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야? 나 너무 배고파. 우리한테 밥도 안 주고... 무서운 개랑 같은 데 가둬두고... 개한테 여러 군데 물리기까지 했어. 나 너무 아프고 무서워. 흑...”극북빙양, 거대한 전장에서 수많은 함선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그중 붉은색 드래곤이 코팅된 함선의 지휘실 수화기에서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하지만 아이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염구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잘못 거셨습니다.”“아니야! 우리 엄마가 날 속였을 리가 없어. 내 이름은 염희주야. 염구준의 딸 염희주라고! 엄마가 그렇게 말해 줬단 말이야.”쿠궁!행여라도 전화를 끊을가 싶어 다급하게 내뱉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염구준의 눈동자가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한다.염희주?“정... 정말 내 딸이라고?”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 대신 들려오는 건 찢어질 듯한 따귀 소리와 여자아이의 처참한 비명소리였다.“이 계집애가, 발칙하게 몰래 전화를 걸어?”“아,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때리지만 말아주세요!”여자아이의 애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겨버리고 다시 걸어봐도 묵묵부답.딸이 위기에 처했음을 인지한 염구준은 다급한 마음에 붉은 피를 왈칵 쏟아냈다.“주군!”깔끔한 군복차림의 여자가 다급하게 그를 부축했다.하지만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친 염구준이 포효했다.“어서 전세기 준비해. 지금 당장 청해로 돌아간다!”“알겠습니다!”잠시 후, 거대한 전세기가 하늘을 뚫고 사라지고... 수많은 병사들이 수십 척의 함선갑판을 가득 메운 채 무릎을 꿇었다.“안녕히 가십시오, 주군!”다음 날, 청해 교외, 손씨 가문 저택.저택 밖에 선 염구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5년 전, 가문에서 쫓겨나고 킬러들에게 쫓기다 교통사고까지 당했던 순간, 우연히 길을 지나던 소녀 한 명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헤치고 중상을 입은 그를 구해냈었다.그녀의 정체는 바로 손씨 가문의 딸,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 염구준은 기꺼이 데릴사위가 되는 조건
이에 다시 딸을 꼭 끌어안은 염구준이 아이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아니야. 엄마가 착각한 거야. 아빠 살아있어. 지금 바로 네 앞에 있잖아.”눈물의 부녀상봉을 마친 염구준이 물었다.“그런데 여기 말이야... 혹시 엄마가 보낸 거야?”염구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던 염희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아니야! 엄마가 날 이딴 곳에 보낼 리가 없잖아! 우리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이모, 나쁜 이모가 날 여기 보낸 거야. 이모가 엄마랑 날 집에서 내쫓은 거라고...”‘이모?!’생각지 못한 단어에 염구준의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손혜린 그 여자를 이모라고 부른다고? 그럼... 이 아이 엄마는 도대체 누구지? 나랑... 손혜린이 낳은 딸... 아니었나?’이 상황이 당황스러웠지만 염구준은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빠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야 해. 이모 이름이 뭐야?”“이모 이름은 손혜린. 우리 엄마 사촌언니랬어. 그런데... 나쁜 이모가...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말래. 이모가 내 엄마래!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그러니까 아저씨도 우리 아빠 아니지?”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던 염희주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반짝였다.“엄마가 그랬어. 아빠를 구하려다 성대를 다친 거라고. 그래서 말을 못 하는 거라고. 그래도 이건 가르쳐줬다?”염희주은 작은 손가락으로 염구준의 큰 손바닥에 삐뚤삐뚤하게 “염구준” 세 글 자를 적어보였다.“엄마가 가르쳐 준 거야. 아빠 이름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나 제대로 쓴 거 맞지?”한편, 염희주의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염구준은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날 구하려다 성대를 다쳤다고? 그날 날 구한 게 손혜린 그 여자가 아니었단 말이야? 손혜린 그 여자는 분명 말을 할 줄 알았었지... 그럼 그날 밤, 나랑 첫날밤을 보냈던 그 여잔 도대체 누구야?’“희주야.”전장에서 온갖 못 볼 꼴을 다 보며 살아남은 염구준이었지만 이 순간, 떨리는 목소리만큼은 차마 숨길 수 없었다.“엄마 이름이 뭐야?”그러
