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약 일 분간 베란다 뒤에서 바라만 보다가 뒤돌아섰다.전태윤은 하예정이 차려준 음식을 들고 출근하려 했다.문을 나서기 전에 전태윤은 하예정에게 말했다.“나 출근 갈게.”“네, 운전 조심해요.”하예정이 당부했다.전태윤은 문을 닫은 후 도시락들 들고 아파트를 내려왔다.전태윤의 경호원 팀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갈 곳 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전태윤이 도시락을 두 개 들고 내려오자 경호원들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바라만 보며 아무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전태윤은 어이가 없었다.‘도시락을 들었다고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뭐야?’“도련님?”역시나 눈썰미가 좋은 강일구가 먼저 다가가 도시락을 받아서 들었다.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롤스로이스를 향해 걸어갔다.이내 롤스로이스는 경호원들의 차량 몇 대에 둘러싸여 아파트 단지를 나갔다.마침 하예정이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다가 자주 보는 롤스로이스가 기타 차량 몇 대의 보호를 받으며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 뒤로는 전태윤의 국산 차가 나가고 있었다.고급 외제 차를 만나면 절대 가까이에 가면 안 된다. 만일 하나 긁기라도 하면 배상이 어마어마하다.‘이 아파트 단지에 근 20억 하는 롤스로이스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거는 이곳 집값이 비싸다는 뜻일 텐데, 태윤 씨는 이 집 얼마 주고 샀으려나?’하예정은 전태윤이 큰 기업에서 한자리한다고 하나 정확히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지는 몰랐으며 물은 적도 없었다. 워낙 전태윤이 그녀에게 편견이 있다 보니 그녀는 괜한 오해를 만들기 싫어 직장과 직위에 관해 하나도 묻지 않았다.전태윤이 나가고 하예정은 꽃에 물을 주고는 그네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열어 댓글을 확인했다. 하예정의 진상 친척들을 욕하는 댓글을 확인한 하예정은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물론 어떤 누리꾼들은 시간도 오래 지난 데다가 어르신은 연세도 많고 중병에 걸리셨으니 그녀더러 원망은 내려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또
전태윤은 도시락 두 개를 사무용 책상에 올려놓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형수님이 너랑 나 같은 회사에 출근한다는 걸 알고 너 먹으라고 챙겨줬어. 맨날 밖에 음식 먹지 마, 깨끗하지 않아.”“형 예전에 맨날 밖에서 먹었잖아.”비록 가문의 호텔이지만 그래도 밖은 맞다.전혁진은 커피를 내려놓고 다급히 도시락통을 열면서 말했다.“토요일에 형수님 손맛 보고 나 진짜 그 맛에 반했다니까. 오 마이 갓, 뭐가 이렇게 많아. 종류도 다양하고 게다가 보기까지 좋으니 맛은 더 말할 것 없겠지.”전혁재는 두 도시락통을 다 열어보고는 하예정의 솜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손재주도 있는 데다가 음식 솜씨도 좋다며 말이다.‘어쩐지 할머니가 눈독 들이셔서 기어코 형한테 결혼하라 했지.’그도 그럴 것이 하예정은 장점이 많은 여자다.전재혁의 촐싹거리는 모습이 눈꼴 시려서 전태윤이 입을 열었다.“네 형수님이 나한테 고맙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상다리 부러지게 아침밥 차렸지, 뭐야.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서 너도 맛 좀 보라고 도시락 싸 온 거야.”전혁재는 멈칫했다.그러고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형수님이 나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으니 먹다 남은 건 절대 아니겠지.”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먹다 남은 거 먹게 하나씩 미리 다 맛보는 거였는데. 이 자식 못 까불게.’“형, 다른 볼일 있어?”“왜, 아침부터 먹을 거 가져다줬건만 벌써 내쫓는 거야?”전태윤은 불쾌하다는 듯 전혁재를 노려보다가 무의식중에 사무용 책상 끝머리에 놓인 수공 파키라 공예품이 보였다.전태윤은 파키라를 들어 이리저리 보다가 입을 열었다.“이거 할머니 거랑 같은 사람한테서 나온 작품 같은데.”할머니는 하예정의 선물을 집안 제일 환한 곳에 올려다 놓았기에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자주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전태윤은 그 작품에 익숙했다.“형 눈썰미가 아주 그냥.”전혁재는 자리에 앉아 전태윤이 가져다준 도시락을 먹으며 기분이 잔뜩 나서 말했다.“그거 형
