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리는 자신의 속내를 들키자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오히려 더 귀엽게 웃으면서 말했다.“아니, 사실 별일 아닌데... 너의 사랑스러운 여보가 업무상에서 도움이 좀 필요하단 말이지.”육시준은 피식 웃었다.“도움이 필요하면 여보고 아니면 갑처럼 행동하겠다 이거지?”강유리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듣고 보면 정말 강유리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하다.“너무 오래 걸어서 다리가 쑤셔.”“내가 집에 가서 만져줄게. 나 되게 잘해. 오늘 밤 꼭 만족시켜 준다고!”그녀의 목청은 생각보다 컸고 서빙하던 직원은 그 말을 듣고 떨어트릴뻔했다.하지만 교육을 받은 직원이니 표정관리에 능했고 침착하게 서빙했다.육시준은 그녀가 그를 달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시간 안의 쇼핑으로 그녀의 이러한 태도를 맞바꿨으니 나름 만족스러웠다.“이 레스토랑의 요리는 내 입맛에 안 맞는 것 같아.”“나가자. 내가 살게!”육시준은 원하는 답이 아니라는 듯 침묵했다.강유리는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집에 가서 야식이나 먹을까? 내 사랑으로 만든 야식!”육시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좋아하면서 말이다.“그래. 사모님의 요리 실력을 한번 봐야겠어. 일어나자.”밤 10시.JL빌라의 주방은 처마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한 시간 동안 주방에서 요리하던 강유리는 물에 살짝 데친 야채를 접시에 담았다. 그녀는 접시를 들고나오더니 육시준에게 말을 건넸다.“야식은 기름진 걸 먹으면 안 돼. 이렇게 물에 살짝 데쳐먹으면 얼마나 맛있게요?”조금 전 육시준이 주방을 지날 때 보았던 것들이 생각났다. 검게 탄 무언가가 여러 접시나 있었다. 지금 그녀가 들고나온 건 그나마 먹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넌 외국에서 도대체 어떻게 3년이나 지낼 수 있었던 거야?”강유리는 그의 앞에 접시를 놓았다.“난 입이 고급 지지 않아서. 익은 건 다 먹는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그가 고개를 돌리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스칠 정도였으니 말이다.강유리는 그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지 자연스럽게 팔을 그의 어깨에 올려놓고는 그 위에 작은 머리를 기대었다.또다시 맞닿은 시선에 두 사람 모두 당황한 것 같았다.‘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겼네.피부가 어쩜 나보다도 매끄럽지? 뭐야, 계란 피부야? 모공도 안 보이고...조각상이야 뭐야...’윤기가 도는 도톰한 입술을 본 그녀는 불현듯 아침에 일어났던 일이 생각났다. 그녀의 다리에 힘이 풀리게 했던 모닝키스 말이다.그녀는 한 손을 식탁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허리를 숙였다. 그한테 꼭 붙어서 끼라도 부리듯 눈만 깜빡였다.“우린 부부잖아. 너를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거나 마찬가지지.”가쁜 호흡이 서로 엉켰다.육시준은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 분위기대로라면 위험했기 때문이다.“카드 긁을 때랑은 너무 다른데?”그의 낮은 톤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경고하는 듯싶었지만 강유리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피하는 모습에 오히려 더 가까이 붙으면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었다.“네가 더 이상 쇼핑 안 하겠다고 한 거면서 왜 아직도 화가 난 건데?”육시준은 동문서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다만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선명해진 그녀의 숨결이 그의 인내심을 툭툭 건드렸다.그는 강유리의 허리를 감아안아서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아!”강유리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기세등등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큰 눈망울만 깜빡이는 귀여운 소녀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뭐! 뭐 어쩔 건데?”육시준은 얼굴을 더 가까이 갖다 댔다.“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그녀는 눈만 깜빡였다.“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야식으로는 배가 안 불러.”“그럼 내가...”“좋아.”강유리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모닝 키스는 어딘가 어정쩡하고 가벼웠
