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음은 신유리의 한쪽 팔을 부축해주며 귀에 대고 아까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유리언니,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 예요?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 올라가서 좀 쉬세요.”신유리는 송지음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풀려 어쩌지도 못했다. 그녀는 크게 호흡을 내쉬며 들끓는 화를 조절했다.“송지음, 지금이 후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송지음은 말을 하는 신유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악독함을 더는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아직까진 저 협박할 힘도 있나본데... 그럴 바엔 조금 잇다 어떻게 하실 건지나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여정원은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이미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저번에 성서에서 마주친 이후로 여정원을 본 적이 없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떤 이유로 인해 만흥 그룹사장님으로부터 좌천당했다고 한다.여정원은 멀리서 머쓱하다는 듯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걸어오며 인사를 건넸다.“유리씨, 오랜만입니다.”신유리는 송지음에게 부축을 당하며 몸을 겨우 일으켰고 미간을 찌푸린 채 시뻘건 얼굴을 하고 있었다.몸에 이미 퍼진 약의 효능이 너무도 불편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송지음과 여정원 사이에 고정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 술잔에 무슨 짓을 한 거죠?”송지음은 일부로 깜짝 놀란 척 연기하며 대답했다.“어머, 사람 함부로 의심 하지 마요. 유리씨 저희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요? 증거도 없으면서 막 말해도 되는 거예요?”신유리는 송지음의 가식적인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마저 들었다.“경희영씨보고 내 술잔에 약을 타라고 했겠죠?”그녀는 자신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술을 부으러 온 경희영의 모습이 생각나 확신에 차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송지음은 피식 비웃더니 신유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제가 그런 게 맞다면 또 어쩔 건데요? 설마 오늘 밤도 도망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송지음은 말을 마치고 여정원을 쓱 쳐다보고는 그에게 물었다.“준비해야 할 물
신유리는 그의 품에 안겨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이미 말라 터진 입술을 하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하였지만 낼 수 있는 소리는 작디작은 신음소리 뿐이었다.서준혁은 품에 안긴 여자의 체온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고 순간 동공이 급격히 흔들렸다.뒤에 따라 오는 이석민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곤 급히 안내하고 잇던 두 명의 사업파트너에게 사과를 건네고는 둘을 데리고 전에 예약했던 방으로 다시 안내했다.신유리가 그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왔고 그녀의 얼굴은 심할 정도로 빨개져있었으며 몸은 뜨겁다 못해 불구덩이 같았다.오는 길 내내 서준혁에게 안겨 그에게서 나는 익숙하고도 은은한 향수냄새를 맡자 신유리는 금세 진정이 조금 되는 듯 한 눈치였다.그래서 그녀는 오는 길에 계속 서준혁의 가슴팍에 머리를 틀어박고 약간 변태처럼 그의 냄새를 맡아대고 있었다.서준혁은 바로 그런 그녀를 침대위로 던져버렸고 신유리는 반응이 더뎌져 얼른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냄새를 맡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그의 옷은 신유리가 비벼대는 바람에 얼룩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서준혁은 이미 눈이 반쯤 풀려 자신의 손끝을 잡고 있는 신유리를 조심스레 쳐다보았다.신유리의 눈은 원래도 예뻤지만 지금 약 효과 때문인지 눈 끝이 빨개져 반짝반짝 빛이 나던 동공도 더욱 청초해보였다.그녀는 무릎을 반쯤 꿇고 침대에 앉아있었고 서준혁의 손가락을 잡고는 말라 터진 입술이 아파오는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쓱 핥았다.신유리는 이미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도달했지만 서준혁에게서 나는 냄새가 좋아 그 냄새만을 쫓아다니려고 애를 썼다.뜨거운 그녀의 손이 서준혁의 손가락을 잡아 끌어 자신의 쪽으로 힘없이 끌어당겼고 그가 아무 움직임도 없자 미간을 슬쩍 찌푸리고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너 일로와!”서준혁은 어떤 표정도 없이 있다가 조금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신유리의 말대로 그녀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그 순간, 신유리가 서준혁의 몸을 덮치더니 그의 허리를
