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이번 생에 그 여자를 찾지 못하면 평생 다른 여자와 결혼하지 않을 계획인가?’이런 집념과 생각을 플레이보이들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한편 정가마을.고은영이 이불 정리를 끝내자 정원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도 옆집 할머니인 것 같았다.방금 고은영은 할머니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어서 결국 저녁을 차리지 않았다.그녀는 정원을 지나 문을 열었다.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인영이 나타났다. 작은 키가 아닌 고은영도 그의 가슴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입꼬리를 휘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자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따뜻한 눈빛과 마주쳤다. 그제야 남자의 생김새가 또렷이 보였다.고은영은 순간 숨을 들이마셨다.그녀는 옆집 할머니의 손자가 시골에 사는 청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보니...“왜 그쪽이 여기 있어요?”그가 입을 열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에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 혼란과 충격에서 그가 고은영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은영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며 눈앞에 남자를 알아보았다.“진, 진 도련님. 안녕하세요.”‘세상에 제발 누가 나 좀 살려줘.’진 아주머니의 외손자가 강성 4대 명문 가문 중 하나인 진씨 가문의 손자라니. 그는 량천옥이 계속 배지영과 결혼을 시키려고 했던 상대였다.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이미 진씨 그룹의 모든 것을 물려받기 시작한 진정훈이었다.배씨 가문에서 예쁘게 보고 있는 진유경이 바로 진정훈의 여동생이었다.고은영의 몸은 머리보다 훨씬 더 반응이 빨랐다. 그녀는 쾅 하고 문을 닫았다.문밖에 서 있던 진정훈이 빠르게 물러나지 않았다면 문은 바로 그의 얼굴에 부딪혔을 것이다. 순간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도 당연히 고은영을 알아봤다.그녀는 량천옥을 굴복하게 만들고 엄격하고 가혹한 염라대왕 같은 배준우의 옆에서 몇 년 동안 평화롭게 살아온 비서였다.진유경도 고은영을 사라지게 하려고 비밀리에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진정훈은 이런 상황에서 고은영을 만날
정설호가 특별히 부탁했기에 그녀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준비했다.“은영아 이 물고기는 정훈이가 금방 잡아 온 자연산이라 영양가가 아주 높아. 지금 너한테 아주 좋을 거다.”“감사합니다, 할머니.”입맛을 다시던 고은영은 진정훈이 잡아 온 물고기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진씨 그룹의 후계자로서 일이 엄청 바쁠 텐데 이곳에 와서 낚시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 놀라운 일이었다.지금 눈앞에 있는 진정훈은 강성에서 봤던 것처럼 엄숙해 보이지 않았다. 야구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캐주얼하면서도 조금은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그리고 이 오이는 내가 심은 거야. 생긴 건 못생겨도 농약을 치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먹어.”“네 감사합니다 할머니.”진씨 할머니가 뭐라고 하든지 고은영은 바로 대답했다.진정훈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을 마주치자 고은영은 마치 바늘 위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진씨 할머니는 그녀를 어떻게 보아도 모두 예뻐 보이고 마음에 쏙 들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친밀감이 느껴졌다.만약 진정훈이 없었다면 고은영도 똑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아주 복잡했다.밥을 한 끼 먹는 동안 그녀의 마음속은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했다.고은영은 요리들이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씨 할머니의 보살핌 덕분에 많이 먹었다.식사가 끝나자 진씨 할머니는 진정훈에게 말했다.“날이 어두워졌네. 네가 은영이 좀 데려다줘.”“할머니 괜찮아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고은영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감히 진정훈을 귀찮게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서둘러 이 남자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전에 량천옥이 배준우와 진씨 가문의 딸 진유경을 결혼시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고은영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진씨 가문이 어떤 태도였는지도 알고 있었다. 배준우가 싫다고 하는데도 진씨 가문에서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그 모습에 진씨 가문도 배씨 가문과 혼인으로 이어지기
고은영은 억울한 표정으로 엄숙하게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진정훈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그는 코를 훌쩍이는 고은영을 바라보며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아직도 안 자요? 내가 침대까지 데려다줘야 해요?”고은영은 위협적인 진정훈의 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돌려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다행히 진정훈이 따라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고은영은 조금 안도감을 느꼈다.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아자마자 문을 잠그고 심지어 이동식 캐비닛까지 문 쪽으로 옮겼다.진정훈은 집안에서 방바닥에 가구가 끌리는 소리를 듣고 입가에 경련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저 여자가 지금 날 짐승으로 보는 거야? 뭘 저렇게까지 경계를 해?’