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에서 분주한 시간을 보낼 때 전태윤은 푹 자고 일어나 눈도 못 뜬 채 몸을 기울이고 팔을 뻗어 아내를 끌어안으려 했는데 옆자리가 텅 비었다.그제야 눈 떠보니 아내가 집에 없었다.해가 중천이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벌써 아홉 시였다.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아무리 주말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오래 자본 적은 없다.어젯밤에 너무 늦게 돌아와서 그런 걸까?전태윤은 부랴부랴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일부러 하예정이 사준 옷으로 입었다.방문을 열자 숙희 아주머니가 고양이와 함께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문 여는 소리에 아주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깨셨어요 도련님. 아침 준비해 드릴까요?”“벌써 아홉 시네요.”전태윤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왔다.“그래도 아침은 드셔야죠. 사모님께서 신신당부하셨어요. 도련님 깨시면 무조건 아침 차려드리라고요.”“예정이는요? 언제 깨난 거죠? 언제 나갔대요?”전태윤은 기분이 살짝 언짢았다.주말에 집에서 휴식하는데 아내가 아침 일찍 가버렸으니.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서 함께 아침 먹는 게 정상 아닌가?왠지 아내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숙희 아주머니가 대답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리고 하예정이 돌아왔다.“깼어요 태윤 씨?”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며 남편과 인사했는데 의외로 전태윤이 시큰둥한 얼굴로 몸을 홱 돌리고는 방에 돌아갔다.아침 댓바람부터 남편을 내팽개치고 나가더니 돌아와서 문 열자마자 또 이름을 부르다니, 남편이라고 해야지!아내에게 버림받아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는데 인제 더 불쾌해져서 방에 돌아갔다.전태윤이 삐졌다.하예정은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진 못하고 어리둥절해서 아주머니께 물었다.“아주머니, 저이 왜 저런대요? 누가 잘못 건드렸어요?”숙희 아주머니는 전태윤이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걸 보더니 실소를 터트리며 대답했다.“사모님 때문에 삐지신 것 같네요.”“네?”하예정은 이해가 안 갔다.“난 아침 일찍 나가서 태윤 씨 심기를 건드릴 새도
하예정은 허리 숙여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사모님, 일단 도련님부터 달래보세요. 이제 막 깨어나 아침도 안 드셨어요.”숙희 아주머니도 도련님이 갑자기 삐질 땐 어쩔 바를 모른다.이리로 오지 않았다면 도련님이 이토록 속 좁은 모습도 전혀 모를 것이다.하예정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아주머니께 물었다.“뭣 때문에 화났는지는 알아야 달래죠. 나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아주머니가 나지막이 말했다.“아침 일찍 나가신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주말에 도련님이 집에서 쉬시니 사모님이 옆에 함께 있어 주길 바라셨나 봅니다.”“난 언니 가게 돌봐주러 간 건데. 오늘 주말이긴 해도 공장은 휴일이 없어요. 잔업 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게가 여전히 분주해요. 아침 일찍 나갔다가 지금도 일찍 돌아온 셈인데, 10시도 채 안 돼서 돌아왔잖아요.”전태윤이 이렇게 사소한 일로 삐질 줄이야, 하예정도 숙희 아주머니도 어이가 없었다.“일단 한번 들어가 볼게요.”제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하예정이기에 마지못해 고양이를 안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아주머니는 고양이를 안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게 생각났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도련님이 더 화내시겠네.’하예정은 고양이를 안고 안에 들어갔다. 전태윤은 문을 등지고 창가 쪽에 서 있었다.인기척을 들었지만 몸을 돌리지 않았고 하예정이 가까이 다가와서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뭐 봐요?”전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녀를 쳐다봤는데 옆에 고양이가 안겨있자 미간을 확 찌푸리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여보.”하예정이 뒤따라갔다.“나 깨났을 때 당신 자고 있었어요. 평소에 일하느라 바쁜데 주말엔 늦잠 자게 놔두려고 안 깨운 거예요. 내가 뭐 이상한 데라도 갔나요. 언니 가게 가서 거들어준 것뿐인데. 당신 깬 줄 알고 얼른 돌아왔어요. 언니 가게는 여전히 바쁜데 당신이 깨나서 나 없다고 뭐라 할까 봐 부랴부랴 달려왔다고요.”하예정이 따라오며 해명했다.전태윤은 걸음을