하예정은 이 순간 전태윤이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서점에 왔다. 서점은 조용했다. 하예정은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했다.심효진은 파키라를 완성한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아. 너 요즘 왜 파키라만 만들고 있어? 이거 잘 팔려?”완성품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던 하예정은 심효진의 물음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요즘 쇼핑몰 매출이 좋아. 제일 핫한게 바로 이 파키라야. 매출 완전 수직 상승.”“혹시 너 입장 발표하고 나서 사람들이 너랑 예진 언니 안쓰러워서 사주는 거야?”하예정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그건 아닌 거 같아. 어릴 적 사진이랑 번호만 올렸고 다른 정보는 공개된 거 없어. 지금은 그 글도 다 삭제됐잖아.”글을 올린 사람이 아마도 하씨 집안 사람들한테 불똥이 튈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뭐 마침 전씨 가문 도련님의 기사 때문에 그 일이 묻히긴 했지. 더 일이 크게 번지기 전에 내가 반격한 거고. 그러니까 그런 가능성은 적어.”심효진은 전씨 가문 도련님의 기사라는 말에 이내 관심을 보이며 신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우리 고모가 그러는데 성소현이 너와 관련된 실검을 보고 자기가 묻힌 거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뒤에서 손 좀 써서 너에 관한 실검을 묻어버렸대.”이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성소현 씨가 결국 나 도와준 거네.”하예정은 뭔가 생각하더니 또다시 웃음을 지었다.“성소현 씨한테 고마워해야겠어. 그럼 나도 성소현 씨가 하루빨리 전씨 가문 도련님을 정복하길 기도해 줘야 하겠는걸. 재벌 집 딸이니 돈도 많고 권력도 있으니 전씨 가문 도련님 몸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아내기 쉬울 거야. 우리끼리 하는 말이었으니 말이지 앞으로 입조심해야겠어.”심효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우리도 그냥 해보는 말이지, 뭐. 전씨 가문 도련님이 정말 몸에 이상이 있다 한들 성소현이 어떻게 알겠어? 그 도련님 주위에는 종래로 젊은 여자가 없었으니 그거에 대해서는 아
주우빈의 부름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기고 하예정은 하예진이 주우빈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손에 든 것을 내려놓더니 카운터에서 나왔다.심효진은 하예정보다 더 행동이 빨랐다. 어느새 심효진은 어리둥절해하는 주우빈을 안아 들더니 볼에 뽀뽀 세례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주우빈에게 비행기 놀이를 해주니 주우빈은 신난다는 듯이 까르르 웃어댔다.“언니, 어떻게 왔어?”하예정은 시간을 확인했다. 때는 이미 10시가 넘었다. 이 시간에 하예진은 보통 집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한다. 주형인이 퇴근했을 때 식사 준비가 되지 않으면 또 잔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을 것이다.“하도 심심해서 나왔어. 우빈이가 기어코 여기 오겠다 그러더라고.”하예진은 태양 모자를 벗더니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곧 11월인데 날씨 왜 이렇게 더워.”관성의 가을과 여름은 온도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겨울도 그리 춥지 않다.그저 아침과 저녁에 조금 쌀쌀할 뿐, 낮에는 해만 떴다 하면 푹푹 쪘다.“열 시 넘었는데 언니 식사 준비 안 해도 돼?”하예정은 하예진이 무조건 밥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보통 사람은 점심때 밥을 먹어야 하니 그저 물은 것뿐이다.“우빈이는 다 먹이고 나왔어. 분유도 가져왔으니 오후까지 놀다 가도 괜찮아. 이따 너랑 배달이나 시켜 먹지 뭐. 아니면 나 지금 장 보고 와서 너희 가게 주방에서 밥해도 되고. 네 형부는... 쌀은 내가 씻었고 물도 맞춰놨어. 전기까지 다 꽂아 놨으니 알아서 해 먹겠지, 뭐. 채소는 다 씻어서 주방에 두었으니 데쳐서 먹든 볶아서 먹든 알아서 하라고 해.”하예진의 말을 들은 심효진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언니. 그럼 절반만 해둔 거예요?”“더치페이하기로 했으니, 반반만 하는 거지. 내가 다 하면 그게 어떻게 더치페이야? 더치페이가 돈에만 있는 줄 알아?”하예진은 요즘 주형인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니 더치페이 앞에서 하예진은 똑 부러지게 행동했다. 이 기회에 주형인을 잘 다스릴 생각으로 말이다.하예진은 앞으로
“저번에 예정이랑 제부가 사 온 선물들, 그날 더치페이 일로 나 진짜 뚜껑이 열리더라고. 그래서 다 내 방에 가지고 들어갔어.”하예진은 걸상을 빼서 앉으며 말했다. 하예정은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씻은 뒤 하예진의 입에 넣어주었고 심효진은 온수를 따라왔다.하예진은 물을 마시고 나서 하예진은 집에서 발생한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그녀는 꾹꾹 눌러 담은 화를 하예정에게 토로하고 싶어서 왔다.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우울증이 걸릴 것 같았다. 심효진과도 오랜 시간 봐 온 사이거니와 그녀도 입이 무거웠다.하예진이 말 했다.“다음날 깨나 보니 주형인이 이미 다들 집에 보냈더라고. 가면 갔지, 나도 빨리 갔으면 싶었어. 그런데 주형인이 글쎄 예정이 부부가 들고 온 선물을 다 보낸 거야. 우빈이 장난감까지 거의 다 털어갔어. 나 진짜 눈이 뒤집히더라니까. 