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진은 손은경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방금 노동명과 계약을 체결할 때 무언가 혜택을 받고 이리로 달려와 좋은 말만 해주는 게 아닌지 심히 의심이 들었다.손은경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은 듯 웃으며 답했다.“오빠가 좋은 말 해달라고 저를 이리로 부른 게 아니에요. 그저 오빠가 예진 씨한테 대시하면서 갖은 트러블에 부딪히니 저라도 몇 마디 도와주고 싶은 거예요.”“은경 씨, 저는 동명 씨를 친구로만 생각해요.”“아줌마가 못 받아들이는 것 때문이에요?”“사모님과는 전혀 상관없어요. 저는 정말 동명 씨를 친구로만 생각해요. 다른 마음은 일절 없어요.”윤미라도 원인 중 하나이긴 하지만 중요한 원인은 아니다.하예진은 진짜 노동명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오직 친구로만 생각할 뿐 다른 건 일절 없다.주형인과 이혼한 후 그녀는 단기간 내에 재혼 생각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손은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하긴, 호감이 없는데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죠. 결혼은 대충 생각할 게 아니잖아요.”특히 하예진 같은 경우는 감정에 크게 데인지라 요구가 더 까다롭다.“은경 씨랑 동명 씨가 꽤 잘 어울리던데요.”조건도 대등하고 윤미라도 손은경을 무척 좋아한다.하예진은 손은경이야말로 노동명에게 어울리는 상대라고 생각했다.이에 손은경이 웃으며 말했다.“저랑 오빠가 잘 어울려도 오빠가 저를 안 좋아하고 저 또한 자존심이 강하다 보니 오빠가 거절했을 때 저도 바로 포기했어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여자는 되기 싫거든요.”천천히 찾다 보면 언젠가 그녀만 바라봐주는 남자를 만날 테니까.하예진은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여전히 손은경이 마음에 든다.손은경은 성소현처럼 한때 누군가를 좋아도 했고 열심히 대시도 했지만 상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곧바로 단념했다.성소현도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본인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보니 굳이 다른 여자들과 함께 한 남자를 다투
관성 중학교성소현은 차를 세우더니 차 키를 들고 하예정의 서점으로 들어갔다. 하예정은 혼자서 가게를 보고 있었고 심심할 때 가끔 공예품을 만들기도 했다.성소현이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자전거를 만들고 있었다.“왜 또 이걸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했잖아. 왜 다 혼자 하려고 해?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태윤 씨가 너를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집에서 사모님 노릇을 이나 하라고 할걸. 그때 가서 불평하지 마.”성소현은 차 키를 카운터에 올려놓고 의자를 가지고 와 앉으며 말했다.그리고 하예정이 만든 자전거를 가져오더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예정아, 근데 너는 진짜 손재주가 좋아. 너무 잘 만들었네.”“전문적으로 배웠어요. 언니는 어떤 걸 좋아해요? 내가 시간 있을 때 만들어 줄게요.”“아니야. 괜찮아. 태윤 씨가 알면 또 싸늘하게 나를 째려볼 것 같아.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가게에서 살게. 매출도 올릴 겸.”성소현은 말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자전거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예정은 도구를 거두면서 성소현에게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주고 과일을 씻어서 내놓았다.