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 씨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예요.”한지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나는 괜찮아요. 내 곁에는 날 사랑해주는 가족도 있고 날 끔찍하게 챙겨주는 친구도 있어요. 내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건 다 그사람들 덕이에요. 부귀영화까지는 누리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평범하고 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연신 씨를 원망하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아주 나중에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을 때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한치의 원망도 없고 비아냥도 없는 아주 차분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왜인지 그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백연신은 가슴이 아파 왔다. 미워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그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되어 다가왔다.백연신은 한지영과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 일이 인생 최대의 행운이고 또 행복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헤어짐조차도 너무나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고 아주 조금의 원망도 늘어놓지 않았다.만약 5년 전 그날, 찾아오려는 그녀를 제지했더라면, 백씨 가문을 완전히 손에 넣는 데 있어 조금 더 충분히 준비한 뒤에 움직였다면 그랬다면 둘 사이의 결말이 지금과는 달랐을까?“지영아...”백연신은 한지영과 닿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아래로 기울였다.하지만 막 닿으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아까 있었던 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터라 백연신은 한지영을 데리고 근처 호텔로 들어왔고 그렇게 두 사람은 지금 호텔 방 안에 있다.귀를 뚫고 들어오는 노크 소리에 백연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시 몸을 바로 세우고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노크한 사람은 백연신의 부하직원으로 그의 손에는 옷가지들이 들려있었다.“지시하신 옷입니다.”“수고했어.”백연신은 문을 닫은 후 다시 한지영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여성 사이즈의 옷을 그녀에게 건넸다.“갈아입고 와.”“괜찮아요. 어차피...”“지금 그 꼴로 돌아가면 부모님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 문이 열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한지영이 걸어왔다. 그녀는 나오자마자 백연신을 향해 말했다.“계좌번호 불러요. 돈 보내줄게요.”“안 줘도 된다고 했어.”“나도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어요.”두 사람은 서로 조금도 양보 못 한다는 듯 팽팽하게 대치했다.분위기는 갑자기 다시 얼어붙었고 한지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나는 헤어진 연인한테 무언가를 빚지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요. 네?”백연신은 그녀의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에는 계좌번호를 얘기해주었다.한지영은 휴대폰을 집어 들고 손을 움직였다. 옷 가격은 방금 갈아입을 때 힐끔 봤기에 굳이 그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다만 생각보다 더 비싼 옷이라 그녀는 숫자를 입력하면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정확히 그녀의 두 달 치 월급이었으니까.하지만 아무리 비싸도 돈은 줘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테니까.옷값을 송금한 후 한지영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백연신에게 손을 뻗었다.“곧 고은채 씨와 결혼한다고 들었어요. 축하해요. 두 사람 백년해로하길 바랄게요.”“축하... 한다고?”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백연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네, 축하해요.”헤어진 전 연인이지만 한지영은 그럼에도 진심으로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백연신은 복잡한 얼굴로 그녀가 내민 손을 바라보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손을 뻗었다.그녀의 손을 한번 잡고 나니 우습게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심장이 찢어발겨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백연신은 한지영의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지영은 점점 창백해져 가는 그의 얼굴에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어디 아파요? 안색이...”백연신은 갑자기 손을 확 놓더니 뒷걸음질을 치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난 괜찮아.”한지영은 백연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얼
