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인은 계속 빈정거렸다."차 렌트했어? 빨리 돌려줘, 긁히면 어쩌려고."그녀는 포르쉐를 알고 있었다. 재개발로 벼락부자가 된 친척이 이 브랜드의 차를 뽑았는데 아마 2억원 정도 들었을 거다. 손가을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참시 멈칫한 손가을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제가 선물한 겁니다."염구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딱딱하게 굳은 여인이 눈을 대굴대굴 굴렸다. 염구준이 선물한 거라고?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양반이? 듣기론 밥벌이도 제대로 못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맞아요, 구준 씨가 사줬어요. 더 안전한 차로 출퇴근하라고요."손가을이 이웃집 아줌마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여인은 그 자리에 완전히 굳어버렸다.고작 출퇴근을 위해서 이렇게 비싼 차를 뽑아줬다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 하지 않았던가? 직업도 없는데 이렇게 많은 돈은 어디서 났을까. "우리 장모님과 무슨 얘기 중이셨습니까?"염구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니, 별 얘긴 안 했어요... 난 이만 돌아가서 상이나 차려야겠네."난처한 표정을 짓던 여인이 휙 자리를 떠났다. 진숙영에게 뱉었던 말들을 되돌려 받는 느낌에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진숙영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서둘러. 좀 더 얘기 나누지."살이 피둥피둥 찐 여인은 황급히 꽁무니를 뺐다.그동안 쌓였던 억울함이 한순간 해소되었다. 눈앞의 다정한 부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자신의 사위는 딸아이에게 차를 사줬을 뿐만 아니라 손녀를 위해 성대한 생일 파티도 준비했다. 그는 꼭 마치 비밀을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손태석이 혀를 차며 말하길, 오늘 그들이 포르쉐를 몰고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저 이웃집 여자 때문에 심장병이 도졌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진숙영도 할 말이 많은 눈치였으나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손태석을 부축해 집으로 돌아갔다."방금 당신, 일부러 그 아줌마 약 올렸지?"손가을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게 뭐라고.
하지만 집밥은 몇 년 동안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진숙영의 요리 솜씨도 매우 훌륭했기에 식사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염구준이 식사하는 모습은 우아하지 못했다. 사실 게걸스럽게 먹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처음에 진숙영은 그 모습에 매우 놀랐으며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었다.인정하기 싫지만 그래도 자기 사위가 아니던가. 아마 5년 동안 밖에서 갖은 고생을 했을 터였다."염 서방, 이 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네."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밥을 먹던 손태석이 마침내 결심을 내리고 그에게 따져 물었다."지난번 파티 때, 자네 친구들 말이야. 대체 언제 그런 실력 있는 친구들을 사귄 것인가?"염구준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일전의 전쟁터에서 한 전우의 목숨을 구해준 적 있는데, 나중에 그 친구가 어마어마하게 출세했거든요. 제가 돌아왔다는 걸 전해 들은 그 친구가 손을 쓴 겁니다."염구준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게 되면 처가에 득 될 것이 없었다.그렇게 된 거로군.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내뱉는 한편 어쩐지 조금 실망스러웠다.진숙영이 흥, 콧방귀를 뀌었다."그럴 줄 알았지. 남들이 도와준 거였어."그러면서도 염구준에게 고기 한 점을 더 얹어 주었다.손태석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언제까지 신세만 지고 살 순 없잖나. 그러니 스스로 할 일을 찾아보게.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지는 말아야지."염구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퍼먹었다.손태석이 또 질문했다."그럼 포르쉐를 구입한 돈은 어디서 났는가?""군 복무도 오래 했었고, 또 선박 일을 하면서 모은 돈이 꽤 됩니다."손태석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반신반의하며 염구준을 쳐다보았다.히긴, 군 생활도 5년이나 했고 어쩌면 정말로 원양어선에서 돈을 많이 줬을지도 몰랐다."장인어른. 차는 정말 제 돈으로 샀어요. 다리 다 나으시면 제가 장인어른께도 차 한 대 뽑아 드릴게요."수저를 내려놓은 염구준이 장난스레 말했다.거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한편, 손영 그룹, 손태진 사무실."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손태진이 탁자 위에 찻잔을 툭 올려놓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아물지 못한 흉터가 그의 얼굴 곳곳에 나 있었고 팔도 깁스를 한 상태였다.수감된 며칠 동안 그는 지옥을 맛보았다. 곽승환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를 처참하게 짓밟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염구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알아냈습니다."