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심각한 병은 아니겠지?’ 어의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점점 초조해졌고, 급기야 두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돌린 소우연은 어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었다.어의의 이마는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그녀가 묻자, 어의는 황급히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회, 회 왕비마마,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소우연: “....” 그녀는 옆에 있던 정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평민이기에 예기치 못한 황족과의 만남에 잔뜩 긴장한 모양이었다.소우연은 낮은 목소리로 의원을 다독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게. 그저 평소처럼 진찰해 주시면 되네. 특히 왕야의…… 남성 건강에 관해서 말이야.”어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예 마마,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긴장을 하고 있는 그를 정연은 다시 한번 안심시켰다. “왕야께서 서재에 계시느냐?” 무빈은 문 앞에서 졸고 있다가 소우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는 급히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왕비마마께 문안드리옵니다. 왕야께서는 서재에 계시옵니다.”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재 안에서 이육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를 안으로 모시거라.” “예, 왕야.” 무빈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소우연은 의원을 힐끗 본 뒤, 함께 서재로 들어갔다. 이육진은 책을 한 손에 들고, 혼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고 있던 바둑판은 전에 본 것과는 다른 평범한 옥석 바둑판이었다. 사실, 전에 봤던 바둑판은 이락원에서는 딱히 쓸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바둑판은 많았으니, 하나쯤은 둔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왕야께 문안드립니다.”그녀는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소인 왕야께 문안 올립니다.”어의는 무릎을 꿇고 정중히 큰 예를 올렸다.그제야 그는 소우연이 민간 어의와 함께 왔음을 깨달았다.그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소우연, 도대
회남왕부 이당.소우연은 정연을 문밖에 대기시키고, 임곽수와 함께 이당으로 불러 차를 마셨다. 그녀는 어의에게 차를 대접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왕야께서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느냐?”임곽수는 방금 전 서재에서의 긴장감을 떨쳐내지 못한 듯, 아직도 몸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맥을 짚어본 결과, 다리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하여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문제없사옵니다.” “정말 아무 이상이 없단 말이냐?” 소우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런데 왜 왕야께서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냐?” 임곽수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왕야께서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으신다고요?”그는 문득 한때 경성에서 떠돌던 소문을 떠올랐다.하지만 왕비마마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말들이 왕야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임곽수가 묵묵부답이자, 소우연은 은전 한 자루를 꺼내 그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내가 왕부의 주인이니, 넌 그저 알고 있는 대로 말하면 된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임곽수는 은전과 소우연을 번갈아 보았다. 만약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인은 단지 짐작일 뿐이옵니다. 아마도 왕야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 여인이 없으시기 때문에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으신 것일 수 있사옵니다. 혹은…….” “혹은?” 소우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재촉했다. “혹은 왕야의 취향이…… 여인이 아닐 수도 있사옵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소우연도 자연스레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인이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그저 추측일 뿐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옵소서!” “그렇다면…… 그 방면으로는 가능한 것이냐?” “그…… 어쩌면 가능할지도…….” “어쩌면?” 소우연은 어의의 모호한 대답에 당혹스러워하며 다시 물었다. “자네는 비뇨기과 명의로
정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소우연을 바라보았다. ‘왕비마마께서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해 보이시는 걸까?’‘갑자기 어의는 왜 부른 것일까?’한편, 이육진은 진규를 서재로 불렀다. “왕비가 오늘 갑자기 어의를 불러 진료를 받게 한 이유를 알아보거라.” 진규는 두 손을 모으며 명을 받들었다.진규는 일 처리가 빨랐다. 임곽수가 아직 의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규는 그의 마차로 불쑥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위협했다. “오늘 왕비께서 왜 너를 부른 것이냐?” 목에 닿은 차가운 칼날에 임곽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 “대, 대감, 부디 흥분하지 마시오. 제가 말하겠습니다!”그리하여 임곽수는 소우연과의 대화를 진규에게 고스란히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진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우리 왕야의 몸에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것이냐?” “소인은 문제가 없다고 보았사옵니다. 