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균은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이 말을 듣고 이전처럼 폭주하지 않았고 그녀가 상상한 것처럼 기회를 틈타 마음을 털어놓지도 않았다.그는 단지 가볍게 한마디 했다.“네, 조카딸이죠. 삼촌이라고 부르잖아요?”릴리는 이 아저씨가 오늘 저녁에 가짜 술이라도 마신 게 아닌지 의심했다.하던 대로 하지 않으니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주아언니는 신하균이 여러 가지 원인으로 그녀에게 피드백을 주려 한다고 했는데?그 피드백이 고백은 아니더라도 친척관계를 맺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차가 은하타운에 도착했다.릴리는 천천히 안전 벨트를 풀고 운적석의 남자를 보면서 눈알을 굴리다가 무심하게 물었다.“삼촌,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실래요?”“네, 내려요.”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릴리는 손해 본 것 같은데 화를 낼 수도 없었다.‘와! 이 아저씨가 미친 거 아니야? 그래, 정말 삼촌이 되고 싶다, 이거지?’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입씨름 소리가 들려왔다.“이 계집애가 들어오기만 해 봐. 다리를 분질러버릴 거야. 이게 다 뭐야? 어떻게 이런 걸 올릴 수 있어?”바론 공작의 목소리는 무시무시하고 불만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강유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왜 못 올리는데요? 아버지 위치에 영향이라도 있어요?”바론 공작은 딸이 이렇게 말하자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설명했다.“나한테는 영향이 없지만 그 계집애한테 영향이 있잖아. 지금 사람들이 웃음거리로 삼고 있어.”“누가 웃음거리인데요? 릴리가요? 솔직담백하고 용감하고 책임지는 사람을 웃을 일이 뭐가 있어요?”“아니, 걔가 지금은 고성그룹 일원인데 이렇게 가문의 명예를 고려하지 않으니...”“목숨도 위태로운데 가문의 명예까지 고려해야 해요?”“그렇다고 함부로 하면 안 되잖아. 고정철이 이미 체포됐는데, 또 뭐가 불만이래?”“네, 아버지는 성홍주가 체포되니 만족스럽던가
“맞선다는 말은 좀 심하지만, 이 일로 말다툼이 일어난 건 확실히 문제 있어요. 결국 릴리가 그날 아버지에게 썼던 표현이 정확한 것 같네요.”“무슨 표현?”“이중잣대!”문밖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릴리가 스스로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고치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뭘 고쳤는데요? 맨날 싸우고. 형부가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둘이 싸웠을 거잖아요?”“위아래도 없어? 누구한테 말해? 어른을 보고 인사도 안 해?”바론이 못마땅한 듯 흠부터 잡았다.릴리는 그와 다투지 않고 착하게 그의 말에 따라 인사했다.“아버지, 안녕하세요.”바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뒤에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이분은...”“아, 이분은 제 삼촌이에요.”“...”공기가 얼어붙은 듯 조용했다.신하균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돌아서서 가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이 계집애가.’그는 한참 잠자코 있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농담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릴리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뭐라고 반박하려 할 때 옆에서 협박의 뜻이 담긴, 차가운 시선이 날아왔다.“어른 앞에서 소란 피우지 마세요.”릴리는 말없이 입을 삐죽거렸다.‘아까는 자연스럽게 대답하지 않았어? 겁쟁이!’속으로는 비난했지만 겉으로는 더 이상 맞서지 않고, 계속해서 아버지 트집을 잡았다.“아버지, 이중잣대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또다시 그 화제로 돌아가자 바론은 잠시 침묵했다.그때 당시는 몰랐지만, 그 표현을 그런 맥락에서 썼으니 어쨌든 좋은 말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리고 후에 특별히 알아봤었다.“이중잣대는 분명 같은 일인데 자기 취향, 이익 등 요인 때문에 다르게 요구하는 것을 말해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과 비슷한 말인데 이해되세요? 말 그대로인데...”“됐어. 나도 알아. 누가 설명하래?”바론은 화가 나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릴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비아냥거렸다.“아세요? 저는 또 몰라서 번번이 고치지
