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숙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다.“그래, 내가 다시 방법을 찾아보마.”소우희는 혜주를 데리고 조용히 나섰다.그녀는 어머니에게 기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였다.이제 그녀가 직접 움직일 차례였다.하지만, 그녀는 이민수를 찾아가자마자 한 차례 정을 나누었다.소우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조금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오라버니… 저는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부디 절 도와주세요.”이민수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품에 안고 있던 그녀였지만,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그는 한순간 망설였다.그러나, 머릿속에는 평서왕의 날 선 질책이 떠올랐다.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우희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희아…”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소우희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세자 저하,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그녀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듣는 순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이민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너를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마. 어쨌든 그 분도 황가이시니…”“최선이요…?”소우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오라버니, 설마… 절 돕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이민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희아, 돕지 않는 게 아니라 돕지 못하는 거란다… 폐하께서 내린 혼사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어.”그가 부친이 황제가 되지 않는 이상, 아니 그가 황제가 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그녀의 혼사를 막을 수 없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우희는 그 속뜻을 알아챘다.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세자 오라버니, 설마 잊으셨습니까? 저는 천명이 정한 사람…”“희아, 그만하자.”이민수는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했다. 그러자 그를 모시던 환관, 상평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우희 낭자를 뒷문으로 돌려보내라.”소우희의 두 눈이 붉어졌다.
소우희가 평서왕부를 찾은 일은 진우 등을 비롯한 감시하는 이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그들이 이육진에게 보고했을 때, 소우연은 무심한 듯 말했다.“정말 미쳤구나.”진우가 말을 덧붙였다.“이민수의 측근인 환관이 우희 아씨를 뒷문으로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우희 아씨의 몸종은 충격을 받은 듯 그대로 주저앉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군요.”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한참 후 조용히 말했다.“혜주는 참 충성스럽구나.”이육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내일이면 소씨 가문에서 연회를 열겠지.”구일, 정식으로 출가하는 날. 평춘왕 이종대가 직접 맞이하러 올 터였다.“그럼 우리도 연회에 가야겠구나.”“아니지… 가기 싫다면 안 가도 된다.”“아니요. 가고 싶습니다.”소우연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이육진이 말했다.“그럼 가도록 하자.”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굳이 연회까지 갈 필요는 없죠. 평춘왕부로 축하 인사만 전하면 돼요. 어차피 왕야와는 꽤나 먼 친척일 뿐이잖아요.”평춘왕부에 가면, 그곳에서도 충분히 볼만한 광경이 펼쳐질 터였다.“좋은 생각이구나.”이육진은 언제나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그리고 소우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마음속에서 부서진 조각들이 천천히 맞춰지듯, 감정이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었다.만약 운명을 거슬러 바꿀 수 있다면, 이 사람과 함께하는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진우는 두 사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우희의 일을 분석하는 모습을 보고 몇 번이나 웃음을 참아야 했다.다음 날.아침 식사 시간, 진우가 다시 찾아와 보고했다.“진원 장군부에서 연회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소우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소우희가 평춘왕부로 시집가면, 모든 것이 정해질 터였다.그러나 칠일, 팔일 이틀 동안 그녀는 극도로 불안해했다.마음이 불안감에 휩싸여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그리고 구일 아침이 밝았다.소우연은 일찍 눈을 떴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가는 내내 울어댔다.소우연은 그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둥글넙적한 얼굴의 평춘왕이 울고불고하는 소우희를 번쩍 들어 말 위에 태우는 모습이라니…그야말로 눈앞에 선한 장면이었다.이육진이 조용히 말했다.“우리도 슬슬 가볼까?”소우연은 소우희가 신랑과 함께 예를 올리는 모습을 직접 못 보는 게 아쉽다고 속으로 생각했다.정월 구일.집을 나서자 거리에는 온통 붉은색이 가득했다.