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초는 담담하게 말했다.“이진아, 우리가 무슨 사이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누구와 만나든, 누구와 친하게 지내든 모두 내 자유야. 네가 날 많이 도와준 건 사실이지만 내 교제에 관여할 자격은 없지 않아? 난 널 그저 아는 친구로 생각할 뿐이야.”“아는 친구? 그냥 아는 친구일 뿐이라고?”전이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여운초, 너 지금 일부로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내가 널 약혼녀로 생각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한 후부터 넌 나를 피하며 전화도 받지 않았어. 게다가 지금은 다른 남자와 알콩달콩 지내고 있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여운초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녀는 전이진의 손을 몸에서 떼어낸 후 카운터로 물러섰다. 카운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 훨씬 안정감이 느껴졌다.겉으로는 담담해 보이지만 사실 지금 속으로 약간 당황하고 있다.그녀도 본인이 왜 당황하고 있는지 몰랐다.뭔가 전이진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것만 같았다.하지만 둘은 연인 관계도 아닌데 이런 일로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다만 전이진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이진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이 한마디야. 내가 누구랑 만나든, 왕래하든 모두 내 자유야. 그래, 네 할머니가 나를 아주 맘에 들어 하셔서 날 너의 아내감으로 선택했다는 거 알아. 다만 날 약혼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지 네 생각뿐이잖아? 나도 널 똑같이 약혼 상대로 생각할 거라고 착각하지는 마. 난 기껏해야 널 평범한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아. 이때까지 도와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보답으로 밥을 사줬잖아. 그리고 널 피한 게 아니야. 그냥 휴대폰과 번호를 바꿨을 뿐이야. 널 피하고 싶었으면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어, 진작 가게 문을 닫고 떠났을 거야.”전이진은 그녀를 노려봤다.여운초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녀를 필사적으로 노려봤자 소용없었다. 어떻게 째려보든 그녀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줄도 모른다.“어젯밤 나랑
여운초가 자신을 피가 날 정도로 물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었다.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얼얼하게 아파 났다.여운초가 힘껏 휘두른 손에 전이진은 뺨을 한 대 단단히 얻어맞았다.그녀는 느낌으로 손을 휘둘렀던 것이다.전이진의 뺨을 때린 후 여운초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 들어 그를 향해 내리쳤다.전이진은 그녀가 자신을 때리도록 놔두었다. 어쨌든 아프지 않으니.다만 그녀가 지팡이를 움켜쥐고 그를 향해 때리자 전이진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피했다.“운초야...”“나가!”이젠 여운초가 화를 내게 됐다.그녀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지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여운초는 전이진이 정직한 사람이라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이렇게 강제로 키스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눈이 안 보인다고 마음대로 괴롭히다니.열받아 죽을 지경이였다.“운초야, 나...”전이진은 자기가 충동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해명하고 싶어도 해명할 길이 없었다.“나가! 전이진, 너 당장 나가!”그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지금 서 있는 방향을 확인한 여운초는 지팡이를 내던졌다.전이진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그녀가 던진 지팡이를 받았다.“알았어, 나갈 테니까 물건 던지지 마. 그러다 다쳐. 갈게, 당장 나갈게.”여운초가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미칠듯한 모습을 보이자 전이진은 얼른 지팡이를 들고 떠났다.그녀는 그의 발소리가 밖으로 향하는 것을 듣고 그가 차를 몰고 떠나는 기척까지 듣고서야 털썩 주저앉아서 손을 들어 힘껏 입술을 닦았다.“개자식!”여운초는 욕을 한마디 뱉었다.그러고는 눈물을 닦았다.‘울지 마!’그녀도 한입 물어 그의 입에서 피가 나게 했으니 그에게 복수한 셈이었다.여운초는 앞으로 다시는 전이진을 상대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전이진이 그녀를 와이프로 생각했든 말았든 그건 그만의 생각이지, 그녀는 결코 그를 남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따지고 드는
