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후 저택의 작은 마님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자신 있어? 임 나리의 이름을 내세워 겁이나 주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니!”꿈쩍도 안 하는 양진아를 보며 안정미는 눈에서 불을 뿜을 기세였다.그리고 안순자 뒤로 몸을 숨기더니 큰소리를 쳤다.“하여간 혼수는 내가 가져갈 거야. 만약 거절한다면 고모께 일러바칠 줄 알아.”말을 마치고 나서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상대방이 타협하기를 기다렸다.어려서부터 시비가 붙을 때마다 고모라는 이름만 언급해도 양진아는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더욱이 안순자도 있는 와중에 계속해서 고집을 부린다면 혼날 게 뻔했다.“내 처지에 관하여 고정수의 부인으로서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양진아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설령 어머니께서 계신다 한들 확인되지 않는 이상 손조차 댈 생각하지 마.”곧이어 마당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고, 혼수 꾸러미가 줄줄이 등장하더니 금세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입구마저 가릴 정도였다.제후 저택의 청지기 임태원이 손에 혼수 목록을 들고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했다.“안 낭자가 마련한 혼수를 전부 옮겼습니다. 이건 혼수 목록입니다.”이내 양진아에게 건네주며 한마디 보탰다.“작은 마님의 혼수는 나리께서 시종을 시켜 전부 실어 왔습니다. 일단 창고에 보관했으니 시간이 날 때 한 번 살펴보십시오.”제후 저택의 청지기마저 마음대로 부려 먹고, 혼수를 가지러 임우진이 직접 사람을 보냈다니?제후 일가에서 양진아가 지위 없다는 소리는 아무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안정미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두 눈에 질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어젯밤 임우진이 보낸 사람이 고씨 가문에 찾아와 양진아의 계집종들을 데려간 순간을 떠올리자 증오는 점점 극에 달했다.만약 꽃가마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게 자신의 소유였을 텐데!‘양진아, 두고 봐!’시샘에 눈이 먼 그녀는 예전과 사뭇 달라진 양진아의 의연한 모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임 청지기가 처리한 일인데 어찌 문제가 있겠느냐? 혼수
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붉은 비단옷을 입고 걸어 들어오는 임우진을 발견했다.반듯한 몸매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 얼음장처럼 차갑던 눈빛은 양진아를 향하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는 곧장 걸어와 양진아의 옆에 멈춰 섰다.양진아는 의아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어젯밤 혼례를 치르고 머릿속은 온통 제후 저택에 남아 있을 궁리로 가득 찼기에 임우진을 찬찬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전생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는 신혼 둘째 날에 북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러 갔다.황제가 백관을 대동하여 직접 배웅을 나왔고, 경양의 백성은 이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앞다투어 성 밖으로 몰려들었다.그녀도 안정미와 함께 군중 속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당시 임우진은 갑옷을 걸치고 거만한 눈빛으로 뭇사람을 내려다보았고, 마치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하지만 쌀쌀맞은 분위기와 달리 이토록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일 줄은 몰랐다.감탄 어린 그녀의 표정에 임우진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혼수를 확인한다더니 얼른 시작하지 않고 뭐 해?”그제야 넋을 잃은 사실을 깨닫고 양진아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더니 공손하게 말했다.“임 나리!”예상외의 호칭에 임우진의 표정이 굳어졌고,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방금 뭐라고 했어?”아침까지만 해도 ‘서방님’이라고 부르고 갑자기 안면 불고하는 건 무슨 상황이지?기껏 도와주려고 급히 달려왔더니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갑자기 안색이 돌변하는 남자를 보자 양진아는 잽싸게 말을 바꾸었다.“서방님.”임우진은 시선을 돌리고 임태원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저택에서 작은 마님의 말이 곧 내 지시임을 모두에게 알리도록 하여라. 만약 명을 어기고 반항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에 따라 엄벌을 내릴 것이야.”“네! 알겠습니다.”이를 목격한 안정미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질투심에 휩싸여 이성마저 잃을 것 같았다.또한, 임우진이 나타나자 금세 태세 전환하는 임태원 때문에 더욱 화가