육시준은 강유리를 혼자 남겨둔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는 접시에 남겨진 요리를 보면서 멍을 때렸다.‘결혼식을 올리려면 한참 멀었는데…’그녀는 육시준을 공식 석상에서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유강엔터의 운명이 다른 이에게 좌지우지되는 판에 공개했다가 육시준을 해하려 들면 어떡해?반지는 먼저 맞춰도 되긴 하지.’복잡한 생각을 거두어 낸 그녀는 접시에 놓인 요리를 쳐다보았다.“그 정도로 맛이 없다고?”그녀는 한 조각 집어먹어보았다.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화장실로 뛰쳐가 겨워내고 말았다. 그러고는 입을 여러 번 헹궜고 육시준을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쟤 진짜 대단해! 이런 걸 어떻게 먹을 수가... 너무 자연스럽게 먹기에 괜찮은 줄 알았지...’육시준은 서재에서 서류를 검토했고 강유리는 샤워하고 나서 쉬고 있었다. 그녀는 늦은 밤까지 주얼리와 반지를 검색해 보았다.유강엔터 사무실.강덕준은 인상을 찌푸린 채 책상에 놓여있는 연예인 차트를 검토하고 있었는데 대충 훑어보고는 물었다.“이 여자를 여자 조연으로 추천한다고요? 그것도 두 주인공 다음으로 배역이 큰 조연을요?”그의 맞은켠에 앉은 사람은 능글스럽게 대답했다.“제가 장담하는 데 성신영 씨 만큼 큰 잠재력을 가진 여배우는 없습니다. 저를 봐서라도 배역을 주는 것이...”“프로듀서님은 아직 저희 팀 스타일을 모르시나 봐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강덕준은 서류를 내려놓았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강덕준 씨도 아시다시피 유강엔터는 투자자이기도 하지만 결국 유강그룹 소속인 걸 아시죠? 제 뜻은 곧 성 회장님 뜻입니다. 저는 통보하러 온 것이지 타협하려는 게 아닙니다.”강덕준은 강유리만큼이나 기고만장한 투자자를 또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헛웃음만 나왔다.“네. 잘 들었습니다.”프로듀서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물을 들이키고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젊은이 패기는 인정합니다만. 아직도 갈 길이 머네요. 그럼 이
업계 탑인 육경서도 고작 남자 조연인데…성신영이 여자 조연의 자리를 따낸 건 엄청 대단한 일이었다.이게 다 인맥 덕분이다…임천강은 다정하게 성신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공주님한테 조연이나 하게 하다니. 우리 공주님 억울해도 조금만 참아. 이번 작품 끝나면 바로 스타인 엔터로 와. 내가 있는 힘껏 팍팍 밀어줄게.”성신영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한 얼굴을 유지했다. “남우주연상 받은 배우랑 함께 작품 하는 거, 내가 항상 바라던 일이야. 나 하나도 억울하지 않아.”“누나, 빨리 형부네 회사랑 계약해! 누나가 나중에 여우주연상이라도 받게 되면, 그렇게 되면 내가 친구들 앞에서 얼마나 체면이 서겠어!” 성한일은 자신의 욕망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왕소영은 그런 성한일을 나무랐다. 화기애애하고 화목한 가족이었다.“얼른 출발해. 비록 서브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야 해. 촬영장에 가서 잘난 척 거만한 척하지 말고. 강 감독님이 능력은 있는데 성격은 안 좋거든.” 성홍주가 그들에게 말했다.성신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 강 감독이랑 친해.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야.”그녀의 말에 성홍주는 의아함을 표했다. “어? 진짜?”성신영이 막 대답하려는 그때,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행여나 통화에 방해가 될까, 온가족은 숨을 죽였다.성신영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매니저의 전화였다. 그녀는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진짜 안 데리러 와도 돼. 천강 오빠가 호텔까지 데려다주기로 했어.”“그게 아니라, 신영아…”“너 저녁에 안 가봐도 될 것 같아.” 매니저는 조금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매니저의 말에 온 거실이 물이라도 뿌린 듯 조용해졌다.매니저의 목소리는 모든 사람의 귀에 똑똑히 들어갔고 순간 사람들의 얼굴빛이 달라졌다.성신영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시간이 바뀐 거야?”매니저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어이가 없었다. “아니, 우리가 놀아난 거야. 네가 이 역할에 안 어울리는 거 같다고 방금 연락이 왔어.”그