집집마다 붉은 대련을 붙이고, 붉은 초롱을 매달아 한껏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평춘왕부 밖에는 터진 폭죽 껍질이 온통 붉게 나뒹굴었고, 꽹과리와 피리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소우연은 이육진을 살짝 밀었다.계단을 올라설 때, 진규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녀를 도왔다.그 순간, 이육진의 동생 이지약이 그가 가면을 쓴 채 나타난 것을 보고는 놀란 기색을 보였다.하지만 이내 서둘러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대청에서는 중매쟁이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예식이 끝났고, 신부는 신방으로 들여보내졌다.그 순간, 소우희의 울음소리가 문밖까지 새어 나왔다.정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아니, 신부가 왜 이렇게 우는 거야?”이지약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강제로 치러진 혼례.아버지가 억지로 그녀를 끌어와 강제로 치른 혼인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소우연도 나지막히 말을 덧붙였다.“경사스러운 날인데, 분위기를 깨는구나.”소우희와 평춘왕이 혼례를 올리고, 신방에 들었다.그렇다면 이제 끝난 거겠지?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었다.생각해 보면, 자신 역시 한때 원치 않는 혼인을 강요당했다.하지만 그때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물론, 지난 생에서는 도망쳤지만, 이번 생에서는 남기로 했다.그리고 생각보다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연회가 시작되고, 평춘왕 이종대는 잔을 들고 연석을 돌며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그 후, 이육진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그러나 이육진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오늘은 숙부님의 경사스러운 날
남의 입을 통해 듣는 것보다,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짜릿한 법이다.하지만 이육진의 기대 가득한 시선을 보고, 소우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남자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소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었다.그 순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민수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그 눈빛은 어딘가 어두웠다.부드러우면서도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할 말이 있다고?소우연은 헛웃음을 지었다.이 남자가 나한테 할 말이 남아 있긴 할까?섣달그믐날, 그가 했던 말이란 결국 고작해야 이육진이 후사를 보게 되면 평서왕부에 불리할 거란 경고뿐이었다.“연아…”이육진은 소우연이 자신을 밀던 손을 멈춘 것을 느꼈다.뒤돌아보니 그녀는 이민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이육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불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소우연은 허리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왕야?”왜 멈춘 걸까?“가자.”그렇다. 이 평춘왕부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소우연은 다시 이육진을 밀며 연회장을 가로질렀다.그녀를 향한 수많은 시선이 따라왔지만, 무슨 의미인지 굳이 짐작할 필요도 없었다.그저 잘나가던 황태자가 하루아침에 폐인이 된 걸 안타까워하는 동정의 눈빛이라고 생각하였다이민수를 지나칠 때, 그는 소우연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마치 무언가 말을 남기려는 듯. 이육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가슴 한구석이 찝찝했다.왕부에 돌아온 후.소우연은 이락원으로 향했다.직접 이육진을 위한 약재를 조제하고, 연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이육진은 본채의 서재로 돌아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흠천감의 용강한이 그를 찾아왔다.이육진은 침상에 앉아 조용히 바둑판을 가리켰다.“한 판 두겠소?”용강한은 피식 웃었다.“운이 트일 땐, 당연히 축하판을 둬야지.”그가 가볍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흰색 도포가 부드럽게 휘날렸다.마치 속세를 떠난 신선 같았다.“그 말은 무슨 뜻이오?”이육진은 눈썹을
용강한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방금까지 팽팽했던 승부는, 이육진이 방금 둔 한 수로 단번에 갈렸다.역시나, 시운이 도는 자의 기세란 두려운 법이다.이육진이 조용히 물었다.“자네도 소우희가 타고난 ‘봉황의 운명’이라 믿으시오?”용강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렇소. 자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그 노도사는 바로 어릴 적 자네의 운명을 점쳤던 사람이었소. 그 분은 내 스승이셨지…”“그게 정말이오?”“그렇소. 내가 내 스승을 어찌 헐뜯을 수 있겠소?”이육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어쩐지, 그래서 그동안 내가 점을 쳐달라 하면 늘 피한 거였군.”용강한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사실은 여러 번 봐 주었소. 다만, 그 당시 자네에게 좋지 않은 점괘만 나왔을 뿐이지.”“그러다가 자네가 우연 아씨와 혼인한 후, 명운이 변하기 시작했소.”이육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부인이 내 명운을 바꿨다는 뜻이오?”“십중팔구 그렇다고 봐야지…”그는 손에 들고 있던 바둑돌을 바둑통에 툭 던졌다.“지금 부인의 운명별은 점점 밝아지고 있소. 자네 운도 마찬가지고.”“이런 기회는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기회라…”이육진은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뒤쪽 창문을 열었다.