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그 말을 듣는 순간 공수이와 함지우 모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윤구주는 완전히 얼어붙었다.윤신우와 윤정석이 죽다니?“형님?”“구주 형?”옆에 있던 공수이와 함지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는 넋을 놓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구주야, 슬퍼하지 마. 내가 꼭 형님과 정석이를 위해서 복수할 테니까.”윤창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윤구주를 향해 걸어갔다.윤창현이 윤구주와 1미터 정도 떨어졌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쿵!엄청난 충격파가 윤창현에게 덮쳐들었다.윤창현은 윤구주가 갑자기 기습할 줄은 몰랐는지 미처 막지 못하고 멀리 날아갔다. 곧이어 그는 화가 난 눈빛으로 윤구주를 노려보았다.“구주야, 왜 날 공격하는 거야?”이때 옆에 있던 공수이와 함지우는 당황했다.그들은 윤구주가 갑자기 윤창현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윤구주는 싸늘한 얼굴로 어둠 속에 서서 날 선 눈빛으로 눈앞의 윤창현을 바라보았다.“감히 우리 둘째 삼촌을 사칭해?”‘뭐라고? 사칭했다고?’그 말을 듣자 맞은편에 있던 윤창현은 살짝 당황했다.공수이와 함지우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윤창현을 바라보았다.윤창현은 정체를 들키자 곧바로 킥킥대며 웃었다.곧이어 중후하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면서 여자의 목소리로 변했다.윤창현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만지자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이 윤구주 등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그녀는 바로 옥면 여우 미희였다.소문에 따르면 옥면 여우는 천면 여우라고 불린다고 한다.그녀의 역용술은 아주 뛰어나서 보통 사람들은 구별할 수 없다고 한다.그리고 지금까지 옥면 여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그녀의 모든 얼굴이 가짜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젠장, 감히 사칭을 해요?”공수이는 화를 냈다.“감히 구주 형을 속이려고 해? 죽으려고!”함지우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옥면 여우를 죽이려고 하자 윤구주가 그를 막았다.“말해. 왜 우리 둘째 삼촌을 사칭한 거지? 솔직히 얘기하지 않는다면 넌 오늘 죽
미희의 정체를 간파한 뒤 윤구주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말해. 누가 널 보낸 거야? 감히 우리 삼촌을 사칭해?”미희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그건 얘기해줄 수 없어요.”“얘기할 수 없다고요? 그러면 죽어요!”공수이가 가장 먼저 손을 썼다.그는 주먹을 내뻗으면서 눈 깜짝할 사이 미희에게로 날아갔다.오래전부터 유명했던 옥면 여우는 당연히 실력이 약하지 않았다.공수이가 주먹을 휘두르자 그녀는 몸을 비틀어 피하면서 빠르게 반격했다.손바닥과 주먹이 부딪치는 순간 미희는 저 멀리 날아갔다.“휴, 전 제가 구주왕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똑똑할 줄은 몰랐어요. 재미가 없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미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떠나려고요? 꿈 깨요!”공수이가 다시 한번 고함을 지르면서 미희를 따라가려는데 윤구주가 입을 열었다.“됐어, 수이야. 가게 놔둬.”‘응?’“형님, 왜 저 여자를 그냥 보내주는 거예요?”공수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그들의 실력이라면 미희를 잡아두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공수이뿐만 아니라 함지우와 윤구주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구주가 말했다.“잡아봤자 별 쓸모가 없을 거야.”말을 마친 뒤 윤구주는 갑자기 어둠 속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같이 윤씨 일가 저택에 갔다 오자.”갑자기 윤씨 일가 저택으로 가자는 말에 공수이와 함지우는 흠칫했다.“형님, 왜 갑자기 본가로 가려는 거예요?”공수이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내 예상이 맞다면 윤씨 일가는 습격을 당했을 거야.”윤구주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오늘 윤구주는 날이 저물 때부터 계속 불안했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옥면 여우가 윤창현을 사칭하여 이곳에 오자 윤구주는 그제야 윤씨 일가가 습격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의 본가를 습격했다는 말이에요? 모조리 죽여야겠어요!”그렇게 세 사람은 곧바로 윤씨 일가로 향했다.윤씨 일가는 천하제일 가문이라고
