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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작가: 임은별
이번 만남은 양가 가족이 처음으로 상견례를 갖는 자리였다.

그런데 이렇게 불쾌하게 끝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집에 돌아온 부모님은 여전히 화가 잔뜩 나 계셨다.

그러나 10년 동안 이어진 연애를 한순간에 끊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두 성인이 되었으니,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할 일도 더 늘어난 것이다.

“수경아, 네가 현수랑 잘 얘기해 봐. 오늘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말이다. 내가 보기엔 현수는 참 괜찮은데, 하필 이런 이상한 집안이라니 어쩌면 좋니.”

아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김현수의 사촌 누나라는 사람, 임신한 몸으로 나와서 저렇게 설치다니, 이상해. 방금 자리에서 보니 일부러 몸싸움을 벌이려고 한 건 아닌가 싶더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자 엄마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야. 정말 이상한 건 이혼한 여자가 왜 굳이 그 집에 얹혀살고 있냐는 거야. 게다가 딱 봐도 너를 싫어하는 게 느껴지잖니. 마치 네가 뭔가를 빼앗은 것처럼 말이야.”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사실 김서현에 대해 내가 아는 것도 많지 않았다.

다만, 김현수의 어머니가 남동생을 굉장히 아꼈고, 그 남동생이 나이가 들어 어렵게 얻은 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딸까지 아끼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딸이 바로 김서현이었다.

김현수가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마다, 김서현과 함께 자라며 깊은 유대감을 쌓았다고 말했다. 거의 친누나처럼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그래서 김서현이 이혼한 뒤에도 자연스럽게 집에 들여 함께 살게 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김서현이 경제적으로 막막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를 부양하는 사람이 무려 다섯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김현수의 외삼촌과 외숙모, 김현수의 부모님, 그리고 김현수까지.

아마 김서현 입장에서는 내가 김현수와 결혼하면, 단번에 네 개의 경제적 지원이 끊겨버리는 셈이었을 것이다.

또한, 김서현에겐 다섯 살짜리 아들과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교육비며 분유 값까지, 어느 것 하나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김서현의 전남편은 능력도 없는 주제에 밖으로만 나돌며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었고, 양육비는커녕 손톱만큼의 도움도 줄 리 없었다.

결국 김서현이 의지할 곳은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 가족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말이 되었다.

그러니 김서현 입장에서는 내가 그녀의 것을 빼앗아 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 휴대전화가 진동하더니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확인해 보니, 김현수의 어머니가 보낸 장문의 사과 메시지였다.

주된 내용은, 첫 가족 모임에서 이런 난처한 상황이 벌어져 나에게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김현수의 어머니는 한층 낮춘 태도로 글을 적었고, 그걸 본 가족 단체 채팅방의 다른 사람들, 심지어 오랫동안 잠잠했던 사촌동생들까지도 하나둘씩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음속에 쌓였던 분노가 조금은 풀렸다.

어차피 내가 원했던 건, 단지 그들 가족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었으니까.

처음으로 남자친구 집안 식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모욕을 당했는데, 누가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곧바로 괜찮다는 의미의 문장을 길게 적으려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김현수의 외삼촌까지 나에게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일은 전적으로 소우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결국 부모인 우리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더 큽니다.]

그러더니 바로 김서현을 태그하며 말했다.

[서현아, 너도 당연히 사과해야지.]

순간, 채팅방이 고요해졌다. 무려 5분이 넘도록 아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같이 사는 가족끼리 상대방이 메시지를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는 건, 결국 나에게 사과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방금 전까지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나는 채팅창에 입력해 두었던 다 같이 화목하게 지내자 라는 문장을 전부 지워버렸다.

또다시 5분이 지나서야, 김서현이 마지못한 듯한 줄의 메시지를 남겼다.

[미안해요, 수경 씨. 그래도 수경 씨는 대인배이니 이해할 수 있죠?]

김서현의 메시지를 본 순간, 불쾌함이 온몸을 뒤덮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곧이어 김서현이 몇 장의 사진을 더 올렸다.

전부 다 내가 어떤 남성과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사진에는, 내가 반클리프 아펠 팔찌를 차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는 머리로 피가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사진들은 모두 과거에 내가 서로 다른 SNS 계정에 올렸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찾아낸 걸까?!

나는 마치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받은 듯한 모욕감을 느꼈다.

