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휴가가 끝나려면 아직 며칠 더 남았다.“언니, 무슨 일 있어?”“오늘 나와 동명 씨는 다 바빠서 우빈이 데리러 갈 시간이 없어. 너와 제부 씨가 어린이집에 가서 우빈이를 좀 데리고 나와서 주형인한테 데려다줄래? 주형인이 우빈이를 만나고 싶다고 해.”주형인은 앞으로 다시는 하예진 앞에 나지 않거니와 하예진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그는 말한 대로 했다.주형인이 애를 만나고 싶다고 할 때마다 하예진은 우빈이를 태워서 옛날에 그녀와 주형인이 함께 살던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가서 마중 나온 우빈이 할머니에게 맡긴 후 직접 돌아오곤 했다. 우빈이가 집에 돌아오려고 하면 주씨 집안 식구가 우빈이를 하루 레스토랑까지 데려다줬다.“알았어. 이따가 나와 태윤 씨가 우빈이 데리러 갈게. 우빈이가 그 집에 남아서 밥 먹어?” “우빈이한테 물어봐, 애가 거기에 남아서 밥 먹고 싶다고 하면 그러라고 해. 마침 내일이 토요일이니 거기에서 잠자고 오라고 해도 돼. 너와 제부 씨는 거기에서 기다릴 필요 없어.”“알았어, 언니는 걱정하지 말고 볼일 봐. 내가 우빈이 데리러 갈 테니.”하예정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하예정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하예진을 찾는 소리를 들었다. 하예정은 언니는 지금 엄청 바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예진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어?”성소현은 걱정돼서 물었다.“언니가 너무 바빠서 우빈이 데리러 갈 시간이 없다고 나와 태윤 씨더러 어린이집에 가서 우빈이 데려오라고 하네요. 주씨 식구가 우빈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애를 데리고 와서 주씨 저택까지 데려다주라고 해요. 내일이 토요일이니 애가 거기에 남아서 자고 싶으면 자도 된다고 해요.”성소현이 미심쩍은 어투로 물었다.“주씨 집안 식구들 정말 조용해졌어?”“네, 조용해요. 주형인이 말한 대로 하네요. 우빈이를 만나는 걸 빼고는 그 집 사람들은 더는 언니를 귀찮게 하지 않았어요. 그 집 사람들이 진작 이렇게 나오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정현숙이 얼마 전에 관성을 떠났어.”전태윤은 운전하면서 말했다.“하지만 그 사람이 데리고 온 경호원 중 한 사람이 바뀐 거 같아.”“한 사람 바뀌었다고요? 내 기억 속에 그 사람은 여러 명의 경호원을 달고 온 거 같은데요.”“맞아, 그 사람이 여러 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왔는데, 강성에 돌아갈 때는 경호원의 인수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중 한 사람은 낯선 얼굴이었어. 한 사람을 잘랐든지, 아니면 관성의 정보를 수집하려고 일부러 남겼을 수도 있어.”전태윤이 사람을 붙여서 정현숙을 감시하니 정현숙도 당연히 사람을 남겨서 그들을 감시할 것이었다.하예정은 남편의 옆얼굴을 지켜보았다.전태윤도 그녀를 흘끔 쳐다보고는 계속해서 앞을 보면서 운전했다. 아내를 태운 차를 운전할 시에 그는 한눈도 감히 팔지 못했다.“여보, 자기 눈썰미는 진짜 장난이 아니네요.”하예정이 계속해서 남편을 칭찬했다.“당신이 정현숙을 몇 번 봤다고, 그 여자가 달고 다니는 경호원의 얼굴까지 다 기억해요?”그녀는 정현숙의 얼굴과 달고 다니는 경호원이 몇 명인가만 기억했을 뿐, 그 경호원들의 얼굴이 어떻게 생긴 것까지는 정말 기억하지 못했다.“난 그냥 기억력이 뛰어날 뿐이야.”“나도 기억력이 좋아요.”전태윤이 웃으면서 말했다.“당신 임신했잖아. 다들 임신 한번 하면 뒤 3년은 머리가 둔해진다고 하지 않았어? 당신 지금 기억력이 무조건 나보다 못해.”“나는 하나도 둔하지 않거든요. 그럼 우리 앞으로 정현숙을 계속 감시해도 되나요? 그 사람이 진짜 경호원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관성에 남겨뒀다는 것은 이미 무슨 기미를 알아채고 우리가 무슨 단서라도 찾아낼까 봐 두려워하는 거 같은데요.”“우리 외할머니도 십중팔구 그 사람이 해쳤어요. 그 자리에 오르려고 친형제마저 깡그리 해쳤어요.”하예정은 자신과 언니가 십여 년 동안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는데 언니에 대한 감정이 엄마에 대한 감정과 같을 정도로 깊었기에 자신더러 언니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하라고 하면 절대 못 할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강성.비행기가 땅에 무사히 착륙했다.이은화는 휴대전화를 꺼내 비행 모드를 껐다.곧이어 이은화의 휴대전화에 낯선 메시지가 도착했다.[당신 남편이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침대에서는 꽤 대단하더군요. 당신은 군호 씨를 더 만족시킬 수 있기나 하겠어요?]그 메시지를 본 이은화의 얼굴은 새까맣게 변했다.