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그 말이 너무 역겨웠다.“그럼 그냥 내 동생에게 말하면 되잖아. 나랑 상관없는 일인데, 일해야 되니까 길 좀 비켜줘.”인애가 화를 내며 말했다.“네가 아니라면 소민준이 세령이에게 프로포즈하려고 올린 광고가 왜 내리게 되겠어? 네가 강지혁의 약혼녀를 죽였으니 강지혁이 소 씨 가문에게 칼을 겨누는 거잖아. 하지만 넌 팔자 좋게 여기에서 마음 편하게 청소를 하고 있잖아.”유진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지혁이 한 일이라는 걸 생각지도 못했다.강지혁……지난번 그녀가 신정민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강지혁 때문이다.강지혁은 S시의 신과도 같다. 그는 거대한 GH그룹을 장악하고 있으며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릴 수 없고 그의 한마디는 마치 S시의 성지와 같다.그리고 그녀와 강지혁은 정말 많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애초에 민준이 급히 유진이와 헤어졌을 때 S시에서 감히 그녀의 변호사가 되줄 사람이 없었고, 온갖 고통을 겪은 그녀에 대한 감옥 교도관의 내혹한 태도마저, 모두가 강지혁 때문인가?유진이가 교통사고에서 죽인 사람이 바로 강지혁의 약혼녀였기 때문이다.심지어 한번은 감옥에서 유진이는 차가운 물에 머리를 눌려 질식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그녀가 감옥에서 이와 같은 괴롭힘을 당한 것도 강 씨 가문의 지시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 씨 가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그녀를 더 열심히 밟고 괴롭혔다.유진은 인애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바닥을 쓸었다.인애가 너무 화 나 유진이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세령이 인애를 막았다.“세령아, 임유진은 너무 뻔뻔해. 내가 제대로 혼내 주야겠어.”인애가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세령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 반지 하나가 없어졌어. 이곳에 떨어졌는데 누가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나봐. 환경미화원더러 좀 찾아줘라고 해야겠어.”인애는 흠칫 놀라더니 재빨리 알아듣고 웃으며 말했다.“맞아. 잘 찾아줘야지. 네 반지는 엄청 비싸잖아. 이곳 쓰레기를 하나하나 다 뒤져봐야겠어.”인애는 말을 하며 임유진
“네? 차에 간다고요?”팀장은 깜짝 놀랐다. 2천만 원이 넘는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그녀는 같이 찾을 생각조차 안 했다.“세령이는 잘나가는 연예인인데 당신들이 반지를 찾는 걸 서서 기다리겠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팬들에게 둘러싸일 거예요.”박인애가 말하자 팀장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세령의 차는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차에 앉아 있다해도 쉬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유진이의 초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쟤는 쓰레기를 뒤지는 거랑 어울려.”인애는 악독하게 웃었다.“방금 그렇게 잘난 척해도 지금 쓰레기 더미에 있잖아.”세령이 담담하게 말했다.“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가자.”지금 유진의 모습은 아무런 위협도 없는 것 같았다.비록 민준이 그녀를 사랑했지만 결국 민준한테서 버리게 되었다.유진은 감옥에 있을 때 열 손가락이 끊임없이 피가 흘렀고, 손가락의 뼈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억울한 누명을 썼고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했다!하여 세령은 그녀가 너무 미웠다.왜 그녀는 이런 고통을 겪고도 이와 같이 버티는 것일까!정말 무죄라고 견지한다면 무죄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법에는 증거 뿐이다!“맞다! 기념이라도 남겨야지.”인애는 말을 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유진이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을 찍었다.이 일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정상 퇴근은 불가능이었다. 게다가 미옥조차도 그 있지는도 모르는 반지를 찾아야 했다.유진은 고무장갑을 벗고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혁아, 나야. 오늘 일이 좀 있어 늦게 끝날 거 같아. 저녁은 자기절로 먹고. 날 기다릴 필요는 없어.”전화 저쪽에서 청아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그냥……음, 회사 일 때문에. 아무튼 날 안 기다려도 돼.”유진은 말하면서 팀장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재빨리 전화를 끝고 장갑을 껴서 쓰레기 더미를 뒤적였다.GH그룹 대표 사무실.지혁이 이준에게 분부했다.“임유진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봐.”이준은 대답하고서 곧바로 대표실을
세령과 인애는 차안에서 유진이가 쓰레기를 뒤지는 모습을 실컷 보았으니 이만 운전을 하고 떠나려 했다.그때 박인애가 말했다.“언제까지 찾게 할 생각이야?”진세령은 무심코 말했다.“내가 자기 전까지 찾게 하지. 때가 되면 소장에게 연락해 반지를 못 찾았으면 그만두라고 하면 돼. 그냥 내가 재수 없었다고 말하면 돼.”“하하, 정말 봐준 셈이야.”인애가 말했다.“소민준이 지금의 임유진을 보았다면 역겨워 토할 거야. 임유진이 어떻게 소민준과 어울리겠어. 너 같은 영애야말로 어울리지.”빨간색 마세라티가 막 시동을 걸자 갑자기 경찰차 몇 대가 오더니 마세라티는 순간 경찰차에 의해 둘러싸게 되었다.바로 그때 경찰이 차에서 내려 마세라티의 창문을 두드렸다.세령이 창문을 내리자 경찰이 말했다.“이곳에 2천만 원짜리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신고를 받았어요. 입건하여 수사를 해야 해요. 반지를 잃어버린 거예요, 도둑맞은 거예요?”“입건이라고요?”세령과 인애는 어리둥절했다.“우리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요!”인애가 소리쳤다.하지만 상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2천만 원 이상의 가치는 이미 중대한 사건에 속해요. 두 분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세요. 저희도 두 분이 한시라도 빨리 반지를 되찾는 것을 돕는 거예요.”하지만……애초에 반지를 잃어버리지 않았다.그때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더니 세령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더 이상 반지를 찾을 생각 없어요. 못 찾아도 괜찮아요.”“만약 절도 사건이라면 입건 수사에 충족한 금액이니 입건하여 수사해야 합니다. 두 분은 차에서 내려 반지를 잃어버린 구체적인 장소가 어디인지 확인해 주세요.”사건 담당자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여 세령과 인애는 따뜻한 차에서 내려 찬바람을 맞으며 이전에 그들과 유진이 대화하던 곳에 왔다. 다만 지금 이곳은 이미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원래 쓰레기통에 있던 쓰레기들이 반지를 찾기 편하게 모두 바닥에 널브러졌다. 쓰레기의 비린 내가 끊임없이 풍겨왔다. 화려한 모습의 세령과 인애가 쓰레기