“예정아, 상의할 게 있는데.”성소현은 과일을 먹으며 말했다.“뭔데요?”“우리가 투자한 채소 농장 말이야. 이젠 수입도 많이 올랐어. 그래서 회사를 설립하고 사무실로 마련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재배업 쪽에 경험이 많은 직원들을 모집하고 농장 관리를 맡겨야겠어. 매니저도 몇 명 구해서 마케팅 업무를 보게 하고 큰 사업 얘기는 우리끼리 하자.”하예정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좋은 생각인데요. 본가 쪽에 사무실을 하나 마련해야 돼요. 농장이 모두 그쪽에 있어 사무실과 거리가 멀면 관리하기 힘들어져요.”“그래. 직원 모집은 너에게 맡길게. 나는 이쪽 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어. 매니저 채용은 이미 헤드헌터 회사에 맡겼어.”하예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지금 농장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면서 성실히 일하고 있어요. 일단 지켜봅시다. 그중
그러자 하예정이 대답했다.“하지만 땅을 사서 집을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먼저 사무실을 임대할까요? 그러고 나서 땅을 사고 집을 지으면 되죠.”“그래. 이 일을 효진 씨에게도 알려야 해. 네가 문자를 보낼래? 아니면 내가 보낼까?”성소현은 하예정에게 물었다. 그리고 하예정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네가 보내. 너랑 효진 씨의 친분이 10년이 넘는데 네가 효진 씨 신혼여행에 ‘민폐’를 끼쳐도 너를 뭐라고 할 것 같지 않아.”그러자 하예정도 웃으면서 대답했다.“네. 저녁에 전화해서 얘기할게요.”“효진 씨가 매일 올리는 인스타를 보면 정말 부럽고 질투나.”“저도 너무 부러워요. 결혼식을 올리고 저랑 태윤 씨도 신혼여행 갈 거예요.”“이젠 부럽다는 소리도 지겹네. 너랑 효진 씨 때문에 내가 못 살아.”성소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언니도 깨가 쏟아지던데 뭘. 준하 도련님이 매일 꽃도 사다 주고 연애편지도 주던데, 우리 집 그분은 나한테 쪽지도 안 줬어요. 연애편지는 상상도 못 하죠.”예준하를 언급 하자 성소현은 방긋 웃더니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우리 집에서 준하는 안 된대. 예정아, 내가 네 앞에서는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준하가 너무 좋아. 우리 둘도 잘 지내고 있고. 준하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제일 행복해. 그런데 우리 엄마는 준하를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더라고. 준하가 착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떠났을 거야.”그녀는 한숨을 쉬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가족들의 그런 태도를 보면 나도 많이 혼란스러워.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야 할지 고민이야.”하예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모가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딱 한 개인 것 같아요. 준하 도련님의 집이 너무 멀어요. 사실 이모는 준하 도련님 그리고 예씨 가문에 대한 인상이 좋거든요.”“나도 알아. 사실 많이 멀지. 하지만 준하는 앞으로 관성에서 오랫동안 일할 거고 나도 준하와 함께 관성에 있
