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서도현이 한쪽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태연하게 물었다.“아무리 허울뿐인 자리라고 해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 누나 난 아직도 누나가 배씨 가문 사모님 자리에서 내려와선 안 된다고 생각해.”비록 지분이 20%밖에 안 되더라도 그걸로도 평생 먹고살기엔 충분했다.그 말에 서유라는 짜증이 폭발했다.“닥쳐. 지금 네 꼴 좀 봐. 제대로 된 일 하나 못 하면서 어디서 훈수를 둬? 네가 언제 믿음직스러웠던 적 있어?”“누나, 사람 잘못 본 건 누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잖아?”“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니었으면 누나가 오늘까지 이 좋은 날들 누릴 수 있었겠어?”서도현은 비웃으며 고개를 젖히더니 눈을 휙 뒤집어 깠다.“잊지 마, 배서준이 우리한텐 마지막 구명줄이야. 누나가 배씨 가문 사모님 자리에서 내려오면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될지 누나도 잘 알잖아?”이번엔 단순한 충고가 아니었고 노골적인 협박이었다.서유라는 그 말에 치가 떨렸다.가족 때문이었다.그 때문에 이 모든 걸 감수해야 했고 그 때문에 이렇게까지 살아야 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저따위 태도로 자신을 몰아세운다니 어이가 없었다.“서도현, 내가 전생에 너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냐?”서유라는 이를 악물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온갖 비굴한 삶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이따위 결과를 받으려고 그랬던 건가?’그렇게 이를 갈던 서유라는 이내 뭔가 떠오른 듯 곧장 은행 카드를 들고 남설아를 찾아갔다.문을 연 남설아는 서유라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문턱에서 가로막았다.“나은이가 안에 있어. 나은이는 유라 씨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설아 씨, 왜 이렇게 가식 떠는 거야?”서유라도 더 이상 부드러운 척할 생각은 없었는지라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남설아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근처 카페로 데려갔다.“유라 씨가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올 리가 없겠지?”“맞아.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서유라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며 카드 한 장을 테
“설아 씨, 서준이는 단 한 순간도 설아 씨를 마음에 둔 적 없어. 이렇게까지 해봤자 서준이의 눈길 한 번 받을 수 없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서유라는 마치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처럼 설득하려 했다.그러나 그 말을 들은 남설아는 실소를 터뜨렸다.“내가 가진 배건 그룹 지분, 지금 시장에 내놔도 최소 6000억은 받을 수 있어. 그런데 고작 60억을 들고 와서 협상하려고? 내가 계산도 못 할 거로 생각하나?”“그리고 유라 씨, 배서준? 그 사람이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되나? 예전엔 아이 때문에 한 번쯤 더 쳐다봐 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나은이는 없어. 이제 내 눈에 그 사람은 그냥 쓰레기일 뿐이야.”“난 배건 그룹의 51% 지분을 갖고 있어. 그럼 내가 어떤 남자를 원하든 못 가질 이유가 있나?”그동안 쓸데없는 것에 얽매여 살았다는 걸 깨닫자 이제야 비로소 눈앞이 환히 트였다.남설아는 앞으로의 삶이 훨씬 더 좋아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뭐?”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조용하고 순하던 남설아가 이런 말을 하다니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지금까지 자신이 남설아를 무시할 수 있었던 건 배서준이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남설아가 배서준을 사랑했기 때문이였다고.하지만 이제 그녀가 배서준을 버린다면? 이 관계는 끝인 것이다.그렇다면 이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상처를 주든 남설아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그 순간 서유라는 모든 것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인 서유라는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졌고 곧바로 극단적인 행동을 택했다.그녀는 들고 있던 컵을 바닥에 내던지며 깨뜨렸고 그 조각을 집어 들자마자 자신의 손바닥을 깊이 그었다.이내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하지만 남설아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그리고 예상대로 다음 순간 배서준이 번개처럼 뛰어 들어왔다.그러고는 거의 반사적으로 서유라의 손을 움켜쥐며