그러나 왕비마마께서는 왕야께서 여색을 기피하신다 말씀하셨사옵니다…….” 진규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면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는 돌아가 왕야에게 무어라 보고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대감, 그럼 왕비께서 청하신 약은…… 보내드려야 합니까?” 아직 목에 닿아있는 칼날에 임곽수는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자 진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내거라.”이육진의 지시로 임곽수를 찾아간 것이니, 당연히 왕야께서는 왕비가 이 사실을 알게 두지 않을 터였다. 그는 단단히 입단속을 시킨 뒤, 곧장 돌아가 보고했다.진규의 보고를 받은 이육진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그녀와 혼인한 뒤로 자신이 얼마나 참고 버텨왔는데!그런데도 그녀는 남자로서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의심하고 그 어의는 아예 취향 문제라는 암시까지 했단 말인가?이게 대체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정말 기가 막히는군!그녀가 어디까지 믿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는 낮에 그녀가 이민수를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을 전해
어떤 여인을 좋아하냐고? 그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소우연의 청아한 미모와 미소, 그녀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약초 향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소우연은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왕야께서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왕야의 취향에 맞는 여인을 첩으로 들이시는 건 어떠하옵니까?” “첩을 들이라고?” “예, 왕야의 취향에 꼭 맞는 여인이 어떤 모습인지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육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의 곁을 지키지만, 그 모든 것은 동정과 책임에서 비롯된 것일 뿐, 사랑은 아니었다. 불구에다 흉측한 얼굴을 한 그에게 사랑을 느끼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민수뿐이었다. 진심을 가장한 친절과 헌신이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아리따운 여인은 거짓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저절로 그 덫에 빠지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그리고 그 순간, 이육진은 그녀가 자신에게 발라주고 그 연고들이 제발 효과를 발휘하길, 그저 조금이라도 흉터가 옅어지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소망이 생겼다.“나는 여인에 관심이 없다.”그는 눈을 감으며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여자에 관심조차 없다니……!소우연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긴장한 탓에 점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첫날밤, 스스로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정조의 상징을 만들어낸 이유.그녀에게는 그저 낯 뜨거운 신음만 내도록 요구했던 이유.바로 그래서였다.이래서야 어찌 이민수와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소우연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왕야, 태의에게 진찰을 받아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녀의 질문에 이육진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그는 진규로부터 들은 보고에 이미 충분히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그런데 이제는 아예 대놓고
소우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는 이육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왕비, 두려워하지 말게.”“두렵지 않사옵니다.”이미 한 차례 죽음을 겪은 몸인데 이제 와서 무엇이 두렵겠는가? 다만, 이 일에 대해서는 너무 생소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를 뿐이었고 이렇게까지 먼저 다가선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런데 이육진은 그저 그녀의 머리만 쓰다듬고 마는 것인가?그 이상의 행동은 왜 하지 않는 것인가?“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이육진의 표정을 살피려 했으나, 방 안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어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없었다.그 순간, 이육진의 몸은 이미 뜨거운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있었다.예전 같았더라면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며 그녀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그리할 수 없었다.그녀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는 감히 이 망가진 몸을 그녀에게 감당하라 할 수 없었다...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소우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 다리를 치료할 수 있겠느냐?”소우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왕야께서는 아직도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이옵니까?”이육진은 짧게 한숨과 함께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믿는다. 나는 그대를 믿고 싶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덧붙였다. “그렇다면, 내 다리가 완전히 낫거든 그때 합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소우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떠올리니, 합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남녀 간의 일이란 것을 잘 알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그가 적극 협조한다고 해서, 과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일까?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약속했다.“제가 기필코 왕야의 다리를 고쳐 드리겠사옵니다!”어두운 방 안에서도 이육진은 그녀의 결연한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좋다. 난 반드시 왕비를 잘 따르도