거실에는 야릇한 침묵이 흘렀다.육시준은 비슷한 성격에, 툭하면 싸우는 부녀를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이런 말투는 당연히 문제없다. 하지만 그걸 들춰내고 일부러 그러는 건 문제다...“풉!”옆에 서 있던 릴리가 참지 못하고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극히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일부러 그런 거죠? 제가 언제 그렇게 가식적으로 말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애교스러운 말투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에요. 연습 많이 하셔서 앞으로 아버지가 화낼 때마다 애교 부리세요. 굉장히 효과적이고 백발백중이에요.”“...”신하균은 옆에 서서 소리 없이 입가를 씰룩했다.남의 약점을 논하는 건 그렇다 치고, 그걸 그 사람 앞에서 말하면 어떡하나?그 사람 체면은 생각하지 않는 건가?이전에 효과가 있었다고 해도 앞으로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바론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헛소리하지 마! 내가 언제 그랬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애교를 부린다고 마음이 바뀌면 뭐가 돼?”“당연히 우리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거죠. 사랑해요.”릴리는 그를 향해 하트를 날리고 윙크도 했다.“...”가장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은, 이 망할 계집애와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화를 낼 때 이 계집애는 애교를 부리며 그의 환심을 산다는 것이다.화가 나지만 어찌할 수도 없다.어쨌든 원칙을 지켜야 하는 큰일도 아닌데, 굳이 감정 상하게 혼낼 필요가 없고, 또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그리고 이 일 때문에 딸과 사이가 멀어지고 싶지 않다...입술을 꽉 깨물고 생각하던 바론은 한참 뒤에야 결론을 냈다.“이번에는 됐어.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그리고 나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야. 너희가 정말 잘못을 저질렀다면 나는 절대 눈감아 주지 않을 거야.”“네네, 맞아요! 아버지는 매우 합리적이고 원칙적인 사람이죠. 하지만 이번에 입장을 바꿔서 제 생각을 해주셨으니 큰 변화라 할 수 있어요. 이중잣대를 쓰지 않
릴리는 문득 한 가지 일이 생각났다.“언니 결혼식에서 소란을 피웠던 한지철이라는 사람이 뭔가 불었어요?”“맞아, 증거는 그 사람 손에서 받은 거야. 고한빈도 이번에 결사의 각오로, 성신영을 이용해 너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려고 했지. 그리고 은밀히 재산을 빼돌린 것도 사실이야. 지금 천천히 되돌리고 있어.”“되돌릴 수 있어요?”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강유리는 잠시 멈추고 바론을 힐끗 쳐다보았다.“되겠지.”그가 하루빨리 귀국하면 어떤 일은 처리하기 편리해질 것이다.그녀의 시선을 느낀 바론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나는 토요일에 Y국으로 돌아가.”“...”전에 일정 얘기를 듣지 못 했던 강유리는 갑자기 돌아간다고 하니 좀 놀랐다.“그렇게 빨리요?”딸이 가라고 암시하는 것 같아 좀 서운했던 바론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의 먹구름이 조금은 걷혔다.“빠르긴. 여기 충분히 오래 있었어. 며칠 전에 결정하고 너와 상의하려 했는데 네가 너무 바빠서 말을 못 했어.”강유리는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바쁘다는 건 다 거짓말이고, 그를 피하고 싶어서 자꾸 회사에 나갔을 뿐이다.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의견이 달라 말다툼을 하거나 그가 이유 없이 지극 정성을 보여서 당해낼 수 없었다...그녀가 입을 벌리고 뭔가 말하려는데 바론이 말을 이었다.“시준의 말을 들어 보니 너희가 아직 신혼여행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았다며? 아니면 Y국으로 올래?”전에는 시국도 그렇고, 두 사람의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아 부녀 사이가 매우 소원했다.강유리가 Y국에 3년 동안 머물렀지만 두 사람은 별로 만나지 않았다.그녀는 오히려 릴리 모녀와 더 자주 만났다.그녀가 Y국으로 신혼여행을 온다면 그는 반드시 일정을 적절하게 배치해서 그녀가 편하고 달콤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줄 것이다.“물론 네가 따로 좋아하는 곳이 있다면 그쪽으로 준비해 줄 수도 있어. 네가 원한다면, 나는 반드시...”“Y국도 괜찮을 것 같아요.”강유리는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고
신하균은 정면을 응시하며 조용히 차를 몰았다.차 안이 너무 조용했는지 그는 가끔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소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차창에 기대어 가끔 휴대전화를 보았다. 나무 그림자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차에 비치어 들어와 얼룩덜룩하게 그녀의 작은 얼굴에 떨어졌다.“무슨 생각 해요?”신하균은 낮은 목소리로 예고 없이 입을 열었다.“대표 이사 자리에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릴리도 갑자기 답답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말이 나오자 두 사람은 모두 어리둥절했다.신하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다시 쳐다보더니 눈 밑에서 몇 가닥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정신을 차린 릴리는 머뭇거리며 신하균에게 질문을 던졌다.“고한빈의 일은 하균 씨 알고 계시죠?”“릴리씨 생각은 어때요?”신하균은 무심코 반문했다.“내 생각은 하균 씨 형부랑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데 이 일을 같이 꾸몄다는 걸 보니 알고 계셨겠죠? 