안에서 움직임 소리가 사라지고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한 진정훈은 그제야 몸을 돌려 정원을 떠났다.하지만 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구석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웅 웅 웅 웅. 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유경’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진정훈은 두통을 느끼며 미간을 문질렀다. 전화를 받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변했다.“유경아.”“오빠, 외할머니 뵈러 가는데 왜 난 안 데려가? 흥.”귓가에서 진유경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유경이 배준우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을 배씨 가문 전체가 알고 있었다.진씨 가문의 압력이 없었다면 진유경이 본인의 신분을 깎아내리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이전에는 이미월과 고은영을 비롯해 배준우의 옆은 너무나 소란스러웠다.진씨 가문에서도 진유경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들의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었다.비록 진유경은 진씨 가문의 양녀일 뿐이지만 진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이미 오래전 부터 혈육으로 생각했다. “너무 멀잖아. 갔다 왔다 하는 길이 너무 험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자고 안 했어.”진정훈이 부드럽게 말하지 진유경이 말을 이었다.“나도 외할머니 보고 싶어.”외할
진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점검했어요.”그의 외할머니 진경희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잘했어.”진정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외할머니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그런 진정훈의 모습에 외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그래?”“할머니 왜 그 여자한테는 그렇게 잘해줘요?”진정훈의 인상 속에서 외할머니는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었지만 유독 진유경에게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진정훈의 질문에 외할머니는 바로 ‘어휴’하며 입을 열었다.“그게 왜? 난 저 아이가 불쌍해서 그래. 배가 저렇게 불러서는 정설호의 낡은 집에 와서 지내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야.”“할머니도 저 여자가 정 할아버지의 진짜 손녀가 아니라는 거 아시죠?”“당연히 알지. 정설호 그 노인네한테 손자가 몇인지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그리고 정설호한테 손녀는 없어.”고은영의 앞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고은영이 불편하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의 보살핌을 받았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그 말에 진정훈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할머니는 남한테는 그렇게 다정하게 잘 챙겨주시면서 왜 그동안 유경이한테는.”진정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외할머니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다.하지만 진정훈은 무서워 않고 말을 이었다.“유경이는 계속 할머니를 존경해 왔어요.”“뭘 존경해?”“하지만 할머니 남한테는.”“그래 남에게 중요한 건 예의고 가족에게 중요한 건 사랑이야. 유경이는 남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데 내가 뭘 어떻게 대해야 하니?”할머니의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진정훈은 진경희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할머니의 얼굴은 더욱더 진지해졌다.“유경이 때문에 너희들 그동안 잃어버린 동생 찾는 일에는 신경도 안 썼지?”진정훈이 말했다.“뭘 신경을 안 써요? 계속 찾고 있어요. 저희가 의심하는 건 그 아이가 그때 이미...”“이미? 허. 진정훈 그 아이가 네 여동생이야. 그렇게 추측만 하면서 그 아이를 찾는 일에 소홀했어?”“할
“할아버지 진씨 할머니의 외손자가 진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라는 거 알고 계셨어요?”고은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은 말을 돌려 물을 시간이 없었다.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전화 반대편의 공기가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설호가 ‘아이고’ 하며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기억이 안 났어. 진씨네 딸이 죽은 지 이렇게 오래됐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기억해?”고은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죽 죽었다고? 그럼 지금 진씨 가문의 사모님은 진 회장님의 원래 부인이 아니라는 거야?’그러나 부잣집에 첫 부인과 계속 사는 회장님들은 별로 없었기에 고은영은 이 문제에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다급하게 물었다.“저 여기서 더 지낼 수 없어요. 진씨 가문 큰 도련님이 날 알아봤어요.”정설호는 그한 마디에 일의 심각성을 깨닫고서는 재빨리 말했다.“그래 더 있을 수 없겠네. 거기서 기다려라. 널 데리러 내가 바로 사람을 보낼 테니. 너 혼자서 움직이지 마.”진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 고은영을 알아봤다는 말에 정설호가 가장 걱정한 것은 고은영이 놀라서 바로 도망가는 것이었다.이미 늦은 밤인데 임신까지 한 고은영을 생각하지 정설호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은영이 말했다.“시간이 되겠어요? 배준우가 이미 만하고성까지 왔어요.”“걱정하지 마. 가능하니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준우가 아이를 뺏어가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거다.”오후에 고은영은 육명호의 옆에서 배준우가 그녀와 육명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정설호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얘기했다.당연히 그녀는 자기와 량천옥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지만 정설호는 이제 알게 되었다.정설호는 마음속으로 배준우가 고인영을 찾아서 다시 데려가면 결국 아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이에 그는 고은영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이 기회에 그녀와 배준우가 완전히 헤어지기를 바랄 뿐이었다.지금은 비록 배준우가 아