세령은 비록 마음속으로 그녀가 확실히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 이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특히 주변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 촬영하는 것을 보자 세령은 더욱 화가 났지만 겉으로는 매너를 유지해야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환경위생과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오자 경찰이 파견한 사람들과 함께 반지를 찾고 있었다.그리하여 추운 날, 세령과 인애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구경당하면서 경찰의 검문을 받고 그 쓰레기 무더기의 옆에 서서 이따금 악취를 맡았다.반지는 당연히 찾지 못했다. 경찰이 드디어 세령과 인애를 풀어주었을 때 두 사람은 하마터면 이 쓰레기 냄새 때문에 토할 뻔했다.“세령아, 어떻게 해. 이 일이 커져서 형사사건으로 됐어.”차 안으로 돌아오자 인애가 불안해하며 말했다.“도대체 누가 신고한 거야, 경찰까지 왔어.”“나중에 지인에게 말해서 사건을 흐지부지하게 만들면 돼.”진세령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사건보다 자신의 이미지에 더 신경을 썼다. 자신은 인기 스타라 평소 셀카조차 고급 장소에서 찍는데 지금은 쓰레기 더미 옆에 있다.그리고 옆에 많은 사람들이 현장 사진을 찍고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핫이슈가 될 것 같았다. 세령은 얼른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관련 뉴스를 내려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한편 유진의 몸에는 온통 쓰레기 냄새일 뿐이다. 손을 몇 번이나 씻어도 쓰레기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고 작업복을 벗고 자신의 외투를 입었지만 그 고약한 냄새가 났다.“부자들은 정말 너무해. 자기 실수로 반지가 잃어버렸는대 왜 우리를 시켜. 그렇게 비싼 반지르는 잘 간수하지도 않고.”미옥이가 불평해 했다.유진이 그녀를 몇 마디 위로하고서 자신의 가방을 들고 회사를 떠났다.진세령 때문에 평소보다 집에 더 늦게 돌아갔다. 길가의 가로등은 이미 켜져있고 찬바람이 그녀의 얼굴에 불어와 한기와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오늘 유진은 다시 한 번 그전과의 차이를 느꼈다. 세령이 반지를 찾으라고 요구했을 때 그녀
지혁은 품속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목에 기대었다.그는 자연히 그녀가 말하는 냄새를 알게 되었다.오늘 세령 때문에 오랫동안 쓰레기를 뒤졌다. 하지만…….“누나의 몸에서 냄새가 나도 나를 피할 필요 없어.”“하지만…….”유진은 자신의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지혁의 포옹 때문인지 어색했다.“우리가 서로 의지하는 이상 피할 게 뭐가 있어? 언젠간 내 몸에서 냄새가 나면 누나도 일부러 날 피할 거야?”지혁이 반문했다.그러자 유진은 잠시 침묵한 뒤 한숨을 쉬었다.“알았어. 다음부터 그러지 않을게.”지혁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더니 그제야 유진의 손을 잡고 좁은 임대주택으로 돌아갔다.지혁은 미리 음식을 차렸다. 비록 음식은 이미 식었지만 유진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오늘 무슨 일 있었어?”지혁이 물었다.유진은 망설이다가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오늘 일이 사건으로 되었으니 그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지혁은 인터넷에서 알게 될 것이다.그때 지혁은 조용히 유진의 얘기를 듣더니 말했다.“화나지 않아?”유진는 어쩔 수 없는 듯 웃었다.“화날 것도 없어.”“정말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트집을 잡으려고 한 것이잖아. 아니야? 왜 누나는 화나지 않아?”“화가 나도 소용없어.”유진이 말했다.“너 강지혁이라는 사람을 알아?”그는 흠칫 놀라며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그는 S시의 신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해.”그녀가 말을 이었다.“감옥살이를 할 때 내가 교통사고를 내서 그의 약혼녀를 죽게 했다고 판결났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감옥에서 날 괴롭혔어. 만약 모든 일에 화를 낸다면 난 화병 때문에 죽은지 오래전일 거야. 그러니까 그냥 무시하면 돼.”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지혁의 마음은 너무 아팠다.유진의 짧은 한 마디에 지혁는 그녀가 감옥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유진이 말했 듯이 지혁의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정말
