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명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그가 오늘 전태윤을 찾아온 이유는 프로젝트 협력에 관해 이야기하러 온 것이다. 두 사람은 곧 본론에 들어갔다.이야기가 끝난 후, 노동명은 떠날 준비를 했다.“나 다시 들어가서 우빈이가 깨났나 볼게. 만약 깨났다면 내가 데리고 놀러라도 갈까?”“데리고 가긴 어딜까? 네가 데리고 나가면 아마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울 거야.”노동명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그렇다, 우빈인 항상 그와 친하지 않다.다시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간 노동명은 2분도 안 돼 안에서 호들갑을 떨었다.“태윤아, 태윤아, 빨리 와!”“무슨 일이야?”그가 고함을 지르는 것을 들은 전태윤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휴게실로 뛰어들었다.“우빈이 침대에 오줌쌌어. 시트 흠뻑 젖은 것 좀 봐.”노동명은 침대 위의 꼬마 녀석을 가리키며 친구에게 말했다.“....”전태윤은 다가가 먼저 자신의 양복 외투를 벗어 침대맡에 놓은 다음 우빈을 안아 들고 오줌에 젖은 바지를 벗겼다. 그다음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자신의 외투로 감싸 안았다.실컷 잔 우빈은 전태윤이 자기 바지를 벗길 때 눈을 떴다.그는 전태윤을 보고 달콤한 미소를 짓더니 애티난 목소리로 이모부를 불렀다.“이모부.”“응, 우리 우빈이 깼어?”전태윤은 우빈을 안고 휴게실을 나서며 휴게실에 들어오자마자 우빈의 이불을 들추는 친구에게 말했다.“침대 시트 좀 치워 줘.”“우빈이가 오줌 싼...”“싫어?”“...”노동명은 냄새난다고 싫은 것이 아니라, 뭐랄까... 처음으로 어린아이가 오줌을 싼 것을 보고 신기했다.그는 침대 시트를 걷어 우빈의 젖은 바지와 함께 화장실의 세탁기가 던져 넣었다.휴게실에서 나오니 이모부의 정장 코트를 바지처럼 입고 소파에 앉아 있는 우빈이가눈에 들어왔다.“동명아, 너 밖에 가서 우빈이가 입을 새 옷 몇 벌 사 올래?”노동명은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 나갔다.그는 재빨리 근처의 아동복 가게에서 십여 벌의 옷을 골라왔다.“품질이 괜찮아 보이길래 사긴
“왜 사나이는 치마를 못 입나요?”노동명이 대답했다.“그거야 남자와 여자가 다르니까.”우빈은 알듯 모르듯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빛으로 노동명을 쳐다봤다.전태윤은 바지 한 벌을 골라 우빈을 안고 입혀주며 말했다.“남자는 힘든 일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치마를 입으면 불편해.”“왜 남자는 힘든 일을 해야 하죠?”“우빈이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한다는 말 들은 적 있어? 그래서 우린 남자에게 중한 일을 시키고, 엄마와 이모와 같은 여자들에겐 경한 일을 시키는 거야.”우빈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우빈이도 크면 중한 일을 하고, 경한 일은 엄마와 이모한테 시킬래요.”전태윤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우빈이 잘한다.”“...”띠리링!내선전화가 울렸다.전태윤은 우빈을 내려놓고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그는 곧 전화를 내려놓고 우빈이에게 말했다.“우빈아, 엄마가 데리러 왔어.”“엄마!”꼬마 녀석은 엄마가 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치마를 쇼핑백에 쑤셔 넣고 자신의 오줌에 젖은 바지도 찾았다.“이모부, 우빈이가 입고 온 바지는요?”“그 바지는 오줌에 젖어서 세탁기에 넣어 빨았어.”노동명이 재빨리 대답했다.우빈은 더는 말하지 않고, 힘겹게 커다란 쇼핑백을 끌고 혼자 나가려고 했다.“이모부, 바지가 깨끗하게 세탁되면 잊지 말고 돌려줘요.”“알았어, 이모부가 우빈이 바지를 깨끗이 세탁해서 가져다줄게. 우빈이 바지는 너무 작아서 이모부가 남겨도 소용없어.”꼬마 녀석은 뜻밖에도 오줌에 젖은 바지마저도 집에 가져갈 생각을 했고있었다.“우빈아, 그 치마는 가져갈 필요 없어. 동명 아저씨한테 가져가서 환불해 달라고 하자. 우빈인 치마를 입을 수 없잖아.”우빈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이모부, 이 치마 잘 뒀다가 이제 이모가 여동생을 낳으면 입힐 거예요.”전태윤은 꼬마 녀석의 말을 듣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꼭 껴안았다. “우빈인 이모가 여동생을 낳을 것 같아?”“네. 엄마 말로는 이모가 나중에 예쁜 여동생을