“닥쳐!”배서준은 남설아를 바라보며 뒷어금니를 악물고 내뱉었다.“내가 왜 닥쳐야 하는데요?”“서준 씨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닥치라고 해요? 지금이 아직도 옛날 사회인 줄 알아요? 여자들은 진작에 해방됐어요. 꺼져요!”남설아는 남은 커피를 그대로 배서준의 몸에 확 끼얹고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 동작은 그야말로 흐름이 막힘없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다.몸을 돌리는 순간 유리창 너머로 문 앞에 서 있는 강연찬이 보였다.조금 전까지 그렇게 당당했던 남설아는 막상 강연찬의 눈과 마주치자 왠지 모르게 어색함이 밀려왔다.걸음을 서둘러 밖으로 나가며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여긴 왜 왔어?”“원래는 널 보호하러 왔는데 이제 보니까 내가 필요 없었네.”강연찬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리고 너 나한테 아직 샤브샤브 한 끼 빚졌어.”‘보호하러 온 게 아니라 빚 받으러 온 거 아니야?’남설아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고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지금 먹으러 가자.”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았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이지 부부처럼 보였다.“아파.”서유라는 손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배서준이 고개를 숙이고 보니 그녀의 손바닥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순간 얼굴빛이 변했다.곧장 그는 서유라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손님, 아직 계산 안 하셨습니다!”서둘러 다가온 직원이 서유라를 붙잡고 돈을 요구했다.완전히 망신살이 뻗쳤다.그 순간,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서유라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배서준의 품에 쓰러졌다.직원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는 불길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는 배서준을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배서준은 말없이 핸드폰을 꺼내 결제한 뒤, 그녀를 안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밖으로 나오는 순간 막 강연찬의 차가 출발하는 것이 보였다.서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는 선명하게 보았다.조수석에 앉아 있는 남설아를 말이다.그리고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그 모습까지.가슴이
배서준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순간, 서유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슴이 조여드는 긴장감이 들었다.‘혹시 서준이가 뭔가 눈치챘나?’“서준아... 왜 아무 말도 안 해?”서유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유라야, 너 선을 넘었어.”배서준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단, 말의 내용만 빼고 말이다.그 한마디가 서유라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목이 메인 채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알아, 다 내 잘못이야.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난 그저 널 도우려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설아 씨는...”“우리 일은 내가 알아서 해.”이번에는 가식적인 다정함조차 없었고 남은 것은 단 하나, 경고뿐이었다.그리고 그것은 마지막 경고였다.배서준은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서유라는 그에게 조금은 특별한 존재였을지 몰라도 그 기준에서 벗어날 만큼은 아니었다.이제야 서유라는 알았다.자신이 배서준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착각이었는지를.결국 그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철저하게 깨달아버린 그 사실이 서유라를 절망하게 만들었다.“그래, 알겠어.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뚝뚝,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붉게 물든 콧날, 새빨개진 눈가, 누가 봐도 안쓰러울 만큼 애처로운 모습이었다.하지만 서유라는 스스로의 장점을 잘 알고 있었고 배서준이 어떤 모습에 약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니 이 눈물조차도 서유라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무기였다.역시나 배서준의 태도는 이내 부드러워졌다.“됐어. 푹 쉬어. 회사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 저녁에 다시 올게.”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서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그가 병실을 나서는 순간, 서유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쾅!옆에 있던 물컵을
