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짜릿한 법이다.하지만 이육진의 기대 가득한 시선을 보고, 소우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남자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소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었다.그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민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눈빛은 어딘가 어두웠다.부드러우면서도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할 말이 있다고?소우연은 헛웃음을 지었다.이 남자가 나한테 할 말이 남아 있긴 할까?섣달그믐날, 그가 했던 말이란 결국 고작해야 이육진이 후사를 보게 되면 평서왕부에 불리할 거란 경고뿐이었다.“연아…”이육진은 소우연이 자신을 밀던 손을 멈춘 것을 느꼈다.뒤돌아보니 그녀는 이민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이육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불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소우연은 허리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왕야?”왜 멈춘 걸까?“가자.”그렇다. 이 평춘왕부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소우연은 다시 이육진을 밀며 연회장을 가로질렀다.그녀를 향한 수많은 시선이 따라왔지만, 무슨 의미인지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그저 잘나가던 황태자가 하루아침에 폐인이 된 걸 안타까워하는 동정의 눈빛이라고 생각하였다이민수를 지나칠 때, 그는 소우연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마치 무언가 말을 남기려는 듯. 이육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가슴 한구석이 찝찝했다.왕부에 돌아온 후.소우연은 이락원으로 향했다.직접 이육진을 위한 약재를 조제하고, 연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이육진은 본채의 서재로 돌아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흠천감의 용강한이 그를 찾아왔다.이육진은 침상에 앉아 조용히 바둑판을 가리켰다.“한 판 두겠소?”용강한은 피식 웃었다.“운이 트일 땐, 당연히 축하판을 둬야지.”그가 가볍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흰색 도포가 부드럽게 휘날렸다.마치 속세를 떠난 신선 같았다.“그 말은 무슨 뜻이오?”이육진은 눈썹을
용강한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방금까지 팽팽했던 승부는, 이육진이 방금 둔 한 수로 단번에 갈렸다.역시나, 시운이 도는 자의 기세란 두려운 법이다.이육진이 조용히 물었다.“자네도 소우희가 타고난 ‘봉황의 운명’이라 믿으시오?”용강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렇소. 자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그 노도사는 바로 어릴 적 자네의 운명을 점쳤던 사람이었소. 그 분은 내 스승이셨지…”“그게 정말이오?”“그렇소. 내가 내 스승을 어찌 헐뜯을 수 있겠소?”이육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어쩐지, 그래서 그동안 내가 점을 쳐달라 하면 늘 피한 거였군.”용강한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사실은 여러 번 봐 주었소. 다만, 그 당시 자네에게 좋지 않은 점괘만 나왔을 뿐이지.”“그러다가 자네가 우연 아씨와 혼인한 후, 명운이 변하기 시작했소.”이육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부인이 내 명운을 바꿨다는 뜻이오?”“십중팔구 그렇다고 봐야지…”그는 손에 들고 있던 바둑돌을 바둑통에 툭 던졌다.“지금 부인의 운명별은 점점 밝아지고 있소. 자네 운도 마찬가지고.”“이런 기회는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기회라…”이육진은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뒤쪽 창문을 열었다.맑고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가슴 한구석에서 낯선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과거에는 흠천감의 점괘 따위 믿지 않았다.하지만 용강한과 가까워지고, 그리고 네 해 전 황태자 자리를 잃은 후부터는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용강한은 오늘 전할 말을 모두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육진은 예의상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권했지만, 예상외로 용강한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왕야가 처음으로 나를 식사에 초대하는데, 당연히 응해야 하지 않겠소?”“……”방금 그 말은 그냥 하는 소리였는데. 하지만 용강한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그는 직접 보고 싶었다.소우연이라는 여인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하늘의 운명을 거스르는지 말이다.간석이 주방에서 저녁 종
이육진은 가볍게 헛기침하며 용강한을 바라보았다.“용공, 무슨 가르침이라도 받은 것이오?”용강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아니, 전혀 없소.”“혹시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오?”“아니오. 아주 맛있소.”‘그렇게 맛있다면서 네 눈은 왜 자꾸 연이에게 가는 것이냐?’“그럼 다행이군. 마음껏 먹으시오.”이육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단단히 결심했다.다음번엔 이 자를 절대 왕부에서 밥 먹게 하지 않겠다고.용강한은 가볍게 웃으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방금 전까지 소우연의 관상을 보고 있었다.운명별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막상 직접 얼굴을 보니 시각적 충격이 상당했다.언뜻 보기엔 요염한 미인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이었음에도 얼굴선이 단정하고 기품이 넘쳤다.의상 또한 소박하면서도 세련되어 그녀의 기품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에도 봉황이 내려앉은 듯한 우아한 기세가 서려 있었다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앞으로 그녀는 이육진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져야 했다.이 두 사람은 언젠가 평생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용강한은 떠나기 전, 단정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소우연에게 예를 올렸다.“오늘 환대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그러고는 흠천감 용공답게 흰 소매를 살짝 날리며 자리를 떠났다.소우연은 어리둥절했다.‘…저 사람, 왜 나한테 저리도 공손하게 구는 걸까?’책에서는 용강한이 냉정하고 남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고 적혀 있었다.단, 이육진과 심소균만은 예외였지만 말이다.“왕야, 용공이 오늘 와서 왕야께 무슨 말을 했습니까?”책 속에서 용강한은 이육진과 친밀한 관계였고, 몇 번이나 그를 구해 준 존재였다.그야말로 믿을 만한 벗이었다.이육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밥 얻어먹으러 왔다더군.”“……”이 대화를 계속해야 할까?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용강한에 대해 묻지 않았다.날이 저