성소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준하가 오늘 엄청 바쁘대. 꽃과 편지는 평소대로 받았는데 문자는 겨우 몇 통밖에 못 했어. 준하 큰형수가 곧 출산이라 준하가 가능한 한 빨리 업무를 보고 A시에 다녀오겠다고 했어.”“모연정 씨가 쌍둥이를 임신했잖아요. 보통 쌍둥이들이 예정 출산일보다 빨리 태어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6월에 낳는다고 했는데 지금 5월 중순인 걸 보면 곧 낳을 것 같아요.”아이 이야기를 꺼내자 성소현은 하예정에게 2세 계획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가에 맴돌던 말을 그대로 삼켰다.하예정는 일이 너무 바쁜 탓에 모든 정력을 일에 투자하고 있다. 그래서 2세 계획을 잠시 고민하지 않았다.만약 성소현이 아이 이야기를 꺼내면 하예정은 갑자기 슬퍼질 것이다.“저는 이따가 태윤 씨를 데리러 가야 해서 오늘은 같이 못 먹을 것 같네요.”성소현도 이해하듯 고개를 끄덕이었다.“그래. 아니면 나도 준하를 데리러 갈까? 예정아, 준하가 퇴근하고 내가 와있는 걸 보면 어떤 표정일까?”“너무 좋아하겠죠.”두 사람은 아직 정식으로 연인 관계를 확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주동적으로 예준하를 찾아간다면 이 또한 애정을 표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예준하가 무조건 기뻐할 것이다.얼마 후, 성소현은 하예정의 서점을 떠났다.점심시간이 너무 짧은 탓에 하예정은 전태윤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가게 문을 닫고 꽃필무렵으로 갔다.전이진와 여운초는 아직도 밀당 중이다. 비록 전이진이 호감을 드러내면서 부지런히 대시를 했지만 여운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답답한 전이진은 사석에서 전태윤과 요즘 너무 힘들다고 투덜댔다.그는 전태윤과 하예정이 혼인신고 덕에 쉽게 관계를 확정 지었다고 생각했다.전태윤은 그 말을 듣자 피식 웃었다. 사실 두 사람도 많은 일을 겪고 서로 맞춰가면서 결혼까지 골인했다.전태윤이 예전에 하예정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를 칠 때 전이진도 그 모습을 보았다.비록 전이진이 아직 여운초의 마음을 얻지 못했지만
여운초의 두 고모는 그녀가 잘되는 모습을 배 아파 지켜볼 수가 없었다.전태윤은 하예정에게 여운초가 이미 여씨 그룹을 장악했다고 알려줬다.여운초도 전씨 일가 앞에서 이 일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예정에게 솔직하게 말했다.“누구도 우리 남매의 것을 빼앗을 수 없어요.”그녀가 여씨 그룹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건 아니었다. 동생의 몫은 동생이 성인이 된 후에 넘겨주려고 했다.하지만 여운별의 몫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고마워요. 지금까지는 괜찮아요. 동호 오빠도 도와주고 있고.”그리고 전이진도 있었다. 여운초는 전이진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골칫거리가 더 많아졌을 거다. 그녀는 결국에 그의 신세를 지고야 만 셈이다. 전이진은 점점 더 자신감이 부풀어 올랐고 여운초를 가지고 노는듯싶었다. 주도권을 잃은 그녀는 이 관계에서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이진 도련님도 운초 씨를 도와줄 수 있잖아요.”여운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때, 전이진이 꽃다발을 안고 갑자기 등장했다. 하지만 그건 진짜 꽃이 아니라 5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씩 접어서 만든 꽃다발이었다.하예정은 전이진을 보고 여운초에게 말했다.“운초 씨, 저는 꽃을 가져다주러 가야 해요. 그럼, 이만.”“그래요.”여운초도 전이진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이를 모른척하고 담담하게 하예정을 배웅하려고 애써 노력했다.“형수님.”전이진이 하예정을 불렀다.“그래. 왔어? 태윤 씨는 아직도 회사에 있어?”“네. 아직도 회사에 있어요. 제가 먼저 퇴근한 거예요.”하예정은 웃으면서 여운초에게 더 이상 배웅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차를 몰고 떠났다.하예정이 떠난 후에야 전이진은 여운초에게 들고 있던 꽃을 주었다.“운초야, 네 생각이 나서 이 꽃을 샀어.”“우리 가게에 있는 게 꽃인데. 필요 없어.”그녀는 꽃을 돌려주려고 했다.
