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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작가: 돛배
“내가 안 낭자와 혼약을 올린 이유는 단지 양가의 체면을 봐서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였소.”

싸늘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지자 양진아는 흠칫 놀랐다.

우선 면사포부터 젖혀야 하지 않나?

물론 상대방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본처로서 누릴 권리는 당연히 주겠지만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오. 나중에 혹시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언제든지 보내주겠소. 시간도 늦었는데 피곤하겠소. 난 밖에서 잘 테니 얼른 쉬시오.”

말을 마치고 나자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수가!

양진아는 임우진이 첫날밤부터 부인을 방치할 줄은 몰랐다. 집안 체면 때문에 안정미와 혼사를 올렸다니?

발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베일을 벗었다. 계집종까지 전부 내보내는 바람에 방 안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문틈을 통해 바깥을 힐끔거리자 인영이 어렴풋이 보였다.

비록 안정미에게 관심은 없지만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신방을 떠나지는 않은 듯싶었다.

덕분에 양진아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혼례복을 벗고 내의만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이불막을 치고 침대를 어지럽힌 다음 가위를 꺼내 손가락을 찔러서 무명 수건에 피를 묻혔다.

마무리하고 나니 밖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고 점점 가까워졌다.

‘벌써 왔나?’

양진아는 급히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빼내고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려 마치 방금 거사를 치른 듯한 모습을 했다.

곧이어 재빨리 이불 속으로 숨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밖에서 누군가 나지막이 물었다.

“우진아, 자느냐?”

다름 아닌 이선화의 목소리였다.

평상에 누워 있던 임우진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자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몸에 걸친 내의와 평상에 널브러진 이불을 번갈아 보았다.

이내 잠시 고민하다가 침구를 정리하고 혼례복을 다시 입었다.

안방을 지나가는 와중에 힐긋 쳐다보니 이불막이 내려와 있었다.

‘벌써 자는 건가?’

임우진이 방문을 열자 그제야 밖에 서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 뒤로 혼례복을 입은 두 남녀를 발견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구를 막아섰다.

“아버지, 어머니, 어쩐 일이십니까?”

방금 침대에서 일어나 혼례복을 대충 걸치고 나온 듯한 아들의 모습을 보자 이선화는 아차 싶어 입을 떼려고 했지만 선수를 빼앗겼다.

“임 나리, 내자가 바뀌었습니다. 나리의 부인은 저예요.”

“황당하기 짝이 없소! 자기 부인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어디 있소?”

임우진은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여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 낭자?”

무려 정식으로 맞이해야 하는 배우자이지 않은가?

그와 혼인을 올린 사람이 안정미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이지?

내자가 바뀌었다라...

여자의 정체가 당최 짐작이 안 갔다.

임우진은 걷잡을 수 없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돌아서 안방으로 걸어갔다.

안정미도 뒤따라 들어섰고, 이선화와 임재성이 시선을 마주치더니 얼른 뒤쫓았다.

곧이어 안방에 도착한 임우진은 이불막을 확 젖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인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더니 곧장 뛰어들었다.

결국 엉겁결에 팔을 뻗어 품에 끌어안게 되면서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이내 뒤따라온 안정미도 해당 장면을 목격하고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였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임우진은 품에 안긴 여자의 팔을 붙잡고 단번에 떼어냈다.

곧이어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임우진의 동공이 문득 커졌다.

“양진아?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러고 나서 흐트러진 옷으로 시선이 향했다.

찢어진 가슴팍 사이로 하얗고 고운 속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눈길을 피했고 양진아를 잽싸게 뒤로 숨겼다.

“옷매무새 정리하고 나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안정미를 바라보았다.

“안 낭자는 밖에서 잠시 기다려주시오.”

안방으로 들어선 안정미는 내부의 화려한 장식에 시선을 빼앗겼다.

은은한 불빛을 내뿜는 촛불과 희귀한 병풍, 그리고 값비싼 서양 융단까지.