혼인신고를 하고 맹세의 키스를 하고 서로의 부모님께 큰절로 인사를 올렸다.5년 동안 전장을 구르면서도 매일 밤 그리워했던 여자가 이 여자였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그리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손혜린은 그녀의 사촌언니이자 희대의 사기꾼이었다!결혼식마저 모두를 속이기 위한 사기극에 불과했다!그는 이제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전신전 군주 염구준이다!그런 그가 이 하찮은 여자에게 5년을 속았다니!“지금… 뭐 하자는 거야?”잠시 당황한 손혜린은 옆에 있는 서재원의 팔을 꽉 잡고는 의기양양한 말투로 말했다.“네 신분을 망각하지 마. 넌 우리 가문 데릴사위야! 어디 감히 내 앞에서 큰소리를 내?”염구준은 낮게 으르렁거렸다.“말해! 왜 나를 속였어?”“5년 전 나와 결혼한 사람이 너 맞아? 손가을은 누구야? 빨리 해명해!”손혜린은 흠칫 어깨를 떨더니 떨떠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설마… 다 알고 왔어?”알고 왔다니?염구준은 뿌드득 소리 나게 이를 갈았다.역시 그런 거였어!희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그 결혼식은 가짜였다.손가을, 손씨 가문… 저들은 도대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혜린아.”여태 말이 없던 서재원이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두려워할 것 없어. 저 자식이 진실을 알게 된들 뭘 할 수 있는데? 너 이제 곧 나랑 결혼할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 저놈은 그냥 벌레야. 남한테 놀아난 줄도 모르는 가련한 버러지일 뿐이라고!”손혜린은 깔깔 웃더니 가면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그녀는 서재원의 품에 안기더니 염구준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어차피 너랑은 이혼할 생각이었으니까 거짓말할 필요도 없지! 넌 내가 널 살려준 은인인 줄 알았어? 내가 왜? 난 손가을처럼 멍청하지 않아!”과거, 손씨 가문은 데릴사위를 공개적으로 모집했다!4대째 내려온 가문은 이번 대에서 대가 끊길 위기에 직면했다. 손가을은 이 가문의 유일한 손녀였다. 결국 어르신은 친척인 손혜린을 호적에 입적시켰다. 손혜
“예전에 잘나갈 때 나도 잘해준다고 선물도 종종 가져다 주고 그랬는데 저 여자 나한테 시선 한번 안 주더라?”서석호는 두툼한 손으로 턱을 만지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전에는 도도하게 굴어도 어쩔 방법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지.”말을 마친 그는 손가을에게 손짓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쳤다.“거기, 여기 와서 앉아! 오늘은 오빠가 예뻐해 줄게!”피아노 박자가 다소 빨라지더니 손가을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휴게실에 있는 손님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서석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짓고는 손가락으로 의사를 표현했다.5년 전 사고현장을 목격한 그녀는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하다가 뜨거운 일산화탄소에 성대가 손상되면서 다시는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그 뒤로 그녀는 수화를 몸에 익혔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퇴근해야 해서요. 재밌게 놀다 가세요.]수화로 의사를 전달한 그녀는 다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그녀가 서석호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그가 그녀의 옷자락을 우악스럽게 잡았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애 보러 가는 거야?”그는 야비한 미소를 짓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아, 넌 아직 모르겠구나? 네 딸 희주 있잖아? 손혜린이 걔를 우리 조카한테 보내주기로 했어!”“우리 조카 알지? 우리 누나가 애지중지하는 왕자님이잖아. 애가 좀 멍청하기는 해도 예쁜 여자애들이랑 노는 걸 좋아하더라고! 지난번에 걔랑 같이 놀라고 데려온 여자애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즉사했다지?”손가을은 움찔하며 충격 어린 표정으로 서석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소리 없이 흐느꼈다.서석호가 거짓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손혜린은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애였다.그녀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딸 희주는 그녀에게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왜? 마음 아파?”서석호가 입술을 감빨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딸 살리고 싶어? 간단해! 내가 평소에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 거야! 여기 사람