“운초야.”전이진은 그녀의 붉은 입술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비록 여운초는 그의 눈빛을 볼 수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전이진이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점점 허스키해졌다. 그녀를 또 한번 가지고 싶었다.이를 눈치챈 여운초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전이진이 준 꽃다발을 안고 뒷걸음질 치다가 실수로 화분을 걷어찼다. 그녀가 막 넘어지려고 할 때 전이진은 크게 힘센 손으로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고 그녀를 다시 끌어와 품에 안았다.공허했던 몸과 마음이 그녀로 인해 꽉 차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전이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정신을 차린 여운초는 몸부림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이진, 이거 놔.”가게에는 다른 직원들도 있었다. 직원 두 명과 경호원 두 명은 마침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전이진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나는 너를 구한 거지 해친 거 아니잖아.”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말했다. 그리고 볼에 뽀뽀했다. 그러자 그녀의 가벼운 떨림을 느낀 전이진은 피식 웃었다.‘엄청 예민하네.’그는 여운초가 이런 행동에 크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어떻게 그녀를 꾈지 알 것만 같았다.“전이진!”그녀는 매우 예민했다. 이렇게 뽀뽀를 받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고맙다고 인사해.”여운초는 싸우기 귀찮아서 타협하기로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이진아, 잡아 줘서 고마워.”전이진은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듣기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진이라는 두 글자가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에서 불리는 것이 너무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장소가 아쉽게도 그녀의 가게라 더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고작 한마디야?”여운초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 짜증 나.’“밥 사줘.”그는 또 밥을 사달라고 했다.여운초는 어이가 없어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래. 사줄게. 우리 가게에서 먹어. 내가 밥 해줄게.”“요리할 줄 알아?”“아니.”그녀는
전이진은 여운초를 카운터 앞으로 끌어당겨 앉혔다.“요리해 줄게.”그러자 그녀는 어리둥절해졌다.“정말?”그녀는 방금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전이진더러 그녀와 함께 있으면 생활에 많은 불편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자기에 대한 호감이 떨어질 줄 알았다.“내 요리 솜씨를 한번 맛봐.”전이진은 허리를 숙인 채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사람들이 그러더라고. 마음을 사로잡고 싶으면 그 사람의 입맛부터 사로잡아야 한다고. 내가 그 생각을 왜 이제야 했을까?”“...이진아,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 내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그럼.”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이 꽃다발을 들고 자랑해도 되고 뜯어도 되지만 돌려주지는 마. 아니면 화낼 거야. 내가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알잖아.”여운초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니 그녀는 대응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가게 안쪽에는 간이 주방이 하나 있었다. 주방이라고 하기에는 설비들이 아주 초라했다. 가스레인지랑 전기밥솥이 있었기에 간단한 요리 정도는 할 수 있었다.전이진은 한번 둘러보더니 식재료가 없는 것을 보고 말했다.“운초야, 장을 안 봤어?”“아니.”그녀는 배달시키려고 했다. 전이진은 쌀을 씻으면서 말했다.“그러면 내가 밥을 안치고 가서 장 좀 보고 올게. 뭐 먹고 싶어? 직원들과 같이 먹을 거야?”그 말을 들은 두 직원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아닙니다. 이진 도련님. 저희는 분식 먹으러 갈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그러자 그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직원들은 너무 눈치가 빨랐다. 그는 장사가 잘되면 여운초더러 직원들에게 월급을 올려주라고 말하고 싶었다.잠시 후, 전이진은 가게를 떠나 장을 보러 갔다. 장을 보고 돌아와 경호원 두 명에게 말했다.“먼저 가서 밥 먹어.”경호원들은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 두 명과 함께 근처 분식집으로 떠났다.그들이 밥을 먹으러 가고 전이진이 야채를 씻을 때 여운초가 해고한 사촌