혼자 서점을 지키던 하예정은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전이진이 찾아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하예정은 일어서서 카운터에서 나오며 물었다.“이진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입술도 얼굴도 왜 이렇게 부었어요? 누구랑 싸운 거예요? 진 거예요? 못 이기겠으면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요.”하예정의 잇따른 물음에 전이진은 얼굴이 빨개졌다.싸움에서 진 거면 형수님에게 도와달라고 하라고?그의 싸움 실력은 하예정보다 훨씬 좋았다.“형수님, 이번엔 꼭 도와줘야 해요.”“당연하죠. 이 하예정의 시동생을 이렇게 때리다니. 이진 씨 형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참아요. 누가 이렇게 때렸는지 말해봐요. 내가 가서 혼찌검을 낼 테니까요.”하예정은 말하면서 의자를 전이진의 뒤로 끌어왔다.“일단 앉아서 천천히 말해요. 물 마실래요? 잘됐어요, 오랜만에 몸을 풀고 싶던 참이었어요.”하예정은 전이진에게 물을 따라주었다.전이진은 형수가 왠지 신이 난 듯한 모습으로 관심해 주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누구랑 싸운 게 아니에요.”만약 다른 사람과 싸워서 진 거면 불러도 형제들을 불렀지 형수를 부를 리가 없었다. 비록 형수가 싸움 좀 할 줄 안다고 해도 말이다.하예정은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 전이진에게 가져다주고는 자신도 의자를 하나 끌고 와 맞은편에 앉아 관심 있는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말해봐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걱정 마요, 도와줄 수 있는 건 꼭 도와줄 테니. 이번뿐만 아니라 나중에라도 손해 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내 뒤엔 태윤 씨도 있는걸요. 겁먹을 필요 없어요.”하예정은 형수로서의 믿음직함이 있었다.시동생이 손해를 보기만 하면 바로 대신해 갚아줄 듯한 모습이었다.전씨 일가은 아홉째 도련님은 제일 똑똑했다. 그는 하예정을 처음 보자마자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큰형이 형수님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보고는 괴롭힘을 당하기만 하면 형수를 찾아가 고자질하곤 했다.전이진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형수의 흥취 가득한 모습
전이진과 여운초는 서로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정도로 발전하게 된 것에 하예정은 진척이 꽤 빠르다고 탄복했다. 동생은 남편보다 사랑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얼굴이랑 입술이 부은 것을 보니까 키스는 운초 씨 동의 없이 한 거네요? 그리고 운초씨가 뺨을 때린 거고요, 맞죠?”하예정의 눈은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경험해 온 사람으로서 전이진의 지금 모습을 보고 바로 짐작이 갔다.강제 키스를 한 것이라고.전이진은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는 말하지 않았다.묵인한 셈이었다.하예정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형수님. 저를 도와준다고 했잖아요.”전이진은 하예진이 그를 돕지 않으려 하는 줄 알고 긴장한 말투로 말했다.그에 하예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마음 가라앉히러 물 마시러 가는 거예요. 이진 씨 말에 좀 놀라서요.”“....”그녀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르고는 물을 마시며 걸어와 다시 전이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물을 마시며 전이진을 천천히 훑어봤다.전씨 일가의 가풍은 좋아서 누구나 교양이 넘쳐났다.이건 그녀가 시댁 식구들에 대한 평가이다.전이진은 차갑고 거만한 전태윤과는 달리, 너무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훨씬 온화했다.이 정도로 강하게 나올 줄이야... “형수님...”“이진 씨, 이 정도로 밀어붙이는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전이진은 얼굴이 빨개졌다.“그건 충동적인 행동이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운초는 지금 제 전화를 받지도 않고 저와 만나는 것도 거부하고 있는데, 아까 가게에 가보니 마침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어요. 그 남자가 다정하게 운초의 이마를 손으로 쓰다듬는 걸 직접 봤어요.”전이진은 여운초에게 강제 키스를 한 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었다. 정말 순간의 충동으로 행동한 것이다.정확히 말하면 질투였다.그 낯선 남자에게 말이다.그보다 더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사업에서 꽤 성공한 남자인 듯싶었다.“운초 씨에게 강