하예진은 쭈그리고 앉아 아들에게 물었다.“우리 우빈이 말 잘 들었어? 이모부 일하는데 방해하지 않았지?”“우빈이 말 잘 들었어요. 근데 엄마... 우빈이 오줌 쌌어요.”우빈은 말하면서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어디에 오줌을 쌌어?”“이모부 침대 위에요.”“...”“그리고 동명 아저씨가 새 옷을 많이 사주셨어요. 그리고 새 치마도 사주셨는데, 그 치마는 나중에 이모가 여동생을 낳으면 입힐 거예요.”“아... 그랬어?”‘우빈이에게 치마까지 사주다니... 이런 세심하지 못한 면도 있었네.’노동명은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새 옷이 들어있는 커다란 쇼핑백을 하예진에게 건넨 다음 우빈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가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고마워요, 하지만 저 스쿠터를 타고 왔어요. 그리고 이 옷 사는 데 얼마나 드셨나요? 제가 돌려드릴게요.”“그럴 필요 없어.”“이건 돌려 드려야죠.”하예진은 돈을 돌려주겠다고 고집하자 노동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40만 원 안 되게게 썼으니 30만 원만 주면 돼.”하예진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려놓으며 그가 옷을 살 때 아마도 흥정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가게 사람들이 가격을 부르는 대로 내버려두면, 이만큼 사는데 거의 40 만이 들 것이다.하예진은 지갑에서 30만 원을 세어 노동명에게 건네주었다.“대표님, 여기 옷 사신 돈이에요.”노동명은 우빈을 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그 돈을 건네받고는 세지도 않고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사무실 건물을 나온 후, 노동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정말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아?”“네, 고마워요, 대표님.”노동명은 아쉬운 듯 우빈을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다.“그럼 천천히 타고 가. 그리고 우빈이에게 모자를 씌워줘, 오늘은 바람이 좀 센 것 같아.”“알겠어요, 스쿠터에 우빈이 모자가 하나 있어요.”한 손으론 우빈을, 다른 한 손으론 쇼핑백을 든 하예진이 아들에게 말했다.“우빈아, 아저씨한테 작별 인사해야지.”우빈은 노동명에게 손을
하예정은 배가 꼬르륵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그녀는 잠에서 깨자마자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만졌는데 아무도 없었다.이불 밑이 차가운 걸 보니 전태윤이 일어난 지 한참 된 것 같았다.막 날이 밝았을 거로 생각하며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2시가 다 되었다.하예정은 멍하니 있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어쩐지 배가 고프다고 했는데 이 시간까지 자고 일어났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태윤 씨 나 좀 깨울꺼지...’하예정은 서둘러 옷 한 벌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가 갈아입고는 세수를 한 후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이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태윤이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서 전화를 받으며 낮은 목소리로 불평했다.“태윤 씨 일어난 후 나도 좀 깨울 거지, 여태 자다가 방금 일어났단 말이에요.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다 되었지 뭐예요.”전태윤은 전화기 너머에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너무 달콤하게 자길래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 그리고 효진 씨에게도 당신이 오늘 좀 피곤하여 오후쯤에 가게로 돌아갈 거라고 전화했어.”‘당신이 이렇게 말하면 효진이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하지만 어젯밤에 절제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 앞으론 조심해야겠다.’“당신 퇴근하셨죠?”“방금 회의 끝나고 밥 먹으러 가는 길이야. 당신도 잊지 말고 밥 챙겨 먹어.”전태윤은 그녀가 밥도 안 먹고 부랴부랴 외출할까 봐 걱정됐다.“당연하죠,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당신도 밥 먹으러 가요.”“그래, 자기야 사랑해.”“당신이 갑자기 이렇게 달콤한 말을 하니 조금 낯서네요. 나도 사랑해요.”그녀는 지난번에 심효진이 소정남과 통화할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휴대폰에 대고 쪽! 하고 뽀뽀하는 소리를 냈다.“어때요? 내 뽀뽀 느껴져요?”전태윤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응, 느껴져.”어제 로맨틱한 밤을 보낸 후로부터, 하예정은 남편에게 아주 친절해졌다.전태윤은 앞으로도 로맨스를 더 많이 준비해 아내가 항상 자기에게 열정을 가질