여운초의 사촌오빠가 명령을 내리자 그의 일행들이 즉시 움직였다.그들은 선반 위에 놓인 화분을 넘어뜨리면서 가게로 쳐들어갔다.“뭐 하는 거예요?”여운초는 일어나서 엄한 말투로 물었다.그러자 최씨 도련님인 최성욱이 기세등등하게 다가와 말했다.“뭘 하냐고? 야, 이 맹인아. 네가 먼저 의리를 지키지 않았잖아. 자, 다들 뭐해? 얼른 가게를 쳐부숴! 우리 돈줄을 끊어 놓고 너는 앉아서 돈이나 세고 있어?”그는 전이준이 준 돈 꽃다발을 보더니 생각지도 않고 손을 뻗어 빼앗아 가져왔다.눈 깜짝할 사이에 누군가가 다시 꽃다발이 빼앗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여운초가 아니라 전이진이였다.최씨와 김씨 일가는 전씨 둘째 도련님이 여운초를 좋아해 부지런히 대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만약 전이진의 신분을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두 가문에서 손을 잡아 여운초를 제대로 혼냈을 것이다. 심지어 여씨 저택에서 살 수도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최성욱은 전이진이 이곳에 있을 줄 몰랐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잠시 여기에 주차한 줄 알았다.“전, 전이진 도련님?”그는 말을 약간 더듬었다. 전이진은 그의 양복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마침 채소를 썰고 있었기에 그는 식칼을 들고 나왔다. 그는 한 손으로 식칼을 쥐고 한 손으로 그 꽃다발을 빼앗았다. 그리고 어둡고 사악한 눈빛으로 최성욱을 노려보았다.“뭐 하는 거야?”전이진은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넘어진 선반을 보자 그는 더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가게를 부수러왔어?”“...전, 전이진 도련님. 우리는... 우리는 가게를 부수러 온 것이 아니라 방금 실수로 넘어뜨린 것뿐이에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분위기를 감지한 최성욱은 겁에 질렸고 방금 기고만장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왜 하필 여기에 있는 거야?’비록 사람 인수로는 더 많았지만 그들은 전이진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내가 귀머거리
“엄마.”고현은 진미리의 전화를 받았다.“현아, 퇴근했어?”“네, 막 퇴근하려고 그래요. 왜 그러세요?”“드레스 말고도 평소에 입을 옷도 몇 벌 더 사줄까?”고현은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요.”고현은 단지 내일 저녁 연회에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여 사람들에게 그녀가 사실 여자라는 것을 알려주어 전호영이 동성애자가 아닌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이 더는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다들 전호영이 고현을 삐뚤어지게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색안경을 끼고 전호영을 바라보았으나 고현은 정상적인 남자라고 여겼다.진미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필요 없어? 여자 신분을 회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일 저녁에만 드레스 입고 계속 남자 옷을 입고 다니려고?”“네. 원래대로 다니려고요.”고현은 이제 그녀의 가짜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약간 태평공주기 때문에 가슴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양복을 입어도 남자처럼 보였다.진미리는 계속해서 설득했다.“신분을 드러내기로 했는데 왜 또 남자 행세를 하려고 해? 얼마나 힘들어.”“엄마, 그건 제 습관이에요. 20년 동안의 습관을 단번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엄마, 저의 요구대로 사주세요. 앞으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시려면 엄마 아드님 걱정 좀 하세요.”“빈이 그 자식은 걱정해도 소용없어. 그럼 엄마는 네 요구대로 드레스를 사줄게. 그리고 평소 입을 옷도 몇 벌 사 갈게. 옷장에 넣어두었다가 입고 싶을 때 꺼내서 입어.”“알겠어요.”“그래. 넌 퇴근해. 난 네 아빠랑 밥 좀 먹어야겠어. 네 아빠가 오랜만에 쇼핑하니 너무 힘들대. 먼저 밥 먹고 나서 다시 옷 보러 돌아다닐게.”진미리는 전화를 끊었다.고지호가 곁에 물었다.“현이가 싫대?”고진호 부부는 고현의 도도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옷들을 많이 봤다.“현이가 싫다고 해도 우리가 집으로 사가서 현이 옷장에 넣어두
전호영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니에요. 제가 고현 씨에게 꽃다발을 반년 넘게 보냈지만, 당신은 돈을 낭비한다면서 표정 한 번 변하지 않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니 놀라서 그러죠. 고현 씨가 제 꽃다발을 좋아한다고 하니 저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고현은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책상을 에돌아 꽃다발을 꽃병에 꽂았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보면서 말했다.“너무 예쁘네요. 이 꽃병에 마침 꽉 찼네요.”“그럼요. 저의 마음이니까요.”고현은 다시 돌아서서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출근하기 전에도 책상 위가 깨끗해야 했고 퇴근할 때도 책상 위가 정연해야 했다.“가요. 밥 먹으러 가요. 예진 언니랑 노 대표님께서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돼요.”전호영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제가 왔을 때 동명 형에게 전화했는데 예진 누나랑 지금 돌아오는 길이래요. 조금 먼 거리에 있어서 저희보다 조금 늦게 호텔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길이 막히기 쉽거든요.”두 사람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고현은 남 비서에게 지시했다.“박 대표님께 미팅이 한 시간 늦어진다고 전해주세요.”“알겠습니다.”