[수경 씨, 이 남자와 여러 번 식사를 같이 한 건, 혹시 두분 사이가 친밀하다는 증거 아닌가요?

그리고 수경 씨 손목에 차고 있는 그 팔찌도 이 남자가 준 거죠? 제가 한참을 관찰해봤는데, 수경 씨와 현수의 월급으론 그 팔찌를 살 능력이 없을 텐데요.

따라서 이 모든 걸 종합해서 묻고 싶은데, 하수경 씨, 혹시 이 남자의 불륜녀인 건가요?]

사람들은 임신하면 멍청해진다고 하지만, 김서현이라면 열 번을 임신해도 바보 같을 거다.

터무니없는 억측을 가족 단체 채팅방에 끌고 와서는, 마치 자신이 대단한 명탐정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이 순간, 나는 딱히 답할 말이 없었고, 그저 웃는 이모티콘 하나만 보냈다.

하지만 김현수는 나보다 더 격분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 남자는 수경의 외사촌 동생이야! 일 년에 한 번 집안 모임에서 겨우 얼굴 볼까 말까 하는 사이인데, 사진 한 장 찍은 게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그리고 팔찌도 수경이 직접 자기 돈으로 산 거고! 정신 나갔어?! 너 지금 제정신이야?]

김현수와 나는 10년을 연애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뜻이겠지.’

당황한 김서현은 황급히 자기가 올린 메시지를 삭제했지만, 문제는 사진이었다.

단체 채팅방에서는 사진을 올린 사람이 삭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 사진들은 계속 대화창에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눈에 거슬렸다.

그러자 가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 쓸데없는 잡담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사진들이 점점 위로 밀려 올라가더니, 결국 화면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사진들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김서현, 날 몰래 감시한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구나.’

나는 SNS에 별생각 없이 짧은 글들을 자주 올리긴 했다.

하지만 설정을 최근 6개월 이내 게시물만 공개로 해두었기 때문에, 저 사진들을 찾으려면 적어도 1년 전부터 내 SNS를 뒤지고 있었어야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날 몰래 지켜봤으면서도, 결국 저장한 사진은 딱 몇 장.

다른 남자와 식사하는 사진, 그리고 비싼 팔찌를 찬 사진뿐이었다.

이 모든 게, 결국 날 불륜녀로 몰아가기 위해서였다는 뜻이었다.

나는 김서현의 행동에 역겨움을 느껴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온몸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김현수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내 감정을 달래려 애썼다.

[우리 가족 모두가 사촌 누나 때문에 미칠 지경이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그러니 자기야, 너무 화내지 마. 우리 엄마가 며칠 뒤에 네가 집에 오면 직접 사과하겠다고 하셨어. 오늘은 우리 가족이 너무 심했어. 우선 부모님께 상황을 잘 말씀드려줘.]

김현수의 메시지를 보고 나도 한숨을 내쉬며 조금 진정되었다.

[그냥 말 안 할래. 괜히 또 화내실 거야.]

김현수와 김서현은 아무런 상관없는 관계다. 그렇다고 내가 김서현에게 느낀 분노를 김현수에게 쏟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다시 김현수의 집을 방문한 건 주말이었다.

김현수의 부모님과 외삼촌, 외숙모는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은 크지 않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외삼촌과 외숙모가 출근해서, 집에는 여섯 명만 있었다.

거실에는 김서현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김소우가 앉아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사전에 경고를 받은 듯,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김소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김서현이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날 보더니, 곧바로 따지듯 말했다.

“여기 앉아서 뭐 하는 거예요? 도와줄 생각은 없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김서현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제가 손님인데, 뭘 도와주죠?”

평소엔 집에서 빈둥거리면서도, 남에게만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그때, 김소우가 텔레비전에서 새로 나온 트랜스포머 장난감 광고를 보자마자,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엄마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엄마, 엄마! 저거 사 줘! 388 저거!! 사 줘, 사 줘!!”

그러자 김서현은 마치 익숙한 일인 양,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조금 이따가 우리 삼촌한테 가서 사달라고 하자, 알겠지?”

김서현의 말투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현수가 이 집에서 김서현, 김소우, 그리고 김서현 배 속의 아이까지 돌바줘야 한다는 뜻이야?’