조사 따위는 그냥 의례적인 일인가요?”“릴리 씨는 아마 형부를 잘 모를 거예요. 그는 일을 할 때 사람들에게 완전히 털어놓지 않아요.”“...”릴리는 잠시 침묵했다.‘그러니까 미리 몰랐다는 말이지?’추측이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신하균은 다시 말했다.“하지만 우리 친분이 있으니 이런 건 나한테 숨기지 않을 거예요.”랄리는 이 말을 듣자,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그래서 하균 씨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요?”“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무슨 상관이 있어요?”신하균이 다시 물었다.“그는 하균 씨에게 숨길 게 없다면서요. 왜 또 전적으로 아니라고 하죠? 그럼, 하균 씨는 대체 아시는 거예요, 모르시는 거예요?”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릴리 씨 묻고 싶은 것은 제가 아는 것에 대한 어느 부분 말이에요?”그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릴리는 그와 계속 얼버무리고 싶지 않았다.“오늘 밤 우리가 물어본 내용에 대해 고씨 가문의 약점이 우리 형부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들었
”...”릴리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약간 황홀하고 불확실했다.그가 이렇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이 바로 그녀의 이 말을 듣기 위해서 인가?삼촌 조카 농담 안 하겠다는 말?릴리가 넋을 잃고 있을 때 그가 덧붙여 말했다.“다음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렇게 돌려서 말하지 말고 직접 물어봐요.”릴리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제가 직접 물어봤잖아요.”“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쪽에서 답장이 없어요? 그리고 릴리 씨 물어본 것이 아니라 제가 물어본 것이에요.”신하균은 담담하게 말했다.“제가 직접 물어보면 알려 주실 거예요?”신하균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그건 모르는 거죠.”“봐요, 제가 물어봐도 안 알려주는데 저보고 직접 물어보라고요?”릴리가 눈을 희번덕거렸다.“하지만 릴리 씨 묻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잖아요.”“...”릴리는 눈동자가 번쩍하여 잠시 말이 없었다.이 말은 좀 익숙하다.그녀가 전에 그에게 얘기했던 것이었다.예전에 그녀는 항상 그의 꽁무니를 쫓아다녔고 그의 기분을 지켜보았다. 그의 과묵한 것을 눈치채거나 그녀의 어떤 말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면 아양을 떨며 그를 달래곤 했다.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고 묻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하균 씨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여요? 릴리가 떠보듯 물었다.“네. 신경이 쓰여요.”몇 초가 지나자 그는 덧붙여 말했다. “릴리 씨가 여동생이라 신경 쓰이는 게 아니예요.”릴리가 입을 딱 벌리고 ‘그럼 뭐 때문인가요?’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삼켜버렸다.짐작한 그 답을 얻을까 봐 두려웠고 또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차 안이 조용했다.두 사람 모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에어컨에서 찬 바람을 내뿜는 희미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어둠을 밟으며 차는 월계만으로 들어가 천천히 주차장에 들어섰다.“내일 몇 시에 회사에 가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신하균은 먼저 입을 열었다.“아, 아니에요 저는
릴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그를 엘리베이터 밖으로 밀어냈다.“그냥 물어본 거예요.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그런 다음 릴리는 미친 듯이 ‘문 닫기’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문은 그녀가 서두른다고 해서 속도가 빨라지지 않았다.마침, 문 닫기 전에 그녀는 신하균의 또렷한 대답을 들었다.“릴리 씨.”“...”손가락이 버튼 위에 멈췄다.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릴리는 혼자 엘리베이터 안에 서서 문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웃었다.봐봐, 그녀 자신이 가장 이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김솔 그 계집애는 몇 년 더 꾸민다고 해도 그녀를 따라잡지 못하겠지. 헤헤헤...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는 그만 생각하고 번거로운 문제는 일단 접어두는 것이 릴리가 줄곧 유지해 온 이념이다.그래서 신하균의 변화가 그녀를 잠시 혼란스럽게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고민하지 않았다.앞으로 대범하게 지내면서 차갑지도 않고 들이대지도 않고 예전 습관을 고치고 툭하면 애매한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말고 점잖게 말하면 된다.토요일 오전.간만에 쉬는 날 릴리는 강유리의 전화에 잠이 깬 다음에 계속 눈을 붙이려는데 또 초인종이 울렸다.