이은화는 그 나이에 진작 잠자리에 관한 일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이은화는 바빠서 매일 돌아오면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그런 일에 대해 논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이은화는 정군호와 스킨십하지 않은 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정군호가 나이가 들었지만, 마음이 늙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용돈이 적지만, 집에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방 아주머니와 한마디만 하면 이내 먹을 수 있었다.하여 보양식을 그렇게 많이 먹은 덕에 신체가 매우 좋았다.젊었을 적 정군호가 바람을 피우려고 했을 때 그는 이은화에게 호되게 혼난 뒤로 겉으로만 얌전한 척했다. 적어도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정군호의 몸은 정말 바람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은 이은화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이은화는그녀가 관성에 간 지 보름밖에 안 됐는데 정군호의 정신과 몸이 모두 바람을 피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은화는 그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집사가 전화를 받았다.이은화가 물었다.“군호 씨는 집에 안 계셔?”“안 계세요. 왜 어르신께 직접 전화해보지 않으셨어요?”이은화가 관성에 가서 전태윤 부부의 결혼식에 참가한 뒤로 보름이란 시간이 지났다.정군호는 이은화가 떠난 지 세 번째 날부터 저녁마다 늦게 들어왔고 매일 외출하기 전에 더욱 젊고 멋지게 꾸미곤 했다. 그리고 돌아올 때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집사는 이런 것들을 유심히 보더니 정군호에게 말을 빙빙 돌리며 이은화에게 절대로 미안한 일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정군호는 친구들과 모임만 할
이은화가 대답했다.“알았어. 내가 집에 없는 동안 윤미 뜻대로 움직여. 누가 감히 윤미에게 무례하게 굴면 나에게 무례하게 구는 거나 다름없는 거라고 전해.”집사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급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럼 먼저 끊을게.”이은화는 전화를 끊은 후 공항에서 나왔다.그녀는 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사람들에게 공항에 마중 나오라고 알리지도 않았다.이은화가 일찍 돌아온 이유는 바로 자신이 집에 없는 동안 이윤미의 일 처리 능력이 어떤지 보기 위해서였다.하여 사람들에게 공항으로 그녀를 데리러 오라고 미리 알리지 않았다.비행기에서 내린 이은화 일행은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불러 이씨 그룹 주소를 알려주었다.이은화는 집에 가지 않고 회사로 가려고 했다.택시에 앉은 지 십여 분 정도 지나서야 이은화는 정군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정군호는 한참 지난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뭐 하고 있었어? 왜 이렇게 늦게 받아?”이은화가 남편에게 물었다.정군호는 헐떡거리며 대답했다.“집 2층에서 휴대전화를 충전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전화 소리를 듣고 빨리 뛰어 올라왔거든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계단 좀 뛰어올랐다고 숨이 차네요.”이은화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당신이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린 이미 일흔이 넘은 사람이야.”정군호가 물었다.“여보, 언제 와요? 결혼식에 가는 것 뿐인데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예요? 거의 한 달 돼 가는데... 저를 데려가지도 않고.”“난 결혼식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해야 하거든. 따라와서 뭐 하게? 아직도 볼 일이 좀 있어서 며칠 후에 집으로 돌아갈 거야. 집안일은 당신이 좀 신경 써줘. 윤미가 아직 어려서 다들 윤미를 잘 따르지 않으니까.”“알았어요. 윤미가... 여보, 내가 우리 딸한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윤미는 정말 우리와 한마음이 아닌 것 같아. 어쨌든 우리와 감정이 없으니까 그런... 휴, 그만 말해요. 더 말하면 사람들이 또 우리 부부가 윤정이를 더 예뻐한다고 수