강일구는 하예정에게 다가가 십여 가닥의 머리카락이 들어있는 비닐백을 건네주며 말했다.“사모님, 이것은 도련님께서 아침에 외출하실 때 분부하신 것입니다.”“이게... 우리 할아버지 머리카락인가요?”하예정은 비닐백을 받으며 물었다.어젯밤 그녀와 전태윤이 토론한 결과 하지철을 시켜 하씨 영감의 머리카락을 뽑아 혈연 확인 검사를 하기로 했다.“네, 그렇습니다.”하예정은 강일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이거, 하지철이 도와 한 건가요?”“넵, 사모님이 두려웠던지, 제가 사모님께서 시키신 거라 했더니 바로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십여 가닥 뽑아서 저한테 줬습니다.”하지철이 무슨 방법으로 하씨 영감을 달래서 머리카락을 뽑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결과만 얻으면 되니까.“그 녀석은 아직 젊었을 뿐, 뼛속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하지철은 아직 만 18세가 되기까지 두석 달이 남았다. 한창 젊고 에너지 넘칠 때다.하씨 영감의 머리카락을 얻은 하예정은 강일구에게 자신을 유전자 검사 센터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하예정은 지난번에 이모와 함께 유전자 검사를 한 경험이 있기에 그 센터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다.강일구는 먼저 큰 도련님과 연락한 후 사모님을 센터까지 모셔다드렸다.검사를 마친 하예정이 센터에서 나오니 전태윤의 전용차들이 도착해 있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차에서 내리고 있는 남편에게로 다가가면서 말했다.“오후에 한가하신가 봐요? 여기까지 다 오시고. 강일구 씨가 데려다줘도 되는데...”전태윤은 두 걸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차에 올라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시간만 있으면 내 아내는 내가 직접 데려다줬으면 좋겠어.”그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하예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다행히 지금의 그는 그녀에게 충분한 자유와 존중을 주었고, 예전처럼 그녀의 생각을 무시하지 않았다.“나 아침에 처형한테 가서 우빈이를 회사로 데려갔어.”“당신 일도 바쁜데 우빈이를 데려가서 어떻게 돌봐요?”“사무실에서 놀게 했는데 말 잘
“난 예정 씨가 할머니의 천억 원 상금을 받았으면 좋겠어.”전태윤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던 하예정이 말을 꺼냈다.“여러 대에 걸쳐 딸이 없는 것은 풍수 구도의 문제일 거예요. 아마도 당신 집은 아들이 흥성한 풍수 같아요.”“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예전에 우리 가문에도 여자애가 태어났었는데 그만 요절하고 말았대. 그 여자애가 요절한 뒤부터 우리 가문에서는 더는 딸이 태어나지 않았어. 작은어머니께서 아홉째를 임신하시기 전에 산성 체질이면 딸을 낳는다고 온갖 산성 음식을 찾아 드시던 기억이 나. 아홉째를 임신한 뒤 첫 두 애와 임신반응이 달라서 틀림없이 딸을 낳을 줄 알았대. 태아의 모습이 형성된 후 사람을 찾아 알아보았는데 딸이라니 모두 엄청나게 기뻐했어.”전태윤은 그때의 일을 회상했다.“그때 난 10대여서 작은어머니께서 아홉째를 임신하셨을 때가 기억에 생생해. 난 작은 어머니께서 여동생을 낳아주실 것을 정말 기대하고 있었거든. 남몰래 여동생한테 줄 장난감도 많이 준비해 두었었어. 집에 어른들이 핑크색 옷과 신을 많이 사 오시는 걸 보고 나와 둘째, 셋째 동생도 몰래 핑크색 치마를 사두었지.”“태윤 씨도 여동생을 몹시 기대하셨군요.”“작은어머니께서 아홉째를 낳는 날은 마침 토요일이어서 우리 가족 남녀노소, 그리고 우리 전씨 가문의 친척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병원 복도를 가득 메울 정도여서 명절 때보다 더 흥성흥성했어. 손녀를 안을 생각에 입이 귀에 걸려서 기뻐하시던 할머니께서는 간호사가 포동포동한 남자애를 안고 나오자 분명히 여자애를 임신하였는데 어떻게 남자애를 낳을 수 있냐며 간호사가 잘못 안아온 것이 틀림없다고 멱살을 잡고 따지셨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상황에 간호사는 산실에는 우리 작은어머니 혼자만 있고, 틀림없이 아들을 낳았다고 거듭 설명했어. 간호사는 다른 집은 남자애를 낳으면 기뻐하는데 우리 집은 마치 병원에서 여자애를 숨긴 것처럼 여자애를 내놓으라고 성화이니, 참 이상한 집이라며 도리머리를 저었고.”그 장면을 상상해 본 하예정의 입가
할머니의 부탁으로 전태윤과 하예정의 궁합을 봐주던 점쟁이는 풍수를 볼 줄도 알겠지? 하지만 깊은 연구가 없다면 아마 전씨 가문의 난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전태윤 부부는 딸 낳는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사이 어느새 관성중학교 앞에 도착했다.전태윤은 하예정을 책 가게로 데려다주고는 곧장 회사로 돌아갔다.오는 길에 줄곧 딸 얘기만 나누었다는 생각에 하예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데, 혼자서 웃고 있는 거야? 말해봐, 나도 좀 웃게.”심효진이 하예정 앞에 과자 한 접시를 놓았다.“정남 씨가 후식으로 먹으라고 사람을 시켜서 보내왔어.”“소 이사님은 정말 너한테 잘해주는구나. 친절하고, 자상하고. 너 말을 고분고분 잘 듣고.”하예정이 간식을 하나 집어 들었다.“정남 씨도 너의 집 전 대표님을 따라 배운 거야, 만약 전 대표님이 본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도 그가 부유한 N 세인지 몰랐을 거야.”하예정이 웃었다.“태윤 씨가 나를 속인 일은 모두에게 예를 보여줬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어.”하예정의 기분이 들떠있는 것을 본 심효진이 떠보듯 물었다“오전에 무슨 일 있었어? 아까 전 대표님이 네가 오전에 가게로 돌아갈 수 없으니, 나더러 가게 일을 맡아달라고 전화 왔었어. 어찌나 말투가 사근사근하던지. 너의 집 전 대표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오늘 오전처럼 부드럽게 말을 한 적이 없었어.”하예정을 짝사랑하는 사촌 동생 김우진을 도와주지 않는 심효진을 보고 전태윤은 심효진이 하예정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알았지만, 동시에 하예정과 사이가 각별한 심효진을 경계하고 질투하고 있었다. “별일 아니야, 어젯밤에 태윤 씨한테서 감동하여서 늦게 잔 것뿐이야. 태윤 씨가 만들어 준 낭만적인 순간을 다 찍어놓았어, 나중에 늙으면 다시 꺼내보려고.”하예정이 말하면서 자신이 찍은 영상을 심효진에게 보여주자, 심효진이 놀리는 듯한 눈길로 하예정을 바라보며 웃었다.“이러느라고 늦게 잔 거구나, 하하!”심효진의
