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소우희가 큰소리로 외쳤고 밖을 지키고 있던 평춘왕 관저의 호위병들이 우르르 달려왔다.이들은 검을 빼 들지는 않았지만 기세가 매우 등등했다.“무엄하도다! 감히 태자빈 마마 앞에서 뭐 하는 짓이냐!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냐?”진우가 언성을 높였다.달려온 호위병들은 애절한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태자빈에게 함부로 행동하면 바로 목이 잘릴 것이다.하지만 소우희의 명령을 거역해도 결과는 똑같이 처참하다.그렇게 일촉즉발의 순간,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돌아서더니 더 이상 평춘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어차피 이 평춘왕도 좋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죽든 살든 관심이 없었다.원작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평춘왕은 많은 여인들을 겁탈했을 뿐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소우희를 마주쳤다가 소우희에게 한눈에 반하여 소우희까지 겁탈하려고 하다가 이민수에게 맞아 그 최후가 매우 처참했다.그리고 지금, 소우연이 회남왕 저택에서 도망가지 않았기에 많은 일들이 바뀐 것이다.하지만 한 가지… 이번 생에서 평춘왕은 성공적으로 소우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한편.소우희는 소우연의 행동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소우연이 정말 호위병들에게 겁을 먹기라도 한 건가?’이때, 소우연이 서서히 걸음을 옮기더니 아직까지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소씨 부인 임진숙에게 다가갔다.“부인, 보셨습니까? 부인께서 어렸을 때부터 애지중지 키운 딸은 평춘왕 관저에서 발언권이 없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실권을 꽉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에 부인께서 딸을 만나지 못했던 건, 그 딸이 부인을 만나기 싫었던 겁니다!”소우희는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소우연,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팍!진우가 소우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무엄합니다! 태자빈 마마께 예를 갖추십시오!”휘청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진 소우희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이지윤도 없는 지금, 딱히 반항할 방법도 없었다.하지만
소우희가 우물쭈물 망설이고 있을 때 소우연은 다시 한번 평춘왕을 향해 두어 걸음 다가갔다.화들짝 놀란 소우희는 소우연이 진맥이라도 할까 봐 서둘러 제지했다.“마마, 평춘왕은 지금 몸과 마음이 많이 편찮으셔서 힘든 사람입니다. 푹 쉴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두십시오.”소우연은 소우희의 말에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사실 소우희와 이지윤이 저지른 짓을 이육진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태자 저하도 신경 쓰기 싫어서 가만히 있는데 태자빈인 소우연도 당연히 이 일에 괜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어차피 소우희는 결국 벌을 받게 되어 있으니까!“우희야, 너 지금 뭐라고 한 것이냐? 그 사람은 네 오라버니야. 그런데 볼 필요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안색이 확 굳어진 임진숙은 소우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전에 평춘왕 관저에 몇 번이나 찾아왔는데 소우희는 단 한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때는 딸이 이 저택에서 괴롭힘을 당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건가 싶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오늘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이 저택 안의 호위병들도 소우희의 눈치를 보고 그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있다.소우희가 왜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걸까?이때, 소우희가 임진숙 곁에 다가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어머니, 제가 셋째 오라버니를 보살피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십니까?”“그 아이는 다리가 부러졌다. 그런데 어미로써 어찌 걱정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찾은 의원이 한준이의 다리를 고칠 수 있는 것이냐?”소우희가 대충 얼버무렸다.“그, 그럼요. 고칠 수 있습니다.”“그래, 그럼 앞장 서거라. 난 오늘 꼭 한준이를 봐야겠다.”말을 하던 임진숙은 곁눈질로 소우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소한준의 다리가 부러진 건 분명 소우연 탓이지만 소우연은 이제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기에 그 책임을 제대로 따질 수도 없다.이내 시선을 거둔 임진숙은 소우희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왜 가만히 서있기만 하고 앞장서지 않는 거