경혜는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벼루를 들고 있었다. 반들반들하고 윤기 나는 표면과 독특한 몸체, 가장자리는 돌출되었고 먹그릇과 가운데 부분은 광택이 감돌았다.비록 오랜 세월이 흐르고 두 번의 생을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서실에 있던 벼루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유물을 다시 보게 되는 순간 양진아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내 건네받아 자세히 살펴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테두리에서 자그마한 흠집을 발견했다.이는 그녀가 어렸을 때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리며 생긴 자국이었다.아버지는 학자 집안 출신답지 않게 독서와 서예보다는 무술을 연마하는 데 푹 빠졌다. 어린 나이에 군영에 들어가 황태자와 인연을 맺았고 싸우며 정이 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형제처럼 돈독하게 지냈다.그 이후로 전장에 나갔고, 황태자는 즉위하게 되었다.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르면서도 황제와 종종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아버지의 필체가 보기 흉하다는 이유로 서예에 필요한 도구를 하사하여 글쓰기를 연습하게 했다.이 벼루는 바로 황제께서 하사하신 것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줄곧 서실에 방치해두고 있었다.아버지의 서실은 그녀가 직접 계집종을 데리고 청소했기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다들 눈에 선했다.어머니는 대체 무슨 배짱으로 아버지 유물까지 안정미의 혼수 목록에 포함한 거지?양진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안정미! 지금도 전부 네 혼수품이라고 할 수 있겠어?”안정미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끝까지 잡아뗐다.“고모께서 준비해주셨다고 얘기했잖아.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내가 어찌 알겠어? 게다가 나한테 선물한 물건인데 유물이라는 것부터 입증해 봐.”“외사촌 아씨, 이 벼루는 혼수 목록에 없는 물건입니다.”경혜가 씩씩거리며 말했다.“그리고 상자 안의 물건은 목록과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전부 양씨 가문의 물건입니다.”“헛소리하지 말거라. 전부 내 것이란다!”안정미는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이때, 안순자가 양진아의 곁으로 다가갔다.“큰 아씨, 아마도 하인이 짐을 싸면서 실수로 넣었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런데도 차분하고 너그러운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마치 어젯밤처럼.임우진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속셈 또한 뻔했으며 제후 저택의 권세를 빌리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자 못마땅한 느낌이 들었다.“아까도 말했지만 부인의 말이 곧 내 지시이니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임우진의 소맷자락이 펄럭였고, 곧이어 싸늘한 목소리가 양진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두 번째네.”두 번째라니?하지만 그는 해명할 생각이 없는 듯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양진아는 마당을 가득 채운 혼수를 바라보며 아리송한 말은 일단 제쳐두고 임태원에게 명령했다.“사람을 불러 물건들을 지키게 하여라. 아버님 어머님께 아뢰고 할아버지까지 뵙고 나서 규정을 만들어 어떻게 할지 정하도록 하겠다.”“알겠습니다!”임태원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우르르 마당에 몰려들었다.무시무시한 기세에 양진아는 넋을 잃었고, 안정미와 안순자도 절망에 빠졌다.양진아를 바라보는 두 여자는 분노와 울분이 차올랐지만 감히 찍소리도 못했다.“그리고 여동생과 할멈이 돌아가서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동행할 자가 필요할 것 같구나. 오늘에 있었던 일에 대해 확실히 설명하고 제후 저택이 누명을 뒤집어쓰는 일이 없게 하여라.”임태원이 서둘러 대답했다.“작은 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직접 두 분을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그렇다면 다행이구나.”양진아는 입꼬리를 올리고 씩씩거리며 떠나가는 안정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역시 운명은 돌고 도는 법이다.이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드디어 전생의 팔자를 고쳤고, 힘들었던 나날을 더는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고 남은 인생은 아직 길었다.경혜는 눈물을 흘리는 양진아를 보자 걱정스럽게 물었다.“아씨, 혹시 첫째 마님께서 원망하실까 봐 그러는 겁니까?”양진아는 어리둥
