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은 도시락 두 개를 사무용 책상에 올려놓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형수님이 너랑 나 같은 회사에 출근한다는 걸 알고 너 먹으라고 챙겨줬어. 맨날 밖에 음식 먹지 마, 깨끗하지 않아.”“형 예전에 맨날 밖에서 먹었잖아.”비록 가문의 호텔이지만 그래도 밖은 맞다.전혁진은 커피를 내려놓고 다급히 도시락통을 열면서 말했다.“토요일에 형수님 손맛 보고 나 진짜 그 맛에 반했다니까. 오 마이 갓, 뭐가 이렇게 많아. 종류도 다양하고 게다가 보기까지 좋으니 맛은 더 말할 것 없겠지.”전혁재는 두 도시락통을 다 열어보고는 하예정의 솜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손재주도 있는 데다가 음식 솜씨도 좋다며 말이다.‘어쩐지 할머니가 눈독 들이셔서 기어코 형한테 결혼하라 했지.’그도 그럴 것이 하예정은 장점이 많은 여자다.전재혁의 촐싹거리는 모습이 눈꼴 시려서 전태윤이 입을 열었다.“네 형수님이 나한테 고맙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상다리 부러지게 아침밥 차렸지, 뭐야.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서 너도 맛 좀 보라고 도시락 싸 온 거야.”전혁재는 멈칫했다.그러고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형수님이 나한테 가져다주라고 했으니 먹다 남은 건 절대 아니겠지.”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먹다 남은 거 먹게 하나씩 미리 다 맛보는 거였는데. 이 자식 못 까불게.’“형, 다른 볼일 있어?”“왜, 아침부터 먹을 거 가져다줬건만 벌써 내쫓는 거야?”전태윤은 불쾌하다는 듯 전혁재를 노려보다가 무의식중에 사무용 책상 끝머리에 놓인 수공 파키라 공예품이 보였다.전태윤은 파키라를 들어 이리저리 보다가 입을 열었다.“이거 할머니 거랑 같은 사람한테서 나온 작품 같은데.”할머니는 하예정의 선물을 집안 제일 환한 곳에 올려다 놓았기에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자주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전태윤은 그 작품에 익숙했다.“형 눈썰미가 아주 그냥.”전혁재는 자리에 앉아 전태윤이 가져다준 도시락을 먹으며 기분이 잔뜩 나서 말했다.“그거 형
하예정은 이 순간 전태윤이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서점에 왔다. 서점은 조용했다. 하예정은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했다.심효진은 파키라를 완성한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아. 너 요즘 왜 파키라만 만들고 있어? 이거 잘 팔려?”완성품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던 하예정은 심효진의 물음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요즘 쇼핑몰 매출이 좋아. 제일 핫한게 바로 이 파키라야. 매출 완전 수직 상승.”“혹시 너 입장 발표하고 나서 사람들이 너랑 예진 언니 안쓰러워서 사주는 거야?”하예정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그건 아닌 거 같아. 어릴 적 사진이랑 번호만 올렸고 다른 정보는 공개된 거 없어. 지금은 그 글도 다 삭제됐잖아.”글을 올린 사람이 아마도 하씨 집안 사람들한테 불똥이 튈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뭐 마침 전씨 가문 도련님의 기사 때문에 그 일이 묻히긴 했지. 더 일이 크게 번지기 전에 내가 반격한 거고. 그러니까 그런 가능성은 적어.”심효진은 전씨 가문 도련님의 기사라는 말에 이내 관심을 보이며 신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우리 고모가 그러는데 성소현이 너와 관련된 실검을 보고 자기가 묻힌 거 같아서 기분이 언짢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뒤에서 손 좀 써서 너에 관한 실검을 묻어버렸대.”이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성소현 씨가 결국 나 도와준 거네.”하예정은 뭔가 생각하더니 또다시 웃음을 지었다.“성소현 씨한테 고마워해야겠어. 그럼 나도 성소현 씨가 하루빨리 전씨 가문 도련님을 정복하길 기도해 줘야 하겠는걸. 재벌 집 딸이니 돈도 많고 권력도 있으니 전씨 가문 도련님 몸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아내기 쉬울 거야. 우리끼리 하는 말이었으니 말이지 앞으로 입조심해야겠어.”심효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우리도 그냥 해보는 말이지, 뭐. 전씨 가문 도련님이 정말 몸에 이상이 있다 한들 성소현이 어떻게 알겠어? 그 도련님 주위에는 종래로 젊은 여자가 없었으니 그거에 대해서는 아