EQ와 IQ가 모두 뛰어난 소정남은 평소에도 자주 심효진한테 서프라이즈를 주곤 한다.하지만 IQ는 남들보다 뛰어나지만, EQ가 낮은 전태윤은 ‘사랑 상담사’소정남한테서 꽉 막혔다고 늘 놀림을 받는다.전태윤이 하예정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 하예정이 이토록 감동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하예정이 달콤한 어조로 말했다.“태윤 씨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바꾸었으니, 나도 태윤 씨를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어.”부부는 서로 베풀고, 진심으로 대해야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네가 부러워, 살짝 질투도 나고.”“너야말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질투의 대상이지.”심효진이 히죽히죽 웃었다.“그래, 난 남들의 선망 대상으로 사는 것이 좋아. 정남 씨와 사귀면서부터 난 너무 행복해. 그리고 맞선을 보라는 부모님 잔소리를 안 들어서 너무 좋아. 고모도 이젠 잠잠해졌어.”“너 고모님께선 지금 엄청나게 기뻐하고 계실 거야. 너를 부잣집에 시집보내 호강시키려고 얼마나 애쓰셨는데.”“난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정남 씨 집안과 같은 부잣집에는 시집가고 싶어, 평생 심심하지 않을 거야. 난 지금 소씨 도련님이 너무 궁금해, 얼마나 대단한 여자라야 그렇게 대단한 남자한테 어울릴 수 있을까?”“때로는 딱 어울릴 것 같은 대단한 가문끼리 맺어지는 것도 아니더라. 주로는 소씨 도련님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가에 달렸지.”“내 생각에 소씨 도련님은 눈이 꼭대기에 붙은 것 같아, 아니면 정남 씨보다 나이도 몇 살 위이고, 또 싱글인데 왜 여태껏 혼자였겠니, 그렇게 훌륭한 남자가 연애도 결혼도 안 하고?”“사업에 너무 신경 쓰느라 연애결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나 보지.”심효진은 발밑에 바람이 일 지경으로 바삐 돌아치는 소정남을 생각하며 웃었다.“아마 우리 같은 여자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하예정도 그 말에 수긍하며 떠라 웃었다.공예품을 짜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맡긴 터라 이젠 서두를
지훈은 그저 그들에게 손주를 안겨주는 도구로 몰락할지도 모른다.“고구마가 이렇게나 많아요? 그럼 군고구마 만들어 먹어요. 밖에서 사면 한 개에 삼천 원 정도 하잖아요, 너무 비싸요.”윤하는 역시나 고구마를 보고 기뻐했다.윤하는 차 문이 열려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보고는 혀를 내둘렀다.”이게 전부 다 고구마예요?”고구마인지 곤약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물건들을 나르기 시작했다.곧 혁진이 도와주러 나왔다.그렇게 세 젊은이는 몇 번을 왕복해서 겨우 차 안에 가득했던 농산품들을 거실로 옮겨갔다. 값비싼 삼과 제비집도 그중 어느 안에 들어있었다.지훈은 부모님이 정말로 농산품만 갖고 온 줄 알았다.소씨 집안에서 가지고 온 선물들을 윤하 어머니께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방문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었다.지훈이 부모님이 방문한 탓에 윤하와 혁진은 도장으로 가지 않고 집에서 접대를 도왔다. 소씨 가주 내외가 아침을 못 드신 걸 알고 윤하 어머니는 윤하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 준비를 했다.윤하는 그 틈을 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아버지랑 큰오빠는 이렇게 일찍 도장으로 나갔어요? 두 사람한테 전화했었는데 둘 다 안 받던데요.”윤하 어머니는 밖을 한번 힐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아버지랑 혁주가 관성에 갔어. 지훈이 집안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근데 지훈이 부모님이 여기로 오실 줄 누가 알았겠니?”“저 아직도 고민 중인데 둘이서 벌써 관성에 갔다고요?”“그러니까 네가 고민이 끝나기 전에 미리 알아보는거지. 네가 시집살이 안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시름 놓고 너희 둘을 미뤄줄 거 아니야.”윤하 어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훈이 부모님을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 두 분이 너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소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처음 집에 인사 온다고 농산품들을 가지고 온 것 봐. 다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우리한테 맞춰주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너를 중요시한다는 거야. 그