게다가 주형인이 뭐라는 줄 알아? 우리는 부족한 게 없으니 자기 누나한테 다 줬대. 우리 시누이가 뭐가 부족한데? 두 사람 다 직장 있고 월급 또박또박 들어오고 게다가 우리 시부모님이 애까지 봐주고 있는데. 우리 시부모님은 퇴직금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받고 계시는데 매달 주형인한테서 돈 꼬박꼬박 다 받아 가셔. 그거 다 시누이한테 줄 걸? 그러고 자기들 월급은 다 적금 들어놓고 우리 시부모님 돈이랑 주형인 월급으로 생활하는 거 있지. 자기 동생이 장가를 안 갔으면 모를까, 장가도 갔고 대출도 매달 나가는데 어떻게 자기 동생 돈으로 생활하려고 들어.”하예진은 주형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드리는 돈이 분명 주서인한테로 가는 걸 알면서 매달 돈을 보내주면서도 정작 하예진한테는 인색했다. 하예진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하예진의 시댁 식구들은 연기도 잘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는 세상 좋은 사람인 양 굴더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본 모습을 드러냈다.“아들이 부모를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지만 누나랑 뭔 상관이야? 돈 주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적게 주라
하예정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녀는 주우빈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우빈이 어린이집 가고 싶어?”“싫어.”주우빈은 한창 엄마한테 엉겨 붙고 싶은 나이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하예진에게 말했다.“우빈이 어느 어린이집으로 보낼지는 생각해 뒀어? 다 생각하면 주말에 우빈이 데리고 미리 적응도 시킬 겸 놀러나 가자고. 재밌게 놀기만 하면 안 가겠다고 떼쓰지는 않을 거야.”이곳은 주말이면 많은 부모님이 아이를 데리고 곧장 어린이집으로 놀러 다니기도 한다.하예진은 머리를 끄덕이고 말했다.“또 있어. 나 진짜 화났잖아. 나 그 시누이가 네 형부한테 뭐라고 했냐면. 자기 두 아이를 관성에서 학교 보낼 테니까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나더러 픽업하래. 그리고 밥 차려 주고 공부도 가르쳐주란다. 나는 뭐 돈 안 받아도 되는 도우미야? 네 형부가 월 30만 원 더 주겠다면서 어쨌든 아이 하나든 셋이든 같은 일이라면서 개소리 치는 거 있지. 내 새끼는 내가 낳았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키우지만 다른 집 애를 내가 왜 키우면서 고생을 사서 하겠냐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문서 명의 자기 누나 앞으로 돌린대. 그렇게 되면 학군지에 집이 있는 게 되니까 두 아이의 입학도 쉽다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집문서 명의 이전하면 다시 되돌려 받기가 쉬운 줄 알아?”하예정과 심효진은 할 말을 잃었다.가끔 인터넷에서 누군가 유사한 사건을 썰로 푸는 것은 본 적은 있으나 하예진이 직접 겪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하예진은 이미 말을 꺼냈으니 브레이크 없이 술술 얘기했다. 그녀는 물 두 모금을 마시고 계속 말했다.“예정아. 나 네 형부한테 만약 집문서 명의 이전할 거라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인테리어 비용은 나한테 돌려달라고 얘기했어. 인테리어 비용만 7,600만 원 썼는데.”하예진은 몇 년 동안 직장에 다니며 모은 돈을 전부 가정을 경영하는 데 썼다.“만약 인테리어 비용 돌려주지 않으면 이혼할 거야. 이혼해도 그 돈은 다 돌려받을 것이고. 예정아,
이내 하예진이 말했다.“모든 남자가 다 주형인 같은 건 아니야. 효진아, 너 언니 때문에 결혼이 두려워서 시집 안 가려고 하면 절대 안 돼. 그럼 나 죄인 될 거야.”하예진은 심효진이 아직 미혼이고 집안에서 결혼을 재촉하는 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알아요, 남자든 여자든 다 진상이 있기 마련이죠. 결혼은 내가 좋아하고 평생을 맡겨도 될만한 사람과 하는 거니까 언니 영향 안 받아요. 그런데 앞으로 결혼을 생각하기 전에 꼭 상대편 가족의 인품은 체크하고 결정해야겠어요.”그녀의 엄마는 결혼은 한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정과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결혼할 남자의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고인 물에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니 알아두어야 할 점이 아주 많다.심효진은 하예정을 한번 슬쩍 쳐다보았다.심효진은 마음속으로 탄복했다.하예진의 결혼 생활은 정말 힘들어 보였다.게다가 아이가 있으니 이혼이 하고 싶어도 충동적으로 움직이면 안 되었다. 미리 뒷길을 생각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든 다음에야 자신감 있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하지만 하예정은 초고속 결혼이라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결혼 전에는 심지어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었다.