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머니 이거 영양제인데 모두 비싼 거예요. 근데 어르신들에게 효과가 좋다네요. 두 분이 천천히 드세요. 다른 사람 나눠주지 마시고요.”그녀도 이렇게 많을 먹을 수 없었다. 두 분에게 돈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이런 물건은 드릴 수 있었다.그 당시에 두 분이 자매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었다. 지금 이렇게 두 분이 그녀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해도 하예진은 한순간에 바로 두 분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여동생이 두 분을 설득해서 그녀를 돕게 했다는 것은 분명 두 분에게 그만한 이익을 주었다는 것이다.“예진아. 네가 지금 입원했는데 영양제는 네게 담겨두고 먹으렴. 몸 잘 챙기거라.”할머니는 입으로는 거절했지만 작은 손주를 앞세워 물건이 담긴 큰 비닐봉지를 가져오게 했다.하예진은 세 사람을 배웅하며 하지철에게 두 분을 잘 모시라고 당부한 뒤 병실로 돌아와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노씨 그룹.노동명은 방금 한 고객과 계약을 협상한 뒤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하려고 할 때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노 대표님, 어머님께서 오셨습니다.”“알겠어.”노동명은 이미 어머니가 올 것이라는 걸 예상했다.점심에 그는 병원으로 하예진을 만나러 갔다고 어머니를 마주쳤고 그는 어머니가 또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러 올 것이라고 짐작했다.아니, 단 3시간 만에 그의 어머니는 그의 회사로 들이닥쳤다.노동명은 고개를 직접 아래층으로 배웅한 뒤 1층에서 바로 어머니를 만났다.윤미라는 아들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10분 뒤 노동명이 어머니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말했다.“엄마 오후에 스케줄 없으세요?”“너희 젊은이들이 다들 바쁘겠지만 나와 네 아빠는 집에만 있는데 무슨 스케줄이 있겠어? 너희 아빠는 일찍이 골프 치러 가셨고 나도 심심해서 너한테로 온 거야.”“은경 씨는 오늘 바빠요?”“너는 은경이가 한가한 줄 아니? 은경이도 일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은경이가 무슨 신분으로 하루 종일 나와 함께 있겠어?
대표 이사 전용 엘리베이터에 모자가 단둘이 타게 되자 윤미라는 더 거침없이 말했고 그녀는 화를 냈다.“너 은경이랑 결혼 안 해도 돼. 엄마가 다시 너와 어울리는 집안 딸로 찾아줄게. 어찌 됐든 넌 반드시 재벌가 딸을 만나야 해. 하예진은 절대로 안 돼! 노동명, 엄마 지금 너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농담이 아니라고. 엄마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하예진과 네가 만나는 걸 절대로 동의할 수 없어.”어머니의 강경함에 노동명은 화를 내지 않았다.“엄마 지금 저한테 이 문제를 얘기하려고 오신 거예요? 더 이상 우리 모자 사이에 이 문제를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 일이고 제 결혼이에요. 엄마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요. 제가 하예진을 포기하길 원하시면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를 살려내요. 할머니께서 저와 예진이가 만나는 걸 반대하시면 그땐 저도 예진이를 포기할게요.”윤미라는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네 할머니 돌아가신 지가 몇 년인데. 그리고 할머니가 살아 돌아오신다고 해도 틀림없이 널 혼내실 거야. 너와 하예진이 만나는 걸 할머니가 아셨다면 너무 화가 나셔서 저승에서 벌떡 일어나 돌아오셨을 거야.”“그럼 전 예진이와 더 함께 있어야겠네요. 할머니가 보고 싶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절 가장 사랑해 주셨어요. 제가 뭘 하든지 제가 기쁘기만 하다면 할머니는 모두 절 응원해 주셨죠. 할머니는 인생을 살면서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아야 후회가 없다고 하셨어요.”노씨 가문의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막냇손자 노동명을 가장 사랑했다.윤미라는 연달아 아들 네 명을 낳았기 때문에 아들이 너무 많아 막내아들을 딱히 소중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노동명에 관한 관심이 조금 부족했다.“다 네 할머니가 널 버릇없이 만든 거야.”윤미라는 욕을 뱉어냈다.“점심에 너 병원으로 가서 하예진을 보러 간 걸 왜 하예진은 모르게 하는 거야? 노동명, 너도 마음속으로 하예진이 널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잖아. 그 여자는 널 단지 건물주이자 친구