저녁 7시, 실크썬.강유리는 모든 배우들과 일일이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소문의 억만장자는 보이지가 않았다.육경서는 대본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선두로 말꼬리를 열었고 덕분에 분위기는 점점 더 화기애애해졌다.강유리는 그들이 하는 말을 한참 동안 조용히 듣고 있었다. 다들 원작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는지 적극적으로 작품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이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그녀는 자리를 피해 옥상으로 올라가 바람을 쐬었다. 작업실과 함께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상의할 겸해서 말이다.그들은 요즘 열심히 커플 반지를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골라도 마음에 드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직접 디자인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펜을 들었다…전화는 걸렸고, 전화기 너머로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리 언니, 디자인 받았어요. 엄청나던데요! 근데 이게 가공에 대한 요구가 좀 높아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제일 빨라서 언제 받을 수 있어요?”결혼한지가 언제인데, 그녀는 아직도 반지를 준비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녀가 너무 소홀했다.그래서 강유리는 빨리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릴걸요? 다이아가 없어서 해외에서 보내야 하거든요.”그 말에 강유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알았어요. 꼼꼼하게 해달라고 부탁 좀 해줘요. 옆에서 주시하고 있어 주세요.”한편 직원은 그만 참지 못하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떤 고객이길래 언니가 이렇게 직접 움직이는 거예요?”그 말에 강유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요.”“뭐라고요?”“그거 제 결혼반지예요.”“…”강유리는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날렵한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의식적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곳이 옥상이라는 사실을 깜빡하는 바람에 그만 팔꿈치를 난간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녀는 성홍주에게 뺨을 맞기까지 했다.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훈계였다. “이 배신자! 너처럼 이렇게 동생한테 각박한 사람
“당장 신영이 다시 촬영팀으로 불러. 가족끼리 얼굴 붉히게 만들지 말고!” 성홍주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불가능해요. 여자 조연은 이미 정해졌어요.” 강유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성홍주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승권을 손에 쥔 듯 침착한 강유리의 모습에 그의 마음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뭔가 예감이 왔다. 강유리가 이번 귀국에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다.강유리는 유강그룹을 손에 넣을 생각이다.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피땀을 쏟으며 경영한 유강그룹을 어떻게 손쉽게 그녀에게 넘겨주겠는가…성홍주의 눈빛은 험악했다. “강유리, 잊지 마. 병원에 있는 그 영감탱이한테는 아직 내 싸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협박이었다.강유리는 그의 말에 거절한 후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몸에 머물렀다.성홍주는 드디어 그녀의 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 나갔다. “육씨 집안에 들어가게 됐다고 기고만장해서는 네가 누구 딸인지도 잊었나 본데! 내가 강씨 집안의 몸을 걸치고 있는 한, 이 집안의 일은 다 내 손을 거쳐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성홍주는 자리를 떠났고, 옥상도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잠시 후, 그녀의 번호로 문자가 왔다. 성신영의 문자였다.‘언니, 대본 리딩은 빠질게. 대신 제작발표회에는 나 꼭 불러줘야 해.’휴대폰 너머로 성신영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강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주위에는 살벌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그게… 다시 오라고 해도 돼. 여자 조연한테는 내가 가서 해명할게.” 등 뒤에서 강덕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벽 쪽에는 머리 하나가 빼꼼 나와 있었다. 강덕준은 입술을 오므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덕준은 천천히 걸어오더니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네가 한참 동안 안 오길래 어디 갔나 해서! 그러
