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 저희 언니 많이 좋아졌어요. 회복도 꽤 잘 됐고요.”“정말 다행이야.”정씨 아저씨는 반찬을 집어 먹으며 밥을 한입 먹었다.“예정아, 아저씨가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네 의견을 말해 줄 수 있겠니? 아줌마한테 말했더니 혼나기만 했어.”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말씀하세요. 무슨 일인데요? 제가 들어보고 의견을 말씀드릴게요.”“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알잖아. 하지만 진정한 사부님 밑에서 배우지 못하고 혼자서 여기저기서 조금 배웠을 뿐이야. 그런 다음에 혼자서 책을 보며 공부했지.”정씨 아저씨는 식사를 멈추고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근데 지금은 내가 육교나 공원 같은 곳에 가서 관상을 봐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심심할 때 가서 돈을 벌면 집안 살림에 도움도 될 것 같아서. 비록 우리 잡화점으로도 돈을 벌긴 하지만.”“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어르신은 점점 더 늙어가고 우리 중년층의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어. 온 식구가 이 가게 수입에 기대 살기는 힘들어. 그래서 밖에서 좀 빨리 돈을 벌고 싶은데 집사람은 날 혼내기만 하니. 우리 집사람은 오늘 저녁, 아니구나 내일인가? 오늘이 수요일이니 목요일에 로또 번호를 공개하겠네. 나한테 내일 저녁 로또 번호를 알려달래. 전 재산을 털어서 로또를 사겠다면서. 많이 사야 상금이 더 높대. 5천 원이 당첨되면 5만 원을 받을 수 있다네.”정씨 아저씨는 불만을 말했다.“내가 로또 번호를 알았다면 이미 부자가 되었을 거야. 육교에 가서 관상이라도 봐 줄 생각을 하겠니? 집사람은 내가 게을러서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는 줄 알 거야.”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내일 저녁 로또 번호 아시면 저한테도 전화해서 알려 주세요. 저도 전 재산을 털어서 살게요.”“예정아, 아저씨 놀리지 마라. 난 내 실력으로 관상을 봐주고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싶을 뿐이야.”“정씨 아저씨, 꼭 공원에 가서 관상을 봐주는 걸로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은 그걸 사기라
하예정은 언니를 보러 병원으로 향했다.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은 아들과 함께 이미 저녁 식사를 마친 뒤였다.“이모.”우빈이는 하예정을 발견하고 기쁘게 달려와 하예정의 품에 안겼다.하예정은 우빈이를 안으며 언니가 도시락을 씻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했다.“언니, 내가 가서 씻어 올게.”“됐어. 나 지금 너무 심심해.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그렇지 않으면 이미 간병인에게 도시락을 씻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이렇게 일찍 문 닫은 거야?”하예정은 조카를 안고서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언니가 뜨거운 물로 도시락을 씻는 걸 바라보며 대답했다.“효진이가 오늘 밥을 산다고 해서. 우빈이가 밥 먹지 않았으면 내가 데려가서 밥 먹였을 텐데.”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나 지금 돼지가 되어가는 것 같아. 밥 먹고 바로 자니까. 아저씨가 가져다주는 반찬들이 너무 맛있어서 매일 이렇게 잘 먹어. 퇴원할 때가 되면 몸무게가 또 70킬로를 넘길 것 같아.”그녀는 쉽게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조금만 많이 먹어도 허리가 바로 통통해졌다.“괜찮아, 언니 지금 너무 말랐어.”어차피 이제 저승 문 앞에서 유턴까지 했다.“조금 있다가 네가 우빈이 좀 데려가. 하루 종일 나하고만 있어서 우빈이도 답답할 거야. 계속 내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만 보고 싶어 해. 눈 나빠질까 봐 걱정돼서 안 보여줬지만.”하예진은 도시락을 씻으며 말했다.“예정아, 내일 너 올 때 우빈이 로고 좀 가져다줄래? 우빈이 유치원 끝나면 여기서 로고 하면서 놀게.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 보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한글 공부하는 책도 가져다줘.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이럴 때 우빈이 한글 좀 가르쳐 줘야지. 9월에 유치원 중급반으로 올라가야 배운다고 하네. 지금은 초급반은 그저 애를 봐주는 거하고 같아.”지금 유치원 등록금도 싸지 않았다. 한 학기에 수백만 원이 들었다. 더 비싼 곳은 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중급반부터 아직도 3년을 더 유치원을 다녀야 초등학교에 입학