하예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전이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면 진실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할머니가 정해준 아내감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고 계속 속이는 편이 더 좋았을까요?”그는 하예정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형처럼 속이고 있다가 들통나면 더 화낼까 봐 솔직히 말한 거였는데...”전이진은 형과 같은 고생을 겪고 싶지 않아 여운초를 속이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다.‘솔직하게 말해도 안 되는 걸까?’“...그 뜻이 아니고요, 그렇게 바로 말하면 운초 씨가 순수하지 않다고 느낄지도 몰라요. 단지 할머니가 이진 씨에게 맡긴 임무를 완수하려고 그러는 거로 생각할걸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요. 이진 씨가 운초라면 기분이 좋겠어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본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요. 아무리 여씨 일가의 큰 아가씨라지만 집안에서는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는걸요. 그래서 다른 집안의 사모님들은 며느릿감을 찾을 때 운초 씨를 아예 고려하지 않아요. 게다가 시각장애인이니 더 자신감이 없을 거예요. 이진 씨와 아직 친하지도 않고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호감이 있더라도 한계가 있어요. 이때 사실대로 말하면 당연히 거리를 둘 수밖에 없죠.”전이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말했다.“하지만 할머니가 주신 임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근한 건 사실이잖아요. 할머니가 자기 생각대로 선택해 줬고 전 이해가 안 됐지만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라 접근하기로 한 거예요. 어차피 좋아하는 여자가 없으니 할머니가 누굴 택하면 누구랑 결혼하는 거죠.”하예정은 전이진을 흘겨보며 말했다.“이런 생각이면서 운초 씨에게 강제로 키스를 한 거예요?”“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니까 화가 나서 그만...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하예정의 매서운 눈길에 전이진의 당당함은 점점 누그러졌다.“이진 씨는 운초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질투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거고요. 우선 먼저
하예정은 말했다.“그러면 된 거예요. 지금 당장 꽃필 무렵으로 가요. 뻔뻔하게 굴어서라도 제대로 사과해요. 할머니가 골라준 아내감이라는 말은 절대 언급하지 말고요. 이진 씨의 진심 어린 마음을 느끼게 해 줘요. 함께 심효진의 약혼식에 참석한 것을 보면 이진 씨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다는 걸 설명해요. 그러니까 운초 씨에게 임무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줘요. 운초 씨도 언젠가는 이진 씨를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거예요.”전이진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운초 씨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매우 예민할 거예요. 조금이라도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해요.”“싫어한 적 없었어요. 단 한 번도.”하예정은 그에 가볍게 응했다.전이진은 여운초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한 적이 없었다. 단지 할머니의 지시에 따를 생각이었고 마음을 바로잡지 못했을 뿐이다.“그러면 지금 당장 운초를 찾아가 사과하겠어요. 나를 만나려 하지 않으면 용서할 때까지 가게에서 떠나지 않을 거예요.”전이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서서 가려 했다.하예정은 그에게 물었다.“먼저 얼음찜질로 부기를 가라앉힐래요?”전이진은 자신의 부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얼마나 찜질해야 부기가 빠질지 몰라요. 어차피 운초는 내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괜찮아요. 마음 아파하지도 않을 텐데요 뭘.”그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형수님, 고마워요. 당장 꽃필 무렵으로 갈게요. 형에게 대신 휴가 좀 내주시겠어요? 직접 휴가를 냈다가는 혼날까 봐요.”이 일에 대해 하예정은 기꺼이 도와줬다.감정 적응기에 전태윤도 많은 일을 소정남과 전이진에게 떠넘겼었다.이젠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되었다.“앞으로 여자를 대할 때 더 신중해야 해요!”하예정은 한마디를 보탰다.전이진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한 번 한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사람이다.“그러면 이만 가볼게요.”“그래요. 학생들도 곧 수업이 끝