어두운 밤.검은색 벤틀리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임강준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그에게 물었다. “대표님, 롤스로이스 수리 다 끝났다는데, 차 바꿀 겁니까?”육시준은 재산이나 보여지는 것에 큰 요구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까탈스러웠다. 모두 명품 차 모으는 것이 그의 취미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는 단지 승차감이 편한 차를 고르고 있었을 뿐이다.롤스로이스는 수많은 차들 중 유일하게 그의 호감을 사고 있는 것이다.전에는 차 수리 문제도 있고, 또 아내한테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을 시켜 급하게 차 한 대를 구입한 것이었다. 그게 바로 이 벤틀리다. 하지만 이 차를 이렇게 오래 타고 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육시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바꿔.”그의 대답이 임강준을 놀라게 했다. “사모님은 아직도 모르세요?”남자는 눈을 뜨더니 그의 얼굴을 흘겨보며 말했다. “너라면 믿겠어? 자기가 고용한 남편이 억만장자라는 사실을?”“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처음부터 속이지 말았어야 했다니까요. 이제는 해명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됐잖아요.”“…”지속되는 침묵에 임강준은 자기가 입을 잘못 놀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는 머뭇거리며 자신의 잘못을 만회했다. “제 말은… 이렇게 속이다가 나중에 큰일 날 수도 있다는 말이죠.”뭐가 머릿속에 떠올랐는지 육시준은 가볍게 웃었다. “그럴 일 없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그는 여자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JL빌라는 칠흑같이 어두웠다.육시준이 도착했을 때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는 오늘 “마음의 문” 촬영팀이 대본 리딩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유리가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이 드라마에 무척이나 진심인 것 같았다.그는 샤워를 끝낸 후 욕실에서 나왔다. 방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강유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육경
육경서는 강유리를 따라 차에서 내리더니 바로 고자질을 하기 시작했다. “형, 그 감독 아무래도 문제 있는 것 같아. 오늘 형수님한테 술을 엄청 먹이더라니까! 게다가 형수님 주량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아주 손쉽게 취하게 만들더라니까!”강유리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강덕준이 무슨 흑심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 그냥 내가 때릴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야.”“…”“여보, 나 안아주면 안 돼? 나 못 걷겠어.”“…”육시준은 여자를 안아 올리더니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자를 소파에 내려놓더니 꿀물을 타려 몸을 일으켰다.강유리는 신고 있던 하이힐을 차버리고는 아무렇게나 소파에 기댔다. 그녀는 천장에서 반짝이는 크리스탈 샹들리에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눈이 부셨다. 눈이 아플 정도였다.성씨 집안사람들은 강도와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강유리의 모든 것을 뺏어간 걸로는 모자란 지 그녀를 통제하려 들기까지 했다.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한계를 모르는지 오히려 더 뻔뻔해졌다.“이거 마셔.”육시준은 그녀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숙이던 순간,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얼굴은 왜 그래?”밖은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방금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제야 강유리의 얼굴이 조금 부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입가도 조금 찢어져 있었다.강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공허함이 조금 섞여 있었다. 그녀는 육시준을 지긋이 쳐다보았다.“강유리?” 그녀의 반응에 육시준은 눈썹을 찡그렸다.강유리는 몸을 일으키더니 그가 건네는 꿀물을 받아 들었다. “당신이 진짜 엄청난 억만장자였으면 참 좋을 텐데.”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녀의 말에 육시준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는 몸을 쭈그리더니 강유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만약 그렇다면 뭘 하고 싶은데?”순간 강유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쥐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신영이랑 성홍주 죽여버릴 거야