남설아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그녀가 아직은 무력한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남설아는 줄곧 집에서 아이를 키우느라 사회생활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적이 오면 막고 물이 넘치면 둑을 쌓으면 돼. 이건 꼭 되갚아야겠어.”남설아는 주먹을 꽉 쥐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이런 일에 연연할 사람이 아니었다.배씨 가문의 재산 따위에도 관심이 없었다.그러나 배서준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눈앞에서 그들의 아이가 죽어가는 걸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배나은을 잃게 만든 장본인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그렇게까지 무력하다면 자신은 어머니로서의 자격도 없었다.‘배서준이 가장 아끼는 것이 ‘이익’이라면 그걸 하나씩 빼앗아주겠어.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버린 뒤, 그 사람한테 대체 뭐가 남는지 끝까지 지켜보겠어.’남설아의 결연한 눈빛을 확인한 강연찬은 그제야 안심했다.내심 그녀가 마음 약해질까 걱정했으니 말이다.“좋아. 그럼 조심해. 난 먼저 간다. 회사에 회의가 있어서.”핸드폰을 확인한 강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말에 남설아는 순간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설마 서준 씨가 오빠를 압박하는 거야?”“그 녀석한테 그럴 힘은 없어.”강연찬은 비웃듯이 낮게 웃었다.배건 그룹이 대단하긴 해도 그들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었다.지금 이 순간에도 강연찬은 여전히 잘 살아 있지 않은가.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남설아는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햇살처럼 밝게 웃던 그 소년이 말이다.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많은 게 바뀐 것 같지만 또 많은 게 그대로였다.강연찬이 떠나고 곧바로 배서준이 도착했다.그를 보는 순간 남설아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여긴 왜 온 거예요?”무의식적으로 그녀는 배나은의 사진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이 남자가 얼마나 불길한 존재인지 다시금 깨달았다.‘감히 나은이 앞에 설 자격이 있기나 해?’“지금 회사가 여론 압박을 받고 있어. 네가 나와서 해명
“X발!”남설아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욕설을 내뱉었다.이 세상에 이렇게까지 뻔뻔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말을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거지?’과거의 남설아라면 참았을 것이다.모든 걸 속으로 삭이고 묵묵히 감내했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아니다.남설아는 망설임 없이 물리적으로 공격했다. 거침없이 손을 휘둘러 따귀를 한 대 올려붙인 것이다.그리고 그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쥐었다.그러고는 있는 힘껏 끌어당겨 배나은의 영정 앞에 그를 내던졌다.“똑바로 봐요. 나은이를 보고도 당신이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한번 할 수 있어요?”배서준은 예상치 못한 힘에 순간 당황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다.그리고 마주한 배나은의 사진, 맑고도 천진난만한 웃음을 한 아이가 영정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때 치료를 했더라도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뿐이었어. 완치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잖아. 살아 있었다 해도 결국 고통뿐이었을 거야.”“맞아요, 나은이는 고통스러웠죠.”남설아는 그의 말을 끊고 차갑게 응수했다.하지만 그녀가 덧붙인 말은 완전히 달랐다.“하지만 그 고통은 병 때문이 아니었어요. 바로 당신 때문이었지!”“나은이가 가장 힘들었던 이유는 당신 같은 인간이 아빠였기 때문이에요!”“당신이 대체 뭔데 나은이의 운명을 결정해요? 무슨 권리로?”남설아는 있는 힘껏 그의 옷깃을 움켜쥐며 분노를 터뜨렸다.그녀는 배서준이 자신을 증오하는 것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하지만 단 하나,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 자신의 딸에게조차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지 말이다.그럼에도 배서준은 미동도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남설아를 바라볼 뿐이었다.그리고 마침내 배서준이 입을 열었다.“내가 아빠니까.”‘뭐?’이 말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남설아의 온몸이 굳었다.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었다.수십, 수백 개의 대답을 예