릴리는 벌떡 일어나 앉아 초인종 소리를 꾹 참고 귀찮은 얼굴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그만 눌러. 그만 눌러! 누구야. 이른 아침에!” “...”문을 확 열자 요즘 낯익고 아주 멋진 얼굴이 나타났다.남자는 제복을 입고 있어 터프하고 멋있는 모습이 방금 그녀의 분노를 소리 없이 잠재우게 했다.하여튼 진짜 잘 생겼다...릴리가 그를 훑어볼 때 그도 릴리를 훑어보고 있었다.릴리는 검은색 슬립이 헐렁헐렁하게 걸쳐져 있고 방금 일어나 긴 머리가 어깨에 헝클어져 있었다.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가느다란 목덜미와 쇄골이 보였다.그녀는 맨발에 날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어 가느다란 팔로 문설주를 짚은 채 비스듬히 문에 기대어 있었다. 항상 활력이 넘치던 작은 얼굴에 나른함과 여성스러움이 더해졌고 눈동자는 매혹스럽게 그를 응
릴리는 입을 삐죽거리고 고개를 돌리며 갑자기 얼어붙었다. 엘리베이터 반대편 문 건너편 옆쪽 복도에서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벽에 기대어 그녀의 작은 몸짓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릴리는 어설프게 눈을 피하며 천천히 몸을 곧게 세워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아직 안 가셨어요?”“실망 많이 하셨나요?”남자는 검은 눈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릴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태연하게 답했다.“괜찮아요.”신하균은 그녀의 심술궂은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놀리지 않고 손목을 들어 올려 보며 말했다.“세수하고 옷 갈아입는데 10분이면 충분해요?”“당연히 부족하죠. 10분이면 되는 여자를 본 적이 있어요? 화장도 해야 하는데요.”“늦겠네요.”“걱정 마세요. 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아버지께서도 안 가실 거예요.”“...”가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중요한 거는 바론 공작은 오늘 공식적인 일이 있어서 지체할 수 없다.그는 몇 초 동안 그녀를 쳐다보더니 어쩔 수 없이 낮은 목소리로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릴리 씨는 작별 인사를 하지만 저는 당번이에요. 말 잘 듣고 가는 길에 화장해도 괜찮을까요?”“...”그녀는 몇 초 동안 침묵했다가 다시 쾅 하고 차갑게 문을 닫았다.방에서 여자아이는 문에 기대어 얇은 눈썹이 찌푸려졌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말 잘 들어요?”“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하죠?”릴리는 손을 들어 뜨거워지는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곧장 옷방으로 향했다.그렇게 차려입고 그런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 정말 반칙이었다.10분 후.방문이 다시 열리더니 여자아이는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고 검은 구두를 신었다. 머리 꼭대기에서 올림머리를 묶고 날씬하고 하얀 목을 드러냈다.민낯이지만 젊고 아름다우며 마치 캠퍼스를 떠난 대학생인 것 같았다.엊그제 직업 분장을 하고 어른인 척하는 것과는 달리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신하균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해 몇 초 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그녀는 그를 일깨워 말했다.“가시죠. 늦으면 두렵지 않으
어떤 커플이 툭하면 사귀고 툭하면 헤어지고 그런단 말인가? 만일 이번에 톡톡히 혼내주지 않으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 반드시 이번 기회에 나쁜 버릇을 고치고 진심을 보여주게 해야 한다.그리고 아직 예능 프로그램이 남았으니 함께 출연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육경서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생각했다.솔직히 절친이 있으면 이런 점이 너무 좋았다. 무슨 일이든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주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며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스로 괴롭히는 것을 자제하게 해준다.전에 신주리도 마찬가지로 릴리와 신하균이 사귄다고 했을 때 가족애를 버리고 그녀의 손을 들어줬다.여기까지 생각한 신주리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물었다.“그날 밤 네가 그랬잖아. 신하균과 사귀는 것이 단지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 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직업 도덕에 반했고 고독한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라고.”이건 릴리가 신하균과 연애한 뒤 신주리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한 말이다.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신주리는 두 사람의 연애를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릴리는 말문이 턱 하니 막히더니 부자연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내가 그런 말을 했어?”