신유리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가만히 서서 서준혁을 쳐다보았다.그래도 지금껏 사회생활을 한 경력이 있고 눈치가 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어젯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고서는 바로 임아중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는 핑계로 녹음기를 슬쩍 켜놓았던 신유리다.원래는 경희영의 증거들을 조금 모아두려고 했지만 예상외로 송지음과 여정원의 악행들을 두 눈으로 보았고 녹음까지 마친 상황이었다.신유리는 아까 정신을 차린 뒤, 얼마 남지 않는 핸드폰 배터리를 확인하고는 재빠르게 녹음을 저장했고 파일형식으로 남겨두었다.채 잠기지 않은 셔츠 사이로 서준혁의 목젖이 보였고 그는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제가 왜 증인이 서준혁의 표정은 그의 뒤에서 비추는 쨍한 햇빛에 의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아주 잘 들려왔다.“제가 왜 증인이 되어주어야 하는 겁니까?”신유리가 고소하려고 하는 사람은 송지음이니 서준혁이 당연히 동의할 리가 없었고 그녀는 이런 그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뭐 괜찮아.]그녀의 눈은 현재 어젯밤 몽롱하게 풀려있던 모습과는 달리 평소 새침하고 도도한 눈빛으로 돌아왔고 여전히 잠겨있지만 단호하게 다시 말을 했다.“전 그냥 지금 서대표님께 통보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증거로 충분하니까.”신유리의 시선은 곧 핸드폰에 멈췄고 옅게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누가 송지음씨더러 그렇게 멍청하게 구라고 시켰나요? 아무 말이나 막 하고...”저리듯 아파오는 몸을 더는 가눌 수가 없었던 신유리는 조금 진정이 된 후 가까운 소파로 향했다.방안엔 온통 어젯밤 흔적들로 가득했고 분위기는 뭔가 오묘했다.신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비록 신경을 안 쓴다고는 말했지만 속으로 내심 많이 불편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지금 서준혁도 꼿꼿하게 그녀의 앞에 서있었고 신유리의 말에 어떤 말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방안은 조용했고 적막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누군
신유리는 이신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눈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방금요.”이신은 신유리 목에 둘러져있는 스카프를 보고는 동공이 흔들리는 듯 했고 생각에 빠져드는 모습이었다.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신 때문에 조금 민망한 신유리는 그 자리에 굳어 무슨 일부터 손을 봐야 하는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아까 호텔에서 임아중과 마주했을 때도 이런 기분이 안 들은 신유리지만 이신의 눈을 바라보자니 긴장감이 맴돌았다. 마치 거짓말을 하다가 들킨 어린 아이처럼.이신의 시선은 신유리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시선을 애써 계속 피하고만 있었다.곡연은 둘의 모습에 신유리가 부끄러워 말을 못하는 줄 알고 화가 나 씩씩대며 아까 그녀가 했던 말들을 다시 막 뱉어냈고 마지막엔 이런 말도 덧붙였다.“오대표님도 참... 경희영씨 소문이 그렇게 안 좋은데 왜 그 사람을 데려왔을까요?”곡연의 말을 다 들은 허경천은 방금 전 곡연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고 첨엔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지다가 후에는 오대표님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상황인지 따지려고 하였다.신유리는 곡연과 허경천이 같이 나가는 것을 보고는 긴장했던 마음이 점차 진정되는 것 같았지만 고개를 들면 보이는 이신의 얼굴 때문에 또다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그녀가 마음을 굳게 먹고 말을 꺼내려고 준비할 때, 이신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어제... 많이 무서웠지?”“...”이신은 말을 하지 못하는 신유리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위로를 건네듯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그런 일은 여자인 너 혼자 감당하게 만들었네... 미안해, 빨리 나타나주지 못해서.”신유리는 이신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올 줄 몰라 잠시 당황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안 무서웠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어찌 안 무서웠겠는가? 어제 복도에서 버티다 못해 주저앉았을 때의 심정은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려오는 신유리였다.그 순간, 이신이 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다정하게 위로했다.“이젠 괜