백연신이 다시금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고은채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고은채는 소파에 걸터앉은 채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주 영웅이 다 됐던데요? 누가 보면 종일 한지영 그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닌 줄 알겠어요. 안 그래요?”“우연히 지나가다가 도와준 것뿐이야. 너랑 결혼하기로 한 거 빈말 아니니까 안심해.”백연신은 가운을 정리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다행이지만요.”고은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연신의 앞으로 걸어갔다.“내가 연신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죠? 백씨 가문을 온전히 손에 쥐여줘, 부모님 설득해줘, 정략결혼을 하고 나면 회장직을 당신한테 넘겨주기로 약속해줘, 나 같은 여자가 또 있을 것 같아요? 한지영 씨는 당신이 원하는 거 아무것도 못 해줘요. 오직 나만 할 수 있다고요. 알겠어요?”고은채는 말을 하며 손을 뻗어 백연신의 목에 둘렀다.이에 백연신은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길을 피하려다가 생각을 바꾼 건지 밀어내려는 움직임 하나 없이 가만히 있었다.고은채는 그런 그를 보며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지었다.‘조만간 너도 완전한 내 것이 될 거야.’“연신 씨, 인생은 길어요. 그 긴 인생을 함께할 파트너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연신 씨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연신 씨가 원하는 건 나밖에 못 줘요.”백연신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지영아,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제는 정말 조금이면 돼. 다 왔어...’...임유진과 강지혁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욕실로 향했다.임유진은 다 씻은 후 강지혁의 몸을 한 번 더 자세히 체크한 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실히 확인하고서야 완전히 안심했다.“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지 말라고. 날아온 게 달걀이랑 썩은 배춧잎이라 망정이지 염산이나 위험한 거였으면 나 진짜 기절했을 거야.”임유진은 아까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권건우 변호사?”“어떻게 알았어?”임유진은 깜짝 놀라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강지혁이라면 이미 진작에 라온시에 있었을 당시의 일들을 조사했을 것이라며 납득했다.“맞아. 스승님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그 사건 덕이었지. 그날 재판에서 이긴 사람은 나였어. 까마득한 후배한테 진 거라서 기분 나쁠 법도 한데 스승님은 화 한번 내지 않았고 오히려 날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어.”권건우에게 있어 그날 재판은 아주 보기 드문 진 재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재판이 끝난 후 임유진의 조심스러운 인사에 호탕하게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재판에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진상이고 진실을 향한 규명이네. 변호사가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눈과 귀를 가리고 진실까지 가려버리면 안 되지. 안 그렇나?”전부터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날 이후 임유진은 다시 한번 권건우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를 자신의 우상으로 삼았다.“김승수 씨는 공무원이었어. 재판에서 2년 반의 형을 받은 뒤에는 당연하게도 직장에서 잘렸지만.”임유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듣기로 김승수 씨의 취업을 위해 가족들이 꽤 애를 많이 썼나 보더라고. 그 과정에서 빚도 진 모양이고.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잃게 됐으니 어디라도 화풀이할 데가 필요했겠지.”사실 김승수가 원한을 품을 거라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스승인 권건우까지 들먹였다는 것이다.임유진은 시선을 내린 채 고민하다 뭔가 떠오른 듯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오늘 일 기사화 되는 거 아니야? 만약 스승님 이름까지 거론되면...”“걱정하지 마. 화제 안 되게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지시했으니까.”강지혁이 이렇게 단언한 이상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진다고 해도 화제가 될 정도로 퍼지지는 않을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말에 한시름 놓았지만 혹시 몰라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일이 예기치도 못한
임유진은 웃으며 얘기하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그때 스승님 같은 사람을 변호사로 뒀다면 참 좋았을 텐데...”만약 진애령 사건 당시 권건우가 변호사로 있어 줬다면 어쩌면 3년이라는 억울한 세월은 보내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한편 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심장이 철렁했다.진애령 사건에 있어서는 늘 임유진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으니까. 임유진은 그때 과거의 일은 다 용서해주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아주 잠시 닿아있는 것만으로도 못 견뎌 하며 괴로워했다.“미안해...”강지혁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임유진은 ‘미안해’라는 그 말이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바로 눈치챘다.“혁아, 진애령 씨 사건의 진실을 들었던 그날 나는 정말 많이 속상했고 또 슬펐어. 심지어 이제는 누구를 믿어야 하나 하는 마음도 들었었어.”임유진은 말을 잠시 멈춘 후 두 손으로 강지혁의 얼굴을 살포시 감쌌다.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그의 온기는 조금 차가웠다. 그리고 후회와 고통이 자리 잡은 예쁜 그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나고 가슴이 아팠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널 용서했어. 네가 그 일로 죄책감을 느끼고 수많은 후회를 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나랑 함께했을 때 네가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줄 수 있겠냐며 계속해서 물어봤던 것도 다 나를 향한 죄책감이 계속해서 네 머릿속에 맴돌아서 그랬던 거였잖아.”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네가 했던 질문에 내가 번번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임유진은 아직 강지혁이 대부분의 기억을 다 되찾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강지혁은 줄곧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뭐라고... 대답했는데?”“용서하겠다고 했어.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다 용서하겠다고 했어.”강지혁의 눈빛이 다시금 흔들렸다.“그 약속 때문에 날 용서한 거야?”“아니. 그 약속뿐만이 아니라 널 사랑하니까.”흔들리던 강지혁의 눈빛이 서서히 멎어갔다