모든 게 그녀의 소유가 될뻔했지만 결국 양진아가 앗아갔다는 생각에 살인 충동마저 들었다.

“임 나리, 이게 다 양진아가 꾸민 음모입니다. 일부러 복수하려고 우리의 혼사를 망친 거지요!”

그동안 고심해서 계획을 세운 이유도 오로지 제후 저택에 시집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얼떨결에 남 좋은 노릇만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안정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를 지켜본 양진아는 기분이 한결 통쾌했다.

하지만 아직 발끝에도 못 미쳤다.

전생에 안정미 때문에 얼마나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는데 복수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양진아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옷깃이 벌어지는 순간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다른 남자를 좋아하면서 나한테 바가지를 뒤집어씌우면 어떡해? 어쨌거나 난 이제 임 나리의 여자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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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70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람들은 모두 여느 때보다 정색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지금 그들 앞에 서 있는 양진아는 애초에 호락호락하던 아씨가 아니었다.시집을 가서 진국후 저택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한편 안정미는 여전히 내키지 않아 불만을 토로했다.“지금 우릴 협박해? 우린 다 한 가족이야. 고모도 우리한테 엄청 잘해주시고. 대체 언니는 왜 그렇게 못하는 거야?”양진아가 실소를 터트렸다.“네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닌 양씨 일가에 있어야겠네?”“너...”“됐다!”박정숙은 안정미를 째려보고 다시 양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진아 말이 맞아. 하지만 이제 성균이가 잡혔으니 우리 모두 단합해서 어떻게든 구해내야지. 진아 너도 이번 일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양진아는 시선을 올리고 할머니께 답했다.“저는 단지 새색시일 뿐이니 책임지고 싶어도 그럴만한 능력이 못 돼요. 추월이가 돌아오거든 상세한 정황을 묻는 게 더 나을 겁니다.”다들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추월을 기다려야만 했다.안혜선은 자꾸 양진아만 흘겨봤다. 하루빨리 임우진의 마음을 사로잡고 제후 저택을 손에 넣으라고 쉴 새 없이 딸을 설득하려는 어머니였다.양진아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녀는 심지어 딸에게 손까지 댈 기세였다. 다만 이때 청연, 청하가 바로 가로막았다.안혜선이 분노가 폭발하려 할 때 양진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어머니, 이 두 아이 모두 제후 저택 사람입니다. 제가 저택에서 쫓겨나길 원치 않으신다면 얼른 그 입 좀 다물어요.”안혜선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니 끝내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단지 딸아이가 친정에 보탬이 되길 바랄 뿐 제후 저택에서 쫓겨나는 건 원치 않았다.다만 그녀는 왜 양씨 일가의 상황이 특별하다는 걸 생각지 못했을까? 만약 양씨 일가에서 안혜선이 이렇게 못 미더운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양 태부와 최영옥 모두 애초에 그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두 아이가 어머니를 여의게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69화