책상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의 양아들 손호민이었다. 그가 이를 갈며 욕설을 퍼부었다."뇌물을 먹이는 데만 거의 1억을 썼어요. 용준영 부하를 잔뜩 취하게 만들어서 겨우 얻어낸 정보입니다. 예전에 용준영이 군 복무를 했었는데, 아마 염구준과 함께 근무했을 겁니다. 그 등신 새끼 도움을 꽤 많이 받은 것 같더라고요."손태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손가을이 용준영의 침대로 기어들어 간 게 아니었다. 이번 협력의 배후에는 뜻밖에도 염구준이 있었다. 그 등신이 뒤에서 몰래 손을 썼던 것이다."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용준영은 야심가예요. 고작 그 정도의 친분에 얽매일 자가 아닙니다. 이번 프로젝트 협력을 끝으로 더 이상 접점이 없을 겁니다."손태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용준영 같은 자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체면을 중요시했다. 이번에 손가을을 도와준 것으로 신세를 갚았으니 남들 눈에는 은혜를 절대 잊지 않고 보답하는 좋은 사람으로 비칠 터였다. 명성이 올라가는 건 덤이었다. 그러나 용준영이 평생 염구준을 싸고돌진 않을 것이다.염구준이 자신의 체면을 잔뜩 구겨 놓았으니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줘야 했다."공사장 쪽은 다 세팅해 뒀지?""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완벽하게 준비해 놨거든요. 손가을도 곧 깨닫게 될 거예요. 이 프로젝트를 맡은 게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걸요."손호민의 서늘한 눈동자에 독기가 잔뜩 서렸다.잠시 휴식을 취했던 염구준은 손가을을 차에 태우고 프로젝트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엄마랑 무슨 얘기 나눴어?"손가을이 무척 궁금
노랑머리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겁대가리를 상실했네. 감히 경찰을 부르시겠다? 얘들아, 모조리 때려 부숴버려."한 무리의 양아치들이 우르르 몰려와 저마다 쇠파이프나 몽둥이를 휘두르며 돌진했다."저년은 내 거야."음험하게 웃은 노랑머리가 손가을의 머리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휘두르려 했다. 기절시켜 데려가면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을 터였다. 예쁜 여자는 따먹어야지 않겠는가.창백하게 질린 손가을이 쇠파이프를 피해 몸을 비틀려는 찰나,우드득-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노랑머리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손가을의 앞을 막아섰다.바로 염구준이었다.노랑머리는 바닥에 패대기쳐진 채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두 다리는 모두 부러져 있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군."염구준이 싸늘하게 일갈하며 노랑머리의 팔을 지그시 밟았다. 밀려오는 끔찍한 고통에 노랑머리는 하마터면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뭐야, 저 새끼 막아!"분노에 찬 한 무리의 불량배들이 염구준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이곳에서 대놓고 소란을 피우는 중이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덤벼드는 자들이었다. 쪽수도 자기들이 더 많았으니 전혀 두려울 게 없었다."구준 씨…."안색이 퍼렇게 질린 손가을은 당장이라도 염구준을 끌고 도망가려 했다.그러나 낮게 웃음을 터뜨린 염구준이 그들을 향해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사나운 맹수 같은 기운을 풍기며 불량배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 속도는 눈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열 명이 넘는 불량배들은 도미노처럼 픽픽 쓰러졌다. 저마다 바닥을 구르고 코피를 줄줄 흘려대며 고통에 몸부림쳤다.불량배들을 가볍게 처리한 염구준이 손바닥을 툭툭 털었다. 마치 개미를 손가락으로 짓이기듯 손쉬워 보였다."……" 손가을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공사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했다.염구준과 손가을을 번갈아 쳐다본 그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용맹한 보디가드가 미녀를
불량배들이 꼬리를 말고 도망갔지만 손가을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녀가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구준 씨, 사실 희주 생일 파티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대체 이런 격투 기술은 어떻게 익힌 거야?"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제압하던 모습은 가히 두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딸아이의 생일 파티에서 보여준 실력은 또 어떠한가. 주먹 한 방에 백 명이 넘는 경호원들이 모조리 바닥을 굴렀다. 액션 영화 감독도 감히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없으리라. "별거 아니야. 오랫동안 군에 몸담았는데 망나니조차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개망신이지." 염구준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벌레보다 못한 놈들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게다가 감히 손가을을 넘보다니, 아주 죽여달라고 고사를 지내는 거나 다름없었다. 