그들은 배준우를 어떻게 하지는 못했지만 고은영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진경희는 상황의 심각성을 듣고서는 다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침대 옆 탁자에 놓은 돋보기를 더듬더듬 잡았다.“그래그래 알겠어. 너무 조급해하지 마. 불안해하지 말고.”“난 당연히 불안하지. 네 외손자 외손녀가 전에 배씨 가문과 결혼할 예정이었다며?”“아이고, 그건 내 외손녀가 아니야.”진유경에 대해 진경희는 한 번도 자신의 외손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정설호는 지금 진경희와 이 문제로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맞든 아니든 그 애가 전에 약혼자가 있다고 소문이 파다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 은영이 남편이야.”“뭐? 아내가 있는 남자하고 약혼? 진씨 가문 왜 이렇게 뻔뻔해졌어?”“진씨 가문에서 허락까지 했어. 뻔뻔하지 않고 어떻게 그러겠어?”이에 정설호는 매우 화를 냈다.진경희가 말하기도 전에 정설호는 말을 이었다.“진씨 가문에서 주워 온 그 아이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너도 알지? 그 아이를 위해 불법적인 일을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야.”진유경을 위해 불법적인 일을 한다는 말에 진경희는 너무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이곳에서 아무것도 있는 진정훈은 아까 외할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진유경에 대한 외할머니의 불만 때문만이 아니었다.그는 마음속에 반복적으로 만삭인 고은영의 배가 떠올랐다.알고 싶지 않아도 배 속의 아이가 배준우의 아이임은 틀림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배준우와 진유경은 정말 완전히 가능성이 없는 걸까?진씨 가문에서도 진유경을 아이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보낼 수는 없었다.그래서 그는 배준우에게 고은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고 자기에게 신세를 지게 만들면 어떨지 생각했다.그렇게 되면 품으면 안 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진유경의 마음도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진정훈은 진유경의 마음을 완전히 접게 할 생각에 결국 핸드폰을 꺼내 배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배준우는 만하고
진씨 가문에 량천옥과 배항준은 일방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배준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었다.배준우는 지금 진정훈이 자기에게 전화한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왜? 그렇게 못 기다리겠어?”전에 진씨 가문에서 고은영에게 저질렀던 은밀한 행동들을 배준우는 모두 알고 있었다.그가 나서서 복수를 하기도 전에 고은영이 사라졌고 아직 그녀를 찾지도 못했다.하지만 그들은 진유경과 배준우의 일이 이미 성사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진정훈은 이 순간 비록 핸드폰 넘어였지만 배준우의 적의가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었다.이제 보니 배준우가 계속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이유는 진심으로 진씨 가문과의 혼인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진정훈은 조금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그쪽의 마음속에서 우리 진씨 가문이 그렇게 서둘렀다고 생각해요?”“서두른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팔리지 않는 것 같은데?”진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지금 이놈이 뭐라는 거지? 팔리지 않아? 누가 팔리지 않는다는 거야?”지금 이 순간 배준우가 이토록 분노하며 말할 사람은 진유경 말고는 없었다.‘젠장 지금 감히 우리 유경이한테 팔리지 않는다고 하는 거야? 뭐 팔리지 않는다고?’진정훈은 비즈니스를 하며 선을 넘는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정도로 무례한 사람은 처음 봤다.“우리 진씨 가문도 당신 같은 사람 별로 소중하지 않아.”“그럼 이 상황에 왜 전화는 한 거야? 네 여동생이 나 때문에 울며불며 난리 치는 모양이지? 아니면 나 때문에 죽겠대?”“배준우.”진정훈은 바로 화를 냈다.그는 배준우가 지금 고은영을 찾지 못해 얼마나 패닉 상태인지 몰랐다.그저 원래부터 진씨 가문에 이 정도로 적개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여러 날 동안 고은영을 찾느라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지금 진정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배준우의 무례하고 비열한 말에 진정훈은 너무 화가 나서 오장육부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내가 미쳤지. 전화해서 그쪽 와이프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녀의 손자는 바로 고은영의 길을 막아버렸다.그녀는 진정훈과 더 말하고 싶지 않았고 거칠게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가서 바로 은영이 데리고 떠나.”“네가 이 소식을 누구한테 전했든지 상관없어. 그 사람이 은영이를 찾게 할 수 없어.”진정훈은 입꼬리가 떨려왔다.외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요구에 그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진경희가 그를 재촉했다.“빨리 안 일어나?”“아니 할머니 이게 지금.”“일어날 거야 안 일어날 거야?”