전태윤은 이에 응하며 이어서 말했다.“점심 배달시키지 마. 도시락 가져다줄 테니까 같이 먹자.”하예정은 서점에 혼자 있었다. 전태윤은 아내가 배달 음식을 먹는 것이 마음이 아파 진작에 관성 호텔에 전화해서 음식을 주문해 경호원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점심에 음식을 가지고 서점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알았어요, 배달 안 시킬게요. 먼저 일하고 있어요, 학생들 수업이 끝나서 저도 바빠질 거예요.”하예정은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전태윤은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보며 투덜거렸다.“안녕이라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네.”하예정은 바빠지기 시작했고 전태윤도 하던 일을 끝내고 사무실을 떠났다.경호원은 방금 호텔에 가서 도시락을 가져오는 길이었다. 전태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마중 나갔다.몇 분 후, 전태윤의 차는 전씨 그룹에서 떠났다.10분 일찍 떠나 아직 길이 막히지 않아 곧 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전태윤이 서점에 도착했을 때 하예정의 서점에는 여전히 물건을 사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 웬 학생이 하예정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예정 언니, 며칠 동안 효진 언니가 안 보이는데 어디 갔나요?”학교 주변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사장 중 젊은 사장은 하예정과 심효진뿐이라 학생들은 대부분 그녀들을 친절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얼굴도 이쁘고 매우 친절해 학생들은 수업이 끝날 때면 하예정네 서점에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효진 언니는 오늘 중요한 일을 보러 가야 해서 시간이 없어. 아마 두세 달 동안은 내가 혼자서 가게를 지키게 될 거야. 왜, 효진 언니가 보고 싶어?”그녀는 돈을 계산하면서 학생들을 놀렸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할인을 해주었다.“그렇게나 오래요? 그러면 다음 학기에나 효진 언니를 만날 수 있겠네요. 당연히 보고 싶죠. 요 며칠 문을 안 열어서 엄청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그리워한 것을 봐서 좀 싸게 해줘요.”“정말 우리를 보고 싶어 한 줄 알았잖아, 할인해달라는 거였네. 걱정 마,
하예정은 테이블을 깨끗이 닦았다.전태윤이 가져온 음식들을 보고 그녀의 마음은 꿀을 먹은 듯 달콤해 났다. 남편은 언제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해 오곤 했다.“이진이가 와서 뭐라고 했어? 무슨 사고를 쳤길래?”전태윤은 아내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호기심에 물었다.“운초 씨에게 엉뚱한 짓을 해버려서 제가 가서 사과하라고 했어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말해줬어요.”하예정은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이 일은 전이진과 여운초의 개인적인 일인 데다가 전이진이 그녀를 믿기에 알려준 것이라 더 이상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전태윤에게조차도 말하지 않으려 했다. 이후에 여운초가 시집오게 되면 전태윤을 보기 부끄러워할까 봐 걱정되었다.아내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전태윤도 예전에 아내에게 강제 키스를 한 적이 있었기에 곧 짐작이 갔다.하지만 아내의 생각을 눈치채고 더 이상 이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전태윤 부부가 점심을 먹고 있는 시간에 노동명은 퇴근 시간을 이용해 병원에 갔지만 하예진의 병실 앞에 한참을 서성이면서 들어가지 않았다.전씨 가문의 경호원이 물었다.“노 대표님, 들어가시겠습니까?”“아뇨, 예진이는 어때요? 좀 좋아졌어요?”“회복이 잘 돼서 이제는 침대에서 내려와 조금씩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퇴원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하예진 모자의 하루 세 끼 식사는 박 아저씨가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했다. 모두 영양사가 짠 식단에 따라 준비한 것이라 하예진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됐다.이경혜도 자주 보신 수프를 가져다주곤 했다.김은희도 자주 보내왔지만 매번 도로 가져가게 했다.오늘은 왠지 주씨 일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면 됐어요. 모르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게 잘 지켜줘요.”노동명은 경호원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 돌아섰다.전씨 일가의 경호원들은 노동명의 거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특별히 찾아와서는 병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하예진에게도 자신이 온 걸 알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대표님, 저는 회사의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 논의하러 왔어요. 방안을 가져왔으니 한번 보도록 하세요.”이윤미는 말하면서 자신 비서의 손에서 서류를 건네받은 뒤 두 손으로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한참 후에 다 훑어본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그녀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을 꺼냈다.“윤미 씨의 방안이 괜찮아 보이지만 이씨 그룹의 실력이 부족해서 별로 협력하고 싶지 않네요.”