염구준은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가차 없이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손가을은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시공팀에게 다가간 그녀가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지시하기 시작했다.몇몇 책임자들은 손영 그룹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는 손가을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퍽 불만이었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맡았던 베테랑들이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새내기가 고까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염구준이 떡하니 버티고 있자 그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순순히 손가을의 말에 따랐다."두 달 안에 완공하고, 석 달 뒤에는 공장을 가동할 거예요." 기한을 정하는 손가을 앞에서 몇몇 담당자들은 고장 난 인형처럼 연신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손가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생산라인만 잘 건설하면 절반은 성공한 셈이에요. 또한 후반에는 각 부서와 협력하여 고품질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손가을은 뭐든 진지하게 임하는 스타일이었다. 무엇하나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없었다. 꼼꼼하고 때론 박력이 넘쳤으며 신중하면서도 결단력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엘리트였다. 가만히 앉아
돈이 너무 적어서 귀찮은 게 틀림없었다. "고객님, 잠시만요." 잔뜩 흥분한 은행 직원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받들고는 진숙영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치 보물을 감싸 안듯이 카드를 소중하게 품은 은행 직원이 재빨리 지점장에게 달려갔다. 문을 두드리는 것도 잊은 채 다짜고짜 쳐들어간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지점장에게 말했다."지점장님. 큰... 큰일 났어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던 뚱뚱한 중년 남성이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냈다."웬 소란이야. 무슨 일인데." "이것 좀 보세요." 여직원이 급히 카드를 내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중년 여성분께서 이 카드 안에 있는 돈을 전부 출금하려고 해요." 은행 카드를 힐끗 바라본 지점장이 둔중한 몸을 움찔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물고기 사료가 와르르 어항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수습할 겨를도 없이 블랙카드를 홱 낚아챈 지점장은 1분 동안 카드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모든 디테일을 꼼꼼하게 살펴본 그가 마침내 결론에 다다랐다.이건 VVIP 블랙 카드였다. 전국 은행에서 통용되며 안에는 적어도 2000억이 들어있었다. 이 많은 액수를 전부 인출한다고? 현금 2000억을 보유한 은행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 고객님 옷차림은 어땠어?" 간신히 냉정함을 되찾은 지점장의 머리가 그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나 신청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신청인은 매우 고귀한 신분을 갖고 있어야 했다. 상사의 말만 들어보았을 뿐, 그로서는 처음 실물로 접해보는 카드였다. "딱히 특별한 건... 사실 좀 초라해 보이긴 했어요." 진숙영이 입은 외투는 십여 년 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이었다. 즉, 지금은 구할 수조차 없는 옷이었기에 여직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설마, 카드를 주운 건 아니겠죠?" 이윽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여직원이 되는대로 지껄였다."훔친 걸 수도 있고요… 지점장님, 어떡해요?" "젠장,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어떻게 이런 걸 훔칠 수가 있어!" 지점장이 분노를
"얌전히 따라오십시오." 다짜고짜 진숙영을 지점장실로 끌고 간 보안 요원 중 한 명이 그녀를 힘껏 소파에 처박았다. 그가 지점장의 눈치를 살피며 살살 아부했다."지점장님, 말씀대로 끌고왔습니다." 혹시나 지점장의 눈에 들어 내일 당장 보안 팀장으로 승진할지도 몰랐으니, 그에게 잘 보여야 했다. 진숙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따졌다."뭐 하는 짓이야. 당장 이거 놓지 못해?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이래!" 지점장이 냉소했다."뭐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순순히 인정하시지." 진숙영은 잠시 멍해졌다. 대체 뭘 인정하란 말인가?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뻔뻔하기는."여직원이 진숙영을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훑었다. 주름지고 건조한 피부에 낡고 허름한 옷... 기껏해야 건물 청소나 할 법한 사람이었으니 절대 이 블랙 카드의 주인이 아니었다. "이 카드, 어디서 훔쳤어?" 여직원은 진숙영을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벙찐 진숙영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이 번 돈으로 당당하게 살아온 그녀였다. 한데 어떻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쓴단 말인가? "헛소리하지 마!" 블랙 카드를 노려보던 진숙영이 이를 악물었다."이건 우리 딸 카드야." "정말 웃기는 여자네. 끝까지 발뺌이지. 