“내가 잘못했어.”염구준은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손혜린한테 속아서 5년이란 시간을 허비했어. 내가 속지만 않았어도….”“이것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옆에서 듣고 있던 서석호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염구준의 말을 잘랐다. 그는 염구준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자식,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손가네 데릴사위, 염구준?”“감히 내 일을 방해하려 하다니! 죽고 싶어? 내 이놈을 당장!”고래고래 떠들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염구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아귀를 뻗어 서석호의 턱을 잡고 비틀었다.우드득!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상하 치아가 순식간에 맞물리며 서석호의 혀를 잘랐다!그 뒤에 이어진 발차기에 육중한 몸집을 자랑하던 서석호가 끈 떨어진 연처럼 공중을 날아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뒤에 있던 호화 안마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서석호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손가을을 포함해 현장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염구준의 품에 안긴 염희주마저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190cm를 자랑하는 장신 서석호가 가볍게 나가 떨어져서 피를 토하는 모습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으… 윽….”놀란 손가을도 다급한 마음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염구준의 팔을 밀쳤다.‘도망가. 빨리 도망가. 여긴 서가네 아지트야. 온통 서가네 사람들 뿐이라고!’“두려워하지 마.”염구준은 시선을 돌려 담담한 표정으로 손가을을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만 원한다면 저놈들을 싹 다 죽여 버릴 수 있어. 내 딸과 처를 괴롭힌 놈들은 죽어도 싸!”그냥 겁주기 위한 멘트가 아닌, 전신전 전주의 선전포고였다.어차피 사회의 암 같은 존재들뿐인데 좀 죽이면 어때서?"………" 손가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흘렸다.죽이면 안 돼, 죽이면 안 돼!당신이 군인이었다 하더라도, 무공이 뛰어나고, 서석호를 죽일 수 있고, 이곳의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 하
"가을아." 염구준은 다른 사람들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손가을만 가만히 지켜보며 속삭였다. "두려워하지 마, 내가 있어!”그리고 손혜린을 돌아보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손혜린,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이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건 아니겠지?”"서재원의 경호원들 덤비라고 한 명령을 좋은 의도로 말렸을 이유는 없고……”"말해봐, 도대체 뭘 하자는 거니?!”서재원도 화를 억누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혜린, 나도 묻고 싶다. 왜 경호원들을 말렸니?!”"재원 오빠, 화내지 마. 이 쓰레기 같은 놈과 이혼하려고 그랬어!" 손혜린은 서재원의 품에 안기어 염구준을 째려보았다. "구청에 가서 여러 번 조사했는데 이 쓰레기 같은 놈의 정보가 없었어. 만약 그가 탄 해선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더라면 벌써 죽은 줄만 알았지!”"이제야 알았네. 전쟁터에 갔으니 혼인 정보가 군 시스템에 들어사서 내가 일방적으로 이혼 신청을 할 수 없었던 거야.”"염구준 본인이 동의가 있어야 해!”서재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흥” 하는 소리를 냈다."염구준, 당신이 전장에서 돌아온 것을 봐서 나랑 재원 오빠는 오늘 네 목숨을 살려 둘 거야!”"과거의 일도 묻어두지!”"대신 나랑 이혼해!”염구준은 웃었다.군인과의 혼인은 신성하다. 손혜린의 능력으로 쉽게 이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그리고….전신전 전주는 용제국 국주와 대등한 존귀한 신분이다. 청해 구청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강대국의 정보 부서에서도 그의 정보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손혜린 이 우습고 어리석은 여자."이혼, 요구가 이렇게 간단하다고?" 염구준의 염희주를 안고 그의 양 갈 머리를 잡고 놀면서 손혜린에게 가볍게 웃었다. "나랑 이혼하고 싶다고? 나도 같은 생각이야. 공교롭게도 생각이 일치하네!”"그리고."“네가 비록 나를 5년 동안 기만했지만 그래도 양쪽 어르신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했으니 이렇게 서면상의 혼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그래서 한 번 더 묻는다. 정말 잘 생각하고 나랑
반지가 아니라 반짝이는 순금의 작은 토큰이였다. 정면에는 부조였고 뒷면에는 “G.J”라고 적혀있었다. 토근은 마치 수라장을 포위한 듯 살기가 넘쳤다.G.J 토큰!4대 전존을 통솔하고 7대 전왕을 거느리며 108명의 전장에 백만 전사를 지배하는 용제국 최고의 영예이자 전신전 전주가 세운 공을 상징하는 토큰이다. 전신전 전주를 대표하는 토큰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이 토큰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손가을은 입술을 깨물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청혼!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5년간 무수히 환상을 해왔던 일이다!5년...그동안 너무 많은 억울함을 당했고 너무 많은 고난이 있었다!