임유진은 지금도 역시 자신이 가진 모든 애정과 사랑을 다 꺼내 강지혁의 불안을 잠재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강지혁이라는 남자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하니까.입맞춤이 끝난 후 임유진은 천천히 눈을 뜨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내 진심이 조금은 통했어?”강지혁은 그 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더 많이 사랑해줘. 내가 버릇이 나빠질 정도로 나한테 사랑을 속삭여줘.”키스 때문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척이나 유혹적으로 들려왔다.강지혁은 자연스럽게 임유진을 침대 위에 눕혔다. 눕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조금의 깜빡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했다.“혁아, 웃어봐. 나는 네가 나한테 웃어주는 게 좋아.”“응.”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마음을 단숨에 훔쳐 갈 그것 같은 그런 예쁜 미소였다.강지혁은 임유진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 줄 수 있다. 그게 몸이 됐든 영혼이 됐든 그녀에게 주는 거라면 뭐든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 적을까 봐 걱정이었다.임유진은 혼이 다 나간듯한 표정으로 강지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조금 달아오른 얼굴부터 시작해 굵직한 목, 그리고 깊게 파인 쇄골까지 음미하듯 아주 천천히 입을 맞췄다.“혁아, 평생 내 곁에 있어. 나도 평생 네 곁에 있을 테니까...”강지혁은 온몸에 퍼부어진 임유진의 입맞춤을 느끼며 5년 전에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당시의 그는 음식물을 게워내며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그때는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줄 용기조차 없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도 가까이 맞닿아 있고 임유진도 매일같이 사랑을 속삭여준다. 과정이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지금 무척 행복한 상태다.‘평생 내 곁에 있어. 나는 유진이 너만 있으면 되니까...’...다음날.한지영은 출근한 후 동료 직원들이 눈만 마주치면 피하고 심지어는 자기들끼리 뒤에서 수군거리기까지 하는 아주 기이
“나연 씨한테는 호텔이 모텔 같은 개념인가 보죠?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다 화끈해지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네요.”한지영은 표정 변화하나 없이 바로 되받아쳤다.이에 조나연은 얼굴을 확 일그러트리더니 목소리 톤을 높였다.“임자 있는 사람이랑 파렴치한 짓이나 하는 주제에 지금 누굴 욕해요?!”“그럼 대놓고 나한테 이상한 프레임 씌우려는 사람한테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듣기만 할 줄 알았어요?”한지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백연신 씨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럼 호텔에는 왜 갔어요? 방에는 또 왜 그렇게 오래 머물렀는데요? 그리고 왜 들어갔을 때랑 나왔을 때 옷이 달라요? 증거가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대체 내가 무슨 이상한 프레임을 씌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앙칼진 조나연의 목소리에 동료 직원들이 하나둘 가까이 다가왔다. 다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조나연과 다를 것 없는 의견이라는 눈빛이었다.“옷이 더러워져서요. 사진 제대로 안 봤어요? 호텔로 들어갈 때 옷에 뭐가 잔뜩 묻어있잖아요. 그리고 백연신 씨는 줄곧 로비에 있었고 나만 올라갔어요. 믿기 힘들면 CCTV라도 돌려보던가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거짓말! 둘이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위로 올라가 놓고 어디서 거짓말이에요?”한지영은 조나연의 말에 차갑게 웃었다.“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꼭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처럼. 혹시 이 사진 나연 씨가 찍은 거 아니에요? 나 골탕 먹이려고?”조나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아, 아니... 나는 그냥... 그럴 것 같아서.”“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럼 나도 나연 씨가 일부러 내 사진을 찍어서 사내 게시판에까지 올렸다고 멋대로 생각해도 되겠네요?”한지영의 추궁에 동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조나연에게로 집중됐다. 다들 한지영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조나연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이내 한지영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함부로 모함하지 말아요. 나는
