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빨리 봐요. 우희 씨가 부승원 씨에게 몰래 입을 맞추고 있어요.”옆에서 양시연이 연정훈에게 귓속말을 건네자 연정훈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유치하긴. 그저 입 맞췄을 뿐인데.”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내밀며 슬쩍 쳐다본 뒤 상황을 보고했다.“부승원 씨가 우희 씨에게 입을 맞추고 손도 잡으려는 것 같아요.”연정훈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그 순간 부승원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부승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정훈에게 말했다.“심심했어?”연정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콜라를 한 모금 마셨고 다행히 영화가 곧 시작되었다.그의 관심은 드디어 양시연에게로 돌아갔고 그는 양시연에게 살짝 기대어 앉으며 그녀가 영화 내용을 공유해주기를 기다렸다.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쳐다보았다. 부승원은 그녀는 커다란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며 한 손은 그의 손목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팝콘을 계속 집어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양시연이 준 티켓은 최신 SF 영화로 화면은 화려했지만 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시끄러워 부승원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반우희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연정훈이 자꾸 부승원을 놀리자 반우희는 영화를 시작한 뒤로 그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영화의 자극적인 장면이 지나갈 때마다 반우희는 감탄하며 부승원의 손목을 잡고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부승원은 그녀의 손에 시선을 두었고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펼쳐 천천히 깍지를 잡았다.반우희는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영화에 집중하던 시선을 떼고 꽉 잡힌 손을 본 뒤 다시 부승원을 쳐다보았고 부승원은 화면을 응시한 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반우희는 입술을 오므리고는 마음속으로 설렘을 느꼈고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 부승원에게 조금 더 가까이 기울여 팝콘을 먹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가까워지는 느낌을 감지하고 미소를 지었다.부승원은 더 이
“지금은 차가워 보이지 않는 거야?”양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한층 내려와서 평범한 사람처럼 보여서 그냥 그래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지금 너는 내 아내인데 내가 너한테 도도하게 대할 이유가 뭐 있어?”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그의 앞에 가서 사무실 책상에 기대며 마치 진지하게 말하듯 말했다.“난 당신의 차가운 모습이 꽤 좋아요. 멋져 보이고 뭔가 걷잡을 수 없어 보여요.”그 말이 끝나자마자 연정훈은 양시연을 자기 무릎에 앉혔고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며 손바닥이 허리 옆에 닿도록 하고 익숙하게 장난을 치며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귓불에 닿았다.“지금 차갑지 않아서 안 좋아하는 거야?”양시연은 앙탈을 부리며 연정훈의 품에 숨었고 몇 번의 짧은 순간 만에 연정훈은 뜨겁게 달아올랐다.양시연이 임신한 이후로 연정훈은 본래 차분하게 지냈고 축적된 감정이 많았기에 그녀가 입으로 자꾸 그를 도발하는 바람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그녀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걸 알게 되자 바로 뻔뻔하게 애교를 부렸다.“좋아요. 당신의 어떤 모습도 전 다 좋아요.”연정훈은 그녀가 이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회사 일은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두 다리를 그의 허리 옆에 벌려서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며 일어섰다.이 자세에서 양시연은 곧 이어질 상황을 떠올렸고 양시연은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아직 의사가 말한 시간이 아니잖아요.”연정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양시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웃었고 그녀는 연정훈이 오래 참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시연은 두 손으로 연정훈의 얼굴을 감싸며 그의 얼굴에 입맞춤하며 마지막으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연정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한 뒤 숨이 거칠어졌다.“이건 네가 먼저 말한 거야. 내가 강요한 게 아니야.”“그럼 할래요? 안 할래요? 조금만 기다리면 후회할지도 몰라요.”그녀는 도도하게 말했고 연정훈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침실로 가지
양시연은 모연준의 사건이 부승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그 이야기를 꺼내며 부승희는 한탄하듯 말했다.“사실 저는 모연준 씨가 꽤 마음에 들었어요. 결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실수했죠.”모연준의 전 여자친구이자 첫사랑인 그녀는 모연준이 어려운 시기에 빠졌을 때 사라졌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 온갖 방법으로 그를 술에 취하게 만들고 하룻밤을 보낸 뒤 임신했다는 사실을 양시연은 이제야 알았다.“모연준 씨도 솔직한 편이에요. 그 첫사랑에 대한 감정이 조금 남아 있다고 했죠. 그렇지 않았다면 그 하룻밤을 그렇게 확실히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가 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모연준 씨는 당황해서 아이를 지우라고 했는데 그 여자는 끝내 지우지 않고 시간이 지나 찾아와 문제를 만들었어요.”부승희는 손을 들며 단호하게 말했다.“어쨌든 난 참을 수 없어요. 모연준 씨가 무릎 꿇고 사과해도 그건 안 될 거예요.”하지만 모연준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 후 그는 부승희를 찾아와 선택권을 줬고 부승희가 헤어지자고 하자 깔끔히 사라졌다.그날 부승희는 모연준에게 여러 차례 뺨을 때렸지만 그는 반격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부승희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이야기를 마치며 부승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여자도 결국 얻은 건 없을 거예요. 모연준 씨가 그 여자에게 감정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거든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승희 씨가 그렇게 단호하게 헤어진 거군요?”부승희는 턱을 치켜들며 대답했다.“그 여자가 내 사람을 건드렸다면 절대로 쉽게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모연준 씨가 만약 그 여자에게 감정이 남아 있었다면 내가 그 둘을 죽도록 괴롭혔을 거예요. 그 여자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 두지 않았겠죠.”‘눈에는 눈 이에는 이.’부승희의 인생 원칙은 분명했다. 억울하게 당하지 않고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양시연은 부승희의 말에 손뼉을 쳤다.“그러면