맑고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가슴 한구석에서 낯선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과거에는 흠천감의 점괘 따위 믿지 않았다.하지만 용강한과 가까워지고, 그리고 네 해 전 황태자 자리를 잃은 후부터는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용강한은 오늘 전할 말을 모두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육진은 예의상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권했지만, 예상외로 용강한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왕야가 처음으로 나를 식사에 초대하는데, 당연히 응해야 하지 않겠소?”“……”방금 그 말은 그냥 하는 소리였는데. 하지만 용강한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그는 직접 보고 싶었다.소우연이라는 여인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하늘의 운명을 거스르는지 말이다.간석이 주방에서 저녁 종
이육진은 가볍게 헛기침하며 용강한을 바라보았다.“용공, 무슨 가르침이라도 받은 것이오?”용강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아니, 전혀 없소.”“혹시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오?”“아니오. 아주 맛있소.”‘그렇게 맛있다면서 네 눈은 왜 자꾸 연이에게 가는 것이냐?’“그럼 다행이군. 마음껏 먹으시오.”이육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단단히 결심했다.다음번엔 이 자를 절대 왕부에서 밥 먹게 하지 않겠다고.용강한은 가볍게 웃으며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방금 전까지 소우연의 관상을 보고 있었다.운명별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막상 직접 얼굴을 보니 시각적 충격이 상당했다.언뜻 보기엔 요염한 미인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이었음에도 얼굴선이 단정하고 기품이 넘쳤다.의상 또한 소박하면서도 세련되어 그녀의 기품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손짓 하나, 발걸음 하나에도 봉황이 내려앉은 듯한 우아한 기세가 서려 있었다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앞으로 그녀는 이육진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져야 했다.이 두 사람은 언젠가 평생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 분명했다.용강한은 떠나기 전, 단정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소우연에게 예를 올렸다.“오늘 환대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그러고는 흠천감 용공답게 흰 소매를 살짝 날리며 자리를 떠났다.소우연은 어리둥절했다.‘…저 사람, 왜 나한테 저리도 공손하게 구는 걸까?’책에서는 용강한이 냉정하고 남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고 적혀 있었다.단, 이육진과 심소균만은 예외였지만 말이다.“왕야, 용공이 오늘 와서 왕야께 무슨 말을 했습니까?”책 속에서 용강한은 이육진과 친밀한 관계였고, 몇 번이나 그를 구해 준 존재였다.그야말로 믿을 만한 벗이었다.이육진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밥 얻어먹으러 왔다더군.”“……”이 대화를 계속해야 할까?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용강한에 대해 묻지 않았다.날이 저
신방에서 보낸 첫날밤.그는 이미 그녀의 눈부신 살결을 한차례 본 적이 있었다.그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점점 또렷해지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속이 문란해진 거지?”“한심하게도, 내 몸 하나도 다스리지 못할 줄이야.”소우연은 목욕을 마친 후, 새로운 속옷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침상으로 다가왔다.이육진은 눈을 꼭 감고, 마치 이미 잠이 든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촛불을 불어 끄고, 조심스럽게 침상 위로 올라갔다.혹여나 그를 깨울까 싶어, 숨소리마저 가볍게 죽인 채로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지금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만약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았다면, 그의 귀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숨 막히는 밤이었다.그는 간신히 자신을 억눌렀다.그녀의 숨결이 고르게 변하고, 완전히 잠든 것이 확인된 후에야 이육진은 조용히 눈을 떴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그러다 문득, 낮에 용강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대의 운명은 부인을 만나면서부터 바뀌었소.”그녀가… 정말 그의 운명을 바꾼 걸까?왕부에서의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그러나 열이틀째 되는 날, 진원 장군부에서 소우연을 부르러 사람이 왔다.이육진은 이미 조정으로 떠난 후였다.그가 하직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은 시각이었다.정연이 조용히 물었다.“왕비마마, 장군부로 가실 겁니까?”“마마, 제발 한 번만 가 주십시오!”소씨 가문의 심부름꾼은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연거푸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이렇게까지 간절하게 사정하는 걸 보면, 장군부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이 틀림없었다.날짜를 계산해 보면, 오늘은 소우희가 친정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혹시… 소우희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걸까?그래서 소씨 가문에서 그녀를 억지로 부르려는 것일까?“왕비마마, 아니… 우연 아씨… 제발 한 번만 가 주세요.”
