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초는 담담하게 말했다.“이진아, 우리가 무슨 사이인 것도 아니잖아. 내가 누구와 만나든, 누구와 친하게 지내든 모두 내 자유야. 네가 날 많이 도와준 건 사실이지만 내 교제에 관여할 자격은 없지 않아? 난 널 그저 아는 친구로 생각할 뿐이야.”“아는 친구? 그냥 아는 친구일 뿐이라고?”전이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여운초, 너 지금 일부로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어? 내가 널 약혼녀로 생각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한 후부터 넌 나를 피하며 전화도 받지 않았어. 게다가 지금은 다른 남자와 알콩달콩 지내고 있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여운초는 여전히 평온했다. 그녀는 전이진의 손을 몸에서 떼어낸 후 카운터로 물러섰다. 카운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 훨씬 안정감이 느껴졌다.겉으로는 담담해 보이지만 사실 지금 속으로 약간 당황하고 있다.그녀도 본인이 왜 당황하고 있는지 몰랐다.뭔가 전이진에게 미안한 일을 한 것만 같았다.하지만 둘은 연인 관계도 아닌데 이런 일로 미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다만 전이진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이진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이 한마디야. 내가 누구랑 만나든, 왕래하든 모두 내 자유야. 그래, 네 할머니가 나를 아주 맘에 들어 하셔서 날 너의 아내감으로 선택했다는 거 알아. 다만 날 약혼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단지 네 생각뿐이잖아? 나도 널 똑같이 약혼 상대로 생각할 거라고 착각하지는 마. 난 기껏해야 널 평범한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아. 이때까지 도와준 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보답으로 밥을 사줬잖아. 그리고 널 피한 게 아니야. 그냥 휴대폰과 번호를 바꿨을 뿐이야. 널 피하고 싶었으면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어, 진작 가게 문을 닫고 떠났을 거야.”전이진은 그녀를 노려봤다.여운초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그녀를 필사적으로 노려봤자 소용없었다. 어떻게 째려보든 그녀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줄도 모른다.“어젯밤 나랑
여운초가 자신을 피가 날 정도로 물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었다.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얼얼하게 아파 났다.여운초가 힘껏 휘두른 손에 전이진은 뺨을 한 대 단단히 얻어맞았다.그녀는 느낌으로 손을 휘둘렀던 것이다.전이진의 뺨을 때린 후 여운초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물건을 아무거나 집어 들어 그를 향해 내리쳤다.전이진은 그녀가 자신을 때리도록 놔두었다. 어쨌든 아프지 않으니.다만 그녀가 지팡이를 움켜쥐고 그를 향해 때리자 전이진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피했다.“운초야...”“나가!”이젠 여운초가 화를 내게 됐다.그녀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지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여운초는 전이진이 정직한 사람이라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이렇게 강제로 키스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눈이 안 보인다고 마음대로 괴롭히다니.열받아 죽을 지경이였다.“운초야, 나...”전이진은 자기가 충동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해명하고 싶어도 해명할 길이 없었다.“나가! 전이진, 너 당장 나가!”그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지금 서 있는 방향을 확인한 여운초는 지팡이를 내던졌다.전이진은 민첩한 몸놀림으로 그녀가 던진 지팡이를 받았다.“알았어, 나갈 테니까 물건 던지지 마. 그러다 다쳐. 갈게, 당장 나갈게.”여운초가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미칠듯한 모습을 보이자 전이진은 얼른 지팡이를 들고 떠났다.그녀는 그의 발소리가 밖으로 향하는 것을 듣고 그가 차를 몰고 떠나는 기척까지 듣고서야 털썩 주저앉아서 손을 들어 힘껏 입술을 닦았다.“개자식!”여운초는 욕을 한마디 뱉었다.그러고는 눈물을 닦았다.‘울지 마!’그녀도 한입 물어 그의 입에서 피가 나게 했으니 그에게 복수한 셈이었다.여운초는 앞으로 다시는 전이진을 상대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전이진이 그녀를 와이프로 생각했든 말았든 그건 그만의 생각이지, 그녀는 결코 그를 남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따지고 드는