하지만 나는 그런 상황에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조용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김서현은 그런 나를 보며, 일부러 피식 웃더니 김소우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소우야, 이제 철들어야 해. 조만간 네 삼촌한테 새 가족이 생기면, 더 이상 너만 예뻐해 주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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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김서현을 바라보았다. 김소우가 저런 말을 하도록 가르쳤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러니 김소우가 나를 싫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이 집안 전체가 마치 김현수의 피를 빨아먹으려는 흡혈귀들처럼 그를 철저하게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때 김현수의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수경아, 서현아, 밥 먹자!”식탁에 앉자, 김현수의 어머니는 내게 계속 반찬을 덜어주며 미안하다는 말을 늘어놓았다.그리고 마지막에 결정타를 날렸다.“너희 둘 정말 오래 만나 왔잖니. 우리 가족 모두 너희를 응원하고 있어. 그러니 이런 작은 일로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해라.”한 방 먹었다.그래서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럼요, 이 정도 일로 저희 사이가 흔들리진 않아요, 어머님.”그때, 옆에서 김소우가 김현수의 팔을 붙잡고 칭얼대며 말했다.“삼촌, 나 TV에서 나온 트랜스포머 사고 싶어요.”그러자 김현수가 김소우를 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래. 삼촌이 사줄게.”그런데 그 순간, 김소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김현수에게 물었다.“외삼촌, 외숙모가 생기면 나랑 엄마는 버리는 거예요?”식탁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김현수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김현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니. 삼촌은 언제까지나 소우를 아껴줄 거야. 그리고 외숙모도 소우를 예뻐해 줄 거야, 맞지?”그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분위기가 다시 싸늘해졌다.김소우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마치 이 나쁜 여자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러한 상황에 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그 순간, 김현수의 어머니가 급하게 나서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자, 자, 이제 중요한 이야기 좀 해보자. 수경아, 집은 우리가 이미 계약금까지 다 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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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김현수 너. 너희 가족도 마찬가지야.”내 눈물이 결국 참지 못하고 떨어졌다. 하지만 난 내가 왜 우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아마도 최근 겪었던 서러움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10년 동안 이어온 이 관계가 마침내 끝을 맞이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나는 차분하게 정리하고 떠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별은 생각만큼 담담하지 않았다.“김현수, 너희 집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가 있는 가족이야. 네 부모님은 너를 낳기 위해 네 누나를 보냈어. 그러면서 서현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잖아. 이렇게 중의적인 이름이라니, 남자처럼 자라길 바란 거 아니야?나는 외동딸이야. 그래서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딸을 보내면서까지 아들을 원하는 그런 집에서 내가 결혼 후 어떤 삶을 살게 될지.”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김현수를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우리는 고등학생 때부터 10년을 연애했어. 하지만 네 안에서는 단 한 번도 가족에게 반항하고자 하는 걸 느낄 수 없었어.사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단 한 번이라도 그들에게 반항했다면, 난 네 가족이 문제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내 손을 잡고 떠나겠다고 했다면, 난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하지만 넌 한 번도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따라서 그런 너와 함께 있어 봤자, 난 늪에 빠지는 것 말고는 다른 결말이 없겠지.”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16살 때, 우리는 서로를 짝사랑했지. 그때 넌 용기를 내서 내게 먼저 다가왔어. 그때 네가 사귈 수 있을까 라고 물어봤을 때, 난 널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소년이라고 생각했어.그러니까 너, 16살의 김현수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거야?”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끝이 났다. 나는 김현수가 줬던 전통 가보를 조용히 돌려주고, 내 삶을 다시 시작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김현수는 한동안 무기력하게 살아갔다. 하지만 결국 부모님의 뜻을 따라 선 자리를 보게 되었다. 선을 본 여자는 김현수를