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심효진은 자기는 절대 모르는 남자와 초고속 결혼을 못 할 것이라 생각했다.비록 지금의 상황으로 봤을 땐 전태윤은 주형인에 비해 훨씬 낫다. 최소한 하예정에게 곤란이 생겼을 때 전태윤은 발 벗고 나서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하예정과 반년 짜리 계약을 맺은 사람이니 심효진은 하예진의 앞날에 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예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은 하예진과 단둘이 해야 했기에 말을 아꼈다.“드르릉...”하예정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휴대폰을 확인한 그녀는 주우빈을 하예진에게 넘겨주며 말했다.“태윤 씨야. 나 전화 좀 받고 올게.”하예정은 하예진이 두 사람의 통화내용을 듣고 비밀을 알아낼까 봐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
전태윤은 가볍게 대답하고 계속 말했다.“이번 일로 그 사람들도 더는 함부로 하지 못할 거야.”하씨 집안 사람들에게는 이젠 후회만 남을 것이다.“평소에 점심 식사는 어디서 해요?”“밖에서.”전태윤은 다시 물었다.“나한테 밥 사주고 싶구나.”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시간 되면 내가 밥 살게요. 도움을 받아서 고마운데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밥 사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 비싼 곳은 안 돼요. 감당 못 할 수도 있어요.”전태윤은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서 밥을 사겠다며 비싼 곳에 갈까 봐 두려워하는 건 성의가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점심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퇴근하고 나면 외식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나 진짜 밥 사주고 싶다면 집에 일찍 들어갈 테니까 당신이 직접 해줘. 우리 둘만 먹을 수 있게 적당히 하면 돼.”전태윤은 전혁진에게 아내인 하예정이 만든 음식을 주기 싫었다. 아무리 사촌 동생이라고 해도 그건 안 되는 일이다.‘집 밥을 먹고 싶으면 자기도 빨리 장가가서 와이프한테 해달라고 하던가.’전혁진이 전태윤의 생각을 읽었다면 지금쯤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우리 형 역시나 질투했네!”전태윤은 저도 모르게 창피해졌다.자기는 절대 질투가 뭔지도 모르고 어떤 기분인지 느껴본 적도 없다고 큰소리치더니 아마 지금쯤은 제대로 그 기분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저녁에 일찍 들어와요. 밥 차려 놓고 기다릴게요.”“수고해.”전태윤은 절대 하예정이 아내로서 무조건 밥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만약 그녀가 차려준다면 그것은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두 사람 다 출근해야 하고 직장이 있다 보니 각자 바쁜 건 사실이다.가정이 행복해지려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함께 힘을 써야 한다.두 사람은 5분도 안 돼서 통화를 종료했다.통화를 종료한 후, 전태윤은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사무용 책상에 올려놓고 혼자 중얼거렸다.“나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상하네.”그는 왜 용건 없이 하
“이모! 아저씨!”우빈이가 달려 나왔다.그는 멀리서 하예정과 노동명을 보자마자 바로 선생님의 손을 뿌리치고 작은 가방을 멘 채로 빠르게 달려왔다.선생님은 깜짝 놀라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아왔다.“우빈아, 너무 빨리 뛰지 마. 넘어져! 조심해야지.”하예정이 몇 발짝 앞으로 나가며 소리쳤다.눈 깜짝할 사이에 우빈은 하예정의 곁으로 달려갔다.하예정은 쪼그리고 앉아 그를 안아 주었다. 그러다가 곧 몸부림치며 내려왔다.“이모 뱃속에는 제 동생이 있어요. 동생이 지금 자라는 중이라 이모가 저를 안아 주면 제가 이 동생을 누를지도 몰라요.”우빈은 가끔 이모의 배를 만지면서 하예정 배속의 동생과 인사 나누기도 했다.심지어 배속의 동생에게 왜 여동생이 아니고 남동생이냐고 묻기까지 했다.안타깝게도 그 동생은 아직 그에게 답을 줄 수가 없었다.하예정은 녀석에게 한 달 후, 동생에게 인사를 건네면 움직일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그때면 태아의 움직임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하예정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괜찮아. 우리 우빈이 전혀 무겁지 않은걸. 동생을 누르지 않을 거야.”임신해도 우빈이 정도는 거뜬하게 안을 수 있었다.다만 다들 우빈이가 함부로 움직여 실수로 그녀의 배를 다치게 할까 봐 안게 하지 못했을 뿐이다.우빈도 철이 든 아이였다.하예진이 그에게 다시는 하예정 품에 안기지 말라고 한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아까는 너무 기뻐서 참지 못하고 하예정에게 안긴 것이다. 하하!“아저씨.“우빈은 즐겁게 노동명의 앞으로 뛰어갔다.그는 자연스레 노동명의 허벅지에 올라가 두 손으로 노동명의 목을 껴안으며 달콤하게 소리쳤다.“아저씨, 보고 싶었어요.”“아저씨도 우리 우빈 너무 보고 싶었어.”노동명은 어린 녀석을 껴안으며 마음이 따스해졌다.“어제 아저씨를 못 봤더니 태윤 이모부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루 못 봤더니 일... 일...”우빈은 전태윤이 한 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그 뒷부분의 구절이 기억나지 않았다.“하루 못 보니 일 년이나