혼자 서점을 지키던 하예정은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전이진이 찾아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하예정은 일어서서 카운터에서 나오며 물었다.“이진 씨, 무슨 일 있었어요? 입술도 얼굴도 왜 이렇게 부었어요? 누구랑 싸운 거예요? 진 거예요? 못 이기겠으면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그랬어요.”하예정의 잇따른 물음에 전이진은 얼굴이 빨개졌다.싸움에서 진 거면 형수님에게 도와달라고 하라고?그의 싸움 실력은 하예정보다 훨씬 좋았다.“형수님, 이번엔 꼭 도와줘야 해요.”“당연하죠. 이 하예정의 시동생을 이렇게 때리다니. 이진 씨 형은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참아요. 누가 이렇게 때렸는지 말해봐요. 내가 가서 혼찌검을 낼 테니까요.”하예정은 말하면서 의자를 전이진의 뒤로 끌어왔다.“일단 앉아서 천천히 말해요. 물 마실래요? 잘됐어요, 오랜만에 몸을 풀고 싶던 참이었어요.”하예정은 전이진에게 물을 따라주었다.전이진은 형수가 왠지 신이 난 듯한 모습으로 관심해 주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누구랑 싸운 게 아니에요.”만약 다른 사람과 싸워서 진 거면 불러도 형제들을 불렀지 형수를 부를 리가 없었다. 비록 형수가 싸움 좀 할 줄 안다고 해도 말이다.하예정은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 전이진에게 가져다주고는 자신도 의자를 하나 끌고 와 맞은편에 앉아 관심 있는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말해봐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걱정 마요, 도와줄 수 있는 건 꼭 도와줄 테니. 이번뿐만 아니라 나중에라도 손해 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내 뒤엔 태윤 씨도 있는걸요. 겁먹을 필요 없어요.”하예정은 형수로서의 믿음직함이 있었다.시동생이 손해를 보기만 하면 바로 대신해 갚아줄 듯한 모습이었다.전씨 일가은 아홉째 도련님은 제일 똑똑했다. 그는 하예정을 처음 보자마자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큰형이 형수님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보고는 괴롭힘을 당하기만 하면 형수를 찾아가 고자질하곤 했다.전이진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형수의 흥취 가득한 모습
전이진과 여운초는 서로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정도로 발전하게 된 것에 하예정은 진척이 꽤 빠르다고 탄복했다. 동생은 남편보다 사랑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얼굴이랑 입술이 부은 것을 보니까 키스는 운초 씨 동의 없이 한 거네요? 그리고 운초씨가 뺨을 때린 거고요, 맞죠?”하예정의 눈은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그녀는 경험해 온 사람으로서 전이진의 지금 모습을 보고 바로 짐작이 갔다.강제 키스를 한 것이라고.전이진은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는 말하지 않았다.묵인한 셈이었다.하예정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형수님. 저를 도와준다고 했잖아요.”전이진은 하예진이 그를 돕지 않으려 하는 줄 알고 긴장한 말투로 말했다.그에 하예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마음 가라앉히러 물 마시러 가는 거예요. 이진 씨 말에 좀 놀라서요.”“....”그녀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르고는 물을 마시며 걸어와 다시 전이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물을 마시며 전이진을 천천히 훑어봤다.전씨 일가의 가풍은 좋아서 누구나 교양이 넘쳐났다.이건 그녀가 시댁 식구들에 대한 평가이다.전이진은 차갑고 거만한 전태윤과는 달리, 너무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훨씬 온화했다.이 정도로 강하게 나올 줄이야... “형수님...”“이진 씨, 이 정도로 밀어붙이는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전이진은 얼굴이 빨개졌다.“그건 충동적인 행동이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그만... 운초는 지금 제 전화를 받지도 않고 저와 만나는 것도 거부하고 있는데, 아까 가게에 가보니 마침 다른 남자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어요. 그 남자가 다정하게 운초의 이마를 손으로 쓰다듬는 걸 직접 봤어요.”전이진은 여운초에게 강제 키스를 한 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었다. 정말 순간의 충동으로 행동한 것이다.정확히 말하면 질투였다.그 낯선 남자에게 말이다.그보다 더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사업에서 꽤 성공한 남자인 듯싶었다.“운초 씨에게 강