그러자 신주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분명히 했어.”릴리는 생각하는 척하더니 반박하지 않고 말했다.“맞는 말이잖아. 내가 그때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지금 운수가 안 좋아.”신주리는 릴리 말에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융통성이 전혀 없고 일밖에 모르는 신하균은 예쁜 말로 여자를 달랠 줄도 모르고 낭만도 모르며 외모 빼면 자랑할 것이라곤 전혀 없으니 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다른 한편, 강유리는 단체방에서 수다를 떨다 결과를 마저 듣지도 못하고 릴리가 오프해버리는 바람에 심심한 나머지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 검색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러는 동시에 머리 한쪽 구석으로 이젠 귀국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도우미들이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하는 냄새가 어렴풋이 전해오자 강유리는
그 기분이 신씨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잘 유지되었고 비록 두근거리고 긴장됐지만 그래도 더없이 기뻤다. 하지만 신주리의 이 한마디 말이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얼어들었다.‘연기라고 했어...’육경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이 한참 동안 노려보자 불편함을 느낀 신주리는 두 사람의 운명을 책임진 운전대를 직접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빨간불 앞에 차가 멈추자 신주리는 두 손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리더니 투덜거렸다.“왜 쏘아보고 그래? 그러다 물기라도 할 것 같아.”육경서는 슬픔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주리야.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오해가 생긴 게 유미나 때문인 줄 알았어.”이 말은 진심이었고 그는 유미나만 해결하면 두 사람이 화해할 줄 알았지만 신주리의 태도로 봐서는 전혀 장난 같지 않았다. 그를 혼내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아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주리는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네 생각이 틀렸어. 우리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솔직히 신주리도 유미나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절대 두 사람 사이의 걸림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한 번도 육경서와 그녀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상대를 대하는지의 문제였다. ...여론이 지속적으로 확산되면서 오늘 밤 어떤 사람은 상심에 빠졌고 어떤 사람은 수심이 가득했다. 유미나와 매니저는 서로 원망하기에 바빴고 게다가 거액의 배상금까지 떠안게 되어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육경서와 신주리도 아직 화해하지 못했기에 똑같이 수심에 빠져있었다. 신주리는 절대 나 혼자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물귀신 작전을 펼치러 월계만으로 달려가 눈에 띄는 커플만 있으면 헤집어놓을 심산이었다. 릴리 집에 도착해보니 뻔뻔한 친오빠는 그곳에 없었고 릴리 혼자만 절친 단체방에서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화젯거리는 당연히 신주리였다.“핸드폰이 그렇게도 좋아?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떡하니 서
현재 신주리 실력과 지위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다 보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지하 주차장에 신씨 가문 차량이 오래전부터 대기하고 있었고 경호원이 기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서슬이 퍼레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신주리는 매니저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차를 향해 걸어가자 경호원이 깍듯이 차 문을 열어줬고 허리를 숙여 차에 오르니 불청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넌 왜 여기에 있어?”신주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아있는 육경서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돌려 활짝 웃으며 말했다.“기자한테 포위돼 못 빠져나가는 것을 어머님, 아버님이 구해주셨어.”신명진은 고개를 돌려 짜증 섞인 신주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다 가족인데 모순이 있으면 집에 가서 문 닫아걸고 얘기해.”그러자 한영숙도 한마디 곁들었다.“그래. 이 자식이 평소에는 믿음이 별로 안 갔는데 오늘 결정적인 순간에 너를 위해 서슴없이 나서는 것을 보니 그나마 책임감은 있는 것 같아.”