주우빈의 부름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기고 하예정은 하예진이 주우빈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손에 든 것을 내려놓더니 카운터에서 나왔다.심효진은 하예정보다 더 행동이 빨랐다. 어느새 심효진은 어리둥절해하는 주우빈을 안아 들더니 볼에 뽀뽀 세례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주우빈에게 비행기 놀이를 해주니 주우빈은 신난다는 듯이 까르르 웃어댔다.“언니, 어떻게 왔어?”하예정은 시간을 확인했다. 때는 이미 10시가 넘었다. 이 시간에 하예진은 보통 집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한다. 주형인이 퇴근했을 때 식사 준비가 되지 않으면 또 잔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을 것이다.“하도 심심해서 나왔어. 우빈이가 기어코 여기 오겠다 그러더라고.”하예진은 태양 모자를 벗더니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곧 11월인데 날씨 왜 이렇게 더워.”관성의 가을과 여름은 온도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겨울도 그리 춥지 않다.그저 아침과 저녁에 조금 쌀쌀할 뿐, 낮에는 해만 떴다 하면 푹푹 쪘다.“열 시 넘었는데 언니 식사 준비 안 해도 돼?”하예정은 하예진이 무조건 밥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보통 사람은 점심때 밥을 먹어야 하니 그저 물은 것뿐이다.“우빈이는 다 먹이고 나왔어. 분유도 가져왔으니 오후까지 놀다 가도 괜찮아. 이따 너랑 배달이나 시켜 먹지 뭐. 아니면 나 지금 장 보고 와서 너희 가게 주방에서 밥해도 되고. 네 형부는... 쌀은 내가 씻었고 물도 맞춰놨어. 전기까지 다 꽂아 놨으니 알아서 해 먹겠지, 뭐. 채소는 다 씻어서 주방에 두었으니 데쳐서 먹든 볶아서 먹든 알아서 하라고 해.”하예진의 말을 들은 심효진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언니. 그럼 절반만 해둔 거예요?”“더치페이하기로 했으니, 반반만 하는 거지. 내가 다 하면 그게 어떻게 더치페이야? 더치페이가 돈에만 있는 줄 알아?”하예진은 요즘 주형인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니 더치페이 앞에서 하예진은 똑 부러지게 행동했다. 이 기회에 주형인을 잘 다스릴 생각으로 말이다.하예진은 앞으로
“저번에 예정이랑 제부가 사 온 선물들, 그날 더치페이 일로 나 진짜 뚜껑이 열리더라고. 그래서 다 내 방에 가지고 들어갔어.”하예진은 걸상을 빼서 앉으며 말했다. 하예정은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씻은 뒤 하예진의 입에 넣어주었고 심효진은 온수를 따라왔다.하예진은 물을 마시고 나서 하예진은 집에서 발생한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그녀는 꾹꾹 눌러 담은 화를 하예정에게 토로하고 싶어서 왔다.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우울증이 걸릴 것 같았다. 심효진과도 오랜 시간 봐 온 사이거니와 그녀도 입이 무거웠다.하예진이 말 했다.“다음날 깨나 보니 주형인이 이미 다들 집에 보냈더라고. 가면 갔지, 나도 빨리 갔으면 싶었어. 그런데 주형인이 글쎄 예정이 부부가 들고 온 선물을 다 보낸 거야. 우빈이 장난감까지 거의 다 털어갔어. 나 진짜 눈이 뒤집히더라니까. 게다가 주형인이 뭐라는 줄 알아? 우리는 부족한 게 없으니 자기 누나한테 다 줬대. 우리 시누이가 뭐가 부족한데? 두 사람 다 직장 있고 월급 또박또박 들어오고 게다가 우리 시부모님이 애까지 봐주고 있는데. 우리 시부모님은 퇴직금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받고 계시는데 매달 주형인한테서 돈 꼬박꼬박 다 받아 가셔. 그거 다 시누이한테 줄 걸? 그러고 자기들 월급은 다 적금 들어놓고 우리 시부모님 돈이랑 주형인 월급으로 생활하는 거 있지. 자기 동생이 장가를 안 갔으면 모를까, 장가도 갔고 대출도 매달 나가는데 어떻게 자기 동생 돈으로 생활하려고 들어.”하예진은 주형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드리는 돈이 분명 주서인한테로 가는 걸 알면서 매달 돈을 보내주면서도 정작 하예진한테는 인색했다. 하예진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하예진의 시댁 식구들은 연기도 잘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는 세상 좋은 사람인 양 굴더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본 모습을 드러냈다.“아들이 부모를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지만 누나랑 뭔 상관이야? 돈 주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적게 주라