반우희는 열심히 문제를 풀고 마침내 수영장에 갈 기회를 얻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수영장 쪽으로 몰려갔다.연정훈과 양시연의 집에는 지하에 거대한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전체가 수영장으로 꾸며져 있었다.날씨는 아직 쌀쌀했지만 수영장의 물 온도는 조절할 수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양시연은 이곳에서 여유롭게 수영을 즐겼다.수영장에 모인 사람 중 루나를 포함한 여자 임원들은 모두 미모와 능력이 뛰어난 여성들이었으며 수영에도 능숙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등장하자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사람들이 많아지자 누군가 수영 경기를 제안했다.처음엔 여자들만 물에 들어갔고 경기 방식은 단순했고 수영 방법에 상관없이 끝까지 도달하면 되는 것이었다.남자들은 구경하며 흥미롭게 지켜봤고 한우빈이 출발 신호를 맡았다.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 동시에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고 주변에서는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양시연은 수영장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비롯해 모든 이들의 시선은 반우희에게 쏠렸다.반우희는 개헤엄을 꽤 잘했고 다른 사람들처럼 화려한 비키니가 아닌 끈이 달린 나시와 반바지 스타일의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하얗고 통통한 몸매는 키 크고 늘씬한 여성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경기는 치열했고 두 번의 왕복 끝에 반우희는 루나와 동점을 기록했다.“반우희 씨, 정말 대단하네요.”양시연이 칭찬했다.반우희는 밝게 웃으며 수영장 라운지로 헤엄쳐 올라왔다.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의 시선은 부승원에게 향했다.양시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반우희는 은근히 부승원의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부승원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반우희를 잡아 올렸다.“올라와서 좀 쉬어.”반우희는 몸을 가볍게 뛰어 라운지에 올라와 부승원 옆에 앉았고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기대며 이야기를 나눴다.이승우와 몇몇 남자들도 물속으로 뛰어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놀며 내기를 시작했고 상품을 걸며 분위기를 띄웠다.수영장 라운지에서는 연
부승희는 2층으로 올라가 아무 방이나 골라 샤워를 마친 뒤 나오자마자 거실에서 드라이어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가 여자들이 내는 소리일 것으로 생각한 부승희는 맨발로 나가보았지만 짜증이 밀려왔다.‘하 이런.’이승우는 부승희의 모습을 등지고 서서 큰 전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며 이마에 떨어진 잔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멋을 부리고 있었다.의 머리에는 지난번 부승희가 때려서 생긴 작은 상처가 아물었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부러 하트 모양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꿔 그 부분을 가렸고 멀리서 보면 그 흔적은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부승희는 팔짱을 끼고 문틀에 기대며 한마디 했다.“옆방 드라이어 고장 난 거야?”이승우는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6~7개 방을 다 눌러보다가 이 방까지 온 거야.”이승우는 드라이어를 끄고 머리를 정리하며 부승희를 바라봤다.“기분 나쁘면 나한테 두 대 정도 때릴래?”부승희는 웃으며 말했다.“진짜 너 괘씸해.”이승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듯 드라이어를 부승희에게 건넸고 부승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았다.그녀는 소파로 가서 앉아 하얀 피부의 긴 다리를 꼬고 머리를 한쪽으로 넘기며 눈을 감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이승우는 그 옆 소파에 기대어 대놓고 부승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머리가 거의 말라갈 무렵 부승희가 눈을 떴고 이승우는 딸기를 씻어서 건넸다.부승희는 잠시 쓱 훑어본 뒤 망설임 없이 머리를 숙여 그것을 물어갔다.이승우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너에게 꽃을 보냈는데 봤어?”부승희는 그를 보지 않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으면서 대답했다.“언제 보낸 거? 어떤 꽃?”“그저께 오후. 줄리엣 장미.”“어느 꽃집에서 샀어? 무슨 포장이 그렇게 엉망이야.”부승희는 투덜거렸다.“...내가 포장했어.”부승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직접 포장한 거야?”“응. 직접 포장했어.”“그러면 너 진짜 운 좋네. 그 꽃은 내가 직접 쓰레기통에 던졌던 유일한 꽃이야. 너무 못생겼어.”이승우는 그녀가
이승우는 다리를 뻗어 부승희를 부드럽게 끌어올려 무릎 위에 앉혔고 그 일련의 동작은 마치 미리 설정된 것처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루어졌다.심지어 부승희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는 동작까지 예상한 듯 그는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아 등 뒤로 제압했다.‘이런.’부승희는 속으로 짧게 욕을 내뱉었지만 체면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이승우를 응시했다.“이거 무슨 뜻이지?”“실수였어.”이승우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여 부승희의 다리를 살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부승희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이승우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허리가 아프네. 좀 주물러 줄래?”그 말을 하며 그녀는 이승우의 무릎 위에서 일부러 몸을 살짝 비틀었고 이승우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정말로 주물러줘도 화 안 낼 거야?”“화날 리가 있겠어? 