“뭐가 문제야? 유리 신분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니까 내가 지시만 하면 서류는 아무 문제가 없어.”바론 공작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말하자 육경서가 물었다.“그럼 저는요?”“육 서방 서류가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자네가 협조하기만 한다면...”“협조 못 해요.”육시준이 바로 대답하자 바론 공작은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면서 나한테 왜 물었어? 이럴 거면 귀국할 거라고 얘기하면 되 것을 남을 것처럼 쓸데없는 말을 한바탕 물었어?’“하지만 전 유리 의견을 존중해요. 유리가 남고 싶다면 저도 함께 남을 것이고 비행기는 이미 준비됐으니 싫다고 하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바론 공작은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그래서 자네가 지금 내가 유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거야?”육시준은 그걸 이제야 알겠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말은 그렇지 않았다.“그런 뜻은 없어요.”바론 공작은 육시준을 힘껏 노려보더니 귀찮은지 가버렸다.‘이 자식이 보면 볼수록 마음에 안 들어. 유리 앞에서 갖은 자상한 척을 다 하더니 나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어. 기다려 봐. 내가 유리를 설득해서 이곳에 남게 하면 널 데릴사위로 맞아들일 거야.’시간이 훌쩍 지나 제2부가 시작되었다.이 동안에 육경서는 그날에 있었던 불쾌한 일을 잊어버린 듯이 여전히 신주리의 주위를 맴돌며 갖은 비위를 맞춰갔다.육경서는 녹화 날 댓바람부터 캐리어를 준비해 신주리의 아파트에 도착했고 카메라 감독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한 무리 사람이 돌처럼 굳어버리더니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었다.육경서는 그런 사람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서 문을 노크하자 그걸 본 카메라 감독은 신속하게 카메라 초점을 그에게로 맞추며 입을 열었다.“경서 씨 여긴 무슨 일이에요? 오늘 녹화하는 날인 걸 잊지 않았죠?”“알아요.”육경서가 대충 대답하자 카메라 감독이 물었다.“그럼 경서 씨 카메
문이 쾅 하고 닫히면서 하마터면 바론 공작의 코에 부딪힐뻔하자 그는 화가 나 펄쩍 뛰었다.‘역시 딸내미는 시집가면 남이야. 자기 남편밖에 몰라. 열받아.’강유리 심부름을 다녀왔던 도우미는 무슨 일인지 살짝 예상했지만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다시 험상궂은 바론 공작을 보더니 비밀을 배속으로 삼켜버리면서 말했다.“부부 사이 일이겠죠. 공작 어르신은 잠깐 기다렸다가...”“대디 걸이라고 누가 그랬어? 저 아이가 부부 사이의 일을 나한테 말해줄 것 같아? 이럴 때면 아비를 문밖에 버려두고 말이야. 사기꾼 같은 계집애.”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바론 공작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강유리는 너무 흥분돼 정신이 나갔는지 육시준을 방안으로 끌어들인 뒤 화장실에 숨어 뒤에 감춘 물건을 보여줬다. 빨간 두 줄이 눈앞에 나타나자 육시준은 멍하니 서 있었고 표정은 변함없지만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육시준은 가까스로 흥분을 억제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이게 뭐야? 그래서 결과가 뭐야?”“이게 뭔지 몰라? 두 줄이잖아. 나 임신했어. 이번에는 진짜야.”강유리가 활짝 웃으며 감격해 말했다. 육시준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테스트 시제를 받아 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으로 봐서 담담한 척했을 뿐이다. 그는 선명하게 찍힌 빨간 두 줄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사용 설명서를 읽어보더니 한참 뒤에야 하늘이 무너져도 끄덕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표정이 무너지면서 웃음꽃이 만발했다.“그렇다면...”“당신 아빠가 되었어.”강유리는 이런 육시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참지 못하고 재차 설명해 줬다. 다음 순간 강유리의 발이 허공에 뜨더니 육시준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고 천정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귓가에는 흥분으로 가득한 남자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아빠가 됐어. 드디어 아빠가 됐어. 내가 이럴 줄 알았어.”강유리는 머릿속이 죽통이 되는 것 같아 작은 손으로 그의 팔뚝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진정. 진정. 정숙.”이 순간에 무슨
