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연희는 커피의 뜨거움도 느끼지 못한 채, 곽서연의 휴대폰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화면 속 남자는 들것에 누워 의료진에 의해 응급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온몸이 피로 얼룩져 있었고, 얼굴 역시 피투성이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의 손목에 차고 있는 한 줄의 불교 염주는 그녀를 얼어붙게 했다.그 염주는 바로 몇 년 전, 그녀가 사찰에서 108배 기도 끝에 얻은 것이었다.‘우진의 평온한 삶과 행복을 기원하며...’호두나무로 만든 염주 첫 번째 구슬에는 ‘연희 우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그 문구는 그녀와
윌리엄 요한의 말은 너무도 당당해서, 육연희는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맙습니다.”윌리엄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대꾸했다.“언제쯤이면 나한테 이렇게 격식 차리지 않을까, 연희야.”그는 옷장에서 편안해 보이는 옷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는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연희야, 혹시 그 사진 속 남자를 걱정하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질문에 육연희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방금 본 사진 속 남자가 자신의
뜨거운 모래를 머금은 듯한 윌리엄 요한의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육연희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게다가 ‘여보’라는 호칭은 마치 두 사람이 금실 좋은 부부라도 되는 듯 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안 그래도 조금 전 키스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리던 육연희는 윌리엄 요한의 말에 볼이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육연희는 약간 붉어진 눈으로 윌리엄 요한을 바라보며 키스로 인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선을 여러 번 넘네요.”윌리엄 요한은 화를 내는 육연희의 얼굴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을 깨물고 웃으며 말했다.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윌리엄 요한의 멋스러움은 감추어지지 않았다.그는 늘씬한 다리로 여유 있게 걸어 육연희의 곁으로 오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가 그래요? 우리 결혼생활이 공허하다고요? 왜 사랑 없이는 따뜻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체이스 선생, 생각이 너무 독단적인 거 아닌가요?”체이스는 윌리엄 요한을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사랑을 하려면 거짓 없는 솔직한 모습으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야죠. 하지만 윌리엄 공자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잖아
고용인은 윌리엄 요한이 여왕의 취향을 몰라 그녀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집어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뜻밖에도 윌리엄 요한이 집어준 음식은 모두 육연희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게다가 새우 껍질도 세심하게 벗겨 주었다.고용인뿐만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체이스도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육연희는 유달리 입맛이 독특했다.그런데 어떻게 결혼한지 하루밖에 안 되는 윌리엄 요한이 그녀의 취향을 이토록 잘 아는 걸까?아무리 사적으로 알아보고 사전조사를 했다고 해도 이런 사소한 것까지 알기 어려울 텐데.체이스는 윌리엄 요한을 수상쩍게
육연희는 윌리엄 요한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두 사람의 숨결은 서로 뒤엉켜 열기를 더했다.육연희는 나긋해진 목소리로 말했다.“윌리엄, 오늘 선을 여러번 넘네요?”윌리엄 요한은 낮게 웃으며 코끝을 그녀의 얼굴에 비비고 말했다.“여보, 저녁에 상을 주기로 약속했었잖아. 한 나라의 여왕으로서 내뱉은 말은 지켜야지.”“내가 언제요? 표현을 보겠다고만 했지, 주겠다고는 하지 않았는데요.”“나 충분히 잘한 것 같은데?” “부족해요.”육연희의 말에 윌리엄 요한은 욕망을 참지 못한 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
몇 마디 다정한 말로 풀 수 있는 응어리가 아니었다.육연희는 그때 받았던 상처가 너무 깊어 두 번 다시 건드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그 고통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졌다.육연희는 눈을 감았다.더 이상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이제 모든 건 시간에 맡기고 싶었다.윌리엄 요한은 곤히 잠든 육연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맑고 고른 그녀의 숨소리를 조용히 듣다가 그녀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연희야, 다시 날 사랑할 수 있게 해줄게.”다음날.육연희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 비
윌리엄 부인이 말하는 사람은 윌리엄 요한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윌리엄 요한은 육연희를 아껴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일도 도와서 해주고 있었다.밥을 먹을 때면 입에 떠먹여 줄 정도로 다정한 사람인데 윌리엄 부인은 왜 그를 이렇게 헐뜯는 걸까?윌리엄 부인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내가 잘못 알고 있다는 건가요?”육연희는 웃으며 말했다.“네. 잘못 알고 계시네요. 배려심도 깊고 나한테 아주 다정한 남편이에요. 윌리엄 부인께서 왜 그렇게 알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육연희의 말에 윌리엄 부인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네가 안고 자고 싶다면 될 일이야? 네가 그러다가 이모부한테 쫓겨 나오면 내 잘못 아니다.”둘째와 셋째는 아빠와 천우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신바람이 나서 쉴 새 없이 옹알이했다.