이내 본채로 돌아와 보니 이선화만 홀로 있었다.“어머님, 며느리 왔습니다.”양진아는 조신하게 걸어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물론 속으로는 조마조마했다.마당에서 안정미와 실랑이를 벌인 것도 모자라 제후 저택까지 끌어들였으니 무슨 벌을 내릴지 알 수 없었다.“밑반찬이 맛있더구나.”하지만 예상외로 이선화는 마당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감사합니다. 만약 입맛에 맞으시면 나중에 다시 만들어드리겠습니다.”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자 양진아는 서둘러 계집종의 손에서 찻주전자를 받아 들고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고 나서 깨끗한 손수건도 건네주었다.이선화의 눈썹이 까딱했다. 이내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 돌려준 다음 느긋하게 말했다.“우리는 그렇게 꽉 막힌 집안이 아니란다. 우진의 부인으로서 부군을 잘 모시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겠느냐? 제후 저택의 며느리는 요리나 바느질에 소질이 없을지언정 현명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그리고 곁눈질로 생각에 잠긴 양진아를 힐긋 쳐다보더니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하오나 이미 시집온 이상 제후 저택의 일원으로서 얼굴에 먹칠하는 짓은 하지 말거라. 물론 우리도 너를 망신시키는 일은 안 할 것이다.”이선화는 결코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외모는 고상하고 기품이 흘러넘쳤고, 비록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오히려 더 위엄이 있어 보였다.양진아를 훈계하는 동안 방안의 계집종들은 감히 찍소리도 못 냈다.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았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충고하는 건지 아니면 트집을 잡은 건지 어찌 모르겠는가?“말씀 감사합니다. 반드시 명심하여 제후 저택에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이선화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양진아가 이렇게 고분고분할 줄은 몰랐고, 쓴소리를 더 하려고 했으나 순순히 꼬리를 내린 모습을 보니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결국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다. 내 시중은 들 필요 없으니 방으로 돌아가거라. 우진이가 집에 있는 이상 부군부
마당으로 돌아온 양진아는 임우진이 서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민 끝에 직접 차를 끓여 서실로 향했다.임우진의 호위무사 남혁수가 문밖을 지키다가 양진아를 보자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마님, 오셨습니까? 나리께서 독서 중이십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말을 마치고 나서 고분고분 문을 열어주고 안으로 모셨다.양진아는 눈을 깜빡였다. 서실처럼 중요한 장소에 보고도 없이 함부로 드나들어도 되는 건가?하지만 남혁수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바라보자 물어보기도 애매해서 경혜의 손에 든 다과를 받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옆에 서 있는 경혜는 바보처럼 헤실거리는 호위무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아씨는 나리께 다과를 드리러 가는 건데 왜 본인이 더 신났죠?”“당연하지. 나리께서 나보다 더 기뻐하실지도 몰라.”남혁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경혜는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네?”“그러니까...”말을 이어가다가 뒤늦게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정색했다.“어차피 말해줘도 넌 몰라. 나리와 마님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서 그랬어.”“그쪽만 좋으면 됐지요, 뭐.”경혜는 몰래 눈을 흘겼다. 단지 나리를 지키는 호위무사가 이렇게 듬직하지 못해서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변덕이 이리 심해서야, 원.남혁수는 묵묵부답하는 경혜를 힐긋 쳐다보더니 어깨를 콕콕 찔렀다.“네가 모시는 분이 이미 시집을 갔으니 마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단다. 계속해서 아씨라 불렀다가 나중에 할멈의 귀에 흘러 들어가면 혼날지도 몰라.”그러고 나서 의혹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에 목소리를 낮추었다.“제후 부인의 시중을 들어주는 할멈은 규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야.”“충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꼭 명심하겠습니다.”경혜가 활짝 웃자 남혁수는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양진아는 다과를 들고 서실에 들어섰다.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을 지나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긴 다리를 착생 위에 걸치고 앉은 임우진을 발견했다.
