녀를 유산시키게 한다면 정말 속이 다 시원할 것이다.그리고 여운초가 아이를 평생 낳지 못하게 한다면 전이진이 여운초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과
청소부 아줌마는 종이쪽지를 여운별이 탄 차 안에 던진 뒤 가버렸다. 원래는 여운별에게 누군가가 병원 부근의 빵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려고 했는데, 여운별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그것도 아주 험한 욕설이었기에 빗자루로 차 안에 있는 여운별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전해주라고 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여운별은 청소부 아줌마가 차 안으로 쓰레기를 던진 거로 생각하고 종이쪽지를 주워들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문득 쪽지에 글이 쓰여 있음을 발견했다.[빵집에서 만납시다. 정현숙]그제야 여운별은 방금 청소부 아줌마는 종이쪽지를 전해주려고 차 문을 두드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청소부 아줌마를 쫓아가 묻고 싶었지만, 상대방은 이미 멀리 가버렸다. 게다가 방금 그녀는 그 사람한테 악담까지 퍼부었는데 따라잡았다고 한들, 그 사람은 여운별을 상대하기조차 싫어할 것이었다.여운별은 하는 수 없이 차를 운전하여 병원을 떠났다.그녀는 정현숙이 청소부 아줌마를 시켜서 쪽지를 전하라고 했으니 분명히 이 부근에 있을 테니, 자기가 부근에 있는 빵집을 훑어보면 정현숙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복수를 위해, 그리고 또 자금위기의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여운별은 반드시 정현숙을 찾아내야만 했다.그래도 총기가 좀 있는 편인 여운별은 병원 부근에 있는 한 빵집에서 빵을 사 들고 나오는 정현숙을 발견했다.여운별이 차에서 내리자, 정현숙은 그녀를 스쳐 지나가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금 감시당하고 있으니 꼬리를 떼고 난 뒤 다시 연락할게요.”그리고는 차에 올라 기사더러 운전하라고 분부했다.여운별은 감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빵집에 들어가서 아무렇게나 빵을 둬가지 샀다.이쪽에 있는 전태윤은 문자와 함께 사진 한 장을 접수했다.문자와 사진을 확인한 뒤, 그는 핸드폰을 하예정에게 넘겨주었다. 핸드폰을 받아서 내용을 읽은 그녀는 전태윤을 바라보았다.전태윤은 아무
정현숙의 목적은 하예정을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하예정이 전씨 가문의 사모님이기 때문에 하예정이 살아있는 한, 전씨 가문이 곧 두 자매의 뒷심이 되어 성씨 가문과 손을 잡고 이씨 가문과 맞설 것이었다.정현숙은 자매를 죽여 가족을 희생시켜서야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에 올라 몇십 년을 보내왔다. 근데 지금에 와서 이씨 가문의 가주 자리를 큰언니의 후대에 물려준다는 것은 도저히 안 될 일이었다.애초에 그녀는 친자매도 죽일 수 있었다지금 조카, 조카손녀를 죽인다는 것은 그녀에 대해 말하면 개미를 비벼 죽이는 것과 다름없이 아무런 고통, 잠시의 주저함도 없을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장기적으로 관성에 눌려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도 그녀가 관성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에 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계속 그녀를 물고 놓지 않았다.