“어머니…”“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말거라!”임진숙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평소에 한준이가 너를 얼마나 예뻐하고 아껴줬는데 넌 어떻게 네 오라버니를 이 지경으로 대할 수 있어!”임진숙은 소우희가 너무 실망스러웠다.한편, 임진숙의 호통에 소우희는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어머니, 오라버니를 다치게 한 사람은 분명 소우연입니다. 태자 저하께서 오라버니의 다리를 부러트렸는데 어찌 소우연을 탓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되레 아무 잘못 없는 저를 나무라시는 겁니까? 그래요. 전 이제 소씨 가문에 아무 소용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들 저를 만만하게 여기고 버리려는 겁니까?”“너…”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임진숙은 너무 기가 막혀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이때, 소한준이 아픈 다리를 꾹 참고 쓰러지려는 임진숙을 부축하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았다.“내가 이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 넌 나를 딱 한 번 보러 왔다. 그 뒤로 나한테 신경조차 쓰지 않은 게 사실이지 않느냐? 나의 두 다리를 치료해주기 싫은 것이냐?”“전…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를 위해 의원을 모셔오지 않았습니까?”“그자는 의원이라고 할 수도 없어! 민간요법밖에 할 줄 모르고 심지어 지금도 어디서 낮잠을 자고 있을 것이야!”조금 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마당 앞에 나타나자 화들짝 놀란 의원은 큰일났다 싶어서 몰래 도망을 쳤다.이때, 누군가가 보고를 올렸다.“왕비님, 의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잡아올까요?”“잡아와! 당장 잡아와서 그자의 목을 베어라!”“네!”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 창피한 소우희는 임진숙과 소한준 앞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라버니, 전 오라버니를 일부러 모른 척한 게 아닙니다. 다만 요즘 너무 바빴을 뿐입니다.”말을 하던 소우희는 또다시 목을 박박 긁었다. 요 며칠동안 그녀는 짜증이 나지 않는 순간이 없었으며 그뿐만 아니라 온몸이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몸을 긁던 소우희는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
“어머니…”소우희는 화가 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말했다.“이게 바로 마마께서 원하는 겁니까? 지금 저한테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한편, 소우연은 손톱을 만지작거릴 뿐, 확실하게 대답하지는 않았다.“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오늘 단지 소씨 부인과 함께 소 장군님을 보러 왔을 뿐입니다.”“소 장군님? 마마, 대체 어떻게 그런 호칭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이의 혈연관계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까? 어찌 이리 잔안하고 매정하십니까? 마마가 아니었다면 전 평춘왕 관저에 시집을 오지 않았을 것이고 셋째 오라버니의 다리도 부러지지 않았을 겁니다!”소우희가 이를 악물며 구구절절 얘기했지만 소우연은 그저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뭐 잘못된 게 있습니까? 당신들이 먼저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전 그저 살짝 반격을 가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분합니까? 그건 대체 어느 나라 법이란 말입니까?”“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게 법이지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혼인 상대를 정해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딴 헛소리가 나옵니까?”소우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우연이 소우희를 힐끗 흘겨보았다.“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닙니다.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요? 애초에 저와 혼사를 맺은 상대가 누구인지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회남왕과의 혼사는 황제께서 왕비에게 하사하신 겁니다. 이 나라의 모든 백성은 황제 폐하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지요. 당신들은 황제의 뜻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황제께서 그 책임을 묻지 않으신 걸 감사하게 여기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감히 지금 겁도 없이 개처럼 소리까지 질러요? 왕비는 정녕 무서운 게 없습니까?”“뭐라고요? 개처럼 소리를 질러요?”“길거리를 떠도는 개도 왕비보다 깨끗하고 착합니다.”소우연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그렇다고 한들 우리가 어찌할 수 있겠느냐?”소우희가 훌쩍거리며 대꾸했다.“그러게 말입니다. 소우연은 이제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습니다! 어머니, 저를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전 사실 이 저택에서 외롭고 힘들게 지내고 있습니다. 왕야께서 앓아 눕고 세자 저하는 계모인 저에게 태도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임진숙은 그런 소우희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키운 딸을 조금 전 알게 된 진실들로 무작정 미워하고 원망할 수는 없었다.