그날, 목숨 걸고 교통사고로 다친 청년을 구했다! 그날 저녁, 술에 취한 남자에게 몸을 바쳤다! 그리고 5년 동안,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잃었고, 손씨 집안 맏딸의 자리를 빼앗겼고 심지어 부모님께도 피해를 끼쳐 집안에서 쫓겨나게 만들었다! 5년 사이, 그는 염희주를 낳았고 이별이 만남보다 많은 나날을 보냈다. 그나마 딸을 낳아서 다행히 모녀의 정은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까지 기다렸다.오늘, 그녀의 남자가 돌아와 그들의 딸을 구하고 서석호 손에서 그녀를 구해줬다.그리고 손혜린과 이혼을 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전부 가짜라고 해도, 염구준이 돈을 들여 섭외한 사람과 차라고 해도, 이 모든 게 거품같은 환상이라고 해도, 너무 행복했다. 염구준의 마음만 있으면 충분했다. “결혼해, 결혼해...”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주변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행인들이 박수를 보내며 흥분한 채 소리 질렀다. “결혼해, 결혼해...”염구준 뒤에있는 주작전존과 호위대들도 전부 오른손을 가슴에 놓고 소리쳤다. “결혼해, 결혼해...”결혼...손가을은 입술을 꽉 깨물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꾹 참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염구준 손에서 G.J 토큰을 받았다! 무거운 G.J 토큰은 철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반지가 아니
“...”손가을 얼굴이 어두워졌다.아무 말도 없었지만 부모님의 태도는 너무 명확했다. 손씨 집안에 장가를 온다고 해도 염구준은 데릴사위에 불과하다. 제대했어도 돈은 받지 못했을 거다. 돈이 없으면 생활이 좋아질 리가 없다. 노동력은 많아졌지만 동시에 밥 먹는 입도 늘어난 셈이다.부모님은 이 사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을아.” 손태석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그릇에 담긴 밥을 다 먹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 몇 년간 일해서 모은 돈이 얼마나 되니? 희주 유치원 학비랑 돈 들어갈 거 다 빼면 50만원은 되니?”손가을은 얼굴이 하얘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한테 줘봐.” 손태석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집에서 쫓겨나고 아버지가 다시 집안으로 돌아가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너도 알 테다. 내일이 어르신 칠순 잔친데, 그 돈으로 제대로 된 선물 하나 준비하고 싶구나. 어르신이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손가을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돈은 있다!손혜린이 그녀더러 사우나에서 일하라고 시키면서 갖은 모욕을 줬지만, 손님 등을 밀어주고 가끔 피아노 쳐주면 운 좋은 날은 팁도 받을 수 있어 돈은 적지 않게 벌었다. 몇 년 동안 일해서 손가을은 몇백만 원은 모았다. 하지만 손씨 어르신 마음은 얼음보다 차갑고 돌덩이보다 단단했다. 고작 몇백만 원의 선물을 드렸다고 절대 그들을 다시 받아주지는 않을 것이다!“돈...” 장인어른의 눈치를 보던 염구준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만졌다. 헉.난처했다.그는 전신전의 전주다. 혼자 돈을 주고 무얼 사본 적이 없었다다.하찮게 여겼던 돈이지만 지금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주머니를 만지는 염구준을 보자 손태석은 눈이 반짝해졌다. 하지만 빈손인 걸 보자다시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푹 수그리고 머리를 저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염구준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멍하니
“저 자식 데리고 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염구준은 꼴도 보기 싫어서 손을 내저었다.이쪽 일은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네카일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청해에 돌아가고 싶었다.양청화와 네카일이 떠난 뒤, 염구준은 볼라르에게 다가가 휴대폰을 들고 듣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했다.“당신이 누군지 몰라도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퍽!그는 상대방에게 경고하고 손에 힘을 주어 휴대폰을 단번에 아작냈다.일개 백작이 왕후를 공격하는 건 말이 안 되었다.그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휴대폰 너머로 영상으로 그 장면을 본 누구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염병! 저 자식이 진짜 나섰어. 이런 빌어먹을 연놈들!”염구준의 실력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해서 정면으로 맞설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시체를 분리해서 각자 집으로 보내. 저들이 나를 습격해서 내가 살해했다고 설명하면 돼.”염구준은 성 내의 군사들에게 지시했다.