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서진의 목소리는 크게 들려오는 화려한 댄스 음악에 묻혔고, 그와 가까이에 있던 서준혁만이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서준혁 잠시 뜸을 들인 후 덤덤하게 말했다. "볼 일이 있어."우서진이 물었다. "강희성이 또 오라고 한 건 아니지? 너네 어머님이 허씨 집안이랑 그렇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너는 또 친하게 지내는 게 희한하단 말이야."그러고보니 삼촌이 곧 성남에 오신다며? 그저께 뉴스에서 봤어."그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사람들 모두 웃었다. “야, 서진아. 너가 뉴스도 보냐?”“꺼져, 내가 독서가 내 마음의 양식이다. 네가 알기나 해?”우서진은 그들과 장난치며 말다툼을 하였다. 방금 말을 꺼낸 남자는 임아중을 힐끗 보고는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아중아, 너도 여기서 놀고 있었네? 같이 놀까?”성남의 재벌 2세들은 사실 여러 개의 무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모두 서로를 알고 있지만 같이 어울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남자가 임아중에게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모두가 쳐다보았고, 자연스럽게 임아중 옆에 있던 신유리와 이신에게도 시선이 갔는데, 화려한 조명 탓에 사람의 표정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신유리는 임아중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쉴 수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줄게."그런데 떠나기 직전, 우서진이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진짜 운명인가보다. 내 생일이라고 아중이가 나타나줬네?”임아중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노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전에 바에서 신유리가 우서진과 서준혁을 만났던 때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바라보았다."유리 씨, 우리 꽤 친한 사이잖아요. 제 생일인데 흥이 깨지면 안되지 않겠어요?" 우서진은 임아중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신유리에게 직접 물었다.단지 그의 말투가 차갑고 불친절했을 뿐이다.신유리는 미간을 꿈틀거리며 임아중에게 말했다. "넌 놀고 싶으면 놀아도 돼. 난 그냥 택시타고 돌아갈게""네가 가는데 내가 어떻게 놀 수 있겠어." 임아중은 조금 망설
신유리는 순간 당황했다. 스폰이라니?다른 사람들이 보는 그녀와 서준혁의 관계는 그러한 것이었다.하지만 스폰으로 이런 지경이 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자기 자신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눈을 고개를 숙였다.임아중은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자신이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짜증스러운 듯 이마를 두드렸다. "유리야, 별 의미 없는 말이었어. 그냥 없던 말로 생각해 줘. 내가 바보같이 아무 말이나 한 거야. 정말 미안해.”신유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아중도 진정하고 옆에 조용히 서서 휴대폰을 바라보았다.이신이 차를 몰고 온 뒤에야 임아중은 휴대폰을 내리고 뒷문을 열어 차에 탔다.뒷좌석에는 신유리의 상자가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이것을 보고 당황하여 물었다. "이신, 너 이사가?""내 꺼야." 신유리는 조수석에 올라탔다.임아중은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 맞다, 네가 이사 가지."그녀는 호텔에서 신유리를 만났을 때 신유리가 쫓겨났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임아중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이 생각을 말로 내뱉지 않았다.이신은 그들을 곧바로 별장으로 데려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허경천 일행이 마당에 바비큐용 화로를 설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화로는 아주 작아 차를 끓이는 데 사용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사람들에 의해 바비큐 그릴로 바뀌었다.곡연은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유리 언니, 빨리 와요. 금방 구워질 거예요!" 임아중은 진작에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성격이 활발했고 아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타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신은 신유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하면 먼저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신유리는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냈다."괜찮아. 경천 씨의 실력을 요리 실력을 봐야지." 신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떼고 바비큐장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곡연의 진실되고 밝은 모습을 좋아했다.신유리는 줄곧 친구가 없어서 그런 것 일수
신유리는 아주 푹 잤다. 다음날 일어났을 때는 겨우 7시쯤이었다. 곡연은 아직 곤히 자고 있었고, 신유리는 살며시 일어났다.그녀는 어제 병원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외할아버지가 걱정하지 않도록 병원에 가야만 했다.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거실에 사람이 없었다. 아마도 어젯밤 너무 늦게까지 논 탓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그녀는 마당에 나오자마자 이신이 등을 지고 통화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이신은 뒤를 돌아 신유리를 보았다. 막 통화를 마친 뒤 그는 신유리를 향해 다가와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신유리가 말했다. "외할아버지 뵈러 병원에 좀 가려고."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고객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너 데려다 줄게."신유리는 그에게 귀찮게 도와줄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신은 이미 차고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이신의 빌라는 규모가 아주 컸고 위치도 좋았다. 내부 인테리어를 보면 아직 사람이 살지 않은 새집처럼 보였다.신유리는 이신을 따라 차고로 가며 물었다. "설마 네가 성남에 돌아온 뒤에 이 별장을 산 건 아니겠지?"“아냐, 어머니가 사주 신 거야.” 이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원래는 집을 사준 뒤에 결혼을 시키려고 하셨어."“아주머니는 멀리 보시는구나.” 이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할 생각이 없는 듯하여 신유리도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하니 딱 8시였고 병원 입구에는 사람이 많았다. 차에서 내리기 전 신유리는 이신에게 말했다. "난 오후에 호텔로 차를 픽업하러 갈 거야. 성북까지 들러야 해서 늦게 돌아갈 거 같아."성북에 있는 예전 집은 당장 입주가 불가능했다. 어제 이신은 신유리와 이야기를 나눠 그녀를 이 별장에서 계속 살게 하였고, 이로써 금융 전시회 작업도 더욱 수월하게 하였다."조심히 다녀." 이신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으나, 신유리는 문득 이 대답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