“여긴 왜 왔어?”윤구주가 육도진의 멱살을 잡은 채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자, 주위의 금위군들은 깜짝 놀랐다.육도진도 질식할 것 같아 서둘러 입을 열었다.“저하, 진정하세요. 이 늙은이는 조금 전 윤씨 일가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육도진의 말을 듣고서야 윤구주는 멱살을 놓아주었다.“할머니!”그는 윤씨 일가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윤씨 일가 중에서 윤구주는 자신 때문에 눈까지 멀었던 할머니를 가장 따랐으나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할머니의 안위가 걱정되어 뒤뜰로 달려가 보니 한산하기 그지없었다.하미연이 살던 오두막집의 문은 열려 있었다.“할머니!”윤구주가 서글프게 외쳤지만,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보니 테이블과 의자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을 뿐 하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윤구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할머니…”그가 슬픔에 빠져있을 때 공수이와 함지우, 그리고 육도진도 달려왔다.윤구주의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공수이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빌어먹을! 대체 어느 놈이 형님의 집을 공격했단 말인가? 영감, 내 손에 죽고 싶지 않다면 어서 바른대로 말해!”공수이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육도진을 쏘아보자, 육도진은 어이가 없었다.“나도 조금 전에 왔어. 너희들이 나를 죽인다 해도 난 몰라.”사실 육도진도 조금 전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모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지만 살기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을 뿐 윤구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이때 금위군 한 명이 달려왔다.“육 우상님, 육 우상님!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을 찾았어요.”이 말을 들은 육도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물었다.“어디 있어?”“앞뜰에요.”금위군의 말을 육도진은 황급히 윤구주에게 전했다.“저하,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았대요. 가보지 않겠어요?”“그러자!”윤구주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이들은 앞뜰로 향했다.이들이 앞뜰에 도착
노인의 입에서 문씨 세가라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 윤구주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윤구주의 옆에 있던 공수이, 육도진의 안색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윤구주가 계속해서 물었다.“내 할머니는 대체 어디 있냐 말이야? 그리고 아버지는?”“주인님은… 고문을 당한 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문씨 세가 사람들에게 잡혀갔어요.”노인이 말했다.“뭐야? 고문까지 당했다고?”윤구주의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네.”간신히 숨만 붙어있던 이 노인은 아까 일어났던 일을 윤구주에게 말해 주었다.사실 이 전투는 윤씨 일가의 패배가 아니었다.문씨 세가에서 몰래 자객을 보내 몰래 하미연을 납치한 탓에 윤씨 일가가 와르르 무너진 것이었다.문창정이 하미연을 인질로 내세우자, 윤신우, 윤창현, 윤정석, 그리고 윤씨 일가의 모든 사람은 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이 때문에 윤하율을 포함한 윤씨 일가의 모든 사람이 문창정에게 잡히고 말았다.그 말을 들은 윤구주는 과도한 분노로 울화통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옆에 있던 육도진도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젠장! 문씨 세가 놈들이 어르신을 이용해 저하를 잡으려 하다니! 비열한 놈들!”“저하, 명을 내리시면 제가 이 도시의 금위군들을 모두 동원하여 가주님과 다른 사람들의 행방을 찾도록 하겠습니다.”윤구주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구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몰랐지만, 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그렇게 한참 정적이 흐르더니 윤구주가 갑자기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저하?”걸어가는 윤구주를 바라보던 육도진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그의 뒤를 따랐다.공수이와 함지우도 윤구주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지 못했지만 일단 따라가 보기로 했다.뜰에서 나온 후, 윤구주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우상,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윤구주의 말에 육도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명만 내리시면 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해 받들겠습니다.”“서울 전체를 봉쇄해!”윤