  • 나를 라이벌로 여기는 사촌언니   제5화

    그러나 집에서 나왔어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날 이후로 김현수는 매일같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전부 똑같았다.그러나 나는 그 집에서 나왔고, 여전히 삶을 살아가야 했다.그날 이후, 김현수는 거의 매일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뻔했다. 우리 관계를 놓을 수 없다,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는 말뿐이었다.심지어는 하루 종일 일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차를 몰아 우리 아파트 아래까지 찾아와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하지만 나는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주변에서는 가끔 우리 결혼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미 헤어졌다고 가볍게 말했다.사람들은 놀라긴 했지만, 누구도 아깝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의 삶을 응원한다며 축복해 주었다.이전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던 현실도, 마주해 보니 생각만큼 두렵지 않았다.어느 주말, 김현수가 다시 한번 나를 만나자고 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못 본 척하지 않고,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어떤 말들은, 직접 만나서 확실히 해야 끝나는 법이니까.내가 도착하자마자, 김현수는 급하게 나를 안아버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나는 김현수의 눈물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나는 차분하게 김현수의 품에서 벗어났다.그러자 김현수는 초조한 듯 서둘러 말했다.“수경아, 우리 부모님도 허락하셨어. 그 집은 이제 우리 둘만의 집으로 남겨두겠다고. 앞으로 서현과 같이 사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러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부탁이야.”말을 하면서도, 김현수는 마치 내가 끝까지 듣지 않고 떠날까 봐 불안한 듯 조급해 보였다.이윽고 나는 조용히 물었다.“좋아. 그럼 앞으로 김서현과 서현 씨 아이들을 챙기지 않을 수 있겠어? 우리가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네 돈은 오직 나와 우리 미래의 아이를 위해서만 쓸 수 있겠어?”그 순간, 김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나를 라이벌로 여기는 사촌언니   제4화

    나는 내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혹시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닐까? 연애라는 건 원래 사소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 법인데, 내가 너무 따지는 걸까?’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속에 쌓였던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우리가 보러 간 집은 꽤 컸다. 네 개의 방과 거실 하나, 햇빛도 잘 들어와서 내 이상적인 신혼집과도 같았다.심지어 안방에는 벌써 붉은색 침구 세트가 깔려 있었고, 집안 분위기가 마치 페스티벌처럼 화사했다. 우리는 하나하나 방을 둘러보며 설명을 들었다.그런데, 그 방을 보고 있던 김현수의 어머니가 무심한 듯 한마디를 던졌다.“이 방은 서현이가 쓰면 되겠네. 아기 침대까지 놓으면 아기 돌보기도 편하고. 그리고 맞은편 방은 소우 방으로 쓰면 딱 맞겠어. 그럼 안방이랑 작은방 하나는 너희 부부랑 미래의 아이를 위해 남겨두면 되겠구나! 완벽하네.”김현수의 어머니는 마치 이 미래를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우리 가족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우리 엄마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서현이랑 소우? 그게 누구죠?”그 순간, 내 안에서 억눌렀던 화가 터질 듯이 치솟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내 몸에서 화산이 폭발할지도 몰랐다.그래서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왜 김서현 씨 가족이 제 신혼집에 같이 살아야 하죠?!”“수경아.”김현수가 내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강하게 뿌리쳤다.“나는 정말 오랫동안 참았어. 첫 만남 때부터, 당신네 가족은 단 한 번도 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적이 없어! 처음엔 소우가 내 40만 원짜리 원피스에 오렌지 주스를 뿌렸지.그다음엔 김서현이 가족 채팅방에서 내 불륜 루머를 퍼뜨렸고, 김서현을 만나러 갔을 때는 눈물을 흘려가며 나한테 무언의 경고를 줬어. 그런데 이제는 내 결혼 집까지 마음대로 하라고? 이건 며느리를 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호구를 구하는 거잖아!”그 순간, 김현수가 날 쏘아보며 소리쳤다.“수경아! 너 지금 우리 부모님께

  • 나를 라이벌로 여기는 사촌언니   제3화

    ‘뭐라고?’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김서현을 바라보았다. 김소우가 저런 말을 하도록 가르쳤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러니 김소우가 나를 싫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이 집안 전체가 마치 김현수의 피를 빨아먹으려는 흡혈귀들처럼 그를 철저하게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때 김현수의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수경아, 서현아, 밥 먹자!”식탁에 앉자, 김현수의 어머니는 내게 계속 반찬을 덜어주며 미안하다는 말을 늘어놓았다.그리고 마지막에 결정타를 날렸다.“너희 둘 정말 오래 만나 왔잖니. 우리 가족 모두 너희를 응원하고 있어. 그러니 이런 작은 일로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해라.”한 방 먹었다.그래서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럼요, 이 정도 일로 저희 사이가 흔들리진 않아요, 어머님.”그때, 옆에서 김소우가 김현수의 팔을 붙잡고 칭얼대며 말했다.“삼촌, 나 TV에서 나온 트랜스포머 사고 싶어요.”그러자 김현수가 김소우를 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래. 삼촌이 사줄게.”그런데 그 순간, 김소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김현수에게 물었다.“외삼촌, 외숙모가 생기면 나랑 엄마는 버리는 거예요?”식탁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김현수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김현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니. 삼촌은 언제까지나 소우를 아껴줄 거야. 그리고 외숙모도 소우를 예뻐해 줄 거야, 맞지?”그러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분위기가 다시 싸늘해졌다.김소우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마치 이 나쁜 여자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러한 상황에 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았다.그 순간, 김현수의 어머니가 급하게 나서며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자, 자, 이제 중요한 이야기 좀 해보자. 수경아, 집은 우리가 이미 계약금까지 다 냈어.