“저는 그저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그럽니다.”소우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마치 한 송이 탐스러운 꽃처럼 곱게 피어났다.“필요 없느니라.”이육진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예.”소우연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어차피, 얼굴과 다리가 회복된다면, 그때는 자연스레 답이 나오겠지.’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이육진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는 것이었다.“왕비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그녀의 붉어진 얼굴에 이육진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우연의 손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손끝이 닿는 순간, 소우연은 불에 덴 듯이 화들짝 손을 홱 빼내고는 이불 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이육진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그녀를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온몸을 이불 속에 꼭꼭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귀여웠다.“그러다 숨 막혀 쓰러질 것 같구나.” 그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휠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빈을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아침 식사 후.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바르며 물었다. “요 며칠 피부가 가려우시거나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있으셨사옵니까?”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그렇더구나.”“그렇다면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옵니다. 왕야의 피부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증거이니 걱정하지 마옵소서.”“참말로… 회복되고 있단 말이냐?”“그러하옵니다.” 이육진은 이 가려움이 햇빛에 오래 노출된 탓이라 여겼었다. 약을 바른 후, 이육진은 바로 서재로 향했다. “무빈아.”무빈은 급히 차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여기에 있사옵니다.”“거울을 가져오거라.”“거울 말이옵니까?”왕부에서 거울을 찾다니… 얼굴에 화상을 입은 뒤, 그는 왕부에 있던 모든 거울을 부수어버렸고 한 점도 남겨두지 않았다. “왕야, 지금은 거울이 없사옵니다. 즉시 가서
‘그런데 왕비마마께서 과연 치료할 수 있겠는가?’ “내 얼굴에 난 상처… 자세히 보거라.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 같으냐?”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듯 보였으나, 내심 회복에 대한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소우연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무빈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얼굴은 전처럼 창백하지 않사옵니다. 며칠 동안 햇볕을 쬐셨기에 좀 더 건강해 보이는 것 같사옵니다.”“본왕이 묻는 것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흉터가… 옅어졌느냐?”“저는… 그것이…”“거짓말은 하지 말거라!”그러자 무빈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소인 감히 거짓말은 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전에 왕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사오니, 잘 알지 못하겠사옵니다.”잘 알지 못하겠다… ‘그건 아직 변화가 없다는 뜻이겠지.’이육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어 무빈에게 퇴거를 명했다.“물러가거라.”“오래된 상처이오니 아무리 신묘한 의술을 지니셨다 하더라도 그리 빨리 나을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너무 조급해하지 마옵소서..”무빈은 조심스레 이육진을 위로했다.차라리 왕야의 고통을 대신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는 그저 내시일 뿐이니 얼굴이 흉해지든, 몸이 불편하든 큰 상관이 없었으니까.이육진이 아무런 말도 없자 무빈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예를 갖춘 뒤, 살며시 문을 닫았다.책상 위에는 무빈이 남겨둔 거울이 놓여 있었다.거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거울을 집어 오랜 세월 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손끝이 심하게 떨렸다.머릿속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난 붉은 칼자국은 마치 거대한 지네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화상 자국은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어 마치 팔순 노인의 주름진 피부
무빈은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우연에게 곧바로 밝힐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인 알아챌 길이 없사옵니다.”‘심장군께서는 평소에 활달한 성격이시나 왕야께서 사고를 당한 후로는 결코 왕부에서 이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는데...’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그녀는 이미 본채의 정자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찬바람이 옷깃을 스미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무빈은 그녀를 따라가며 정중히 권했다. “왕비마마, 차라리 본채로 돌아가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쉬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정연 역시 이에 동의하며 거들었다. 그러나, 소우연은 정원의 매화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화가 아름답게 피었구나. 몇 가지를 꺾어 왕야의 서재로 가져가야겠다.”