강유리가 잠깐 멍하더니 살짝 고개를 쳐들며 물었다.“왜?”그러자 육시준은 강유리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남은 일정은 별로 끌리지 않아.”강유리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솔직히 요 며칠은 주로 집에서 바론 공작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남은 일정에 대해 강유리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그리고 예측하는 것이 있기에 그 일정을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강유리는 육시준이 눈치챘는지를 모르기에 머리로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비비더니 온화하게 물었다.“여보, 내가 요 며칠 라이브에 정신이 팔려서 당신한테 신경 못 썼어.”“맞아. 그래서 어떻게 보상할 거야?”육시준이 대수롭지 않게 묻자 강유리는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때라면 착한 육시준이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이해한다고 했을 텐데 보상을 요구했다.“부부 사이에 보상을 얘기하면 서운하지.”강유리는 작은 손을 내저으며 생글생글 웃었다.육시준은 그런 강유리한테 속지 않고 강경하게 말했다. “저번에 내가 긴급회의를 했다고 나한테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어? 그때는 왜 내가 서운해할 거란 생각을 안 했어?”‘이득 앞에서 못 본 체하는 건 바보가 아닌가?’하지만 강유리는 절대 육시준이 쉽게 이득을 보게 하지 않을 것이다.“좋아. 보상해 줄게. 내가 그렇게 억지 부리는 사람이 아니야. 방금 전의 제의 들어줄게.”그 말에 육시준은 미묘한 눈빛으로 강유리를 바라봤다.‘방금 제기한 요구라면 혹시 앞당겨서 귀국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육시준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고 항상 다른 사람을 계략에 빠뜨리던 그지만 강유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앞당겨 귀국하자고 한 건 사실 진짜로 귀국하자는 것이 아니고 강유리가 요즘 회사 일과 다른 일에 너무 정신이 팔려 자기한테 소홀한 것 같아 귀띔해 주려 했던 것인데 그녀가 바보인 척하며 그의 제의에 찬성했다. 강유리는 육시준의 놀란 표정을 보고 신
육경서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욕이라도 할까 봐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수를 욕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강유리의 뒤끝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더욱 두려운 건 육시준이었다. 화를 못 이겨 육경서는 핸드폰을 소파에 집어 던지고 미친 듯이 머리카락을 헤집더니 바닥에 있는 쿠션과 인형을 발로 차버리고는 다시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발길에 채워 저 먼 곳에 불쌍하게 누워있는 인형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주워서는 원래 자리에 예쁘게 놓아줬다. 이건 주리가 선물한 것이기에 절대 이 아이한테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 육경서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형수가 한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기에 강유리가 주리를 설득해 화해하지 못하게 한 것이고 두 사람이 절친이기에 그녀를 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이렇게 좋은 절친이 있으니 주리는 절대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육경서가 남도 아니고, 아아아아악!강유리가 빨리 도망치라고 했기에 주리가 육경서를 냉랭하게 대한 것이고 전혀 기회를 줄 뜻이 없었으며 오해를 풀고 나서도 화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인단 말인가?육경서는 털썩 주저앉아 오랫동안 생각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철없고 진지하지 못한 게 생리적 결함도 아닌데 고치면 되잖아.’육경서는 반드시 주리에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녀가 다시 자기를 신임할 수 있게끔 하리라고 결심했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전화를 끊고 나서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육경서가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모든 심리 변화와 최종 결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강유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무의식 간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깜짝 놀라 흠칫했다. 언제 들어왔는지 육시준이 팔짱을 끼고 베란다 옆 수납장에 기대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언제 왔어? 부르지 그랬어. 깜짝 놀랐잖아.”