사실 지훈도 부모님 몰래 일을 꾸몄으나 두 분이 보통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라서 지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집 문 앞에서 지켜보던 윤하 어머니는 딸과 함께 들어오는 두 사람의 얼굴이 지훈이랑 아주 비슷한 걸 보고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그러고는 얼른 문을 활짝 열었다.지훈 어머니는 윤하 어머니를 보자마자 하마터면 사돈이라고 부를뻔했지만 너무 이른 감이 있어 당황하실까 봐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되려 삼켰다.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이 오실 줄은 생각 못 했다.아들과 남편이 방금전에 관성으로 출발했는데 두 분이 집에 찾아오시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관성에서 두 사람에 대해 알아볼 때 마주치거나 들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정씨 집안 식구들은 지훈이 마음에 들었다. 지훈이 집안 사람들까지 인품이 좋으신 분이라면 멀기는 멀어도 윤하를 소씨 집안으로 시집 보낼 의향이 있었다.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바로 지훈의 질병이었다. 어젯밤, 두 형제는 지훈에게 이게 관해 물어보지 않았고 윤하도 가족들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윤하가 지훈을 대하는 태도에서 아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윤하 어머니는 짐작했다.전에 질병이 있었다가 이제는 다 완치됐을 가능성도 있었다.두 집안 어르신이 만나고 나서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 두 분 다 성격이 좋으시고 친근하신 걸 느꼈다.사돈 될 분들한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왔다. 행여나 너무 부유해 보여 정씨 집안에서 윤하를 시집 안 보내겠다고 하면 아들이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정씨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두 가문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정씨 집안이 손해 보는 셈이었다. 지훈은 이제 중년이 다 된 아저씨이고 윤하는 아직 꽃다운 어린 아가씨이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소씨 집안 가주라는 기세 없이 자세를 낮추어 얘기했다.윤하 어머니와 혁진은 두 분을 대접하고 있고 윤하는 지훈을 도와 짐 나르러 갔
지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윤하 씨는 언제든지 예뻐요. 긴장하지 말아요, 저희 부모님 그렇게 어려운 분들 아니세요.”“긴장 안 했거든요. 처음 뵈는 자리니까 잘 꾸미지 않더라도 예의는 갖춰야 하니까요. 제가 문 열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하는 지훈보다 먼저 뛰어가 문을 열었다.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문 앞에 서 있었다.윤하가 문을 열자 차에 앉아 계시던 분이 창문을 내리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중년 여성분이셨는데 지훈과 많이 닮아서 누가 봐도 소지훈 어머니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윤하는 내심 지훈의 어머니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관리를 아주 잘하셔서 겉보기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같이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면 전혀 모자같이 보이지 않았다.지훈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걸어오며 물었다. “아가씨가 윤하 씨구나. 사진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소지훈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어머님, 안녕하세요.”윤하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지훈도 윤하를 따라 인사 한마디 건넸다.지훈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윤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보고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고 아들이랑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훈 어머니는 첫눈에 바로 윤하가 마음에 들었다.