“배건 그룹 일? 난 신경 안 써요. 온라인에서 무슨 난리가 나든 그것도 상관없어요.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그따위 해명? 나랑 아무 관련 없어요!”“당신이 스스로 한 짓이잖아요. 그에 대한 대가는 당연히 당신이 감당해야지!”“내기에서 졌으면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나. 사랑이랍시고 방종한 대가, 이제 당신도 치를 때가 됐어.”남설아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비수처럼 날아갔다.그 말 속에는 단 한 점의 감정도 없었다.오직 차가운 냉소와 경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그녀는 이제 이 남자에게 철저히 절망했고 완전히 질려버렸다.한때 그는 체면을 위해 남편이라는 사람에게 애써 다가가며 ‘다정한 부부’인 척 연기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한심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남설아, 후회하지 마.”배서준은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유지했다.그는 여전히 믿고 있었다.이 여자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 모든 행동이 결국 자신을 붙잡기 위한 발악일 뿐이라고.“네가 협조만 한다면 당장은 이혼을 얘기하지 않아도 돼.”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듯한 말을 던졌다.하지만 남설아는 더 이상 몇 년 전의 순진한 바보가 아니었다.그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여전히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 자체가 얼마나 한심하고 가소로운 착각인지 배서준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이혼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뭐겠어요? 바로 지분 때문이잖아요. 할아버지의 유언,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내 앞에서 연극을 한 거예요?”“그동안 나랑 부부로 사는 게 그렇게 끔찍했으면서 돈 때문에 참고 견뎌 줬다 이거죠?”남설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치 비수가 되어 배서준의 가면을 산산조각냈다.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비웃음이 가득했다.“참 대단하네요. 당신 정말 대단해요.”“그렇게까지 참고 버티면서 살아왔으니 참
배나은의 장례식이 이미 끝난 지 오래지만 남설아의 마음은 여전히 배나은이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아니, 어쩌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지도 몰랐다. 배나은이 떠나지 않고 여전히 곁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아까 서준 씨가 했던 말... 혹시 나은이도 듣고 있었을까?’남설아는 아이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닦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은아, 착한 우리 나은이. 상처받지 마, 저 사람 헛소리하는 거야. 엄마 눈에는 우리 나은이가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쁜 아이야. 엄마는 정말 행복했어, 네 엄마가 될 수 있어서.”“나은아, 엄마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그런데 넌 왜 한 번도 엄마 꿈에 오지 않는 거니? 혹시 엄마를 원망하고 있는 거야? 엄마는 정말 네가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사람들은 시간이 약이라고 말하지만 남설아에게 시간은 그저 무능한 돌팔이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배나은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숨이 막힐 듯 괴로웠다.아이의 사진을 꼭 끌어안고 남설아는 한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한참이 지나서야 감정을 가라앉히고 그녀는 부모님의 위패 앞에도 향을 올렸다.“엄마, 아빠. 어릴 때부터 저한테 착하게 살라고 하셨죠. 그래서 지금까지 착하게 심지어는 바보처럼 살아왔어요. 모든 일에 정성을 다했는데... 그런데 왜, 왜 이런 결말이 된 거죠?”“왜 제가 사랑한 사람은 저를 사랑하지 않았고, 왜 제가 붙잡고 싶은 사람은 끝내 잡을 수 없었을까요?”“엄마, 아빠... 죄송해요. 이제는 더 이상 착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제 아이를 위해서라도 복수할 거예요. 저와 나은이의 것을 반드시 되찾을 거예요.”배씨 가문의 것이든 아니든 남설아는 한 번도 탐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배나은을 위해서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걸 되찾을 것이었다.부모님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남설아의 눈빛은 한층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한테 맡긴 업무는 어떻게 됐나요?”남설아는 한원준이 건넨 꽃다발을 안고는 자신이 지시했던 업무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남설아가 이제 막 퇴원한 상황인데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업무라니, 정말 예상 밖이었다.사람들은 마치 보물 자랑하듯 자신이 맡은 작업 결과물을 하나씩 꺼내서 남설아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모두 기술 쪽에 능한 사람들이라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방향은 잘 잡혀 있었다. 남설아는 모두의 자료를 꼼꼼히 확인한 후 자리에 앉아 직접 계산과 검토에 들어갔다.한편, 배서준은 온몸에 먼지를 묻힌 채 분노에 찬 얼굴로 기술팀에 들어섰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본 광경은 전 직원이 조용히 집중해서 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남설아도 예외는 아니었다.