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에서 큰 비밀을 발견한 양시연은 마음의 고통이 반쯤 가시고 일하는 데도 한결 힘이 났다.부승원과 함께 일한 지 꽤 되었지만 그는 드물게 양시연에게 대표다운 면모가 보인다고 긍정적인 평가했다.양시연은 내심 콧방귀를 뀌며 웃음을 지었다.“방금 반우희 씨가 커피를 잔뜩 사서 들고 올라오는 걸 봤어요. 꽤 통 크네요.”양시연의 말을 듣고 부승원은 잠시 멈칫했다.‘반우희가 접대?’“다른 사람 심부름으로 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일부러 신비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아니요. 반우희 씨가 사비로 산 거예요.”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부승원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를 한번 훑어보았다.‘할 말 있으면 말해.’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였다.“반우희 씨가 자기 친구를 아래층 커피숍에 소개해 줬거든요. 그 커피숍 직원들은 커피를 많이 팔면 보너스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부승원은 곧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반우희는 친구에게 고객을 끌어준 셈이었다.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다가 문득 양시연의 눈빛을 보고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반우희 씨가 소개한 친구 장서진 씨라는 남자 맞죠?”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고 양시연은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정답이에요.’부승원은 얼굴에 아무런 변화 없이 고개를 숙여 서류를 계속 보았고 양시연은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마음속으로 비웃었다.저녁 해가 지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그때 연정훈에게서 저녁에 술자리가 있어 양시연을 데리러 갈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양시연은 정리가 안 된 일정이 있었고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저도 야근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의 화가 다 풀렸는지 확신하지 못한 듯 드물게 머리를 쓰담하는 귀여운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냈는데 그 대상은 배가 볼록 나온 임산부였다.“바보 같으니.”양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작게 중얼거린 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한편 밖에서는 반우
부승원은 외투를 벗고 단단히 묶인 넥타이를 풀며 깊은 눈길로 반우희를 바라보았다.“몇 문제나 풀었어?”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세 문제요.”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소매 단추를 풀고 침대 머리맡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반우희는 그가 또 자신에게 비효율적이라며 잔소리를 할까 봐 재빨리 변명했다.“나 샤워했어요. 안 그랬으면 벌써 다 풀었죠.”‘허세가 장난 아니구나.’사실 샤워를 하지 않았어도 반우희는 느긋하게 꾸물거렸을 게 뻔했다.부승원은 그녀의 의도를 꿰뚫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세수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워 잠시 쉬었다.반우희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 장난기 어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조심스럽게 그의 침대로 올라탔다.부승원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의 차가운 종아리가 자기 다리에 닿는 순간 그녀가 그의 셔츠 하나만 걸친 걸 떠올렸고 분명 이번에도 장난을 칠 거로 생각했다.점점 대담해지는 그녀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그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려 반우희를 외면했다.반우희는 몸을 일으켜 얼굴을 들이밀며 장난스럽게 다가왔고 부승원은 비록 그녀를 보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연정훈의 휴게실에 샤워하러 오며 개인 세면용품까지 챙겨 와 자신의 의도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는 태도를 드러냈다.‘정말 어리석군.’부승원은 목이 약간 메면서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이내 숨을 고르고 반우희의 작은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조용히 가서 네 숙제나 해.”반우희는 이를 악물며 불평을 흘렸다.“흥. 안 할래요.”이내 부승원의 곁에 바짝 다가가 그를 꽉 안았다.“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부승원은 속으로 흐뭇하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가시지 않아 기분이 상했고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것을 꾹 참았다.하지만 예
‘응?’반우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제야 깨달았다.“당신 장서진 말하는 거예요?”부승원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반우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매장에 손님이 많지 않아서 그냥 장서진에게 매출 좀 올려준 것뿐이에요.”“돈 많네.”“제가요? 전 돈 없어요.”반우희는 팔짱을 끼고 부승원의 품에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장서진 아니었으면 돈 쓰지도 않았을 거예요.”반우희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부승원은 더 이상 말없이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렇구나 너 참 의리 있네.”반우희는 고개를 힘껏 끄덕인 후 부승원에게 입을 맞추려 했지만 그는 일부러 고개를 들어 피했다.‘응? 왜 그래?’반우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보였다.그녀는 부승원과 눈을 마주쳤고 그는 차갑고 깊은 눈빛으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반우희는 가끔 생각이 빠르게 전개되곤 했는데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부승원의 목을 감싸며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당신 질투하는 거예요?”부승원은 침묵했다.“...”“착각이야.”‘히히. 맞았구나. 질투하는 거야.’그녀는 기쁨에 차서 계속 부승원의 몸에 밀착하며 연속으로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당신과 연 대표님처럼 장서진과 나는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장서진에게는 아무 감정도 없어요.”부승원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반우희가 그를 가로막으며 빠르게 덧붙였다.“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만 좋아해요. 그러니 질투하지 마요.”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반우희를 바라보았다.“...”감정이 조금 가라앉았고 부승원은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기분이 좋았고 감동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반우희는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입술을 깨물었고 그의 귀를 살짝 잡고 조용히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작은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는데 가질래요?”부승원은 얼굴을 돌리며 거의 참지 못할 표정을 빠르게 조정한 후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