“마님, 혹시 나리와 싸우셨습니까?”경혜는 양진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양진아가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 임우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젯밤 안정미로 착각하고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상대방이 마음에 없는 게 분명했다.하지만 그녀를 대하는 태도도 피차일반이라 아마도 양씨 가문의 적녀와 혼인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전생에 임우진은 신혼 둘째 날에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북강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선화는 근심과 걱정에 시달려 집안일까지 미처 돌보지 못했다. 결국 안정미가 제후 저택의 대소사를 맡게 되면서 나중에는 제후 부부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이번 생에는 부인이 바뀐 탓인지 아직 전장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북강이 분쟁 지역인 만큼 언제든지 출정할 가능성이 있다.현재로서 그가 집을 떠나기 전에 합방하여 아이라도 가지면 더할 나위 없었다.그래야만 제후 저택에서 굳건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양진아는 불쾌한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경혜에게 말했다.“부엌 식모들에게 저녁으로 보양식을 준비하라 하여라. 그리고 남혁수를 찾아가 함께 식사하도록 나리를 모셔 오라고 전하거라.”서실.남혁수는 다시 돌아온 경혜가 전해준 말을 듣고 나서 즉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주인에게 보고하러 갔다.“제 말 맞지요? 마님은 역시 나리 생각뿐이었습니다.”그제야 임우진의 안색이 한결 누그러졌다. 잠시 후 본채로 돌아가 식사하면서 양진아에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양진아는 연빨강 비단 내의를 입고 겉에 허리를 강조하는 빨간색 평상복을 걸친 다음 화장까지 연하게 했다.마치 갓 피어난 연꽃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웠으며 풋풋하고 요염한 매력을 겸비했다.“마님, 너무 예쁘십니다.”두 계집종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양진아를 모셔 오면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진작에 꾸미고 다니지 그러셨어요.”시온은
임우진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컴컴해졌다.머나먼 하늘을 물든 노을이 어느새 구름에 가려졌고 밤이 찾아오면서 마당에 등불이 하나둘씩 커졌다.창문에는 여전히 장식품으로 가득했고, 고개를 숙여 몸에 걸친 빨간색 의복을 내려다보자 문득 꿈처럼 느껴졌다.정말 양진아와 결혼한 게 맞나?방에 들어서서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여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제야 비현실적인 느낌이 서서히 사라졌다.불빛을 받아 한층 요염해진 모습이 기억 속 밝고 당당했던 형상과 겹치면서 임우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올랐다.“큼!”이내 목을 가다듬고 발걸음을 옮겼다.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인기척을 따라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양진아의 시선을 느낀 임우진은 긴장한 나머지 다리가 휘청거렸다.이를 본 몇몇 계집종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추월은 걱정을 제외하고도 한심한 기색이 역력했다.밥상 앞으로 다가간 임우진은 왠지 모를 침체된 분위기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마침 물어보려고 입을 떼려던 찰나 양진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다들 이만 물러가거라.”계집종들이 줄지어 자리를 떠났다.“서방님, 부엌에 요리를 준비해서 가져오라고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임우진이 먹을 음식인 만큼 부엌에서도 신경을 쓰기 마련이기에 당연히 그의 입맛을 고려해서 만들었을 것이다.살뜰하게 챙겨주는 그녀를 보자 임우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상을 차리는 양진아를 제지하며 국물을 한 그릇 떠서 건네주었다.“가만히 있...”고개를 돌리는 순간 밥상 위에 차려진 나머지 요리를 확인하자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전복죽과 민어전, 부추무침까지 차례로 훑어보고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양진아도 당황스러웠으나 어차피 다시 태어난 김에 아이를 갖기 위해서라도 뻔뻔스럽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결국 못마땅한 표정을 애써 외면했다. 남자는 체면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절대로 본인의 약점을 인정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녀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람들은 모두 여느 때보다 정색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지금 그들 앞에 서 있는 양진아는 애초에 호락호락하던 아씨가 아니었다.