소우연이 정당에 들어서자, 소우희가 소 노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한 떨기 비에 젖은 꽃처럼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익숙한 장면이었다.그 순간, 정연이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했다.“왕비마마께서 도착하셨습니다!”그 한마디에, 소 노부인과 임진숙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소 노부인은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했다.“이제 내가 손녀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냐?”임진숙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소 노부인의 말을 듣고는 다시 앉아버렸다.“오늘은 네 동생이 귀녕하는 날이다. 가족끼리의 모임일 뿐인데, 굳이 격식을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그녀의 시선이 곁에 서 있는 정연에게 향했다.이 회남왕부의 시녀는 어쩜 이렇게 오만하단 말인가?장군부에서까지 왕부의 위세를 과시하려 드는 것인가?그러나 소우연은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뒤, 소 노부인 옆의 주좌로 걸어가더니 망설임 없이 앉았다.정적이 감돌았다.소우연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소씨 가문의 예법이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 괜한 형식적인 예법은 생략해도 괜찮겠지요?”“너…!”소 노부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왼편의 주좌는 오직 소홍범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소 노부인조차 함부로 앉지 않는 자리인데, 소우연이 거리낌 없이 그곳에 앉아버린 것이다.소우연은 차분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그리고 태연하게 되물었다.“제가 이 자리에 앉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소 노부인과 임진숙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네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한 것이냐?”소 노부인은 이를 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혀 예의도 없고, 가문을 존중하는 태도도 없구나.”소우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는 할머니의 손녀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회남왕비입니다.”그녀의 시선이 차갑게 번뜩였다.“비록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존중하고자 하나, 이곳의 예법이 왕야께, 나아가 폐하의 귀에 들어간다면, 소씨 가문은 군신의 예를 무시했다고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보니 소우희의 외출 목적이 소현우와 소한준 두 사람을 경성으로 데리고 오려는 거였네.”소우연이 담담하게 말하자 진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이때, 정자에 앉아있던 이육진이 말했다.“소우희 그 여자는 경성의 천재 소녀가 아니라 완전 멍청이였어.”“예전에 덕빈 마마께서 소우희의 어여쁘고 천재적인 모습을 보고 폐하께 왕야와 소우희를 위해 혼인을 하사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소우연이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에 이육진은 그녀를 조용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대꾸했다.“그러고보니 소우희 그자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아니구나. 그자가 아니었으면 나와 연이 너의 인연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것이지 않느냐?”이육진은 그동안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계속 찾아다니고 있었지만 올해가 되어서야 단서를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특히 용강한은 전에 이육진에게 소우희 대신 시집온 아내에게 잘해주라고 하면서 어쩌면 소우연이 그의 고달픈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그때 당시 이육진은 용강한에게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점을 봐 달라고 했고 용강한은 그런 이육진에게 급할 것 없다고, 인연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만 얘기했다.이육진은 용강한의 말투와 태도가 사기꾼처럼 느껴졌다.그러다가 혼사를 치른 뒤, 소우연의 몸에서 생명의 은인과 똑같은 약초향이 나자 이육진은 그제야 용강한은 사기꾼이 아니라 실력이 뛰어난 점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한편, 소우연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나와의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고?’그 말은 마치 이육진이 두 사람이 언젠가 함께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내 지운 소우연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왕야 말씀이 맞습니다.”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소우연이 잘못된 선택을 하나라도 했더라면 오늘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뒤로하고 이육진 이 남자만 봤을 때 이육진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며
소현우는 아버지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대 당시 최전방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후방을 책임지던 회남왕이 습격을 당한 탓에 지원군들이 제때에 나타나지 못했다.결국 삼천 명이 넘었던 병사들은 몇백 명 밖에 남지 않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전쟁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큰 부상을 입은 소현우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부하는 곧바로 소현우를 조청강에 위치한 그의 외갓집으로 데려갔지만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처했다.그러다가 겨우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사람이 소우희였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소우희가 매일 소현우 곁을 지켰고 하인을 시켜 약을 달이고 직접 소현우에게 먹여 주기까지 했다.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외출하느라 바빴다.