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위해 선발 대회라도 열 수는 없지 않겠나?전태윤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릇 가득 새우를 깐 후 일회용 장갑을 벗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런 병 들어봤어요.”“소지훈 씨, 순리대로 따라요. 아니면 우리 할머니가 가장 신뢰하는 점쟁이를 소개해 줄 테니, 점쟁이의 도움을 받는 게 어때요? 혼자 살 운명인지, 아니면 대대로 이어갈 운명인지 점쳐 보시죠.”“전씨 할머니께서 믿는 점쟁이요? 어르신이 믿는 점쟁이라면 진짜가 틀림없겠네요.”전씨 할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이 컸던 소지훈은 할머니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다.“형, 그럼 할머니가 아시는 점쟁이에게 가서 누가 구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지 그래?”소정남은 불안한 마음에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아, 이따가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우리 형한테 점쟁이를 소개해 달라고 말씀드려.”하예정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전태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돌아가서 할머니한테 전화할게.”소지훈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전태윤을 바라봤고, 전태윤은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이모, 나 물 마시고 싶어요.”“그래.”하예정이 우빈에게 따뜻한 물을 한 잔 따라주려던 찰나, 전태윤은 이미 우빈에게 물을 따라주러 간 뒤였다.곧 전태윤이 우빈이를 위해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이모부 고마워요.”우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소지훈은 우빈을 바라보며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 씨 조카 맞죠? 정말 귀엽고 예의 바르네요.”하예정은 손을 뻗어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제 조카 맞아요. 이름이 우빈이에요.”“삼촌도 귀여워요.”우빈이 덩달아 소지훈을 칭찬했다.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소지훈도 웃으며 말했다.“꼬마야, 삼촌은 어른이라 귀엽다고 하면 안 돼.”“삼촌 잘생겼어요, 우리 이모부만큼.”우빈이 말을 바꿨다.소지훈은 일부러 아이를 놀렸다.“그럼 삼촌이 잘생겼어, 이모부가 잘생겼어?”우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당연히 이모부가 더 잘생겼죠.”사람들은 다시
전태윤이 동생을 바라보자, 전이진은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젓가락을 들어 무슨 음식을 먹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그의 정신은 음식이 아닌 다른 데 가 있었다.원래는 여씨 가문 저택으로 바로 가고 싶었지만, 소정남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에 그의 체면을 봐서 자신의 호텔로 먼저 온 것이다.하예정은 전이진의 반응을 보자 단번에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기울여 전태윤을 바라보았다.전태윤이 다정하게 물었다.“여보, 다 먹었어?”그녀가 짧게 대꾸했다. 그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 이미 배불리 먹은 상태였다.“계속 도련님 노려보지 마요.”하예정은 낮게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 여운초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기계적인 대답만 들릴 뿐이었다.“고객님의 휴대전화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여운초의 휴대폰은 정말 꺼져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카톡도 없고, 휴대폰도 꺼져 있어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휴대폰 꺼져 있으니 이따 집에 한번 가 봐요. 내일 아침에 언니 가게에서 꽃 사면서 얘기 잘해볼게요.”전이진은 이제 하예정을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하예정은 그를 도와 줄 수밖에 없었다.“고마워요 형수님.”전이진은 서둘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그는 여씨 가문 저택으로 갈 생각이었다.그러나 여운초는 사실 집에 있지 않았다. 전이진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후 점원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꽃필 무렵을 떠났다.이후 그녀는 곧바로 한동호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길가에서 기다릴 테니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부탁했다.한동호가 데리러 오자 여운초는 관성에 바다가 보이는 별장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여운초는 바닷가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 그녀가 아니라 한동호의 명의로 해놓았다. 그래야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으니까.여운초는 바닷가를 좋아했다. 아직 앞이 보이던 시절, 집에서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하면 혼자 택시를 타고 바닷가로 갔다. 바닷가에 앉아 조용히 바닷바람을 느끼며 파도를