하지만 아무리 무서워한다고 한들 이 상황에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기자들의 추궁 속에서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한지영은 가방을 손에 꽉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시끄러운 엔진소리와 함께 승용차 여러 대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차 안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내리더니 금세 기자들과 한지영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한지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곧이어 또다시 한 차량이 다가오더니 익숙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빠르게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지영은 차에서 내린 백연신을 보고 금세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백연신과 연관된 일인데 이렇게 되면 당사자 두 명이 다 한자리에 있게 되는 거니까.‘이 사람은 내가 왜 기자들한테 둘러싸였는지 모르는 거야? 지금 나타나면 일이 더 복잡해지기만 하잖아!’백연신은 빠르게 걸어와 이윽고 한지영 바로 앞에까지 도착했다.한지영은 이에 거리를 두려는 듯 뒷걸음질을 쳤지만 두 걸음도 채 못 디디고 그의 손에 잡혀 차량 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백연신이 한지영의 손을 잡는 그 순간 수많은 플래시와 함께 기자들의 질문 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런 그들의 외침에도 한지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또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지금은 대체 어떤 행동을 하는 게 맞는 건지 같은 이성적인 사고조차 하기 힘들었다.그러다 차에 올라타고 백연신이 기사에게 출발하라는 말이 들리고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방금 연신 씨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해요?!”한지영이 외쳤다.“알아.”백연신은 한지영의 손을 놓으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노을이 차창을 뚫고 들어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붉은색이 한층 씌워졌는데도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해 보였다.‘지난번에도 이렇더니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한지영은 백연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에는 참지 못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
사람들은 두 가문이 파혼이라는 결말을 맺을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은채는 어제 기자들에게 오늘 오후 정식 기자 회견을 열겠다고 했던 터라 지금 비장한 얼굴을 한 채 기자들 앞에 앉아 있다.“사실 저와 백연신 씨는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고 제 현재 남자친구는 기사에서 언급됐던 그분입니다. 백연신 씨와 헤어진 걸 알리지 않았던 건 부모님이 저와 제 남자친구와의 사이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백연신 씨에게 부모님의 마음을 돌릴 때까지만 저의 남자친구인 척해주면 안 되냐고 했고 백연신 씨는 이에 동의했습니다.”고은채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이번 일은 다 제 잘못입니다. 제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백씨 가문이 곤란해지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반인 여성에게까지 피해가 갔습니다. 정략결혼 얘기는 저희 부모님이 저희 둘 모르게 공표한 것으로 저와 백연신 씨의 의사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혼 파기를 빨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로 불필요한 타격을 입고 상처를 받았을 백씨 가문과 한지영 씨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백연신 씨와의 결혼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라는 것을, 백연신 씨와는 진작에 헤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고은채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미리 준비해둔 대사를 전부 다 읽어낸 후 진중하면서도 가녀린 얼굴로 기자들을 바라보았다.지금 그녀가 챙길 수 있는 거라고는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는 이미지밖에 없었으니까.“그럼 결혼은 지금 남자친구분과 하실 예정인 건가요? 부모님께서 다시 반대하시지 않겠어요?”기자 한 명이 손을 들며 물었다.“결혼은... 당연히 지금 남자친구와 할 생각입니다. 부모님도 시간이 흐르면 저와 남자친구 사이를 예쁘게 봐주실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만에 하나 계속 반대하신다 해도 헤어질 생각은 없습니다.”고은채는 겉으로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반대도 무릅쓰고 끝까지 갈 것
백연신은 차창을 통해 한지영이 머무르고 있는 1층 방의 창문을 바라보았다.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녀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지,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만든 자신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는지 같은 질문이 절로 떠올랐다.“안 올라가십니까?”기사가 물었다.“응, 이렇게 보는 거로도 충분해.”백연신은 말을 하며 계속해서 아파트 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내일이면 한지영에게 씌워진 오명을 전부 다 벗겨낼 수 있다....다음날.인터넷은 고은채의 기사로 난리가 났다.한 기자가 고은채에게 백연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그것도 여러 명이 있었다며 폭로했기 때문이다.그중 제일 화제가 된 남자는 지하 클럽에서 호스트로 활동했었던 남자였다. 그 남자는 고은채를 만난 후 아주 오랜 기간 그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왔고 그 덕에 현재는 억 소리가 나는 별장에서 살고 있다고 하며 외출할 때도 꼭 경호원을 한 명씩 데리고 다닌다고 한다.고은채의 기사를 폭로한 기자는 이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라며 자신의 수중에는 인터넷에 공개된 그녀가 남자와 끌어안고 키스하는 수위가 약한 사진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해괴망측한 취향이 가득 담긴 사진도 다수 있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아무것도 모른 채로 백연신의 별장에서 석방된 고은채는 기자들의 손에 들린 사진과 그들의 질문을 통해 아주 빠르게 알아챘다. 지금 이건 백연신이 짠 각본이라는 것을.그녀와 친밀한 사이라고 소개된 호스트는 확실히 그녀의 파트너가 맞다. 백연신의 철벽으로 풀지 못했던 욕망을 어디든 분출해야만 했으니까.아마 기자가 공개하지 않은 사진에는 그녀가 남자의 무릎을 꿇리고 개처럼 바닥을 기게 하는 등의 모습이 찍혔을 것이다.하지만 고은채가 호스트와 놀아난 건 2년 전의 일이었다. 하이에나 같은 기자가 아무런 요구도 해오지 않고 그 사진들을 2년이나 간직하고 있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즉, 해당 사진들은 기자가 자기 힘으로 입수한 사진이 아닌 백연신에게서