  • 나를 라이벌로 여기는 사촌언니   제2화

    이번 만남은 양가 가족이 처음으로 상견례를 갖는 자리였다.그런데 이렇게 불쾌하게 끝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집에 돌아온 부모님은 여전히 화가 잔뜩 나 계셨다. 그러나 10년 동안 이어진 연애를 한순간에 끊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두 성인이 되었으니,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할 일도 더 늘어난 것이다.“수경아, 네가 현수랑 잘 얘기해 봐. 오늘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말이다. 내가 보기엔 현수는 참 괜찮은데, 하필 이런 이상한 집안이라니 어쩌면 좋니.”아빠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리고 김현수의 사촌 누나라는 사람, 임신한 몸으로 나와서 저렇게 설치다니, 이상해. 방금 자리에서 보니 일부러 몸싸움을 벌이려고 한 건 아닌가 싶더라.”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자 엄마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했다.“웃을 일이 아니야. 정말 이상한 건 이혼한 여자가 왜 굳이 그 집에 얹혀살고 있냐는 거야. 게다가 딱 봐도 너를 싫어하는 게 느껴지잖니. 마치 네가 뭔가를 빼앗은 것처럼 말이야.”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사실 김서현에 대해 내가 아는 것도 많지 않았다.다만, 김현수의 어머니가 남동생을 굉장히 아꼈고, 그 남동생이 나이가 들어 어렵게 얻은 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그 딸까지 아끼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그 딸이 바로 김서현이었다.김현수가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마다, 김서현과 함께 자라며 깊은 유대감을 쌓았다고 말했다. 거의 친누나처럼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그래서 김서현이 이혼한 뒤에도 자연스럽게 집에 들여 함께 살게 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그리고 김서현이 경제적으로 막막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를 부양하는 사람이 무려 다섯 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김현수의 외삼촌과 외숙모, 김현수의 부모님, 그리고 김현수까지.아마 김서현 입장에서는 내가 김현수와 결혼하면, 단번에 네 개의 경제적 지원이 끊겨버리는 셈이었을 것이다.또한, 김서현에겐 다

  • 나를 라이벌로 여기는 사촌언니   제1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엄마와 아빠, 그리고 남자친구인 김현수는 급히 달려와 내 드레스에 묻은 끈적한 오렌지 주스를 닦아냈다.나는 정신이 멍해진 채, 분노에 가득 찬 어린 김소우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김소우는 겨우 다섯 살이다. 눈매는 그의 엄마를 꼭 닮아 있었고, 얼굴도 귀엽고 단정하게 생겼다. 그런데 지금 김소우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고,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양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이었다.이때, 김서현이 김소우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소우야, 저 사람은 아빠가 아니야. 저 분은 삼촌이야.”김서현은 비난하거나 꾸짖지도 않고 그저 김소우를 끌어내려고 했다.그러자 엄마가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해요! 그리고 내 딸에게 당장 사과해요! 이게 그쪽 집안에서 아이들을 훈육하는 방식인가요?”그러나 김서현은 여전히 우리가 과민 반응을 한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무관심한 표정을 지었다.“아직 어린애잖아요, 뭘 알겠어요?”나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소우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도, 서현 씨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나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그때, 김현수의 부모님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는 듯 나를 향해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의 요지는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부드럽게 넘어가, 아이들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오늘은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자리잖아.”그 말은 마치 내가 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오늘 식사는 양가 부모님이 공식적으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고, 중요한 친척들도 모두 참석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위해 평소에는 입지 않는 고급 드레스를 준비했다.그러나 김소우가 음료수를 쏟은 바람에, 40만 원이 넘는 내 드레스는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다.정말 화가 났다. 그런데도 김소우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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