자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인데 모두가 일에 몰두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 부적절하게 튀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민망해졌다.배서준의 얼굴이 굳은 걸 본 한원준과 몇몇 남직원들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설아가 막 퇴원한 만큼 또다시 일이 생길까 봐 무의식적으로 보호하려는 반응이었다.자신이 월급을 주는 사람들이 전부 남설아 편에 선 걸 실감한 배서준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폭발할 수도 없었다.결국 그는 코웃음을 치며 남설아를 매섭게 노려본 뒤, 말없이 돌아서서 나갔다.그 과정 내내 남설아는 한 번도 고개를 들어 그를 보지 않았다. 화가 나서 들어오는 것도 차가운 반응도 전부 무시했다. 왜냐하면 남설아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서준이 아무리 사적인 감정으로 날뛰더라도 적어도 회사 업무에는 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배서준이 떠난 뒤,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남설아에게 다가와 속삭였다.“팀장님, 진짜 대단하신 것 같아요. 대표님처럼 기세 강한 사람 앞에서 표정 하나 안 바뀌다니요.”“익숙해지면 괜찮아. 근데
남설아의 깔끔하고 단호한 행동을 본 천기준은 거의 감탄을 금치 못했다.지금 남설아가 이렇게까지 성장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았다.그는 남설아가 그냥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일 줄로 알았지만, 그녀는 되려 정면으로 반격하는 행동을 보였다.놀란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천기준과 눈이 마주치자 남설아는 살짝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제 정당한 권리는 지켜도 되는 거죠?”“그럼요, 당연하죠. 당연히 지켜야죠.”천기준은 바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제야 남설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먼저 가요. 회사에 일도 있고 저 사람들 기다릴 필요 없어요.”“그런데 우리 차는 한 대뿐이잖아요?”“저 사람들은 택시 타고 오겠죠.”남설아는 운전석 문을 열고 앉으면서 천기준을 힐끔 바라봤다.“천 비서님도 택시 타실래요? 택시비는 회사에서 안 나올 텐데요?”천기준은 바보가 아니었다. 굳이 눈앞에 있는 차를 두고 택시를 탈 이유도 없고 더군다나 운전석도 자신이 아닌 남설아가 차지하고 있는데 굳이 말썽 피울 이유도 없었다.그는 바로 조수석 문을 열고 조심스레 탔다.“팀장님, 운전은 하실 줄 아시죠?”천기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운전면허 따고 나서 두세 번 정도 해봤어요.”남설아는 웃으며 대답했고 곧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도로 위로 내달렸다.배서준과 서유라는 막 서류를 마치고 나와서 딱 차가 떠나는 순간을 보게 되었다. 눈앞 주차장이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의 얼굴은 동시에 어두워졌다. 서유라는 배서준의 소매를 잡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준아, 설아 씨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내가 전화해서 차 부를게.”배서준은 냉랭한 얼굴로 회사 다른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두 사람은 차가 도착할 때까지 무려 30분 넘게 바람맞으며 서 있어야 했다.배서준은 어릴 적부터 이런 굴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자신을 이렇게까지 창피하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남설아였다. 예전엔 언제나 자신 눈치만 보던 그 여자가 이제는 완전히 달
서유라는 원래 눈빛으로 기선 제압하려던 중이었지만 남설아가 이렇게 단순하고 거칠게 자기를 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얼굴빛이 확 변했고 배서준이 나오는 걸 곁눈질로 보자마자 바로 태도를 바꿔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설아 씨, 내가 좀 멀미가 심해서 앞자리에 앉은 건데 너무 화내지 마.”“운전하면 되잖아? 그것도 앞자리니까.”남설아는 팔짱을 낀 채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서유라를 바라봤다.“그건...”서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설아를 바라봤다. 이 여자의 논리가 이렇게 치밀하고 말 한마디로 사람을 말문이 막히게 만들 줄은 정말 몰랐다.“서준 씨는 오늘 아주 바쁘잖아. 유라 씨는 원래 눈치 빠르지 않았어?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을 틈이 있나? 멀미 심하면 유라 씨가 운전해. 난 내가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아야겠어.”남설아는 더 이상 서유라의 연기에 관심 없다는 듯 소독 물티슈를 꺼내 조수석 시트를 꼼꼼하게 닦고는 툭 하고 자리에 앉았다.그 행동을 본 서유라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배서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서준아, 나 그냥 택시 타고 갈게.”“타, 같이 가.”배서준은 뒷좌석 문을 열며 서유라를 향해 한마디만 했다.그제야 서유라는 오늘 조수석은 포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불만은 가득했지만, 이 자리에서 억지 부리면 더 손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조용히 뒷자리에 올라탔다.배서준도 뒷자리에 타면서 조용히 서유라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때 천기준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그는 아무 말 없이 순순히 운전석 문을 열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차를 몰고 부동산 계약 장소로 향했다.서유라는 처음엔 자신이 완전히 밀렸다고 생각했지만, 배서준이 자기 손을 꼭 잡은 걸 보고 곧 깨달았다. 이 사람은 이미 계획을 해두었다.그러자 그녀는 곧 연약한 척 배서준 어깨에 기대며 부드럽게 말했다.“서준아, 나 좀 어지러워.”역겹기 짝이 없었다.남설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가증스러운 여자가 뭐가 좋은지 이해가