고현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협력업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윤미의 개인 회사와 협력하려 했던 것은 그냥 단순히 이윤미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던 것이었다.하예진의 회사도 설립되고 나면 고씨 그룹과 협력할 예정이었다.이윤미가 호탕하게 웃었다.“고 대표님, 우리 이씨 그룹이 귀사에 비해 조금 못하단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이씨 그룹도 강성에서 백 년을 이어온 명문가라서 뿌리가 깊어요. 저도 일부 프로젝트를 책임졌으니 어느 정도 발언권이 있어요. 고 대표님이 저와 협력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대표님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을 거고요.”이윤미와 그녀의 비서는 협상에 진전이 없을 거란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현에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다.이씨 그룹을 아무리 추켜세워도 고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자, 이윤미가 말했다.“고 대표님, 협력하지 않더라도 저와의 인연은 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비록 우리 이씨 그룹이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협력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요.”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게 될 거예요.”이씨 가문이 권력에서 물러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이씨 그룹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씨 가문이 고씨 그룹과의 협력을 이용해 힘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 고현은 협력하기 싫었던 것이었다.만약 이씨 그룹의 세력이 커진다면 하예진의 앞날이 더욱 험난해질 것 같았다.이윤미가 웃으며 말했다.“우리 이씨 그룹이 열심히 노력해서 하루빨
고빈은 몇 걸음 걷다가 고개를 돌려 이윤미를 쳐다보았다.한동안 보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감 넘치는 아우라를 발산하는 이윤미가 전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조금 전에 멈칫했던 것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애초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누나가 내게 소개해 줬을 때 거절하지 않았을 텐데.”고빈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물론 그녀에게 대시한다 해도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이씨 가문에 이윤미 같은 인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강인한 성격을 만들 수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상대를 방심하게 하여 허를 찌르는 데 능숙했다.고빈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이윤미처럼 가식이 많고 거짓말을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순수한 여자였다.‘이윤미 같은 여자는 형에게 적합해. 둘이 함께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해. 형이 이윤미를 높게 평가한 것을 감안할 때 둘이 충분히 한 쌍의 커플로 발전할 수 있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놀아나겠지. 아니구나. 난 형이 없잖아! 강성의 사람들은 내게 형이 없고 누나만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해.’자신과 인사하는 것만으로 고빈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 줄을 이윤미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이윤미가 비서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서자, 고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었다.“윤미 씨, 뭐 드실래요?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말할게요.”“따뜻한 물 한 잔이면 됩니다. 밤에 잠 못 잘까 봐 커피는 감히 마시지 못하겠네요.”고현은 두 사람을 소파에 앉으라고 말한 뒤 따뜻한 물을 따라주라고 자기 비서에게 지시했다.자리에 도로 앉은 고현이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저는 아침과 오후에 한 잔씩 마셔요. 습관 돼서 그런지 밤에 잠을 자는 데 별 지장은 없어요.”그녀는 보통 카페인이 효력이 사라진 자정이 되어서야 자는지라 걱정거리가 없는 한 수면에 큰 영향