비서는 고현이 박 대표와의 미팅을 취소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박 대표와 미리 말을 해 놓았다.전호영은 고현에게 물었다.“저녁에도 또 일 보려고요?”고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전호영은 곧 그녀의 눈빛의 뜻을 알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저도 사실 매우 바쁘거든요.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놀부가 아니라고요.”전호영에게는 미래의 아내에게 구애하는 일도 큰일이었다.그는 매일 고현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정말 빈둥빈둥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호영 씨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한가한 사람이에요. 전씨 할머니도 호영 씨보다 더 바쁘실걸요.”전호영은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그건 그래요. 저는 우리 할머니에 비하면 덜 바쁘죠. 우리 어
저녁 무렵, 전호영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마이바흐를 몰고 제때 고씨 그룹에 들어섰다.고씨 그룹 건물 입구에서 차를 멈추었다.그는 꽃다발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양복 차림의 전호영은 언제나 그랬듯 늘 멋졌다.“전 대표님.”그는 꽃다발을 안고 걸어 들어갔고 모두 그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전호영이 지나가자 그 직원들은 웃음을 거두어들였다.전호영은 고씨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그의 신분이 높지 않았다면 그 직원들은 가짜 웃음조차 그에게 주기 싫었을 것이다.‘휴, 현이 씨가 여전히 여성 신분을 폭로하기 싫은 거로 보면 아무래도 내 노력이 너무 부족했나 싶다...’전호영은 계속 동성애자라는 누명을 쓰며 강성의 젊은 여성들의 증오와 미움을 견뎌야 했다.그러나 전호영은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그는 고현을 따르기로 한 그날부터 단단히 마음 먹었다.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는 아내를 쫓아다닐 거라고 다짐했다.이렇게 하면 사실 좋은 점도 있다. 바로 고현이 원래 여자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진정한 연적이 없다는 점이다.그리고 여자 연적들에 대해서도 두려울 게 뭐가 있는가!고현의 여자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그 여자들의 마음은 아마 단번에 무너질 것이다.전호영은 그렇게 기분 좋게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전호영은 남 비서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살금살금 들어갔다.“나가세요! 노크 다시 하고 들어와요!”고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전호영은 멈칫했다.고현의 청력이 정말 대단했다.“현이 씨...”고현은 고개를 들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전호영은 즉시 항복했다.“네네네, 나가겠나이다. 노크하고 다시 들어오겠나이다.”서프라이즈를 해주고 싶었지만, 고현은 문 여는 소리를 듣더니 다시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다.전호영은 어쩔 수 없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남 비서는 그가 들어가자마자 다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
“그래, 일 봐. 엄마가 지금 네 아빠 불러서 함께 드레스랑 하이힐을 사러 갈게.”진미리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떼자마자 진미리가 소리쳤다.“여보! 여보!”고진호가 밖에서 대답했다.“왜 그래?”고진호가 곧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무슨 일이에요?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허둥지둥 달려왔는데.”“가요. 당장 옷 갈아입고 나가서 치마 좀 사요. 제가 직접 우리 딸을 위해 드레스를 골라줘야겠어요. 드디어 예쁜 치마를 사서 우리 딸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게 됐어요.”고진호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현이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너무 좋은 일이네요. 그럼, 사람 시켜 패션 디자인 사진을 가져오게 해요. 문 나설 필요 없이 사진만 고르면 되잖아요. 우리 현이가 입을 건데 당연히 가장 좋은 옷을 주문해서 제작해야죠.”“그러기엔 너무 늦었어요. 내일 저녁에 입을 드레스라서 시간이 안 돼요. 저한테도 드레스가 많지만, 중년 드레스라서 젊은이가 입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 백화점에 가서 먼저 현물을 사고 나중에 천천히 주문 제작해요.”고진호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우리 현이가 치마를 입고 싶어 하다니... 호영이에게 미리 웨딩드레스를 맞추라고 알려줘야 겠어요. 그럼 곧 결혼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도 큰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겠네요.”그리고 나서 고진호 부부는 집중적으로 매일 시시덕거리고 껄렁껄렁한 고빈을 혼내줄 수 있을 것이다.서른이 다 되어가는 고빈 주위에는 예쁜 미인들이 많지만 여자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장녀 고현이 있기 때문에 진미리 부부는 잠시 고현의 인생 대사에 몰두하고 있었다.고현의 일이 곧 결실을 보게 되면 이번에는 고빈의 차례로 될 것이다.두 아이는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시각에 태어났다.“내일 저녁 현이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일은 당분간 호영에게 알리지 마세요. 제 생각에는 현이도 갑자기 치마를 입고 여성 신분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것을 호영이가 모르는 것 같더라고요.”진미리는