배서준이 제일 싫어하는 건 남설아가 다른 남자에게 웃는 거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강연찬이라니 더 화가 났다.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강연찬 앞에서 남설아의 허리를 확 감싸 안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순간 방 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하지만 강연찬의 눈에는 배서준의 행동이 유치하게만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방해하지 않을게.”“거기 서요. 앞으로 내 아내 앞에서 얼쩡대지 마요.”배서준은 남설아의 허리를 감싼 채 강연찬을 향해 경고했다.“아내? 배 대표님이 말 안 했으면 몰랐겠네요. 설아가 그쪽 아내였어요?”강연찬은 인내심을 가지고 멈춰 섰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그대로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가볍게 말했다.“설아가 병원에 입원한 일주일 동안 난 매일 찾아왔고 직접 요리도 해줬어요. 배 대표님은요? 얼굴 한 번 안 비췄잖아요. 그런데 감히 설아가 그쪽 아내라고요?”“당신!”배서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본능적으로 남설아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이런 상황에서도 배서준은 꿋꿋하게 말했다.“그건 우리 부부 사이 문제에요. 그쪽이 참견할 일 아니죠.”“두 사람 부부 문제는 나랑 상관없죠. 하지만 내 후배 문제는 내가 그냥 넘길 수 없어요. 배 대표님, 착각하지 마요. 내가 신경 쓰는 건 그쪽이 아니에요. 정말 우습네요.”그 말을 남기고 강연찬은 돌아섰다. 그 뒷모습은 마치 전투에서 이긴 장군처럼 당당했다.남설아는 그런 강연찬의 유치한 승리감에 실소를 터뜨렸다.‘아니, 이 사람 대학교 때보다 더 애 같아졌네?’“남설아, 넌 정말 아내로서 해야 할 도리를 모르는구나. 넌 내 배서준의 아내고 배건 그룹 사모님이라고. 다른 남자랑 이렇게 당당하게 다니다니, 배씨 가문 체면은 생각 안 해?”그는 남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따지듯 말했다. 하지만 남설아는 그런 질문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서준 씨는 서유라 허리 휘감고 세상 다 돌아다
서유라는 화가 나서 컵을 몇 개나 집어 던졌다. 그런 누나의 모습에 서도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별것도 아닌 천한 년이잖아. 매형 돈은 곧 누나 돈인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걔한테 넘겨주다니? 누나, 내가 나서서 그 여자 제대로 혼쭐내줄까?”서유라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도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이번에는 제발 신중하게 해. 괜히 설쳐서 또 손해 보는 일 없게. 알겠지?”“걱정하지 마. 그냥 여자 하나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지.”서도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번 교도소에 갔다 온 것도 결국 그 여자 때문이라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번엔 진짜 예전 일까지 싸잡아서 복수해주겠다고 이를 갈았다.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났다.그동안 남설아는 병원에서 아주 얌전히 요양 생활했다. 몸도 많이 회복돼서 살도 약간 올랐다.강연찬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꽃다발을 들고 남설아가 퇴원할 때 병원에 찾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는 마침 남설아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을 때였다. 하얀 등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에는 선명하고 끔찍한 상처 자국이 있었다. 피부 대부분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나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강연찬은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얼굴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하지만 남설아는 등을 돌린 상태였고 보여준 건 단지 뒷모습뿐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휘저으며 담담히 말했다.“다 입었어요. 돌아보세요.”비록 등 한쪽을 본 것뿐인데도 강연찬은 자꾸 괜한 상상을 하게 됐다.하얀 등이 눈앞에 아른거리다 남설아의 얼굴과 겹치니 마음속의 작은 불씨가 더 활활 타올랐다.강연찬은 어색하게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퇴원 축하해.”“고마워요, 오빠. 근데 오늘 월요일이라 바쁠 텐데 어떻게 시간 냈어요?”남설아는 꽃을 받아들며 고개를 살짝 기울여 강연찬을 궁금하다는 듯 바라봤다.강연찬은 앞으로 성큼 다가와 USB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연훈 그룹에서 우리한테 요구한 기술자료야. 우