하예정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녀는 주우빈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우빈이 어린이집 가고 싶어?”“싫어.”주우빈은 한창 엄마한테 엉겨 붙고 싶은 나이다.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하예진에게 말했다.“우빈이 어느 어린이집으로 보낼지는 생각해 뒀어? 다 생각하면 주말에 우빈이 데리고 미리 적응도 시킬 겸 놀러나 가자고. 재밌게 놀기만 하면 안 가겠다고 떼쓰지는 않을 거야.”이곳은 주말이면 많은 부모님이 아이를 데리고 곧장 어린이집으로 놀러 다니기도 한다.하예진은 머리를 끄덕이고 말했다.“또 있어. 나 진짜 화났잖아. 나 그 시누이가 네 형부한테 뭐라고 했냐면. 자기 두 아이를 관성에서 학교 보낼 테니까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나더러 픽업하래. 그리고 밥 차려 주고 공부도 가르쳐주란다. 나는 뭐 돈 안 받아도 되는 도우미야? 네 형부가 월 30만 원 더 주겠다면서 어쨌든 아이 하나든 셋이든 같은 일이라면서 개소리 치는 거 있지. 내 새끼는 내가 낳았으니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키우지만 다른 집 애를 내가 왜 키우면서 고생을 사서 하겠냐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문서 명의 자기 누나 앞으로 돌린대. 그렇게 되면 학군지에 집이 있는 게 되니까 두 아이의 입학도 쉽다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집문서 명의 이전하면 다시 되돌려 받기가 쉬운 줄 알아?”하예정과 심효진은 할 말을 잃었다.가끔 인터넷에서 누군가 유사한 사건을 썰로 푸는 것은 본 적은 있으나 하예진이 직접 겪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하예진은 이미 말을 꺼냈으니 브레이크 없이 술술 얘기했다. 그녀는 물 두 모금을 마시고 계속 말했다.“예정아. 나 네 형부한테 만약 집문서 명의 이전할 거라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인테리어 비용은 나한테 돌려달라고 얘기했어. 인테리어 비용만 7,600만 원 썼는데.”하예진은 몇 년 동안 직장에 다니며 모은 돈을 전부 가정을 경영하는 데 썼다.“만약 인테리어 비용 돌려주지 않으면 이혼할 거야. 이혼해도 그 돈은 다 돌려받을 것이고. 예정아,
이내 하예진이 말했다.“모든 남자가 다 주형인 같은 건 아니야. 효진아, 너 언니 때문에 결혼이 두려워서 시집 안 가려고 하면 절대 안 돼. 그럼 나 죄인 될 거야.”하예진은 심효진이 아직 미혼이고 집안에서 결혼을 재촉하는 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심효진이 웃으며 말했다.“알아요, 남자든 여자든 다 진상이 있기 마련이죠. 결혼은 내가 좋아하고 평생을 맡겨도 될만한 사람과 하는 거니까 언니 영향 안 받아요. 그런데 앞으로 결혼을 생각하기 전에 꼭 상대편 가족의 인품은 체크하고 결정해야겠어요.”그녀의 엄마는 결혼은 한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정과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결혼할 남자의 가족과 친구들이라는 고인 물에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니 알아두어야 할 점이 아주 많다.심효진은 하예정을 한번 슬쩍 쳐다보았다.심효진은 마음속으로 탄복했다.하예진의 결혼 생활은 정말 힘들어 보였다.게다가 아이가 있으니 이혼이 하고 싶어도 충동적으로 움직이면 안 되었다. 미리 뒷길을 생각해 상황을 유리하게 만든 다음에야 자신감 있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하지만 하예정은 초고속 결혼이라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결혼 전에는 심지어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었다.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심효진은 자기는 절대 모르는 남자와 초고속 결혼을 못 할 것이라 생각했다.비록 지금의 상황으로 봤을 땐 전태윤은 주형인에 비해 훨씬 낫다. 최소한 하예정에게 곤란이 생겼을 때 전태윤은 발 벗고 나서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하예정과 반년 짜리 계약을 맺은 사람이니 심효진은 하예진의 앞날에 대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예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은 하예진과 단둘이 해야 했기에 말을 아꼈다.“드르릉...”하예정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휴대폰을 확인한 그녀는 주우빈을 하예진에게 넘겨주며 말했다.“태윤 씨야. 나 전화 좀 받고 올게.”하예정은 하예진이 두 사람의 통화내용을 듣고 비밀을 알아낼까 봐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