[솔로인 것도 좋지. 너무 서두르지 마라.]소정남은 친구를 위로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없을 때는 노동명도 솔로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니 그도 소정남처럼 빨리 솔로 탈출을 해야겠다고 느꼈다.퇴근 후 집에 돌아 가면 서로 관심해 주고 따뜻한 안부를 전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하예진은 분명 좋은 아내가 될 것이다.주형인이 소중함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노동명은 하예진과 함께한다면 그녀를 반드시 소중하게 대할 것이다.“동명아 누구한테서 온 문자야? 태윤이니? 동명아 태윤이하고 하예정은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았으니 사이가 좋을 거야. 당연히 두 자매를 위해 더 생각할 테고. 너 은경이랑 결혼하기 전까지 태윤이와 거리를 좀 둬.”윤미라는 전태윤이 처형인 하예진의 편에 설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소정남의 약혼녀도 하예정의 친한 친구라도 했다. 심씨 가문은 꽤 괜찮은 집안이었다. 관성의 부동산 재벌이니 빌딩도 몇 채와 핫한 거리의 상가들을 임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소정남과도 어울렸다. 그리고 소정남과 심효진은 전태윤 부부가 이어준 것이었다. 윤미라는 전태윤이 자기 막내아들인 노동명과 그의 처형인 하예진을 결혼하게 만들어 세 사람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엄마 뭐라고 하셨어요? 태윤이랑 예정 씨가 아직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아서 사이가 좋은 거라뇨? 태윤이 바람피울 남자 아니에요. 예정 씨를 평생 사랑할 남자예요. 태윤이 집안에서도 예정 씨를 다 받아줬고요. 어머니도 뒤에서 이런 얘기 그만하세요. 전씨 가문이나 태윤이 귀에 들어가면 저희 두 집안 사이의 우정에 영향만 미칠 뿐이니.”“그리고 저 은경 씨하고 결혼 안 해요. 전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요. 그러니 더 이상 은경 씨 오해하게 만들지 마세요. 저도 은경 씨한테 분명하게 말할 거예요.”손은경은 그와 비즈니스 외에는 사적인 대화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똑똑한 여자였다. 고집스럽게 매달리지 않으니 하예진에게 졌다고
띠리리링...노동명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전태윤에게서 온 전화였고 그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저녁에 정남이가 밥 먹자고 하더라.”전태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노동명이 먼저 말했다. 노동명은 전태윤이 그에게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한 줄 알았다.세 사람의 우정은 아주 깊었다. 소정남이 솔로 탈출을 축하하는 의미로 두 사람에게 밥을 사는 것이니 아무리 바빠도 참석할 것이다.“나도 알아, 정남이한테서 이미 문자 왔어.”전태윤은 핸드폰을 한 손에 들고서 다른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는 틈에 노동명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내 와이프가 이미 네 속셈을 꿰뚫어 보던데.”“꿰뚫어 보다니?”노동명은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지만 이내 알아차렸다.“눈치챘어? 그럼 잘됐네. 나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사실 노동명은 자기의 감정을 정확하게 확인한 뒤에 행동하려고 했다. 전태윤이 그에게 하예진이 상처를 입어 몸과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하예진에게 그의 마음을 전하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니 기다리라고 했었다.그는 묵묵하게 하예진의 옆에서 그녀가 유명해질 때까지 지켜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다시 그녀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두 사람이 함께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질 것이다.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의 마음은 더 잘 드러나게 된다. 그가 묵묵히 옆에서 지켜주고 함께 해주면 하예진도 분명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옆에서 함께 하는 것이 가장 긴 사랑의 고백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예정이 그의 마음을 눈치챌 줄은 몰랐다.노동명은 자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분명 하예진을 또 찾아갔을 것이다. 하예진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분명 이상한 말들을 했을 것이다.하예진은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기 여동생에게 말했고 아마도 이때 하예정이 그의 마음을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었다.“그래, 알겠어.”