“할머니께서 언제 돌아오실까요? 갑자기 생각나네요.”하예정은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날들을 매우 그리워한다.“제가 알려드리기도 전에 사모님께서는 이미 문을 열고 들어가셨어요.”숙희 아주머니의 말에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전 가서 손 좀 씻고 올게요.”그녀는 손을 두 번 씻은 후 다시 예전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옷장에서 깨끗한 옷을 한 벌 꺼내 갈아입고 나서야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다.“여보, 손도 두 번 씻고 옷도 갈아입었어요. 이제는 고양이 털이 아무 데도 없을 거예요.”그녀는 남편의 뒤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여보, 미안해요, 방금 고양이를 안고 있다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난 얘네들이 정말 귀여워요, 특히 당신이 나한테 선물한 거잖아요. 당신이 선물한 거라면 난 다 좋아요. 당신도 내가 선물한 거라면 다 소중히 간직하잖아요, 나도 마찬가지예요.”전태윤은 여전히 머리를 돌리고 아내를 쳐다볼 생각이 없었다.“잠에서 깼는데 당신이 보이지 않아서 숙희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일찍 나갔다는 거야. 그때 버림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리고 금방 돌아왔을 때도, 여보가 아닌 내 이름을 불렀잖아.”“여보, 여보, 자기야. 이제 됐죠? 화내지 마요.”그녀는 그를 향해 몇 번이나 여보라고 불렀다.“그리고 당신도 몇 번이나 한밤중에 나갔잖아요. 난 당신이 나가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한테 몇 번이나 버림받았는지 모르는 셈이네요.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당신한테 화를 내지 않았고, 나에 대한 사랑을 의심한 적도 없었어요.”“내가 괜히 화낸다는 거야?”그녀는 그의 허리에서 손을 떼더니 그의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띠고 말했다.“아닌걸요?! 하지만 당신은 항상 자기 생각만 고려하고 있죠.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내 생각은 고려 안 하네요. 내가 언제 당신이랑 정말로 따진 적이 있나요? 매번 갈등이 생긴 게 다 당신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는지 잘 생각해 봐요.”“한밤중에 나간
“우리 모두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은퇴한다고 해도 매일 깨어나 눈 뜨면 서로를 보게 된다는 보장은 없어요.”누군가는 먼저 일어나고 누군가는 뒤에서야 깨어나게 된다.전태윤은 자신이 막무가내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숙희 아주머니가 당신이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다고 하던데, 배고프죠? 우리 얼른 가서 먹어요, 내가 옆에 같이 있을게요.”그녀는 자기 생각을 솔직히 터놓은 후 그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동적으로 화제를 바꾸었다.서로 따지려고 하면 화목한 부부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그래.”그는 품에 안고 있던 예쁜 아내를 놓아주었다.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안방을 나갔다.숙희 아주머니는 일찍이 도련님의 아침을 테이블 위에 차려 놓았다.도련님은 성격이 소심하지만, 사모님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타협할 뿐이다.그래서 숙희 아주머니는 자신이 차린 아침 식사가 낭비될까 봐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우빈이는 데려오지 않았어?”그는 아내가 옆에 있어 주자 기분이 좋아져서 더 이상 차가운 표정을 짓지 않고 꼬마에 관해 물었다.“언니가 오늘은 일찍 문을 닫고, 우빈이를 데리고 가게에서 좀 놀다가 이따가 집에 데려가겠다네요. 태... 여보, 우리 우빈이를 데려와서 사는 건 어때요? 그래야 우리 언니도 좀 편하고 우빈이도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은데...”“나야 전혀 의견이 없지. 내가 우빈이를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그도 꼬마가 늘 처형을 따라 일찍 일어나면 수면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그렇게 어린아이가 잘 못 자면 성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처형은 어떻게 생각해?”“원래 언니와 우빈이 모두 데려와 함께 살려고 했는데, 언니가 거절했어요. 예전에도 거절했는데, 지금도 거절하네요. 언니는 항상 우리 부부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우빈이만 데려올 수밖에요.”“처형은 독립심이 강한 여자야. 비록 몇 년간 결혼생활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우리