사람들은 아기를 안고 출근하는 전태윤의 모습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하예정과 이야기를 나누던 몇몇 임원들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전 대표님께서 오셨으니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괜히 커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임원진들이 간 뒤 웃으며 함께 있는 아이와 남자에게 다가갔다.“태윤 씨, 애 잘 잡고 있어요.”아이를 높이 들어 올리거나 허공에서 빙빙 돌릴 때 제대로 안지 않아 떨어뜨리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전태윤은 우빈이를 높이 들고 빙글빙글 돌리는 것을 멈춘 다음 아이를 내려놓으며 웃었다.“걱정 마, 내가 우빈이 떨어지지 않게 꼭 안고 있을 테니까. 우빈아, 이모부 좋아?”우빈이 대답했다.“좋아요, 이모부 너무 좋아요.”그들 사이에 꼽사리 낀 꼬맹이라고 부르는 것만 그만두면 더 좋을 것 같았다.우빈은 말하며 두 팔로 전태윤의 목을 감싸고, 전태윤의 얼굴에 뽀뽀하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어깨에 머리를 파묻었다.전태윤은 꼬마 녀석의 입맞춤에 빙그레 웃으며 하예정에게 말했다.“동명이가 왜 우빈이를 유난히 좋아하는지 알겠어. 애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하예정이 웃으며 맞장구쳤다.“당연하죠, 누가 키웠는데. 내가 키운 아기니까 당연히 귀엽지.”전태윤은 아내를 바라보았다.“왜 그렇게 봐요? 우빈이 내가 키운 거 맞잖아요.”“그래, 맞아. 그냥 나랑 만나고 나서 당신이 얼마나 능글맞아졌는지 보는 거야.”“당신이나 능글맞다는 거 인정해요.”하예정이 전태윤의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은 함께 걸어 나갔다.전태윤은 웃으며 말했다.“인정해, 당신 앞에서 난 무척 뻔뻔하게 행동하지. 할머니는 그래서 나한테 자꾸 뭐라고 하시잖아, 가끔은 내가 친손자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야.”늘 전태윤에게 한 소리 하던 할머니를 생각하며 하예정은 큰 소리로 웃고 싶었지만, 대표 사모님으로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해야 했기에 참았다.“친손자니까 그러는 거죠. 원래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싫은 소리 하고,
“그래, 아직 이르긴 하지만 우리도 준비해야지.”전태윤은 말하며 빠르게 덧붙였다.“네가 걱정할 건 없어, 디자이너가 오면 잘 협조하면 돼. 네 체형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만들어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 거야.”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굳이 맞춤 드레스를 입지 않아도 가장 아름다운 신부예요.”그녀는 나름 자기 외모에 자신 있었다.전태윤은 웃으며 맞장구쳤다.“그래, 넌 언제나 내 가장 아름다운 신부였지. 그냥 내가 너한테 최고인 것만 해주고 싶어서 그래.”하예정을 위한 예물도 준비해야 했던 전태윤은,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과 가족들이 그에게 물려준 것 전부를 그녀에게 주기로 했다.두 사람은 사옥을 나와 함께 전태윤의 롤스로이스를 향해 걸어갔다.“따라오지 않아도 돼요.”전태윤이 경호원들에게 말하자 경호원들은 정중하게 대답했다.전태윤의 차가 시동을 걸고 전씨 그룹을 빠져나가자, 경호원들도 뒤따라 회사를 떠났다.소정남은 관성 호텔에서 가까운 지인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이 자리에는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전이진, 예준하와 소지훈을 제외하고는 초대받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소씨 가문에서는 소정남에게 특별히 소지훈을 부르라고 지시했다.소정남이 애정을 과시하면서 소지훈을 자극해 결혼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소정남은 소지훈이 감정에 대해선 무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지라 대신 마음이 조급했다.삼촌의 부름에 소지훈은 흔쾌히 승낙했다.심효진은 하예정과 성소현만 초대했는데 성소현은 갑자기 일이 생겨 오지 못했다. 관성 호텔에 온 김에 소정남은 전호영에게 연락해 그에게도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했다.모두 도착했을 때, 아내가 있었던 소정남과 전태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싱글이었다.“소 이사님, 효진아, 두 사람 축하드려요.”하예정은 이제 막 부부가 된 사랑스러운 커플을 보자마자 진심 어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고마워.”그녀는 허리를 굽혀 우빈이를 안아 들