“그러면 지금 바로 할머니께 전화할게. 퇴근 후 집에서 샤부샤부 먹겠으니, 집사에게 말하라고 말이야. 사람 좀 있어야 분위기도 나니까 이진 부부도 부를게. ”그러자 하예정이 말했다.“제가 할머니께 전화할 테니 당신은 가서 일 보세요. 아니면 오늘 밤 관성에 있는 사람 중 시간 있는 사람들을 와서 밥 먹으라고 가족 단톡방에 말 보낼게요. 하긴 사람이 많으면 시끌벅적하고 좋긴 하죠.”전태윤이 웃었다.“다들 바쁘니까 오지 못할 거야. 이진 부부만 불러.”“당신 말한 대로 할 테니 얼른 가서 일 보라니까요. 수중의 일부터 빨리 처리해야 나중에 그나마 수월해질 건데.”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한 전태윤은 야근하지 않고 퇴근 시간에 맞춰 아내와 함께 집으로 가려 했다.아내의 거듭된 재촉에 전태윤은 마지못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일을 시작했다.하예정은 할머니에게 전화하여 저녁에 전이진 부부를 불러 샤부샤부를 먹겠다고 말하자,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할머니는 당연히 기뻐하며 바로 승낙했다.강성, 이윤미가 타고 있던 차량이 고씨 그룹으로 향하고 있었다.차가 멈추자, 먼저 차에서 내린 이윤미의 비서는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이윤미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이윤미는 자신의 비서와 함께 사무실 건물을 향해 걸어갔다.수십 층에 불과한 이씨 그룹의 청사와 달리 중심상업지역에 자리 잡은 고씨 그룹의 청사는 강성의 모든 대기업 중 가장 높은 층수를 자랑했다.이미 오기 전에 고현에게 전화하여 프로젝트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이 있는지 물어본 후, 이윤미가 자신의 비서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었다.고현이 자신의 계획을 꿰뚫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윤미는 그래도 이씨 가문 딸의 신분으로 협력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다.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다시 사적으로 회사 대표의 신분으로 얘기해 볼 속셈이었다.고현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윤미는 잘 알고 있었다.그녀와 척을 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윤미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이 뻔했다.이윤미가 여러
전태윤의 뒷부분 말을 들은 소정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말하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지 넌 모를걸. 약속 지켜. 네가 회사로 돌아오면 날 며칠 쉬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네가 잊을 수 있으니 내가 계속 일깨워 주었을 뿐이야. 그리고 내년에 우리 효진이가 아이를 낳을 때 나에게 출산 휴가를 두 달 주기로 약속한 것도 잊지 마.”전태윤은 그를 꾸지람했다.“네가 아기를 낳는 것도 아닌데. 출산 휴가는 한 달이면 돼. 네 아내의 산후조리만 잘 돌보다가 바로 출근해. 게다가 너의 집에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산후조리가 끝나면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될걸. 내가 두 개월 휴가를 주는 것도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데 적게 줬다고 생각하다니.”소정남은 바로 반박했다.“예정 씨가 아기를 낳을 때 네가 매일 회사에 돌아와서 평소처럼 일할 수 있고 예정 씨의 산후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내가 출산 휴가를 한 달만 낼게. 내가 아기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난 남편으로서 효진이가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내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상황을 보면서 회사가 바쁘지 않으면 내가 3개월 휴가 줄게, 됐지?”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전태윤도 하예정이 출산하면 그녀의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산후조리 때 특별히 잘 보살펴야 한다.소정남은 재빨리 말했다.“예정 씨, 들으셨죠? 태윤이가 저에게 출산 휴가 3개월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하예정은 웃으며 대답했다.“들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증인으로 되어드릴게요. 태윤 씨가 반드시 약속 지킬 거예요.”심효진의 임신 기간이 하예정보다 길었기에 내년 5월쯤에 아기가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이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소정남도 그의 상사와 내년 출산 휴가를 미리 상의하고 있었다.소정남은 그제야 시름을 놓으며 일어나 전태윤에게 말했다.“그럼 난 먼저 돌아가서 일할게. 오늘 업무를 전부 처리해 놓아야 내일 휴가를 잘 보낼 수 있을 테니까.”이틀간의 휴가를 얻은 소정남은
