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되지.”강지혁이 대답했다. 아이 한 명 늘어난다고 그에게 딱히 문제 될 건 없다.“근데 윤이가 정말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임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록 그 영화가 전체연령 관람가이긴 하지만 아이가 아직 너무 어리고 대부분의 소리와 언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그래도 영화를 보는 건 나름대로 새로운 체험이니 그때 가서 수어로 설명해주거나 옆에서 조금씩 도와주면 될 듯싶었다.임유진은 빨리 함께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윤이와 함께 영화 보는 장면이 너무 기대됐다.그녀는 수어로 아이에게 영화 보기 좋아하는지 물었고 아이는 머리를 내저으며 본 적이 없다고 했다.“그럼 이따가 이모랑 함께 영화 보러 갈래?”그녀는 물으면서 아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수어까지 결부했다.아이는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신나는 표정을 지었다.윤이는 영화라는 단어만 이해하고 있지만 내심 기대에 찬 모습이었다.그런 아이의 모습에 임유진은 살짝 유감스러웠다. 오늘 만약 윤이와 함께 만화영화를 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하지만... 만약 아이가 영화 보는 걸 좋아하면 다음에 또 함께 만화영화 보러 가면 된다.차는 극장으로 향했지만 정문에 세우지는 않았다. 정문 쪽에는 언론 매체들이 너무 많았고 그녀가 기자들의 주목을 받는 걸 아주 꺼린다는 것을 강지혁은 잘 아니까.게다가 강지혁 본인도 기자들이 매우 싫었다.옆문엔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강지혁의 차를 확인하자마자 공손하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강지혁과 임유진, 탁윤까지 나란히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내부에는 기자들이 딱히 없고 상영관에 축하 화환들과 시사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임유진은 그 사람들을 쭉 둘러봤는데 전부 눈에 익었고 스크린에서 자주 봐왔던 유명한 배우들이었다. 게다가 국내외 유명 감독들도 있었고 평상시 정재계 뉴스로만 봐왔던 유명인사들도 있었다.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고주원이 현재 인지도가 높긴 하나 이 정도까진 아닌데... 또한, 이번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업계
게다가 강지혁 옆에 있는 여자는 또 어떻게 된 거지?!이런 장소는 스캔들이 나기 가장 쉬운 장소였다. 임유진은 자신과 윤이를 향한 이상야릇한 눈빛을 쳐다보며 문득 사람들의 속내를 알 것 같았다.“저기... 이 사람들 뭔가 오해한 것 같아.”그녀가 나지막이 복화술로 강지혁에게 말했다.강지혁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오해? 무슨 오해?”그는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강지혁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걸까?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며 강지혁을 물끄러미 쳐다봤고 도화살 가득한 영롱한 그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맑아 보였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윤이가 우리 아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단 말이야!”“그럼 오해하라고 하지 뭐.”강지혁은 되레 담담하게 말했다.뭐라고?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해하게 놔두라니? 이게 말이 돼?“하지만...”“괜찮아. 문제 될 거 없어.”강지혁이 말을 이었다.“어차피 우리도 조만간 아이가 생길 거 아니야. 저 사람들 몇 년 일찍 오해하라고 하지 뭐. 아무 일 아니야.”“...”그의 대답을 들은 임유진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가자, 이만.”그는 탁윤의 다른 한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갔다.이 모습에 추측이 난무하던 사람들은 셋의 관계를 더 확신하는 것만 같았다. 두 남녀가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니 한 가족 말고 또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그렇지만 강지혁은 외부에 결혼 사실을 알린 적이 없는데 3, 4살 돼 보이는 아이까지 있다니?!설마 비밀결혼? 그것도 아니면 단지 애인일 뿐이라고? 이 아이는 그럼 사생아란 말인가? 문득 많은 사람들이 동정 어린 눈길로 임유진을 쳐다봤다.그렇지만 부러움에 휩싸인 눈빛이 절대다수였다. 아들까지 낳아줬는데 안방마님으로 등극할 수 없을까? 설사 강씨 일가에 발을 들이진 못한다 해도 평생 넉넉하게 살 순 있잖아!이 영화감독은 강지혁과 친분이 있다. 전에 시사회 초대장을 나눠줄 때 강지혁이 비서를 시
다만 소찬호 감독은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하죠. 고주원 씨도 이런 팬분이 있다는 걸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둘은 또 몇 마디 담소를 나누다가 소찬호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임유진도 의외이긴 마찬가지였다. 강지혁이 그녀를 위해 고주원과 만날 기회를 마련해주다니, 덕질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왜 그래?”그는 멍하니 넋 놓은 임유진에게 물었다.“고주원 씨랑 사진 찍고 사인받을 생각에 넋이 나갔어?”“기쁘긴 한데 그런 기쁜 마음이 아니라...”임유진은 말을 더듬거렸다. 기쁘긴 한데 고주원을 가까이에서 보고 사진도 찍고 사인받을 기회가 생겨서 기쁜 것보다 강지혁이 무심코 그녈 위해 신경 써준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그녀는 더이상 쓸모없는 년이 아니고, 귀찮게 한 명 더 늘어난 계집애가 아니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하찮은 인간이 아닌, 심지어 가족들에게 구박받는 재수 없는 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소중히 다루어지는 귀한 존재인 것만 같았다.“됐어, 어떤 기쁨이든 다 좋아. 누나 소원이라면 뭐든 다 이뤄줄게.”강지혁이 나지막이 말하며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조건은 단 하나, 누나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여야 해, 알겠지? 이건 영원히 변할 수 없어.”감미로운 목소리로 사람 마음을 홀릴 듯한 말들을 내뱉으며 애틋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데 이건 단지 그의 다짐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맹세도 원하고 있었다.임유진은 저도 몰래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그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강지혁이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과 소중히 다뤄진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고 있으니까.이 세상에 그녀를 보석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존재했다니, 이토록 깊이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니, 이 모든 걸 강지혁이 그녀에게 절실히 알려주고 있었다!강지혁은 흡족한 미소를 날렸고 둘 사이에 끼운 탁윤은 턱을 치키고 예쁜 눈동자로 둘을 쳐다봤다.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의아한 눈길로 쳐