하지만 윤구주의 왕위가 문아름에게 뺏긴 후에 이 부저는 이황부로 명칭이 바뀌었다.이 시각, 국방부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이황부의 경계는 아주 삼엄했다.몇 명의 경비병이 어둠 속을 뚫고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던 윤구주, 공수이, 함지우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어서 멈춰라! 이곳은 매우 중요한 곳이니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하지만 세 사람은 경비병의 말을 무시한 채 여전히 그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멈추지 않으면 쏜다!”이들이 계속 다가오자, 경비원들은 총을 들고 세 사람을 겨누었다.그때, 윤구주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문아름을 찾으러 왔으니까 내 앞을 가로막지 마! 그렇지 않으면 다 죽여버릴 거다.”문아름을 찾는다는 말에 경비병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거 아주 미친놈이네. 감히 우리 새 왕의 이름을 불러? 죽으려고 환장했구나.”한 경비병이 허리에 차고 있던 총을 빼 들려고 했지만, 갑자기 권영이 경비병을 향해 날아왔다.‘쾅’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 경비병은 즉사했다.“말이 많구나!”공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공수이였다.공수이가 손쉽게 이 경비병을 죽이자, 나머지 경비병들은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다들 쏘지 않고 뭐 하는 거야!!!”경비병들이 총집에서 총을 꺼내려는 순간, 갑자기 검기가 휘몰아치더니 검광이 이들을 덮쳤다.그렇게 십여 명의 경비병들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감히 구주 형에게 총을 겨누다니! 이 쳐 죽일 놈들.”이번에 나선 사람은 함지우였다.공수이와 함지우가 모든 경비병을 죽인 후, 세 사람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국방부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땡땡땡!세 사람이 국방부 정문을 넘어서는 순간, 귀청을 찌르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국방부에 침입했다. 빨리 집합하라!”잠시 뒤 중무장한 국방부 병사들이 손에 총기를 든 채 사방에서 몰려와 세 사람을 포위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윤구주는 여전히 이황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윤구주에게 접근하는 국방부 병사들을 공수이
이황왕의 부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국방부 장교 장홍산을 포함하여 모두가 정문을 향해 총을 조준하고 있었다.이때 국방부 대문이 덜컹거리며 열리더니 세 사람이 국방부 병사들의 시야에 들어왔다.“장군님, 바로 이 세 명의 미친놈이에요. 지금 들어오고 있네요.”부하 한 명이 서둘러 장홍산에게 보고하자, 윤구주의 모습을 본 장홍산이 차갑게 말했다.“다들 기관총 준비해! 이 미치광이들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다.”수백 명의 병사들이 기관총을 장전하고 윤구주, 공수이, 함지우를 조준하고 있었다.국방부 병사들이 총을 자신들에게 겨눈 것을 본 함지우가 재빨리 윤구주의 앞에 나서며 말했다.“구주 형! 이 보잘것없는 놈들은 내게 맡겨!”함지우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자, 흑백 비검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혼자 공을 다 가로채시면 안 되지요. 저도 있어요.”공수이가 재빨리 함지우의 옆에 다가오며 말을 내뱉었다.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려고 할 때 반대편에 있던 장홍산이 큰 소리로 외쳤다.“너희들은 누군데 겁도 없이 우리 화진의 국방부에 침입한 거야?”“하하! 얼어 죽을 국방부에는 관심 없다. 하지만 누가 내 형님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절대 용서치 않겠다!”공수이가 소리 지르자, 장홍산이 멈칫하며 물었다.“네 형님이 누군데?”공수이가 손으로 윤구주를 가리켰다.“이분이다!”윤구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장홍산은 순간 흠칫했다.“뭐야? 왜 이렇게 낯이 익지?”몇 초 동안 윤구주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장홍산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이럴 수가! 구… 구주왕? 저하 맞나요?”장홍산이 갑자기 귀신이라도 본 듯 윤구주를 향해 소리치자, 윤구주는 고개를 들어 장홍산을 흘끗 쏘아보았다.“구주군 제1경비대의 경비병이었던 장홍산?”자신이 구주군에 있을 때의 직책을 윤구주가 부르자, 장홍산은 깜짝 놀랐다.“어머나! 저하! 저하가 맞으시군요!”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던 장홍산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바로 무릎을 꿇었다.이 모습을 본 공수