유일하게 안타까운 건 소우희가 소우연보다 훌륭하게 크지 못했다는 점이다.임진숙은 이내 손으로 소우희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면서 소한준에게 말했다.“아무래도 내가 다시 가서 빌어보아야겠다.”“소우연에게 빈다고요? 뭘 빌겠다는 말씀이십니까?”“네 오라버니가 지내는 이곳은…”임진숙은 가구 하나 없는 방 안을 쓱 훑어보고는 다시 소한준에게 시선이 꽂혔다.“네 오라버니를 계속 평춘왕 관저에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느냐?”“전…”임진숙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네 의술은 전부 가짜이지 않느냐?”소한준을 이곳에 둘 바에는 차라리 장군 관저로 데리고 가서 좋은 의원을 찾아 다리를 치료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한편, 소우희는 임진숙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임진숙은 고개를 돌려 소한준을 쳐다보았다. 그의 몸에서 분노와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억지로 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소우희에게 꽂혀 있었다.‘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어!’이 순간까지도 소한준은 소우희가 도대체 왜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를 이렇게 괴롭게 만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만약 소한준이 형들의 말을 듣고 소우희의 본모습을 일찍 알아봤더라면 두 다리도 부러지지 않았을 것이다.생각할수록 후회가 막심한 소한준은 자신의 뺨을 미친듯이 때렸다.“한준아, 한준아… 이러지 말거라.”임진숙이 다급하게 말리자 소한준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어머니, 제가 소우연에게 미안한 짓을
입술을 오므리고 있던 소우희는 잔뜩 화가 난 소한준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때, 임진숙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는 소한준 곁으로 다가왔다.“한준아, 걱정하지 말거라. 이 어미가 널 위해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의원을 모셔올게. 꼭 네 다리를 고쳐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전장을 누비는 장군에게 다리가 부러진다는 건 그의 목숨을 앗아간 거나 마찬가지다. 이육진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이런 사람이 나중에 황위를 물려받으면 그야말로 폭군이 될 것이다.상황이 복잡해졌지만 일단 현재 가장 급선무는 소한준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이 일이 우희 탓만은 아니야. 그렇다고 너희 남매가 원수 사이로 지낼 수는 없지 않으냐?"“어머니! 어떻게 아직도 소우희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소한준은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소우희가 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어찌 소우희를 도와 소우연을 납치했겠습니까? 그럼 제 다리도 부러질 리가 없었겠지요.”임진숙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한편, 소한준의 말에 소우희가 엉엉 울면서 대꾸했다.“전 소우연과 이육진이 그렇게 잔인할 줄 몰랐습니다. 오라버니의 다리를 부러트릴 줄 정말 몰랐습니다. 소우연이야말로 우리들 중에서 가장 악하고 잔인한 사람입니다.”남매가 싸우는 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임진숙은 탁자를 확 내리치며 큰소리로 외쳤다.“둘 다 조용히 하거라! 네가 이 저택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으면 네 오라버니에게 편히 지낼 곳 하나는 마련해 줬어야지! 그리고 네가 많이 바쁘다면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네 오라버니를 잘 보살폈어야지! 이 어미가 지금 당장 돌아가서 방법을 생각해 보마. 소우연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빌어야 한다고 해도 태자 저하께 한준이를 장군 관저로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허락을 받을 것이다!”이곳 환경은 행군이나 전쟁 때와 조건이 거의 똑같았다. 소한준은 속으로 화도 나고 원망도 차올랐지만 아무것도 할
그러자 그가 물었다. “평춘왕은?”소우희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때 임진숙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볍게 누르며 소우희 대신 대답했다.“네가 아직 몰랐구나. 평춘왕의 병세가 심각해 네 동생 혼자서 왕부를 떠받들고 있단다.”“병세가 심각하다고요?”“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더구나.” 임진숙은 짐작하는 말투였으나 소우희의 말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소한준은 비웃듯 웃으며, 소우희를 향해 독화살 같은 눈빛을 쏘았다.“소우희, 내가 처음 왔을 때 너는 뭐라 했지? 왕부에서 네가 힘도 없고 입지도 없으니 폐가에서 지내라며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지. 실상은 내가 귀찮고 성가셔서겠지. 내가 다쳤으니 곁에 두면 네가 의술 못 쓰는 게 들통날까 두렵고, 밤마다 아픈 내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네 잠을 방해할까 두려워서였겠지!”소우희가 억울한 듯 말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그런 게 아니에요.”