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희는 떠날 때 마음속에 분노를 가득 품고 떠났으며 정확히 말하자면 이승우와 사귀지 않았지만 그와 모호한 관계를 여러 번 이어왔다.부승희는 속으로 둘이 결국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결국 이승우는 진정한 사랑이라 여긴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녀는 해외로 떠날 때 마음속으로 이승우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돌아와서는 모연준과 함께하며 학업과 커리어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로 인해 이승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우에 대한 미움은 여전히 부승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처음에는 모든 환상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승우가 모연준을 대신해 싸워주던 그날 밤 사실 그가 부승희를 위해 싸운 것이었음에도 그녀는 마음 깊이 숨겨왔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이승우가 대체 누구길래 얼굴도 두껍게 나서서 자신을 대신해 싸운다고 하는지 의문스러웠다.이승우가 부승희를 대신해 싸운 것은 결국 그녀에게 창피함을 안겨준 셈이었고 마치 자신이 이승우보다 못한 사람을 찾았다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부승희는 이승우의 머리를 때린 후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 그저 이승우가 알아서 멀리 떨어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두 가문 간의 인연을 생각해 어느 정도 체면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그런데 하하.’그때 이승우는 웃으며 부승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부승희 나는 다른 것을 바라는 게 아니야. 내가 너를 도와서 상황을 풀어줄게. 돈을 벌어서라도 이렇게 쌀쌀맞게 굴지 말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잖아.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우정이라도 남아 있잖아. 네가 예전에 나와 사귀지 못해서 마음에 담고 있다면 마음이 너무 좁은 거 아니야?”“마음이 좁다고? 감히 이런 말투로 나를 말하다니. 내가 이승우에게 용기를 준 건가?’“어때?”이승우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내가 너의 부하가 되어줄 기회를 줄래? 네가 어디를 지시하면 내가
부승희는 양시연에게서 옷을 빌려 입고 나오던 중 마침 부승원과 반우희를 마주쳤다.‘반우희 씨는 피부가 정말 하얗고 통통하네.’부승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순간 참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부승원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반우희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반우희 씨, 가슴이 진짜 풍만하시네요.”반우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듯 가슴을 감쌌다.‘이 여자 변태인가?’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어 부승원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다. 그러더니 반우희를 옆으로 끌어당겨 속삭이듯 물었다.“우리 오빠가 만져본 적 있어요?”반우희는 당황했다!반우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승희를 바라봤다.‘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거야?’부승원은 반우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부승희가 불쾌한 말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객실 문을 열었다.“일단 들어가서 샤워하고 옷부터 갈아입어.”반우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부승희의 손에서 재빨리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방 밖에서는 남매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부승희는 두 손을 뒤로 모으며 부승원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부승원도 수영을 한 듯 드물게 정장을 벗고 수영복만 입은 모습이었다.반우희는 친오빠마저 그냥 두지 않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오빠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들어가. 절호의 기회잖아.”부승원은 침묵했다.“...”이승우는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아까 이승우랑 같이 있었냐?”‘쳇.’수비가 되지 않자 공격으로 돌리는 것은 정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치사한 수법이었다.부승희는 콧방귀를 끼고 대답 없이 자리를 떠났고 부승원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반우희가 샤워를 마친 후인지 그녀의 옷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모습은 전혀 여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부승원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들었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잠시 후 반우희가 목욕
점심 무렵까지 놀다 보니 사람들도 지쳐 절반 정도의 손님들은 객실로 가서 휴식을 취했고 여전히 에너지를 발산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반우희 집안의 세 아이뿐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앉아 몇몇 임원들과 함께 업계 대기업들의 권력 교체 뒤에 숨겨진 작전들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입이 심심해졌다. 그녀는 술 창고에 여 아주머니가 만든 과일 원액이 생각나 직접 가지러 가기로 했고 연정훈은 그녀가 걱정되어 동행하기로 했다.“겨우 몇 걸음밖에 안 되잖아요.”양시연이 말하자 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내가 집에 있을 땐 나랑 같이 가. 내가 집에 없을 땐 혼자 수영장이나 술 창고에 가지 마.”양시연은 현재 배가 커져 있어 혹시라도 넘어지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필요 없어요...”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뒷문에 도착했고 연정훈이 문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양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확인한 후 여 아주머니의 손자인 탁승호라는 걸 알고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승호 오빠.”탁승호는 양씨 가문 사람이라 연정훈도 그를 예우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배경은 깨끗했다.“방금 창고에 신선한 식자재를 채워 넣고 오는 길에 뒷마당에서 몇몇 아이들이 우체통을 열려고 애쓰는 걸 봤어요. 그래서 열쇠를 찾아주려고 했어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 우체통은 녹슬었을 텐데 아직 열릴 수나 있을까요?”“괜찮아요. 안 열리면 자물쇠를 교체하고 조금만 다듬으면 보기에도 좋을 거예요.”“네. 수고하세요.”탁승호는 서른 정도로 보이는 투박한 남자로 성격도 순박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금세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연정훈과 양시연에게 길을 내어주고 두 사람이 지나가자 조용히 거실로 들어갔고 매우 얌전하게 있었다.양시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연정훈과 함께 술 창고로 내려갔다.그녀는 과일 원액을 금세