하예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전이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면 진실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을까요? 할머니가 정해준 아내감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고 계속 속이는 편이 더 좋았을까요?”그는 하예정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형처럼 속이고 있다가 들통나면 더 화낼까 봐 솔직히 말한 거였는데...”전이진은 형과 같은 고생을 겪고 싶지 않아 여운초를 속이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다.‘솔직하게 말해도 안 되는 걸까?’“...그 뜻이 아니고요, 그렇게 바로 말하면 운초 씨가 순수하지 않다고 느낄지도 몰라요. 단지 할머니가 이진 씨에게 맡긴 임무를 완수하려고 그러는 거로 생각할걸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요. 이진 씨가 운초라면 기분이 좋겠어요?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본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요. 아무리 여씨 일가의 큰 아가씨라지만 집안에서는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는걸요. 그래서 다른 집안의 사모님들은 며느릿감을 찾을 때 운초 씨를 아예 고려하지 않아요. 게다가 시각장애인이니 더 자신감이 없을 거예요. 이진 씨와 아직 친하지도 않고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호감이 있더라도 한계가 있어요. 이때 사실대로 말하면 당연히 거리를 둘 수밖에 없죠.”전이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말했다.“하지만 할머니가 주신 임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근한 건 사실이잖아요. 할머니가 자기 생각대로 선택해 줬고 전 이해가 안 됐지만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는 일이라 접근하기로 한 거예요. 어차피 좋아하는 여자가 없으니 할머니가 누굴 택하면 누구랑 결혼하는 거죠.”하예정은 전이진을 흘겨보며 말했다.“이런 생각이면서 운초 씨에게 강제로 키스를 한 거예요?”“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니까 화가 나서 그만...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하예정의 매서운 눈길에 전이진의 당당함은 점점 누그러졌다.“이진 씨는 운초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질투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거고요. 우선 먼저
하예정은 말했다.“그러면 된 거예요. 지금 당장 꽃필 무렵으로 가요. 뻔뻔하게 굴어서라도 제대로 사과해요. 할머니가 골라준 아내감이라는 말은 절대 언급하지 말고요. 이진 씨의 진심 어린 마음을 느끼게 해 줘요. 함께 심효진의 약혼식에 참석한 것을 보면 이진 씨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다는 걸 설명해요. 그러니까 운초 씨에게 임무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줘요. 운초 씨도 언젠가는 이진 씨를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거예요.”전이진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운초 씨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매우 예민할 거예요. 조금이라도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해요.”“싫어한 적 없었어요. 단 한 번도.”하예정은 그에 가볍게 응했다.전이진은 여운초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한 적이 없었다. 단지 할머니의 지시에 따를 생각이었고 마음을 바로잡지 못했을 뿐이다.“그러면 지금 당장 운초를 찾아가 사과하겠어요. 나를 만나려 하지 않으면 용서할 때까지 가게에서 떠나지 않을 거예요.”전이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일어서서 가려 했다.하예정은 그에게 물었다.“먼저 얼음찜질로 부기를 가라앉힐래요?”전이진은 자신의 부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얼마나 찜질해야 부기가 빠질지 몰라요. 어차피 운초는 내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괜찮아요. 마음 아파하지도 않을 텐데요 뭘.”그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형수님, 고마워요. 당장 꽃필 무렵으로 갈게요. 형에게 대신 휴가 좀 내주시겠어요? 직접 휴가를 냈다가는 혼날까 봐요.”이 일에 대해 하예정은 기꺼이 도와줬다.감정 적응기에 전태윤도 많은 일을 소정남과 전이진에게 떠넘겼었다.이젠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되었다.“앞으로 여자를 대할 때 더 신중해야 해요!”하예정은 한마디를 보탰다.전이진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한 번 한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사람이다.“그러면 이만 가볼게요.”“그래요. 학생들도 곧 수업이 끝