연우진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고 그녀의 대답에 모든 신경을 다 쏟아 붓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전에 진송백 또한 자신에게 부산에 친척이 있는지 물어보던 일이 생각이 났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연우진에게 되물었다.“왜 물어보는거야?”하지만 연우진은 입을 꾹 닫아버렸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얼른 부인하더니 말을 꺼냈다.“아니야, 내가 잘못 생각했나보다. 미안.”요즘 일이 바쁜 탓인지 신연과 신유리가 아는 사이 일 것이라고 착각을 한 연우진은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했고 신유리는 평소와 무척이나 다른 그의 모습에 걱정 어린 표정을 하고 물었다.“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나 먼저 가볼게.”연우진은 입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무슨 말을 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결국 꾹 참아내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한참 뒤, 낮은 목소리로 결심이라도 내린 듯 신유리에게 말했다.“유리야, 그때 말이야... 왜 계속 서준혁씨랑 헤어지지 않았던 거야?”신유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연우진이 당황스러웠고 그녀는 그를 유심히 보며 생각했다.[옛날에 대판 싸웠을 때도 이런 건 안 물어보더니...][그냥 아무 말 없이 날 도와주던 애가 왜 이러지?]지금 연우진의 모습과 저번에 말했던 지연이가 생각이 나 신유리는 더욱 더 생각이 많아졌고 그녀는 책상위에 놓인 얼마 마시지도 않은 커피를 보며 아무 감정도 없이 대답했다.“그러게 말이야. 그땐 내가 너무 멍청했어. 누가 와서 말려도 안 될 정도로.”예전의 신유리는 서준혁이 저지른 크고 작은 나쁘고 악한 만행들을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해줬고 한번, 또 한 번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서준혁은 단지 지금 재밌는 게임을 하면서 논다고 생각하려고 애썼다.하지만 결국 서준혁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신유리였다.연우진은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고 신유리는 그런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떴다.그녀가 몸을 일으키기 전, 연우진이 대뜸 입을 열었다.“송
그녀의 부름에 서준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천천히 머리를 들고 송지음을 쳐다보았다.송지음은 순간 그의 눈빛에 뜨끔했고 곧이어 온 방엔 서준혁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가 이석민씨한테 말한 거 그거 다 사실이야?”서준혁에게로 다가가려고 하고 있던 송지음은 발걸음을 멈췄고 첫마디부터 이런 물음을 던지는 그에게 실망한 것 같아 보이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그거 다 경희영씨가 술에 많이 취해서 저한테 알려준 거예요.”그녀의 대답에도 서준혁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까만 눈동자 속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리지 않았다.송지음은 마음을 굳게 먹고는 계속 서준혁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을 이어갔다.“오빠, 전에 일은 제가 다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화 좀 풀어요. 네?”서준혁은 말을 하는 송지음을 흘긋 째려보며 물었다.“너는 내가 왜 너를 고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네?”송지음은 그의 질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서준혁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책상위에 툭 던져놓으며 차갑게 말했다.“회사 내 비밀문서들을 팔아넘긴다... 이 하나로도 넌 절대 법의 심판을 피하지는 못 할 거야.”가만히 서있는 송지음은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그녀는 지금 서준혁이 하는 말들이 다 사실이고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렸다.서준혁이 송지음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 다 화인 그룹을 위해서이고 그런 줄도 모른 송지음은 사실 그날 이석민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그래도 아직 서준혁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가 혼자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서준혁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그제야 반응을 했다. 그가 자신을 남겨둔 건 오직 회사를 위해서이고 아직 그녀가 이용가치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송지음은 포기하지 않았고 이런 저런 생각들을 다 제쳐둔 채, 울먹거리며 입을 열었다.“오빠... 이렇게 독한 사람이었어요? 저 요 며칠 많이 반성했잖아요. 왜 저를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 건데요?”