시집을 가서 진국후 저택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한편 안정미는 여전히 내키지 않아 불만을 토로했다.“지금 우릴 협박해? 우린 다 한 가족이야. 고모도 우리한테 엄청 잘해주시고. 대체 언니는 왜 그렇게 못하는 거야?”양진아가 실소를 터트렸다.“네 말대로라면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닌 양씨 일가에 있어야겠네?”“너...”“됐다!”박정숙은 안정미를 째려보고 다시 양진아에게 시선을 옮겼다.“진아 말이 맞아. 하지만 이제 성균이가 잡혔으니 우리 모두 단합해서 어떻게든 구해내야지. 진아 너도 이번 일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양진아는 시선을 올리고 할머니께 답했다.“저는 단지 새색시일 뿐이니 책임지고 싶어도 그럴만한 능력이 못 돼요. 추월이가 돌아오거든 상세한 정황을 묻는 게 더 나을 겁니다.”다들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추월을 기다려야만 했다.안혜선은 자꾸 양진아만 흘겨봤다. 하루빨리 임우진의 마음을 사로잡고 제후 저택을 손에 넣으라고 쉴 새 없이 딸을 설득하려는 어머니였다.양진아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그녀는 심지어 딸에게 손까지 댈 기세였다. 다만 이때 청연, 청하가 바로 가로막았다.안혜선이 분노가 폭발하려 할 때 양진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어머니, 이 두 아이 모두 제후 저택 사람입니다. 제가 저택에서 쫓겨나길 원치 않으신다면 얼른 그 입 좀 다물어요.”안혜선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니 끝내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단지 딸아이가 친정에 보탬이 되길 바랄 뿐 제후 저택에서 쫓겨나는 건 원치 않았다.다만 그녀는 왜 양씨 일가의 상황이 특별하다는 걸 생각지 못했을까? 만약 양씨 일가에서 안혜선이 이렇게 못 미더운 사람이란 걸 알았다면 양 태부와 최영옥 모두 애초에 그녀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두 아이가 어머니를 여의게
박정숙은 슬픈 척하면서 눈가에 음모와 계략이 잔뜩 드러났다. 이 모습을 본 양진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전에 대체 얼마나 멍청했으면 외할머니가 날 엄청 아껴주신다고 여긴 걸까?’다만 그녀는 전혀 티내지 않고 재빨리 다가가서 박정숙을 부축했다.“할머니, 괜찮으세요? 외숙모는 왜 울고 계세요? 어머니는 어디 가셨죠?”“진아야, 얼른 나 좀 구해줘.”이때 하진경이 불쑥 양진아에게 덮쳐들었다.“네 서방한테 말해서 외삼촌 좀 구해달란 말이다.”“...”양진아는 아무 말도 안 했다.“그 입 다물지 못할까! 관아가 무슨 진국후 저택에서 여는 줄 알아? 구하고 싶다면 구하게?”박정숙이 냉큼 쏘아붙였다.물론 그녀도 하진경과 똑같은 생각이지만 곧이곧대로 입밖에 내뱉을 순 없었다.“진아야, 방금 한 무리 위병들이 와서 네 삼촌을 잡아갔어. 우진이가 능력이 좋잖아. 어서 우진이더러 네 삼촌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보게 해줄래? 그래야 우리도 대안을 세우지!”양진아는 곧장 대답했다.“예, 할머니, 걱정 마세요. 지금 바로 사람 보낼게요.”“추월아, 혁수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해.”“예, 마님!”추월이 나간 후 양진아는 박정숙을 부축해서 일으켰다.“남혁수는 서방님을 모시는 가장 든든한 사람이에요. 분명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낼 거니까 숙모도 그만 울어요. 이번 일은 제가 꼭 책임지고 알아봐 줄게요.”양진아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박정숙은 문득 그런 그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양진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안 변했지만 예전처럼 그리 쉽게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녀가 실눈을 뜨고 사색에 잠겨있을 때 하인이 달려와서 안정미가 왔다고 전해드렸다.안정미는 아직 아버지가 잡혀간 줄 모른 채 침울한 집안 분위기에 흐느끼는 어머니까지 살펴보더니 다짜고짜 양진아를 질책했다.“언니는 꼭 어머니 생신날까지 이렇게 괴롭혀야겠어? 사람들이 언니를 불효녀라고 삿대질할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 봐?”“아니면 진국후
안순자는 허겁지겁 본채로 달려갔다.그 시각 안씨 일가 어르신 박정숙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는데 짙은 보라색 비단의 옷을 입고 같은 색상의 장식용 머리띠를 두른 채 근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로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였다.안순자가 홀로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오자 박정숙이 물었다.“왜 혼자 오는 것이야? 진아는?”“그게... 큰 아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박정숙이 탁자를 내리쳤다.“누가 돌려보낸 거야?”“다름이 아니라 아씨께서 정문이 닫혀있다고 그냥 가버리셨습니다. 게다가 함께 온 계집종이 돌아가서 제후 부인께 알리겠다고 했어요. 안씨 일가에서 큰 아씨를 능멸한다고요...”“뭐?”이때 안성균의 부인 하진경이 버럭 화를 냈다.“그냥 돌려보내면 어떡하란 말이냐? 걔가 가면 내 생일은 어쩌라는 거야?”