진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연세가 드셨지만 그의 외할머니는 화를 내지 않고도 위엄있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하지만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빨리 안 가?”계속 움직이지 않는 진정훈에 진경희는 화가 나서 앞으로 다가가 그의 팔뚝을 때렸다.팔뚝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진정훈은 할머니가 자기를 때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아니 할머니 왜 그러세요? 그 계집애가 할머니하고 무슨 상관이에요?”‘완전히 남남인 사람한테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시는 거지? 그럼 유경이는...’진정훈의 말에 분명하게 담긴 원망에 진경희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지금 너하고 이렇게 얘기할 시간 없어. 너 지금 당장...”삐걱.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집의 나무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진경희는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청력은 여전히 좋았다.“너 무슨 소리 못 들었어?”진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진경희는 다급하게 말했다.“큰일 났네. 은영이가 분명 도망가는 거야. 너 얼른 가 봐. 이 밤에 무슨 일이라도 나면 내가 정설호 얼굴을 어떻게 보니.”진경희는 다급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 만삭인 고은영의 모습이 가득했다.진정훈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진경희는 그의 머리에 손을 휘둘렀다.“내가 가보라고 했지. 이 할미 말이 안 들려?”남들의 눈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나한테 남긴 건 그대로 넘겨주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고은영은 진성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끊었다.싸늘한 고은영의 시선에 진성택의 안색은 순간 창백해졌다.진성택이 무언가를 덧붙이기 전에 고은영이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그렇지 않으면 뭐요?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 배준우의 아내예요. 진유경에게 손대는 건 쉬운 일이죠.”“유경이한테 손대지 마. 은영이, 너...”“됐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진유경을 그렇게까지 감싸는 진성택을 바라보며 고은영은 실망감을 넘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래?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일까지 한단 말이야! 아내랑 아이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거지? 어떻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어... 엄마가 남긴 소중한 유품을 진유경 같은 년에게 넘기겠다고? 하...’진유경이 단순히 진씨 가문의 양녀였다면 고은영은 아마 이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진실을 아는 고은영은 지금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설령 눈앞의 남자가 그녀의 혈육이고 아버지라 할지라도 고은영은 그를 혐오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진성택은 그녀의 분노에 애처롭게 그녀를 불렀다.“은영아...”고은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진성택이 말을 이었다.“나한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이런 부탁 하지 않았을 거야.”“같잖은 호소는 그만 하세요. 저희 사이에 애정이라 칭할 만한 감정도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내였던 사람에게 너무하네요. 엄마가 불쌍해요.”그녀는 더욱 화가 났다.비록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머니와 특별한 애정이라 할 감정은 없었지만 진성택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은영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고은영은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머니의 깊은 사랑은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진성택은 어떠한가.고은영은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
고은영이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저는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요.” 진성택에게 돌려 말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으로 접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고 지금 와서 그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그녀의 불만 섞인 태도에 그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너희 둘째 오빠가 병원에 왔었어.” 고은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쏘아보았고 그는 그녀의 생각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네가 받을 모든 주식들 있잖아. 할머니와 진호영, 그리고 유경이의 지분까지 너에게 줬다던데, 맞지?” 고은영은 차갑게 한 마디로 대답했다. “맞아요.” 드디어 그의 목적을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더욱 차가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차가운 시선에 조금 떨린 듯 말을 이어갔다. “그 주식들은 사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남긴 거니까 너에게 돌아가야 맞아.” “그래서 저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부른 거죠?” 고은영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가 주고자 한다면 왜 이제서야 이리 말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다. 진성택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고 그의 눈빛에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 주식은 네게 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돌려줄 수 없다고요? 왜요?” 그의 말은 너무도 간단했다. ‘할 수 없다'라는 말이 또다시 진유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거 같았다. 진유경, 정말 독특한 존재다. 역시나 양딸이 모든 것보다 우선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로 진씨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양부모는 하나같이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너희 둘째 오빠가 그 주식들을 되찾고 나서 진씨 가문의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렸어. 지금 그들은 전부 저축해두었던 돈을 쓰고 있어.” 모든 지원을