전태윤은 가볍게 대답하고 계속 말했다.“이번 일로 그 사람들도 더는 함부로 하지 못할 거야.”하씨 집안 사람들에게는 이젠 후회만 남을 것이다.“평소에 점심 식사는 어디서 해요?”“밖에서.”전태윤은 다시 물었다.“나한테 밥 사주고 싶구나.”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시간 되면 내가 밥 살게요. 도움을 받아서 고마운데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밥 사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 비싼 곳은 안 돼요. 감당 못 할 수도 있어요.”전태윤은 웃음이 나왔다. 고마워서 밥을 사겠다며 비싼 곳에 갈까 봐 두려워하는 건 성의가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점심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퇴근하고 나면 외식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나 진짜 밥 사주고 싶다면 집에 일찍 들어갈 테니까 당신이 직접 해줘. 우리 둘만 먹을 수 있게 적당히 하면 돼.”전태윤은 전혁진에게 아내인 하예정이 만든 음식을 주기 싫었다. 아무리 사촌 동생이라고 해도 그건 안 되는 일이다.‘집 밥을 먹고 싶으면 자기도 빨리 장가가서 와이프한테 해달라고 하던가.’전혁진이 전태윤의 생각을 읽었다면 지금쯤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우리 형 역시나 질투했네!”전태윤은 저도 모르게 창피해졌다.자기는 절대 질투가 뭔지도 모르고 어떤 기분인지 느껴본 적도 없다고 큰소리치더니 아마 지금쯤은 제대로 그 기분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저녁에 일찍 들어와요. 밥 차려 놓고 기다릴게요.”“수고해.”전태윤은 절대 하예정이 아내로서 무조건 밥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만약 그녀가 차려준다면 그것은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두 사람 다 출근해야 하고 직장이 있다 보니 각자 바쁜 건 사실이다.가정이 행복해지려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함께 힘을 써야 한다.두 사람은 5분도 안 돼서 통화를 종료했다.통화를 종료한 후, 전태윤은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사무용 책상에 올려놓고 혼자 중얼거렸다.“나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상하네.”그는 왜 용건 없이 하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가게로 돌아가려던 하예정은 마침 가게에서 나오는 하예진이 보였다."어디가, 언니?""마트에 가서 장 좀 보려고, 배달 음식 좀 적게 먹어."“우빈이 좀 봐줘."하예정은 알았다고 한 후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었다.하예정은 새 차를 운전하지 않고 낡은 스쿠터를 타고 출근했다. 하예정에겐 그 스쿠터가 더 편했다.또한 출퇴근길에 차가 막힐 위험도 줄일 수 있다."언니, 생활비 좀 보낼게."하예정은 하예진이 주형인의 돈으로 이것저것 사는 것이 싫어서 하예진에게 계좌이체 해주었다.하예진은 대꾸도 하지 않고 하예정의 스쿠터를 타고 멀리 사라졌다. 채솟값 정도는 하예진에게도 있다.하예진을 보낸 후 하예정은 다시 가게로 돌아왔다. 우빈이가 처음으로 가게에 온 것은 아니다. 심효진과도 꽤 친하여 엄마가 없어도 울지도 않고 가게를 두리번거리면서 펜을 만지작거리거나 책을 만지작거렸다."그분이 널 찾는 중?"심효진이 살짝 떠보면서 말했다."출근 시간에도 전화하는 것을 보니 네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그 진상들이 나한테 연락했는지 물었어."심효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그래도 네 일을 마음속에 두고 있다는 거잖아. 예정아, 어쩌면 너랑 태윤 씨 잘 될 수 있지 않을까?""요즘 지내보니 사람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인연이 될 사람은 자연스레 인연이 되겠지, 뭐."전태윤은 여전히 그녀가 다가가는 것을 밀어내고 있고 하예정도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만약 인연이라면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아침에 입술도 부딪혔는데 서로 더 다가가려 하지 않은 것은 놀랄 일이었다.아직도 남녀 사이에 우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전태윤을 생각하니 하예정은 자신이 골동품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 나이에 이렇게 순진한 남자라니!다른 한 면으로 볼 때는 전태윤은 사랑 앞에서 차가웠다. 할머니가 굳이 빨간 실을 두 사람에게 묶어주길 바랐던 원인이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이 쉰에도 아내를 맞이하기 어려울 것이다."효진아, 남