배서준은 자신이 남설아에게 결정타를 날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위협은 남설아 눈에는 그저 웃기는 소리일 뿐이었다.심지어 남설아는 가끔 배서준의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궁금했다.예전에는 자신이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진짜 연애에 눈먼 건 배서준 쪽 같았다.인제 와서 이 모든 일이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한다니, 정말 뻔뻔함도 이런 뻔뻔함이 없다.남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고 바로 자리에 누워 병실에서 평온한 요양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한편 차 안에서는 서유라가 조심스럽게 배서준을 바라보며 작게 물었다.“서준아, 우리 이제 어떻게 해?”“그깟 돈 좀 주면 어때.”배서준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배건 그룹은 어쨌든 수천억을 움직이는 대기업이고 고작 260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부부 사이였기에 돈이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넘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오히려 본가가 진짜로 정리돼 버린다면 그 피해는 자신들이 입게 되고 그 순간 상류사회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서유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어떻게 배서준이 남설아에게 260억이나 그냥 줄 수가 있지? 대체 뭔 자격으로 그런 걸 받아?’그녀는 그동안 배서준 옆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뒷말과 차별을 감내했는데 그렇게 받은 돈을 다 합쳐도 260억의 10분의 1도 안 됐다.그녀는 처음으로 느꼈다. 배서준의 사랑이라는 건 결국 허상일 뿐이었다.배서준은 그런 서유라의 눈빛 속 못마땅한 감정을 알아채고는 안쓰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기분 풀어. 너 바닷가 별장 좋아했잖아. 월요일에 명의 이전할 때 그 별장 네 이름으로 해줄게, 어때?”예전 같았으면 별장을 받는다는 건 큰 선물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260억이라는 금액을 본 이상, 별장은 그냥 구걸하는 사람에게 던져주는 적선 같았다.그래도 서유라는 놀란 척을 하며 환하게 웃고 배서준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역시 서준이 너뿐
배서준은 제일 먼저 바닥에 무릎 꿇은 서유라를 일으켜 세우고는 곧장 남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나랑 맞서겠다는 거야?”“우린 그저 비즈니스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거예요. 난 당신이 정한 방식에 맞춰서 하고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안 되는 거예요?”남설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치 아무 잘못도 없는 듯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배서준 씨, 우리 사이에서 가장 어이없는 얘기가 감정이란 거 서준 씨도 알잖아요.”“남설아, 내가 나은이의 유골을 파내서 갈아버릴 수도 있다고 하면 믿겠어?”배서준은 갑자기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남설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가장 아꼈던 게 그 못된 계집아이이니 한번 해보자는 의미였다.남설아는 이미 이 남자의 냉혹함을 충분히 겪어봤다.지금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걸로 끝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나은이 살아있을 때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았잖아요. 죽은 지금은 더더욱 그렇죠. 내가 왜 당신 말을 못 믿겠어요? 유골을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사람이 죽으면 그냥 죽은 거죠. 누가 그런 걸 신경 써요?”남설아는 웃기 시작했다. 크게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정말 웃기네요. 나은이가 아플 때 1억을 달라고 부탁했을 때는 한 푼도 안 주더니 인제 와서 아이의 유골을 들먹이며 260억을 아끼려 들다니요. 서준 씨 같은 사람 눈에는 도대체 뭐가 값지고 뭐가 쓸모없는 건데요?”“너!”배서준은 눈에 핏발이 서며 이성을 잃었고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들어 남설아의 목을 움켜잡았다. 완전히 마지막 인내심마저 무너진 듯 그는 남설아의 목을 세게 조이며 감출 수 없는 살의를 드러냈다.“네가 그 유언장 하나 들고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아?”“그래도 서준 씨처럼 사람 목 조르는 것보단 낫죠.”남설아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며 비웃었다. 예전엔 자신이 너무 착하고 순해서 이런 사람에게 눌려 살았던 거였다.하지만 이제 나은이도 이 세