당시의 백연신은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고은채 밖에 없었고 고은채는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뭐든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었다.그녀가 도와줘야 백연신이 살 수 있고 또 그녀가 도와줘야만 백연신은 앞으로도 훨훨 날아오를 수 있었다.자신이 우월하다는 감각에 취한 탓일까, 고은채는 홧김에 그에게 한지영을 구해주는 대신 자기 옆에 있으라고 했다. 이제껏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이 남자를 지금에야말로 자기 발밑에 무릎을 꿇리고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그래서 백연신이 한지영에게 이별을 고했을 때 그녀는 그의 육체라도 곁에 묶어둔 것에 환희를 느꼈다. 어차피 마음 같은 건 시간의 흐르면 당연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만 백연신은 어느샌가 그녀의 손아귀에서 점점 벗어나 있었고 형세는 완전히 뒤집혀버렸다.고은채는 백연신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그의 뒷모습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다시 그 여자랑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과 그 여자의 인연은 이미 5년 전에 끝이 났어. 두 번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백연신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말 따위는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고은채는 백연신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내렸다.고씨 가문에 살길이 터진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가문이 재기할 수 있게 조금이라도 힘을 모으는 것뿐이다.내일부터 꽤 치욕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 말이다.고은채는 한지영의 루머를 바로잡아주고 백연신과 합의 하에 파혼한 것처럼 연기해야 할 생각만 하면 벌써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백연신의 차량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서서히 별장에서 멀어졌다.운전기사는 룸미러를 통해 백연신을 바라보며 물었다.“어디서 모실까요?”백연신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한지영이 현재 살고 있는 주소로 향해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시트에 등을 기댔다.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다.생각해보면 그는 어릴 때부터 어느 한순간 피곤하
“뭐...?”고은채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백연신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때만을 기다려온 사람이 갑자기 죽여야 하는 상대에게 살길을 터주겠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내가 돈을 빌려주면 해진 그룹은 파워팰리스 프로젝트만큼은 사수할 수 있을 거야.”백연신의 말에 고은채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그의 말을 달리하면 고씨 가문은 파워팰리스 프로젝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잃게 된다는 뜻이었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고씨 가문은 더 이상 부유층이 아니게 되고 한순간에 지위가 하락하게 된다.‘아니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파워팰리스 프로젝트만 제대로 사수해도 다시 재기할 가능성이 생겨!’“원하는 게 뭐야? 이유도 없이 자금을 빌려주지는 않을 거 아니야.”고은채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 거라고 생각하며 말이다.“내가 원하는 건 우리 둘의 결혼 파기야.”백연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고은채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빈정거리며 웃었다.“결혼 파기? 우리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결혼 파기 그까짓게 안 될까 봐 무서워?”“나는 네가 직접 사람들에게 우리 결혼은 합의하에 없던 일이 된 거라고 하길 원하는 거야. 그리고 지영이가 그런 모욕적인 오명을 쓰게 된 것도 네 입으로 직접 해명하길 원하고.”백연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고은채는 머릿속을 스친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순간 눈을 크게 떴다.“설마... 파워팰리스 프로젝트로 딜을 하려는 게 한지영 때문이야?”“아니면? 내가 그 이유 말고 너희 가문에게 살길을 터줄 이유가 또 있어?”고은채의 두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게 백연신은 지금 고작 한지영 하나 때문에 몇조가 되는 이익을 포기한다고 하고 있으니까.‘그렇게 오래 판을 짜놓고 이제 와서 여자 하나 때문에 이익을 포기하고 후환까지 남겨둔다고...? 미친 거야?’고은채는 이쯤 되니 백연신이라는 남자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안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강지혁은 불안한 만큼 더욱더 강하게 임유진을 몰아붙였다. 그러다 갑자기 입술을 떼더니 임유진의 눈을 마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만 내 곁에 있으면 나는 하나도 안 아파... 그러니까 날 떠나지 마.”그러고는 또다시 입술을 부딪치며 마치 그녀의 모든 걸 다 집어삼키려는 듯 폭풍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백연신 씨, 당신 이거 납치야.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거라고! 우리 부모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날 내보내!”고은채는 백연신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쳐댔다.