여운초는 당시 경찰이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해쳤다는 증거를 그렇게 빨리 찾아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 사건으로 인해 큰아버지도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충분한 증거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소지훈이 찾아낸 증거는 표면적으로 많은 부분이 추미자를 가리키고 있었기에 여태웅은 아내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지만, 소지훈이 어떤 사람인가. 그 이후에 새로운 증거를 속속 내놓으며 여태웅은 자유를 잃게 되었다.추미자 사건은 관성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언론 보도 이후 이제는 관성 사람들뿐만 아니라 뉴스를 보는 다른 도시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여씨 그룹 사람들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았다.그들은 여태웅 부부가 모두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경영을 맡게 될지 추측하고 있었다. 여씨 그룹을 누가 물려받을까?여태웅의 외아들?하지만 그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여태웅이 단단히 감추며 보호했기에 그들조차 만난 적이 없는 도련님이었다.여운초가 경영진들과 미팅을 할 때만 해도, 그녀는 평소 한동호를 통해 여씨 그룹의 상황을 전해 들었고,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는 데다 젊은 여자라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어떻게 여씨 그룹을 임시로 관리할지 의문이었다.그런데 회의가 끝난 후 한 번의 만남으로 임원들의 의구심은 풀렸고, 그녀는 여씨 그룹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한동호 부사장이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여태웅이 늘 믿고 의지하던 그가 여운초를 지지하는데 고작 밑에서 일하는 부하직원들 주제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여씨 그룹은 결국 여씨 가문 사람의 것이었다.여씨 가문 사람이 이어받아 그들에게 월급만 제때 준다면, 누가 위에 오르던 별 영향이 없었다.이 순간에도 여운초는 여전히 바닷가 별장에 있었다.그녀에게 연락이 닿지 못한 전이진이 하예정에게 다시 가서 부탁하는 것도 모른 채.여운초는 하예정도 모르는 사이 번호를 바꾼 상태였다.하예정에게 알려주면 전이진도 알게 될까 봐 알려줄지 말지 망설였다.마당에는 여운초가 누워있는 긴 의자 옆으로
“전이진 피해서 며칠 더 여기 머물고 싶으면, 여자 친구한테 얘기해서 내일 비행기 타고 오라고 할게.”남자인 그가 여운초를 돌보기는 다소 불편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평생 여운초의 오빠가 되어주기로 했으니, 회사 일을 제외하고도 앞을 못 보는 여운초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도와줘야 했다.오후에 미팅할 때도 그가 옆에서 도와줬다.“나와 전이진 씨는 아무 사이 아니에요.”여운초는 다급하게 해명하자 한동호는 그녀에게 음식을 건네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운초야, 난 널 중학교 입학할 때부터 알았어. 벌써 14년이나 지났는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알아.”“오후에 미팅할 때도 바쁘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었잖아. 가만히 있을 때면 멍때리기 일쑤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때 전이진 씨 분명 질투하고 있었어. 아마 우리 둘 사이를 오해했겠지. 그래서 너한테 물어봤고, 넌 아무 말도 안 했으니 둘이 갈등이 생긴 거지?”밥을 먹던 여운초가 잠깐 멈칫하더니, 이윽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갔다.“동호 오빠, 전이진이랑 나랑은 갈등이 생길 것도 없어. 우린 단순히 친구 사인데 무슨 설명이 필요해. 됐어, 오빠. 난 괜찮아. 그나저나 곧 동생이 돌아오는데 모든 걸 알면 날 미워하진 않을까?”여씨 가문에서 여운초는 계부와 이복동생의 생사는 말할 것도 없고 친어머니의 죽음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남동생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남동생이 그녀를 걱정할 때마다 겉으론 차갑게 굴어도 사실 이미 마음이 풀려서 그를 가족으로 생각한 지 오래였다.남동생은 여운별과는 달리 진심으로 그녀를 누나처럼 대했고, 무조건 그녀의 편을 들었다.그랬기에 여운별은 엄마한테 말해 남동생을 초등학교 때부터 기숙학교에 보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게 한 것이었다.이제 동생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한 달에 하루만 집에 돌아왔다. 수능이 곧 다가오는데 여운초는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 동생에게