전태윤은 이에 응하며 이어서 말했다.“점심 배달시키지 마. 도시락 가져다줄 테니까 같이 먹자.”하예정은 서점에 혼자 있었다. 전태윤은 아내가 배달 음식을 먹는 것이 마음이 아파 진작에 관성 호텔에 전화해서 음식을 주문해 경호원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점심에 음식을 가지고 서점에 가서 같이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알았어요, 배달 안 시킬게요. 먼저 일하고 있어요, 학생들 수업이 끝나서 저도 바빠질 거예요.”하예정은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전태윤은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보며 투덜거렸다.“안녕이라고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네.”하예정은 바빠지기 시작했고 전태윤도 하던 일을 끝내고 사무실을 떠났다.경호원은 방금 호텔에 가서 도시락을 가져오는 길이었다. 전태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마중 나갔다.몇 분 후, 전태윤의 차는 전씨 그룹에서 떠났다.10분 일찍 떠나 아직 길이 막히지 않아 곧 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전태윤이 서점에 도착했을 때 하예정의 서점에는 여전히 물건을 사고 있는 학생이 있었다. 웬 학생이 하예정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예정 언니, 며칠 동안 효진 언니가 안 보이는데 어디 갔나요?”학교 주변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사장 중 젊은 사장은 하예정과 심효진뿐이라 학생들은 대부분 그녀들을 친절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얼굴도 이쁘고 매우 친절해 학생들은 수업이 끝날 때면 하예정네 서점에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효진 언니는 오늘 중요한 일을 보러 가야 해서 시간이 없어. 아마 두세 달 동안은 내가 혼자서 가게를 지키게 될 거야. 왜, 효진 언니가 보고 싶어?”그녀는 돈을 계산하면서 학생들을 놀렸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할인을 해주었다.“그렇게나 오래요? 그러면 다음 학기에나 효진 언니를 만날 수 있겠네요. 당연히 보고 싶죠. 요 며칠 문을 안 열어서 엄청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그리워한 것을 봐서 좀 싸게 해줘요.”“정말 우리를 보고 싶어 한 줄 알았잖아, 할인해달라는 거였네. 걱정 마,
하예정은 테이블을 깨끗이 닦았다.전태윤이 가져온 음식들을 보고 그녀의 마음은 꿀을 먹은 듯 달콤해 났다. 남편은 언제나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준비해 오곤 했다.“이진이가 와서 뭐라고 했어? 무슨 사고를 쳤길래?”전태윤은 아내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호기심에 물었다.“운초 씨에게 엉뚱한 짓을 해버려서 제가 가서 사과하라고 했어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말해줬어요.”하예정은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이 일은 전이진과 여운초의 개인적인 일인 데다가 전이진이 그녀를 믿기에 알려준 것이라 더 이상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전태윤에게조차도 말하지 않으려 했다. 이후에 여운초가 시집오게 되면 전태윤을 보기 부끄러워할까 봐 걱정되었다.아내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전태윤도 예전에 아내에게 강제 키스를 한 적이 있었기에 곧 짐작이 갔다.하지만 아내의 생각을 눈치채고 더 이상 이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전태윤 부부가 점심을 먹고 있는 시간에 노동명은 퇴근 시간을 이용해 병원에 갔지만 하예진의 병실 앞에 한참을 서성이면서 들어가지 않았다.전씨 가문의 경호원이 물었다.“노 대표님, 들어가시겠습니까?”“아뇨, 예진이는 어때요? 좀 좋아졌어요?”“회복이 잘 돼서 이제는 침대에서 내려와 조금씩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퇴원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하예진 모자의 하루 세 끼 식사는 박 아저씨가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했다. 모두 영양사가 짠 식단에 따라 준비한 것이라 하예진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됐다.이경혜도 자주 보신 수프를 가져다주곤 했다.김은희도 자주 보내왔지만 매번 도로 가져가게 했다.오늘은 왠지 주씨 일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그러면 됐어요. 모르는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게 잘 지켜줘요.”노동명은 경호원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 돌아섰다.전씨 일가의 경호원들은 노동명의 거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특별히 찾아와서는 병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하예진에게도 자신이 온 걸 알리지 않았다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