네가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걸 아는데.”이승우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억누르려 애썼다.‘이승우가 좋은 마음으로?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부승희는 허리가 아프다고만 했을 뿐 정확히 어디가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승우도 따지지 않고 그녀의 손을 풀어주며 따뜻한 손바닥으로 천천히 허리를 주물렀다.그는 부승희의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잡담을 나누는 이 순간을 만끽했다.만약 부승희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승우의 목덜미를 살짝 꼬집지 않았다면 그 순간은 더 완벽했을 것이다.부승희의 손톱은 정교하게 네일 아트를 한 상태였고 살짝만 꼬집었을 뿐인데도 이승우는 목덜미에 뻐근한 고통을 느꼈다.참다못해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피해내던 이승우를 보며 부승희는 만족스러운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기분 좋지?”이승우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좋아.”‘정말 한심하군.’부승희는 이승우를 흘겨보았다. 그의 손이 허리 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뜨거운 온기가 점점 더 신경 쓰였다.참다못한 부승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손을 들자마자 또다시 이
부승희는 떠날 때 마음속에 분노를 가득 품고 떠났으며 정확히 말하자면 이승우와 사귀지 않았지만 그와 모호한 관계를 여러 번 이어왔다.부승희는 속으로 둘이 결국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결국 이승우는 진정한 사랑이라 여긴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녀는 해외로 떠날 때 마음속으로 이승우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돌아와서는 모연준과 함께하며 학업과 커리어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로 인해 이승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우에 대한 미움은 여전히 부승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처음에는 모든 환상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승우가 모연준을 대신해 싸워주던 그날 밤 사실 그가 부승희를 위해 싸운 것이었음에도 그녀는 마음 깊이 숨겨왔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이승우가 대체 누구길래 얼굴도 두껍게 나서서 자신을 대신해 싸운다고 하는지 의문스러웠다.이승우가 부승희를 대신해 싸운 것은 결국 그녀에게 창피함을 안겨준 셈이었고 마치 자신이 이승우보다 못한 사람을 찾았다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부승희는 이승우의 머리를 때린 후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 그저 이승우가 알아서 멀리 떨어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두 가문 간의 인연을 생각해 어느 정도 체면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그런데 하하.’그때 이승우는 웃으며 부승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부승희 나는 다른 것을 바라는 게 아니야. 내가 너를 도와서 상황을 풀어줄게. 돈을 벌어서라도 이렇게 쌀쌀맞게 굴지 말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잖아.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우정이라도 남아 있잖아. 네가 예전에 나와 사귀지 못해서 마음에 담고 있다면 마음이 너무 좁은 거 아니야?”“마음이 좁다고? 감히 이런 말투로 나를 말하다니. 내가 이승우에게 용기를 준 건가?’“어때?”이승우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내가 너의 부하가 되어줄 기회를 줄래? 네가 어디를 지시하면 내가
부승희는 양시연에게서 옷을 빌려 입고 나오던 중 마침 부승원과 반우희를 마주쳤다.‘반우희 씨는 피부가 정말 하얗고 통통하네.’부승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순간 참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부승원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반우희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반우희 씨, 가슴이 진짜 풍만하시네요.”반우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듯 가슴을 감쌌다.‘이 여자 변태인가?’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어 부승원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다. 그러더니 반우희를 옆으로 끌어당겨 속삭이듯 물었다.“우리 오빠가 만져본 적 있어요?”반우희는 당황했다!반우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승희를 바라봤다.‘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거야?’부승원은 반우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부승희가 불쾌한 말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객실 문을 열었다.“일단 들어가서 샤워하고 옷부터 갈아입어.”반우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부승희의 손에서 재빨리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방 밖에서는 남매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부승희는 두 손을 뒤로 모으며 부승원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부승원도 수영을 한 듯 드물게 정장을 벗고 수영복만 입은 모습이었다.반우희는 친오빠마저 그냥 두지 않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오빠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들어가. 절호의 기회잖아.”부승원은 침묵했다.“...”이승우는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아까 이승우랑 같이 있었냐?”‘쳇.’수비가 되지 않자 공격으로 돌리는 것은 정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치사한 수법이었다.부승희는 콧방귀를 끼고 대답 없이 자리를 떠났고 부승원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반우희가 샤워를 마친 후인지 그녀의 옷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모습은 전혀 여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부승원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들었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잠시 후 반우희가 목욕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