이 광경을 본 임유진도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 아이가 너무 어려 이런 영화를 지루해할 줄 알았고,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상영관을 나가겠다고 떼쓰면 안고 나갈 생각까지 다 했는데 뜻밖의 경사였다!그녀도 드디어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이 영화는 캐릭터와 캐스팅 설정이 조화를 이루었고 CG 효과도 예뻤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단조로운 느낌은 안 들었다.고주원도 기존 이미지를 깨고 새로 이미지 변신한 셈인데 이건 또 다른 장르에 대한 도전이었다.임유진은 고주원의 연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영화 속 캐릭터를 아주 완벽하게 소화했다.심지어 하이라이트로 접어들 땐 그녀도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눈물이 흘러내린 순간 임유진은 제 모습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잘 우는 편이 아니다. 전에 영화 볼 때 옆에서 아무리 대성통곡을 해도 그녀는 딱히 울지 않는다.영화 내용이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그랬던 그녀가 이 영화의 감정선에 흠뻑 도취해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영화 속 캐릭터가 그녀와 너무 닮아서 제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흐느낀 듯싶다.평범하던 데로부터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갔지만 상상했던 진정한 완벽함을 이루지 못한 채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떨어졌다. 그 뒤로 또다시 본인 노력으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가 밝은 미래를 맞이했다.영화에서 익살스럽게 이 과정을 연출했지만 그 속에 담긴 아픔은 임유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그 고통을...그녀가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으려 할 때 강지혁이 선뜻 손 내밀어 그녀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왜 울어?”“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라.”임유진이 코를 훌쩍거리며 대답했다.“이렇게 우는 거 보니까 괜히 데려왔나 싶어.”강지혁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울면 강지혁도 속상하니까.영화가 감동돼서 그렇다 해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을 울게 하고 싶지 않았다.“영화가 재미있으니까 우는 거지. 웃기
될 수 있다면 그녀가 평생 슬퍼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강지혁은 그녀 얼굴에 묻은 눈물에 조금씩 입 맞췄고 임유진은 온몸이 굳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강지혁이 입 맞췄던 곳은 뜨겁게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영화가 다 끝난 후 임유진은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영화의 80퍼센트는 재미있게 잘 봤는데 뒷부분 20퍼센트는 강지혁의 키스 때문에 도저히 집중해서 볼 수가 없었다.그저 엔딩 장면만 머릿속에 남았지만 윤이는 달랐다. 영화가 다 끝난 후에도 아이는 흥이 채 가시지 않는지 계속 나쁜 놈을 때리고 싶어 했다.임유진은 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데려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이렇게 재미있게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윤이 이따가 이모랑 함께 영화배우들 보러 갈래? 아까 나쁜 놈 때렸던 주인공 말이야.”임유진은 아이에게 물으며 수어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네.”윤이는 어쩌다가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임유진은 너무 기뻤다. 윤이은 앞으로 할 줄 아는 말이 점점 더 많아질 테고 머지않아 보통 아이들처럼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겠지.그녀는 아이와 함께 강지혁 따라 스텝들의 안내를 받으며 배우 대기실로 향했다.대기실이라기보단 엄청 큰 룸에 가까웠고 고주원을 비롯한 몇몇 주연 배우들이 휴식하는 중이었다.감독이 미리 고주원에게 말했던 터라 그는 강지혁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함께 사진 찍고 사인하는 걸 알고 있었다.애초에 고주원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S 시에서 명성이 자자한 강지혁 대표님이 여자친구가 있다고? 게다가 여자친구분이 자기 팬이었다니?! 그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강지혁 같은 인물은 고주원이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 유명인사인데 지금 팬 덕분에 가까이에서 보게 된 셈이다.“강지혁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고주원이에요.”고주원이 앞으로 걸어가며 활짝 웃더니 임유진에게 시선을 돌렸다.“감독님께 전해 들었어요. 제 팬이시라고요? 영광입니다. 만나서 반가
연예계에 예쁜 사람은 널렸다.얼굴이 좀 예쁘다 하는 여자들은 심지어 포즈까지 취하며 강지혁의 시선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눈길은 임유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한편 고주원은 윤이와도 몇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포토 타임이 끝나자 윤이가 임유진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쉬아... 쉬아..."임유진은 윤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독 화장실이 없었을뿐더러 매 층 제일 끝에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었다.그녀가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하려 하자 강지혁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야 해서 불편할 거야. 스태프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강지혁은 옆에 서 있는 스태프 한 명에게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갈 것을 요구했다.