국방부 병사들이 모두 퇴각한 후, 윤구주는 이황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장홍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묵묵히 윤구주의 뒤를 따랐다.눈앞에 있는 이황부는 한때 윤구주의 왕부였으나 세월이 흘러 지금은 문아름의 부저가 되어 있었다.삼엄한 왕부의 입구에 있던 윤구주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외쳤다.“아름아, 어서 썩 나오지 못할까!”소리가 왕부 내부로 울려 퍼졌지만 안타깝게도 내부는 텅 비어 있어서 문아름의 모습은커녕 아무도 없었다.“이봐, 문아름이라는 팜므파탈은 어디 있어?”왕부 내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공수이가 장홍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새 왕은 이틀째 부저에 없었어.”장홍산이 서둘러 대답했다.문아름이 이황부에 없다는 말에 공수이는 화가 치밀어올랐다.윤구주의 몸에서도 뭉클뭉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자, ‘펑’하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검이 허공에 나타났다.금술 천주!윤구주가 천주검을 휘두르자, 수십 미터의 검망이 부저를 향해 날아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렁찬 폭발음이 들려오며 거대한 왕부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장홍산은 넋을 놓은 채 파괴된 왕부를 바라보고 있었다.“팜므파탈 문아름에게 전해라! 내가 그녀를 무조건 죽이고야 말겠다고!”차갑게 말을 내뱉은 뒤, 윤구주는 자리를 떴다.장홍산은 윤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 지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윤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그는 눈물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하의 말씀을 꼭 전달하겠습니다.”…서울의 어느 곳의 우뚝 솟은 지하 궁전, 흑포를 입은 사람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이 지하 궁전 안에는 거대한 지하 감옥이 있었다.바로 이때, 뚜벅뚜벅 걷는 발걸음 소리가 궁전 밖에서 들려왔다.불빛 사이로 걸어오는 사람은 봉황관을 쓴 절세미인이었지만 아름다운 얼굴에는 사악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녀가 바로 화진의 이황왕인 문아름이었다.그녀가 지하 감옥 입구에 도착하자, 흑포 입은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셨군
몸에 있던 쇠사슬이 풀렸지만 하미연은 문아름의 말귀를 못 알아들었는지 침묵을 지켰다.문아름은 하미연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미안해요. 부하들이 너무 무례하게 굴었죠? 제가 할머니를 대신해 그들을 혼냈으니 그만 화 푸세요.”그래도 하미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할머니, 저한테 화나신 거예요? 하긴 몇 년 동안 찾아뵙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요. 제가 윤씨 일가의 손자며느리가 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참으로 아쉽네요.”문아름의 말에 하미연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원하는 게 뭐야?”하미연이 드디어 입을 열자, 문아름이 답했다.“할머니, 일단 화 가라앉히세요. 사실은 할머니의 귀한 손자를 위해서 여기로 모셔 온 거예요.”“구주?”“네.”문아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제가 오빠를 사랑한다는 걸 할머니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항상 우리 문씨 가문과 마찰을 빚었어요. 만약 할머니가 그를 설득해 우리 문씨 가문에 들어오게만 한다면 제가 평생 그를 지아비로 모실게요. 심지어 왕위를 그에게 다시 돌려줄 수도 있어요.”문아름이 말을 듣더니 하미연은 차갑게 웃었다.“네년이 지독하기 짝이 없구나.”하미연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할머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문아름이 물었다.“넌 내 손자며느리가 될 자격이 없어!”하미연의 직설적인 말에 문아름의 눈 밑에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어떤 면에서 할머니의 손자며느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외모? 몸매? 아니면 가문의 혈통이나 지위 때문에?”그녀는 기고만장한 얼굴로 이 말을 내뱉었다.사실 문아름은 화진 제일의 미녀라 불릴 만큼 매우 아름다웠지만 하미연은 가차 없이 말했다.“모든 면에서. 사실 난 네년이 순간 어리석음에 빠져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역시 나쁜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될 수가 없나 봐. 애초에 우리 구주가 너와 혼약을 맺었었지만, 넌 구주의 왕위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그를 모함하려