소정남과 심효진의 결혼식이 이달 말로 정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저마다 소정남을 한마디씩 놀렸다.소정남은 모두의 놀림과 축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여기서 전태윤 빼고 다 똑같아.”소정남은 스스로 잔을 가득 채우더니 모두를 향해 웃으며 건배했다.“자, 똑같은 분들, 오늘부로 전 그쪽들 모임에서 빠집니다. 앞으로는 솔로 모임에 절 부르지 마세요. 건배!”예준하가 웃으며 말했다.“아주 부럽네요, 소 이사님.”반면 노동명은 이렇게 말했다.“오늘부터 소정남도 전태윤처럼 아내 바보가 되겠네.”전태윤이 낮은 목소리로 받아쳤다.“괜찮아, 넌 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 아내 바보.”“전태윤, 너 되게 상처받게 말한다. 예정 씨, 태윤이 제대로 단속 안 해요?”하예정은 조카에게 음식을 집어주고 있었다. 이미 저녁을 먹은 우빈이는 더 먹기 싫어 좋아하는 음식만 몇 입 먹고 있었다.“태윤 씨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단속할 필요가 없잖아요.”“들었지, 부부는 한통속이야.”노동명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친구들 중에 두 사람이 제일 부러워.”전호영이 거들었다.“형, 부러우면 얼른 여자 친구 찾아요, 우리도 형 부러워하게. 지난번 공씨 집안 파티에서 손정 그룹 부회장님하고 얘기 잘하지 않았어요? 두 사람 춤추는 걸 봤는데 정말 잘 어울렸어요.”노동명은 하예진에게 말할까 봐 재빨리 하예정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하예정 역시 그날 밤 파티에 있었고, 이미 다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알려줄 거라면 진작 말했을 것이다.그러자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건 우리 엄마 마음에 드는 신붓감이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야. 난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그 사람 마음 얻어서 운 좋게 결혼까지 하게 되면 꼭 소정남처럼 성대한 만찬을 대접할게.”두 커플을 제외한 나머지 싱글들은 노동명이 좋아하는 사람이 하예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예준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노 대표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전호영이 웃으며 말했다
소정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형이 왜 정상이 아니야?”소지훈은 입술을 꾹 다물다가 말을 꺼냈다.“여기 다 아는 사람들이고, 두 제수씨도 예전부터 가까운 사람이라 그냥 얘기할게. 난 여자한테 아무 감정을 못 느껴.”“...”하예정과 심효진은 친구 아니랄까 봐 동시에 집었던 새우를 그릇에 떨어뜨렸다.“형, 그냥 핑계지?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말로 나를 겁줄 필요는 없잖아.”소정남은 큰아버지의 눈빛과 큰어머니의 기대에 찬 표정을 떠올리며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형이 어떻게 이런 말을, 깜짝 놀랐다.“소지훈 씨 혹시 남자를…”예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지훈 옆에 앉아있던 그는 이미 조용히 엉덩이를 들면서, 소지훈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언제든 자리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소지훈이 어떤 사람인데, 준하의 이런 작은 행동까지 그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예준하의 팔을 잡아당겼고, 예준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예준하 씨, 겁먹을 필요 없어요. 전 남자한테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병이죠. 정신과도 가봤고, 남성 질환 전문으로 유명한 의사도 만나봤는데, 다들 이건 치료 방법이 아니라 운명에 달렸다고 하더라고요.”“형, 놀라게 하지 마.”“소정남, 내가 거짓말할 사람이야?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난 내 몸 상태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아.”소지훈의 표정이 진지했다.하예정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지훈 씨, 그게 혹시 감정이 없는 병인가요?”소지훈은 하예정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런 병도 있습니까?”“전에 잡지에서 봤는데, 그런 병은 치료법도 없고 전적으로 운명에 달렸대요. 소지훈 씨를 구원해 줄 여자를 만나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말 평생 혼자 살아야 해요.”“...”소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소정남, 돌아가서 큰아버지한테 말해. 나만 보면서 나한테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이 많은 사람