어차피 잡것들이 달려들어도 자신을 죽이지 못하니, 혼자 감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그러면 밖에서 그가 아직도 오스크국의 고위층 2 명의 목숨을 짊어지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염 선생님.”남은 군사들은 대부분 벨의 측근이라 이유를 묻지 않고 지시에 따라 처리했다.염구준은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서 쉬려고 했다.그런데 다급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염 선생님, 범인을 심문하다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벨 왕자께서 그쪽으로 오시랍니다.”정말 쉴 틈을 주지 않고 사람을 굴려 먹는 그들 때문에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무슨 상황인지 가서 보죠.”그래도 속으로 유용한 단서가 나오길 바랬다.오스크 황실 감옥.이 감옥은 평소 귀족이나 황실의 죄인을 가두는 곳이라 항상 조용했었다.하지만 오늘따라 군사들이 북적거렸다.벨 왕자가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친왕의 시종과 작위가 낮은 귀족들을 체포해, 감옥 내에 온갖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울렸다
“나의 친애하는 왕후여, 평소에 청렴하고 고상하던 분이 뒤에서 이런 남사스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앞장선 남자의 이름은 볼라르, 작위가 낮은 백작이었다.오스크국에서 귀족들은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 작위로 나뉘어 있었다.볼라르처럼 낮은 신분을 가진 귀족은 평소 왕후와 말을 건넬 자격도 없었다.“무례합니다. 본인의 신분을 알고 예를 갖추세요. 아니면 바로 벌을 내릴 것입니다.”양청화는 순식간에 기품이 흐르는 왕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염구준은 볼라르 뒤에 따라온 일행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들도 장기말일 뿐, 정작 배후는 나타나지 않았다.“왕후, 창녀처럼 천박하게 굴었으면서 나를 벌한다고요? 웃기지 마세요.”볼라르 백작은 오만하게 말하면서 한 켠으로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왕후를 완전히 보내려는 수작이었다.그와 함께 온 일행은 양청화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아는 사이었군요. 두 사람이 결탁하여 에드로 친왕을 죽인 게 확실합니다.”“애당초에 저도 그런 말을 했어요. 왕후는 우리 종족이 아니니 배척해야 한다고 했는데 국왕이 아예 듣지 않았어요.”“이건 재앙입니다. 외적은 피하기 쉬워도 집안 도둑은 막기 어려운 법이죠.”볼라르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왕후 앞에서 대놓고 거침없이 말했다.오스크국에서는 양청화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종족’이라 불렀다.심지어 그녀가 왕후 자리에 오른 후에도 일부 보수파들은 계속 불만을 품고 항상 끌어내릴 기회를 노렸다.“여군단!”스스슥!양청화의 명령이 떨어지자, 검은 그림자 무리가 그녀의 주변에 나타났다.만약 그녀에게 아무런 수단과 세력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볼라르 백작, 휴대폰을 남기고 가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양청화가 마지막 통보를 보냈다.“왜요, 바람피운 것이 들통나니 죽여서 소문을 막으려고요?”볼라르 백작은 그녀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 단정하고 휴대폰을 흔들거리며 조롱했다.“이미 영상을 보냈습니다. 휴대폰을
염구준은 여러 갈래의 검기를 발사하여 네카일을 쓰러트렸지만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하하하, 쓸모없는 녀석. 이것도 막지 못해?”“내가 졌어. 그냥 죽여!”네카일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노을에 붉게 물든 하늘을 쳐다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어엿한 반보천인 고수가 이 정도로 슬퍼하다니 충격이 꽤 큰 모양이었다.하지만 왜 우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이제 말할 수 있어?”한참 뒤, 염구준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흥, 그녀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너였어. 그런데 넌 오히려 쌀쌀맞게 대하면서 상처를 주었지. 내가 대신 복수할 거야!”네카일은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그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된 염구준은 쓴웃음을 지었다.“나와 양청화의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 그렇다고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지. 이만 돌아가.”상대방이 이런 일로 찾아왔다면 더는 난감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네카일의 말을 들어 보면 양청화 때문에 오스크국에 남은 것 같았다.그에게 치정적인 면이 있었다니 참 의외였다.“염구준, 너 당장 이혼하고 그녀 곁으로 가. 아니면 내가 용하에 가서 네 아내를 죽여버릴 거야!”네카일은 바닥에 누워 미친듯이 소리를 질렀다.그 말은 염구준의 마지노선을 건드렸다. 자신을 협박하는 것은 괜찮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가족을 언급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가 황천길로 보내 줄게.”