“너도 억울해할 필요 없어. 네가 화진을 위해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전적으로 구주왕에 대한 충성심 위에 쌓인 것일 뿐이야. 앞으로 네가 성장하면 윤구주도 널 통제하지 못할 테니 그 전에 널 제거하려 할 거다.”말이 끝나자 청현은 순식간에 수천 미터를 날아 수비영으로 다시 뛰어들었다.삼척청봉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으며 그 검 끝은 백호를 정확히 겨눴다.날카로운 검의 울림은 수 킬로미터 안의 모든 이들의 고막을 찢을 듯 진동하며 어지러움을 유발했다. “지껄이지 마. 죽이려면 날 죽여. 내 형제들을 어떻게 죽였지? 그리고 여긴 어딘 줄 아나? 이곳은 화진 서울이야. 너 같은 쓰레기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백호의 눈빛은 살기로 가득했고 상공엔 살기가 짙게 뭉쳐 수신의 형상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그 위압감은 실로 섬뜩할 정도였다.솔직히 이런 백호의 모습은 정말 마인으로 오해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그는 윤구주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었지만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윤구주만이 아니었다.구주의 전우와 화진의 백성들 그 모든 이들이 그가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그의 행보는 그를 점점 인간 요귀로 만들어가고 있었다.“그래? 지금은 네가 그들을 인정하고 있어도 언젠가 네가 마인으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 의지대로 되지 않을 거야. 난 간다. 미리 경고했으니 후회하지 마. 내게 자비란 없다.”슈욱!청현은 한 자루 검과 함께 어둠을 가르며 잔상처럼 백호를 향해 돌진했다.한 줄기 칼날의 섬광이 나타나며 수천 개의 검기가 일제히 백호에게 쏟아졌다.쾅! 쾅! 쾅!각 칼날 하나하나가 구오지존 초입의 수련자를 가볍게 썰어버릴 위력이었지만 백호의 몸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대부분의 검기는 튕겨 나갔고 일부는 살을 파고들었지만 뼈에 닿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휙!강풍이 맹렬히 불어치는 가운데 청현은 백호의 천령개를 향해 칼을 날카롭게 휘둘렀다.슉!백호는 머리를 살짝 비켜 피했지만 칼은 그의 어깨를 정확히 내리꽂
화진의 외곽에서 청룡의 흔적을 추적하던 빙신전 전주는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며 말했다.“늙은이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뭔가 감지된 거야?”현모와 주작은 즉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몇 번을 말해. 난 황보웅이라고.”빙신전 전주가 차갑게 대답했다.“헛소리 작작 해. 널 신발이라 안 부른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 청룡은 찾았어?”성질 더러운 주작은 그에게 전혀 봐주는 법이 없었다.“아니. 백호한테 걸어둔 천술이 강제로 해제됐어.”황보웅이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뭐라고?”현모와 주작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서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현모와 주작은 즉시 위성 전화로 서울에 연락을 시도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근처 도시에 연락한 결과 서울에 이상 상황이 발생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고 했다.그들은 이미 서울로 인원을 파견했다고 전했다.“젠장! 진동왕 그 늙은 놈 처음부터 믿지 않았어. 청해는 더 말할 것도 없고!”주작은 크게 분노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현모는 차분하게 말하며 주작을 진정시켰다.황보웅은 무관심하게 말했다.“진동왕 임성진이야 고작 구오 경지에 불과해서 그가 뭘 하든 별 소용없어. 청해는... 그놈은 이제 더 이상 반역하지 않을 거야. 곤륜 구역은 배신자를 용납하지 않거든. 구주왕은 더 말할 것도 없고.”현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웅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설령 서울에 큰 위기가 닥쳤다 해도 이곳에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걱정하지 마. 국주도 서울에 있고 왕이 말했듯이 국주가 이제 최고급 신급에 올랐으니 진형만 유지하고 주변 도시에 원군을 요청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야.”현모는 힘차게 말했다. 이어서 두 사람에게 청룡 추적에 전념할 것을 지시했다.황보웅은 서울의 사상자 수에는 무관심했고 윤구주만 무사하면 대국에 지장이 없다고 여겼다.그리하여 세 사람은 다시 깊은 산과 밀림으로 들어가서 청룡을 추적했다.한
청해는 모든 일을 마무리한 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음을 기다렸다.청의 검객은 그의 곁을 무심히 지나가며 담담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네가 곤륜 구역의 사술사긴 해도 화진 백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충성이라 할 만하다. 윤국주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켰군. 내가 굳이 너를 죽일 필요는 없어. 정리할 게 있다면 정리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라.”청해의 마지막 충성을 보고 청의 검객은 그를 살려두었다.그리고 얼음 진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청해가 온 힘을 다해 짜놓은 얼음 결계는 한 번에 산산조각 나버렸다.“이 미친놈. 차이가 너무 크잖아. 고급 신급뿐인데 어떻게 저렇게까지 강력할 수 있지?”청해는 욕설을 퍼부으며 이를 악물었다.그래도 자신이 오늘 죽으면 화진을 위해 싸운 셈이니 윤구주가 자신을 잘 묻어주고 이름을 남길 거라고 생각했다.