신유리는 그녀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하성을 찾으려고 두리번 거렸지만 연회에 사람이 너무 많은 탓에 신유리가 주위를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송지음은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떠났다.그런데 갑자기 신유리가 물었다. "서준혁은 어디 있어?"송지음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번졌고, 그녀가 말했다. “유리 언니, 오빠를 찾으시는 거면 제가 대신 전해 드릴게요. 오빠가 지금 바빠서요.”신유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 선생님도 여기 오셨어?"송지음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고 침착한 척 신유리에게 물었다. "그건 왜 물어보세요?"송지음과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신유리는 휴대폰을 꺼내 서준혁에게 직접 전화해 하성이 왔냐고 물어보려했다.만약 그가 여기 있다면 그녀는 오늘 그를 꼭 만나야 한다.그러나 전화기를 꺼내자마자 뒤에서 하정숙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인이 준비한 국수가 정말 맛있어. 비서실의 직원들도 모두 나와 문 앞에서 귀빈분들을 맞이하고 있단다."송지음은 하정숙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그녀는 하정숙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하정숙이 자신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맞닥뜨리기 싫었다.조용히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최대한 얌전한 모습을 보였다.신유리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하정숙 뒤에 있는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오고 있던 사람은 하정숙과 하성이었고 서창범과 서준혁은 없었다.신유리는 주먹을 꽉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또박또박 말했다. "하 선생님, 저는 신유리입니다. 왕 선생님이 저에게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저희 외할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말씀드려도 될까요?"하성의 목소리는 감미로웠고, 진지한 표정으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호원 씨가 말한 환자분의 가족이십니까?"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
서준혁의 말에는 가시가 가득했다. 신유리는 그를 쳐다보며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끝내 입을 열었다.“내가 누구를 만나든 이제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담담한 말투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것 같았다. 서준혁은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말했다.“상관이 없다고?”“신유리, 넌 여기 할아버지 때문에 온 거지?”신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서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큰 키를 가진 서준혁이 신유리를 내려다보았는데, 모든 것이 가소롭다는듯한 눈빛과 태도였다.“그냥 그분은 성남에서 이틀만 머무를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그 사람이 누군지 서준혁은 말하지 않았지만, 신유리는 그제서야 하성이 서준혁의 삼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신유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성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그저 하정숙이 집안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도만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서준혁은 계속 집안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성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테지만 만약 서준혁이 같이 만나러 간다면 만나줄지도 몰랐다. 신유리는 순간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금세 표정관리를 했다. 신유리가 고개를 들고 서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무슨 조건이 있는데?”신유리는 서준혁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을 얘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준혁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깊은 눈동자에 신유리의 모습이 비쳤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무슨 소리야! 네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말을 마치고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유리도 따라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작은 그림자 하나가 옆으로 다가왔다.갑자기 나타난 송지음은 신유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고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언니, 방금 오빠가 하는 말 다 들었잖아요. 언니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한 것 같아 보이니 먼저 가시는 게 어때요?”하정숙의 비웃음을 받은 데다가 서준혁에게도 무시를 당하니 송지음은 지금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휴대폰은 그렇게 한참 동안 울리다가 자동으로 꺼졌다. 신유리는 휴대폰을 건네받고는 주방에서 나갔다. 그러자 임아중이 물었다.“유리야, 넌 국 안 마셔?”“난 됐어.”사실 신유리는 또 저녁을 안 먹었다. 이미 위가 불편했지만 전혀 입맛이 없었다.한편 성남 호텔에서는 화인 그룹의 모임이 막 끝난 상황이였다. 하정숙이 휴대폰을 들고는 차갑게 웃었다.“만족해?”맞은 켠에 앉은 서준혁은 아무런 표정 없이 차가운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어머니께서 만족하셨겠죠.”하정숙은 50이 넘은 나이였지만 관리를 잘한 탓에 아직도 젊어 보였다. 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서준혁을 바라보았다.“내가 네 엄마라는 걸 잊지 마. 내가 설마 그깟 집 한 채도 처리하지 못할 것 같아? 