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구했다고?”피식 웃던 이육진이 소우희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래, 어디 계속 얘기해보거라.”그는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어디까지 뻔뻔하게 굴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한편, 소우희는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육진을 보며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소, 소인이 5년 전에 남강에서 태자 저하를 구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소인은 태자 저하의 생명의 은인이지요.”“그래? 그럼 옥패는 어디 있는 것이냐?”이육진은 자신의 물건을 되찾기 위해 최대한 꾹 참고 있었다.소우희는 재빨리 품에서 옥패를 꺼내 두 손으로 이육진에게 보여주었다.“태자 저하, 보십시오. 이게 바로 저하의 옥패입니다. 그때 당시 저하를 치료해 준 사람은 소인이 확실합니다.”소우희 손에 든 옥패를 힐끗 쳐다보던 이육진은 이내 고개를 돌려 간석에게 눈짓을 했고 이육진의 뜻을 바로 알아차린 간석은 소우희에게 다가갔다.흠칫하며 손을 슬쩍 피한 소우희는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옥패를 쳐다보았다.“아씨, 무슨 뜻입니까?”간석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꾹 참고 억지 미소를 물었고 소우희는 이내 최대한 가여운 표정을 지으며 이육진을 쳐다보았다.“태자 저하, 소인을 믿으시는 것이지요?”“옥패를 간 태감에게 주거라.”이육진은 소우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에 소우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그동안 두렵고 겁에 질린 순간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에 소우희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이육진을 상대로 얕은수를 쓸 수는 없었다.‘이육진 이 남자가 내 말을 믿은 걸까? 아니면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건가?’냉랭하고 차가운 이육진의 표정으로 소우희는 도무지 그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한편, 간석은 이내 소우희의 손에서 옥패를 가져갔다.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소우희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태자 저하, 소인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보십시오. 이 옥패는 그때 당시 저하께서 소인에게 준 옥패가 확실합니다.”이육진은 손에 끼고
“진규야, 이자의 손발을 부러트리고 혓바닥을 뽑아서 소씨 가문 저택 앞에 버리거라. 그러고도 이자가 문제를 더 일으킬 수 있는지 내 한번 지켜보겠다.”“아닙니다, 아닙니다! 태자 저하, 소인에게 그러시면 안 됩니다.”“내가 왜 너에게 이러면 안 되는 것이냐?”이육진의 물음에 머릿속이 하얘진 소우희는 그 어떤 이유도, 핑계도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어찌, 어찌 생명의 은인한테 이러시는 겁니까?”“나를 구해준 사람은 연이다. 너 같은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 때문에 오늘 내 눈과 귀가 더럽혀졌으니 너에게 반드시 벌을 줘야겠다. 우리 연이가 너만 보면 기분이 안 좋거든.”“저하! 지금 소우연 때문에 소인을 죽이려고 하시는 겁니까?”“아니! 네 목숨은 연이에게 달렸다. 연이는 네가 고통과 절망 속에서 굴욕적으로 살아가길 바라는데 내가 어찌 연이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이육진은 끝까지 역겹고 뻔뻔한 소우희와 더 이상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다.홱 돌아선 이육진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곁에 서있던 진규가 소우희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높이 치켜들더니 소우희의 손목을 향해 힘껏 내리꽂았다.그렇게 손과 발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소우희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그녀는 바닥에 축 늘어진 채 얼굴이 허옇게 질려버렸다.이를 힐끗 쳐다보던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진규에게 말했다.“혹시 모르니까 저자의 손발에 있는 힘줄까지 다 잘라버리거라.”소우연이 이육진의 부러진 다리를 고칠 수 있다면 소우희의 손발을 고칠 수 있는 의원이 있을 수도 있기에 반드시 그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한다.이육진은 절대 소우희에게 그 어떤 자비도 베풀고 싶지 않았다.한편, 이육진의 명령에 진규를 또다시 검을 치켜 들었고 소우희의 비명소리와 함께 바닥 여기저기에 피가 마구 튀었다.그렇게 소우희의 두 손과 두 다리는 철저히 망가졌고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었다.“저하, 이자가 기절했습니다.”진규의 말에 이육진은 간석을 쳐다보며
“악!”비명소리가 태자부에 울려 퍼졌다. 소우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버렸고 화들짝 놀란 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정연은 입을 가린 채 헐레벌떡 달려온 명심 등 하인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얼른! 얼른 이걸 치우라고 하여라!”정연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공포와 역겨움이 한데 섞여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한편, 의자에 앉아있던 소우연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탁자 모서리를 잡은 채 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바닥에는 새빨간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껍질이 전부 벗겨진 고양이의 시체가 누워있었다.소우연도 크게 놀랐지만 그래도 냉정함과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바로 이때, 누군가가 방안으로 빠르게 뛰어들어왔다.갑자기 나타난 이육진이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은 모습을 보자 정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한편, 명심과 나머지 시녀들은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 너도나도 토하기 바빴다.그리고 간석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정연은 덜덜 떨면서 간석에게 말했다.“태감님, 얼른 저 고양이 시체부터 치워주십시오!”휘청거리며 일어난 정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힐끔 쳐다본 간석은 바닥에 널브러진 고양이 시체와 피가 줄줄 흐르는 고양이의 껍질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아니,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이, 이민수 그자가 보낸 겁니다.”간석은 빠르게 다가가 맨손으로 고양이 시체를 선물함에 넣은 뒤,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고 했다.“잠깐만.”정신을 번쩍 차린 소우연이 간석을 불러 세웠다.“태자빈 마마…”“좋은 곳에 잘 묻어두거라.”소우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들고양이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했다.“네.”간석이 선물함을 챙겨 방을 나섰고 정연은 시녀들을 불러 바닥에 흐른 핏자국을 빠르게 지운 뒤, 방 안에 향초 여러 개를 피웠다.한편, 이육진은 안색이 창백한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연아, 내 이민수 그자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어차피