하예정은 다시 한번 자신의 행운을 한탄했다. 비록 남편이 때때로 성질을 부리기를 좋아하지만, 그녀에게 매우 잘 대해준다. 절대 가정 폭행을 하거나 바람을 피울 염려가 없다.주로 전씨 일가의 가풍이 좋아서다. 전씨 일가처럼 개방적이고 너그러운 시댁은, 상류층에서 아주 드물다고 할 수 있다.그때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한테 절대 나쁜 손자를 소개시켜 주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사실, 할머니의 손자들은 모두 매우 훌륭하다.다만 전태윤이 맏이라 제일 우선으로 소개해 줬을 뿐이다.“노씨 사모님은 이미 동명 씨를 도와 아내감을 물색해 놓았어요. 손은경이라고 젊고 예쁘고 야무진 모습이라 한눈에 봐도 좋은 가정 출신의 아가씨였어요. 게다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딱 노씨 사모님의 마음에 든 것 같은데요?”“알고 있어. 동명이도 노씨 사모님이 계속 손은경과 이어주려 하자 귀찮아서 우리한테 찾아와 살게 된 거야.”그는 단지 여태 그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알 필요도 없었다.그는 자기 아내의 이름만 똑똑하게 기억하면 되었다.“아, 그 여자가 바로 손은경 씨였나요? 난 또 사람이 바뀐 줄 알았어요.”“노씨 사모님은 눈이 워낙 높아 비록 동명의 혼사를 걱정하고는 있지만 결코 자기 아들이 보통 여자를 찾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며느리를 찾는 게 아니라 세자빈을 고르는 거지. 우리 관성의 부잣집 아가씨들 중 노씨 사모님의 눈에 들만한 아가씨는 몇 명 되지 않아.”노씨 사모님의 눈에 드는 가문에 맞춤한 딸아이가 없지 않으면, 결혼 적령기의 딸은 있지만 가문의 조건이 적합하지 않은 게 대부분이었다.노씨 가문은 관성 최상류의 명문가일 뿐만 아니라, 노동명 본인도 능력도 있고,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또한 앞으로 가족으로부터도 많은 유산을 물려받을 테니 얼마나 많은 재산을 쌓을지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그러니 노씨 사모님의 며느리에 대한 요구도 높을 수밖에 없다.만약 전씨 일가에 결혼 적령기의 딸이 있었더라면, 노씨 사모님은 가장
“아무래도 노씨 사모님은 우리 언니가 동명 씨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손은경의 사진을 가지고 가서 언니에게 보여준 것 같아요. 하지만 언니는 동명 씨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어요. 현재는 가게 일에만 전념하며 돈 벌 생각뿐일걸요.”전태윤도 처형에 대해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만약 처형이 동명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더라면 노씨 사모님은 처형이 계속 가게를 열게 놔두지 않을 거야.”그녀도 남편이 한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노씨 사모님은 분명 언니를 떠보러 갔다. 다행히 언니는 아직 아무것도 눈치 못 챈 모양이고,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것 같았다.“여보, 언니한테도 이 얘기 알려줘야 할까요?”“노씨 사모님이 아무 행동도 없었다는 것은 우리처럼 의심만 하고 있다는 뜻이야. 언니한테 가서 뭐라고 할 필요 없어. 이제 내가 동명한테 앞으로 자주 처형 가게에 가서 아침 먹지 말라고 말할게.”전태윤은 속으로 친구에 대해 불평했다.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닌데, 하필이면 매일 아침 일찍 처형의 가게에 갈 필요가 있을까?“알았어요.”남편이 식사를 끝내자,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보,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요?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그는 귀엽다는 듯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좋아, 너무 많이 먹어서 산책 좀 해야겠어. 당신같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산책해.”“넵, 나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하하하!”숙희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부부가 산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하예정은 원래 봄이도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옆에 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결국엔 따라 나가고 싶어 하는 봄이를 집에 남겨두었다.밖으로 나오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였다.애완동물과 가까이하는 것이 싫은 전태윤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아내를 데리고 멀리 비켜섰다. 그들 부부의 행동에 산책하는 사람들은 쑥스러운지 거듭 말했다.“우리 집 강아지는 사람을 물지 않아요.