박정숙이 옆에 앉은 안혜선을 보더니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너는 대체 딸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 이 꼴이니? 이제 하다 하다 내 앞에서까지 으름장을 놓으려고 해?”“정미 혼수를 거둬간 걸 네가 다시 돌려받았다니 뭐라 더 따지지 않았는데 오늘 또 보거라. 외숙모 생신연에 참석하라는 것도 이렇게 연신 거절하고 있잖느냐.”“네 눈엔 이 어미가 있긴 해? 우리 안씨 일가가 있긴 하냔 말이다!”안혜선이 황급히 대답했다.“어머니, 지금 당장 가서 이년을 따끔하게 혼내고 이리로 데려와서 사과하게 하겠습니다!”그제야 박정숙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계집종 두 명을 진아한테 보내거라. 그리고 양씨 일가에서 따라온 그 계집종들은 싹 다 돌려보내.”“오늘 그 계집종들이 이간질해서 이 사달이 난 거잖아. 어이가 없어서 원!”“예, 어머니.”다만 안혜선이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문 지킴이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큰일 났어요! 관아에서 나리를 잡아갔습니다!”“뭐라고?”안혜선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누굴 잡아가?”“나리요! 나리께서 금방 잡혀갔습니다.”문 지킴이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위병들이 다짜고짜 대문을 부수고
임우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대체 이건 무슨 말이야? 누가 진아 앞에서 뭐라고 말한 게야?”요 이틀 관아에 일이 바빠서 거의 매일 심야에 돌아오는 임우진은 양진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줄곧 서실에서 지냈다.그러나 지난번 호되게 겁을 준 이후로 아무도 감히 그에게 가까이하지 못한다.설마 누가 또 그가 서실에서 쉬는 걸 보고 양진아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꼼수를 부린 걸까?임우진이 오해하자 남혁수는 재빨리 해명했다.“아니요, 다름이 아니라 마님께서...”그는 양진아가 어떻게 안성균을 처리할지에 대해 낱낱이 전해드렸다.“마님의 이 방법은 저로서도 생각해낼 만한데 나중에 안성균이 알게 된다면...”“그야말로 야비한... 아니, 현명한 수단입니다!”임우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남혁수는 얼른 태세를 바꿨다.임우진은 그를 힐긋 째려봤다.“얼른 가서 임 청지기더러 진아한테 무녀를 두 명 붙여두라고 하거라.”남혁수는 실로 어이없을 따름이었다.‘나리, 마님께서 언젠가 똑같은 수법을 나리께 쓸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무예를 습득한 노비는 다소 구하기 어려웠다. 제후 저택이라 할지언정 무녀를 구하느라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임태원은 3일도 채 안 돼서 양진아에게 무녀를 보내드렸다.양진아는 마침 안씨 일가로 가려던 참인데 청지기가 보내온 두 명의 무녀를 보더니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맙구나.”안 그래도 어멈을 몇 명 데리고 갈까 고민하던 참인데 마침 무녀를 보내왔으니 너무 다행이었다. 양진아의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외할머니까지 다들 막무가내인 사람들이고 큰외숙모는 덩치 큰 체구에 인성이 나쁘기로 소문났다.전에 계집종을 데리고 갔을 때 감히 찍소리도 못 냈는데 이번엔 무녀라서 한시름을 놓았다.임태원이 그녀에게 답했다.“나리께서 친히 분부하신 일입니다. 마님이 걱정되어 무녀를 보내드린 겁니다. 마음에 안 든다면 제가 또 가서 물색해볼게요.”‘임우진이었어?’‘요즘 쭉 바쁜 것 같던데 보양식이라도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임우진은 다음날 바로 남혁수를 양진아에게 보냈다.양진아는 앞쪽 별채에서 남혁수를 만난 후 바로 그에게 안씨 일가를 조사하라고 분부했다.“우리 외삼촌 안성균은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다. 너는 가서 그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법도를 어긴 일이 있는지 조사해 보거라. 하나도 빠짐없이 인증, 좌증 전부 조사해내야 할 것이야.”남혁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때 양진아가 눈썹을 치켰다.“무슨 문제라도 있느냐?”“아닙니다! 분부 받들겠습니다.”그는 놀란 마음을 달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반드시 이른 시일 내로 조사를 마치겠습니다.”양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보냈다.남혁수는 임우진의 지시를 받은 터라 아주 열심히 나섰다. 양진아가 임우진의 마음속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3일도 채 안 될 사이에 그는 안씨 일가에 관한 모든 일을 낱낱이 조사하여 양진아에게 보고했다.양진아가 문서를 꼼꼼하게 훑어보았고 남혁수가 옆에서 설명을 이어갔다.“마님, 안성균의 만행은 전부 여기에 적혀있습니다. 대부분 나쁜 성분의 물건을 좋은 물건으로 눈속임해서 거래했고 본인이 직접 도맡은 처사를 두 번씩이나 사고를 냈습니다. 상관은 그자가 양씨 일가에서 추천한 사람이라고 최대한 체면을 봐준 것 같습니다.”“그자의 동료들도 찾아가 보았는데 다들 그자와 함께 일하길 꺼렸지만 안씨 일가의 체면을 보고 참아온 것 같더라고요.”그는 말하다가 불현듯 양진아가 안씨 일가를 언급할 때 표정이 떠올라 한마디 덧붙였다.“사실 이것들은 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단속만 잘한다면 큰 사고는 면할 테지요.”이에 양진아가 시큰둥하게 쏘아붙였다.“안성균의 성격에 큰 사고를 빚을 일이 없다는 말이냐?”남혁수는 목을 움츠리고 감히 말을 내뱉지 못했다.“사람 한 명 보내서 안성균의 만행을 적발하고 체포한 뒤 내 소식을 기다리거라. 잘 들어! 이번 일은 제후 저택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임우진이 처가에 손을 댄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