경찰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여직원이 한껏 비아냥댔다.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은행에서 막중한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첫 번째 징계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일 테고. "이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니, 늙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 여직원의 말은 비수가 되어 진숙영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댔다. 잔뜩 화가 난 진숙영이 여직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짝-그러나 보안 요원이 진숙영의 뺨을 후려갈기며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죽고 싶어?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손바닥 자국을 따라 진숙영의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녀의 여린 자존심도 한없이 짓밟혔다
"도둑년. 마지막으로 할 말은?"지점장은 신문지로 진숙영의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며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면 자신은 아주 큰 공을 세우는 셈이었다."나... 나... "보안 요원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 바닥에 엎드리게 된 진숙영이 이를 꽉 깨물었다. 잔뜩 쉰목소리로 그녀가 울먹거렸다."가족들과 연락하게 해줘."공사 현장.프로젝트에 관한 지시를 내린 손가을은 몹시 뿌듯했다.현장에 오기 전, 그녀는 단단히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사실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풀릴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작업반장은 자신의 결정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비위를 맞춰주기까지 했다. 지난번의 방문과는 무척이나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하던 사람들이었다. 고개를 돌려 염구준을 슬쩍 훔쳐보았다. 손가을은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염구준이 그녀를 위해 미리 사람들을 제압했을 터였다. "수고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마지막 당부를 마친 손가을이 빠른 걸음으로 염구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도중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였다. 전화를 받은 손가을이 웃으며 말했다."엄마, 방금 퇴근했어요! 곧 집으로 돌아갈..." "가을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왔다."엄마가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렸어..." 진숙영은 조금 전 은행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낱낱이 토로했다."가자." 염구준은 군말 없이 손가을을 포르쉐에 태웠다. 포르쉐가 무서운 굉음을 내며 은행을 향해 질주했다. 가는 내내 손가을은 분노를 삭이며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억울한 일은 아마 처음 겪으실 거야. 자존심이 강한 분이신데... 지금쯤 분명…" 도둑으로 몰려 경찰서에 끌려가게 생겼다니, 그녀는 한없이 절망하고 있을 터였다. 비록 그들은 돈도 없고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법을 어기는 부끄러운 짓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빠도 엄마한테 욕을 한 적 없는데.
잔뜩 겁에 질린 매니저는 찍 소리도 못하고 부랴부랴 도망쳤다.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람이 죽은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그때 청년이 일어서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너희들 저주할 거야. 청목 존주도 저주할 것이다.”청목 존주의 적이라는 것을 확인한 염구준은 가슴이 벌렁거리고 뇌가 빠르게 돌아가더니 계략을 짜기 시작했다.친구의 친구는 반드시 친구가 될 수 없지만 적의 적은 또 말이 달랐다.염구준 일행은 남극 빙원에 있는 청목의 행적을 모르고 있으니 안내자가 있다면 일이 수월하게 될 것이다.그가 작은 소리로 부하들에게 임무를 맡겼다.“시간 됐다. 죽어!”우두머리는 1초도 지체하지 않고 칼을 높이 들었다.바로 그때 모든 전등이 꺼졌다.갑자기 어두워지자 홀에 비명이 쏟아지고 서로 밀치고 도망치느라 난장판이 되었다.“도망쳐! 살인이야!”누가 고함을 지르자 현장은 더 혼란스러워졌다.“아아악!”여러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바로 피바다에 쓰러졌다.그들은 죽을 때까지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몰랐다.옆 사람들도 모두 자신을 보호하느라 정신없어서 누가 죽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염구준 일행은 야간 투시경을 끼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홀에서 나왔다.계획은 차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백호는 어깨에 청년을 메고 도망쳤다.“CCTV를 피해서 객실로 돌아가자.”염구준이 지시를 내렸다.사람을 구한 것을 반드시 비밀로 해야 했다.아니면 저들이 쫓아오는 날에 일이 더 귀찮아질 것이다.“네.”백호는 혹시나 들통날까 봐 커다란 캐리어를 찾아 젊은이를 집어넣었다.객실에 돌아온 후, 염구준은 잠든 청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이 녀석이 있으면 남극 빙원에서 길을 헤매고 다니지 않겠지.’