임유진은 윤이를 향해 말과 함께 수어도 같이 쓰며 스태프 아저씨를 따라가면 된다고 전했고 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수어로 얘기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윤이가 평범한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고 인공와우를 착용하고 있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탁유미가 인공와우인 걸 티나지 않게 예쁘게 꾸몄던 터라 아마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아이들이 달고 다니는 액세서리 같은 건 줄 알았을 것이다.한편, 두 사람의 모습에 아까 강지혁의 주의를 끌려고 했던 여배우들은 안타까운 눈길로 임유진을 바라봤다. 강지혁의 사생아를 낳아주면 뭐할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인 이상 강씨 일가의 재산을 물려받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스태프는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아까 그 스태프가 다급하게 혼자 달려왔다."윤이는요?"임유진이 물었다."죄... 죄송합니다. 그게 실은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아까 아이를 화장실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걸려와서 잠깐 10초 정도 통화를 했는데... 전화를 끊고 보니 아이가 사라졌어요..."스태프는 당황한 표정으로 횡설수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이가 강지혁의 사생아라면 그는 엄청난 실수를
순간 임유진의 머릿속으로 유괴 아동 뉴스와 잔혹하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기사가 스쳐 지나갔다.만약 윤이가 정말 유괴라도 당한 거면 그녀는 아마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이미 제정신이 아닌 그녀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한시라도 빨리 윤이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만 앞섰다.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당기더니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급해 하지 마."임유진은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그제야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어떡해, 윤이가 없어!"그녀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고 목소리도 울먹거렸다."다 내 탓이야. 내가 윤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야 했는데...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윤이 손을 놓지 않았을 텐데...""아니야. 내 탓이야."강지혁이 말했다."스태프에게 윤이를 보낸 건 나잖아. 하지만 걱정하지마. 내가 지금 당장 이 건물을 봉쇄하고 사람들을 풀어서 윤이를 찾아볼게.""하... 하지만 만약 유괴범이 데려간 거면 어떡해? 이미 윤이를 데리고 이 건물을 빠져나갔을지도 모르잖아."임유진은 지금 머릿속으로 최악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그럼 S 시 전체를 봉쇄할게."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10분 안에 S 시를 봉쇄할 거야. 아무리 대단한 유괴범이라도 10분 안에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는 없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낼게."임유진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도시를 봉쇄하겠다니?!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10분 안에 도시 전체를 봉쇄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그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아무리 말이 안 돼 보여도 결국에는 가능한 일이 된다."나 믿어. 내가 S 시를 뒤집어 엎어서라도 찾아올게."강지혁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유는 임유진이 혹시나 죄책감을 가질까 봐서였다. 만약 윤이를 정말 찾지 못하게 되면 그녀는 분명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강지혁이 핸드폰을 꺼내 막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도시를 봉쇄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어딘가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임유진은 윤이가 침묵하자 한 번 더 차근차근 수어로 물었다. 그러자 윤이는 손바닥 위에 있는 인공와우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면 귀에 꽂는 부분을 말이다.윤이의 인공와우가 떨어졌었나?임유진은 수어로 윤이와 한차례 대화를 나눈 후 드디어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아까 화장실에서 나오고 다시 돌아가는 길, 스태프가 통화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윤이는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자신의 인공와우를 찾고 있었다.그때 이경빈을 만나게 됐다. 상대는 수어를 할 줄 몰랐지만 똑똑한 윤이가 세면대에 있는 물을 손가락에 적셔 벽에 사람을 찾고 있다는 등 의사 표현을 열심히 한 덕에 이경빈은 그를 데리고 인공와우를 찾은 후 화장실에서 나왔고 그렇게 임유진을 만나게 된 것이다.임유진은 사건의 경과를 전해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착한 사람과 우연히 만나게 돼서 너무 다행이었다. 만약 나쁜 사람을 만났으면 정말 끔찍한 결말을 마주할 뻔했다.그녀는 생각을 마친 후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윤이 옆에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우리 아이 찾아줘서 너무 고맙습니..."임유진은 남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뭔가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뚫어지게 그를 쳐다봤다."왜요? 혹시 저 알아요?"이경빈은 눈앞에 여자를 향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자신을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은 그를 알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야 이 남자는 윤이의 아빠이니까! 부자가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아직 서로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임유진은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알죠."그때 강지혁이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는 임유진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웃었다."이경빈 대표님이시죠.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강지혁입니다.""GH 그룹 강지혁 씨요?"이경빈이 물었다."네."강지혁이 답했다."이거 참 우연이네요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