윤화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세상에서 제일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듯 소리 내 비웃었다.“아버지가 있다는 걸 기억하긴 하네.”“됐어요. 지금 당장 집 문제부터 처리하러 갈게요.”배서준은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불바다란 말이 자기 인생을 이렇게 정확하게 설명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흐느끼고 있는 서유라를 바라보며 죄책감과 무력감에 잠겼다.“괜찮아?”“괜찮아. 사실 어머님 말씀도 틀린 건 없어. 모든 게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했어. 서준아, 나 진짜 설아 씨한테 널 돌려주고 싶어. 근데 어떡해, 난 정말 그게 안 돼. 널 사랑해. 너 없으면 안 돼. 정말 너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난 죽을지도 몰라.”서유라는 절박하게 배서준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 눈빛 속엔 거의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의존이 가득했다.그리고 배서준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이런 병적인 의존과 소유욕이었다. 이런 감정만이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그는 서유라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넌 날 절대 잃지 않아, 바보야.”“서준아, 나 무서워.”서유라는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애교를 부렸다.그녀도 사실 마음속으로 꽤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설마 남설아가 진짜 저렇게까지 뒤집을 줄은 몰랐다. 가문 전체를 본가에서 내쫓다니, 생각보다 너무 대담했다.배서준은 곧 서유라를 데리고 남설아의 병실로 향했다.강연찬은 회사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병실 안에는 남설아 혼자였다. 그녀는 배서준이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유라까지 같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보아하니 유라 씨한테는 정말 정이 깊으신가 봐요. 이런 상황까지 와서도 굳이 함께 오다니요?”남설아는 손을 꼭 잡은 채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서준 씨, 애초에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나랑 결혼했어요?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왜 지우라고 말하지 않았죠? 결혼하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어머님, 진정하세요.”서유라는 윤화진의 허리를 단단히 안으며 가까스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넌 비켜!”윤화진은 서유라를 거칠게 밀쳐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가 우리 아들 유혹한 그 요망한 년이란 거 모를 줄 알아? 우리 집안 꼴이 지금 뭐가 됐는지 봐! 인제 와서 착한 척은 집어치워. 염치도 없구나!”“이게 웬 난리예요?”배서준이 성큼성큼 걸어와 모두 사이에 몸을 막아섰다. 모자를 쓴 중년 사내는 옷깃을 정리하며 배서준을 매섭게 바라봤다.“당신이 배건 그룹의 대표죠? 이름 있는 사람이라더니, 가족은 왜 이렇게 교양이 없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타인의 부동산을 불법 점유 중이라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일주일 안에 이 집에서 나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법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뭐라고?’배서준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여긴 배씨 가문의 본가였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집에서 자라왔다. 그런데 무단 점유라니.“경찰이 오해한 거 같은데요? 여긴 우리 집입니다.”배서준은 눈썹을 세게 찌푸리며 이게 누가 장난을 친 건지 의심했다. 하지만 경찰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증거를 꺼내 들었다.“부동산 등기부입니다. 이 집의 정식 소유주는 남설아 씨로 등록돼 있어요. 이 정도면 이해가 되셨겠죠?”그제야 배서준은 문득 생각났다.할아버지 유언장에서 이 집은 이미 남설아에게 넘긴 상태였다. 하지만 그동안 남설아는 한 번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은 거야?’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러니까 지금 남설아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겁니까?”“그렇습니다. 일주일 안에 반드시 퇴거하십시오.”경찰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돈 많은 사람이라고 고상할 줄 알았는데, 다 거기서 거기네. 아주 막무가내야.’“서준아, 설아 씨가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너무 심한 거 아니야?”“배서준! 이게 네가 그렇게 감싸던 아내야? 지금 이 상황 어떻게 할 건데?”서유라와 윤화진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서유라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