“다시는 날 오라버니라 부르지 마라! 정말 후회가 된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 우연이에게 그리 모질게 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후회도 소용없구나.”“저는…”소우희는 화가 치밀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과거 어머니도, 오라버니도, 아버지와 다른 오라버니들도 전부 다 자신만 좋아하지 않았던가.어째서 소우연이 태자빈이 된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달라졌단 말인가?‘두고 보십시오. 제가 훗날 태후가 되는 날, 여러분들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그만해라. 이제 네 오라버니는 누가 돌봐준단 말이냐?” 임진숙이 물었다.소우희가 손짓으로 아무 하인이나 불렀다.“앞으로 네가 오라버니를 잘 보살펴라. 만일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네 목숨은 없을 줄 알 거라.”하인은 부들부들 떨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소인이 정성껏 모시겠습니다.”모든 것을 처리한 뒤, 임진숙은 그제야 안심하고 떠났다.소우희는 이미 소한준의 증오와 혐오 어린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더 이상 말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거군요.”이지윤은 소우희를 부드럽게 다독이며 위로했지만, 방 안에 널린 지저분한 파편들을 보고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소우희의 성정이 이토록 괴팍할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고 그 개만도 못한 자식 말이에요,”“소우연이 왔을 때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어요! 세자 저하, 이제 저 인간을 살려두면 안 됩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며 침상 위에서 증오의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보는 평춘왕 이종대를 가리켰다.“오늘 소우연이 이런 꼴을 보고 틀림없이 의심했을 겁니다. 만약 태자와 상의하여 사람을 보내 조사하기라도 하면, 우린 끝장이에요!”이지윤 역시 마음이 몹시 다급해졌으나, 얼굴에는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소우희를 바라봤다.‘이 여자… 교양이라곤 없고, 양심마저 결여되어 있구나. 정녕 하늘이 내린 ‘봉황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맞을까?’‘이런 사람이 과연 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오늘 평춘왕부에서 벌어진 일은 너무도 심각했다. 소우희의 말대로, 소우연이 태자부로 돌아가면… 소우연은 오늘 일을 태자에게 이야기할 것이 분명했다.그렇게 된다면 평춘왕이 죽기 전이든 후든 간에, 그들은 반드시 이 사건을 빌미로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다.그는 지금껏 숨어 살며 어렵사리 목숨을 유지해왔다.그런데 이 귀한 인생을 고작 소우희 같은 여인 하나 때문에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이런 생각을 하며, 이지윤은 소우희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개 같은 것들…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종대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바로 그 개 같은 놈이 아니 덥니까? 그때 왕비마마를, 또 첩실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이지윤이 차갑게 비웃었다.그는 다시 소우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분들에게 인간 이하의 고통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께서 당하는 모든 건 당연한 대가입니다.”소우희가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세자. 저 사람은
손을 뻗던 용강한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전에 소우연은 그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많이 두려워했는데 이렇게 저택까지 찾아온 걸 보면 그녀는 이육진을 많이 좋아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용 대감님은 확실히 태자 저하의 편이 맞으시지요?”소우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흠천감은 상운국의 가장 신성한 직위로 자리에 오른 모든 감정들은 한 명의 황제에게 충성한다.황태자인 이육진은 누가 봐도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이다. 또한 용강한과 이육진 두 사람은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은 사이이기에 소우연은 용강한이 무조건 이육진의 편에 설 거라고 확신했다.최소한 이육진을 배신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소인은 단지 태자빈 마마의 편일 뿐입니다.”이때, 용강한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다가 싱그러우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저 말입니까?”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용강한이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소우연 때문에 용강한은 마음이 더욱 굳건해졌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육진과 함께 계획을 모색하고 운명을 거스르려고 하는 것이다.