자기 아들을 구해준 유일한 여자애라고 생각해서 사진을 볼 때부터 이미 마음에 들었고 흡족해하셨다.지훈이 아버지도 차에서 내렸다.“윤하 씨, 안녕하세요, 저는 지훈이 애비되는 사람입니다.”지훈이 아버지는 평소에는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하시지만 그 순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윤하는 아버님께도 인사를 건네고 두 분을 집안으로 모셨다. “아버님, 어머님,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요, 밖이 추워요.”“좋아요.”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지훈의 아버지는 차 키를 아들에게 던져주고는 말했다.” 차 안에 있는 물건들 집으로 옮겨와.”“두 분 편히 오시면 돼요, 뭘 들고 오시지 마
지훈의 아버지는 시계를 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찍 오긴 한 것 같아. 여름이면 이쯤 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을 텐데. 차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노크하러 갈까?”지훈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먼저 아들한테 전화를 걸어 일어나라고 해야겠어요.”그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윤하와 입술이 닿는 그 순간, 고막을 찌르는 전화벨 소리가 울려 지훈은 단꿈에서 깨어났다. 지훈은 키스의 여운에 입술을 문지르다 정신이 번쩍 들어 그제야 자신이 꿈꾸었음을 알았다. 윤하는 지훈의 고백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눈치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달콤한 꿈이 산산조각 나자 지훈은 순간 화가 났다.핸드폰을 집어 든 지훈은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고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거세요? 큰 일이 아니라면……”“아니면 어쩔 건데? 내가 누구냐고? 네 엄마야, 나 지금 윤하네 집 앞이야. 빨리 나와 문 열어. 아니면 내가 들어가서 혼쭐을 내줄 거니까.”지훈도 한 성깔 하는데 지훈의 어머니는 그보다도 한 수 위였다. 말 몇 마디로 바로 지훈을 수그러들게 했다.지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요? 지금 집 앞이라고요? 아버지도 같이 있어요?”두 분이 오신다고는 했지만 진짜로 오실 줄 몰랐고 또 이렇게 일찍 올지도 몰랐다.“아버지도 옆에 계셔. 대문이 아직 안 열려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보지? 아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지훈은 침대에서 굴러 내려오며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이 추운 날씨에 이렇게 일찍 오신 거예요? 아버지가 오신다고 하시더니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직 이르다고 말했잖아요, 윤하 씨가 엄마아빠를 만나면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제가 내려가서 문 열어줄게요.”입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정작 부모님들이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지훈은 엄마에게 당부 몇 마디 하고
그러고는 윤하한테로 눈길을 돌렸다. 그대로인 동생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는 두 사람은 아무리 봐도 커플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지훈은 도대체 무슨 질병이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윤하 어머니는 과일을 꺼내오다 두 사람을 발견했다.“마침 돌아왔네. 얼른 와서 과일 먹어.”“윤하 씨가 저한테 옷을 사줬어요.”지훈은 싱글벌글하며 두 형님 옆으로 가 앉더니 윤하가 선물해 준 옷을 자랑했다.윤하는 그런 지훈을 보고 얼굴이 빨개져 자리에 앉지 않고 꽃다발을 손에 든 채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엄마, 오빠들, 나 먼저 올라가 쉴게.”혁주와 혁진은 옷자랑에 바쁜 지훈에게 맞장구를 쳐줬다. 윤하가 안목이 좋다, 옷이 멋지다, 두께감이 있어 따뜻하겠다 등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면서 또 이십몇 년간 같이 살면서 오빠들은 옷 잘 사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하여튼, 지훈은 옷 몇 벌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고 연애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주위 친구들이 늘 자랑하던 얼마 안 되는 선물이라도 좋아하는 사람한테 받으면 엄청 행복하다던 그 감정도 알게 되었다.윤하의 두 오빠는 결국 지훈이 무슨 질병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혁주는 내일 관성으로 가는 티켓을 이미 끊어놓았다. 아버지랑 같이 관성으로 가서 소씨 집안 사람들의 인성을 조심히 알아보려는 계획이었다. 