“두 가지 선택을 줄게. 여기서 죽거나 바다에 뛰어내려서 헤엄쳐 가.”듣다 못한 노인이 언성을 높였다.“여긴 용하국의 해역이다. 너희들 멋대로 행패를 부릴 수 없다.”“아니지. 1분 전에 용하국을 벗어났어.”우두머리가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체크했다.“시간이 많지 않아. 5분 줄 테니까 대답해.”장난치는 게 아니라 시간이 되면 진짜 말한 대로 할 것이다.청년과 노인은 상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속만 끙끙 앓았다.“3분 됐어.”우두머리는 계속 시간을 말해주었다.참다 못한 노인이 따져보려고 입을 열었다.“너희들… 컥!”말을 꺼내기 전에 노인의 머리가 멀리 날아갔다.일행의 살의는 생각보다 강했다.“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라고 했어?”우두머리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발로 툭툭 찼다.단진무성 초기에 도달한 무술인이었다.기운만 봐도 우두머리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아저씨!”청년은 머리 없는 시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사람을 죽였어!”파티를 즐기던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고 기겁하는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피범벅이 된 살인 현장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누가 감히 천랑성호에서 살인을 저질러?”살인 사건이 터지자 매니저가 경호원들을 데리고 현장에 나타났다.“왜 청목 존주님의 일에 너희들이 끼어들어?”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청목 존주님?’청목 존주란 이름은 전에 들어본 적 없었지만 최근에 용하국에 이름이 자자했다.유람선을 운영하는 매니저는 혹시나 부딪칠까 걱정했는데 하필 오늘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형님들 마음대로 하세요.”
승무원은 초면인 사람에게 더 건방지게 굴었다.“거지 같은 파티에 티켓 없으면 들어갈 방법이 없나?”염구준은 믿지 않았다.금전을 숭상하는 유람선에서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한 사람당 티켓 200만 원 내면 들여보낼게. 그럴 돈이 있어?”승무원이 의기양양한 말투로 물었다.몇 시간밖에 안 되는 파티에 200만 원이라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하. 생각보다 싸네. 7장 줘.”염구준은 돈 뭉치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가 돈 뭉치를 던질 줄은 생각도 못했는지 승무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뭘 봐? 이건 돈이 아니야?”염구준은 큰소리치며 전혀 체면을 주지 않았다.‘사람이 서로 존중해야지 때리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봐준 줄 알아.’큰소리에 깜짝 놀란 승무원이 꽥하고 소리질렀다.“안 돼. 차림새가 너무 촌스러워!”그녀는 트집잡기 선수였다.방금 금목걸이에 모피를 걸친 사람도 들여보냈는데 염구준 일행은 안된다고 잡아뗐다.원래 문지기 개는 주인보다 사나운 법이었다.“매니저 어디 있어? 얘기 좀 해야겠어.”염구준은 승무원과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경호원, 누가 소란을 피워요. 빨리 오세요!”오히려 승무원이 적하반장으로 저쪽을 보며 소리질렀다.이 일이 매니저에게 알려지면 바로 쫓겨나게 되니 절대 만나게 하면 안 되었다.“이 사람들 잡아서 쫓아내세요.”20명 넘는 경호원이 나타나자마자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쓸데없는 말을 하기보다 사람을 잡는 게 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쿵!그때 주작이 기운을 펼치며 달려오는 경호원들을 전부 튕겨버렸다.“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무슨 싸움을 하겠다고. 너희들 목숨줄이 그렇게 길어?”아무리 간이 부어도 상대가 누군지 보면서 덤벼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문외한들은 무술에 대해 모르니 경호원들이 날아가는 장면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그때 함성 소리와 함께 승무원 옷을 입은 꺽다리가 나타났다.“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야?”“매니저님, 이 사람들 행패