평생 신령으로 살아온 청해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되새기며 웃고 있었다.멀리서 진동왕 일행이 도착했지만 그는 발을 디디기도 전에 칼날 같은 살의와 검의 기운에 압도당했다.바로 그 순간 그는 미친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임정설이 올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백호의 생명은 위태로웠다.그는 얼음 속에 갇혀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백호 네 안에는 살기가 너무 많다. 성수의 피를 융합한 이상 언젠가는 인간계의 마인으로 폭주할 것이다. 윤국주는 결코 너를 죽일 수 없겠지만 내가 대신 끝내주마.”청현의 검 끝에서 한 줄기 서늘한 빛이 뻗어 나와 얼음 결계를 뚫고 백호의 단전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청의 검객인 청현은 이미 그 흐름을 감지하고 있었다.성스러운 짐승의 피를 깨뜨린다면 백호는 죽을 운명이었다.진동왕은 숨을 삼킨 채 그 칼끝을 노려보고 있었다.하지만 구주군은 더는 참지 못했다.“대장님을 구하라. 돌격.”수천 명의 구주군이 함성을 지르며 청현을 향해 돌진했다.하지만 청현은 단 한 번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그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더니 순식간에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아 손바닥
진짜 부처의 금빛 광채가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수많은 불빛이 만불종의 보도자항을 송두리째 태워버렸다.그의 육신이 타들어 가며 내면의 음험한 영혼과 사악한 기운이 드러나자 그동안 그에게 속아왔던 이들은 마침내 진실을 깨달았다.그는 진정한 부처가 아니라 불교의 이름을 악용해 사술을 부리는 사악한 존재였음을. 불빛은 순식간에 희미해졌고 하늘의 황금 형상은 다시 검은 구름에 삼켜졌다.지상에 남은 금빛 실루엣도 점차 사라지며 그 자리에는 누더기 법복을 입은 한 스님의 모습이 드러났다.그는 바로 공수이의 스승인 미친 스님이었다.최고급 신급에 근접한 존재였다.“역시 스승님. 평소에는 미친 척하시더니 제대로 할 땐 정말 대단하시네요.”공수이는 온몸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미소 지으며 말했다.“미친 스님? 200년 전 풍화산의 불동 주지 스님 이름이 뭐였더라?”진동왕 임성진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그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불은 본래 형상이 없으니 내가 불을 닦는다면 이름 자체가 무의미하지요.”미친 스님은 아미타불을 외우며 몇 개의 단약을 꺼내 진동왕과 공수이에게 먹였다.하지만 은용위의 부대는 이미 요승 불경의 손에 전멸한 후였다. 미친 스님은 그들을 위해 자리에 앉아 초혼 의식을 치렀다.“스님 지금은 초혼할 때가 아닙니다. 그들이 백호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요. 청해도 위험한 상황일 겁니다. 부디 백호를 구해주십시오.”진동왕은 숨을 고르자마자 미친 스님을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은 상황이 너무나 긴급했기 때문이었다.그 말을 들은 미친 스님은 안타깝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내 도행은 보도자항과 팽팽한 대결 수준입니다. 그를 죽일 수 있었던 건 수련이 아니라 운 때문이었습니다. 백호에게 닥친 이 재앙은 그의 운명에 이미 각인된 것입니다.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뭐... 뭐라고요?”곤륜 구역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고인조차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진동왕은 충격을 받았다.“어서 말하거라.
“미친놈. 이 가짜 스님아, 당장 꺼져.”공수이는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혈액을 인으로 새겼다.그의 피는 놀랍게도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십장 금불인이 발동되었다.공수이가 모든 힘을 다해 불러낸 공격은 보도자항이 소환한 금불상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갔다.“네 놈이 고작 불법 몇 년 수련했다고 대단한 줄 아느냐? 서방여래는 만불지존이다. 네가 감히 뭐로 나와 겨룬단 말이냐. 깨져라.”보도자항은 냉소를 띠며 금불상의 양손을 모았다. 그러자 손끝에서 번개 같은 금뢰가 튀어나와 공수이의 금강불인을 산산이 부수었다.그 충격에 공수이는 완전히 쓰러졌다.그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설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되었다. 문득 공수이는 이것이 정말 여래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찮은 요귀가 어찌하여 참불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세상 이치인가? 내가 배운 불법은 전부 거짓인가? 아니면 선악을 막론하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건가?”그 순간 하늘을 가르며 천지의 정기를 품은 무지갯빛 호연정기가 짙은 기운을 가르며 쏟아졌다.“금강인 불문을 열어라. ”거대한 메아리 같은 음성이 하늘을 울렸고 곧이어 백장 금인이 칠색 구름을 타고 서울 상공에 강림했다.“뭐라고?”