“엄마, 사실 나도 좀 망설여져요.”고현의 말을 들은 진미리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망설일 필요 없어. 너 원래 여자이고 원래 치마 입어도 되는 신분이야. 네가 20년 이상 남자 옷을 입었으니 진작 여자 옷을 입었어야 했어. 호영이도 네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함께 참석하는 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어. 그때 가서 다들 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될 거고 너희 둘이 게이라고 수군대지도 않을 테고. 사실 사람들이 나한테 네가 그토록 훌륭한데 호영 때문에 삐뚤어진다는 말을 했거든. 네가 정상인데 호영 때문에 게이로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사실을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데 넌 여자 신분을 되찾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늘 참고 있었지. 그리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어.”진미리 부부도 사실 큰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었다.다른 사람의 말들은 고진호 부부가 무시하고 멀리하면 그뿐이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와서 설득할 때면 그들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진미리는 결국 고현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딸이 행복하면 그뿐이라면서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그 친척들은 몇 년 지나면 고현이 후회할 것이라고 화를 내면서 진미리가 고현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빈도 따라서 게이로 될 것이고 따라서 손주를 안고 싶어 해도 기회가 없을 거라는 심한 말을 내뱉기도 했다.이는 진미리를 화나게 했지만 그렇다고 또 어쩔 수도 없었다.“엄마가 좀 이따가 드레스 몇 벌 골라줄게. 네 취향대로 골라봐. 액세서리는 새것으로 살래? 엄마가 몇 벌 골라줄까? 하이힐도 몇 켤게 사줄게. 다 신어 봐.”고현이 대답했다.“엄마가 결정해 주시면 돼요. 제가 내일 오후에 쉬니 집으로 돌아가서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어 볼게요. 하이힐을 신어 본 경험이 없으니 걷는 연습도 해야겠어요. 아니면 추태를 보일지도 모르니까요.”진미리가 웃으며 대답했다.“하긴, 걷는 연습을 좀 해야겠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하이힐을 신고 몇 걸음도
전호영은 눈치채지 못했다. 고현도 일부러 그에게 명백하게 알려주지 않았다.내일 저녁에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강성 전체 사람들도 분명 충격받을 것이다.고현은 이미 전호영에 대한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변이 없다면 2년 안에 전호영에게 시집갈 것이다.그녀는 전호영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는 그가 동성애라자라는 누명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전호영은 게이가 아니라 정상적인 남자였다.고현이 모든 사람을 속인 것이다.고현은 전호영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여자로 되고 싶어 했다.그 또한 기뻐할 것이다.고현의 형상이 너무 남자다웠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리 여성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전호영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여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고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전호영도 그녀를 기쁘게 하려고 여자로 분장한 적 있다.당시 고씨 그룹 직원들은 여자 분장을 한 전호영이 매우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의 자매인 줄 알았지만 전씨 가문에는 딸이 없고 전호영에게도 자매가 없었다는 것을 반응한 사람들은 그제야 전호영이 분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날 그 사실은 고씨 그룹에서 아주 큰 가십거리로 소문이 자자했다.전호영과 통화를 마친 고현은 진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진미리가 전화를 받았지만 고현은 주저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현아, 왜 그래?”고현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진미리는 놀라워하며 고현에게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현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했다.“엄마, 시간 있어요? ”“있지. 난 언제나 시간 있지. 왜? 내가 뭐 도울 거라도 있어? 말해봐. 내가 다 해줄게.”고현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면 분명 큰일일 것이다.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낸 진미리는 관심 있게 물었다.“생리 왔어? 배 아파?”고현은 때때로 생리통을 앓곤 한다.진미리는 한동안 몰래 고현에게 한약을 지어주면서 그녀를 돌보았다.“아니요. 엄마. 저 내일 저녁 연회