이날 저녁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돌아오는 날은 일요일이었다.휴식날인데 우빈이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우빈이는 일어난 후 곧장 하예정이 자는 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다. 전태윤이 안에서 방문을 열어주었다.“이모부, 이모 일어났어요? 들어가서 이모랑 같이 놀래요.”전태윤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꼬맹이와 화내지 말자고 스스로 가슴을 달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우빈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지? 평소에 어린이집 가야 하는 날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더니 쉬는 날만 되면 아주 일찍 일어나더라.”우빈이가 입을 뾰족이 내밀면서 말했다.“이모부, 나는 한 번 깨어나면 더는 못 자요. 나랑 놀아 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심심해요. 이모 찾아와서 노는 수밖에 없어요.”현재 우빈이는 시 중심에 자리 잡은 전태윤의 개인 별장에서 지내고 있다. 서원 리조트에 있을 때는 그나마 함께 놀아 주는 어린이들이 있었기에 이모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전태윤은 하는 수 없이 두 팔로 우빈이를 부쩍 들어 품에 안으면서 말했다.“이모는 아직도 자고 있어. 이모부가 우빈이랑 같이 놀아 줄게. 뭐 놀까?”“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면 좋지 않을까?”우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싫어요. 혼자 놀면 재미가 없어요. 이모부는 장난감도 안 놀 거잖아요.”전태윤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알았어. 이모부랑 같이 아침 조깅하러 나갈까? 이모부가 가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얌전하게 기다려야 해?”그는 우빈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려놓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신신당부했다.“침실에 들어가서 이모를 깨우면 안 돼. 알았지? 이모부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우빈이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전태윤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서 먼저 운동복 바지부터 바꿔 입고 우빈이가 그사이에 침실에 들어가서 하예정을 깨울까 봐 걱정되어 웃옷을 입으면서 밖으로 나왔다.우빈이가 조용하게 제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야 전태윤은 안도의
윤미라는 아들 노동명이 무서웠다.“알았어. 꾸준히 재활 치료할 거야. 네가 돌아올 때면 내가 2~3m나 걸을 수 있을지도 몰라. 참, 언제 돌아올 거야?”하예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대답했다.“설까지 있을 계획에요. 설날이 되면 제가 돌아갈게요.”“그렇게 오래 있겠다고? 우빈이는 어쩌려고?”“예정이가 돌봐주기 때문에 괜찮아요. 제가 보고 싶을 때마다 주말에 시간을 내서 우빈이 보러 가주세요. 시간이 없으면 제부한테 부탁해서 우빈이를 저한테 데려오라고 하는 수밖에 없고요.”하예진은 점점 더 바빠질 것이다.당분간 아들 우빈과 함께할 시간이 적을 것이다.“우빈이가 태어날 때부터 예정이가 곁에서 보살펴서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설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요.”“사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그래!”노동명이 한 마디 내뱉었다.우빈이는 핑계일 뿐, 사실 노동명이 그녀가 그리웠다.시간이 그토록 오래 걸리면 노동명은 자신이 하예진이 무척 보고싶을 것으로 예상했다.전화도 하고 영상통화도 할 수 있지만 그리움의 고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우빈은 어려서부터 녀석을 키워준 하예정이 있어서 하예진이 곁에 없다고 해도 바로 적응할 수 있지만 노동명은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요즘 그는 매일 하예진을 보는 것에 익숙했다.“예진아,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내가 혼자 널 보러 가도 돼? 걱정하지 마. 우리 집에 개인 비행기가 있어서 내가 그 비행기를 타고 경호원들과 함께 가면 돼. 경호원들이 날 돌봐줄 거야. 네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거고. 널 보러 갈 뿐이야. 너랑 밥 먹고 얘기도 하면서 말이야. 내가 주말마다 널 보러 갔다가 월요일에 돌아올게. 나도 출근해야 하니까.”하예진은 마음이 따듯해졌다.“그럼 주말에 우빈이도 데리고 오세요.”“난 너와 단둘이 주말을 보내고 싶은데 우빈이 녀석도 데리고 가야 해?”하예진은 얼굴이 빨개졌고 이내 웃으면서 대답했다.“동명 씨가 혼자 온 걸 알게 되면 우빈이가 삐질걸