“이쪽은 가짜, 저쪽은 진짜예요. 됐죠? 당신들은 나가세요.”승무원의 태도는 반감을 살 정도로 불쾌했다.염구준은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 나머지 6명은 절대 참을 수 없었다.“우리 티켓이 가짜라면 말없이 나갈 수 있어요. 근데 그쪽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들어요.”염구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흥, 불만이세요? 여기서 내 말이 법이에요.”승무원이 표독스럽게 대꾸했다.최하 등급 티켓을 산 사람들에게 아예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촥촥!보다 못한 주작이 바로 승무원에게 싸대기를 날렸다.“네가 뭔데?”감히 보스 앞에서 법을 내세우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승무원은 오랫동안 근무했지만 이렇게 폭력적인 상황은 처음이라 어리둥절했다.최하 등급 티켓을 사는 주제에 감히 자신의 뺨을 맞은 것이 억울해 바로 전기봉을 들었다.“미친년, 방금 날 때렸어?”탁!하지만 내려치기 전에 전기봉이 주작의 손에서 두 동강이 났다.이어서 묻지마 폭행이 이어졌다.“주둥이를 확 찢어버릴라. 방금 뭐라고 했어?”“아가씨, 잘못했어요. 너무 아파요!”승무원이 비명을 질렀다.“저년 바다에 처넣자. 아니면 귀찮아져.”옆에서 백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멍청한 말을 꺼냈다.그 말에 승무원은 물론 옆에 있던 모녀까지 벌벌 떨었다.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바다에 처넣다는 말에 단단히 겁을 먹었다.“아니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안목이 없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당신들 티켓은 진짜예요.”승무원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사정했다.“만약 귀찮게 일을 벌리면 바로 물고기 먹이가 될 줄 알아. 꺼져!”염구준은 살기를 뿜으며 승무원에게 겁을 주었다.만약 복수한다고 사람을 부른다면 일이 귀찮아지게 될 것이다.“절대 안 그럴게요. 절대요.”제대로 겁먹은 승무원은 네 발로 기어서 도망갔다.“따… 딸아. 우리 그냥 티켓 다시 사자.”아주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딸에게 말했다.염구준 일행은 겉보기에 선한 얼굴이지만 화가 나면 저승사자 같아서 괜히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잠깐
“저기요. 뭐 좀…”“아는 척하지 마세요. 차림새를 봐.”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젊은 승무원에게 무시를 당했다.‘작전을 위해서 참자.’현무는 억지로 웃으면서 물었다.“9527호실은 어디로 가면 됩니까?”그들 일행은 일련번호가 찍힌 티켓을 들고 있어 방 한 칸만 찾으면 되었다.“몰라요.”승무원은 눈을 흘기며 으리으리하게 차려 입은 남자에게 달려갔다.“고객님, 천랑성호에 탑승한 것을 환영합니다. 원하는 서비스가 있을까요?”고급진 장소일수록 인간의 본성이 드러났다.그 모습을 지켜본 현무는 열 자리 이상 숫자인 통장 잔고를 승무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무시당하는 기분이 정말 불쾌했다.“한 사람 한 층씩 찾아.”염구준은 이어폰으로 객실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이번 작전에서 첫 명령이었다.“네. 알겠습니다.”일행은 작전 명령이라 여기고 빠른 걸음으로 객실을 찾으러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폰에서 말소리가 들렸다.“찾았어요. 3층 중간 방입니다.”객실에 도착한 후, 염구준은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짧은 회의를 열었다.“이번 작전은 아주 위험해. 내가 반천인 경지 개조 로봇을 봤어. 그러니까 방심하지 말고 불필요한 상황에서 절대 나서지 마. 만약 밖에 나가서 놀고 싶다면 주작을 찾아서 분장한 다음에 나가. 알겠지?”엄숙한 표정으로 짧게 설명하던 염구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이번 여행을 즐기자. 유람선에서 비용은 내가 다 쏜다.”그 말에 다들 눈을 반짝였다.“형님 만세! 벌써 신나요.”세계 유람이라도 다들 비용을 낼 형편은 되었다.하지만 다른 사람이 비용을 낸다면 기분이 달랐다.똑똑!다들 기뻐할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음식을 주문하지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유람선에서 누가 찾아왔는지 어리둥절했다.염구준이 일어서 문을 열자 낯선 모녀가 밖에 서 있었다.“무슨 일입니까?”아주머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휴, 당신들 우리 열쇠를 훔치고 우리가 예약한 방에 들어왔는데 무슨 일이라니요?”아주머니의 눈길을 보니 당장이라도