더불어 지훈의 질병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그들은 지훈에게 직접 물어도 솔직히 대답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직접 알아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이른 아침이 되자 혁주는 아버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그들이 출발할 때 윤하는 아직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던 지훈마저도 윤하에게 키스하는 달콤한 꿈을 꾸느라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도 역시 큰 형님과 윤하 아버지가 일찍이 길을 나선 것을 몰랐다.두 사람이 출발해서 얼마 되지 않아 소씨 가주 내외가 도착했다.두 분은 사돈 될 분들이 놀랄까 봐 경호원들 없이 둘이서 제
지훈이 윤하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윤하 씨가 좋아하면 매일 선물해 줄게요. 아니면 지금 도장에 꽃 가지러 같이 갈까요?”“같이 가요. 매일 선물 안 해줘도 돼요. 어쩌다 한 번씩 서프라이즈를 주는 게 더 좋아요. 매일 받으면 또 감흥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잖아요.”지훈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윤하 씨 말 들을게요.”지훈의 꽃 선물에 윤하는 꽃 떡을 떠올렸다.지훈도 자신이 매일 꽃 선물을 하면 윤하가 꽃 떡을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까 걱정이 됐다.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아마도 돈이 아닐까?지훈은 돈으로 된 꽃다발을 선물해서 윤하가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게 해줄 수도 있었다.“먼저 옷 쇼핑가요, 제가 옷 선물을 해줄게요.”윤하는 꽃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옷 선물을 해주려 했다.“옷을 선물해 준다고요?”지훈은 아주 기뻤다.“지훈 씨가 추울 것 같아서 두꺼운 아우터를 선물해 주려고요. 근데 저는 지훈 씨처럼 명품은 못 사요. 삼십만 원 정도는 해줄 수 있어요. 혹시 마음에 안 들면 버리지 말고 저한테 줘요. 저희 큰오빠가 지훈 씨랑 키가 비슷하니까 큰오빠 주면 돼요.”지훈은 재빨리 대답했다. “마음에 안 들 리가요, 윤하 씨야말로 줬다 뺏기 없어요. 큰형님 옷도 많으시고 두꺼운 옷도 많으시잖아요. 저는 두꺼운 옷 별로 없어요. 저 사실 추위 많이 탄다고요. 집밖에 잘 안 나가고 매일 사무실, 도장, 윤하 씨 집, 난방이 있는 이 세 곳에만 있잖아요.”바로 전까지만 해도 추위를 안 탄다고 하던 지훈은 혹여나 윤하가 사준 옷을 큰형님한테 줄까 봐 추위를 많이 탄다고 엄살을 부렸다.“그럴 줄 알았어요. 남방 사람들은 연성에 오면 다들 춥다고 그래요. 아무리 지훈 씨가 이곳저곳 많이 다닌다고 하지만 그래도 관성에서 보낸 시간이 제일 오라잖아요. 연성이 안 춥다면 거짓말이죠.”지금의 관성은 날씨가 아주 좋아 윤하도 부러울 정도였다.지훈은 웃으며 말했다. “관성은 난방이 없어서 추울 땐 진짜로 추
윤하의 어머니는 잠깐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너희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래도 지훈이 돌아오면 너희가 한번 잘 물어봐. 안 그러면 나 계속 걱정돼서 잠 못 자니까. 그리고 지훈이 우리 윤하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걔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두 집안이 차이가 있잖아. 지훈이 부모님이 우리 윤하를 못 받아들일 수도 있고. 너희 아빠가 돌아오시면 내가 얘기 한번 해봐야겠어. 혁주를 데리고 관성에 가서 지훈이 부모님에 대해 좀 알아보라고 해야겠어.”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혼자 가도 돼요. 오늘 저녁에 바로 티켓 끊어서 내일 아침에 출발할게요.”“아버지랑 같이 가. 네가 아직 어려서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해. 아버지는 나이도 많고 사회생활도 수십 년 해왔으니 사람 보는 눈이 괜찮아. 딸을 시집보내는데 아버지가 돼서 시댁이 어떤지는 알아봐야지.”윤하 어머니는 지훈이 의심하지만 않는다면 자신도 함께 관성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혁진이 말했다. “소 대표의 부모님이 우리 윤하를 싫어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소 대표 나이가 몇인데, 곧 사십이잖아요. 우리 윤하는 이제 스물넷인데 나무랄 게 뭐 있어요. 나무란다고 해도 우리가 소 대표를 나무라야 맞죠.”“소 대표 부모님께서 마음이 조급하시지 않을까요? 드디어 좋아하는 아가씨를 만났는데 그분들이 왜 나무라겠어요? 오히려 서둘러 결혼시키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 집안이 부자면 또 어때요? 우리 집안은 뭐 가난한가? 몇백억은 아니더라도 자산이 적지는 않잖아요. 어머니아버지가 윤하한테 집도 마련해 줬고 상가 부동산도 남들보다 훨씬 많은걸요.”“당연하지, 소씨 집안에서 우리 윤하를 마음에 안 들어 하기만 해 봐요.