어떤 아픔을 겪어야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이토록 덤덤할까?“앞으로 누가 누나를 다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혁은 마치 맹세하는 것처럼 말했다.그러자 유진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해했다.“자꾸 그런 말을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유진는 말을 하며 집중하여 음식을 계속 먹었다.한편 지혁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이와 동시에 일이 커졌지만 세령은 회사 쪽에서 이 실검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인터넷에는 그녀가 반지를 잃어버려 환경미화원이 그녀를 도와 쓰레기통을 뒤졌다는 기사가 퍼져 있다.특히 세령이 화려한 옷을 입고 쓰레기 더미 옆에 서 있고 옆에는 허리를 굽혀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환경미화원이 있는 사진을 넣었다.이런 대비는 즉시 적지 않은 사람들의 불만을 이끌었고 모두들 그녀의 품성에 문제가 있고 갑질을 한다고 질책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본인이 반지를 잃어버렸는데 왜 환경미화원이 찾아야 하나요? 환경미화원들은 하루 종일 힘들게 도로 청소를 하는 것도 모자라 반지까지 찾아줘야 해요? 왜 혼자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고?”“스타가 되면 남보다 더 대단해요?”“왜 도시의 자원을 사용하는 거죠? 진세령이 환경미화원의 임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반지를 찾아주는 거예요?”비록 세령의 팬들이 열심히 그녀의 편을 들지만 이런 부정적인 댓글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당시 현장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수많은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왜 실검도 막지 못해?”악플이 많아질수록 세령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방법이 없어. 어쩐 일인지 대형 잡지사에서 관련된 내용을 내려주지 않아.”그때 매니저가 멈칫하더니 머뭇거리는 듯 말문을 열었다.“세령아, 혹시 너 누구의 미움을 산거야?”“내가 누구의 미움을 사겠어.”S시에서 진 씨 가문의 신분에 게다가 소 씨 가문의 예비 며느리인 진세령이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미움을 살까
심지어 적지 않은 팬들은 탈덕하겠다고 하면서 세령을 미워하겠다고 한다.또 일부 세령의 충실한 팬들은 어느 부분에서 잘못된 게 아니냐면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믿기 힘든 것은 세령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경찰이 수사보고서를 제출했고 그녀는 다른 네티즌들과 동시에 알았다.세령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설마 몇 년 동안의 그녀의 노력과 커리어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인가?그러나 더 참혹한 것은 뒤에 있다. GH그룹 강지혁의 개인 비서 이준이 소 씨 가문, 진 씨 가문에게 연락하여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세령은 현재의 부정적인 뉴스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유진은 경찰의 수사 보고서를 본 후 오히려 좀 놀랐다. 수사 보고서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이 이 기사를 내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는 추세이다.“진세령, 정말 너무 나쁜 사람이네. 그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반지를 찾아달라고 했으면서 결국 잃어버리지도 않은 거잖아.”환경위생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의론이 분분했다.“인터넷에 진세령을 욕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게 당연해.”“하지만 이상해. 톱스타가 왜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우리한테 찾으라고 해?”한 직원이 의문을 제기했다.“심심해서 그런 거겠지.”그때 미옥이 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그날 진세령이 유진 씨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잖아. 혹시 아는 사이야?”그때 지나가던 방현주가 조롱하는 어투로 말했다.“서미옥,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임유진이 어떻게 진세령과 아는 사이겠어. 진세령은 부잣집 영애잖아.”“하지만 그날 진세령과 유진 씨가 얘기 나누는 걸 봤어.”“설마 임유진이 진세령의 미움을 사 톱스타가 일부러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한 거 아니야?”방현주는 주범을 찾은 것처럼 말했다.“임유진, 너 때문에 우리가 쓰레기통을 뒤진 거네.”동현이 임유진을 좋아하기에 현주는 유진을 겨냥했다. 미옥은 현주가 이
“아빠도 언니 많이 보고싶죠.”세령이 말했다.“그날 임유진을 만났는데 가소롭게도 임유진은 그 어떤 죄책감도 없었어요.”“이제 그만. 그 여자 말을 꺼내지 마.”진기태가 말했다.말하는 사이에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강지혁이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저 만나러 왔나요? 무슨 일인가요?”지혁이 담담하게 물으면서 두 사람을 힐끗 보았다.지혁의 차가운 눈빛에 세령은 순간 오싹한 기운이 들었다.그 당시 언니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세령은 아직도 언니 애령이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말한 것이 기억난다.“세령아, 난 한평생 강지혁 같은 남자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는 아주 차갑고 이성적이야. 그를 안아도 그의 온도를 느낄 수 없어. 그는 아주 정교한 도자기 같고 그의 껍데기를 가진다해도 그의 속내는 알 수 없을 거야.”그렇다. 세령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매번 지혁을 만날 때마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지혁은 준수한 얼굴에 뒤에 GH그룹까지 있기에 이 도시에서 종횡무진할 수 있지만 세령은 단 한 번도 그와 엮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이 남자는 너무 무섭고 차갑다.비록 언니가 그 당시 지혁을 죽도록 사랑해 지혁이 결혼을 승낙했지만 세령은 지혁이 언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언니의 장례식에서 지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고 심지어 조금의 슬픔도 없었다.“지혁아, 세령이 철이 없어서 이런 영향이 안 좋은 사고를 쳤어. 내가 이미 잘 타일렀으니 세령이와 소민준의 약혼식에 참석했으면 좋겠어. 세령이는 애령의 유일한 동생이야. 애령이도 네가 약혼식에 참석하길 바랄 거야.”진기태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지혁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진기태를 바라보았다. 진기태는 여러 해 동안 백화점을 운영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사위에게 기세가 눌린 채 자신의 생각이 이미 상대에게 들킨 것 같았다.“네. 철이 없긴 했어요.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한 거는 말할 것도 없고 그깟 반지