“하하, 이겼다.”얼마나 많은 수를 무르고서야 할아버지는 이겼다고 아이처럼 기뻐하셨다.이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진 적은 없지만 번마다 이길 때면 엄청 좋아하셨다.단지내에서 염구준만 이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었다.“대단하세요.”염구준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렸다.자신의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인들은 모두 좋은 대우를 받길 바랐다.지잉-전신전에서 연락이 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어르신,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얼른 가. 일이 중요하지.”할아버지는 장기판을 보며 기쁨을 만끽했다.염구준은 자료를 보면서 집으로 달려갔다.“국주님, 놈들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지금 남극 빙원에 있어요. 구체적인 위치는 아직 모르겠고 놈들의 수법이 은밀해서 빼앗은 로봇을 모두 여러 갈래로 운반하고 있어요.”남극 빙원은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기후가 악랄하고 환경이 복잡한 데다 수많은 세력들이 잠복해 있었다.아직까지 통제할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은 탓이다.몇 년 전만 해도 그곳의 기후가 매우 낮아 누구도 살지 않았었다.그런데 최근,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방한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수많은 조직과 세력들이 그곳에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하지만 아직까지 치안이 혼란스럽고 주먹이 센 사람이 통치는 바람에 곳곳에 위험이 도사렸다.염구준은 자료를 살펴보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정영팀은 신속하게 청해로 온다. 위장을 잘하고 절대 행적이 드러나면 안 된다.]이번 작전에 대해 대략적인 계획을 세운 후, 집에 돌아와 손가을에게 말하고 그날 저녁에 청해 부두로 향했다.장모님인 진숙영에게 은밀히 고수들을 붙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신비한 클럽은 인간 세상에서 증발할 것처럼 사라져서 골치가 아팠다.하지만 국정이 급선무인 지금 청목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염구준이 부두에 도착했을 때 백호, 주작, 현무 그리고 세 명의 전왕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들 모두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큰 가방을 들고 있었다.“주… 염 선생님!”여섯 사람은 염구준에게 다가와 깍듯하
“주작. 천목 시스템을 가동해. 내가 구체적인 좌표를 보내줄 테니까 그 해역의 화물선을 주시해.”“백호. 7인 정예팀을 선발해서 잠시 내 명을 대기하고 있어.”“현무, 한 달 사용할 최첨단 무기를 준비해.”“청룡, 넌 전신전을 지키고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염구준이 지시를 내릴 때 누구도 농담하지 않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다.“네.”임무를 내린 후, 염구준은 한마디를 남기고 청해로 돌아갔다.“송 가주와 국주가 상의하는 동안 누가 방해를 한다면 바로 죽이러 올 것이다.”염구준의 말에 외부인들은 바로 속셈을 거두었다.이어서 송씨 가문은 절반 주식을 국주에게 담보로 내놓고 보호를 받았다.국주가 내세운 조건은 송씨 가문이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생길 때 다시 주식을 돌려주는 것이었다.중요한 임무를 맡은 송현우는 지금 상황에서 반천인 경지와 싸울 수 있는 유력한 후계자였다.송명호 일가는 더는 송 가주를 방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족보에서 쫓겨났다.그를 지지했던 세력들은 자발적으로 돈으로 배상하고 평화를 유지했다.송씨 가문의 세력이 대폭 하락하니 이러는 수밖에 없었다.청해로 돌아온 염구준은 손가을이 잘 관리한 덕에 편히 지낼 수 있었다.“구준이 왔어?”그를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은 방금 기도를 마친 진숙영이었다.최근 신비한 클럽이 감쪽같이 사라진 바람에 그녀는 갈 곳이 없어 집에만 있었다.“장모님.”염구준이 뭐라고 하기 전에 진숙영은 또 속으로 중얼거리며 기도했다.“아빠.”인기척을 듣고 나온 염희주가 활짝 웃으면서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갔다.“그래.”‘귀여운 녀석, 어쩜 이리 애교가 많을까. 며칠을 못 봤더니 또 키가 컸네.’염구준은 대답하면서 딸을 뻔쩍 들어올렸다.딸을 보는 그의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았다.“저러다 신선이 되겠어요.”염희주는 진숙영을 힐끔 보면서 염구준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그런 말하면 못 써.”염구준이 바로 말렸다.어른들의 일에 아이가 끼어드는 것과 함부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아빠