긴 복도와 큰 사무실은 넓기 그지없었기에 하정숙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는 신유리가 무시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그녀와 하정숙은 아예 모르는 남보다는 조금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신유리는 전에 서준혁 때문에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은 신유리가 무엇을 하든, 어떤 짓을 하던 지간에 하정숙은 그녀를 얕잡아보았고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하정숙과 신유리가 제일 많은 소통을 하는 시간은 서씨 집안의 큰 행사나 파티가 있는 날이었고 그때마다 하정숙은 신유리에게 좀 도와달라고 늘 먼저 말을 걸었었다.하지만 대부분 시간 신유리는 하정숙과의 소통과 교류를 숙제삼아, 임무삼아 완수하려고 하였고 그리하여 매일 참고 인내하며 그녀와 함께 했었다.하정숙은 신유리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자 화장을 세심하게 한 얼굴엔 미소가 띠었고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주현에게 말했다.“나중에 너랑 준혁이 결혼하면 준혁이를 좀 잘 관리해봐, 회사가 얼마나 성스럽고 중요한 곳인데 개나 소나 다 들어오게 하고 말이야.”그녀의 말에 주현의 시선은 자연스레 하정숙을 타고 신유리에게로 떨어졌고 생긋 웃으며 마치 불난 집 불구경이라도 하듯 대답했다.“화인 그룹의 룰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 회사는 절대 잘린 직원을 다시 회사 내에 발 들이게 하지 않던데요.누가 잘 통하는 사이 아니랄까봐 주현과 하정숙은 사람을 조롱하는 말투마저 똑같았고 신유리가 여전히 대꾸조차 해주지 않자 또다시 신유리를 쳐다보며 물었다.“요즘 업무 때문에 화인에 자주 들락거린다고 들었어요. 한 걸음 물러나는 척하며 두 걸음 다가서는 거... 좋은 방법이네요.”신유리는 딱히 아무 감정이 없어 무덤덤한 얼굴로 주현을 쓱 훑어보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화인그룹이랑 버닝스타의 협업을 제가 담당하고 있어서요. 주현 아가씨랑 정숙 부인님이 그렇게 불만이 많으시다면야 직접 서대표님께 가서 합작을 취소하라고 말씀하세요. 위약금만 낸다면야 버닝스타도 의견은 없을 거예요.”그녀는
신유리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서준혁을 쳐다보았고 사무실은 물을 뿌린 듯 조용했다.그녀는 원래 사무실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었고 밖의 휴게실에서 서준혁을 기다리려고 하였지만 예상에는 없던 하정숙과 주현을 만나는 바람에 안으로 발을 들인 것이다.신유리는 서준혁의 눈빛을 보곤 주먹을 꽉 쥐며 똑바로 서 있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그녀를 슬쩍 보고는 여전한 말투로 대답해줬다.“당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제가 지음이를 너무 좋아해서 꽉 쥐고 있는 게 됩니까?”“신유리 씨 지금 너무 박력 있습니다?”말을 마친 서준혁은 바로 전화기를 집어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들어오세요.”그가 전화를 끊자마자 이석민이 기다렸다는 듯 사무실로 들어왔고 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이석민을 쳐다보며 말했다.“데리고 나가세요.”이석민은 서준혁의 말에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와 신유리에게 천천히 말을 꺼냈다.“신유리 씨, 저랑 가시죠.”서준혁이 지금 신유리와의 대화도, 소통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신유리는 그것을 아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 순간 서준혁의 낮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석민 씨, 마지막으로 경고해주죠. 아무 사람이나 막 제 사무실에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시겠어요?”신유리는 턱 끝까지 차올랐던 말들을 다시 삼켰고 서준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서야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이석민은 회사 아래까지 배웅해줬고 둘의 사이는 꽤나 좋았기에 오는 길 내내 조용한 신유리가 걱정됐는지 잠시 생각을 하다 말을 내뱉었다.“택시 불러줄게요.”“아니요, 괜찮아요.”신유리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이석민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고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회사를 빠르게 떠나버렸다.이석민은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신유리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다시 회사 안으로 옮겼다.하지만 이석민이 모르는 사실 한 가지는 신유리가 구석진 코너를 돌고나서 한 행동이었다.우울하던 얼굴은 삽시간에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