소우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참 후에야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왜 저 때문에 이렇게까지… 태자 저하이신 걸 잊으신 거예요?”“그럼 난 마땅히 관용을 베풀어야 했느냐?”소우연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생에 그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의 책 속에서 이민수와 소우희는 언제나 남의 피와 눈물을 밟고 올라 정상에 선 인물들이었다. 관용과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감사해요, 부군.”소우희는 소우연의 가슴속 깊은 응어리였다. 이육진이 이번에 행한 일은 그녀를 대신해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준 셈이었다. 그녀가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었다.“너와 나는 한 몸이다.”소우연이 전에 들려준 이야기나 꿈과는 상관없이, 평서왕 이남진과 그의 세자 이민수는 이미 5년 전에 이육진을 공격했던 이들이었다. 단지 확실한 증거가 없었을 뿐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였다. 한 사람이 살려면 다른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찌 손을 놓고 자비를 베풀겠는가.한편 진규는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싸고 얼굴을 가린 채, 소우희를 마차에 태워 그녀를 그대로 소 씨 가문 대문 앞에 내던졌다. 문 앞을 지키던 호위들은 이 광경에 크게 놀랐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여인은 가문의 둘째 아씨 소우희를 닮아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어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가 보고했다.“나리, 누군가가 문 앞에 다친 여인을 던져놓고 갔는데… 둘째 아씨와 많이 닮았습니다.”“뭐라 했느냐?!”막 차를 마시려던 소홍범은 깜짝 놀라 찻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서재에 함께 있던 소현우와 소현준도 충격을 받았다.“우희가 돌아왔다고?”우림은 주저하며 다시 답했다.“틀림없이 둘째 아씨 같습니다만…”소홍범은 급히 밖으로 나갔고, 뒤따르던 두 아들 또한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대문 앞에는 이미 행인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소홍범은 황급히 다가가 바닥
의원은 급히 소우희의 몸을 치료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에서도 이름난 의원들이 찾아와 그녀를 살펴보았지만, 결국 모든 의원들의 결론은 하나였다.그렇게 소우희는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희야…!”임진숙은 가슴을 치며 죽을 듯이 울부짖었다.“희야…!”그때 밖에서 소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으로 들어섰다.늙은 나인이 소 노부인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소우희는 이미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상에 누워 있었지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진흙덩이처럼 축 늘어진 몸을 보자 소 노부인의 눈은 크게 흔들렸다.“이게 어찌된 일이냐?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이냐!”소 노부인의 분노 어린 외침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홍범아, 반드시 우희의 원수를 갚아줘야 한다.”소홍범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은 무력함으로 가득했다.지금 소우희는 평춘왕을 살해하고 도망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이었다.“분명 태자 짓이야! 그 요망한 소우연 짓이 틀림없어! 그 애가 나타난 이후로 우리 집안이 꼬이기 시작했어. 한준이는 다리를 잃고, 우희는 이렇게 살아도 산 게 아닌 꼴이 되고 말았어!”임진숙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침상 위에서 그 말을 들은 소우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바로 소우연이 그랬어요! 소우연과 이육진, 그 두 사람이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특히 이육진이 가장 증오스러웠다.그자는 어쩌면 그토록 잔인할 수가 있는가? 자신을 구더기처럼 움직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다니!“보세요! 우희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소우연이야, 그 악독한 소우연이 우희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요!”임진숙은 격하게 흐느꼈다.“그만해라! 소우연은 태자빈이다. 태자빈을 건드렸으니 이런 꼴이 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소홍범이 날카롭게 꾸짖자 임진숙은 흐느끼며 입을 다물었다.소현우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아버님, 과거 우리가 소우연에게 잘못한 건 맞습니다만, 어찌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습니까?”그의 시선이 다시 비
소 노부인은 머리를 주무르고 다리를 문질렀다. 그녀는 오랫동안 소우희를 원망하고 있었다. 소우희가 모든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었다.그녀의 두통은 이제 더 이상 치료 약이 없었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며 살아가며 자신이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것만 같았다. 자신은 죽어도 좋았지만, 소씨 가문은 계속 이어져야 했다.노부인은 울먹이며 소홍범을 불렀다.“홍범아, 잠시 밖으로 나오너라. 내 긴히 너한테 할 말이 있어.”소홍범은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가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소현우와 소현준에게 별채에 있는 소한준을 불러 서재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그렇게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임진숙은 침상 옆에서 힘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두 손으로 소우희를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댈 곳이 없었다.“어미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절대 용서치 않을 거야.”