이 모든 건 전부 소우연을 위한 것이다.그녀를 위해 용강한과 이육진은 반드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떤 결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용강한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한편, 예상치 못한 대답에 소우연은 입을 뻥긋하다가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제, 제가 예전에 대감께 장수 목걸이를 드린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가볍게 미소를 짓던 용강한은 소우연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소우연에 대한 감정은 절대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었다.그때 당시 어린 소녀였던 소우연은 맑고 순수한 눈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고 그 눈빛을 그는 지금도, 아니 평생 잊을 수 없다.용강한에게 장수 목걸이를 건네며 말을 하던 소우연의 목소리는 너무도 따듯했고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전 돈이 없습니다. 대신 이 장수 목걸이가 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이걸로 돈을 갚고 망자가 편히 쉴 수 있
”저하…”소우연의 시선이 이육진 손에 든 쪽지에 꽂히자 이육진은 이내 이를 소우연에게 건넸다.“일단 소우희 그자를 처리하고 오겠다. 돌아와서 다시 자세하게 얘기하자.”손에 쪽지를 든 소우연은 멀어지는 이육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한편, 쪽지 속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고 그저 옥패 하나만 그려져 있었다. 이 옥패는 그때 당시 소우연이 남강에서 구해준 소년이 그녀에게 준 옥패였다.‘소우희가 이 옥패로 또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려는 건 아니겠지? 이 나쁜 계집애는 어떻게 저런 처지가 됐는데도 날 걸고 넘어지려고 수를 쓰는 거지?’“태자빈 마마,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안색이 하얗게 질린 소우연을 지켜보던 정연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소우연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확 꾸겨 버렸다.이내 정신을 번쩍 차린 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정연에게 말했다.“진우에게 외출 준비를 하라고 전하거라.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엄숙하고 진지한 태자빈의 표정에 정연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방을 나섰다.‘저하께서도 조금 전에 급히 저택을 떠나셨고 태자빈 마마도 이렇게 갑자기 외출 준비를 하는 걸 보면 뭔가 심상치가 않은데? 대체 소우희가 쪽지에 뭘 썼기에 두 분께서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거지?’이내 저택 앞에 마차가 세워졌다. 소우연이 마차에 올라타자 진우가 그녀에게 물었다.“마마,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용 대감을 찾아 뵈어야겠다.”“용, 용 대감님 말입니까?”진우와 정연은 소우연이 흠천감의 용강한을 찾아가겠다고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태자가 예전에 자신을 구해준 소녀가 바로 태자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부터 집안 모든 하인들에게 앞으로 태자빈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명했다.만약 태자와 태자빈이 동시에 명을 내린다면 태자빈의 명령에 우선적으로 따르라고 하기도 했다.용강한의 저택은 멀리 떨어져 있기에 마차는 두 시간 정도 달리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마차에서 내리고 진우가 문지기에게 말을 전하려고 할
다음날.소우연의 시중을 들려고 방에 찾아온 정연과 명심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소우연은 이들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그녀가 처음 이육진과 살을 맞닿은 그때였다. 진정한 합방을 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만지고 애정을 나눴으며 이불을 적시기도 했다.그때 당시에도 정연과 명심은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두 사람이 지내는 곁방이 본채와 이토록 가까운데 그들도 당연히 다 들었을 것이다. 소우연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남사스럽게도 했다.한편, 이육진이 소우희에 대한 체포령을 거두었기에 며칠동안 소우희에 관한 소식이 전혀 없었다.그러다가 이날, 한 거렁뱅이가 쪽지 하나를 들고 태자부 앞을 서성이다가 누군가가 이 쪽지를 직접 태자 저하께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면서 문지기에 쪽지를 건넸다.문지기는 당연히 거렁뱅이 주제의 쪽지를 태자에게 전할 리가 없었다. 한편, 우연히 이 일을 알게 된 명심은 바로 소우연에게 말해주었다.“문지기에게 얘기하거라. 나중에 태자 저하께서 돌아오시면 바로 저하께 드리라고.”“네, 알겠습니다.”명심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태자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정체도 모르는 이런 쪽지를 당연히 몰수할 거라고 생각했다. ‘겁이 없는 어느 가문 멍청한 아씨가 태자 저하께 추파라도 보내는 거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거지? 