“앞으로 더는 허튼 생각 하지 말아요. 저는 단 한 번도 동명 씨를 싫어한 적이 없어요. 제가 돼지처럼 뚱뚱하고 못생겼을 때도 동명 씨는 저를 싫어하지 않았던 것처럼요.”노동명은 급히 끼어들었다.“넌 못생기지 않았어. 전혀! 예전에 통통할 때도 못생긴 편은 아니었거든. 복스러워 보였어.”“못생긴 거 맞아요. 저는 거울만 봐도 뚱뚱한 제가 너무 싫었어요.”바보 같은 짓은 한 번만 하면 충분했다. 하예진은 다시는 예전처럼 폭식하지 않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살을 빼기 전에 하예진은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지방간뿐만 아니라 요산 수치도 높았다.체중 감량 후 요산뿐만 아니라 지방간 수치도 모두 많이 좋아졌다.“하예진아, 우빈한테 장난감도 사주고 옷도 사줬는데 나한테는 뭐 사준 거 없어?”노동명이 화제를 바꾸어 질투하기 시작했다.“동명 씨는 부족한 게 없잖아요. 우빈이는 아이라서 너무 빨리 커요. 해마다 새 옷을 사줘야 하지만 동명 씨는 이젠 다 큰 성인이라 작년의 옷을 올해에도 입을 수 있잖아요. 돌아가게 되면 강성의 특산 제품을 가져다드릴게요.”노동명은 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우빈이는 크면 남의 집 남편으로 되어 우빈의 아내가 그를 걱정하고 보살피게 될걸. 결국, 내가 영원히 네 곁에 있을 텐데 나를 더 관심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도 새 옷 사줘. 네가 사준 옷이면 난 다 좋아.”하예진은 하예정에게 거의 선물을 주지 않았다.지난번 하예진은 재혼하고 싶지 않다며 노동명의 감정을 거절했다.그러나 지금, 하예진이 시집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연인이나 다름없다. 모두의 눈에는 두 사람이 연인으로 보였다.노동명도 자연스레 하예진의 남편 역할을 하고 있었다.노동명은 하예진의 여생을 함께하려고 한다.하예정이 끝까지 노동명에게 시집가지 않더라도, 그가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면서 지금처럼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고 남은 인생을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선물을 너무 받고 싶었다. 가격을 따지
이윤미가 말을 꺼냈다.“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헤어스타일을 바꿨을 뿐이에요. 사람들을 몰래 예진 씨를 따르라고 한 것은 감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뒤를 따라가서 예진 씨의 몸매를 익히게 하려고 그런 거예요. 앞으로 예진 씨가 변장하더라도 그녀의 몸매에 대한 인상으로 분장한 예진 씨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해요. 제가 예진 씨와 만날 때마다 예진 씨의 안전을 반드시 책임져야 하니까요.”“만약 그녀가 저를 만나러 오는 도중에 사고가 나면 하예정 일행은 아마 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리고 예진 씨가 강성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몰래 그녀를 도와주세요. 그저 우리 엄마와 그 늙은 남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도와주면 돼요.”이윤미가 말하는 늙은 남자는 정군호가 아닌 이은화의 특별 비서였다.방윤림은 예의 갖추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 밤이 점점 깊어지는데 얼른 돌아가세요.”이윤미는 한숨을 쉬었다.“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 집에는 따뜻함이 없어요. 서로 다투고 경쟁하고 눈치 보면서... 좋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방윤림은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랐다.주인의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일개 비서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이윤미는 곧 방윤림과 함께 떠났다.한 시간 후.하루 호텔로 돌아온 하예진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한 뒤 가발을 쓰고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이윤미가 선물한 인간 얼굴 가죽을 쓰기 아까웠다.그렇게 전업적인 도구는 가장 필요한 곳에 써야 낭비하지 않는다.하루 호텔은 전호영이 강성에서 소유하고 있는 호텔 본점이다. 하예진이 분장한 이유는 전호영에게 폐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을 뿐, 그를 경계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 가죽을 쓸 필요 없었다.하예정은 그녀가 묵고 있던 룸으로 돌아와 방문을 잠근 뒤에야 휴대전화를 꺼내 노동명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노동명이 전화를 받았다.“동명 씨,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주무세요?