신씨 부모님은 신주리의 열혈 팬이기에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를 수 없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단지 팬에 그쳤고 딸이 실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두 사람이 아직까지 사귀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신주리가 입을 열고 뭐라고 설명하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차는 서서히 신씨 가문 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전에도 육경서가 신씨 가문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사위 신분으로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하필이면 또 이런 특별한 사건이 생긴 시점이라 덜컥 겁이 났다.바로 이때 신주리가 입을 열고 말했다.“두 분은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저희는 아직 할 일이 있어 나갔다 와야겠어요.”그러자 한영숙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녁 먹을 시간인데 뭐가 그렇게 바빠?”“회사 여부장님이 좀 만나자고 해서요.”신주리는 대충 아무 핑계를 대면서 두 사람을 차 밖으로 밀어냈다. 합리적인 이유라 부모님이 두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영숙은 차에서 내리면서 낮은 소리로 중
유미나 소속사는 반나절이 지나도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들은 애당초 육경서의 인기를 훔칠 생각도, 신주리를 모함할 생각도 없었으며 중요한 건 하라고 시켜도 감히 못 했을 것이다. 소속사 사장은 무수히 쌓인 계약 해지 및 배상 건에 관한 서류와 인터넷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스캔들에 화가 나 책상을 치며 물었다.“당사자는 아직도 연락이 안 돼?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대체 누굴 보고 수습하라는 거야?”“연락됐는데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답니다...”“병원에서 확 죽어버리라고 해.”사장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정신없이 울어대는 핸드폰을 보더니 지친 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성명 발표해.”유강 엔터와 신씨 가문 중 어느 한 곳도 그가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중요한 건 육씨 가문에서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다. 현재 상황에서 회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미나와 멍청이 매니저와 관계를 청산하고 사건의 경위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모르쇠를 놓는 것밖에 없었다.반 시간도 안 돼 유미나 소속사에서 회사와는 무관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소속사의 과감하고 신속한 대응에 대중뿐만 아니라 유미나 매니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회사를 위해 몇십 년 동안 소처럼 성실하게 일해 온 결과가 바로 오늘의 토사구팽이란 말인가?매니저는 기자들의 질문을 피하고자 꺼놓았던 핸드폰을 켜더니 연속 걸려 온 두 건의 광고 업체 전화를 끊어버리고 사장에게 연락을 하니 전화기가 꺼진 상태였다. 매니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몇 년 동안 소속사 연예인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긴 했지만 그때마다 회사는 눈을 감아주고 말없이 지지해주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이렇게 내동댕이칠 수 있단 말인가?“언니, 어떻게 됐어요? 회사에서 어떻게 처리하래요?”이제 막 정신을 차린 유미나는 모든 희망을 매니저에게 걸고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자 매니저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싸늘한 눈빛에 온통 혐오
현장 분위기의 열기가 하도 뜨거워 기자들은 발표회가 끝나고 보도하기로 한 내용을 상사와 연락을 취한 뒤 바로 현장에서 라이브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최 측에서도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기에 이 일은 날개라도 달린 듯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신주리 신안 그룹 회장 딸#”“#신주리와 육경서야 말로 진정한 소꿉친구#”“#유미나 사기꾼#”“#짝퉁 아가씨와 리얼 아가씨와의 만남#”“#이건 사기와 다른 점이 있을까#”이러한 검색어가 재빠르게 실시간 검색어 랭킹에 진입하더니 검색어 옆에 이내 빨간 상승 화살표가 붙어버렸다. 유미나는 생전 처음 이렇게 큰 상황을 겪었고 처음 이렇게 많은 실시간 검색어를 소유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적인 기사로도 신주리를 초월하지 못했고 시종일관 신주리 검색어 하단에 위치했다.“세상에. 그러면 유미나가 여태까지 자작극을 벌였던 거야? 이건 사기와 다를 바와 없잖아. 하마터면 믿을 뻔했어.”“재벌 집 딸 컨셉으로 진짜 재벌 집 딸을 제압하려 했으니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판 거나 다름없지, 뭐.”“영상을 보고 나니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갔어. 우리 주리가 드디어 성장했어. 참다가 더는 못 참겠으니 반격하는 법도 배웠어.”