정연: “……”무빈: “……”항상 왕야를 생각하고 계시는 왕비의 모습에 두 사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제가 다시 모시러 오겠사옵니다.”정연이 소우연의 뒤를 따랐다. 정연은 왕비께서 혹여 사고를 당하기 전의 왕야를 은밀히 사모하신 적은 없으셨는지 묻고 싶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왕야를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그러나 왕비께는 본래 정인이 있었으나 강제로 대신 시집와야 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왕비는 아주 현명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왕야에게 시집온 이상, 왕야만을 바라보며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으니까.아이라도 낳게 된다면 왕비의 미래는 더욱 창창할 터, 어쩌면 머지않아 황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정연은 말없이 가위를 가지러 갔다.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서재 쪽 한 모퉁이가 희미하게 보였다.그녀는 무빈이 서재로 들자, 곧 어린 내시가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그때, 매화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소우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
소현우와 소한준이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소한준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며 말했다.“우희야, 네가 고생이 많다. 걱정하지 말아라. 큰형과 난 언제든 네 편이다.”소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걱정하지 말 거라. 내일 내가 일단 아침 일찍 경성으로 출발하마! 우희 넌 한준이와 함께 천천히 뒤따라오거라. 절대 낙심해서는 안 된다!”소우연은 아마도 소우희를 도와서 약을 제조할 때 의술을 조금 익혔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가문을 망가트리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회남왕은 왜 갑자기 자비를 베풀어 소우연을 살려둔 걸까?예전에 소현우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소우희는 잠시도 앉아있지 못하고 곁에서 소현우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밖으로 싸돌아 다니느라 바빴다.친 오라버니가 위독하다는데 전혀 신경도 안 쓴 소우연만 생각하면 소현우는 너무 실망스웠다.“고마워요, 큰 오라버니.”소우희가 가까스로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소현우가 곁에 있던 혜주에게 말했다.“넌 일단 우희가 푹 쉴 수 있게 모시고 나가거라.”그제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혜주는 소우희를 부축한 채 방을 나섰다.두 사람이 나가자 소한준이 씩씩거리면서 언성을 높였다.“소우연 걔는 미친 게 분명해요. 회남왕에게 시집을 갔다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단 말입니다.”“네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없어. 이 일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소우연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이야. 일단 돌아가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고 우희의 억울함을 풀어줘야지.”“아버지와 둘째 형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소우연의 말만 듣고 그럴 수 있는 겁니까?”“우희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소우연이 할머니로 우희를 협박했다고. 우희에게 의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소우연이라고 인정하라고. 심지어 본인이 소씨 가문 복덩이로 인정하라고도 했다 하지 않았느냐? 소우연 걔가 참…”한편, 방을 나선 소우희와 혜주는 멀리
“혜주 얘는 왜 이래?”그제야 평소와 다른 혜주를 눈치챈 소현우가 묻자 소우희가 대답했다.“소우연이 절 협박했다는 사실을 혜주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우연이 일부러 이런 수를 쓴 겁니다.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아버지께서 화를 버럭 내시더니 혜주에게 벌을 내리신 겁니다. 혜주의 혓바닥은 결국 소우연이 자른 겁니다.”“아버지가?”소현우와 소한준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에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큰 벌을 내렸다는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하긴, 아버지께서 사실을 왜곡한 소우연의 말을 믿었으니까 당연히 화가 나셨을 것이다.“불과 몇 달 사이에 집에 이렇게 큰 변고가 생겼을 줄은 몰랐네.”소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소현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소우연이 소우희 대신 회남왕에게 시집을 가고 이 때문에 황제가 평춘왕와 소우희 두사람의 혼사를 하사했을 때부터 소현우는 소씨 가문이 몰락하고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소우연까지 이렇게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이건 단순한 변고가 아닙니다! 소우연이 회남왕을 부추겨 덕빈 마마와 폐하게 평춘왕의 혼사를 하사해 달라고 한 게 분명해요. 소우연이 우리 우희를 철저하게 망가트리려고 한 겁니다.”소우희는 감동한 눈빛으로 소한준을 쳐다보았다.소씨 가문 사람들이 말로는 다들 소우희를 예뻐하고 아꼈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앞에 나서서 소우희를 지키는 사람은 소한준밖에 없었다.이런 생각에 소우희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셋째 오라버니, 소우연이 절 원망하고 미워하는 건 괜찮은데 할머니의 병으로 장난치는 건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오라버니들도 경성을 떠나기 전에 소우연이 어떤 태도인지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이제 소우연 마음속에는 소씨 가문이 없습니다. 심지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소현우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다급하게 제지하자 소우희가 훌쩍이며 말을 이어갔다.“오라버니, 제가 어렸을