양시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뭔데?”희주는 양시연의 손을 잡고 작은 방으로 이끌었고 잠시 고민한 후 침대 위에서 한 묶음의 엽서를 꺼냈다.희주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승주 오빠가 언니가 아기를 가진 상태라 화내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언니가 모르면 더 속상해할까 봐 저희끼리 의논했거든요...”말을 끝낸 희주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고 양시연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대체 뭔데 그래?”희주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손에 든 것을 양시연에게 내밀었고 양시연은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고 훑어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빛이 변했다.그것은 엽서가 아니라 사진 묶음이었고 사진 속 장면들을 본 순간 양시연의 손이 떨리고 몸이 굳어졌다.희주는 양시연의 표정을 살피며 상황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고 두 손을 어찌할 바 모르며 만지작거렸다.“언니 이 사진...저희 몇 장만 봤어요. 함부로 다 보지는 않았어요.”양시연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녀는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알았어. 희주, 고마워.”희주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으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혹시... 오해일 수도 있어요. 아 맞아요.”그러더니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승주 오빠가 그러는데 이 사진들이 조작된 걸 수도 있대요.”양시연은 살짝 미소 지으며 희주의 어깨를 다독였다.“알겠어. 먼저 가서 놀아.”희주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양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고 의자에 앉아 허리를 살짝 짚은 뒤 사진들을 한 장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첫 번째 사진에는 연정훈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고 소현주는 핸드폰을 들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추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이 사진 한 장만으로도 희주 같은 어린아이조차 불륜을 떠올릴 법했으니 양시연이 불쾌함을 느낀 것도 충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랫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앞뒤로 위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며 속으로 추측을 시작했다.“싸운 걸까요?”거실의 분위기는 점점 냉랭해졌다.그 옆에서 세 명의 어린아이도 조용하게 있었다. 동준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순수한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승주와 희주는 상황을 감지한 듯 말수가 줄고 표정이 어두워졌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으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용히 자기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위층에서 양시연과 연정훈은 비록 서로 소리 내어 다투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양시연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사진을 보낸 사람이 마치 과거에 양민아가 연정훈에게 자신과 양혁수의 에든베타 영상을 보낸 것처럼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전 연인의 친밀한 사진을 보고 차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소현주를 극도로 싫어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신경 쓰는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소현주와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거짓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양시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를 등진 채 말없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고 감정이 격해져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이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소현주가 연정훈과 친밀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위산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결국 양시연은 급히 일어나 욕실로 향했고 연정훈은 그녀를 따라갔다.그녀가 토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의 마음은 무너지는 듯 아팠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의
방 안 분위기가 차츰 진정되었고 양시연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눈을 감고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 곁을 지키며 조용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양시연은 눈을 뜨며 옅은 창백함이 감도는 얼굴로 말했다.“배가 두 번 정도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어요. 아기한테 영향이 간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양시연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고 연정훈은 지금 그녀의 상태를 우선시했다. 집에 손님들이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의사를 불렀다.의사가 도착하자 부승희와 몇몇 손님들도 양시연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다행히도 의사는 금방 진찰을 마쳤고 임신부의 정서적 동요로 인해 불편함이 생긴 것이며 아기에게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이 말을 들은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늦게 나타난 반우희는 세 아이를 데리고 양시연을 찾아왔다.