하지만 진성택은 다르다. 결국 그녀와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배준우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시간 후, 배준우는 고은영을 밀크티 가게에 데려다주었다. “내가 같이 들어갈까?” 배준우가 물었다. “준우 씨는 그냥 기다려요. 당신을 보면 아마 바로 저세상으로 갈지도 몰라요.” ‘이 녀석 입이 참!’ 하지만 고은영이 말이 맞았다. 예전에 진성택과 량천옥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진성택은 항상 배준우에게 진유경을 미래의 아내로 삼으라고 했었고 그때 배준우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은영과 결혼했다.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진성택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운명의 미묘함을 탄식할 것인가? 아니면 진유경 때문에 속상해할 것인가? 고은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눈에 보였다. 작은 원탁 옆에 앉아 있는 진성택이. 그는 손에 밀크티를 들고 있었다. 고은영이 두 걸음 내딛자마자 진성택도 그녀를 보았다. “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본 그의 얼굴은 확실히 더 노화되어 보였고 얼굴색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특히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예전만큼 눈빛도 밝지 않았다. 고은영은 이제 막 기운이 다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진성택은 확실히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아마 이번이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은영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거 마실 수 있어요?” 진성택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문득 깨닫고 곧바로 그녀에게 건넸다. “너를 위해 샀어. 여자애들은 다 밀크티 좋아하잖아. 너도 좋아하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밀크티는 그녀의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그런데 배준우와 결혼한 이후로 배준우는 그녀가 밀크티가 몸에 안 좋다며 못 마시게 했다. 진성택은 그녀가 음료를 마시지 않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실 유경이에게 이런 걸 사준 적이 없었어. 진씨 가문의
전화 너머의 진성택은 고은영의 말을 듣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 전에는 네 감정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 순간, 진성택은 자신이 고은영에게 대했던 태도가 문제였음을 인정했다. 고은영이 말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은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야. 큰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반응이 무뎌지는 법이잖아. 나는 그동안 계속 너를 찾고 있었어. 그런데 네 소식을 듣고 나서 어떻게 너를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네가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건 알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싫다.” 감정과 이해라. 처음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고 쳐도 그럼 그 후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진짜 아이러니했다. 진성택은 고은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너를 찾은 건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 “그게 진유경의 일 때문인가요?” 고은영은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반문했다. 무슨 일이든 그가 지금까지의 태도를 어떻게 설명하든 고은영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니, 네 어머니 때문이야.”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전화상에서도 고은영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될수록 그녀는 더 비웃었다. “내가 이 시간 동안 살 수 있는 건 모두 하늘이 준 기회야. 빼앗은 기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내가 너를 만날 기회도 얼마 안 남았지.” 그는 매우 허약해 보였다. 고은영은 눈썹을 찌푸렸고 이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진성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자신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그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신이 그를 만나지 않으면 너무 냉정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예요?” “병원 맞은편의 밀크티 가게에 있어.” 그는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의사들이