보도자항의 표정이 굳었다.그 압도적인 기운은 그의 숨조차 막히게 했다.“불.”백장 금인이 왕부로 내려오자마자 뱉은 한마디에 보도자항이 펼쳤던 모든 사술이 산산조각 나버렸다.“안돼... 나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군. 이 세상에 아직도 대승 불법을 익힌 자가 남아 있었다니.”보도자항은 이를 갈며 몸을 떨었다.그는 질투에 사로잡혔다.왜 자신은 만불종 종주임에도 이런 참된 불법의 정수를 얻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었다.“불본무도 심성위령. 일념으로 도를 향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너희 같은 자들은 마음을 그르쳐 불을 왜곡하고 형상 없는 불을 우상화해 신처럼 떠받들었다. 만불종은 불타의 이름을 빌려 사익을 취했고 종교를 가장해 세상을 속였으며 그 어떤 정의로운 종
“너 혹시 내 금강인을 노리는 거야? 이 썩을 놈아. 이 빌어먹을 스님아. 금강인은 불문의 최고 금의인데 너 같은 가짜 스님한테 줘봤자 쓸모없어. 멍청이야.”공수이가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보도자항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네 이놈. 네놈 같은 자는 죽여야 해.”보도자항이 눈을 부릅뜨며 불문의 비기를 펼쳤다.하지만 그의 동작은 도저히 정통 도술로 보이지 않았다.몸 전체에서는 사악한 기운과 요기가 넘실대고 있었다.“요승아, 내 공격을 받아라.”공수이는 다시 한번 금강인을 펼쳤다.그를 감싼 금강불인은 보도자항의 사기를 완전히 차단했고 강렬한 공격이 연속으로 날아들어 보도자항을 계속해서 밀어냈다.보도자항은 억울함을 느꼈다.그의 눈에 공수이는 그저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공수이는 물론 공씨 가문 전체가 나서더라도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임 씨 초대 국주 임세현이 돌아와도 자신 앞에 무릎 꿇을 것이라 확신했다.하지만 금강인만은 보도자항의 모든 사기 무공을 정면으로 제압하는 천적이었다.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보도자항은 속이 타들어 갔다.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수이는 보도자항을 몰아붙이며 집요하게 공격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동왕은 속이 다 시원했다.“공수이, 본때를 보여줘. 더 세게 패.”공수이는 보도자항의 머리 위로 올라가 정통으로 내리쳤고 보도자항이 머리를 감싸자마자 바로 아래로 파고들어 극한의 회음부 공격을 퍼부었다.퍽! 퍽! 빗발치는 주먹이 급소에 꽂히자 아무리 경지 높은 보도자항이라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이 썩을 놈 물러가라.”보도자항은 사기를 폭발시키며 공수이를 멀리 내던졌다.하지만 공수이는 금강인의 보호를 받고 있어 공격을 맞아도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다시 공격하려는 찰나 보도자항은 양손을 합장하더니 눈동자가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전신에 흑기가 치솟았다.“요승아, 너 또 그 짓거리냐?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그런 사술은 통하지 않아
“우습군. 이런 조잡한 칼 한 자루로 어쩌겠다고? 설령 임세현이 직접 나타나도, 내가 제압할 방법은 있다. 하물며 너 같은 놈은? 애초에 수련 자질도 없으면서 평소엔 그저 인생을 낭비하다가 위기에 처하니 발버둥 치는 거야. 정말 한심하군.”“너 같은 놈은 그냥 처박혀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해. 부처님 말씀에 이르길, 부처는 인연 없는 자는 구하지 않느니라. 너는 불문과 인연이 없으니, 지옥에서 고통이나 받는 게 어울리지.”“고해무변. 네가 돌아갈 곳은 지옥뿐이다.”“하하하!”보도자항은 한 손으로 불인을 그리며 마력을 응축해 진동왕의 명문을 향해 내리찍었다.“젠장! 이제 끝이군.”진동왕 임성진의 눈에 분노와 절망이 교차했다.그 말이 맞았던 거다. 잘난 척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막상 상황이 닥치자 그는 평화롭게 죽지 못할 운명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안 돼!”임성진의 절규는 하늘을 갈라놓을 만큼 강렬했다.“뭐, 뭐야?”보도자항은 진동왕이 그런 힘을 낼 리 없다며 비웃었지만, 그때였다.하늘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곤두박질쳤다.“뭐야, 이놈은?”보도자항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곧이어 그 검은 그림자가 땅에 내리꽂히자 바닥에 금이 쩍쩍 가기 시작했다.진동왕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내가 소리쳤다고 사람이 떨어진다고? 혹시 구주왕이 돌아온 건가?’하지만 그건 아니었다.구주왕은 저리 허접하게 등장할 인물이 아니었다.임성진이 눈을 부릅뜨고 확인한 순간 완전히 넋이 나갔다.떨어진 이는 바로 공씨 가문의 세자 공수이였다.“네... 네가 왜 여기에... 공씨 가문에서 보낸 게 고작 이 하찮은 놈이라고?”진동왕은 절규했다.분노와 절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 순간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던 공수이는 허접하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허접? 지금 누굴 보고 하는 소리야, 이 늙은이야!”“내 이름은 공수이! 공씨 가문의 세자지. 법호는 널 죽여주마다!