“당신이 좋아하는 물건과 동물은 내가 최대한 당신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게. 고맙다는 말 할 필요 없어, 고맙다는 말 듣기 싫어. 정말 고마워하고 싶으면, 행동으로 보여줘.”“당신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잖아요, 내 몸과 마음이 다 당신 건데 또 뭘 더 줄 수 있어요?”전태윤은 이 말이 듣기 좋았다.띠리링!이때, 하예정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보더니 지체 없이 받았다.전태윤은 도대체 누구한테서 걸려 온 전화길래 아내가 이렇게 지체 없이 받는지 궁금했다.‘평소 내가 전화를 걸어도 예정이는 지금과 같이 지체 없이 받는 걸까?’그는 질투하는 것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과 겨루길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할머니.”할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그녀는 자기 남편이 자신이 전화를 너무 빨리 받아서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그는 아내가 할머니를 부르는 것을 듣고 속으로 얼른 투항했다.할머니를 당해낼 사람이 없으니까.“예정아, 요즘 어떻게 지내냐? 이 할미가 보고 싶지 않았어?”전화 너머로 허허 웃으시는 것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하나도요. 할머니께서 말도 없이 강성으로 가셨는데 제가 왜 보고 싶겠어요? 미리 말도 안 하시고... 나도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구경하고 싶단 말이에요.”“아직 구경거리가 없다. 이제 구경거리가 생기면 할머니가 널 부르지 않아도 태윤이랑 구경하게 될걸. 참, 오늘 주말인데 태윤이 출근 안 하지? 너 태윤이랑 나가서 바람 좀 쐬지 않겠느냐? 드라이브도 좋잖아, 집에만 있지 말고. 집에만 있으면 얼마나 답답해.”“저녁에 연회가 있어서 낮에는 놀러 가지 않으려고요. 관성의 명승지는 거의 다 보아서 당분간 가고 싶은 곳이 없네요. ”그녀는 관성에서 오랫동안 살며 놀만한 곳은 시집가기 전에 다 다녀왔다.“무슨 연회냐? 어느 집에서 또 연회를 열어? 이번에도 이모를 따라갈 거냐?”할머니가 다정하게 묻고 있다.“공씨 어르신이 연 연
하예정도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태윤 씨는 저에게 정말 잘해줘요.”할머니의 말은 언니가 늘 하던 잔소리와 같았다.전화기 너머로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전태윤은 할머니에게 물었다.“언제 돌아오세요?”“아직 병원에 누워 있어. 빨리는 못 돌아갈 거야.”전태윤과 하예정은 동시에 걱정되어 물었다.“어디 아프신가요?”이렇게 오랫동안 얘기했는데도 할머니는 자신이 병원에 누워있다고 알리지 않았다. 웃으며 말하시는 것만 듣고는 컨디션이 좋은 줄만 알았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현의 차에 놀라 바닥에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뼈가 조금 아플 뿐이야. 고현이가 날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족에게도 알렸어. 다만 강성에야 호영이밖에 없으니 그 녀석에게만 알린 거야.”전태윤은 말이 안나왔다.“...할머니, 꼭 그 작전을 써야 했어요?”‘나이가 적지도 않으신데 그렇게 주저앉다니, 잘못해서 뼈라도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러시는지.’할머니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정말 잘못하여 넘어진 거야.”전태윤은 할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여기까지 들은 하예정은 그녀가 할머니를 구하게 된 것도 할머니께서 연기하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생명의 은인으로서 은혜를 갚는 방법으로 전태윤과 그녀를 결혼시킬 목적이었다.지금은 또 전호영을 상대로 이 수법을 쓰고 있다.수법은 같지만 유용하면 되었다. 고현이 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게 할머니의 목적이었다.“할머니, 고현 씨는 잘생겼나요?”“잘생겼지, 사진보다 실물이 더 잘났어.”하예정은 호기심에 물었다.“호영 도련님은 마음에 들어 해요?”“호영이보다 고현이가 더 잘났어. 그 녀석이 마음에 들어 하든 안 하든 난 고현이가 좋아. 말수도 적고... 태윤이랑 많이 닮은 것 같아.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면서 젊은 여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데, 그건 남장을 한 것을 들킬까 봐 두려워서 그래. 고현처럼 말이 많지 않은 사람에게는 호영이 같은 남자가 남편감으로 제일일 거야. 호영이는 말을 잘해서 누구와도