“준하 씨와 소현 언니가 바래다주러 가셨어요.”소정남이 말했다.“온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벌써 가셨어요? 제가 음식 대접할 시간도 없었네요.”하예정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시간 있을 때 A시에 가서 식사 초대하면 되죠. 준하 씨가 이번에 관성으로 온 이유는 단지 용정이가 우빈이와 함께 놀게 하려는 것뿐이에요.”소정남은 전씨 가문의 대표 부인 앞에서 그의 고통을 호소했다.“제가 시간이 전혀 없었어요. 태윤이가 결혼 휴가를 내서 오늘에야 출근했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었어요. 제가 태윤에게 말할 틈이 없었는데 내일 제가 휴가를 내야겠어요. 좀 이따가 태윤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예정 씨가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제가 한 달 동안 푹 쉬지 못했거든요. 내일 휴가를 내는 것도 휴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효진이와 함께 임신 검사받으러 가기 위해서예요.”하예정이 흔쾌히 대답했다.“좋아요. 태윤 씨가 정남 씨의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제가 도와서 말씀드릴게요. 요즘 정말 수고 많으세요. 필요하시면 제가 태윤 씨에게 휴가 이틀 내주라고 설득할게요. 차라리 휴가 낼 필요 없이 내일 효진이와 함께 검사받으러 가세요.”전태윤 부부가 결혼식 후 편안한 신혼여행을 보내게 되었다. 비록 관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소정남이 전태윤의 업무량을 분담한 덕이다.이제 전태윤이 회사로 돌아왔으니 적절한 시기에 가장 바삐 돌아쳤던 소정남을 쉬게 해야 했다.소정남이 대답했다.“이틀 쉴 수 있다면 더없이 좋죠. 날씨도 추워졌는데 효진이가 샤브샤브를 먹고 싶어 하더라고요. 제가 줄곧 데리고 나갈 시간이 없었어요. 집에서 먹을 수는 있지만, 저의 사촌 누나가 자꾸 잔소리를 늘어놓으셔서 먹는다고 해도 효진이가 불편해해서 늘 나가서 먹고 싶다고 했거든요. 내일 함께 검사를 받고 저녁에 샤브샤브 먹으러 가야겠어요. 효진이가 임신한 뒤로 뭐 먹고 싶을 때마다 즉시 입에 넣고 싶어 하던데 예정 씨도 그
우빈은 형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동생들을 사랑할 줄 알았다.“내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서너 살밖에 안 되는데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하예정은 웃으며 우빈을 안았다.우빈은 뚱뚱하지 않다.녀석은 정말 졸렸는지 하예정에게 안긴 지 2분도 안 되어 금세 잠이 들었다.30분 후, 차 두 대가 전씨 그룹으로 들어섰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려고 생각했지만 고민 끝에 그를 놀라게 해주기로 했다.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저녁에 퇴근할 때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언제 올지는 알려주지 않았다.지금 앞당겨 도착한 그녀는 갑자기 그의 사무실에 갑자기 나타나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했다.심효진은 부부가 함께 지내면서 때때로 상대방에게 서프라이즈 해주면 부부 감정을 두텁게 해준다고 말한 적 있다.소설을 많이 본 성소현은 서프라이즈를 해주는 능력이 하예정보다 더 대단했다.하예정은 성소현에게서 이런 것들을 많이 배웠다.“사모님, 제가 우빈을 안아드릴게요.”경호원은 하예정의 품에서 우빈을 안아오려고 했다.그러나 하예정이 거절했다.“괜찮아요. 제가 안으면 돼요. 1층에서 기다리세요. 만약 볼 일이 있으면 먼저 가서 일을 보셔도 돼요. 태윤 씨가 퇴근하기까지 기다려야 하거든요.”그녀는 남편의 차를 타고 집에 가도 된다고 생각했다.경호원은 공손히 대답했다.“다른 개인적인 일은 없습니다. 큰 사모님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하예정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호원들과 함께 회사 안으로 건물로 들어섰다.들어가는 길에 하예정을 본 직원들은 전부 예의 바르게 그녀에게 인사했다.하예정은 우빈을 안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고 경호원들은 1층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하예정과 우빈을 싣고 곧장 맨 위층으로 올라갔다.우빈은 너무 정신없이 놀고 피곤한지 아주 달콤하게 잠들었다. 아마 깨우지 않으면 어두워질 때까지 잘 수 있을 것이다.전태윤은 하예정이 일찍 도착할 줄은 몰랐다.전태윤의 비서가 대표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모연정도 맞장구쳤다.“맞아요. 용정은 가끔 혼자 놀 때 아무도 그를 보고 있지 않고 인기척을 듣지 못할 때 용정을 찾아가 보면 분명 사고를 치고 있는 거예요. 한 번은 녀석이 제 립스틱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니까요.”성소현은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가장 많이 접하는 아이가 바로 우빈이였다.성소현은 우빈이가 항상 철이 들고 귀엽고 총명하다고만 느꼈지,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그녀의 눈에는 어린아이들이 전부 천사로 보였다.성소현의 친조카처럼 막 태어났을 때는 그다지 예뻐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갈수록 예뻐지고 있다.그녀는 친조카의 성장 다큐멘터리를 찍어준다며 매일 조카의 사진을 몇 장씩 찍어두었다.다만 눈물이 좀 많을 뿐이다.배가 고프면 울고 응가 해도 울었다. 말을 못 한 탓으로 아기는 입만 벌리면 울었다.모연정과 하예정은 잠시 아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예지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쌍둥이가 깨어난 것을 보자 모연정은 일어나서 아들을 안으러 갔다.딸은 이미 예준성에게 안겨 있었다.예준성은 한 손으로 딸을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었는데 예준하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말했다.“형, 내가 도와줄게. 내가 지연이 안아줄게.”예준성은 캐리어를 예준하에게 건네면서 말했다.“캐리어를 밖으로 끌고 나가서 차에 실어줘. 이따가 우리를 서원 리조트로 데려다줘.”그들의 개인 비행기는 서원 리조트에 주차되었다.예준하의 별장에는 예준하 부부의 개인 비행기를 주차할 수 있는 큰 공간이 없다.예준하는 입을 삐쭉 내밀면서 중얼거렸다.“지연이를 안고 싶은데 자꾸 캐리어만 끌게 하다니. 곧 돌아갈 거면서 지연이를 안지도 못하게 해. 살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중얼중얼하던 예준하는 결국 예준성을 도와 캐리어를 끌어갔다.예준성은 딸을 안고 하예정 자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연정이 예지호를 안고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모연정에게 말했다.“연정아, 가자. 용정은?”“밖에서 우빈이와 놀고 있어요. 나가서 불러오면 돼