“들라 하라!”임우진은 곧장 한마디 더 보탰다.“앞으론 마님의 부탁이라면 제때 나에게 알려야 한다.”“예, 나리!”하선은 밖에서 반나절이나 기다렸다. 임우진이 양진아 때문에 화나서 일부러 그녀를 밖에 세워둔 줄 알았는데 모사 두 분이 서실에서 걸어 나왔다.‘내가 괜한 오해를 했네!’서실 안에서 임우진은 하선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일이더냐?”하선은 분명 마님께 남혁수를 빌려오라는 분부를 받았지만 이토록 중요한 일은 반드시 나리께서 직접 마님을 찾아가 상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나리.”“무슨 일로?”임우진이 눈썹을 치켰다.“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알겠다. 지금 바로 간다고 전하거라.”하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물러났다.한편 임우진은 마음이 살짝 복잡해졌다.‘설마 내가 화난 걸 알고 달래주려는 거야?’‘이번엔 절대 쉽게 용서치 않아!’그는 양진아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정성껏 일정을 짜놓았지만 결국 고정수의 소식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마음이 한없이 식어갈 따름이었다.임우진은 격하게 갈등하다가 마침내 뒤쪽 별채로 갔다.그 시각 양진아는 하선의 말을 듣고 멍하니 넋을 놓았다. 임우진이 설마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 이러는 걸까?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임우진은 이렇게까지 속 좁은 남자가 아니니까. 고정수를 조사해보라고 해도 거절, 남혁수를 빌려서 안씨 일가를 조사해보려고 해도 거절하는 게 과연 무슨 경우란 말인가?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문 앞에 있던 계집종이 청아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올렸다. 양진아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임우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걸상에 앉았다.“그래, 무슨 일로 부른 것이냐?”양진아는 잠시 침묵했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남혁수를 빌려주기 싫어서인지 몰라서 마지못해 질문을 건넸다.“서방님, 남 호위를 잠시 제게 빌려줄 수 있나요?”임우진의 안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서 발생한 일을 전혀 모른 채 안씨 일가에서 보낸 청첩장을 받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이때 경혜가 옆에서 살갑게 말했다.“이건 청지기가 보내온 거라 큰 마님은 몰라요.”“모르시길 다행이지.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잖아!”양진아는 화나서 청첩장을 내팽개쳤다.“제 주제를 알아야지, 어딜 감히 나더러 같잖은 관원 부인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하는 것이야? 뻔뻔스러운 것!”청찹장에는 양진아더러 외숙모의 생신연에 참석하라고 초대하는 내용이었다.청지기가 중도에 가로채길 다행이지 본채까지 넘어갔더라면 그녀는 시어머니께 무슨 오해를 받을지 모른다. 이제 슬슬 주제 넘치게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른다고 여길 수도 있다.“노여움 푸세요, 마님. 그럼 이 초대에는 응하시겠습니까?”“가야지! 아주 푸짐한 선물도 해드릴 거야!”양진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그녀가 안씨 일가를 한방에 기선제압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아마 안혜선을 쥐락펴락하듯 그녀도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거로 여길지 모른다.문제를 해결하려면 한방에 급소를 찔러야 한다. 안씨 일가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자가 바로 3대 독자 안현조이지만 실세는 양진아의 큰외삼촌 안성균이다.안성균은 현재 공부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어서 벌어들인 은냥으론 겨우 생계유지를 하는 처지였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그래서 안씨 일가는 양씨 일가의 피를 쪽쪽 빨아먹고 있다.하지만 욕망이란 골짜기는 메우기가 어려운 법이고 안성균 그 인간은 술과 여자, 도박 어느 하나 손을 대지 않은 게 없다. 양진아가 전생에 들었다시피 안성균이 벌어들인 돈은 죄다 더러운 돈이라고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하선을 불러왔다.“서방님이 돌아왔는지 가보거라. 만약 돌아왔으면 내가 혁수를 잠시 빌리고 싶다고 전하거라.”하선이 분부대로 나가서 알아보았더니 제후 나리가 이미 돌아온 상태였다.나리께서 서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마당으로 향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서방님을 난처하게 했군요.”