신방에서 보낸 첫날밤.그는 이미 그녀의 눈부신 살결을 한차례 본 적이 있었다.그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점점 또렷해지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속이 문란해진 거지?”“한심하게도, 내 몸 하나도 다스리지 못할 줄이야.”소우연은 목욕을 마친 후, 새로운 속옷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침상으로 다가왔다.이육진은 눈을 꼭 감고, 마치 이미 잠이 든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촛불을 불어 끄고, 조심스럽게 침상 위로 올라갔다.혹여나 그를 깨울까 싶어, 숨소리마저 가볍게 죽인 채로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지금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만약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았다면, 그의 귀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숨 막히는 밤이었다.그는 간신히 자신을 억눌렀다.그녀의 숨결이 고르게 변하고, 완전히 잠든 것이 확인된 후에야 이육진은 조용히 눈을 떴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그러다 문득, 낮에 용강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대의 운명은 부인을 만나면서부터 바뀌었소.”그녀가… 정말 그의 운명을 바꾼 걸까?왕부에서의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그러나 열이틀째 되는 날, 진원 장군부에서 소우연을 부르러 사람이 왔다.이육진은 이미 조정으로 떠난 후였다.그가 하직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은 시각이었다.정연이 조용히 물었다.“왕비마마, 장군부로 가실 겁니까?”“마마, 제발 한 번만 가 주십시오!”소씨 가문의 심부름꾼은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연거푸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사정하는 걸 보면, 장군부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이 틀림없었다.날짜를 계산해 보면, 오늘은 소우희가 친정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혹시… 소우희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걸까?그래서 소씨 가문에서 그녀를 억지로 부르려는 것일까?“왕비마마, 아니… 우연 아씨… 제발 한 번만 가 주세요.”
소우연이 정당에 들어서자, 소우희가 소 노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한 떨기 비에 젖은 꽃처럼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익숙한 장면이었다.그 순간, 정연이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했다.“왕비마마께서 도착하셨습니다!”그 한마디에, 소 노부인과 임진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소 노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했다.“이제 내가 손녀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냐?”임진숙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소 노부인의 말을 듣고는 다시 앉아버렸다.“오늘은 네 동생이 귀녕하는 날이다. 가족끼리의 모임일 뿐인데, 굳이 격식을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그녀의 시선이 곁에 서 있는 정연에게 향했다.이 회남왕부의 시녀는 어쩜 이렇게 오만하단 말인가?장군부에서까지 왕부의 위세를 과시하려 드는 것인가?그러나 소우연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뒤, 소 노부인 옆의 주좌로 걸어가더니 망설임 없이 앉았다.정적이 감돌았다.소우연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씨 가문의 예법이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 괜한 형식적인 예법은 생략해도 괜찮겠지요?”“너…!”소 노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왼편의 주좌는 오직 소홍범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소 노부인조차 함부로 앉지 않는 자리인데, 소우연이 거리낌 없이 그곳에 앉아버린 것이다.소우연은 차분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그리고 태연하게 되물었다.“제가 이 자리에 앉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소 노부인과 임진숙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네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것이냐?”소 노부인은 이를 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혀 예의도 없고, 가문을 존중하는 태도도 없구나.”소우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는 할머니의 손녀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회남왕비입니다.”그녀의 시선이 차갑게 번뜩였다.“비록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존중하고자 하나, 이곳의 예법이 왕야께, 나아가 폐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소씨 가문은 군신의 예를 무시했다고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방금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소우희의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로 가득했다.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소우연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담담히 물었다.“이제 대답해야 하지 않겠느냐? 대체 언제쯤 약재를 가져올 것이냐? 할머니의 약은 언제 만들 수 있는지 말해보란 말이다.”소우희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몸을 떨었다.입을 열지 못한 채, 그저 흐느끼며 소 노부인의 발치에 몸을 웅크렸다.소 노부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손녀를 내려다보았다.“말을 해야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해 보거라.”“할머니…”소우희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져 있었다.마치 며칠 밤을 내내 울기라도 한 것처럼.소우연은 문득 떠올랐다.평춘왕과의 혼례 후, 첫날밤에 들려온 끔찍한 비명 소리.