정군호는 말하다가 결국 불만을 토로했다.이은화는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돌아가면 그때 다시 말하자.”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이은화는 즉시 자신의 비서에게 정군호가 지금 어디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이은화는 먼저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집사는 정군호가 분명히 집에 없다고 말했다.정군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핸드폰에 배터리가 없으면 1층에 충전기가 있기 때문에 정군호가 굳이 2층에서 핸드폰을 충전할 필요가 없다.요즘 사람들은 단 1분도 휴대전화를 떠날 수 없는데...비서가 곧 이은화에게 답장했다.[지금 하루 호텔에 있어요.]하루 호텔은 전씨 그룹이 강성에서 운영하는 호텔로 맞은편에 고성 호텔과 자주 경쟁을 치르는 호텔이었고 강성의 최고급 호텔이었다.이은화는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녀의 안색도 따라서 점점 어두워졌다.하루 호텔은 소비가 높기 때문에 정군호의 능력으로 그런 고급 호텔에서 소비할 능력이 없을 것이다.지금 정군호가 하루 호텔에 묵고 있는 돈은 아마는 이윤정이 준 돈이 아니면 분명 정일범 형제가 준 돈일 것이다.이게 무슨 일인가!이은화가 집에 없을 때 전부 그녀에게 미안한 짓들만 벌이고 있었다!이은화는 차갑게 택시기사에게 말했다.“기사님, 하루 호텔로 가주세요. 요금을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택시기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사실 하루 호텔로 가는 것이 이씨 그룹으로 가는 거리보다 더 가깝거든요.”이은화는 아무 말도 하지 잇지 않았다.그와 동시에 전호영은 또 고씨 그룹으로 달려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전호영은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고현은 고개를 들어 전호영은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일을 했다.“고현 씨, 바쁘세요? 일단 일은 내려놓고 저랑 연극 보러 가요. 엄청 재미있는 연극이요.”고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시간이 없어요.”그러나 고현은 멈칫하더니 되물었다.“무슨 볼거
“아직도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많이 남았어요? 저를 믿는다면 제가 도와드릴까요?”전호영이 물었다.고현이 대답했다.“필요 없어요. 이 대표님께서 강성으로 돌아오셨다고요? 강성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떠나면 40여 분 걸릴 것 같은데.”전호영은 손을 들어 시간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30분만 더 일하고 호텔로 가면 시간이 딱 맞겠네요.”고현 일행이 호텔에 도착할 때쯤이면 마침 식사 시간이라 이은화는 그들이 우연히 그 현장을 목격한 것으로 생각할 뿐 전호영이 계획했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갈래요?”전호영이 고현에게 다시 물었다.고현은 전호영을 노려보더니 말을 건넸다.“호영 씨가 다 말해줬는데 제가 안 보러 갈 수 있겠어요? 그렇게 재미있는 볼거리는 당연히 봐야죠. 제가 원래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데, 호영 씨한테서 나쁜 짓만 배우네요.”고현은 다시 전호영을 노려보더니 투덜댔다.결국 고현은 전호영과 함께 구경하러 가기로 약속했다.전호영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왜 그렇게 진지하게 살아요? 인생은 겨우 수십 년밖에 없는데 가볍고 즐겁게 생활해야죠. 정남 씨처럼 이런 볼거리가 있으면 가장 먼저 나서서 보잖아요. 정남 씨는 마음가짐이 좋아서 분명 100세까지 살 수 있을 거예요.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정남 씨는 항상 태연한 자세로 임할 텐데 현이 씨는 너무 엄숙해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이 씨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대범하게 인정하세요. 그래야 앞으로의 삶이 더 편안해질걸요.”고현은 전호영을 꾸지람했다.“제가 몇 마디 좀 했다고 또 저와 인생의 도리를 가르치는 거예요? 빨리 저리로 가서 앉아요. 제 일을 방해하지 마시고.”전호영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알겠어요. 제가 저쪽에 가서 앉을 테니 일단 먼저 일 보세요.”전호영은 몸을 돌려 사무실 입구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 않고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혹은 저처럼 현이 씨가 대답도 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온
