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영준이 풀려난 날, 송재이는 혼자 박윤찬과 함께 지내는 집으로 돌아갔다. 방 안은 아주 조용했다. 시계가 째깍대는 소리만 들렸다.송재이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박윤찬은 그의 서류상 남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진작 식어버렸다.박윤찬이 집에 돌아왔을 때 송재이는 짐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캐리어를 끌고 거실에 있었다.“떠나게요?”박윤찬은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저 이사하려고요. 이제 나가서 살 거예요.”박윤찬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알았어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거죠?”송재이는 약간 놀라운 기분이 들었다. 박윤찬이 이토록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전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또 남게 될 줄 알았다.지난번 술을 마시고 그런 일이 생긴 뒤로 박윤찬의 태도는 완전히 변했다. 송재이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마워요, 윤찬 씨.”송재이는 약간 울먹이면서 몸을 돌렸다. 이때 박윤찬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재이 씨.”송재이는 발걸음만 멈추고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박윤찬은 한숨을 쉬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날 일은 미안해요. 제가... 사과할게요.”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트렁크를 끌고 밖으로 걸어 나갈 뿐이었다.박윤찬은 가만히 앉아서 송재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표정은 아주 복잡해 보였다.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사이는 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늦은 시간, 그는 홀로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텅 빈 방을 바라봤다. 어쩐지 외로운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송재이는 고즈넉한 동네에 작은 아파트를 얻었다. 집주인은 소경애이라고 하는 중년 여자였는데 아주 친절하고 다정했다. 소경애는 항상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보고 있기만 해도 안심이 되었다.이사 온 첫날, 송재이는 소경애에게서 꽃다발을 받았다. 꽃다발에는 자그마한 카드도 있었다.[새로운 집에 온 걸 환영해요.
설영준의 마음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 덩어리가 있었다. 그는 며칠이나 퇴근하는 송재이를 뒤쫓으며 관찰했다.송재이는 날마다 혼자 한적한 동네로 걸어갔다. 박윤찬의 별장으로는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쯤 되니 설영준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박윤찬과 송재이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말이다.사실 설영준은 진작 두 사람의 결혼 생활에 의심을 품었다. 겉보기에 완벽한 결혼 생활 속 깊은 어딘가에 숨겨진 것이 있는 것 같았다.어느 날 저녁, 설영준은 드디어 관찰을 포기했다. 그는 용기 내서 송재이의 발자취를 따라 아파트 건물 아래에 도착했다.그는 고개를 들어서 송재이 집 창문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조명 아래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녀가 보였다.깊이 한숨을 내쉰 그는 위층으로 올라가 노크했다. 문을 열고 설영준을 발견한 송재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표정이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송재이는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설영준은 간절하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달칵 문을 닫아버렸다.자그마한 공간에서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힘 있게 들렸다.“너 요즘 집에 안 돌아간 거 알아. 박 변호사랑 무슨 일 있었어?”질문인 듯하지만 이미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송재이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는 뒷걸음질 치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했다.“뭐가 됐든 제 일이에요. 영준 씨가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그녀는 약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저희는... 저희 일이나 처리하죠.”설영준의 질문에 송재이는 스트레스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잠깐 당황하다가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설영준이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직진에 그녀는 말 못 할 복잡한 기분만 느껴졌다.설영준은 가만히 서서 송재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엇이라도 보아내려는 작정이었다. 걱정으로 시작된 질문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약간 다른 감정으로 번졌다.“네 인생에 간섭하려는
설영준은 송재이의 아파트에서 떠난 다음에도 한참 진정하지 못했다. 그는 박윤찬과 얘기를 나눠서 무슨 영문인지 알아내려고 했다.이는 꽤 민감한 화제였다. 그러나 송재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도무지 모르는 척 지나갈 수 없었다.이튿날, 설영준과 박윤찬은 한적한 카페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인사치레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얘기하기 시작했다.“일단 저번 일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요.”설영준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근데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다른 일이 있어서예요.”박윤찬은 눈썹을 튕기며 설영준이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 설영준은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재이랑 가짜 결혼한 거 알고 있어요.”박윤찬의 얼굴은 빠르게 굳어갔다. 그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진정되었다.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모르겠는 듯 한참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어디서 들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랑 재이 씨 사이 일이에요. 과하게 간섭하지 말았으면 해요.”박윤찬의 목소리는 아주 태연했다. 