양진아가 먼저 사과했다.그녀가 조바심 때문에, 전생의 일들이 떠올라서 추태를 부리고 말았다.이번 생은 임우진과 혼인했으니 전생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을 것이다.‘양씨 일가와 안씨 일가를 완전히 떼어놓을 거야!’안정미와 고정수가 아무리 그녀를 해치고 그녀의 집안까지 해치려 해도 전생처럼 쉽게 해낼 수는 없다.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저택까지 돌아갔다. 저택에 도착한 후 임우진은 곧게 서원으로 향했다.양진아는 그제야 알아챘다. 이 남자가 삐졌다는 것을 말이다.‘내가 뭘 잘못했지? 고정수 한번 조사해달라고 한 게 전부인데? 나도 다 저택과 친정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 대체 내가 무슨 사심을 부렸다고 이러는 거야?’양진아는 어리둥절한 채 하선에게 질문을 건넸다.“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게야?”하선과 추월은 양진아의 시중을 드는 요 며칠 동안 애초의 조심스러웠던 태도서부터 이제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님의 성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마님은 제후 나리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깊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서방님보다 시어머니를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마님은 제후 나리와 서로 공경하는 부부로 지내고 싶어 하지만 제후 나리가 얼마나 거만한 사람인가?수많은 부잣집 따님들의 연모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마님과의 혼약을 지키고 단 한 번도 파혼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 제후 나리의 마음도 몰라주고 마님께서 무심한 태도로 임하고 심지어 하루가 멀다 하게 고 귀공을 언급하고 있으니 기분이 언짢아질 수밖에 없었다.다만 이런 것들은 계집종인 그녀가 말할 자격이 없다.하선은 고개를 푹 떨구고 공손하게 말했다.“소인은 모르겠습니다. 본채로 가시겠습니까, 마님?”양진아는 머리를 끄덕이고 이 일을 뒤로 한 채 본채로 향했다.그 시각 안정미는 백미가 문 앞에서 계집종과 함께 겨우 마차를 한 대 불러왔다.그녀는 고씨 저택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양씨 일가로 향했다.서쪽
“왜 그렇게 웃는 것이야?”양진아는 고개를 내젓고 임우진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한편 두 여자를 따라 나온 안정미는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정나현은 마차를 타고 떠나갔고 양진아도 딱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안정미는 결국 백미가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게 됐다.안달이 났던지 그녀가 대뜸 양진아를 향해 소리 질렀다.“언니, 잠깐만! 나 좀 실어줘!”다만 양진아는 뒤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안정미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언니...”“안 낭자가 기억력이 안 좋다면 내가 대신 안씨 저택에서 했던 말을 되새겨줄 수도 있소.”임우진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나는 여자를 안 때린다고 한 적이 없거늘.”순간 안정미는 사색이 되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진국후 저택의 마차가 멀어져가는 걸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마차 안에서 임우진은 기분이 언짢은 양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혹 저자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냐?”이에 양진아가 머리를 흔들었다.“아니요. 저는 단지 나현 군주가 왜 정미랑 가깝게 지내는지가 의문입니다.”정빈 대군은 황제와 이복형제 사이이고 둘은 어려서부터 태후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온지라 유독 돈독한 정을 쌓고 있다.정빈 대군은 황제의 왕위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당연히 황제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고 초월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하지만 안씨 일가와 정빈 대군 저택의 문벌은 천지 차별이다. 바로 이 때문에 양진아가 몹시 의아한 것이다.전생에도 안정미와 나현 군주가 이토록 가깝게 지냈을까?아쉽게도 전생에 양진아는 고씨 일가에 갇혀서 외부 소식을 접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리하여 환생했지만 딱히 유용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여태껏 몰랐느냐? 고정수는 정빈 대군의 길을 걷고 있어. 지금 호부 금부사에서 사관 직을 맡고 있지.”임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고정수는 나름 유능한 인재이고 정빈 대군 또한 예의 바르고 고결한 성품을 지녀서 고정수를 중히 여기고 있단다. 그러니 나현 군주가 안정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