그리고 그녀는 관성에서 아무런 힘도 없으므로 뭘 좀 하려고 해도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자기가 강성에 있는 소굴로 돌아가서 천천히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자기한테 충성을 다하는 경호원을 관성에 남겨서 여운별을 사람을 죽이는 비수로 만들게 하여 적당한 시기를 찾아서 하예정한테 칼을 박을 타산이었다.“사모님, 알겠습니다. 제가 꼭 사모님의 분부대로 움직이겠습니다.”정현숙은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어서 경호원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이건 여운별의 연락처야. 네 핸드폰에 잘 저장해둬. 하지만 그 여자한테 연락할 때는 네 전화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전태윤한테 들킬 수 있으니깐.”“밖에 있는 공중전화로 그 여자와 연락하면 되겠네.”“알겠습니다.”경호원에게 지시를 마친 정현숙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야 말했다.“딴 일은 없으니 나가 봐.”경호원은 묵례한 후 공손히 물러갔다.정현숙은 혼자 방에서 조용하게 앉았다가 떠났다.그녀는 관성 호텔에 돌아가서 체크아웃 절차를 마친 뒤, 여러 명의 경호원의 호송하에 캐리어를 끌고 호텔 문을 나섰다.진작 불러온 차량이 호텔 정문에서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몇 분 뒤, 정현숙을
이에 하예정은 웃으면서 성소현을 놀려줬다.“애가 그렇게 이쁘면 언니와 형부도 얼른 하나 낳아요.”성소현은 조카의 볼에 뽀뽀하고 나서 말했다.“나와 준하 씨는 결혼 후 서둘러서 애부터 낳을 예정이야. 애를 낳는 인생의 큰 임무를 완성한 뒤, 우리는 사업에 전념할 거야.”“난 또 두 사람이 결혼 첫 2년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 할 줄 알았는데요.”유청하가 말했다.“나도 처음에는 결혼한 첫 2년 동안은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와 준하 씨도 이젠 어리지 않잖아요. 내년에 결혼해서 이내 서둘러서 애를 만든다고 해도 낳고 나면 제 나이가 서른이에요.”성소현은 하예정보다 한 살 위였다.“나도 옛날에는 애를 싫어했어요. 하지만 우빈이를 본 그 시각부터 애를 좋아하게 됐어요. 지금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요.”“내 조카 같은 아기는 얼마나 키우기 쉬운데요. 배불리 먹고는 자고, 자고 일어나면 먹고. 별로 울지도 않아요. 새언니, 이렇게 키우기 쉬운 아기는 몇을 더 낳아도 아무 문제도 없을걸요. 우리 집에서는 얼마든지 키울 수 있어요.”하예정이 웃으면서 말했다.“새언니는 아직 산후조리 기간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둘째, 셋째를 가지라는 말을 해요? 이 말을 큰오빠가 들으면 또 언니를 한바탕 욕할 것이 뻔해요.”임신 기간에 입덧을 심하게 하는 유청하를 보는 성기현은 가슴이 아파서 애를 지우라고 권했었다.두 사람도 애 하나만 갖기로 약속했었다.그 말에 성소현은 얼른 고개를 방문 입구 쪽으로 돌려 큰오빠가 있나 없나 확인한 뒤 웃으면서 말했다.“나도 그냥 신이 난 김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에요. 새언니는 가슴에 두지 말고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그녀도 심한 입덧으로 무척 고생한 유청하를 가슴 아파했다.“하나만 낳으면 돼요. 둘째 오빠가 결혼해서 딸을 낳으면 난 조카와 조카딸이 다 있게 되네요.”“입덧으로 고생할 때는 딱 하나만 낳겠다고 다짐했는데, 다 낳고 나서 귀여운 아기를 보니 먹는 것만 기억