그때 진우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던 기억이 난다.그녀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하게 그려졌다.소우희의 비참한 몰골을 보며, 소우연은 속으로 냉소했다.‘하지만… 이건 내가 전생에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소 노부인의 거실에는 소우희의 흐느끼는 소리가 가득 찼다.소우연은 짜증이 밀려왔다.“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난 결코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소우희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눈물에 젖은 얼굴로 소우연을 노려보았다.“어차피 너도 이 약을 만들 수 있잖아!”그녀가 화를 내며 소리친 순간, 거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모두의 시선이 소우연에게로 향했다.소우희는 기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나는 예전에 너에게 가르쳐 주었어. 할머니께 효도를 다하고 싶다며, 앞으로 진정향은 네가 만들겠다고 했잖아!”그녀는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소우연은 두 눈을 크게 떴다.소우희가 이제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면, 제정신을 잃고 아무 말이나 하는 법이지.’소우연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그렇다면…”그녀는 천천히 말했다.“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이 군에서 쓰는 약들도 내가 배워서 만들어야겠
소 노부인은 며칠째 두통에 시달려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더군다나 소우희의 울음소리가 계속되자, 머리가 더욱 욱신거리는 듯했다.그녀는 짜증 난 듯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울고 또 울고! 진정향 하나 준비하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신음을 흘렸다.“정말 아파 죽겠구나.”하지만 소우희는 여전히 울기만 할 뿐이었다.임진숙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딸의 온몸이 멍투성이인 걸 보니, 혼인 후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짐작이 가서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나, 그녀의 원망은 곧 소우연에게로 향했다.“어차피 가족 아니냐? 이미 네가 맡기로 했으면,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어찌 할머니께 효도할 줄도 모르느냐?”소우연은 냉정하게 응수했다.“방금 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맡은 적이 없습니다.”사실, 과거에는 소 노부인의 진정향을 늘 그녀가 만들어 왔다.하지만 공은 늘 소우희가 가로챘을 뿐이었다.소우연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더 이상 볼일도 없으니, 저는 왕부로 돌아가겠습니다. 왕야께서 기다리시니 말입니다.”정연이 그녀에게 다가와 부축했다.그때, 소우희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소우연, 너… 그날! 너랑 회남왕이 평춘왕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소우연은 일부러 모른 척 되물었다.“언제 말하는 거야?”“내가 혼인한 날!”소우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혼례 첫날밤, 평춘왕이 나에게 이상한 질문을 했어. 도대체 평춘왕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소우연은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이상한 질문이라니?”“어떤 질문이었는데 내게 그리 화를 내는 것이야?”소우희는 그녀를 노려보았다.“너희가 평서왕세자와 나의 사이가 각별했다고… 그렇게 말했다더라!”소우연은 피식 웃었다.“틀린 말은 아니지 않아? 넌 지금도 세자 저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지 않느냐.”그녀는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사실, 그날 밤.소우연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소우희에게 ‘
오늘, 소현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그 순간, 소우연이 가볍게 웃었다.“소 대인께서는 대리사경이시니, 직접 조사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우희가 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말입니다.”소우연은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리고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말이지… 이젠 웃기지도 않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저를 부르지 마세요.”그녀는 정연과 함께 가볍게 옷깃을 정리하며 장군부의 정원을 나섰다.소 노부인은 입술을 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진숙은 딸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소우연의 뒷모습을 보며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소현준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원래 소우연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가 회남왕비가 된 후, 그녀와의 만남은 불과 두 번뿐이었다.그런데 그녀는 더 이상 ‘오라버니’라 부르지도 않았다.“소 대인.”마치 남을 대하듯, 차갑고 거리감 있는 호칭을 사용했다.‘이 아이는 정말 장군부와의 인연을 끊으려 하는걸까…?’그때, 소 노부인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약은? 약은 어디 있느냐?”그녀는 한동안 소우희를 바라보았고,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물었다.소우연은 가볍게 돌아보며 말했다.“혹시 소우희가 할머니께서 도와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일부러 내놓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소우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할머니, 절대 아닙니다! 아니에요!"그러나, 소 노부인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결국,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그녀의 시선이 소우희를 향했다.소우희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소우연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소 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우희야, 설마 정말로 할미를 원망하느냐?”황제의 어명을 그녀가 어찌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소우희의 혼사를 두고 가족 모두가 얼마나 노력을 했단 말인가.온 가족이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