    박정숙은 슬픈 척하면서 눈가에 음모와 계략이 잔뜩 드러났다. 이 모습을 본 양진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전에 대체 얼마나 멍청했으면 외할머니가 날 엄청 아껴주신다고 여긴 걸까?’다만 그녀는 전혀 티내지 않고 재빨리 다가가서 박정숙을 부축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외숙모는 왜 울고 계세요? 어머니는 어디 가셨죠?”“진아야, 얼른 나 좀 구해줘.”이때 하진경이 불쑥 양진아에게 덮쳐들었다.“네 서방한테 말해서 외삼촌 좀 구해달란 말이다.”“...”양진아는 아무 말도 안 했다.“그 입 다물지 못할까! 관아가 무슨 진국후 저택에서 여는 줄 알아? 구하고 싶다면 구하게?”박정숙이 냉큼 쏘아붙였다.물론 그녀도 하진경과 똑같은 생각이지만 곧이곧대로 입밖에 내뱉을 순 없었다.“진아야, 방금 한 무리 위병들이 와서 네 삼촌을 잡아갔어. 우진이가 능력이 좋잖아. 어서 우진이더러 네 삼촌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보게 해줄래? 그래야 우리도 대안을 세우지!”양진아는 곧장 대답했다.“예, 할머니, 걱정 마세요. 지금 바로 사람 보낼게요.”“추월아, 혁수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해.”“예, 마님!”추월이 나간 후 양진아는 박정숙을 부축해서 일으켰다.“남혁수는 서방님을 모시는 가장 든든한 사람이에요. 분명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낼 거니까 숙모도 그만 울어요. 이번 일은 제가 꼭 책임지고 알아봐 줄게요.”양진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박정숙은 문득 그런 그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양진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안 변했지만 예전처럼 그리 쉽게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가 실눈을 뜨고 사색에 잠겨있을 때 하인이 달려와서 안정미가 왔다고 전해드렸다.안정미는 아직 아버지가 잡혀간 줄 모른 채 침울한 집안 분위기에 흐느끼는 어머니까지 살펴보더니 다짜고짜 양진아를 질책했다.“언니는 꼭 어머니 생신날까지 이렇게 괴롭혀야겠어? 사람들이 언니를 불효녀라고 삿대질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봐?”“아니면 진국후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68화

    안순자는 허겁지겁 본채로 달려갔다.그 시각 안씨 일가 어르신 박정숙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짙은 보라색 비단의 옷을 입고 같은 색상의 장식용 머리띠를 두른 채 근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로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였다.안순자가 홀로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자 박정숙이 물었다.“왜 혼자 오는 것이야? 진아는?”“그게... 큰 아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박정숙이 탁자를 내리쳤다.“누가 돌려보낸 거야?”“다름이 아니라 아씨께서 정문이 닫혀있다고 그냥 가버리셨습니다. 게다가 함께 온 계집종이 돌아가서 제후 부인께 알리겠다고 했어요. 안씨 일가에서 큰 아씨를 능멸한다고요...”“뭐?”이때 안성균의 부인 하진경이 버럭 화를 냈다.“그냥 돌려보내면 어떡하란 말이냐? 걔가 가면 내 생일은 어쩌라는 거야?”박정숙이 옆에 앉은 안혜선을 보더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너는 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 이 꼴이니? 이제 하다 하다 내 앞에서까지 으름장을 놓으려고 해?”“정미 혼수를 거둬간 걸 네가 다시 돌려받았다니 뭐라 더 따지지 않았는데 오늘 또 보거라. 외숙모 생신연에 참석하라는 것도 이렇게 연신 거절하고 있잖느냐.”“네 눈엔 이 어미가 있긴 해? 우리 안씨 일가가 있긴 하냔 말이다!”안혜선이 황급히 대답했다.“어머니, 지금 당장 가서 이년을 따끔하게 혼내고 이리로 데려와서 사과하게 하겠습니다!”그제야 박정숙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계집종 두 명을 진아한테 보내거라. 그리고 양씨 일가에서 따라온 그 계집종들은 싹 다 돌려보내.”“오늘 그 계집종들이 이간질해서 이 사달이 난 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원!”“예, 어머니.”다만 안혜선이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 지킴이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큰일 났어요! 관아에서 나리를 잡아갔습니다!”“뭐라고?”안혜선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누굴 잡아가?”“나리요! 나리께서 금방 잡혀갔습니다.”문 지킴이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위병들이 다짜고짜 대문을 부수고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67화