하예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부부 사이에 한쪽이 바람을 피우면 금방 금이 생기게 되는 법이죠. 이혼을 안 했어도 서로 고된 삶을 살 테니,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아요. 저의 전남편도 바람을 피우고 저를 폭행하여 이혼했잖아요. 한번이 있으면 두 번, 세 번이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이 고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아요. 이혼하면 죽는 것도 아닌데.”이윤미가 말을 이었다.“우리 아버지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아버지는 자신이 이혼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아시거든요. 정씨 집안의 친척들도 우리 가문에서 아무런 이익도 보지 못할걸요. 어쩌면 전에 받은 혜택들도 전부 토해내야 할지도 몰라요. 어쨌든 요즘 우리 가문은 편안할 날이 없어요. 저는 왠지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이은화의 모진 마음으로는 정말 해낼 수 있을 것이다.하예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이경혜가 하예진을 강성으로 빨리 오게 한 것은 아마도 이씨 가문이 요즘 혼란스러워 이은화가 하예진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하예진이 그 틈을 타 사업을 일으킬 수 있고 옛날 사고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 있었다.이 기회를 잡아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민심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 것과 다름없다.하예진은 비록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고 강성에서도 사업이 없지만, 그녀의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서 있다. 그리고 하예진의 외할머니는 이씨 가문의 전임 가주였다. 이씨 가문의 친척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예진 씨, 비행기를 몇 시간 타고 방금 도착하셔서 힘드실 텐데 얼른 가서 쉬세요. 일이 있으면 그 번호로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하예진이 관심하며 물었다.“저랑 같이 안 갈실래요?”이윤미는 입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여기 좀 더 있고 싶어요. 마음도 추스를 겸 조용히 있고 싶거든요. 집으로 돌아가도 엉망진창이에요.”“그
수십 년이 지난 탓으로 법률조차도 이은화의 사형을 선고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이윤미는 적어도 그녀가 큰이모의 후손에게 주인 자리를 돌려줄 수 있었다.그녀는 이씨 가문을 떠나 자신의 회사로 돌아가 생활해도 좋다고 생각했다.이윤미는 이런 원한과 복수에 관한 일을 멀리하고 싶었고 그녀의 소소한 삶을 더 좋아했다.이은화가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이윤미는 이은화가 그 해에 정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 믿었다.단지 가주 자리의 권력을 탐내는 것뿐만이 아닌 사랑 때문에 벌인 짓일 수도 있다.이은화는 지금 70세이고 정군호와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며 아들딸도 네 명이나 낳았다.하지만 이은화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 능력이 뛰어난 남자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은숙의 특별 비서일 것이다.“제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요. 저는 제 행동으로 제가 우리 엄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게요.”하예진은 한참 동안 이윤미를 바라보며 웃었다.“윤미 씨의 진지한 얼굴은 정말 멋있고 아름다워요. 당신 엄마가 보신다면 눈에 거슬릴지도 모르지만요. 이씨 가문의 상황은 어때요? 윤미 씨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다가 이 대표님께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요 며칠 동안 윤미 씨 아버지는 모습조차 내놓지 않는다면서요.”하예진은 이은화와 정군호의 일을 알고 있었다.강성에서 이 불륜 사건은 빅뉴스였다.평소에 정군호랑 같이 다니던 늙은 남자들은 대부분 정군호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이은화가 정군호를 너무 엄하게 관리하여 그에게 자유로울 틈도 주지 않고 용돈도 적게 준다고 생각했다.아무리 사이좋은 부부 사이라도 오랜 시간 동안 작은 일에 얽매이게 되면 감정이 깨지기도 한다.여자들은 대부분 이은화의 편을 들었다. 이은화가 남편을 관리하는 것이 좀 엄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군호가 만약 이은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닌 이은화에게 이혼을 제기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정군호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우리 엄마가 예진 씨가 오신 것을 알게 되면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없는데. 조심하세요. 아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제가 다 알려드릴게요. 제가 모르는 일은 할 수 없지만요.”하예진은 웃음을 거두며 한참 동안 이윤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윤미 씨, 우리 만난 적 있잖아요. 저도 윤미 씨가 정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대표님 결국 윤미 씨와 피가 섞인 모녀지간인데, 저는 윤미 씨가 이 대표님과 맞서지 못한다고 생각해요.”이윤미의 웃음도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글쎄요. 우리 두 사람은 모녀 맞아요. 저를 저의 어머니와 같은 편에 서지 말라고 하면 제가 분명 스트레스도 받고 또 엄청나게 큰 용기도 필요하겠죠. 예진 씨가 저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예진 씨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마음이 너무 독하세요. 해본 말이 아니에요. 예진 씨가 여전히 저를 경계하면 저도 더는 묻지 않을게요. 그런데 여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맞서게 되면 저를 찾아오셔도 돼요.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 테니까.”“사실 저와 엄마는 모녀간의 정이 별로 없어요. 