예상에 없던 폭우 때문에 노정이 지체된 소현우와 소한준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금주에 도착했다.여러 사람들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소우희는 뒷돈을 챙겨준 덕분에 성공적으로 금주 역참에 들어와 소현우와 소한준을 만나게 되었다.“우희야, 네가 금주엔 어쩐 일로 온 것이냐?”소현우는 자신과 소한준 앞에 무릎을 꿇은 소우희를 재빨리 부축하며 물었지만 소우희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혜주에게 말했다.“얼른 우희를 일으키지 않고 뭐 하는것이냐?”혜주가 얼른 소우희를 부축했지만 소우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혜주도 소우희를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거냐?”성격이 급한 소한준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 애절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때, 소우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큰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 이제 저에겐 돌아갈 친정집이 없습니다.”“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할머니를 위해 조제할 진정향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약재를 소우연이 전부 싹쓸이했습니다. 제가 세자께 부탁을 해서 금주와 영주 약방을 다 돌아봤는데 결국 구하지 못했습니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할머니를 보며 도무지 가만있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 소우연에게 빌고 또 빌었는데 소우연이 글쎄… 글쎄…”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우희가 한참동안 훌쩍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어갔다.“예전에 소우연이 저를 도와 약재를 달였을 때 전 처방전을 조금도 숨김없이 다 보여줬었습니다. 그런데 소우연이 갑자기 돌변하여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소우희의 말에 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난 산적을 소탕하러 가기 전부터 네가 마음에 걸렸다!”소현우도 미간을 찌푸리며 소우희를 쳐다보았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소현우가 다시 한번 잡아당기자 소우희는 못 이기는 척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오라버니들, 소우연은 분명 진정향
마음속에 큰 파도가 출렁거렸지만 소우연은 최대한 태연한 모습ㅇ르 유지한 채 다정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전 왕야를 믿습니다.”이렇게 좋은 왕야와 함께 한다면 미래에 온통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하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미래가 막연하다고 했던 용강한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리고 용강한이라는 사람이 너무 수상하기도 했다. 용강한은 소우연이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혹 용강한 그자가 너에게 겁을 주는 말이라도 한 것이냐?”이육진은 이제 용강한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용강한은 평소에 말수가 적지만 점괘를 보기 시작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아닙니다.”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소우연은 왠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의 손을 꼭 잡은 채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으며 용강한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한편, 금주 성문 부근에서.“왕비님, 소인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소 장군님 일행은 오늘 내로 금주에 도착하여 역참에 묵을 예정이라고 합니다.”검은 복장을 차려입은 호위무사가 소우희에게 보고를 올렸고 소우희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가 곁에 있던 시녀 춘화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가서 혜주를 데려오거라.”벙어리가 된 혜주를 데리고 다니는 게 참 불편하고 성가신 일이지만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 혜주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네.”밖으로 나간 춘화는 이내 혜주를 데리고 들어왔다. 낡은 마의를 입은 혜주는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우희에게 인사를 올렸고 소우희는 그런 혜주를 재빨리 일으켰다.“얼른 일어나거라.”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하인들에게 말했다.“너희들은 이만 물러나거라.”하인들이 밖으로 나가자 소우희는 혜주를 안아주더니 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혜주야, 너와 내가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일 줄
한편, 정연은 명심에게 왕비와 왕야를 위해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얘기하고 있었다.“왕비님이 나오셨습니다.”소우연을 발견한 명심이 말했다.정연과 명심은 가까이 다가가다가 휘청거리는 소우연의 모습에 재빨리 달려가 부축했다.“왕비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화들짝 놀란 정연이 다급하게 물으며 대청마루를 힐끔 쳐다보았다.“난 괜찮다.”소우연이 대답했다.‘괜찮다고? 얼굴이 이렇게 하얗게 질렸는데 괜찮다니?’정연과 명심은 양쪽에서 소우연을 부축해서 걷다가 맞은편에서 휠체어를 타고 오던 이육진과 마주치게 되었다.핏기를 잃은 소우연의 모습에 이육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어찌된 일이냐?”겨우 진정한 소우연은 이육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별일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잠시 휘청거렸습니다.”이육진은 소우연의 핑계를 당연히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늦게 했기에 이 시간에 배가 고플 리가 없다.“그럼 얼른 가서 간식 좀 준비하거라.”“네, 알겠습니다.”정연과 명심이 소우연을 부축한 채 떠났다.이때, 대청에서 나온 용강한은 문턱 앞에 서서 담담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조금 전에 왕비가 뭘 물어본 것이오?”