    임우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대체 이건 무슨 말이야? 누가 진아 앞에서 뭐라고 말한 게야?”요 이틀 관아에 일이 바빠서 거의 매일 심야에 돌아오는 임우진은 양진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줄곧 서실에서 지냈다.그러나 지난번 호되게 겁을 준 이후로 아무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하지 못한다.설마 누가 또 그가 서실에서 쉬는 걸 보고 양진아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꼼수를 부린 걸까?임우진이 오해하자 남혁수는 재빨리 해명했다.“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마님께서...”그는 양진아가 어떻게 안성균을 처리할지에 대해 낱낱이 전해드렸다.“마님의 이 방법은 저로서도 생각해낼 만한데 나중에 안성균이 알게 된다면...”“그야말로 야비한... 아니, 현명한 수단입니다!”임우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남혁수는 얼른 태세를 바꿨다.임우진은 그를 힐긋 째려봤다.“얼른 가서 임 청지기더러 진아한테 무녀를 두 명 붙여두라고 하거라.”남혁수는 실로 어이없을 따름이었다.‘나리, 마님께서 언젠가 똑같은 수법을 나리께 쓸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무예를 습득한 노비는 다소 구하기 어려웠다. 제후 저택이라 할지언정 무녀를 구하느라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임태원은 3일도 채 안 돼서 양진아에게 무녀를 보내드렸다.양진아는 마침 안씨 일가로 가려던 참인데 청지기가 보내온 두 명의 무녀를 보더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맙구나.”안 그래도 어멈을 몇 명 데리고 갈까 고민하던 참인데 마침 무녀를 보내왔으니 너무 다행이었다. 양진아의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외할머니까지 다들 막무가내인 사람들이고 큰외숙모는 덩치 큰 체구에 인성이 나쁘기로 소문났다.전에 계집종을 데리고 갔을 때 감히 찍소리도 못 냈는데 이번엔 무녀라서 한시름을 놓았다.임태원이 그녀에게 답했다.“나리께서 친히 분부하신 일입니다. 마님이 걱정되어 무녀를 보내드린 겁니다. 마음에 안 든다면 제가 또 가서 물색해볼게요.”‘임우진이었어?’‘요즘 쭉 바쁜 것 같던데 보양식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66화

    임우진은 다음날 바로 남혁수를 양진아에게 보냈다.양진아는 앞쪽 별채에서 남혁수를 만난 후 바로 그에게 안씨 일가를 조사하라고 분부했다.“우리 외삼촌 안성균은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다. 너는 가서 그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법도를 어긴 일이 있는지 조사해 보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인증, 좌증 전부 조사해내야 할 것이야.”남혁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양진아가 눈썹을 치켰다.“무슨 문제라도 있느냐?”“아닙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그는 놀란 마음을 달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반드시 이른 시일 내로 조사를 마치겠습니다.”양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보냈다.남혁수는 임우진의 지시를 받은 터라 아주 열심히 나섰다. 양진아가 임우진의 마음속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3일도 채 안 될 사이에 그는 안씨 일가에 관한 모든 일을 낱낱이 조사하여 양진아에게 보고했다.양진아가 문서를 꼼꼼하게 훑어보았고 남혁수가 옆에서 설명을 이어갔다.“마님, 안성균의 만행은 전부 여기에 적혀있습니다. 대부분 나쁜 성분의 물건을 좋은 물건으로 눈속임해서 거래했고 본인이 직접 도맡은 처사를 두 번씩이나 사고를 냈습니다. 상관은 그자가 양씨 일가에서 추천한 사람이라고 최대한 체면을 봐준 것 같습니다.”“그자의 동료들도 찾아가 보았는데 다들 그자와 함께 일하길 꺼렸지만 안씨 일가의 체면을 보고 참아온 것 같더라고요.”그는 말하다가 불현듯 양진아가 안씨 일가를 언급할 때 표정이 떠올라 한마디 덧붙였다.“사실 이것들은 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단속만 잘한다면 큰 사고는 면할 테지요.”이에 양진아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안성균의 성격에 큰 사고를 빚을 일이 없다는 말이냐?”남혁수는 목을 움츠리고 감히 말을 내뱉지 못했다.“사람 한 명 보내서 안성균의 만행을 적발하고 체포한 뒤 내 소식을 기다리거라. 잘 들어! 이번 일은 제후 저택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임우진이 처가에 손을 댄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65화