형을 위해 선발 대회라도 열 수는 없지 않겠나?전태윤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릇 가득 새우를 깐 후 일회용 장갑을 벗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런 병 들어봤어요.”“소지훈 씨, 순리대로 따라요. 아니면 우리 할머니가 가장 신뢰하는 점쟁이를 소개해 줄 테니, 점쟁이의 도움을 받는 게 어때요? 혼자 살 운명인지, 아니면 대대로 이어갈 운명인지 점쳐 보시죠.”“전씨 할머니께서 믿는 점쟁이요? 어르신이 믿는 점쟁이라면 진짜가 틀림없겠네요.”전씨 할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이 컸던 소지훈은 할머니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다.“형, 그럼 할머니가 아시는 점쟁이에게 가서 누가 구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지 그래?”소정남은 불안한 마음에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아, 이따가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우리 형한테 점쟁이를 소개해 달라고 말씀드려.”하예정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전태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돌아가서 할머니한테 전화할게.”소지훈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전태윤을 바라봤고, 전태윤은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이모, 나 물 마시고 싶어요.”“그래.”하예정이 우빈에게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주려던 찰나, 전태윤은 이미 우빈에게 물을 따라주러 간 뒤였다.곧 전태윤이 우빈이를 위해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이모부 고마워요.”우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소지훈은 우빈을 바라보며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 씨 조카 맞죠? 정말 귀엽고 예의 바르네요.”하예정은 손을 뻗어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제 조카 맞아요. 이름이 우빈이에요.”“삼촌도 귀여워요.”우빈이 덩달아 소지훈을 칭찬했다.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소지훈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삼촌은 어른이라 귀엽다고 하면 안 돼.”“삼촌 잘생겼어요, 우리 이모부만큼.”우빈이 말을 바꿨다.소지훈은 일부러 아이를 놀렸다.“그럼 삼촌이 잘생겼어, 이모부가 잘생겼어?”우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당연히 이모부가 더 잘생겼죠.”사람들은 다시
전태윤이 동생을 바라보자, 전이진은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젓가락을 들어 무슨 음식을 먹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그의 정신은 음식이 아닌 다른 데 가 있었다.원래는 여씨 가문 저택으로 바로 가고 싶었지만, 소정남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에 그의 체면을 봐서 자신의 호텔로 먼저 온 것이다.하예정은 전이진의 반응을 보자 단번에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기울여 전태윤을 바라보았다.전태윤이 다정하게 물었다.“여보, 다 먹었어?”그녀가 짧게 대꾸했다. 그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 이미 배불리 먹은 상태였다.“계속 도련님 노려보지 마요.”하예정은 낮게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 여운초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기계적인 대답만 들릴 뿐이었다.“고객님의 휴대전화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여운초의 휴대폰은 정말 꺼져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카톡도 없고, 휴대폰도 꺼져 있어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휴대폰 꺼져 있으니 이따 집에 한번 가 봐요. 내일 아침에 언니 가게에서 꽃 사면서 얘기 잘해볼게요.”전이진은 이제 하예정을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하예정은 그를 도와 줄 수밖에 없었다.“고마워요 형수님.”전이진은 서둘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그는 여씨 가문 저택으로 갈 생각이었다.그러나 여운초는 사실 집에 있지 않았다. 전이진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후 점원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꽃필 무렵을 떠났다.이후 그녀는 곧바로 한동호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길가에서 기다릴 테니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한동호가 데리러 오자 여운초는 관성에 바다가 보이는 별장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여운초는 바닷가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 그녀가 아니라 한동호의 명의로 해놓았다. 그래야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으니까.여운초는 바닷가를 좋아했다. 아직 앞이 보이던 시절, 집에서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하면 혼자 택시를 타고 바닷가로 갔다. 바닷가에 앉아 조용히 바닷바람을 느끼며 파도를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