하예정의 차는 노씨 그룹 입구에 멈춰 서서 노동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노동명은 하예정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2분도 채 되지 않아 차를 타고 나왔다.“예정 씨.”노동명은 차창을 내리누르고는 웃으며 말했다.“우빈의 여행용 가방은 저에게 맡기면 돼요.”하예정이 대답했다.“어차피 저도 바래다 드려야 해요. 오빠, 우빈이 물건들도 전부 제 차에 있으니 먼저 우빈이 데리러 유치원에 가보세요. 유치원에서 곧 하학해요.”“네.”그러자 노동명이 물었다.“태윤이는 안 왔어요?”“너무 바빠서 얘기도 안 꺼냈어요.”노동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는 정말 바쁜 친구였다.하예정이 먼저 차를 몰았고 노동명의 차도 곧 뒤를 따랐다.그런데 유치원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여운별을 만나게 되었다.여운별은 매일 유치원 입구에서 하예정과 우연히 만날 기회를 잡고 있었다.“사모님, 또 조카 데리러 오신 거예요?”여운별은 입가에 우아한 웃음을 머금으며 걸어오는 하예정에게 물었다.하예정과 함께 있는 노동명을 보는 여운별은 아름다운 눈을 반짝거렸다. 하예정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면 여운별은 아마 노동명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전태윤이 하예정을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는데, 그녀가 그의 좋은 형제와 함께 다니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가!“네, 사모님도 시누이를 데리러 오신 거예요?”“네, 유치원에 다니는 동안만 매일 제가 데려다줘야 하거든요. 내일 주말이니까 이틀 쉬어도 되겠네요. 참, 쉬지도 못하겠네요. 애가 자꾸 놀이터에 가겠다고 조를 테니까요. 저희 시부모님께서는 집에서 쉬고는 계시지만 매일 수많은 사업을 해야 하거든요. 손님께 음식 대접도 해야 하고 고객과 함께 골프도 치러 가야 해서 너무 바쁘세요.”여운별은 거짓말을 점점 더 자연스럽게 했다.너무 잘해서 그런지 자신조차 사실 같다고 느껴졌다.마치 그녀가 정말로 용씨 사모님인 듯, 정말로 시누이와 시동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우리 시누이도 시부모님과 함께 놀지 않고 매일 저에게 달라붙어서
여운초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아주 꿀이 떨어지네요.”하예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웃음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자꾸 새어 나왔다.그녀도 가볍게 답장을 보냈다.“운초 씨도 도련님 사랑 듬뿍 받으시잖아요.”둘은 마치 꿀단지에 잠긴 듯, 사랑의 달콤함에 흠뻑 젖어 있었다.여운초가 바빠 보였기에 하예정은 더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그녀가 천천히 제 차로 돌아와 막 차에 오르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주형인이 서 있었다.“처제.”주형인은 다가오며 그녀가 혼자인 것을 보고 물었다.“우빈이는 안에 데려다줬어?”“네. 우빈이 보고 싶으세요?”주형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손님 모시고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빈이 얼굴이나 볼까 해서 왔어. 아직 안 왔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찍일 줄이야.”“우빈이는 잘 지내요.”하예정은 전 형부에게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주형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우빈이는 잘 지낼 거라 믿어. 네가 돌보고 있으니 나랑 너희 언니도 마음 놓고 있어. 우빈이한테 들었는데 너희 언니 출장 갔다며? 오래 걸린다고 하던데.”“그건 왜요?”“아, 별일은 아니고 그냥 물어봤어.”잠시 침묵하던 주형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출장, 정말 오래 걸려?”“정확히는 몰라요.”“아, 그렇구나.”주형인의 얼굴엔 아쉬움이 스쳤다.하예정은 차갑게 말했다.“더 할 얘기 없으시면, 저 먼저 가볼게요.”“아, 그래.”주형인은 무언가 말하려다 끝내 삼켰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하예정이 차에 올라 떠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자신의 차로 향했다.주형인은 그때 이후로 다시 회사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젠 갈 곳도, 그를 받아줄 곳도 없었다. 변변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관성시에서 그는 이미 유명했다. 나쁜 쪽으로 유명했다. 그 이름에 따라붙는 것은 조롱뿐이었다.사람들은 그를 두고 인과응보라며 혀를 찼다. 뿌린 대로 거