저는 엄마의 곁에서 자라지 않았고 또 이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스무 살이 넘었거든요. 윤정이가 아직 이씨 가문에 남겨졌고 여전히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요. 제가 저의 엄마와 모녀간의 정이 별로 없다고 해도 우리 두 사람이 친 모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알아요.”“만약 당신들이 없다면 제 생각에는 제가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를 짊어지고 리더가 되어 우리 가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을 거예요.”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규정을 수정하고 싶었다.그렇게 딱딱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비록 대가가 좀 클 수도 있지만, 이씨 가문을 더 멀리, 더 잘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수정하고 싶었다.이윤미는 명함 한 장을 꺼내 하예진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은 제 다른 전화번호에요. 아는 사람이 적으니 무슨
“그럼 안전에 유의하시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저에게 전화하세요.”방윤림이 이윤미에게 당부했다.이윤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항상 방 비서에게 의지할 수는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암살을 당하더라도 이윤미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능력을 갖추었다.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면 이렇게 자라지 못하고 일찍이 양어머니의 학대를 받아 죽었을 것이다.방윤림과의 통화를 마친 이윤미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차를 몰았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하예진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하예진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누군가의 차가 오는 것을 보더니 창문을 조금 눌렀고 이윤미가 하예진의 차 옆에 주차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선글라스를 먼저 벗은 이윤미는 얼굴의 가죽을 벗어 던져 본모습을 드러냈고 차에서 내려 하예진과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하예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어떻게 저인 것을 알았어요? 두렵지 않아요?”“지금 이 시각에, 또 이렇게 외진 곳에 주변에 주택도 없는데 겁이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밤에 이런 곳으로 오지 못할걸요. 그리고 저기에 묘지도 있는데 이런 곳에 예진 씨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하예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윤미가 온 후에야 약속 장소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발견했다.하예진도 한참 후에야 차를 세울 곳을 찾아 이윤미가 오기를 기다렸다.지금 그녀들이 주차한 곳은 방윤림이 그녀들에게 준 주소에서 수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묘지에서 이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어요. 만약 제가 알았더라면 아마 혼자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귀신이 무서워서요.”이윤미도 웃었다.“귀신이 뭐가 무서워요? 사람이 더 무섭죠.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예진 씨 분장 기술도 꽤 좋네요. 제가 제 부하들을 하루 호텔 입구에 보내 예진 씨를 기다리게 했거든요. 여기로 오시는 길에 예진 씨를 몰래 보호하라고 지시했는데 예진 씨가 나오는 것을 못 봤다고 하더라고요.”
곧 하예진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에서 나왔다.하예진은 방윤림이 그녀에게 준 그 주소대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차를 몰았다.노동명이 전화했다.하예진은 차의 속도를 늦춘 다음 노동명의 전화를 받았다.“동명 씨, 저 지금 나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고 해요. 지금 운전 중이니 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알았어. 운전 조심하고.”“네.”하예진은 하예정과 달리 천천히 차를 몰았다.다행히 하예정이 시내에 살고 있어서 차를 빨리 몰지 못했다. 만약 차가 적은 외진 곳으로 가게 되면 하예정은 비행기를 운전하는 것처럼 매우 빨리 몰 것이다. 전태윤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지, 그가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 아마 하예정이 운전대조차 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차를 몰고 있는 하예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동명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하예진이 변장하고 남몰래 혼자 차를 몰고 이윤미를 만나러 간 것을 알면 노동명은 아마도 걱정되는 마음에 바로 비행기를 타고 올지도 모른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고 있어서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방윤림이 준 그 주소는 가까운 곳이 아닌 꽤 외진 곳에 있었기에 내비게이션에는 차로 한 시간 이상 가야 도착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하예진이 차를 몰고 호텔을 나서자 이윤미가 방윤림에게 물었다.“예진 씨 나오는 거 봤어요?”방윤림이 대답했다.“제가 종업원에게 부탁해서 쪽지를 보냈으니 바로 떠날 겁니다. 하예진 씨가 방금 관성에서 왔기 때문에 낯선 곳이고 차량도 없으니 택시를 탈 것 같습니다. 아가씨도 출발하시면 됩니다. 하예진 씨가 곧 약속 장소로 갈 겁니다.”방윤림은 하예진을 만난 적 있었는데 하예진이 대담하고 세심하다고 추측했다. 하예진이 강성으로 온 목적이 이씨 가문과 연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방윤림은 하예진이 이씨 가문 때문에 강성으로 왔으니, 이윤미가 만나자고 하면 반드시 만나러 갈 것으로 생각했다.“사람을 시켜 예진 씨를 은밀히 보호하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