송씨 가문의 절반 재산은 천문학적인 숫자인데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하다니 생신을 축하하러 온 손님들이 당황했다.“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부디 염 선생이 말씀해 주시죠.”송 가주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국주한테 가서 얘기하면 아마 기꺼이 도와줄 겁니다.”염구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송 가주는 그제야 깨달은 듯 허벅지를 탁 쳤다.솔직히 말해서 염구준도 절반 재산을 갖고 싶었다.하지만 손씨 그룹에 비해 용하에서 더 필요할 것 같아서 거절한 것이다.이 정도 대의는 갖추고 있었다.“가주님, 큰일 났습니다.”두 사람 대화할 때 한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왔다.“얼른 말해. 이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 있냐?”송 가주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과감하게 말했다.“저희가 해외에 수출한 로봇 화물선이 습격당했어요. 거기에 나무 표식이 있었습니다.”그 사람은 재빨리 다가가 태블릿을 보여줬다.확인하던 송 가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염 선생. 이거 진짜 큰일 났습니다.”송 가주는 태블릿을 빼앗아 염구준에게 걸어갔다.이번에야말로 진짜 큰일이 벌어졌다.염구준은 힐끗 쳐다보려 했으나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았다.“젠장. 이건 노골적으로 도발하는 겁니다.”옆 사람들은 방금 싸울 때도 이렇게 화내지 않았는데 반천인 고수가 화난 모습을 보니 등골이 오싹했다.태블릿에 뜬 메시지에 몇 글자과 사진 2장만 보였다.내용은 이랬다.[먼저 송씨 가문을 도륙하고 용하국을 주살한다.]사진 한 장에 검정색 나뭇잎이 찍혀 있고 다른 한 장에는 청색 나뭇잎이 찍혀 있었다.그것은 분명히 떠돌이 7인조에서 흑풍과 청목을 가리키고, 두 사람이 송씨 가문과 용하를 상대하겠다는 뜻이었다.용하국에서 송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염구준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용하를 건드린다면 상의할 여지없이 싸워야 했다.“염 선생,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요?”송 가주는 마땅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지금 폐인이 되어서 아무리 훌륭한 계략을 짜도 실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이제 좀 재미있네.”그는 두 손으로 검을 잡고 공격할 태세를 잡았다.송현우의 검의가 얼마나 강한지 엄청 기대되었다.승부는 금방 갈리고 구경군들은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필경 마지막 공격으로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매화검법. 쇄산!”먼저 기운을 축적한 염구준이 검을 들고 공격했다.송현우의 검의는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게다가 고씨 선조들이 남긴 시구를 본 이후로 염구준이 초식을 조금 바꾸었는데도 무궁무진한 힘을 발산했다.“죽어라!”그때 맞은편에서 송명호도 패왕창을 들고 공격했다.염구준의 기운을 감지하고 본인이 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하면서 공격한 것이다.예를 들면 갑자기 염구준이 심장병이 발작한다든가.쿵!칼끝과 창끝이 부딪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폭발했다.강력한 위력에 송명호는 저항하지 못하고 패왕창을 든 채로 뒤로 튕겼다.한마디로 말해서 한 초식도 감당해지 못하는 패배자였다.싸움이 드디어 끝났다.이 결과는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조금은 어느 정도 싸우다 체력이 소모되었을 때 주변에서 습격하려고 했는데 이젠 망상이 되어버렸다.염구준은 검과 주변의 검기를 거두었다.“4할 전력이 남았어요. 도전할 분 계신가요?”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패기 있게 말했다.“…”송명호 일가는 도전해도 볼품없이 패배할 텐데, 도전은 개뿔이라고 속으로 욕했다.“투항하겠습니다.”그때 누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한 사람이 시작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잇달아 투항했다.우두머리인 송명호가 죽은 이상 계속 대항할 이유가 없었다.투항하면 적어도 목숨은 건질 수 있지 않은가.상황이 전환되어 송 가주 일가가 승리했다.“할아버지, 아버지.”송청연이 외치며 앞으로 달려갔다.“난 괜찮다.”송 가주는 부축임을 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역전승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염구준의 앞에 다가간 그는 무릎을 꿇었다.“염 선생, 살려줘서 고맙습니다.”“염 선생, 감사합니다.”송 가주 일가 모두 무릎을 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