태자 저하께서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게 될까 봐 걱정도 안 되시는 건가?’“나한테 무엇을 주라고 한 것이냐?”소우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육진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태자 저하께 인사를 올립니다.”정연과 명심은 바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고 이육진이 손을 쓱 흔들자 두 사람은 곁으로 물러나 조용하게 서있었다.소우연은 이내 이육진을 보며 말했다.“문지기 말로는 거렁뱅이로 보이는 자가 저하께 쪽지를 전해달라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마침 저하께서 오셨으니 그 쪽지를 한번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거렁뱅이가 나한테 쪽지를?”이육진은 직감적으로 이 쪽
”끄적거린 글이라… 소설이라…”소우연을 안고 있던 이육진의 손이 멈칫했다.“네, 소우희와 이민수 두 사람은 이 세계에서, 그러니까 이 소설 속의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저는 소우희가 이민수에게 향해 가기 위해 만들어진 디딤돌이고요. 부군은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부군은 이 소설 속 최대 악역으로 장래에 이민수가 휘두른 칼에 베여 목숨을 잃게 됩니다. 때문에 저는 작은 사고 하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소우희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부군, 제 말을 듣고 계십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이육진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왠지 조금 후회가 되었다. 전생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이 세상이 그저 소설 속 허상에 불과하다는 얘기까지 하다니.한편, 소우연이 걱정한 것처럼 이육진은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은은한 촛불로 밝혀진 방 안에서 이육진은 소우연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이마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듣고 있다.”마음속으로는 소우연을 믿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소우연에게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꾼 악몽, 그리고 조금 전에 했던 말들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이다.“그럼 제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믿냐고?이육진은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만 뻥긋거렸다.그리고 그 망설임을 눈치챈 소우연은 이육진이 그녀의 말을 여전히 믿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육진은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소우연도 이런 일들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고, 깨어났을 때 머릿속에 소설 원작 속의 내용이 대체적으로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면 그녀도 자신이 사는 세상이 그저 한 편의 소설뿐이라는 사실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또한 전생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부군, 믿든 믿지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저와 부군의 공동의 적이 평서왕 관저의 이민수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원하지 않습니다.”소우연이 작은 손으로 이육진의 팔뚝을 툭 치며 말하자 이육진이 허리를 살짝 펴며 되물었다.“정말 원하지 않는 것이냐?”“네, 아직도 많이 아픕니다.”술이 거의 다 깬 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이육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내가 약을 발라줄게.”“아니, 전…”소우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육진이 그녀에게 빠르게 입을 맞추고는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거절은 사양한다. 약을 바르지 않겠다고 하면 그건 네가 아직 덜 아프다는 걸로 이해해도 되겠느냐?”어떻게 이렇게 막무가내인 남자가 있단 말인가!하지만 이육진의 품에 안긴 소우연은 감히 반항할 수도 없어서 빨개진 얼굴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그 모습에 이육진은 더할 나위 없는 성취감이 들었지만 일부러 입을 삐죽 내밀며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연아, 사실 나도 너와 똑같이 아프단다.”합방이 처음인 이육진도 아팠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하고 기분이 좋았다.한편, 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럴 리가? 남자도 이런 행위를 하면 아픈 건가?’전혀 믿지 않는 것 같은 소우연의 표정을 보며 이육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이다.”‘어떻게 저렇게 진지하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정말 부끄럽거나 남사스럽지도 않은 건가?’조금 전에 침대 위에서 소우연은 자신도 모르게 이육진을 짐승이라고 나무라기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육진은 더욱 흥분했었다.“그래, 난 짐승이 맞아. 그래서 우리 연이는 짐승 같은 내가 좋은 것이냐?”너무 흥분한 탓인지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좋아한다고 얘기하면서 이런 모습을 더 많이 보여달라고 하기도 했다.아무튼,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이육진마저도 오늘 밤의 소우연이 평소와 너무도 다르게 느껴졌다.조금 뒤, 목욕을 마친 이육진은 소우연의 발이 땅에 닿지 않게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천천히 침대로 향했다. 그러고는 새로 편 이부자리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직접