자세하게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소우연은 매일 소우희에게 소현우가 아직도 고열을 앓고 있는지,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지는 않는지 확인하라고 얘기한 것 같았다.“이제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겁니까?”의자에 앉아있던 소현준이 소현우를 빤히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물었다.소현우는 소우희에게 의심이 생긴 게 확실하다.소홍번도 소현우를 보며 말했다.“진실이 무엇인지 너도 이제 다 알았을 거야. 의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너를 살려주었겠느냐?”안색이 확 굳어진 소현우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홍범의 말에 대꾸를 했다.“아버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우리 소씨 가문은 소우연에게 미안한 게 많아. 하지만 근래에 네 어머니와 현준이가 회남왕에 찾아가 소우연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그 아이가 그렇게 냉정하단 말입니까?”소홍범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쳐다보았고 소현준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그럼…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소현우의 머릿속에 소우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도대체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거짓일까? 소현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라버니, 일단 진정하십시오. 소우연은 지금 회남왕비입니다. 다른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치던 예전의 소우연이 아니란 말입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면서 겨우 말을 이어갔고 그 모습에 소한준은 너무 안쓰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소우연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그래도 우린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가족인데 소우연이 너에게 그런 몹쓸 짓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소우연은 지금 저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보십시오. 소우연은 얼굴도 비추지 않을 겁니다.”소우희가 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씨 가문의 나머지 사람들은 속이기 쉽지 않지만 소한준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가장 예뻐하고 아껴줬으며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기에 이번에도 무조건 그녀의 편에 설 거라고 확신했다.‘난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복덩이야. 절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한편, 소한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자 소우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제가 지금까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저와 둘째 오라버니, 그리고 어머니까지 소우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갔는데 소우연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솔직히 전 소우연이 제 모든 걸 빼앗아가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소우연의 행동을 보면 저희 소씨 가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깊어 보입니다. 만에 하나, 소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트리겠다는 소우연의 말이 그냥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어떡합니까?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는 제 입에서 소우연이야말로 의술을 할 줄 아는 딸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셨기 때문에 소우연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제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목숨 걸고 금주까지 와서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께 이 사실을 전해드리는 겁니다!”“다들 미쳤구나!”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말하다가 너무도 가여운 소우희를 쳐다보았다. 두 눈은 너무
소현우와 소한준이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소한준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며 말했다.“우희야, 네가 고생이 많다. 걱정하지 말아라. 큰형과 난 언제든 네 편이다.”소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걱정하지 말 거라. 내일 내가 일단 아침 일찍 경성으로 출발하마! 우희 넌 한준이와 함께 천천히 뒤따라오거라. 절대 낙심해서는 안 된다!”소우연은 아마도 소우희를 도와서 약을 제조할 때 의술을 조금 익혔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가문을 망가트리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회남왕은 왜 갑자기 자비를 베풀어 소우연을 살려둔 걸까?예전에 소현우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소우희는 잠시도 앉아있지 못하고 곁에서 소현우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밖으로 싸돌아 다니느라 바빴다.친 오라버니가 위독하다는데 전혀 신경도 안 쓴 소우연만 생각하면 소현우는 너무 실망스웠다.“고마워요, 큰 오라버니.”소우희가 가까스로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소현우가 곁에 있던 혜주에게 말했다.“넌 일단 우희가 푹 쉴 수 있게 모시고 나가거라.”그제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혜주는 소우희를 부축한 채 방을 나섰다.두 사람이 나가자 소한준이 씩씩거리면서 언성을 높였다.“소우연 걔는 미친 게 분명해요. 회남왕에게 시집을 갔다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단 말입니다.”“네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없어. 이 일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소우연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이야. 일단 돌아가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고 우희의 억울함을 풀어줘야지.”“아버지와 둘째 형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소우연의 말만 듣고 그럴 수 있는 겁니까?”“우희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소우연이 할머니로 우희를 협박했다고. 우희에게 의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소우연이라고 인정하라고. 심지어 본인이 소씨 가문 복덩이로 인정하라고도 했다 하지 않았느냐? 소우연 걔가 참…”한편, 방을 나선 소우희와 혜주는 멀리