고은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태현 씨는 량천옥이 언니의 생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지.” 이 일은 병원에서도 크게 떠들썩하게 된 사건이라 나태현 쪽에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배준우는 고은영을 쳐다보며 이어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나태현과 고은지의 거래가 량천옥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맞아요. 언니가 천락 그룹으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 량천옥이 아직도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었는데 그 말투에 분노가 가득했어요.” 고은영은 고은지의 분노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마음속이 더욱더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나태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 상황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고은영은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배준우도 지금은 완전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준우 씨가 나태현 씨에게 언니와 한 거래가 무엇인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그리고 희주가 본인 딸인 걸 알고 지신혜 씨와 약혼도 할 건데 왜 언니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지도 물어봐 줘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고은영은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고은지에게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량천옥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끼고 있더라도 말이다. “내가 나태현 형에게 물어볼게. 너는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언니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안 돼. 내가 먼저 나태현이랑 얘기하고 나서 말해.”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고은영이 말한 대로 지금은 최소한 나태현이 고은지를 천락 그룹으로 돌아가게 만든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럼 빨리 물어봐요.” “응, 알았어.” 배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영은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녀는 거대한 음모가 고은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윤은 밖에서 시간을 확인했고 배준우가 10분 내로 나오지 않으면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담배를 반쯤 피웠을 때 문득 고은영이 대문 쪽에서 들어오는 모습을 봤다. 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에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진윤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고은영이 가까워졌고 그녀는 진윤을 발견하고 잠시 멈칫했다. “큰오빠.” ‘큰오빠’라는 단 한 마디에 진윤의 마음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준우 찾으러 온 거야?” 고은영은 너무 오랫동안 뛰어왔는지 호흡이 가빠졌고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안에 있어요?” “응, 안에 있어. 지금은 들어가지 마.” “왜요?” 고은영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진윤은 조용히 말했다. “지금 나태웅이랑 얘기 중이야.” “네? 나태웅이요?” 그 이름이 나오자 고은영의 말투도 달라졌다. 그녀는 전에 나태웅과의 영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가 최근 동안 안지영을 괴롭힌 일이 떠올랐다. 고은영과 안지영의 관계를 고려할 때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이 안지영이 화가 나면 고은영도 같이 화를 내주었다. 진윤은 그녀가 나태웅을 언급할 때의 그 표정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나태웅을 싫어해?” “싫어해요!” 고은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전에 그녀가 배준우와의 일에 그렇게 괴로워했던 건 대부분 나태웅 탓이었다. 정말 그땐 너무 힘들었다. 지금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고은영은 그 당시 어떻게 버텼는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배준우는 이미 안에서 나왔다. 고은영을 보고 잠시 멈칫한 뒤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바로 왔어?” “준우 씨 찾으려고요. 급한 일이 있는데 전화도 안 받았잖아요.” 고은영은 불만을 섞어 말했다. 배준우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윤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것을 본
나태웅이 혼자 남았을 때 그의 세계는 조용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그에게 고요함은 더 큰 괴로움이 되었다. 그는 전화를 꺼내어 안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전화는 바로 차단되었다. 그는 다시 안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사무실에서 안열은 겨우 안지영을 달래놓은 상태였다. 전화의 진동에 안열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리고 안지영도 전화를 확인하고 또다시 통제불능이 되었다. 안열은 안지영이 또 움직일 것 같아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너무 흥분하지 마요. 바로 차단할게요.” “받아요. 이 미친놈이 뭐라는지 봐야겠어요.” 안지영은 이를 갈며 말했다. 안열은 입꼬리를 떨구며 말했다. “그냥 받지 말죠?” 안지영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받아요!” ‘이 사람은 진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을지 걱정하지 않는 건가?’ 하지만 안지영의 말에 그녀는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열은 안지영을 한 번 쳐다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지영 지금 옆에 있나요?” “없어요!” ‘없어요’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지영은 나태웅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전화를 뺏으려 했다. 