여운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동호는 할 말이 끝났는데도 그녀가 가만히 있자 속으로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다른 남자였다면 여운초가 눈먼 자신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지 않았겠지만, 상대는 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전씨 가문은 관성 최고의 갑부였고, 그에 비해 여씨 가문의 총자산은 20억이 좀 넘을 뿐이었다.심지어 일부 자산은 압류될 수 있어 실제로 남아있는 합법적인 사업은 아마 몇억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억만장자인 전씨 가문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거기에 여운초는 몸까지 불편하니 더더욱 전이진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비감이 들었다.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한동호는 차로 여운초를 다시 시내로 데려다줬다.그들이 시내에 돌아왔을 때 전이진 일행은 막 호텔을 나섰다.전이진은 술을 조금 마셨기에 직접 운전하지 않고, 전태윤의 경호원 한 명에게 대리운전을 부탁해 호텔에서 곧장 여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어차피 근처에 그의 별장도 한 채 있으니, 여씨 저택에서 여운초를 만나고 다시 별장으로 돌아가서 쉬면 된다.그곳에서도 그녀를 못 찾으면 꽃집에 찾아갈 생각이었다.이 큰 관성에서 그녀가 갈 만한 곳은 두 곳뿐이었다.전이지는 오늘 밤 그녀를 반드시 찾고 말거라 다짐했다.하예정은 끄덕끄덕 졸고 있는 우빈이를 품에 안은 채 전태윤에게 말했다."태윤 씨, 숙희 아주머니에게 전화해서, 내가 우빈이를 데리고 왔으니 내일 아침에 강일구 씨가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거라고 언니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해줘요.”이 시간쯤이면 언니도 쉬고 있을 것이다.전태윤은 알겠다며 휴대폰을 꺼내 숙희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처제가 안심할 수 있도록 자기들이 우빈이를 데려가겠다고 전했다.숙희 아주머니가 말했다."예진 아가씨는 이미 주무시고 계세요. 9시까지 기다리다가 도련님께서 우빈이가 돌아오지 않아서, 도련님이 데려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더 기다리지 않으셨어요. 두 분도 일찍 쉬세요."전화를 끊은 후 전태윤은 하예정한테서
차에 오른 하예정은 남편에게 물었다.“소지훈 씨한테 진짜로 점쟁이를 소개해 주려고요?”전태윤은 우빈이가 좀 더 편안히 잘 수 있게 자세를 바꾸었다.“당연하지. 지금은 할머니께서 주무실 수도 있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드려서 점쟁이 연락처 받고, 소지훈 씨 사주 봐 달라고 그 댁 가주님께 보내야지.”그렇게 되면 소지훈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본인한테 연락처를 줬으면 그냥 버렸을지도 모른다.“소지훈 씨가 한 말이 사실일까요? 정말 감정이 없는 걸까요?”전태윤은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답했다.“사실일 수도 있고 핑계일 수도 있지. 소씨 가문 가주님만이 그건 확인할 수 있어.”그쪽에서도 이미 소식을 들었을 테니 소지훈이 도망치려 해도 늦었다.소지훈이 아무리 그들 앞에서 대단한 존재라고 한들, 날고 기는 부친의 손바닥은 벗어날 수가 없었다.만약 점쟁이가 소지훈의 사주에 아내가 없다고 하면 소균성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띠리링…”전태윤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소지훈에게서 전화가 왔다.“전태윤 씨, 평소에 제가 많이 도와줬으니 이번에 꼭 절 도와줘야 합니다.”소지훈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전씨 할머니께서 믿는다는 점쟁이의 연락처를 저한테 먼저 주세요. 제가 먼저 점쟁이를 만나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저, 정말 병이 있습니다.”그의 몸은 여자에게도, 당연히 남자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다.몸도 마음도 건강하지만 유독 그쪽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의사는 인연을 만나야 진정한 남자가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내시처럼 살 거라고 말했다.사실 소지훈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그가 오늘 밤 자신의 사정을 거리낌 없이 공개한 건, 소정남의 입을 통해 부모님 귀에 들어가, 결혼을 독촉하는 잔소리가 멈추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제발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하지만 전태윤의 말에 소지훈은 걱정이 되었다. 점쟁이가 정말 용해서 사주에 인연이 있다고 하면, 부모님께서는 분명 인연을 찾아오라며 그를 밖으로 쫓아내실 것이다.어디에