이곳에 갇혀있는 동안 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휴대폰도 압수당한 바람에 그녀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너희 부모님은 지금 너희 집안에 떨어진 불똥 때문에 그거 처리하느라 널 챙길 여유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미 너희 부모님한테 따님이 현재 내 별장에 있다고 얘기했어.”백연신은 소파에 앉으며 느긋한 태도로 얘기했다.“불똥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고은채가 급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이에 백연신은 부하직원에게 눈빛을 보냈고 부하직원은 리모컨을 들어 거실에 있는 티비를 켰다. 모니터 속에서는 요 며칠 해진 그룹과 고씨 가문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도한 뉴스들이 편집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채는 굳은 얼굴로 영상을 계속해서 바라보다 마지막에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몸을 덜덜 떨었다.‘대체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우리 집안을 완전히 망하게 할 생각이야?’“지금껏 쥐새끼처럼 몰래 움직이면서 뒤에서 칼을 갈고 있었던 거야?!”고은채는 분노로 범벅된 얼굴로 백연신을 바라보았다. 고씨 가문이 며칠 사이에 이렇게까지 무너진 걸 보면 꽤 오랜 기간 이 상황을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그녀는 그가 정성스럽게 판을 짜는 동안 조금의 의심도 없이 아직도 자신이 모든 걸 주무르고 있다고 착각
“너는 그 기억을 영영 되찾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어?”강지혁의 질문에 임유진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그가 말하는 기억이 절벽에서의 일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이곳으로 돌아온 그 날 고이준에게서 들었으니까.강지혁은 두 눈을 임유진에게 고정한 채 그녀의 반응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가만히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더니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닌 현재야. 그리고 나는 고통으로밖에 다가오지 않을 과거라면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기억을 잃어버린 상태라도 괜찮다는 소리야?”“응.”임유진은 고통스러운 과거로 서로가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면 당시의 고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같은 건 영원히 알지 못한 채로 살 수 있게 될 테니까.임유진은 말을 마친 후 손을 뻗어 강지혁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졌다.“혁아, 기억을 회복하는 것도 좋지만 무리는 하지 마. 네 몸을 축내면서까지 과거 일을 떠올리지 말라는 소리야. 나는 네가 행복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으니까.”강지혁은 그녀의 말에 머리가 다시금 아파 왔다.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뱉어져 나온 순간 마치 거대한 돌덩이가 심장을 꽉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강지혁은 자기가 말하고는 자기가 더 놀랐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대체 왜?왜 이 말이 이토록 익숙한지, 왜 이 말을 수백 번은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언제 이런 말을 한 거지? 임유진이 절벽에서 떨어지고 난 뒤에?강지혁은 기억을 헤집으며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점점 더 아파져 왔다.게다가 이제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고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히며 고통스러운 신음까지 멋대로 흘러나왔다.임유진은 상태가 점점 더 심각
소민아는 양 볼이 퉁퉁 부은 채로 씩씩거리며 딸과 함께 저택에서 나왔다.임유진은 율이와 현이를 씻긴 후 방으로 데려가 잠을 재웠다.현이는 많이 피곤했던 건지 엄마와 오빠에게 번갈아 뽀뽀한 후 금세 잠자리에 들었다.율이는 동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진지한 얼굴로 임유진에게 말했다.“나는 엄마가 계속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어요.”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아무래도 소민아가 엄마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던 모양이다.“걱정하지 마. 너희 아빠는 절대 다른 여자를 너희 엄마라고 데려오지 않을 테니까.”아이는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굿나잇 인사를 한 후 드디어 잠자리에 들었다.임유진은 천사 같은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아이들을, 이 가정을,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해주는 남자를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지켜주고 싶었다....침실로 돌아온 임유진은 강지혁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는 걸 보고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갔다.“왜 그래? 또 두통이 도진 거야?”강지혁은 걱정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몸을 미세하게 움직이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어려있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조금 놀라며 물었다.“혁아, 무슨 일...”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혁아.”임유진은 그런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물었다.“또 머리가 아파?”강지혁은 한참을 침묵한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방금 머리에 통증이 일었을 때 그는 그의 요구로 종일 경호원들을 뒤에 붙인 채로 있어야만 했던 임유진의 모습을 기억해냈다.아무리 임신 중이라 걱정이 됐다고 해도 이건 도가 지나쳤다. 이건 마치 그녀가 떠날 아주 조금의 틈조차도 주지 않으려는 듯한 무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