그래서 녀석의 짐은 미리 노동명에게 맡겨야 했다.하예정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우빈이가 선생님의 손을 잡고 점점 멀어지자 하예정은 그제야 주차해 둔 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그때, 막 차에 오르는 용씨 가문 사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두 명의 경호원이 그녀의 곁을 바짝 지키고 있었다.한 경호원이 공손히 차 문을 열어주며 예의를 갖췄다.용씨 가문 사모님은 살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는 하예정을 발견하자 미소를 머금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예의상 하예정도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잠시 후 여운별을 태운 고급 승용차는 부드럽게 하예정의 시야에서 멀어졌다.하예정은 시선을 거두며 휴대폰을 꺼내 여운초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운초 씨, 용 사모님을 또 만났어요. 그나저나 동생분께서 찾아와 귀찮게 굴지는 않으셨나요?”여운초는 아직 집을 나서지 않은 상태였다. 오전에는 화상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꽃집에 들를 틈이 없었다.회사에도 처리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통화로 해결할 업무가 많이 남아 있었다.어쨌든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저녁이 되면 남편과 함께 여유롭게 서원 리조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그렇게 또 주말이 다가왔다.주말에는 대체로 업무에서 손을 뗐다. 급한 일이 생기면 한동호가 대신 해결해 주곤 했다.꽃집도 믿음직한 직원들이 지키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주말을 남편과 함께 오롯이 둘만의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내일 밤은 시어머니와 함께 연회에 참석할 계획이었다.“네, 괜찮아요. 곧 있다 올지도 모르겠네요.”여운초는 하예정에게 답장을 보냈다.“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용씨 가문 사모님과 여운별이 제 눈에 너무 겹쳐 보이더라고요. 목소리도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여운별은 지금 남자친구도 없고 경호원을 둘 형편도 안 돼요. 고급 승용차라니, 여운별이 타는 차는 제가 익히 알아요.”여운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다음에 용씨 가문 사모님을
하지만 하예정은 아직 용씨 가문 사모님과 여운별이 한자리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그녀가 여운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두 사람이 동시에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의혹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을 것이다.여운별은 애초에 하예정을 기다리지 않았다.지금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어야 했다. 만약 그녀가 미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너무 작위적으로 보였을 것이다.지나친 의도는 하예정의 의심을 부추겼을 것이다.하예정이 그녀를 조사하고 있다고 용태호가 알려준 적이 있었다.물론, 아무리 뒤져도 쓸 만한 정보는 나오지 않을 터였다.하예정은 이미 그녀가 여운별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었다.여운별은 문득 가장 증오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언젠가 마주했던 언니의 목소리, 그 익숙한 울림이. 하예정의 의심을 부추긴 것은 분명 여운초의 말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다행히도 용태호는 능수능란한 사람이었다.하예정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그녀가 찾아낼 수 있는 건 모두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허상일 뿐이었다.그러나 하예정이 심효진과 친밀한 사이라는 점은 우려할 만했다. 심효진은 소씨 가문의 며느리였고, 소씨 가문은 정보망이 촘촘하기로 유명했다.하예정이 누구를 조사하려면 소씨 가문의 손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하예정은 빈손이었다. 여운별이 여씨 가문의 둘째 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운별은 마음 한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그리고 그 여유는 곧 그녀의 표정에 스며들어 하예정을 마주할 때면 그녀는 점점 더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마치 자신이 진짜 용씨 가문 사모님인 것처럼, 여운별이라는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말이다.용태호는 그녀한테 내일 밤에 있을 연회에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참석하라고 말했다. 용씨 가문 사모님의 신분으로 참석하라는 것이었다.그 연회에는 관성시 상류 사회의 귀부인들이 모일 터였다.전씨 가문의 명해은도 내일 밤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며 며느리인 여운초도 데려갈