염구준은 살기를 뿜으며 검으로 네카일을 베려고 했다.그 순간, 한 그림자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두 팔을 벌여 네카일을 보호했다.“구준 오빠, 안 돼.”그 사람은 양청화였다.“청… 왕후, 이건 내 일이니 참견하지 마세요!”당황한 네카일은 창백한 얼굴로 다급하게 말렸다.그는 양청화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오스크국에 남았지만 지금도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양청화가 그를 받아주지 않는 이유는 부귀영화를 포기하는 것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그 사람’때문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그리고 오늘에서야 그녀
염구준은 검을 뽑아들고 빠르게 나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네카일이 이 난동을 부리는 것인지 제대로 묻기 위해서였다. 한편, 고성 밖에서는 벨이 배치한 경비병들이 황급히 네카일을 막아서서 그를 말리고 있었다.“총사령관님, 제발 돌아가 주십시오! 염 선생님께서는 지금 벨 왕자님의 귀빈이십니다. 건드리면 큰 일 나요!”“두 분 사이 좋으셨잖아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총사령관님, 벨 왕자님께서 얼른 돌아가시랍니다.”그들 역시 자신이 상대방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벨의 충복으로서 명령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꺼져!”그러나 네카일은 그 누구의 체면도 세워주지 않고 포효하며 진기만으로 그들을 밀어냈다.그의 손에 들린 것은, 오래전 염구준이 섬멸한 조직에서 남긴 신병으로, 겉으로 보면 오래된 평범한 도에 불과했는데, 정말 긴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쓰지 않는 것이었다.슈욱.이때, 염구준이 나와 네카일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그저 상대방을 진정시키기 위해 날린 것이라 이 검기에는 많은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쾅!네카일은 쌍도를 교차시켜 제자리에 우뚝 서서 그 검기를 막아냈다. 다만 그의 눈에는 분노가 어려있었다.“왜, 전의 조직의 복수라도 하려는 거야? 갑자기 미쳤어?”염구준은 상대방이 이러는 의도를 몰라 떠물었다.“그 녀석들은 악행을 많이 저질렀으니 죽어도 싸.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건 오스타국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적으로 너와 한 번 붙기 위해서다.”“어디 한 번 붙어볼래?”네카일은 현재 매우 분노한 상태라 그가 내뿜는 기운도 이상하리만치 광포했다. 도의 손잡이를 잡은 그의 두 팔의 핏줄은 이미 불거졌다.지금 그의 눈에 염구준은 부모님을 죽인 원수와도 같았다.“난 이유 모르는 싸움은 안 해. 그러니까 이유 좀 알려주지 그래?”염구준은 이 모든 게 너무 당황스러워 상대방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자 질문했다.“싸움의 이유를 알고 싶다면, 나를 이겨라!”네카일은 말을 마치고는 한 도로 방어를 하면
왕궁은 음모와 배신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양청화가 명을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시종 중 한 명이 벌써 이미 증거를 가지고 고발하려고 안드리를 찾아갔다.“안드리 친왕님, 왕후 폐하께서 조금전에 염구준을 만나셨습니다. 이건 제가 몰래카메라로 찍은 화면입니다.”시녀는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이건 엄청난 공적이니까 말이다. 이번 일로 대량의 상금은 물론 어쩌면 귀족의 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안드리 친왕은 스마트폰을 받은 뒤, 영상을 클릭했다.그러나 영상을 보면 볼 수록 그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이 암캐년이 염구준과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어? 비밀 만남이라니, 왕실의 체면을 정말 깎아내리는군.”“그렇게까지 매달렸는데도 거절을 당하다니, 안타깝기도 하지. 정말 우스운 년이라니까.”시녀는 안드리 친왕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친왕께서 중요한 일이 있으시니 저는 이만 물러가 계속 왕후 폐하를 감시하겠습니다.”“잠깐.”“이 영상이거나 이 일을 혹시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줬니?”안드리 친왕은 시녀를 멈춰세우고는 자상하게 물었다. 갑자기 변한 상대방의 태도에 시녀는 망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증거를 확보하자마자 친왕님께 가져왔습니다.”“그렇다면 가서 죽으렴.”안드리 친왕은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장풍을 날려 시녀를 죽여버렸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의 손에 왕후의 약점이 있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쌍한 시녀는 죽을 때까지도 충성을 바쳤던 주군이 왜 자신을 죽였는지 알지 못했다. 안드리 친왕은 그녀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가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 위대한 사업을 위해 희생했으니 널 기억하마.”이런 헛소리는 그가 자신이 잔인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한 변명에 불과했고, 심리적 위로에 불과했다. 그는 동영상을 한 부 더 복제한 뒤, 밖을 향해 분부했다.