소우연은 이육진의 몸과 맞닿고 있으면 갈증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나뭇가지에 핀 벚꽃 마냥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한편, 밖에 서있던 간석은 방 안에서 들리는 야릇한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는 곁에 있던 정연에게 말했다.“얼른 하인들을 불러서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하거라.”어느새 얼굴이 빨개진 정연은 명심을 데리고 바로 떠났다.태자와 태자빈은 처음에 합방을 전혀 하지 않다가 나중에 이불을 적시는 횟수가 잦아졌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침대에 핏자국에 남긴 적은 없었다.하여 간석은 두 사람이 지금까지 진정한 합방을 한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두 사람이 그동안 합방을 한 게 확실하다면 왜 아직도 회임 소식이 없는 걸까? 물론 부부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낀다면 언젠가 예쁜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간석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방 안에서 예사롭지 않은, 평소와 다른 움직임 소리가 들려왔으며 침대가 곧 부러질 것만 같았다.태자와 태자빈의 야릇한 신음 소리에 침대가 격하게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리자 간석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이번에는 뭔가 다르다.간석은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고 있었다.한 시간 뒤, 이육진은 간석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했다.이육진이 소우연을 안고 욕실로 향했고 정연과 명심은 이부자리를 정리하다가 빨간 핏자국을 발견하게 되었다.흠칫하던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힐끔 쳐다보았다.설마…전에 태자와 태자빈은 이불을 적신 적이 몇 번 있지만 이렇게 처음으로 핏자국을 남긴 걸 보면 오늘이야말로 진정한 합방이란 말인가?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처음 핏자국을 남겼을 땐 태자가 자신의 손바닥을 베어 이불에 묻혀서 덕빈의 눈을 피한 것이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이 합방을 했을 때 만약 태자빈이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태자는 꽤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하지만 태자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두 사람이 지금까
소우연은 조금 더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심지어 옷을 벗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으며 특히 이육진의 품에 이렇게 안겨 있으니 전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청량감이 들기도 했다.이런 느낌은 말로 쉽게 형용할 수 없었다.소우연의 두 손은 자신만의 생각이 있는 듯 본능적으로 이육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고 옆구리살을 살짝 꼬집으니 왠지 흥분되기도 했다.“연아, 준비되었느냐?”이미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설렌 이육진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제가 술을 마신 건, 저하께 드릴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소우연이 몽롱한 정신으로 대꾸했다.“연아, 그러지 말고 오늘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 네가 술을 마셨으니 어쩌면 전처럼 그리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두 사람은 각자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자신의 악몽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저 작가가 쓴 이야기 속 허상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다.하지만 이육진은 지금 그녀와의 합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전, 전…”“더 이상 거절하지 말거라. 저번에도 날 거절하지 않았느냐?”소우연이 입을 열던 순간, 이육진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과 귓볼 그리고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소우연은 마음이 나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전…”이때, 이육진이 소우연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부군, 이번에는 조금 더 살살해주세요.”소우연은 이육진을 바라고 있으면서도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저번의 경험이 아직 생생하기에 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한편, 소우연의 말에 다정하게 피식 웃던 이육진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또박또박 말했다.“너무 두려워하지 마.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아픔이다.”그의 말에 이를 꽉 깨문 소우연은 어느새 두 팔이 이육진에게 잡혀 머리 위로 들어 올렸고 우연히 베개 밑에 있던 그 서책이 손에 닿았다.“태자 저하,