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가까이 다가가 묻자 용강한은 조금 전에 소우연이 했던 질문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다만 용강한과 소우연이 어렸을 때의 인연과 그가 소우연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소우연의 화들짝 놀란 반응에서 용강한은 그녀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그저 너무도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왕비는 왜 그렇게 겁을 먹고 놀란 걸까?용강한은 이육진을 보며 말했다.“왕야, 왕비님이 겉으로 보기엔 씩씩하지만 사실 마음이 여리고 상처가 많은 분이오.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네.”“나도 왕비가 또래 소녀들처럼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걱정 없는 것 같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드네.”이육진은 소우연이 떠난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용강한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인연이 참 깊은 듯합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용강한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왕비님께서 저를 아직까지 기억하신다고 하니 저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아닙니다. 그 남자아이가 대감님이라고 하시니 저도…”오래간만에 소녀다운 모습을 보이던 소우연은 용강한을 쳐다보며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 듯 말했다.“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있는데 대감님께서 이를 풀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용강한은 소우연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했다.“왕비님께서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것이지요?”“네, 그렇습니다.”소우연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고 초조했다. 그녀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를 간절하게 알고 싶었지만 알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그 미래가 너무도 막연하고 아득하여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말을 하던 용강한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왕비님께서는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십니까?”용강한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순백의 구름과도 같았다.“저는…”소우연은 입을 뻥긋거리며 자신과 이육진이 앞으로 판을 뒤집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에 용강한은 미래가 막연하고 아득하다고 얘기를 했었다.‘만에 하나 용강한이 판을 뒤집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라고 대답하면 어떡하지? 그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힘을 쓰는 몇 년 동안 나와 이육진은 언젠가 죽을 걸 알면서 그자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이런 생각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소우연은 대청 밖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는 흰 구름을 보며 어떻게든 차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강한이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왕비님, 혹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소우연은 간절하게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
”지금 막 진규를 보내 자네를 모셔오라고 하던 참이었소.”이육진의 말에 용강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조금 전에 취선루에서 밥을 먹고 낮잠을 청하려고 하다가 왕비님이 날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소.”이육진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저자가 용하긴 용하네.’한편, 소우연은 말없이 백의를 입은 용강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마침 상대방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두 사람은 그렇게 눈이 딱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강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대감님 참 용하시네요.”소우연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말하자 용강한은 여유롭게 대답했다.“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트렸는데 그 김에 점괘를 대충 봤습니다.”소우연은 용강한의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대충 본 점괘로 이렇게 정확하게 맞춘다고?’“그럼 대청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소.”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대청으로 가려던 그때, 용강한이 말했다.“왕야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오.”“그게 무슨 말이오?”이육진이 한층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용강한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용강한은 전혀 겁을 먹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다.그 모습에 소우연은 이내 이육진을 쳐다보며 물었다.“왕야, 제가 따로 얘기를 나눠봐도 되겠습니까?”소우연은 용강한에게 물어보고 싶은 의혹들이 많았다. 소설 원작에 의하면 남녀 주인공과 겨뤄볼 만한 사람은 이육진뿐이지만 하늘의 뜻을 읽을 수 있는 건 흠천감이다!“그리 하여라.”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의 부탁이라면 그는 뭐든 들어줄 수 있었다.이육진은 그렇게 휠체어를 끌고 떠났고 진규와 간석도 이내 이육진의 뒤를 따랐다.홀로 남은 정연은 소우연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왕비님, 그럼 소인은…?”“너도 이만 물러가거라.”“네, 알겠습니다.”그렇게 용강한과 소우연만 남게 되었다. 용강한은 소우연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그제야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왕비님, 가시죠.