“호영 씨, 또 저를 몰래 찍으면 휴대전화를 부숴버릴 거예요.”문득 고현이 경고하는 말이 들려왔다.전호영 고현을 찍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현이 씨, 왜 열심히 일하지 않으세요? 제가 몰래 사진을 찍는 것조차 알고 있다니. 혹시 현이 씨도 제가 신경 쓰이고 저를 훔쳐보는 거 아니에요?”고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호영 씨가 저보다 더 잘생겼어요? 제가 왜 저보다 못생긴 호영 씨를 훔쳐보겠어요?”전호영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전호영은 남자 중에서 잘생긴 편이지만, 남자 분장한 고현에 비하면 그녀만큼 잘생기지는 않았다.“만약 현이 씨가 여성 옷으로 갈아입고 긴 머리를 기르면 그야말로 경국지색일걸요. 아마 너무 아름다워서 제가 눈길조차 떼지 못할 거예요.”고현이 말을 잇지 않았다.전호영은 그녀가 말을 꺼내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더니 몇 분 동안 앉아 있다가 바로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에 앉으며 물었다.“뭐 드실래요? 커피 마실래요?”“지금 커피를 마시면 밤에 잠이 안 와요.”고현은 일반적으로 아침에 회사에 도착하면 커피 한 잔을 마시곤 했다. 그러나 오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점심에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오후 업무를 처리했다.“제 사무실에는 간식이 없어요.”고현이 한마디 덧붙였다.그녀는 어렸을 때 간식을 무척 좋아했지만, 어른이 되어 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 주변의 성공한 남자들이 간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뒤로 더 남자답게 살기 위해 간식 먹는 습관을 끊어버렸다.“제가 사드린 간식은요?”“고빈에게 줬어요.”전호영이 말을 이었다.“고빈 씨는 남자인데도 간식을 좋아해요? 왜 고현 씨에게 남겨주지도 않고...”고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빈은 아마 그 간식들을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주거나 그의 아름다운 여성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가능성이 컸다.고빈은 모든 여성 지인들에게 무척 잘해주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그녀들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녀들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며 딴마음
“그러면 고현 씨도 저에게 쉽게 돌을 던질 수 있잖아요. 제 이마에 피가 나도 저는 상관없어요. 제가 만약 입원하게 되면 현이 씨가 저를 책임지셔야 할 테니까요.”고현이 말을 이었다.“양아치 짓 좀 그만 해요!”전호영은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제가 현이 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안 보여요?”“네네네... 보이네요!”전호영은 웃기만 했다.“제 맞은편에 앉지 말고 멀리 앉으세요. 저는 일해야 해요.”고현은 자기 맞은편에 앉은 전호영을 내쫓았지만, 그 남자는 수다쟁이여서 쉽게 화제를 찾아 그녀를 끌어들였다. 설령 전호영이 조용히 앉아 있다고 해도 여전히 고현에게 방해될 것이다.전호영은 항상 희귀한 보물을 보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 때문이다..“소리 안 낼게요. 현이 씨 업무를 방해 안 할게요.”“호영 씨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것도 저를 방해하는 거나 다름없거든요.”전호영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물었다.“사실 현이 씨도 저를 사랑하죠? 얼굴이 두껍지 못해서 승인하기 싫은 거죠? 보세요. 제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데 현이 씨 기분과 업무에 영향 줄 수 있잖아요. 현이 씨는 분명 제가 매우 신경이 쓰이고 저의 행동을 항상 주시하고 있는걸요.”고현은 그를 노려보면서 또 경고했다.“멀리 가지 않으면 제가 전화를 걸어 경비원에게 호영 씨를 내쫓으라고 할 거예요. 앞으로 절대로 고씨 그룹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할 거예요!”“너무 가혹한 거 아니에요? 멀리 꺼질게요. 얼른 업무나 처리해요. 저는 고빈 씨를 찾아 허풍 좀 떨어야겠어요. 20분 뒤에 바로 데리러 올게요.”전호영은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자리를 떠났다.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던 전호영은 다시 되돌아오더니 책상을 에돌아 고현에게 가까이 가더니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고현은 발로 걷어 차버리고 싶었지만, 전호영은 이미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가버렸다.고현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빛으로 전호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전호영이 대표 사무실을 떠나자 고현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해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