“강지혁, 너...!”강현수가 뭐라 말하려는데 이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지혁아, 신경 쓰지 마. 현수 이놈이 아까 술을 좀 많이 마셔서 헛소리하는 것뿐이야.”이한은 말을 마친 후 얼른 강현수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잡아당겼다.하지만 그의 손에 끌려갈 강현수가 아니었다.“놔. 강지혁한테 확실하게 물어야 할 게 있으니까.”“현수야. 너 오랜만에 돌아온 거잖아. 안 그래도 너랑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지금 갈까? 기왕이면 다른 애들도 부르자, 어때?”이한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며 강현수를 설득했다.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한아, 현수 놔줘. 나 때문에 일부러 왔다는데 궁금한 거 다 해결하게 하고 보내야지 않겠어?”이한은 그 말에 속으로 제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빌며 강현수의 손을 놓아주었다.강현수는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지혁을 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강지혁이 맞나 싶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강현수는 지난 5년간 일부러 더 강지혁과 만나는 것을 피했고 그에게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임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강지혁과 만나면 더 고통스러워질 게 뻔했으니까.“유진이를 아직도 사랑해?”강현수가 물었다.“아니. 안 사랑해.”시원하고도 명쾌한 대답이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대답 들었으니 이제 만족해?”강현수는 그의 대답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지혁의 두 눈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니까.정말 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강현수는 좀처럼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지혁한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강지혁이 파티장에서 나오자 고이준이 예를 갖춰 차량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이준은 오늘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강
이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되도록 강지혁 앞에서 유진 씨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 유진 씨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 입에서 유진 씨 이름이 나오는 걸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강지혁이 정말 유진이를 잊었다고...?”강현수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그럼 뭐 이미 죽은 사람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까? 현수야, 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잖아. 물론 강지혁의 아들까지 낳은 여자는 흔하지 하지만...”이한은 강지혁의 아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는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런지 머리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또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실제로 이한은 강지혁의 아들과 한번 만났다가 뼈도 못 추리고 벙찐 얼굴로 5살짜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그리고 그날 그는 그 꼬맹이가 제 아들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으면 아마 평생을 아들에게 잔뜩 눌린 채로 살았을 테니까.강지혁의 아들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이한의 말에 표정이 점점 급격히 어두워졌다.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라고?그 여자 때문에 강지혁은 하마터면 미친놈이 될 뻔했는데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자를 고작 5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고?강현수는 와인을 한입에 마셔버리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고 강지혁 쪽으로 걸어갔다.“야, 현수야!”이한이 뒤에서 강현수를 불렀다.‘저 녀석 설마 지혁이 앞에서 유진 씨 얘기를 꺼낼 생각인가? 설마... 저 녀석이야말로 아직도 유진 씨를 잊지 못한 거 아니야?!’이한은 즐거운 파티장에서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괜한 소란이 일으킬까 봐 얼른 강현수의 뒤를 따라갔다.실제로 두 사람은 임유진 때문에 하마터면 치고받고 싸울 뻔하기도 했으니까.강현수가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서자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얼