“혜주 얘는 왜 이래?”그제야 평소와 다른 혜주를 눈치챈 소현우가 묻자 소우희가 대답했다.“소우연이 절 협박했다는 사실을 혜주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우연이 일부러 이런 수를 쓴 겁니다.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아버지께서 화를 버럭 내시더니 혜주에게 벌을 내리신 겁니다. 혜주의 혓바닥은 결국 소우연이 자른 겁니다.”“아버지가?”소현우와 소한준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에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큰 벌을 내렸다는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하긴, 아버지께서 사실을 왜곡한 소우연의 말을 믿었으니까 당연히 화가 나셨을 것이다.“불과 몇 달 사이에 집에 이렇게 큰 변고가 생겼을 줄은 몰랐네.”소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소현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소우연이 소우희 대신 회남왕에게 시집을 가고 이 때문에 황제가 평춘왕와 소우희 두사람의 혼사를 하사했을 때부터 소현우는 소씨 가문이 몰락하고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소우연까지 이렇게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이건 단순한 변고가 아닙니다! 소우연이 회남왕을 부추겨 덕빈 마마와 폐하게 평춘왕의 혼사를 하사해 달라고 한 게 분명해요. 소우연이 우리 우희를 철저하게 망가트리려고 한 겁니다.”소우희는 감동한 눈빛으로 소한준을 쳐다보았다.소씨 가문 사람들이 말로는 다들 소우희를 예뻐하고 아꼈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앞에 나서서 소우희를 지키는 사람은 소한준밖에 없었다.이런 생각에 소우희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셋째 오라버니, 소우연이 절 원망하고 미워하는 건 괜찮은데 할머니의 병으로 장난치는 건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오라버니들도 경성을 떠나기 전에 소우연이 어떤 태도인지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이제 소우연 마음속에는 소씨 가문이 없습니다. 심지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소현우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다급하게 제지하자 소우희가 훌쩍이며 말을 이어갔다.“오라버니, 제가 어렸을
예상에 없던 폭우 때문에 노정이 지체된 소현우와 소한준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금주에 도착했다.여러 사람들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소우희는 뒷돈을 챙겨준 덕분에 성공적으로 금주 역참에 들어와 소현우와 소한준을 만나게 되었다.“우희야, 네가 금주엔 어쩐 일로 온 것이냐?”소현우는 자신과 소한준 앞에 무릎을 꿇은 소우희를 재빨리 부축하며 물었지만 소우희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혜주에게 말했다.“얼른 우희를 일으키지 않고 뭐 하는것이냐?”혜주가 얼른 소우희를 부축했지만 소우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혜주도 소우희를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거냐?”성격이 급한 소한준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 애절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때, 소우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큰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 이제 저에겐 돌아갈 친정집이 없습니다.”“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할머니를 위해 조제할 진정향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약재를 소우연이 전부 싹쓸이했습니다. 제가 세자께 부탁을 해서 금주와 영주 약방을 다 돌아봤는데 결국 구하지 못했습니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할머니를 보며 도무지 가만있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 소우연에게 빌고 또 빌었는데 소우연이 글쎄… 글쎄…”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우희가 한참동안 훌쩍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어갔다.“예전에 소우연이 저를 도와 약재를 달였을 때 전 처방전을 조금도 숨김없이 다 보여줬었습니다. 그런데 소우연이 갑자기 돌변하여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소우희의 말에 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난 산적을 소탕하러 가기 전부터 네가 마음에 걸렸다!”소현우도 미간을 찌푸리며 소우희를 쳐다보았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소현우가 다시 한번 잡아당기자 소우희는 못 이기는 척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오라버니들, 소우연은 분명 진정향
마음속에 큰 파도가 출렁거렸지만 소우연은 최대한 태연한 모습ㅇ르 유지한 채 다정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전 왕야를 믿습니다.”이렇게 좋은 왕야와 함께 한다면 미래에 온통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하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미래가 막연하다고 했던 용강한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리고 용강한이라는 사람이 너무 수상하기도 했다. 용강한은 소우연이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혹 용강한 그자가 너에게 겁을 주는 말이라도 한 것이냐?”이육진은 이제 용강한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용강한은 평소에 말수가 적지만 점괘를 보기 시작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아닙니다.”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소우연은 왠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의 손을 꼭 잡은 채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으며 용강한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한편, 금주 성문 부근에서.