임진숙의 마음은 온통 증오로 가득했다. 이전에는 단지 소우연이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셋째 아들을 망가뜨리고, 또 그녀가 가장 아끼는 막내딸마저 이렇게 만들어놓았다. 그 증오는 이미 극에 달한 상태였다.소우희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오늘은 아령이 가져다준 약도 먹지 못한 탓에 온몸이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근질거렸다.너무나 가렵고 고통스러웠다.온몸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사지마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입에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긁어주고, 등이며 가슴이며 허벅지까지 긁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칠 듯이 근질거려 그녀는 작게 신음 소리를 냈다.임진숙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희야, 왜 그러니?”하지만 묻고 나서야 딸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당황한 채 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얘가 무얼 원하는 게냐?”나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소녀도 모르겠습니다, 마님.”“손도 다리도 부러지고 혀까지 잘렸으니… 틀림없이 소우연 그 계집
소씨 가문을 돌봐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었다.그저 더 이상 소우연을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살아, 소씨 가문이 그나마 숨이라도 붙어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소홍범은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명심하겠습니다.”“그래.”소 노부인은 이제야 안심한 듯 보였지만, 곧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녀는 손을 흔들어 소홍범을 내보냈다.“어서 가서 아이들과 의논하거라.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네, 아들이 바로 가겠습니다.”소홍범은 예를 갖추고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서재 문 앞에 하인이 서 있었으나, 방 안에는 아들들이 보이지 않았다.“다들 어디 간 것이냐?”하인이 당황하며 답했다.“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요.”모른다고?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소홍범이 찾으러 나가려던 참에, 소현우가 소한준을 등에 업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셋째가 우희를 보고 싶다 하여 조금 늦었습니다.”소홍범이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 이야기하자.”형의 등에 업힌 소한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소우희를 뼛속까지 미워했다. 거짓으로 모든 사람을 속이고, 결국 자신이 다리를 잃게 만든 사람이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자신보다 더 비참한 꼴이 된 것을 보니,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어느새 그의 증오는 소우연과 태자 이육진을 향해 있었다.그렇게 서재에 부자 넷이 모이게 되었다.한동안 침묵이 방 안을 짓누르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결국 소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소우연이 우희를 저렇게 잔혹하게 짓밟았으니, 언젠가는 우리도 같은 꼴이 될 겁니다. 소우연 그 여자는 애초에 정이란 게 없는 여자예요. 그리고 이육진은 예전의 그 태자가 아닙니다. 다리를 다친 이후 성정이 난폭해져서, 세간에서 그를 염라대왕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소홍범은 긴장한 얼굴로 밖을 흘끔거렸다. 누가 이 말을 듣지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집안이고 밖을 지키는 사람도 믿을 만했
세 아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신신당부를 한 뒤 소홍범은 소현우에게 소한준을 업고 돌아가라 지시했다.그리고 남아 있던 소현준을 향해 말했다.“둘째야, 이 집안에서 가장 냉정한 사람이 너뿐이다. 네가 나서서 우희한테 이런 짓을 한 자가 누구인지 한번 알아보거라.”소현준은 고개를 들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아버님께서 조금 전 태자부를 건드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조사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소우희는 현재 평춘왕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몸입니다. 그런 아이를 장군부에 데리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위험합니다.”소홍범은 말문이 막혔다.소현준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굳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필시 그들의 짓일 테니까요. 이 상황에서 소씨 가문을 지키려면 소우희를 내치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들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수 있을 테니까요.”“우희가 평춘왕을 죽였다고? 그럴 리가 없다.”“왜 그럴 리가 없습니까? 제가 어머니를 모셨던 나인을 불러 직접 물어봤습니다. 나인의 말에 따르면, 우희는 평춘왕부에서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답니다. 호위병들도 그 아이의 지시를 따랐다 하니, 우희는 결코 순진한 사람이 아닙니다.”소현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그런 우희를 여전히 감싸고 계신다면, 소우연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소현준은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순 없었지만, 늘 소우연이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깊은 원한을 느끼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소우연이었다면, 소우희와 형제들 그리고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았을까?당연히 미웠을 것이다!자신의 공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가고,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받았다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아버님, 소우연은 결코 이 상황에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소우희를 내치는 겁니다. 차라리 밖에서 의원을 찾아 치료시키더라도, 더는 가문에서 보호하지 않는 편이 현명합니다.”소홍범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소우희의 죄가 결코 가볍지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