하예진이 그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그도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전태윤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오후에는 그의 아내가 회사로 그를 찾아왔다. 그런 다음 함께 소정남과 심효진의 솔로 탈출을 축하 파티에 참석하려고 했다.전태윤은 다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노동명은 그럴 수가 없었다.그의 어머니는 전태윤과의 통화가 끝나자 그에게 물었다.“동명아, 태윤이가 무슨 얘기 했어?”“엄마, 통화 내용까지 말씀드려야 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챙겨주신 적 없었는데 이제 서른이 넘으니까 엄마가 절 챙겨 주시네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윤미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엄마 하실 말씀 끝났죠. 저 일해야 해요.”그의 말은 어머니에게 이만 떠나달라는 뜻이었다.윤미라는 침묵을 지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정남이가 저녁에 밥 산다며 넌 은경이 데려가. 은경이도 이제 천천히 너희 친구들하고 어울려야지.”“아니요!”노동명은 바로 거절했고 이에 윤미라는 흠칫했다.“... 너 그렇게 은경이가 싫으니? 은경이가 하예진보다 못한 게 뭐야? 출신이며 외모며, 심지어 나이도 하예진보다 어리고,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어. 그리고 능력도 하예진보다 훨씬 좋아.”“은경 씨가 예진보다 잘난 게 아니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뿐이에요. 예진이는 은경 씨하고 시작점부터가 다르다고요. 예진이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이미 독립해서 회사를 차렸을 수도 있어요. 엄마, 저한테 이유를 묻지 마세요. 저도 이유를 모르니까. 그저 좋아할 뿐인데 이유 따윈 필요 없어요.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생각하실 필요도 없어요. 앞으로 계속 나아갈 테니 지켜보세요.”윤미라는 분노했다.“엄마, 혼자 돌아가실 거예요? 아니면 비서 시켜서 모셔다드리라고 할까요?”윤미라는 일어서며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혼자 갈 거야.”“그러세요. 조심히 가시고요.”노동명은 분노하는 어머니를 배시시 웃으며 바라보았다.윤미라는 노씨 그룹을 나오며 손은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은경아, 정남이가 오늘 혼인신고를 했대. 정남이가 오늘 저녁에 동명이한테 밥을
노씨 가문의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노동명을 막지 않으셨을 것이다.노동명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셨다. 그가 만약 진심으로 하예진을 사랑한다면 할머니는 반드시 그가 하예진에게 구애하는 것을 응원해 주셨을 것이다.“은경 씨 설마 아직도 나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죠?”손은경이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요.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오빠가 저한테 감정이 없는데 제가 환상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 세상에 오빠만큼 잘난 남자가 오빠 한 사람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도 오빠한테만 매달릴 수 없는 거 아니에요? 난 잠재력이 있는 다른 나무를 찾을래요. 아니면 더 향긋한 숲을 찾을 수도 있고요. 이렇게 해요, 그럼. 나도 더 이상 연기하지 않을게요. 돌아가서 아주머니와 저녁을 먹은 뒤에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오빠 집에서 나갈게요. 관성 호텔에서 지내도 되고요. 저희 앞으로 부부는 안 돼도 친구는 할 수 있는 거죠?”손은경은 좋은 뜻이었지만 노동명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가능한 한 빨리 윤미라에게 사실을 분명히 말한 뒤 노씨 저택에서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그래야 윤미라가 더는 그녀에게 희망을 걸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노동명을 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명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관성에는 훌륭한 젊은 남자들이 가득했다. 그녀의 운명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만약 관성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만나보면 된다.만약 운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혼자서 사는 것도 멋지다고 생각했다.“오빠 일 보세요. 저 운전해야 해요.”손은경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 일들을 하예정은 모르고 있었다.오후에 그녀는 공예품을 도와주는 학생들에게 재료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저녁이 되자 학교는 끝나고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학교의 대문을 걸어 나왔다. 