결혼 휴가가 끝나려면 아직 며칠 더 남았다.“언니, 무슨 일 있어?”“오늘 나와 동명 씨는 다 바빠서 우빈이 데리러 갈 시간이 없어. 너와 제부 씨가 어린이집에 가서 우빈이를 좀 데리고 나와서 주형인한테 데려다줄래? 주형인이 우빈이를 만나고 싶다고 해.”주형인은 앞으로 다시는 하예진 앞에 나지 않거니와 하예진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그는 말한 대로 했다.주형인이 애를 만나고 싶다고 할 때마다 하예진은 우빈이를 태워서 옛날에 그녀와 주형인이 함께 살던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가서 마중 나온 우빈이 할머니에게 맡긴 후 직접 돌아오곤 했다. 우빈이가 집에 돌아오려고 하면 주씨 집안 식구가 우빈이를 하루 레스토랑까지 데려다줬다.“알았어. 이따가 나와 태윤 씨가 우빈이 데리러 갈게. 우빈이가 그 집에 남아서 밥 먹어?” “우빈이한테 물어봐, 애가 거기에 남아서 밥 먹고 싶다고 하면 그러라고 해. 마침 내일이 토요일이니 거기에서 잠자고 오라고 해도 돼. 너와 제부 씨는 거기에서 기다릴 필요 없어.”“알았어, 언니는 걱정하지 말고 볼일 봐. 내가 우빈이 데리러 갈 테니.”하예정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하예정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하예진을 찾는 소리를 들었다. 하예정은 언니는 지금 엄청 바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예진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어?”성소현은 걱정돼서 물었다.“언니가 너무 바빠서 우빈이 데리러 갈 시간이 없다고 나와 태윤 씨더러 어린이집에 가서 우빈이 데려오라고 하네요. 주씨 식구가 우빈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애를 데리고 와서 주씨 저택까지 데려다주라고 해요. 내일이 토요일이니 애가 거기에 남아서 자고 싶으면 자도 된다고 해요.”성소현이 미심쩍은 어투로 물었다.“주씨 집안 식구들 정말 조용해졌어?”“네, 조용해요. 주형인이 말한 대로 하네요. 우빈이를 만나는 걸 빼고는 그 집 사람들은 더는 언니를 귀찮게 하지 않았어요. 그 집 사람들이 진작 이렇게 나오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정현숙이 얼마 전에 관성을 떠났어.”전태윤은 운전하면서 말했다.“하지만 그 사람이 데리고 온 경호원 중 한 사람이 바뀐 거 같아.”“한 사람 바뀌었다고요? 내 기억 속에 그 사람은 여러 명의 경호원을 달고 온 거 같은데요.”“맞아, 그 사람이 여러 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왔는데, 강성에 돌아갈 때는 경호원의 인수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중 한 사람은 낯선 얼굴이었어. 한 사람을 잘랐든지, 아니면 관성의 정보를 수집하려고 일부러 남겼을 수도 있어.”전태윤이 사람을 붙여서 정현숙을 감시하니 정현숙도 당연히 사람을 남겨서 그들을 감시할 것이었다.하예정은 남편의 옆얼굴을 지켜보았다.전태윤도 그녀를 흘끔 쳐다보고는 계속해서 앞을 보면서 운전했다. 아내를 태운 차를 운전할 시에 그는 한눈도 감히 팔지 못했다.“여보, 자기 눈썰미는 진짜 장난이 아니네요.”하예정이 계속해서 남편을 칭찬했다.“당신이 정현숙을 몇 번 봤다고, 그 여자가 달고 다니는 경호원의 얼굴까지 다 기억해요?”그녀는 정현숙의 얼굴과 달고 다니는 경호원이 몇 명인가만 기억했을 뿐, 그 경호원들의 얼굴이 어떻게 생긴 것까지는 정말 기억하지 못했다.“난 그냥 기억력이 뛰어날 뿐이야.”“나도 기억력이 좋아요.”전태윤이 웃으면서 말했다.“당신 임신했잖아. 다들 임신 한번 하면 뒤 3년은 머리가 둔해진다고 하지 않았어? 당신 지금 기억력이 무조건 나보다 못해.”“나는 하나도 둔하지 않거든요. 그럼 우리 앞으로 정현숙을 계속 감시해도 되나요? 그 사람이 진짜 경호원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관성에 남겨뒀다는 것은 이미 무슨 기미를 알아채고 우리가 무슨 단서라도 찾아낼까 봐 두려워하는 거 같은데요.”“우리 외할머니도 십중팔구 그 사람이 해쳤어요. 그 자리에 오르려고 친형제마저 깡그리 해쳤어요.”하예정은 자신과 언니가 십여 년 동안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는데 언니에 대한 감정이 엄마에 대한 감정과 같을 정도로 깊었기에 자신더러 언니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