    “들라 하라!”임우진은 곧장 한마디 더 보탰다.“앞으론 마님의 부탁이라면 제때 나에게 알려야 한다.”“예, 나리!”하선은 밖에서 반나절이나 기다렸다. 임우진이 양진아 때문에 화나서 일부러 그녀를 밖에 세워둔 줄 알았는데 모사 두 분이 서실에서 걸어 나왔다.‘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서실 안에서 임우진은 하선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더냐?”하선은 분명 마님께 남혁수를 빌려오라는 분부를 받았지만 이토록 중요한 일은 반드시 나리께서 직접 마님을 찾아가 상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나리.”“무슨 일로?”임우진이 눈썹을 치켰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알겠다. 지금 바로 간다고 전하거라.”하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물러났다.한편 임우진은 마음이 살짝 복잡해졌다.‘설마 내가 화난 걸 알고 달래주려는 거야?’‘이번엔 절대 쉽게 용서치 않아!’그는 양진아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정성껏 일정을 짜놓았지만 결국 고정수의 소식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마음이 한없이 식어갈 따름이었다.임우진은 격하게 갈등하다가 마침내 뒤쪽 별채로 갔다.그 시각 양진아는 하선의 말을 듣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 임우진이 설마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 이러는 걸까?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임우진은 이렇게까지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고정수를 조사해보라고 해도 거절, 남혁수를 빌려서 안씨 일가를 조사해보려고 해도 거절하는 게 과연 무슨 경우란 말인가?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 앞에 있던 계집종이 청아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올렸다. 양진아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임우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걸상에 앉았다.“그래, 무슨 일로 부른 것이냐?”양진아는 잠시 침묵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인지 몰라서 마지못해 질문을 건넸다.“서방님, 남 호위를 잠시 제게 빌려줄 수 있나요?”임우진의 안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64화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서 발생한 일을 전혀 모른 채 안씨 일가에서 보낸 청첩장을 받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이때 경혜가 옆에서 살갑게 말했다.“이건 청지기가 보내온 거라 큰 마님은 몰라요.”“모르시길 다행이지.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잖아!”양진아는 화나서 청첩장을 내팽개쳤다.“제 주제를 알아야지, 어딜 감히 나더러 같잖은 관원 부인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하는 것이야? 뻔뻔스러운 것!”청찹장에는 양진아더러 외숙모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초대하는 내용이었다.청지기가 중도에 가로채길 다행이지 본채까지 넘어갔더라면 그녀는 시어머니께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 이제 슬슬 주제 넘치게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른다고 여길 수도 있다.“노여움 푸세요, 마님. 그럼 이 초대에는 응하시겠습니까?”“가야지! 아주 푸짐한 선물도 해드릴 거야!”양진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그녀가 안씨 일가를 한방에 기선제압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아마 안혜선을 쥐락펴락하듯 그녀도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거로 여길지 모른다.문제를 해결하려면 한방에 급소를 찔러야 한다. 안씨 일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자가 바로 3대 독자 안현조이지만 실세는 양진아의 큰외삼촌 안성균이다.안성균은 현재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어서 벌어들인 은냥으론 겨우 생계유지를 하는 처지였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그래서 안씨 일가는 양씨 일가의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있다.하지만 욕망이란 골짜기는 메우기가 어려운 법이고 안성균 그 인간은 술과 여자, 도박 어느 하나 손을 대지 않은 게 없다. 양진아가 전생에 들었다시피 안성균이 벌어들인 돈은 죄다 더러운 돈이라고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하선을 불러왔다.“서방님이 돌아왔는지 가보거라. 만약 돌아왔으면 내가 혁수를 잠시 빌리고 싶다고 전하거라.”하선이 분부대로 나가서 알아보았더니 제후 나리가 이미 돌아온 상태였다.나리께서 서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마당으로 향했다.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63화