강유리는 육경서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아마 여론 뒤에 또 모순이 생긴 모양이다. 솔직히 강유리는 두 사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긴 하지만 육경서가 아직 철들지 못했고 반평생을 도련님으로 살아왔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자기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만 모순이 생기거나 좌절을 겪으면 의심하고 심지어 포기해 버리기에 이대로 지속된다면 두 사람 모두 힘들어질 것이고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이다.강유리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도련님한테 비밀을 알려드릴게요.”육경서는 전혀 감흥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비밀이요?”육경서는 주리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지만 형수 말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주리가 처음 육씨 가문에 왔을 때 어머님이 사실 두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어요.”강유리가 진지하게 말하자 육경서는 몇 초 동안 침묵하더니 이내 터져버렸다.“이게 다 형수님 탓이잖아요. 엄마. 아빠 앞에서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남의 집 귀한 딸을 제가 해칠까 봐 그러신 거잖아요.”그러자 강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이게 왜 이상한 소리예요? 도련님이 저한테 직접 말했잖아요.”“형수님, 미안해요. 지나간 일은 지나가게 해줘요.”“도련님이 얘기를 먼저 꺼냈어요.”강유리가 느릿느릿 말하더니 이내 덧붙여 말했다.“제가 이 말을 하려는 건 어머님 태도 때문에 주리가 그날 기분이 상당히 잡쳐있었어요.”육경서는 이해가 안 가는지 되물었다.“왜요?”강유리는 어이가 없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도련님 생각에는요?”“주리가 승벽심이 강하고 어디를 가든 항상 주목받던 사람인데 어르신들의 사랑을 못 받으니 서운해서 그러지 않았을까요?”육경서 말에 강유리는 조용히 눈을 흘겼다.‘여태까지 솔로인 데는 다 이유가 있어. 미련 곰탱이 같으니라고.’오랜 침묵 끝에 육경서가 눈치를 챈 것인지 아니면 자신감이 붙은 건지 담대하게 예측했다.“혹시 저를 위해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바론 공작이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의료진은 불같이 달려왔고 한바탕 검사를 마친 뒤 아무 문제도 없다는 아주 난처한 결론을 내렸다.“당신들 뭐 하는 사람이야? 아무 문제도 없는데 왜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아빠가 너무 흥분하셨어요. 단순하게 위장이 불편했을 뿐이에요. 음식 습관이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강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론 공작을 위안했고 지금은 또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유리의 말에 찬성했다.“맞아요. 그럴 수도...”바론 공작은 그때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며 뒷말을 제지했다.‘네 자식이 감히 음식 습관이 안 맞다고 말을 하기만 해 봐. 내 딸이 어떻게 자기 집에서 음식 습관이 안 맞을 수 있어?’얼토당토않은 이유이고 이건 강제로 귀국시키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의사는 그제야 바론 공작의 말뜻을 이해하고 이내 덧붙여 말했다.“아가씨가 이곳에 오신 지 한참 되셨는데 음식 습관 때문에 위장이 불편할 건 같지 않고요. 제가 보기에는 내일 병원에 가셔서 전면 검사를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자택에서 검사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환경 제한이 있었다. 의사가 다행히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 덕분에 바론 공작이 비록 불만이 잔뜩 했지만 이내 손을 저으며 가보라고 했다. 강유리는 헛구역질 한번 한 것으로 아빠가 난리법석하는 모습이 우스웠지만 그래도 마음속은 따뜻했다. 사실 강유리는 생리가 일주일이나 미뤄졌기에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전에 한번 해프닝을 겪었던 기억이 있기에 확정된 다음에 말하려고 아무 내색을 내지 않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강유리는 도우미를 불러 심부름을 다녀오라고 하자 그녀는 흠칫하더니 이내 두 눈을 반짝이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강유리는 식지로 입을 막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비밀이야. 바론 공작과 육시준이 알게 하면 안 돼.”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 어둠이 내리자 강유리는 베란다 소파에 앉아 절반 넘게 진행
어떤 커플이 툭하면 사귀고 툭하면 헤어지고 그런단 말인가? 만일 이번에 톡톡히 혼내주지 않으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반드시 이번 기회에 나쁜 버릇을 고치고 진심을 보여주게 해야 한다.그리고 아직 예능 프로그램이 남았으니 함께 출연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육경서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생각했다.솔직히 절친이 있으면 이런 점이 너무 좋았다. 무슨 일이든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주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며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스로 괴롭히는 것을 자제하게 해준다.전에 신주리도 마찬가지로 릴리와 신하균이 사귄다고 했을 때 가족애를 버리고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여기까지 생각한 신주리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물었다.“그날 밤 네가 그랬잖아. 신하균과 사귀는 것이 단지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직업 도덕에 반했고 고독한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고.”이건 릴리가 신하균과 연애한 뒤 신주리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한 말이다.