하예정이 자주 타는 차는 이미 집 앞에 멈춰 서 있었다.경호원은 우빈에게 차 문을 열어주곤 그를 차에 태운 뒤 안전벨트를 매주었다.하예정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하이힐을 벗고 편안한 신발을 갈아 신고는 말했다. “우빈이 안전벨트 다 맸어?”하예정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아저씨가 우빈이 도와서 안전벨트 다 매주셨어요. 작은이모, 이제 출발하셔도 돼요.”하예정은 웃으며 고개를 돌린 뒤 시동을 걸었다.20분 뒤 두 대의 차가 유치원 앞 주차장에 멈춰 섰다.하예정은 차에서 내렸다.우빈이는 이미 스스로 안전벨트를 풀고 작은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하예정이 차 문을 열자 우빈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이모, 오후에 아저씨가 데리러 올 때 내 캐리어도 챙겨달라고 부탁해 주세요.”“집에 먼저 들르지 않을 거니?”하예정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집에 가서 밥부터 먼저 먹고 갈래?”우빈은 큰 눈을 반짝이며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아저씨는 절대 나를 배고프게 하지 않아요. 아저씨랑 가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우빈에게 있어서 노동명은 이미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거대한 나무와 같아서 그 곁에 있으면 세상 어떤 두려움도 사라지게 된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우빈이 노동명에게 전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하예정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노동명과 하예진이 결혼을 한다면 세 사람은 분명히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하지만 이혼 후 아이를 홀로 키우며 재혼하는 여자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두 번째 남편 또는 그의 가족들이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인다 해도 그 아이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명과 그의 가족들은 우빈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바로 하예진이 노동명에게 마음을 열게 된 이유였다.노씨 가문은 노동명이 평생토록 우빈만을 아들처럼 생각하며 지내도 괜찮다는 마음이었다.비록 우빈은 노동명의 친아들이
“잘 자요.”하예정은 남편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넨 뒤, 문을 살며시 닫았다.전태윤은 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그가 먼저 서재에서 자겠다고 말했지만 아내에게 밀려 나가며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쫓겨난 기분이 들었다.전태윤은 콧등을 문지르며 어쩔 수 없이 서재로 발걸음을 돌렸다.그날 밤은 그렇게 고요하게 보냈다.다음 날 아침, 전태윤이 일어났을 때 그의 아내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를 위한 꿀물도 준비해 놓았다.“여보, 좋은 아침이에요.”하예정은 조카 우빈이가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우빈의 작은 책가방을 들고 우빈이와 부엌을 나오던 참에 막 내려온 전태윤을 마주쳤다.그녀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꿀물을 준비했어요. 마시는 거 잊지 마요.”전태윤은 어젯밤 술에 취하지 않았지만 독한 술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숙취로 인한 두통을 걱정한 하예정은 그를 위해 세심하게 꿀물을 준비한 것이다.전태윤이 이렇게 다정하고 배려 깊은 아내를 만난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하예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알겠어, 좀 있다 마실게. 오늘 꽤 일찍 일어났네.”평소에는 항상 그가 먼저 일어났었다.“네, 우빈이가 일찍 일어나서요.”“이모부!”우빈은 맑은 목소리로 전태윤을 불렀다.전태윤은 다가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유치원에서 말 잘 들어야 해.”우빈은 대답했다.“저 말 잘 들어요. 아주 잘 듣고 있어요. 선생님과 친구들이 저를 엄청 좋아해요.”“그래, 그래, 모두가 너를 좋아하고말고.”전태윤은 웃으며 우빈의 작은 얼굴을 가볍게 꼬집었다.우빈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럼요, 남녀노소 누구나 다 저를 좋아해요. 관성에서 가장 잘나가는 어린이라고요.”하예정은 웃음을 터뜨리며 우빈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그거, 지율 삼촌한테서 배운 거지?”전지율은“관성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를 늘 입에 달고 다녔다.우빈은 전지율과 자주 놀았기 때문에 그에게서 이런 말장난을 배운