“호영 씨.”고현이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휴대폰 너머에 있던 전호영도 덩달아 신이 나서 웃었다.“현이 씨, 뭐 좋은 일이 있나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까지 웃음기가 묻어나네요. 현이 씨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고현이 전호영에게 감정이 있다고는 하나 성격이 워낙 무뚝뚝하다 보니 전호영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차가웠다.“제가 기분이 나빴으면 좋겠어요?”“그럴 리가요. 당연히 현이 씨가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좋죠. 그렇지만 현이 씨는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보니 하루 종일 웃지도 않잖아요. 시시덕거리는 고빈을 볼 때마다 테이프로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고씨 그룹을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일하지만, 고빈은 틈만 나면 여자들을 만나느라 바빴다.그렇다고 해서 고빈이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현이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서 그 입 틀어막지 않고 뭐 해요? 솔직히 말해서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그의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부럽기는 해요.”자신이 맏이기 때문에 동생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녀의 머릿속에 꽉 박혀있었다.줄곧 남장하고 있었지만, 여자로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만으로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나타난 후부터 고현은 점차 동생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물론 동생에게 말했던 것처럼 고씨 그룹이 언젠가는 동생의 손에 넘어갈 것을 생각하고 가끔 동생에게 일을 맡기곤 했었지만.평생을 이렇게 버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기대하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전호영이 딱 그런 존재였다.“나중 가면 현이 씨 동생이 현이 씨를 부러워할 것이니 동생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현이 씨가 회사 일을 조금씩 그에게 맡긴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저처럼 호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이윤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고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에게 말했다.“먼저 회사에 가 있어요. 요즘 가주가 시간 없다고 하니 제가 집안일 처리하러 집에 가야겠어요.”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이씨 가문에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녀의 비서 외에 회사 사람들은 다 모르고 있었다.이윤미만 회사에 나오고 가주와 그녀의 오빠들은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회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이 대표가 비록 능력이 부족한 이 부대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해도 어찌 됐든 자기 친딸이니 무슨 일을 저지른다 해도 이 대표가 뒷수습을 다 할 것으로 회사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이윤미가 이 대표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온갖 망발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헐뜯기에 바빴다.그렇지만 이윤미는 가만있지 않았다.중요한 직위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설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그녀는 직접 해고하여 이씨 그룹에서 쫓아냈다.그리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강등시키거나 급여를 깎았다.게다가 해고된 사람들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블랙리스트에 올린 탓에 그들은 복지와 소득 면에서 이씨 그룹에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작은 회사만 전전해야 했다.조금의 손해를 볼지언정 이윤미는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이씨 그룹에서 쫓겨난 직원들을 보며 다른 직원들은 공포감을 느꼈다.모두가 부를 추구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누가 대표직에 오르든지 간에 모두 이씨 가문의 출신일 것이니 승급을 못 할 바에는 이씨 가문의 암투에 직원들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어차피 대우는 변하지 않으니 오히려 정직하게 일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그렇게 한다면 해고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사에게 더 주목받을 수도 있었다.“알았어요.”택시비를 보상해 주겠다며 말한 뒤 이윤미는 비서를 택시에 앉혀 보내고 자신은 차를 몰고 집으로 돌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