노동명이 대답했다.“내가 갑자기 강성에 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우빈은 아직 몰라. 우빈의 친구가 찾아오는 바람에 신나게 놀고 있거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을 정도인데 내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할 겨를도 없어.”하예진이 웃었다.“동명 씨는커녕 엄마인 저조차도 생각하지 않나 봐요.”“우빈이 녀석이 예정 씨와 사이가 좋으면 예진이 네가 자유로워서 좋잖아.”“그건 그래요. 우빈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예정이가 늘 저를 도와 녀석을 봐줬거든요. 우빈이 아빠가 출근해야 해서 제가 산후조리 때부터 예정이가 늘 우리 모자를 돌봐줬죠. 제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을 때야 우빈 아빠가 휴가를 냈거든요. 전 시부모님은 병원에서 우빈을 한 눈만 보고는 행방이 묘연해지고요. 이혼 전에는 심지어 저보고 둘째를 낳으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이혼했네요. 아니면 제가 평생 그 집안에 얽매여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밀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3층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고 하예진은 노동명을 부축해 앉힌 뒤 물어보았다.“뭐 드시고 싶어요?”“네가 주문해. 난 편식하지 않아. 아무거나 먹으면 돼.”하예진은 경호원들을 불러 앉힌 뒤 휴대전화를 꺼내 벽에 붙어 있는 주문 코드를 스캔하여 노동명이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시켰고 고개를 돌려 경호원들에게 물어보았다.“술 드실래요? 동명 씨는 제가 차로 모시면 되니까 다들 술 마시고 싶으면 한잔해도 돼요. 운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의 경호원이 대답했다.“우리는 술 안 마셔요. 술을 주문하지 않으셔도 돼요.”노동명도 술 마시지 않았다.“그럼 술 주문하지 말아요.”하예진과 강일구 일행은 식사했지만 지금 또 노동명과 함께 식사하려고 한다.곧 하예진은 주문을 마쳤다.하예진 옆에 앉은 노동명은 그녀에게 가까이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예진아, 사실 난 형인 씨 무식함이 너무 감격스러워.”하예진은 바로 노동명을 노려봤고 그는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가 안목이 뛰어났다면 내가 널 가까
“고마워요. 괜찮습니다.”노동명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사실 노동명은 하루 호텔에 묵은 적 있지만, 횟수가 적은 탓으로 누구도 그가 노씨 가문의 넷째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노동명은 말할 것도 없고 전씨 가문의 대표 전태윤이 왔다고 해도 호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전씨 그룹의 모든 호텔을 관리하는 사람은 전호영이기 때문에 모든 호텔 직원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전호영이었다.전호영은 고현을 배웅하러 나오는 길에 마침 안으로 들어가는 노동명을 만났다.“동명이 형.”전호영은 노동명을 보고 조금 놀랐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하예진이 오늘 노동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노동명은 오후 2시 전에 도착한다고 했기에 전호영은 노동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줄 알았다.하예진이 방금 밖에서 돌아왔고 아직 노동명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경호원들이 노동명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전호영은 좀 의외라는 듯 웃으며 노동명 앞으로 다가서며 인사했다.“형, 혼자 오셨어요?”“응, 내 개인 비행기를 공항에 세웠거든. 강성으로 오기 전에 차를 빌려놨어. 내리면 바로 차를 탈 수 있게 말이야. 다들 바쁜 거 알고 내가 미리 말 안 하고 왔거든.”노동명은 고현을 바라보았다.고현은 노동명의 앞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면서 공손히 인사했다.“노 대표님.”노동명은 고현과 악수를 하고 나서 전호영에게 말을 건넸다.“호영아, 먼저 일 봐. 날 신경 쓰지 말고. 예진이가 호텔에 있다고 했어. 날 데리러 내려올 거야.”경호원 두 명을 데리고 걸어오는 하예진을 본 전호영은 노동명에게 웃으며 말했다.“예진 누나 오셨어요. 형, 그럼 우리 먼저 가볼게요.”전호영은 하예진에게 눈썹을 움직이며 개구쟁이 표정을 짓자 하예진이 그를 째려보았다. 전호영은 빙그레 웃으며 고현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식사하셨어요?”하예진은 노동명을 보자마자 배고프냐고 물었다.노동명은 배를 더듬으며 가여운 모습을 보였다.“너희들이 어젯밤에
“엄마...”“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네 엄마가 아니야! 또 엄마라고 부르면 네 혀를 잘라서 밖에 던질 거야! 네 엄마는 촌에서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말을 마친 이은화는 다시 병실 문을 닫았다.이윤정은 눈물범벅이 되었지만 더는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셈이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정군호는 이윤정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가슴이 매우 아팠지만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발걸음 소리를 들려오자 정군호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이은화의 눈에 밟힐까 봐 무서웠다.