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잠깐, 우리 윤하가 아직 지훈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잖아요. 나중에 두 사람이 거리를 둔다고 해도 우리 윤하는 전혀 손해 볼 게 없어요.”“아쉬워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지훈이 아닌가.”“그래도 관성에 한번 가서 알아보는 게 좋아.” 혁주는 이미 휴대폰을 꺼내 티켓을 알아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윤하는 지훈과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두 사람이 집 문을 나서자 혁진이 형에게 물었다.“형, 윤하 오늘 좀 이상하지 않아요? 얼굴도 자꾸 빨개지고 지훈이랑 눈도 못 마주치고 아주 부자연스러운 것이 평소랑은 많이 달라요. 이십몇 년 동안 오빠와 동생으로 지내면서 오늘 처음 수줍어하는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쟤도 수줍어할 줄 아는 애였어요. 평소에는 그냥 남자애처럼 덜렁대고 뻔뻔하게 굴더니 수줍어하니 꽤 여자 같은데…”혁주는 말없이 차를 따랐다.윤하 어머니는 주방에서 설거지하다가 혁진의 말을 듣고 주방에서 뛰어나와 두 아들에게 말했다.“너희 둘 이리 와봐, 지훈이 없을 때 할 말이 있어.”“무슨 일이에요? 표정이 심각해 보이는데 안 좋은 일이에요?”혁진은 궁금증을 못 참고 주방으로 들어가다가 엄마의 표정을 보고 사뭇 진지해졌다.차를 따르던 혁주도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뛰어 들어오며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 소 대표가 무슨 말 하던가요? 소 대표가 우리 동생한테 고백했어. 근데 윤하가 아무런 준비 없던 상황에서 고백받아서 놀라서 도장을 뛰쳐나갔어. 내가 소 대표 보고 따라가지 말고 윤하한테 진정할 시간을 좀 주라고 했거든. 지금 보니 뭔가 잘될 것 같은 느낌인데?”혁진은 혁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형, 지훈이가 윤하한테 고백했다고요?”윤하 어머니는 입을 뗐다. “지훈이 질병이 있대. 걔가 윤하한테 솔직하게 털어놨는데 내가 엿듣다 보니 제대로 듣지 못했어. 병명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진짜로 병이 있나 봐. 그래서 여태까지 솔로였대.”“뭐라고요?”두 아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두 사람은 안색이 급격히 변하더니 혁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설마 남자구실을 못 하는 건 아니겠죠?”“그렇게 티가 나는 질병이 아닌 것 같았어. 똑똑히 듣고 싶었는데 방문이 열려있어서 더 가까이 가지 못하겠더라. 영문을 모르니 더 속이 타네. 너희 둘은 남자애니까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해서. 조금 있다가 지훈이 돌아오면 너희 둘이
지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윤하의 목소리가 위층으로부터 들려왔다.“얘들아, 밥 먹어.”윤하 어머니가 주방에서 불렀다.식구들은 주방으로 들어가 일손을 도와 식자재를 날랐다. 그리고 둘러앉아 따뜻한 샤부샤부를 먹기 시작했다.정혁주는 아버지가 소장한 술과 잔을 네 개 가져오며 물었다.“엄마, 저희 오늘 한잔하고 싶은데 괜찮죠?”“외출을 안 하면 한 잔씩은 허락할게. 더는 안돼.”많이 마시다가 취하면 내일 출근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정혁주는 동의하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한 잔씩만 하기로.”한잔이라도 아예 못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윤하는 많이 마시지 마.”혁주는 동생에서 반 잔만 부어주었다.윤하는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내가 여자는 맞지만 주량은 오빠들 못지않거든요, 한잔 마신다고 취하지 않아요.”“너 계속 그러면 한입밖에 못 마시게 할거야. 그 잔 소 대표님 줘.”혁주는 큰오빠답게 여동생의 음주를 제한했다.혁주는 술을 붓고는 윤하에게 귀속말했다. “적게 마시고 정신 붙들고 있어. 있다가 소 대표님 취하면 너한테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 술 취하면 진실을 토하게 되잖아. 그때 물어보면 진심을 알 수 있을 거야.”윤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하며 낮은 목소리로 큰오빠에게 말했다. “지훈씨 주량 엄청 세요, 그 한 병 다 마셔도 멀쩡할걸요.”술 한잔으로 지훈이 취하기를 기대하는 일은 망상에 불과했다.“난 지훈 씨가 한 말이 모두 진심이라고 믿어.”윤하는 지훈에게 반찬을 짚어주며 웃으며 말했다. “지훈 씨도 적게 마셔요, 식사가 끝나면 같이 산책해요.”“좋아요.”“밖에 엄청 추워.”윤하의 어머니가 말했다.“지훈이는 관성에서 왔잖아, 더 추워할걸. 난 시집온 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겨울에는 외출 잘 안 하잖아. 연성의 겨울 추위는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돼.”시집온 지 얼마 안 되였을 때 윤하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서 겨울을 보냈다.시간이 지나 아기들도 점점 커서 어린이집, 학교에 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