강지혁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또 이렇게 마치 임유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울분과 속상함을 잔뜩 털어놓았다.그런 그를 보며 강현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을 결국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 강현수는 해외 시장을 넓히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며 S 시를 떠났다. 사실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당시 S 시에 있는 게 숨이 막히고 또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하지만 해외로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그는 당시 질투 때문에 그녀를 모른 척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지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약 그때 차에서 내려 그녀의 사정을 들어줬으면 그녀가 강지혁과 결혼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차라리 그때 임유진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아무리 강지혁을 사랑한다며 버텨도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임유진은 꽤 오랜 시간 그를 미워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세상과 완전히 작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강현수가 시선을 내리며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던 그때 익숙한 누군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강현수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다름 아닌 그와 강지혁의 오랜 친구인 이한이었다.이한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언제 돌아온 거야?”“며칠 전에.”강현수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돌아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오늘 파티에 참석 안 했으면 너 왔는지도 몰랐을 거 아니야.”이한이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이제 알았잖아.”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강지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딸을 하나 입양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리고 그 딸의 친모랑 꽤 사이가 가깝다지?”강현수는 줄곧 해외에만 있었지만 강지혁의 소식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그래서 강지혁이 2년 전에 웬 여자아이를 한 명 입양하고 그 아이의 엄
모든 건 다 강문철의 시나리오대로였다. 딱 한 가지, 임유진이 정말 강지혁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빼고 말이다.물론 임유진이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정말 그런 선택을 했을 때를 대비해 미리 대책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유진의 목숨을 살려주라는 것까지만 얘기했을 뿐 그 뒤의 일은 김재호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그래서 김재호는 어쩔 수 없이 지금부터는 자기가 직접 이후의 일을 설계해야만 했다. 물론 그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그조차도 모르지만 말이다.강문철은 강지혁에게 약점이 없기를 바랐다. 그래서 제일 큰 약점이자 유일한 약점이 임유진을 처리해버렸다. 그러나 결국 강문철은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강지혁에게도 졌고 임유진에게도 졌다.‘만약 회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시지는 않았을까?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정말 맞는 일일까?’김재호는 속으로 되뇌다 쓰러진 강지혁을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강지혁만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속삭였다.“만약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 언젠가 다시 대표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겠죠. 하지만 만약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저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는 뜻이겠죠.”...5년 후.화려한 파티장 안은 늘 그렇듯 S 시의 부잣집 자제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눈에 띄는 건 단연코 GH 그룹의 회장인 강지혁이었다.이제 고작 34세밖에 안 된 나이로 회장직에 오르게 된 그였지만 그는 강문철이 세상을 떠난 후 5년간 완벽하게 회사를 운영해 나가며 진정으로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는 아들과 양녀가 각각 한 명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자들은 늘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며 틈틈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노렸다.그리고 오늘도 역시 여자들은 파티라는 훌륭한 교류 장소를 빌려 그와 거리를 좁혀가며 강지혁과 인사를 나눌 때 은근히 눈빛을 던졌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감정이라고는 없
고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골함이라니... 설마...!’그는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강지혁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지혁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김재호의 손에 든 유골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유진이는...?”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바로 앞에 계시잖아요.”김재호가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물었다.“유진이는 어디 있냐고!”그러자 김재호가 피식 웃었다.“대표님,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임산부였던 몸으로 정말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아이 하나 남긴 것도 천운이었습니다.”강지혁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흥분하며 김재호를 향해 달려들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행동을 예상한 건지 김재호가 유골함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유골함이 산산조각이 나고 안에 담긴 임유진 씨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도 괜찮으시면 얼마든지 주먹을 휘두르세요.”