    “제가 생각이 짧아서 서방님을 난처하게 했군요.”양진아가 먼저 사과했다.그녀가 조바심 때문에, 전생의 일들이 떠올라서 추태를 부리고 말았다.이번 생은 임우진과 혼인했으니 전생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양씨 일가와 안씨 일가를 완전히 떼어놓을 거야!’안정미와 고정수가 아무리 그녀를 해치고 그녀의 집안까지 해치려 해도 전생처럼 쉽게 해낼 수는 없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저택까지 돌아갔다. 저택에 도착한 후 임우진은 곧게 서원으로 향했다.양진아는 그제야 알아챘다. 이 남자가 삐졌다는 것을 말이다.‘내가 뭘 잘못했지? 고정수 한번 조사해달라고 한 게 전부인데? 나도 다 저택과 친정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 대체 내가 무슨 사심을 부렸다고 이러는 거야?’양진아는 어리둥절한 채 하선에게 질문을 건넸다.“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게야?”하선과 추월은 양진아의 시중을 드는 요 며칠 동안 애초의 조심스러웠던 태도서부터 이제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님의 성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마님은 제후 나리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깊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서방님보다 시어머니를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마님은 제후 나리와 서로 공경하는 부부로 지내고 싶어 하지만 제후 나리가 얼마나 거만한 사람인가?수많은 부잣집 따님들의 연모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마님과의 혼약을 지키고 단 한 번도 파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 제후 나리의 마음도 몰라주고 마님께서 무심한 태도로 임하고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게 고 귀공을 언급하고 있으니 기분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었다.다만 이런 것들은 계집종인 그녀가 말할 자격이 없다.하선은 고개를 푹 떨구고 공손하게 말했다.“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본채로 가시겠습니까, 마님?”양진아는 머리를 끄덕이고 이 일을 뒤로 한 채 본채로 향했다.그 시각 안정미는 백미가 문 앞에서 계집종과 함께 겨우 마차를 한 대 불러왔다.그녀는 고씨 저택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양씨 일가로 향했다.서쪽

  • 나리, 마님을 탐하지 마십시오   제62화

    “왜 그렇게 웃는 것이야?”양진아는 고개를 내젓고 임우진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한편 두 여자를 따라 나온 안정미는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정나현은 마차를 타고 떠나갔고 양진아도 딱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안정미는 결국 백미가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안달이 났던지 그녀가 대뜸 양진아를 향해 소리 질렀다.“언니, 잠깐만! 나 좀 실어줘!”다만 양진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안정미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언니...”“안 낭자가 기억력이 안 좋다면 내가 대신 안씨 저택에서 했던 말을 되새겨줄 수도 있소.”임우진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는 여자를 안 때린다고 한 적이 없거늘.”순간 안정미는 사색이 되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진국후 저택의 마차가 멀어져가는 걸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마차 안에서 임우진은 기분이 언짢은 양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혹 저자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냐?”이에 양진아가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요. 저는 단지 나현 군주가 왜 정미랑 가깝게 지내는지가 의문입니다.”정빈 대군은 황제와 이복형제 사이이고 둘은 어려서부터 태후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온지라 유독 돈독한 정을 쌓고 있다.정빈 대군은 황제의 왕위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당연히 황제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초월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하지만 안씨 일가와 정빈 대군 저택의 문벌은 천지 차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양진아가 몹시 의아한 것이다.전생에도 안정미와 나현 군주가 이토록 가깝게 지냈을까?아쉽게도 전생에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 갇혀서 외부 소식을 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하여 환생했지만 딱히 유용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여태껏 몰랐느냐? 고정수는 정빈 대군의 길을 걷고 있어. 지금 호부 금부사에서 사관 직을 맡고 있지.”임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고정수는 나름 유능한 인재이고 정빈 대군 또한 예의 바르고 고결한 성품을 지녀서 고정수를 중히 여기고 있단다. 그러니 나현 군주가 안정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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