멍하니 서있던 소우연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반응한 채 이육진에게 물었다.“용 감정께서 또 왕야께 점괘를 봐 드린 겁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진규의 손에서 휠체어를 넘겨받고는 이육진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자가 올해 점괘를 가장 많이 보았다고 하더구나. 이제 5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자는 벌써 날 위해 점괘를 세 번이나 보았다.”흠천감은 이 소설 속에서 신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들이 본 점괘는 거의 착오가 없었다.소우연은 마음이 불안해서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다.그러다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과 이육진 단둘이 남게 되자 소우연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용 감정께서 왕야를 위해 다른 점괘를 봐 드린 적이 있거나 혹은 소우희나 이민수 두 사람을 위해 점괘를 본 적도 있습니까?”침대 위에 앉은 이육진은 호기심 가득한 소우연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의 점괘도 본 적이 있다. 용 감정은 두 사람의 운명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더구나.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고 말을 했어.”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는 건 언제든 정상적인 궤도로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더 얘기하신 건 없으십니까?”“있지.”이육진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연이 네가 내 운명을 바꿔 놓았다고 하더구나.”“네? 제가 왕야의 운명을 바꿨다고요?”“그래. 그리고 네 스스로의 운명도 바꿨다고 했어.”용강한이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이육진은 용강한의 말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래의 운명대로라면 소우연은 혼인을 하자마자 큰 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화가 스스로 풀렸다고 한다.화가 풀렸으니 망정이지, 용강한이 암암리에 제시한 말에 따르면 소우연은 혼인을 함과 동시에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용강한 그 영악한 자가 점괘를 잘못 본 게 확
이종대가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소우희는 단단히 찡그린 눈썹을 풀지 못했다.“춘화야, 세자 저하께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두고 계신 걸까?”춘화는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답했다.“왕비마마, 소녀는… 잘 모르겠습니다.”“모른다? 모른다? 너는 벙어리가 아니지 않느냐? 어떻게 매번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하느냐!”소우희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춘화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왕비마마, 소녀가 경솔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그녀가 바닥에 엎드려 빌었지만, 소우희의 속은 더욱 뒤틀렸다.소우연이 대신 시집을 간 그날 이후,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모든 것이 꼬였다…아무리 노력해도 잘 풀리는 일이 없었다.지금처럼…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지는 날이 올거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소우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춘화를 스쳐 지나갔다.“뭘 멍하니 있느냐! 어서 짐을 싸라!”“예, 왕비마마.”본채.이종대는 축 처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흐릿한 목소리로 외쳤다.“물… 물 좀…”소우희는 문을 벌컥 열며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다.“물은 무슨 놈의 물? 네가 빨리 죽어야 내가 속이 시원하지!”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병약한 남자의 퀭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한때 살집이 있었던 그의 몸은 이제 뼈만 남아 있었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보기에도 비참했다.“악독한 여자… 차라리… 나를 죽여라.”이종대는 눈빛 속에 증오와 절망을 담은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죽이라고? 웃기지 마라. 네 목숨은 네가 알아서 끊어야지!”“물 좀… 제발…”그는 희미한 기대를 품고, 뒤에 따라온 춘화를 바라보았다.춘화는 소우희의 눈치를 살피며 물을 건네려 했다.그러나 소우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조금만 줘라. 방 안에 온통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데, 이놈이 너무 많이 마시면 더 지독해지지 않겠느냐?”그녀는 혐오스러운 듯 코를 막으며 손을 털었다.‘이 자식이 빨리 죽어야 내가 다른 처소로 옮기지…’소우희는 질린 표정으로 방을 나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