그러다 손가락은 초조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설영준은 박윤찬의 애매한 말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간섭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냥 재이가 걱정돼서 그래요. 재이가 상처받을까 봐서요.”박윤찬은 깊은 눈으로 설영준을 바라봤다. 그의 말이 진실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는 한참 지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재이 씨도 성인이에요. 본인 일은 알아서 할 거예요. 그리고 감정은 원래도 복잡한 일이에요. 제삼자가 끼어들 건 아니라고 봐요.”박윤찬의 방어에 설영준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알았어요. 근데 저는 진심으로 재이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재이가 고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박윤찬은 침묵에 잠겼다. 설영준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송재이 사이의 관계는 설영준이 아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장서영은 알았다. 이 발견이 송재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그녀가 송재이에 대한 신뢰를 깰 수도 있었다.변호사로서 장서영은 진실을 밝힐 책임이 있었다. 아픈 결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크게 심호흡하고 난 그녀는 송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이 들리는 것도 잠시 전화가 연결되었다.“재이 씨, 저예요. 장서영.”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알려줄 일이 있어서 연락했어요. 박윤찬 씨에 관해서요.”“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인데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해요?”“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 사건 조사하다가 박윤찬 씨가 재이 씨랑 결혼한 이유를 알게 됐어요. 재이 씨가 아는 거랑 많이 다를 거예요.”송재이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장서영은 한숨을 쉬었다. 이게 송재이에게 어떤 충격을 줄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라는 거 알아요. 사실 박윤찬 씨가 결혼한 이유는 한 사건을 덮기 위해서였어요. 이로써 언론의 주의력을 돌리려고요.”송재이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절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마, 말도 안 돼요. 윤찬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장서영은 송재이를 동정했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재이 씨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이건 사기잖아요. 박윤찬 씨는 재이 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속였어요.”송재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증거 있어요? 저 증거가 필요해요.”이미 예상했던 장서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저한테 서류가 조금 있어요. 박윤찬 씨의 동기를 증명하기에는 충분해요. 이따가 보내줄 테니까 직접 확인해 봐요.”송재이는 모순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어떻게 직면해야 할지 몰랐다.“알려줘서 고마워요. 서류부터 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할게요.”장서영은 송재이가 혼자 힘들어하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재이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송재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박윤찬의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심호흡 한 번 하고 난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박윤찬과 눈을 마주쳤다. 박윤찬은 그녀가 올 줄 안 듯 덤덤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태연함이 그녀는 싸늘하게만 느껴졌다.“왔어요.”박윤찬은 회의라도 하는 것 같은 평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송재이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윤찬 씨 설명이 필요해요. 저 지금 배신당한 기분이에요.”송재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아주 단호했다.‘올 게 왔구나.’박윤찬은 약간 복잡한 표정으로 송재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재이 씨 상처받은 거 알아요. 제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요.”“저는 윤찬 씨를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기본적인 신뢰는 있다고 생각했다고요. 저 이제 윤찬 씨를 어떻게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요.”어떻게 설명할지 몰랐던 박윤찬은 침묵에 잠겼다. 그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전에 숨겼던 건 재이 씨를 연루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재이 씨가 연루돼서 다치는 건 안 되니까요.”송재이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는 그녀가 가짜 결혼을 제안했을 때 박윤찬이 흔쾌히 허락하던 모습이 떠올랐다.지금 다시 생각하면, 박윤찬의 허락에도 그녀는 모르는 속셈이 있었다. 박윤찬의 속셈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그래서 제 가짜 결혼 제안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던 거죠? 저는 이제야 알았네요. 저를 도와주려고 그런 게 아닌, 윤찬 씨 목적이 따로 있었던걸요.”박윤찬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송재이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제가 잘못했어요, 재이 씨. 결혼을 허락한 데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근데 재이 씨를 이용하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송재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박윤찬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속으로는 그가 비열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이용이 아니면 뭔데요