육문주는 셋째를 끌어안고 볼 뽀뽀를 하며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그래도 딸이 좋아. 역시 우리 보배 딸이 제일이야. 너희 오빠 한번 봐봐. 고작 3살밖에 안 됐는데 아빠 엄마는 안중에도 없고 와이프를 입에 붙이고 살잖아.”셋째는 아빠의 따뜻한 품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입을 비죽이며 뭐라 말했다. 아기의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간 송학진은 차서윤을 아래 우로 훑어보고 관심 어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는 나한테 연락해야지. 내가 걱정했잖아. 날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거 맞아?”미간을 찌푸린 채 잔뜩 화가 나 보이는 송학진을 차서윤이 빙그레 웃으며 달래줬다.“걱정하지 마세요. 강한나 씨를 만났을 때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꼈어요. 식사하는 내내 자꾸 저희를 보면서 친구들과 뭐라고 소곤거리더군요. 그 사람들이 무슨 수를 쓸 것을 먼저 예상하고 화장실로 간 거예요. 둘째 도련님이 다가올 때 먼저 스프레이를 뿌리고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전 그런 적 없어요. 바람피우다가 송 대표님한테 잡혀서 저한테 덮어씌우려는 수작인 것 같은데요. 그만하시죠.”차서윤은 장사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더니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그녀의 뺨을 후려치고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저 남자를 이용해서 저를 망가뜨리고 제가 바람났다고 학진 씨를 불러올 수작이었죠. 이런 수작에 제가 넘어갈 줄 알았어요? 제가 바보로 보여요?”말을 마친 차서윤은 화가 가시지 않는지 장사연의 나머지 반쪽 뺨을 후려쳤다.“제가 학진 씨와 결혼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가
강한나와 친구들은 시간이 됐다 싶어 화장실을 찾아가서 문이 잠겨있다며 호텔직원을 불러 모았다.그 소식을 들은 송학진도 아림을 데리고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무슨 영문인지 화장실 앞에 사람이 많이 모여 있어서 마음이 놓이지 않은 송학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에요?”어떤 여자가 비꼬는 말투로 대답했다.“딱 보면 알리죠. 파렴치한 남녀가 지금 바람피우는 거죠. 정말 이상한 여자가 다 있네요. 방 하나 예약하면 될 일을 굳이 화장실에서 저러잖아요.”“더 스릴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저는 이런 장면 많이
강한나가 4년을 기다려 기다려온 것은 송학진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이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그 소식이 가짜라 생각했고 송학진이 다른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강한나는 송학진과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외국에서 돌아왔는데 한차례 모욕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늘 아침에 발생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뺨이라도 처맞은 것처럼 얼굴이 얼얼했고 가슴이 아파 났다.그녀는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내 남자는 영원히 내 것이야. 누구도 빼앗
송학진이 차서윤과 아림을 데리고 행복한 모습으로 레스토랑에 나타난 것을 본 강한나는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을 참을 길이 없었다.오늘 저녁은 친구들이 그녀를 위해 마련해준 자리였다. 그녀의 친구들은 송학진을 알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다.너무나도 거북한 장면에 강한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어색한 웃음을 자아냈다.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송학진을 불렀다.“학진아.”강한나의 부름 소리를 들은 송학진은 아무런 표정 없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서윤과 아림을 끌어안고 예약한 자리로 갔다.강한나의 친구들
“그런다고 제가 용서해 줄 것 같아요?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여보, 그건 너무했어. 벌써 금욕이라니! 내가 참지 못하고 죽으면 어떡해. 다음에 주의할 테니까 제발 용서해 줘.”두 사람이 차 옆에서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매니저가 아림을 데리고 멀리서부터 다가왔다.아림은 팝콘을 품에 안고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아빠, 엄마. 얘기 끝나셨어요?”송학진이 허리를 굽혀 아림을 안아 들고 어린이의 볼에 입을 맞춘 뒤 웃으며 대답했다.“응, 얘기 다 끝났어. 근데 어쩌지? 엄마가 아빠 때문에 많이 화
송학진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란 차서윤은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피팅룸에 놓인 커다란 거울에는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거울 앞에서 남자에게 입술을 약탈당하는 모습이 비쳐있었다.거울 속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차서윤은 너무 부끄러워 토마토처럼 목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키스가 끝나자 수치스러운 마음에 그녀는 송학진의 어깨에 이빨 자국을 남기고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이건 너무했어요!”송학진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잠깐 미간을 찌푸린 뒤 웃으며 대답했다.“미안해.근데 너 아
아림의 말에 송학진은 웃으며 말했다.“요놈이 너한테 뭘 가르친 거야. 이제 보면 엉덩이를 때릴 거야.”“천우 오빠 때리지 마세요. 쌍둥이한테 뽀뽀도 할 수 있게 하고 날 엄청나게 예뻐한단 말이에요. 아빠, 쌍둥이들이 너무 귀여웠어요. 손도 너무 작고 보들보들해요. 나도 여동생을 갖고 싶어요.”아림의 말에 송학진은 웃으며 차서윤의 입술에 뽀뽀하고 그녀의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이건 엄마가 허락해야 해. 여보, 우리 오늘 밤에 딸 소원을 들어줄까?”차서윤은 송학진을 흘겨보며 말했다.“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요.”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