’아니, 이게 무슨 술이지?’소우연은 입안에 남은 술을 자세하게 음미했다.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린내가 났다.“부군, 술 맛이 어떠합니까?”이육진도 술맛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면 정연에게 다른 술로 바꿔오라고 할 생각이었다.이때, 이육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나쁘진 않다.”‘나쁘지 않다고? 그럼 그냥 참고 마시지 뭐.’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소우연은 머리가 점점 무겁고 어지러웠지만 그녀와 달리 이육진은 전혀 아무 반응도 없는 듯했으며 심지어 바둑판을 들고 오기도 했다.“바둑이나 한판 두는 게 어떻겠느냐?”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보며 뭔가 할 말이 있었지만 입만 뻥긋거릴 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전에 마차 안에서 그녀는 이육진에게 솔직하게 얘기할 게 있다고 했는데 이육진은 왜 전혀 물어보지도 않는 걸까?그렇게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연이 너부터 두거라.”이육진이 까만 바둑알을 소우연에게 건네자 소우연은 한 손으로 턱을 살짝 괸 채 대꾸했다.“전 하얀 바둑알이 좋습니다.”수정 같이 하얀 바둑알은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피식 웃던 이육진은 까만 바둑알을 한 알 꺼내 먼저 두면서 말했다.“조금 전에 간석을 시켜 소우희 그자를 수색하고 있는 호위병들을 전부 철수시켰다.”이육진의 말에 흠칫하던 소우연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왜 그러셨습니까?”“용 대감이 그자가 먼저 나를 찾아올 거라고 하였다.”“소우희가 저하를 찾아온다고요?”기다란 손가락으로 까만 바둑알을 바둑판에 살짝 내려놓던 이육진이 소우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래. 소우희가 날 찾아올 거라고 하여 그자를 수색하고 있는 호위병들을 철수하였지. 그래야 소우희가 나에게 올 기회가 있을 테니까.”손에 하얀 바둑알을 들고 있던 소우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어차피 소우희를 끝까지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그자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다른 건 몰라도 소우연은
용강한이 멀리 떠난 뒤, 이육진은 바둑판에 놓인 바둑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왠지 용강한은 소우연을 꽤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예전에 소우연이 소우희 대신 이육진과 혼인을 맺었을 때, 용강한이 이육진을 찾아온 적이 있는데 겉으로 보기엔 태연하고 차분했지만 속으로는 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육진이 혹시라도 소우연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태자 저하, 태자빈마마께서 식사를 준비해도 되는지 저하께서 물으셨습니다.”이때, 문 밖에 서있던 간석이 물었다.이육진은 고개를 들어 조금 어두워진 하늘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준비하거라.”그는 이내 일어서서 밖으로 향했다.한편, 밖에 서있던 간석은 돌아서서 명심에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라고 전하다가 밖으로 나온 이육진을 보게 되었다.명심은 이육진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돌아서서 저녁 준비를 하러 떠났다.“태자 저하.”이육진이 벌써 나올 줄은 몰랐던 간석은 인사를 올린 뒤, 이육진에게 다가가 조용하게 그의 곁을 지켰다.한편, 이육진은 하늘에 둥둥 떠있는 구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해질 무렵의 풍경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법이지만 아쉽게도 이 풍경은 늘 순식간에 사라지곤 한다.“간석아, 가서 진규에게 전하거라. 성문과 성밖을 지키고 있는 자들 외에 더 이상 소우희 그자를 수색할 필요가 없다.”“네, 소인 바로 전달하겠습니다.”간석은 이내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어리둥절했다.‘소우희를 체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아닌데? 성문과 성 밖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그대로 두라고 하셨는데? 그건 소우희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지 않으시겠다는 뜻 아닌가?’한편, 본채로 돌아온 이육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우연이 한걸음에 다가와 그를 반겼다.“용 대감은요?”“돌아갔다.”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이육진의 시선은 미소를 짓고 있는 소우연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저하, 왜 저를 그렇게 쳐다보십니까?”“예뻐서 그런다.”입술을 살짝 오므린 소우연은 이육진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