송재이가 떠난 다음 박윤찬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독감에 빠졌다.넓은 사무실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공기 중에는 아직도 송재이의 향기와 목소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박윤찬은 자신이 송재이의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어쩌면 그 이상의 것들도 잃었을지 모른다.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그는 술집으로 가서 위안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잠시라도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알코올의 힘을 필요했다.박윤찬은 술집의 구석 자리에 앉아 한 잔, 또 한 잔 술을 들이켰다. 마치 모든 고통과 후회를 술과 함께 삼켜버리려는 듯이 말이다.술집의 조명은 어두웠고 음악도 낮은 편이었다. 그의 모습은 어둡고 희미한 조명 아래서 더욱 외로워 보였다.그의 생각은 마구 뒤엉켜 있었다, 마음속은 송재이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때 장서영이 나타났다.장서영은 박윤찬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고백했지만, 그는 일을 핑계로 정중히 거절했었다. 오늘 밤, 우연히 박윤찬을 본 장서영은 그가 힘들어하는 모습에 복잡한 감정이 솟구쳤다.“박 변호사님, 이렇게 우연히 만나네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장서영은 박윤찬의 옆에 앉으며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박윤찬은 고개를 들며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장변? 여긴 어떻게...”장서영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는 답하지는 않고 바텐더에게 술 한 잔 주문했다.“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혹시 송재이 씨 때문인가요?”박윤찬은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요?”“비록 저희가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박 변호사님이 재이 씨를 좋아하는 거 눈치챘어요. 두 분 이야기 동료들 사이에서 비밀도 아니거든요.”박윤찬은 말없이 조용히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그는 현실을 피하려고 알코올에 의존하고 있었다.장서영은 계속해서 말했다.“두 분 사
장서영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 그녀가 박윤찬에 대한 짝사랑은 가느다란 바늘처럼 깊숙이 박혀 신경을 찌르며 아프게 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와 박윤찬 사이의 거리는 단순한 직위 차이가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는 마음의 간극이 존재했다.박윤찬의 마음속에는 송재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인생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했다.옷을 갈아입는 장서영은 최대한 평온하게 보이려 애썼다. 마음속은 이미 폭풍우처럼 요동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박윤찬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비록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복잡한 기억이 얽힌 방을 떠나며, 장서영은 문을 살며시 닫고 혼자 아침의 서늘한 바람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손을 들어 택시를 잡고 창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거리를 바라보았다.이제야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비로소 터져 나왔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 택시가 아픈 기억이 담긴 장소에서 멀어지자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마음속에는 박윤찬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이 가득했다.그녀는 알았다. 그녀와 박윤찬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못하고 있었다.장서영은 여러 번 박윤찬과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냉혹했다. 그녀는 그 감정을 마음속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택시 안에서, 그녀의 생각은 과거로 향했다. 그녀는 박윤찬과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했다. 그때 그는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눈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말이다.그녀는 또 용기 내어 박윤찬에게 고백했던 날을 기억했다. 비록 정중하게 거절당했지만, 적에도 마음속에는 용기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현실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박윤찬의 마음속에는 송재이뿐이었고, 그녀는 그저 그의 인생에 잠시 스쳐
서유리의 청첩장을 받은 송재이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그녀와 서유리는 비밀 하나도 없는 친구 사이였고 함께 수많은 힘든 시간도 보냈었다.서유리가 박윤찬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둘 사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러나 현재, 제일 친한 친구가 행복을 찾은 모습을 보니 송재이는 기쁨을 느꼈다.송재이는 서유리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서유리의 행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재이 씨. 청첩장 잘 받았어요? 재이 씨가 가장 먼저 저한테 연락해주리라 예상하고 있었어요!”송재이는 미소를 지었다. 서유리의 행복과 기대가 고스란히 그녀에게도 전해졌다.“유리 씨, 정말 축하해요. 드디어 행복을 찾으셨네요. 정말 너무 기뻐요.”서유리는 다소 수줍은 듯하면서도 행복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재이 씨, 꼭 제 결혼식에 와줘야 해요. 재이 씨가 있어야 제가 긴장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송재이는 서유리의 요구에 흔쾌히 대답했다. 그녀는 절친한 친구를 위해 직접 웨딩드레스를 골라주기로 하면서 서유리가 행복해하는 순간을 직접 두 눈으로 보려 했다.며칠 후, 송재이는 서유리와 함께 유명한 웨딩드레스 매장으로 왔다.매장에는 여러 가지 디자인의 웨딩드레스가 진열되었고 전부 예뻐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다.서유리는 눈을 반짝이며 흥분하면서도 기대하는 눈빛으로 드레스를 구경하다가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하나씩 골라보았다.송재이는 서유리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서유리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을 때마다 진심을 담아 평가를 해주며 골라주었다.드디어 서유리는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골랐다.서유리가 고른 웨딩드레스는 아주 우아한 것이었다. 밑단 부분엔 레이스가 달려 고귀하고 순결한 서유리의 이미지와 찰떡이었다.거울 앞에 선 서유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송재이는 서유리가 느끼는 행복과 자신감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재이 씨, 저 예뻐요?”서유리는 몸을 빙글 돌며 미소를 지은 채 송재이에게 물었다.송재이는 고개를 끄덕였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