구주군이 진동왕을 따라 돌격하려는 순간 진동왕은 단호하게 외쳤다.“물러서! 전원 후퇴하라. 저자는 만불종의 종주다. 너희가 가다간 전멸할 것이다.”진동왕은 자신의 권한으로 구주군의 진격을 막았고 홀로 왕부 안으로 다시 뛰어들었다.“진동왕, 네가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오늘 네 목숨은 내 것이고 왕궁 밖 구주군의 국운 또한 내 차지다.”보도자항은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움직였고 진동왕은 이를 악물고 금도를 휘둘러 필사적으로 맞섰다.그가 뿜어내는 기세는 실로 용맹했지만 사실상 그의 목숨을 스스로 갈아내는 싸움이었다.온 힘을 다했지만 그의 어떤 공격도 보도자항의 몸에 미치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건 오직 시간을 끄는 것뿐이었다. 한편 다른 전장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청의 검객은 서요산 검종 종주의 제자였다. 그의 검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근접해 있었고 곤륜 구역의 수련자들을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청해는 지금 자신의 음혼을 불태우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서울 상공에 먹구름이 짙게 깔렸고 그 먹구름은 서서히 거대한 해골의 형상으로 변해갔다.마치 서울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였다.하늘은 먹구름에 뒤덮였고 땅에는 귀기 어린 안개가 스며들었다.서울 전역이 거대한 안개에 휩싸였고 그 안에서 쉬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악몽에 갇혔다.그 누구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꿈속임을 인지한 이들조차 가위에 눌린 듯 깨어나지 못했다.깨어 있던 이들마저 갑자기 정신이 붕괴된 듯 헛소리를 내뱉으며 광기에 휩싸였다.서요산 검종의 산속 검각에는 종주의 폐관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하얀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피처럼 붉은 달이 떠오르고 동쪽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무겁게 몰려 있었다. 그 위로는 거대한 형체가 아득히 떠다니고 아래로는 온갖 귀물이 들끓고 있었다.“마기가 짙어지고 있군. 누군가 화진의 국운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자색 도포를 입은 중년 남성이 재빠르게 날아와 무릎을 꿇고 보고했
“신령의 기운이 너무 약해졌어. 안 돼. 저놈은 백호 대수령을 노리고 온 거야.”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은용위는 즉시 서울 본부에 상황을 보고했다.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서울 본부와의 모든 통신이 완전히 끊기었다는 점이었다.서울 본부 빌딩에는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천 명의 왕실 금위군 역시 모두 피 웅덩이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해당 지역은 거대한 결계로 봉쇄되어 외부와의 연결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더욱 충격적인 문제는 왕궁 내부 고수들이 전멸했다는 것이다.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왕궁 바로 아래 거주하던 왕실 직계 가족들은 무사했다.왕궁 외곽에서 상황을 전해 들은 견배영은 교외에서 급히 돌아와 지휘권을 인계받았다.그는 원래 용맥 경계에서 방어 임무 중이었지만 사태가 긴급해지자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역시 너무나 무력했다.진동왕과 신령도 그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조차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혼자 사태를 수습한다는 건 불가능했다.“어쩌지... 현모와 주작은 해외에 있고 구주왕은 곤륜 구역에 갔는데. 서요산 검종도 내부 사정으로 정신이 없어서 당장은 도움을 받을 수 없어.”견배영은 고심 끝에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은용위와 구주군, 금위군을 총동원해 대규모 군사력으로 밀고 나갈 작정이었다.즉시 대군이 소집되었고 동시에 진동왕부와 수비영을 향해 출동했다.그중 백 명의 은용위 선봉대가 가장 먼저 진동왕부에 도착했다.이들이 왕부에 들어서자마자 진동왕을 고문 중이던 보도자항이 눈을 가늘게 떴다.“호오... 역시 임씨 가문의 국운이 약해졌다고 해도 아직 끝나지 않았군. 하지만 이번에 막아냈다고 해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지.”보도자항은 싸늘하게 웃었다.“전원 돌격!”백 명의 은용위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그들은 하사받은 금도를 뽑아 들었고 검날에서는 은은한 광휘가 번쩍였다.금도는 왕실의 보검이자 정식 법기였다.평소엔 집안 제단에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