정군호는 자신의 생활과 이윤정의 생활도 이제 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가 지금 이씨 가문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이씨 가문에서 지낼 삶은 개만도 못할 것이다.하지만 정씨 집안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다.정일범이 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상 정군호의 삶은 나아질 수 없을 것이다.친딸 이윤미가 가주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정군호의 삶은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정군호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상처가 다 나아서 퇴원하면 정일범을 도와 자리를 가주 차지하여 이씨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맹세했다.고급 렌터카 한 대가 하루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차 안에 앉아있던 노동명은 하예진에게 그가 도착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아직 하루 호텔로 오는 중인 줄 알고 서둘러 그에게 전화했다.노동명이 전화를 받자 하예진이 물었다.“동명 씨, 지금 어디예요? 공항이에요?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바로 떠날게요.”“아니야. 내가 렌터카를 타고 왔어. 지금 하루 호텔 앞인데 네가 지금 호텔에 있다면 지금 대문으로 나오면 나를 볼 수 있을 거야.”“알겠어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예진은 방금 밖에서 호텔로 돌아왔다.오늘 노동명이 그녀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일찍 호텔로 돌아왔다.노동명이 오늘 오후 2시쯤 하예진을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호텔로 돌아가지도 않고 회사 설립을 위해 밖에서 뛰어다녔을 것이다.그녀는 고씨 그룹에 가서 고현을
이은화는 한참 동안 이윤미를 올려다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엄마는 네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난 네 마음속에도 강한 힘이 있다는 것도 잘 알아. 젊었을 적 날 닮았지. 그런데 넌 좀 착해.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공평함은 없다는 것만은 알아야 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야.”이윤미는 말을 잇지 않았다.“돌아가.”이은화는 이윤미가 이윤정보다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윤미가 자신의 말을 전부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친딸 이윤미는 그녀만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이은화는 어느 땐가 그녀가 애써 얻은 모든 것이 맏언니 이은숙의 후손에게 돌아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이은화가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들이 전부 헛수고로 될 테니까.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이은화는 아마 죽어서도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윤미는 이은화에게 스스로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뒤 병실을 나섰다.이은화는 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 다시 병실로 돌아와 침대 옆에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윤미가 돌아갔어.”“네.”정군호가 대답하며 맘속으로 불효녀 이윤미를 욕했다.방문하러 왔으면서 그에게 관심 어린 말도 건네지 않는다고 원망했다.‘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나? 그래도 나한테 와서 관심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내가 윤정을 내쫓았어. 앞으로 윤정이는 우리 이씨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윤정이한테 준 모든 것을 전부 되돌려 받을 거야. 그 애는 단지 집사의 딸일 뿐인데 우리 윤미의 자리를 이십여 년 동안 차지하면서 윤정의 몫이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지. 그거면 충분해.”앞으로 이윤정은 거지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이은화는 예전에 이윤정을 아끼던 만큼 지금 그녀를 미워했다.이윤정과 정군호가 남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할지라도 이은화는 용서하지 못했다.이은화는 그녀의 분노를 전부 정군호와 이윤정에게 쏟아부었다.정군호는 이은화를 미치광이라고, 수단이 악랄한 여편네라고 욕하고 싶었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