“왕비님, 소인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소 장군님 일행은 오늘 내로 금주에 도착하여 역참에 묵을 예정이라고 합니다.”검은 복장을 차려입은 호위무사가 소우희에게 보고를 올렸고 소우희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가 곁에 있던 시녀 춘화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가서 혜주를 데려오거라.”벙어리가 된 혜주를 데리고 다니는 게 참 불편하고 성가신 일이지만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 혜주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네.”밖으로 나간 춘화는 이내 혜주를 데리고 들어왔다. 낡은 마의를 입은 혜주는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우희에게 인사를 올렸고 소우희는 그런 혜주를 재빨리 일으켰다.“얼른 일어나거라.”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하인들에게 말했다.“너희들은 이만 물러나거라.”하인들이 밖으로 나가자 소우희는 혜주를 안아주더니 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혜주야, 너와 내가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일 줄
한편, 정연은 명심에게 왕비와 왕야를 위해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얘기하고 있었다.“왕비님이 나오셨습니다.”소우연을 발견한 명심이 말했다.정연과 명심은 가까이 다가가다가 휘청거리는 소우연의 모습에 재빨리 달려가 부축했다.“왕비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화들짝 놀란 정연이 다급하게 물으며 대청마루를 힐끔 쳐다보았다.“난 괜찮다.”소우연이 대답했다.‘괜찮다고? 얼굴이 이렇게 하얗게 질렸는데 괜찮다니?’정연과 명심은 양쪽에서 소우연을 부축해서 걷다가 맞은편에서 휠체어를 타고 오던 이육진과 마주치게 되었다.핏기를 잃은 소우연의 모습에 이육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어찌된 일이냐?”겨우 진정한 소우연은 이육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별일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잠시 휘청거렸습니다.”이육진은 소우연의 핑계를 당연히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늦게 했기에 이 시간에 배가 고플 리가 없다.“그럼 얼른 가서 간식 좀 준비하거라.”“네, 알겠습니다.”정연과 명심이 소우연을 부축한 채 떠났다.이때, 대청에서 나온 용강한은 문턱 앞에 서서 담담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조금 전에 왕비가 뭘 물어본 것이오?”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가까이 다가가 묻자 용강한은 조금 전에 소우연이 했던 질문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다만 용강한과 소우연이 어렸을 때의 인연과 그가 소우연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소우연의 화들짝 놀란 반응에서 용강한은 그녀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그저 너무도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왕비는 왜 그렇게 겁을 먹고 놀란 걸까?용강한은 이육진을 보며 말했다.“왕야, 왕비님이 겉으로 보기엔 씩씩하지만 사실 마음이 여리고 상처가 많은 분이오.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네.”“나도 왕비가 또래 소녀들처럼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걱정 없는 것 같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드네.”이육진은 소우연이 떠난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용강한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인연이 참 깊은 듯합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용강한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왕비님께서 저를 아직까지 기억하신다고 하니 저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아닙니다. 그 남자아이가 대감님이라고 하시니 저도…”오래간만에 소녀다운 모습을 보이던 소우연은 용강한을 쳐다보며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 듯 말했다.“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있는데 대감님께서 이를 풀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용강한은 소우연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했다.“왕비님께서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것이지요?”“네, 그렇습니다.”소우연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고 초조했다. 그녀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를 간절하게 알고 싶었지만 알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그 미래가 너무도 막연하고 아득하여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말을 하던 용강한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왕비님께서는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십니까?”용강한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순백의 구름과도 같았다.“저는…”소우연은 입을 뻥긋거리며 자신과 이육진이 앞으로 판을 뒤집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에 용강한은 미래가 막연하고 아득하다고 얘기를 했었다.‘만에 하나 용강한이 판을 뒤집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라고 대답하면 어떡하지? 그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힘을 쓰는 몇 년 동안 나와 이육진은 언젠가 죽을 걸 알면서 그자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이런 생각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소우연은 대청 밖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는 흰 구름을 보며 어떻게든 차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강한이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왕비님, 혹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소우연은 간절하게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