그의 말을 들은 뒤, 양청화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날 찾으러 다녔었어?”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었고,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았다고 원망해왔다.하지만 오늘에서야, 그녀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염구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에효. 그때 널 찾다가 주운 은팔찌는 네 부모님을 돌려드렸어. 그분들도 널 무척이나 그리워하셔.”그때의 일은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그녀를 찾지 못한 것이 염구준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날 상처받고 도망친 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 뿐이었다.“내 잘못, 내 잘못이야! 왜 그때, 멋대로 캠프를 떠나서는..”그녀는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지금은 한 나라의 왕후로서 군림하고 있지만, 그동안 그녀가 겪은 고통과 외로움은 아무도 몰랐다.“후, 다 지나간 일이야. 내가 그때 너무 단호하게 거절했던 잘못도 있어.”염구준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난감한 얼굴로 휴지 한 장을 건넸다.이런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양청화는 눈물을 닦으면서 옛 기억을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그때 어두운 보라색의 오피스룩을 입고 오빠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오빠가 계속 말하던 아내분이지?”“미인이시더라.”염구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는데, 목소리에는 전과는 달리 감정이 담겨 있었다.“맞아. 손가을이라고 해. 사이가 무척 좋지.”“축하해.”“솔직히 질투가 나긴 해. 내가 먼저 오빠를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양청화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지만 그녀는 눈물을 삼키고 웃어보였다.불교에서 말하는 팔고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바로 구지부득이었다.“그건 모르는 일이지. 낯선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은 보기 드무니까 말이야.”그는 불길 속에 있던 아내
이때, 시녀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왕후 폐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후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이에 양청화는 목욕을 마치고 서둘러 일어나며 조금 조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 금방 나갈 테니.”물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물에서 갓 나온 연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한편, 후원의 석탁 옆.염구준은 차를 홀짝이며 평온하게 정원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그때의 일은 단순한 사고였다.마땅히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그는 후회하지 않았지만 조금 안타까울 뿐이었다.하지만 이제 양청화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그조차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었다.이때, 양청화가 후원에 들어오며 위엄있게 모든 시종들을 내쫓았다.“모두 나가. 내 명령 없이는 절대 들어오지 마.”왕후가 낯선 남자와 단둘이 만난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을 게 없었다.즉, 염구준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위험하고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왔네.’염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람이 보이기도 전에 풍기는 옅은 향기에 그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나한테 이런 수작을 부릴 심산인가?”또각또각.리듬감 있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황실 예복을 입은 양청화가 염구준의 시야에 들어왔다.다른 건 일단 신경 쓰지 않고 말하자면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아니, 단순히 이쁜 것 뿐만 아니라 고귀한 아우라도 느껴졌다.“안 본지가 몇 년인데, 하나도 안 변했네.”무공을 연마한 사람들은 노화를 늦출 수 있었는데, 특히 염구준처럼 강한 무인들은 그 효과가 더욱 강했다.그러니 외모가 크게 변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염구준은 예의있는 미소를 지으며 한층 직설적인 태도로 말했다. “너도 관리 잘했네. 오늘 날 불러낸 이유가 단순히 옛정을 나누기 위해서야, 아니면, 그날의 진실을 듣고 싶어서야?”이에 양청화는 쓴웃음을 지으며 석탁에 앉았다.