“신안 그룹 회장님 너무 멋있어요. 딸을 위해 서슴없이 마이크를 잡았어.”“제가 앞에서 육경서 씨를 쓰레기라고 욕해서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오늘 영상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맞아요. 제가 경서 오빠 팬인데 저도 오빠가 양다리 걸친 줄로 오해했어요.”“유미나 여우 같은 것이 경서 오빠가 신사란 걸 알고 폭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짓을 벌였어.”“아무리 신사라고 해도 이걸 어떻게 참아요? 현장에서 주먹을 휘두르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신사예요.”“여기서 포인트는 경서 오빠가 해명하고 나서야 신주리가 해명했다는 것.”“유미나 팬들 다 어디 갔어? 나와서 계속 떠들어보지 그래?”“...”강력한 증언 앞에서 유미나 팬들은 감히 머리도 내밀지 못했고 혹시라도 연루될까 봐 당장
두 분은 고급 허세로 위풍당당하게 신주리의 체면을 세워줬고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부모님을 탄복했다.하지만 신주리는 부모님이 이 시간이 오기까지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 수 없었고 옆에 앉은 신하균과 릴리가 잡지 않았더라면 이미 벌써 폭발했을 것이다. 딸이 부모님이 필요하다는데 머뭇거릴 게 뭐가 있단 말인가?신주리는 활짝 웃으며 부모님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고개를 돌려 돌처럼 굳어버린 유미나를 향해 물었다.“어때요? 제 부모님은 초라하지 않겠죠?”유미나가 넋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신주리가 계속해 말했다.“유미나 씨가 말끝마다 제 남자 친구와 소꿉친구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저도 어릴 적부터 제 남자 친구와 알고 지냈어요. 그런데 왜 유미나 씨를 본 적이 없죠? 그리고 방금 혼내주겠다고 했는데 제 남자 친구를 유미나 씨 같은 사기꾼이 혼내줄 자격이 있어요?”신주리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자 유미나의 모든 거짓말이 들통났다.그녀의 재벌 집 아가씨 신분과 육경서의 소꿉친구라는 설정이 마치 고무 풍선마냥 부풀어 올라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그 고무풍선이 누군가에 의해 터져버리는 날이면 그 위력 또한 어마어마한 것이다. 유미나는 육경서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고, 이 정도 문제로 육씨 가문에서 직접 나서서 자기를 폭로시키지 않을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재벌 아가씨 컨셉으로 한동안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확신했다.하지만 거짓말이 지속되면 현실과 혼돈되는 경우가 있다.유미나의 최대 잘못이라면 신주리를 제압하려 한 것이고 그로 인해 이런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주위에서 보내오는 각양각색의 눈빛과 수군거리는 비아냥 소리에 유미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더니 당장에서 기절해 버렸다. 주최 측은 입장이 난처해 부축할지 말지를 고민했고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신명진 부부에게로 들이밀었다. 신주리는 자기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아 바로 고개를 돌려 무대 뒤로 향하자 현장에 있던 경호원들이 재빠르
유미나는 자기 실력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아무리 허세를 부린다고 해도 이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진 돈과 가산을 탕진해도 유미나가 결제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던 유미나는 부인하지 않고 바로 신주리의 말을 받아쳤다.“맞아요. 제가 일부러 그랬어요. 오늘 패션쇼에 전시된 물건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경서가 여자 친구한테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아 혼내주려고 그런 거예요.”“그럼 신주리 씨는요? 경서가 지금이야 신주리 씨한테 빠져 고분고분 말도 잘 듣고 그러겠지만 나중에도 그럴까요?”“그리고 신주리 씨는 또 무슨 자격과 배짱으로 저한테 이걸 살 수 있냐고 묻는 거예요?”신주리는 마치 마지막 발악을 하는 광대를 바라보듯이 유미나를 한참이나 지그시 바라봤다.육경서가 오늘 이 무대를 준비한 건 반드시 이곳에서 끝장내겠다는 뜻일 텐데 유미나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 도발했다.만일 어느 날 갑자기 유미나가 출연금지라도 당하는 날이면 앞에서 했던 유미나의 발언만으로 또 어떤 정신 나간 팬들은 육경서와 신주리의 탓이라고 떠들어댈 수 있다. 신주리는 유미나가 재벌 집 아가씨 신분을 사칭하는 것이 취미라면 진짜 재벌 집 아가씨의 본때를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내가 무슨 자격과 배짱이 있냐고 물었어요?”그 말에 유미나는 어리둥절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신주리가 MC를 향해 손을 내밀자 주최 측 담당자가 달려오더니 조용히 물었다.“주리 씨, 혹시 무슨 분부라도?”신주리는 담당자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입을 삐죽거리더니 말했다.“유미나 씨 주문서 저한테 보여주시겠어요?”그러자 담당자는 손에 들고 있던 주문서를 건네주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주리는 주문서를 쭈욱 내리훑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혼내주려고 했던 거 맞네요. 모든 브랜드의 신상을 두 벌씩 주문하셨네요. 친구한테 주는 선물도 육경서가 결재해야 하는가 보죠?”“그건...”“그런데 저는 아니에요. 전 절대 누