하예정은 그들의 활기찬 얼굴을 보며 그들의 청춘을 부러워했다.한동안 바쁘게 보낸 하예정은 가게 앞에 놓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 저희 언니 많이 좋아졌어요. 회복도 꽤 잘 됐고요.”“정말 다행이야.”정씨 아저씨는 반찬을 집어 먹으며 밥을 한입 먹었다.“예정아, 아저씨가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네 의견을 말해 줄 수 있겠니? 아줌마한테 말했더니 혼나기만 했어.”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말씀하세요. 무슨 일인데요? 제가 들어보고 의견을 말씀드릴게요.”“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알잖아. 하지만 진정한 사부님 밑에서 배우지 못하고 혼자서 여기저기서 조금 배웠을 뿐이야. 그런 다음에 혼자서 책을 보며 공부했지.”정씨 아저씨는 식사를 멈추고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근데 지금은 내가 육교나 공원 같은 곳에 가서 관상을 봐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심심할 때 가서 돈을 벌면 집안 살림에 도움도 될 것 같아서. 비록 우리 잡화점으로도 돈을 벌긴 하지만.”“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어르신은 점점 더 늙어가고 우리 중년층의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어. 온 식구가 이 가게 수입에 기대 살기는 힘들어. 그래서 밖에서 좀 빨리 돈을 벌고 싶은데 집사람은 날 혼내기만 하니. 우리 집사람은 오늘 저녁, 아니구나 내일인가? 오늘이 수요일이니 목요일에 로또 번호를 공개하겠네. 나한테 내일 저녁 로또 번호를 알려달래. 전 재산을 털어서 로또를 사겠다면서. 많이 사야 상금이 더 높대. 5천 원이 당첨되면 5만 원을 받을 수 있다네.”정씨 아저씨는 불만을 말했다.“내가 로또 번호를 알았다면 이미 부자가 되었을 거야. 육교에 가서 관상이라도 봐 줄 생각을 하겠니? 집사람은 내가 게을러서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는 줄 알 거야.”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내일 저녁 로또 번호 아시면 저한테도 전화해서 알려 주세요. 저도 전 재산을 털어서 살게요.”“예정아, 아저씨 놀리지 마라. 난 내 실력으로 관상을 봐주고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싶을 뿐이야.”“정씨 아저씨, 꼭 공원에 가서 관상을 봐주는 걸로 돈을 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은 그걸 사기라
하예정은 언니를 보러 병원으로 향했다.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하예진은 아들과 함께 이미 저녁 식사를 마친 뒤였다.“이모.”우빈이는 하예정을 발견하고 기쁘게 달려와 하예정의 품에 안겼다.하예정은 우빈이를 안으며 언니가 도시락을 씻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했다.“언니, 내가 가서 씻어 올게.”“됐어. 나 지금 너무 심심해.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그렇지 않으면 이미 간병인에게 도시락을 씻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이렇게 일찍 문 닫은 거야?”하예정은 조카를 안고서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언니가 뜨거운 물로 도시락을 씻는 걸 바라보며 대답했다.“효진이가 오늘 밥을 산다고 해서. 우빈이가 밥 먹지 않았으면 내가 데려가서 밥 먹였을 텐데.”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나 지금 돼지가 되어가는 것 같아. 밥 먹고 바로 자니까. 아저씨가 가져다주는 반찬들이 너무 맛있어서 매일 이렇게 잘 먹어. 퇴원할 때가 되면 몸무게가 또 70킬로를 넘길 것 같아.”그녀는 쉽게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조금만 많이 먹어도 허리가 바로 통통해졌다.“괜찮아, 언니 지금 너무 말랐어.”어차피 이제 저승 문 앞에서 유턴까지 했다.“조금 있다가 네가 우빈이 좀 데려가. 하루 종일 나하고만 있어서 우빈이도 답답할 거야. 계속 내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만 보고 싶어 해. 눈 나빠질까 봐 걱정돼서 안 보여줬지만.”하예진은 도시락을 씻으며 말했다.“예정아, 내일 너 올 때 우빈이 로고 좀 가져다줄래? 우빈이 유치원 끝나면 여기서 로고 하면서 놀게. 핸드폰으로 애니메이션 보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한글 공부하는 책도 가져다줘.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이럴 때 우빈이 한글 좀 가르쳐 줘야지. 9월에 유치원 중급반으로 올라가야 배운다고 하네. 지금은 초급반은 그저 애를 봐주는 거하고 같아.”지금 유치원 등록금도 싸지 않았다. 한 학기에 수백만 원이 들었다. 더 비싼 곳은 천만 원이 넘는다고 한다.중급반부터 아직도 3년을 더 유치원을 다녀야 초등학교에 입학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