오는 길에 이미 현장 사진과 여러 정보를 검토한 덕분에 염구준은 속으로 대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현장에 아무런 저항의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에드로는 한 방에 깔끔하게 처리된 걸 거야.”“전신 위의 실력을 가진 그가 그렇게 당했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야. 하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배신했거나, 다른 하나는 더 강한 반보천인을 만났거나.”“반보천인의 수법은 다양하니, 우선 에드로의 주변 인물부터 조사해 보는 게 좋겠어.”염구준의 분석에 따라 현장에서 가장 의심되는 인물은 그와 벨, 두 명뿐이었다.그러나 이 사건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용의자였다.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염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머릿속이 확 트이는군요! 조사 방향을 명확하게 알 것 같아요.”벨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과하게 아부했다. 그는 염구준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조사를 맡긴 이상, 그는 염구준을 무조건 믿을 생각이었다.“됐어, 단서가 많지 않으니 내부 인물부터 조사해 보자.”염구준은 손을 휘저으며 벨의 아첨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겐 아첨 같은 게 통하지 않았다. 또 다른 단서는 메이슨 집사였으나, 너무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걸 보면 그는 그냥 연막일 가능성이 높았다.“알겠습니다. 바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벨은 공손하게 대답한 뒤, 옆에서 몸을 떨고 있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네카일에게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세 개 부대를 이끌고 오라고 전해.”세 개의 부대에는 총 3만 명이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쓴 걸 보아 이번 조사가 단순히 묻기만 하는 것이 아닌 전면적인 색출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는 아버지인 에드로와는 달리 네카일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었다.1단계 계획을 실행하고 잠시동안은 할 일이 없었다. 다음 계획은 조사가 끝나고 상황을 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염구준은 명탐정이 아니었다. 다만 철저한 논리적 사고와 예리한 관찰력으로 타겟을 좁혀가는 것 뿐이었다.“염 선생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굳이 밀고나갈 필요도 없겠지. 다들 물러나라.”만약 이 상황에서 계속 공격하려고 든다면, 벨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는 결국 병사들에게 물러나도록 지시했다.하지만 안드리 친왕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어 계속 시비를 걸었다.“염구준, 우리 오스타국의 중요 인물 두 명이 죽은 게 모두 너와 연관이 있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는 거냐?”이름까지 부르면서 따지고 묻는 상대방의 태도에도 염구준은 겁 먹지 않고 오히려 비웃으며 대답했다. “니체르는 강제로 사람을 감금하고 연구성과를 빼앗았다. 죽어 마땅하지. 하지만 에드로 친왕의 죽음은 나와 무관해.”“이 대답에 만족해?”“참고로, 나는 지금 너희를 도와주고 있는 거니까 죄인을 심문하듯이 굴지마.”더없이 무례하게 느껴지는 그의 태도에 귀족들은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너...!”안드리 친왕이 다시 말을 하려는 순간, 양청화의 위엄이 담긴 목소리가 대전 안을 울렸다. “그만. 니체르가 저지른 만행은 다들 알 거라고 믿습니다. 죽어 마땅하죠. 그리고 에드로 친왕의 죽음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으니 우선 제대로 조사하고 결정을 내리죠.”“오스타국 왕실을 대표하여, 염 선생님께 감사를 표합니다.”그녀가 말을 마치자 대전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염구준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아래에 있는 귀족들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지만 왕후의 말에 감히 토를 달 수는 없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오스타국의 정치는 조금 특이했는데, 전의 국왕이 늙어서 수명을 다한 탓에 합법적인 후계자인 어린 국왕이 자리를 물려받기는 했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서 왕세자에 불과했다. 즉, 그의 어머니인 양청화가 실권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이곳에 남기로 한 이상, 저를 모함한 범인을 반드시 잡아내고 말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과거의 인연이 있어서인지, 그는 그녀에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강한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