유미나의 발언은 상당히 담대하고 깊은 뜻이 내포되었으며 특히 마지막 한마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여자 친구한테 잘 보이고 싶어 이러는 거야?’하고 대놓고 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용히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신주리는 갑자기 불똥이 자기한테로 튀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죄명을 전가하는 수법이 일류였고 멘탈도 상당히 강했다. 눈앞에서 거짓말이 들통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뻔뻔하게 고집을 피웠다...관중석에서 듣고 있던 신주리의 부모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신하균과 릴리가 한쪽에서 한 명씩 잡고 한바탕 달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유미나의 말이 끝나자 관중석이 갑자기 조용해졌고 그녀는 점차 의기양양해지더니 자기가 추측했던 생각을 말했다.“아니면 혹시 후회한 거예요? 고작 10억짜리 주문서가 혹시 사정이라도 생겨서 결제하지 못하게 된 거예요?”여기까지 말한 유미나는 가볍게 웃더니 계속해 말했다.“결제 안 해도 상관없어요. 사실 저도 오늘 오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이 주문서는 없었던 걸로 하고 오늘 일은 헤프닝이라고 생각할게요. 이곳에서 이렇게 친구 한 명을 잃을 줄 몰랐어요.”얼핏 들어서는 유미나의 말이 매우 억울하지만 노코멘트하겠다는 뜻으로 들리지만 사실 매 한마디 말은 신주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육경서가 여자 친구의 환심을 사려고 할 수 없이 유미나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주문서를 결제 못 하겠다는 것으로 오해하게끔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이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모습으로 봤을 때 확실히 육경서가 열세였고 모든 것을 신주리 위주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낌을 주긴 했었다.그녀의 말은 아주 교묘했고 단순히 이 말만 들어서는 신주리와 육경서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지 절대 유미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신주리는 찍소리 못하고 모든 덤터기를 뒤집어쓰게 되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절로 웃음이 났다. ‘실망’으로 가득 찬 유미나가 마이크를 MC에게 넘
MC가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을 거론하더니 잊지 않고 유미나에게 확인 사살했다. 유미나는 가슴이 떨려서 미칠 것 같고 손이 덜덜 떨렸으며 위에서 내리비추는 강렬한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앞줄에 앉은 육경서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하지만 일이 이 지경으로 되어버렸으니 부정할 수는 없었다.“맞아요. 하지만 사실 큰 관계는 없어요. 저와 경서의 우정으로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전 신경 쓰여요.”느릿느릿한 말소리가 마이크로부터 전해오자 다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카메라도 그쪽을 향해 각도를 맞췄다. 육경서였다. 맨 앞자리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의 표정은 평온했으나 눈빛이 상당히 매서웠다. 육경서는 손에 든 서류를 흔들며 말했다.“유미나 씨, 이건 거의 10억에 가까운 주문서예요. 단지 드라마 한 부 찍은 인연으로 제가 이 정도로 큰 금액을 부담해야 하나요?”하얗게 질렸던 유미나의 얼굴이 이젠 파랗게 되어버렸고 그녀는 육경서가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이 말을 할 줄 전혀 몰랐다. 무대 아래에서 의논하는 말소리가 분분했고 다들 의혹에 차 있었다.“무슨 일이야? 육경서가 이 주문서를 승인하지 않겠다는 거야?”“승인하는 건 둘째고 육경서 말뜻을 들어서는 저 유 씨와 별로 친하지 않다는 뜻이잖아. 그저 드라마를 함께 찍은 사이라잖아.”“전에 절친이고 소꿉친구라고 하지 않았어?”“육씨 가문과 사이가 좋은 가문 중에 유 씨가 있었어?”“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재벌 가문에 아예 유 씨가 없어!”“...”아래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전해져왔고 유미나는 파랗게 질려버린 얼굴로 마이크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미나는 카메라 앞에 선 자신이 마치 홀딱 벗겨진 채로 무대 위로 던져버려진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났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숨어버리고 싶었다. 육경서는 유미나에게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피식 웃더니 계속해 말했다.“오늘 이 기회를 빌어 해명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