그녀는 그를 욕하고 나씨 가문이 망하길 저주했다. 하지만 손을 뻗자마자 안열이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한 마디만 전해줘요.” “말하세요.” “안지영은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첫 번째는 오늘 밤 킹덤 타운을 떠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늘 밤 하주원에게 사과를 하는 겁니다.” “이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안열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음을 바뀌었어요.” 안열은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안지영은 분노에 가득 찼고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안열의 손을 떼며 전화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태웅, 너 이 미친놈! 꿈도 꾸지 마!” “그래, 그럼 하늘 그룹이 네 손에서 얼마나 있을지 지켜보자고!” “너 이 자식, 내가 너의 조상을 건드렸나 보다! 그래서 나한테 복수하는 거네!” 안열은 안지영의 욕설을 듣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주원에게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고?’ 배준우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너 지금 이 상황이 도대체 뭐냐고?” 항상 사고가 명확하던 배준우가 지금은 나태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한 나태웅인데 지금 그를 보니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안지영이 하주원에게 손을 댄 문제를 신경 써야 하는 걸까? 그와 안지영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아직 명확히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나태웅은 대답하지 않고 담배를 달라고만 말했다. 배준우는 담배 한 개비를 던져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태웅은 자신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했다. 그는 아직까지 안지영과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이가 틀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리석은 여자...!’ 만약 그때, 그녀가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말을 했다면 그는 결코 그녀가 배준우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준우의 사람들에게 의지하려 했었다. 배준우는 잠시 생각한 뒤 물었다. “너는 안지영과 장선명이 결혼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하주원 문제에서는 하주원을 도와주고 있잖아?” 그가 잠시 고심한 끝에 결국 핵심을 짚어냈다. “그건 전혀 다른 얘기지!”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맴돌았다. 배준우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다르다고?’ 원래는 명확하게 사고하는 배준우였지만 나태웅의 말에 혼란스러워졌다. 나태웅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하주원 문제에서 안지영이 반드시 사과해야 해.” 이 말을 듣고 배준우는 머리가 아팠다. 나태웅은 이 상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결국, 배준우는 담배를 다 피운 후 천천히 말했다. “너는 이걸 두 가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들 세계에서는 이것은 분명히 한 가지 문제야.” “안지영은 도
방금 안열이 장선명더러 처리하라고 했을 때의 그 걱정은 이제 안지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든 말든 지금은 나태웅을 찾아서 해결하지 않으면 진짜 미칠 것 같았다. 한편, 캘리포니아 반도의 한 장소에서는 배준우와 나태웅이 함께 있었고 진윤과 육범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몇 달 만에 다시 모인 이들이 장선명이 아닌 나태웅을 부른 이유는 사실 그들 모두 나태웅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태웅을 불러내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육범수가 패를 내자 나태웅은 손에 들고 있던 패를 툭 치며 말했다. “난 끝났어.” 배준우는 그의 얼굴을 보고 찡그리며 물었다. “방금 그 전화, 안지영이었지?” 방금 나태웅은 나가서 전화를 했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안지영이었다. 배준우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응.” “너 또 안지영 건드린 거야?” 사실 오늘 배준우가 여기 온 이유는 장선명의 부탁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장선명은 나태웅과 장씨 가문과의 관계가 더 나빠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태웅이 이렇게 계속 안지영을 괴롭힌다면 일이 커질 것이다. 장선명은 본래 도리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나태웅의 이 일에 대해서는 배준우를 생각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게 맞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지금 하주원의 문제도 있고 나태웅의 행동이 점점 더 미쳐 가는 상황이라 걱정이 컸다. 나태웅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육범수에게 말했다. “너 나한테 만 이천 원 줘야 돼.” 배준우는 말문이 막혔다. 육범수도 나태웅이 안지영에 대해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진윤은 본래 남의 일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 성격이다. 본인의 가문 일도 충분히 골치 아팠기에 그동안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째 형이 얘기하잖아. 말 좀 해봐. 대체 안지영에 대해 어떻게 할 생각이야?” 하지만 육범수는 달랐다. 그는 직설적인 성격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