전태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척 금슬이 좋으셨다. 할아버지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할머니에게 애정을 쏟았다.소지훈은 헛기침하며 전화를 끊었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소지훈 씨도 부모님한테 결혼을 강요당하고 있죠?“비슷한 또래인 동명이도 그 댁 사모님이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봐. 소씨 가문 가주님도 같은 마음이실 거야. 부모님들은 다들 아들딸이 서른이 넘으면 불안한가 봐.”그도 마찬가지였다. 서른이 되자 할머니는 슬슬 하예정과의 결혼을 다그치기 시작했다.과거 전태윤은 하예정에 대한 오해가 많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할머니에게 고마웠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주위 친구들은 행복했으면 좋겠어.”전태윤은 남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고, 오로지 주변 사람들만 생각하면서 그들이 자신처럼 행복해지길 바랐다.하예정은 그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저도요.”전태윤은 한 팔로 우빈을, 다른 한 팔로 하예정을 안았다.…여씨 가문 저택에는 1층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집 앞에는 전이진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그는 경호원에게 차 경적을 울려달라고 부탁했다.곧 누군가 집에서 나왔다. 도우미였다.도우미는 문 앞에 주차된 차를 보자 여태웅이 풀려난 줄 알고 서둘러 문을 열러 나갔다.하지만 낯선 전이진의 차량을 본 도우미는 여태웅의 차량이 아닌 것을 알고 문을 닫으려 했다.전이진은 창문을 누르고 고개를 내밀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아주머니, 여운초 씨 돌아왔나요?”전이진이 여운초를 구한 다음 데려다줬을 때, 여태웅 부부는 당시 고마운 마음에 그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했다. 그리하여 당연히 여씨 가문의 도우미도 전이진을 만난 적이 있었다.“저희 큰 아가씨 찾으러 오신 겁니까? 아가씨께선 아직 안 돌아왔어요, 아마 안 올 것 같아요. 요즘 계속 꽃집에서 지냈거든요.”전이진은 짧은 탄성을 뱉더니 말을 이어갔다.“아주머니, 전화번호 남길 테니 운초 씨가 돌아오면 전화 좀 주세요. 급하게 만나야 할 일이 있어요.”도우미는 흔쾌히
“네, 조심히 가요.”여운초가 부드럽게 당부했다.한동호는 짧게 대꾸하며 여운초가 차에서 내려 별장으로 가는 걸 보았다. 열쇠를 꺼낸 그녀는 자물쇠를 만지더니 천천히 문을 열었다.이런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녀가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믿지 않을 것이다.익숙한 환경에서 그녀는 정상인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한동호는 여운초가 빌라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떠났다.그런데 앞에서 전이진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한동호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지만, 빠르게 달리고 있던 탓에 전이진인 것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지나쳐 버린 뒤였다.하여 그는 차라리 멈추는 것을 포기했다.백미러를 통해 전이진이 여씨 가문 저택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그가 여운초를 데려다주는 걸 봤을까?봐도 상관없었다.전이진은 이미 오해를 해왔고, 여운초는 전이진에게 자신의 정체를 말하는 것을 꺼렸다. 마찬가지로 말할 생각이 없었던 한동호는 이참에 전이진이 여운초에게 진심인지, 아니면 재미 삼아 만나려는 건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여운초는 전이진이 여기 있는 걸 모른다.저택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 안에 있던 도우미가 깜짝 놀랐다. 다가와서 그녀인 걸 확인한 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오셨어요.”여운초는 짧게 대꾸했다.도우미는 앞장서서 저택 대문을 닫으러 갔다가, 전이진을 보고는 여운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가씨, 전이진 씨 왔어요.”여운초는 잠시 당황하다가 차분하게 말했다.“너무 늦었으니까 이만 돌아가. 할 얘기 있으면 내일 해.”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집안으로 걸어갔다.여운초의 말에도 전이진은 못 들은 척 도우미가 문을 닫기 전에 안으로 들어갔다.도우미가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저택 문을 닫은 뒤 자리를 떠났다.이제 이 집에는 큰 아가씨와 도련님밖에 없는데, 도련님은 학교에 다니느라 이번 주말에 돌아올 예정이었다.여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추미자가 들어온 후 한바탕 갈아엎으며 다시 고용한 사람들이었고, 평소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