하예정은 갑자기 점쟁이가 자신과 전태윤의 결혼을 지지하면서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 거라고, 아들딸을 낳을 거라는 말을 떠올렸다.만약 하예정이 딸을 낳으면 과연 잘 자랄 수 있을까?만약 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처럼 딸을 낳아도 잘 키울 수 없다면 그녀는 아이를 낳지 않을지언정 아이가 자신의 앞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서원 리조트의 풍수에 문제가 있는 건가!그러나 점쟁이는 리조트의 풍수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점쟁이는 서원 리조트의 풍수 구조가 사업과 자식들이 번창할 것이라고 말했다.“예정아,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아.”하예정의 안색이 변한 것을 유심히 본 성소현이 걱정스레 물었다.“내가 전씨 가문에서 대대로 낳은 딸이 세상을 뜨는 일을 언급해서 그래? 걱정하지 마. 네 뱃속의 이 아이는 틀림없이 아들일 거야. 우빈이가 말했듯이 네 배 속의 아기는 남자 아기일 거야. 게다가 네가 딸을 낳았다고 해도 현재 의학이 발달하고 임신 중에 그렇게 많은 임신 검사를 받을 수 있어서 분명 건강하게 자랄 거야. 태윤 씨 조상들의 일은 옛날얘기잖아. 청나라 말기 때 의학 기술이 얼마나 뒤처졌는데, 감기에 걸리기만 해도 사람 목숨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시기잖아.”고대 궁안의 생활도 아주 좋았지만 죽은 아기들도 얼마나 많았던가!말을 마친 성소현은 일부러 하예정의 어깨를 감싸며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너도 태윤 씨에게 딸을 낳을 만큼 그렇게 좋은 팔자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을걸. 너희들은 아들을 낳을 운명인 거지. 안 좋은 일은 생각하지 마. 너 놀란 것 좀 봐. 잘 들어. 내가 아기에게 준비한 선물들은 전부 남자아이 물건들이니까 꼭 아들을 낳아야 해.”하예정은 겨우 마음을 안정시켰다.아직 딸을 낳지도 않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걱정할 필요 없었다.게다가 점쟁이는 하예정이 아들딸을 낳을 운명이라고 했기에 그녀가 딸을 낳는다고 해도 반드시 건강하게 키워 안전하게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혹은 둘째를 가
하예정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용정을 예준하 곁으로 먼저 보냈다. 예준성 부부는 관성에 온 뒤로 줄곧 예준하의 별장에 머물렀다.예준하의 집에 도착하여 용정을 모연정 부부의 손에 넘겨주고 나서야 하예정의 긴장했던 신경이 풀리기 시작했다.“아줌마, 저 여기서 좀 더 놀 수 있을까요?”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우빈은 아쉬워하며 용정과 한 시간이라도 더 놀고 싶어 했다.우빈이가 입을 열었다.“용정이가 이번에 떠나게 되면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저랑 놀 수 있거든요.”하예정은 모연정을 쳐다보았고 모연정이 말을 건넸다.“저희도 짐을 정리해야 해서 30분 정도 있다가 집으로 갈 거예요. 두 아이를 30분만 더 놀게 해요. 용정도 우빈이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지만 이렇게 계속 놀게 할 수는 없잖아요. 너무 신나게 놀면 마음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워져요.”“그러게요. 정신없이 놀다 보면 자꾸 놀 생각만 하고 유치원은 가기 싫어질 거예요. 용정과 비교되지 않았다면 우빈은 아마 그의 사촌 이모처럼 강제적으로 차에 태워야 했을걸요.”성소현이 어렸을 때 유치원에 다니는 것을 꺼린 사실이 언급되자 모연정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성소현은 예준성 부부를 배웅하러 왔는데 하예정이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얼굴을 붉히며 하예정을 가볍게 때렸다.“예정아, 너 정말 못된 것만 배운 거 아니야? 누가 어릴 때 유치원에 가고 싶었겠어?”하예정은 히죽히죽 웃었다.“저는 아마 가기 싫어한 적 없을걸요. 어쨌든 우리 부모님께서 내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 가기 싫어했다는 말씀하신 적 없었어요. 우리 언니도 말 한 적 없는걸요.”하예정은 유치원에 간 기억이 없지만, 하예진이 5살 연상이라 하예정이 유치원에 가기 싫어한 경험이 있으면 그녀에게 말했을 것이다.“우빈아, 얼른 놀아. 시간이 30분밖에 없어. 우리 모 아줌마를 배웅해 드려야 해. 그리고 이모부 회사로 가서 이모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가서 밥 먹자. 오늘 실컷 놀고 내일부터 유치원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