그 말에 강지혁의 주먹이 멈췄다.그는 이를 꽉 깨물며 김재호를 노려보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유골함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유골함이 부서질 듯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유골이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당시 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들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순간인 줄 알았는데 임유진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드니 그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의 화사했던 미소와 그녀의 달콤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이렇게도 생생한데 이제는 두 번 그녀를 다시 만날 수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혁아, 사랑해.”“혁아, 나는 너랑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있는 행복한 가정을 꼭 이루고야 말 거야.”“혁아, 널 용서할게.”“널 용서하기로 한 거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잘 살아.”진지했던 얼굴, 행복해하며 웃던 얼굴, 조금은 힘들게 미소짓
“누가 대문 바로 앞에 아이를 두고 갔다고 경호 실장님이 얘기해줬어요. CCTV를 돌려보니 김재호 비서더라고요.”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도련님, 이 아이... 도련님 어릴 때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집사는 갓난아기 시절의 강지혁을 본 적이 있다.당시 강선우는 울고 있는 강지혁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 강씨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랑스러운 손주를 봐서 강문철이 자신의 아내를 받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하지만 강문철은 강지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강선우까지 필요 없다며 아주 단호하게 두 사람을 내쳤다.“이 집 문턱을 넘고 싶으면 그 여자를 버리고 와!”그렇게 강선우는 어쩔 수 없이 아기였던 강지혁을 데리고 다시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집사는 그때 강선우의 품속에서 목 놓아 울던 아이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기에 경호 실장에게서 아이를 전해 받은 후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강지혁은 굳어버린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서서히 크게 뜨며 마치 신기한 것을 본 듯 말했다.“나와... 닮았다고?”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있었다.“네, 가까이에 와서 한번 봐보세요.”집사의 말에 강지혁은 몸을 살짝 휘청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고이준은 집사와 그의 품에 안긴 아이 덕에 간신히 다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집사의 품에 안긴 아이는 여전히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얼굴이 핑크색이다 못해 이제는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설마... 유진이가 낳은 아이인 건가? 하지만... 그러면 아이가 세 명이어야 하는데? 왜 한 명이지? 그리고... 유진이는 어디 있지? 왜 아이만 있는 거지?’강지혁의 머릿속은 지금 질문으로 혼란스럽게 휘몰아쳤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들은 후 다급하게 강지혁을 불렀다.“대표님, 김재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표님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답니다!”강지혁은 그 말에 발걸음
강씨 저택.고이준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강지혁이 있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방안을 들여다보니 S 시의 꼭대기에 군림해있는 남자가 임유진의 옷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에는 임유진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최근에 찍은 사진까지 한가득 널려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항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대표님...”고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미팅에 이제는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결재해주셔야 할 서류들도 있고요. 이대로 계속 손을 놓고 계시다가는...”“유진이 소식은 아직이야?”잔뜩 잠긴 목소리가 고이준의 말을 끊었다. 다만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는 상태였다.마치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순간을 계속해서 느끼려는 사람처럼, 마치 지금 눈을 떠버리면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완전히 빼앗겨버릴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네,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임유진을 찾아 헤맨지도 벌써 40일이나 지났다. 긴 시간에 지친 수색대원들은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다며 이 이상 수색해봤자 아무런 가망도 없다고 했다.하지만 고이준은 그 말을 강지혁에게 전할 수 없었다. 전하면 강지혁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유진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얘기 좀 해줘, 응? 제발...”강지혁이 품에 있는 옷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완전히 옷에 파묻었다.“나한테 잘살라고 했지? 그런데 유진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 네가 없는데...”“대표님,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사모님께서 하늘에서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시면 과연 좋아할까요? 오히려 속상하지 않겠습니까?”보다 못한 고이준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하지만 그는 말을 내뱉자마자 1초도 안 돼 바로 후회했다. 굳게 닫혀있던 강지혁의 눈이 번쩍 떠지며 그를 아주 무섭게 노려봤기