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신주리는 두 사람의 연애를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릴리는 말문이 턱 하니 막히더니 부자연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그런 말을 했어?”그러자 신주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분명히 했어.”릴리는 생각하는 척하더니 반박하지 않고 말했다.“맞는 말이잖아. 내가 그때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지금 운수가 안 좋아.”신주리는 릴리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융통성이 전혀 없고 일밖에 모르는 신하균은 예쁜 말로 여자를 달랠 줄도 모르고 낭만도 모르며 외모 빼면 자랑할 것이라곤 전혀 없으니 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단체방에서 수다를 떨다 결과를 마저 듣지도 못하고 릴리가 오프해버리는 바람에 심심한 나머지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 검색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는 동시에 머리 한쪽 구석으로 이젠 귀국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도우미들이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하는 냄새가 어렴풋이 전해오자 강유리는
그 기분이 신씨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잘 유지되었고 비록 두근거리고 긴장됐지만 그래도 더없이 기뻤다. 하지만 신주리의 이 한마디 말이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얼어들었다.‘연기라고 했어...’육경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한참 동안 노려보자 불편함을 느낀 신주리는 두 사람의 운명을 책임진 운전대를 직접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빨간불 앞에 차가 멈추자 신주리는 두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투덜거렸다.“왜 쏘아보고 그래? 그러다 물기라도 할 것 같아.”육경서는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주리야.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오해가 생긴 게 유미나 때문인 줄 알았어.”이 말은 진심이었고 그는 유미나만 해결하면 두 사람이 화해할 줄 알았지만 신주리의 태도로 봐서는 전혀 장난 같지 않았다. 그를 혼내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주리는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네 생각이 틀렸어. 우리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솔직히 신주리도 유미나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절대 두 사람 사이의 걸림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한 번도 육경서와 그녀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상대를 대하는지의 문제였다. ...여론이 지속적으로 확산되면서 오늘 밤 어떤 사람은 상심에 빠졌고 어떤 사람은 수심이 가득했다. 유미나와 매니저는 서로 원망하기에 바빴고 게다가 거액의 배상금까지 떠안게 되어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육경서와 신주리도 아직 화해하지 못했기에 똑같이 수심에 빠져있었다. 신주리는 절대 나 혼자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물귀신 작전을 펼치러 월계만으로 달려가 눈에 띄는 커플만 있으면 헤집어놓을 심산이었다. 릴리 집에 도착해보니 뻔뻔한 친오빠는 그곳에 없었고 릴리 혼자만 절친 단체방에서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젯거리는 당연히 신주리였다.“핸드폰이 그렇게도 좋아?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떡하니 서
현재 신주리 실력과 지위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지하 주차장에 신씨 가문 차량이 오래전부터 대기하고 있었고 경호원이 기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서슬이 퍼레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신주리는 매니저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차를 향해 걸어가자 경호원이 깍듯이 차 문을 열어줬고 허리를 숙여 차에 오르니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넌 왜 여기에 있어?”신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있는 육경서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말했다.“기자한테 포위돼 못 빠져나가는 것을 어머님, 아버님이 구해주셨어.”신명진은 고개를 돌려 짜증 섞인 신주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다 가족인데 모순이 있으면 집에 가서 문 닫아걸고 얘기해.”그러자 한영숙도 한마디 곁들었다.“그래. 이 자식이 평소에는 믿음이 별로 안 갔는데 오늘 결정적인 순간에 너를 위해 서슴없이 나서는 것을 보니 그나마 책임감은 있는 것 같아.”신씨 부모님은 신주리의 열혈 팬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를 수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단지 팬에 그쳤고 딸이 실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신주리가 입을 열고 뭐라고 설명하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차는 서서히 신씨 가문 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전에도 육경서가 신씨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사위 신분으로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하필이면 또 이런 특별한 사건이 생긴 시점이라 덜컥 겁이 났다.바로 이때 신주리가 입을 열고 말했다.“두 분은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저희는 아직 할 일이 있어 나갔다 와야겠어요.”그러자 한영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녁 먹을 시간인데 뭐가 그렇게 바빠?”“회사 여부장님이 좀 만나자고 해서요.”신주리는 대충 아무 핑계를 대면서 두 사람을 차 밖으로 밀어냈다. 합리적인 이유라 부모님이 두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영숙은 차에서 내리면서 낮은 소리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