희주는 맨 뒤에 서서 망설였지만 양시연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그 사진들은 합성된 거야. 언니가 이미 확인했으니까 걱정하지 마.”그 말을 듣고 나서야 희주는 안도하며 어른인 척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내가 뭐랬어요? 형부는 드라마 속 나쁜 남편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요.”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언니한테 보여주지 말 걸 그랬어요.”양시연은 그들이 비록 어리지만 분명히 고민한 끝에 그녀와 더 가까운 관계인 자신이 속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생각했다.그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 양시연은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의사의 말로 모두가 안심했지만 양시연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손님들은 차례로 자리를 떠났다.저택은 다시 고요해졌고 가정부들은 조용히 집 안을 정리했다.밤이 되자 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정훈이 음식을 들고 와 몇 입이라도 먹으라며 권했지만 양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마음이 상해서 먹고 싶지 않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히고 침대 헤드에 기대도록 했다.“좋은 엄마가 되고 싶
연정훈이 말했다.“인생이 단지 첫 만남 같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소현주의 이미지는 나중에 무너졌어. 처음 편지를 주고받았던 정 때문에 계속 신경을 썼던 것 같아. 게다가 처음엔 소현주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었잖아.”양시연은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러면 결국 정말 온라인 연애를 한 거네요.”연정훈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변질된 일로 질투하지 마. 당신이 찝찝하지 않아도 내가 더 찝찝해.”연정훈이 말했다.“내가 질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너는 절대 잘못이 없어.”그는 마치 부드러운 솜처럼 아무리 세게 때려도 무슨 소용인가 싶을 만큼 무력하게 반응했다.양시연은 아무리 화가 나도 결국 그에게 화풀이하고 싶지 않았다.사건은 임성원에게 맡기고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연정훈이 양시연의 마음을 달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아침이 되자 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고 거울 속 부은 눈을 보며 어제 그렇게 감정에 휩쓸린 걸 후회했다.연정훈은 그녀에게 더 쉬라고 했지만 양시연은 일이 없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할 것 같다며 출근하기로 했다.아침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정인으로 데려다주었고 점심시간이 되자 다시 그녀를 보러 왔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바쁜 걸 알기에 말했다.“나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 하루에 몇 번씩 오지 않아도 돼요.”연정훈은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와서 네가 괜찮은 걸 확인해야 오후에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어.”양시연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함께 점심을 먹은 뒤 양시연은 연정훈을 휴게실로 데려가 잠시 눈을 붙이게 했다.연정훈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양시연은 잠이 오지 않아 허리를 매만지며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일에 몰두하면 잡생각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고요가 찾아오자 다시 사소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맞은편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양시연은 문득 연정훈이 예전에 자신에게 이
‘한 통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통 세 통은 뭐지?'양시연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한 채로 연정훈과 소현주의 다른 이메일들을 열었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그중 절반이 그녀가 익숙한 주제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숨을 참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N.S와의 통신을 열어 하나씩 비교하기 시작했고 주제부터 내용까지 높은 중복도를 발견했다.‘뭐지?’양시연은 화면 앞에서 멍하니 멈춰 서 있었는데 갑자기 시선이 N.S라는 두 글자에 떨어졌다.옛날에 양민아가 소현주의 영어 이름은 Nancy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Nancy.Su! 내가 예전에 통신한 사람은 소현주 씨였다는 말인가?’‘이건 말도 안 돼. 너무 황당하잖아.’양시연은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과거에 보냈던 첫 번째 이메일과 연정훈과 소현주가 주고받은 첫 번째 이메일을 찾아봤다. 모두 일치했다.‘온라인 연애? 하. 헛소리.’양시연은 충격을 받았고 곧 분노로 바뀌었다.결국 소현주는 그녀와 연정훈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역할이었고 연정훈과 소현주의 인연은 그녀가 맺어준 셈이었다.양시연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고 일어섰다가 책상 앞에서 걸어 다녔다.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우연인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현주가 양시연의 메일을 통해 연정훈에게 답장을 보냈고 연정훈과 대화를 나눈 후 연애를 하고 다시 한 바퀴 돌아서 결국 연정훈과 다시 만났다.‘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양시연은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다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남은 이메일들을 하나씩 열어봤고 한 통씩 읽을 때마다 답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니 점심시간이 지나버렸고 휴게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 본능적으로 화면을 닫았다.연정훈은 잠을 자고 나서 훨씬 상쾌해 보였다.양시연은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그녀는 소현주와의 ‘온라인 연애’에 질투를 느꼈지만 결국 그와 통신한 건 바로 자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