“아니, 안 죽었어.”윤이의 질문에 대답한 건 탁유미가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은 윤이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유진이 이모는 분명히 살아 있을 거야.”윤이는 아직 이경빈을 용서하지 못한 것인지 그가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탁유미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지켰다.아이는 탁유미가 이경빈으로 인해 험하게 다뤄지는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이경빈은 고작 4살짜리 아이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걸 보며 괜히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다정했던 윤이를, 언제나 선망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윤이를 가차 없이 버린 건 바로 이경빈 본인이었으니까.그가 멍청하게 행동한 탓에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던 아이와의 정도 이제는 완전히 잡을 수 없게 되었다.“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엄마한테 상처 줄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테니까...”이경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그도 알고 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속죄뿐이라는 것을.탁유미는 별다른 말 없이 윤이의 손을 잡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경빈은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말없이 따라갔다.그러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탁유미의 이름을 불렀다.“유미야, 나한테 뭐 할 말 없어...?”그 말에 탁유미가 고개를 돌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유진 씨 찾아주고 있다며? 들었어.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네가 묻는 게 나와 너 사이에 관한 일이라면 따로 할 말 같은 거 없어.”탁유미는 이제 완전히 그와 선을 그으려는 모양이었다.그때 버스가 도착하고 탁유미와 윤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그리고 이경빈은 고통을 삼킨 얼굴로 두 사람을 태운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그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은데 그녀는 이제 그와 그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 한다.하지만 현재 두 사람의 상황이 어떻든 그녀가 살아 있으니 그
사실 고이준은 지금껏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임유진은 강지혁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임유진이 강지혁 대신 죽음을 택했을 때 그 누구보다 놀랐고 그녀의 행동에 탄복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지 모르나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진다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대표님을 사랑하시니까요. 그래서 자신보다는 대표님께서 살기를 바랐던 거죠.”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의 몸이 움찔 떨렸다.그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날 사랑한다고... 그래, 날 사랑해서 그런 거야. 유진이는 날...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 그렇게도 확실하게 얘기해줬는데 나는 믿어주지 않았어...”강지혁은 임유진이 아이들 때문에 그를 용서한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용서하는 거라고 했을 때 그럴 일 없다며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그는 줄곧 자신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이 그녀의 사랑보다 더 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임유진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목숨으로 그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줬다.“대표님, 사모님은 아마 바다에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대표님 걱정을 하셨을 겁니다. 절대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절벽에서 떨어진 게 아닐 겁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사모님을 위하신다면 다시 정신을 차려주세요!”고이준은 강지혁이 홧김에 나쁜 선택을 할까 봐 너무나도 걱정이 됐다.“이준아...”그때 강지혁의 곧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약 정말 이대로 유진이를 찾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애초에 살아갈 수는 있을까...?”모든 걸 다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가 지금은 마치 모든 걸 다 잃은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저녁 바다를 담은 그의 검은색 두 눈동자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탁해져 있었다.고이준은 그런 그의 모습에 순간 만약 정말 이대로 임유진을 찾지 못하면 강지혁은 어쩌면 정말 나쁜 선택을 할지도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