분명히 말했지만 걔는 우리 집안에 못 들어온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거라고 생각하지 마.”서준혁을 가리키면서 얘기하던 하정숙은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진짜 네 아빠 아들은 맞나 보네. 여자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어디서 그런 출신도 미천한 애를.”“하정숙!”서창범이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하정숙을 바라봤다.“그만해.”하지만 하정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다른 사람 앞에서는 제가 항상 봐주니까 잊은 거 같은데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 명심해요.”서준혁은 냉담한 표정으로 그 둘을 지켜보았다. 이런 상황은 이미 어릴 때부터 많이 겪어서 익숙했다. 하정숙과 서창범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화제로 계속 다투었고 감정이 점점 격해지자 하정숙이 서준혁을 가리키며 말했다.“당신 아들을 봐요. 당신이랑 똑같이 멍청하고 쓸모없지 않나요?!”서준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일어서서 격렬히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한번 훑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전 다른 사람이 제 물건에 손대는 게 싫을 뿐이에요.”기분이 안 좋으니 서준혁의 주위에 살얼음이 껴있는 것 같았다. 송지음은 그런 서준혁을 지켜보며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송지음은 일부러 연회가 끝
이신을 기다리고 있던 신유리는 왕호원이 인턴 2명과 함께 아래층으로 급히 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는 마음속으로 하성이 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신유리는 어제 왕호원은 하성과 찍은 사진들과 병원에 대한 각종 소식들을 인스타에 올렸던 것을 봤다. 권위 있는 전문가는 어디서에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고, 특히 신경내과와 뇌과 일부 수술에도 관련되어 있기에 왕호원은 오랫동안 하성을 존경해 왔었다.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왕호원은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돌리고는 신유리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세미나는 15분 후에 시작되니 허 교수님은 지금 아래층에서 쉬고 있을 거예요. 기회를 잡고 싶다면 한 번 가봐요.”멈칫하던 신유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왕호원은 원래의 표정을 되찾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그리고 한참후에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신유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병실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할아버지의 병세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다. 신유리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할아버지도 평생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매우 강인한 사람이었다.고개를 내린 신유리는 큰 다짐을 한 듯 회의실로 향했다.2층 회의실에서는 하성은 의사와 함께 환자 케이스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성의 휴대폰이 울렸다.업무가 중단되자 하성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전화를 끊으려던 그는 발신자를 확인한 후 인내심을 갖고 전화를 받았다.상대 뭐라 했는지 하성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그만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내가 이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이린히는 난감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사이를 봐서라도 도와줄 수 없어? 게다가 그 사람도 사람을 구하려고 그러는 것인데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당신의 친구가 누가 됐든 난 돕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 원칙이야.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먼저 끊을게.”하성은 차갑게 말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때 마침
병원 벤치에 앉아 있는 신유리는 낯빛이 말이 아니었다. 통화는 언제 끊겼는지 알 수 없었다.하성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가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호흡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누군가가 신유리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얼굴은 너무 차가웠고 무감각하게 뻗은 손에 물기가 만져졌다.울고있는 건가?신유리는 눈물로 젖은 손을 바라보았다.서준혁이 말한 것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그녀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할아버지를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신유리의 어깨가 축 늘어지고 귀에 걸렸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그때 갑자기 발자국소리가 가까워지고 익숙한 체취가 소독향에 섞여 신유리의 코를 자극했다.서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의 몸은 바로 경직되었다.“수술받고 싶어?”서준혁의 말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신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가에 아직 눈물이 걸려 있었다.그는 담담한 표정이었고 짙은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실려 있었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원해?”당황한 머릿속이 서서히 정리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서준혁에게 물었다.“조건이 뭐야?”서준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고운 눈에는 전에 있던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와도 같았다.눈을 가늘게 뜬 서준혁은 무심하게 말했다.“내가 왜 도우려고 하는지 스스로 잘 생각해 봐.”창백했던 신유리의 얼굴에는 아무런 반응이 안 보였다. 그저 서준혁을 응시 할 뿐이었다.눈썹을 치켜세우던 서준혁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야.”그의 손끝만큼은 몹시 다정했다.신유리의 턱을 잡고 있는 그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그의 힘에 이끌려 신유리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그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