“술 냄새도 별로 안 나요. 제가 잠들면 천둥이 쳐도 깨지 못할걸요. 이렇게 고생스레 서재에서 밤을 보낼 필요 없어요.”하예정은 그녀의 아랫배에 올려놓은 전태윤의 큰 손을 잡으며 말했다.“내가 샤워도 하고 따뜻한 물도 마시고 껌 두 알을 먹어서 술 냄새를 좀 없앴어... 창빈이가 그러는데 내 몸에 술 냄새가 심하다고 그러던데.”하예정은 작은 소리로 전창빈을 몇 마디 욕했다.전창빈은 진실만 말했을 뿐인데도 말이다. 전창빈은 전태윤이 입만 열면 술 냄새가 확 난다고 느꼈다. 그리고 전태윤 본인도 자신의 몸에서 술 냄새가 풍겨 하예정이 맡을까 봐 걱정한다고 생각했다.“창빈 도련님이 태윤 씨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만났어요?”하예정이 물었다.전태윤이 대답했다.“응. 원림성의 A시로 선우씨 가문에서 가정 요리사에 지원하겠다고 했어. 예정아, 할머니께서 창빈에게 골라주신 아내가 바로 선우씨 가문의 큰손녀 선우민아 씨라고 해.”“저도 알아요. 어머님이 이 사실을 얘기하자마자 우리 할머니가 창빈 도련님을 위해 아내를 정해주셨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요..”전태윤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역시 내 아내답게 똑똑하네.”“저는 멍청하지 않거든요.”“그럼. 내 아내는 늘 똑똑하지.”만약 멍청하다면 전태윤의 마음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우리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사람은 전부 멀리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하예정과 여운초만 관성 출신이었다.전태윤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할머니께서는 나와 이진이를 가장 아끼셨구나. 우리에게 관성의 아내를 골라주셨잖아.”그는 말하면서 또 하예정의 입술에 몇 번 뽀뽀했다.전태윤은 사랑하는 아내를 침대에 데려가고 싶었다.그러나 아기를 위해 그는 또 애써 참았다.“이혁 도련님과 전우 도련님의 아내는 어디 분이세요?”“몰라.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어. 어차피 관성의 사람 아닐 거야. 요즘 두 사람 다 관성에 있는 걸 못 봤어.”전태윤은 하예정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는 아내를 방으로 데려다주며 부드럽게 말을 건
“형, 너무 늦었어. 형도 힘들 텐데 그만 쉬어 나도 이만 돌아갈게.”전태윤과 얘기를 다 마친 전창빈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전태윤이 말을 건넸다.“너무 늦었는데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가. 묵을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전창빈이 말을 이었다.“안 멀어. 여기 방은 있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잠자리를 바꾸면 잠도 잘 안 오고.”전창빈은 장소를 옮기면 새로운 거주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침대를 가리는 사람이 잠자리를 바꾸면 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곤 한다.전창빈의 개인 별장이 그리 멀지 않고 잠자리를 가리는 전창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전태윤도 더는 전창빈을 만류하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천천히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가 문자를 보내라고 당부했다.“그럼 얼른 쉬어.”전태윤은 배웅하러 일어나지 않았다.전창빈이 멀리 떠난 뒤 전태윤은 물을 반 잔 더 마시고는 다시 몸의 냄새를 맡았지만, 여전히 술 냄새가 났다.그는 하예정에게 영향을 줄까 봐, 그녀가 깨어날까 봐 서재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그는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 입구로 돌아갔다. 그러나 문을 밀어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 잠시 안을 바라만 보다가 몸을 돌려 서재로 들어갔다.하예정은 한밤중까지 자고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야 했다.자기 전에 우유 한 잔을 마시면 한밤중에 일어나곤 한다.화장실에 다녀온 하예정은 잠에서 깼다.그녀는 그제야 전태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침대 앞으로 돌아와 앉아 침대 머리맡에서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이미 새벽 세 시가 넘었다.전태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돌아오지 않은 건가? 언제 돌아오는지 문자도 없고.’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참 후에야 전태윤이 전화를 받았다.“여보, 아직 안 왔어요? 많이 바빠요?”하예정은 관심 있게 물었다.그는 예전에 아무리 바빠도 새벽에는 반드시 집에 돌아왔다.그러나 지금 새벽 3시가 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사업에 관한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