양시연은 퇴근 전에 부승원과 몇 가지 업무를 논의하려고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불은 켜져 있었는데.’양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반우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어렴풋이 짐작했다.‘하. 됐어. 내일 다시 얘기하자.’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한 후 연정훈이 아직 업무를 끝내지 못한 것을 알았고 그녀는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휴게실의 바닥에는 남녀의 옷들이 애매하게 흩어져 있었다.반우희는 커다란 눈을 뜨고 가쁜 숨을 내쉬며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는지 귀를 기울였다. 이내 조용함을 확인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개를 돌리자 부승원의 단단한 몸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부승원의 어깨와 가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열기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서로의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었다.반우희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숨을 고르고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부승원은 그녀를 살짝 제지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적당히 해.”반우희는 몸에 퍼지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맞은 부위의 얼얼함을 느끼며 얼굴이 붉어진 채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부승원은 숨을 고르고 반우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너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네?”그는 그녀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꼬집자 반우희는 입을 삐쭉 내밀며 그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고 나지막이 불평했다.부승원은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으며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을 억누르고는 이불을 살며시 끌어 올려 반우희의 몸을 감쌌다. 그는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휴게실에서는 준비가 안 돼 있어.”반우희는 자신이 준비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또 한 번 가볍게 맞았다.“부끄러워할 줄 모르네.”‘바보.’휴게실 안에서 반우희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살짝 내밀며 침묵했다.‘부끄럽지 않다니. 당신은 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반우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드러운 입술이 다
소현주는 이곳에 갇힌 채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병은 반은 실제였고 반은 그녀가 만들어 낸 망상이었으며 때때로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누군가 그녀에게 연정훈과 양시연이 결혼했다는 말을 전한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그것이 소현주의 악몽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일지도 몰랐다.양시연의 얼굴이 몇 년 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그녀의 또렷이 커진 배를 보자 소현주는 온몸을 떨며 그 아이가 분명히 연정훈의 아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나는 이렇게 초라한 몰골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연정훈은 밖에서 양시연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며 아이까지 가졌구나.’잠시 침묵하던 소현주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달려들며 그녀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소현주를 제압하며 쉽게 저지했다.“당신이 감히 여길 어딜 들어와요? 감히 여길 오다니. 죽여버릴 거예요.”양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아 경호원들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눈짓한 후 담담히 말했다.“내가 누군지 기억하는군요. 지난 몇 년 동안 저를 꽤 미워하셨나 보네요.”소현주는 독이 서린 눈빛으로 양시연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독사가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서늘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소현주 씨가 이렇게까지 몰락한 게 전부 제 탓이라고 하시려는 건가요?”“당연히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만 없었더라면 연정훈이 나를 이렇게 버리지는 않았을 거예요.”‘역시 현실을 부정하며 여전히 환상 속에서 살고 있군.’“제가 없었다고 해도 소현주 씨가 연정훈 씨에게 숨겼던 진실이 영원히 묻힐 거로 생각하셨나요?”양시연의 말에 소현주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굳어졌다.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높였다.“내가 뭘 숨겼다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어요. 연정훈이 마음을 바꾼 건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그 말을 하면서 소현주는 마치 자신이 말한 것을 믿는 듯했다. 소현주의 눈에 핏
“무슨 뜻이에요?”소현주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양시연은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지금 옆에 휴대폰 있어요?”소현주는 그녀의 차분한 얼굴을 보며 점점 더 당황했고 얼굴에 일부러 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부추겨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죽지도 못하게 했잖아요. 당연히 내게 휴대폰이 없죠.”“그렇다면 그 사진들은 소현주 씨가 유출한 게 아닌 거네요?”양시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소현주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감정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되어서 경호원에게 놓아달라고 소리쳤다.여기는 연정훈이 마련한 곳이 아니었다. 지난번 소현주를 데려간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 수 없고 양시연은 오늘 밤 이미 충분히 위험을 감수하고 왔다. 그녀는 당연히 소현주가 어떤 일도 생기지 않게 해야 했고 사람들에게 빌미를 줄 수 없었다.“나는 당신을 놓아주고 휴대폰도 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차분해지고 이성적으로 되었을 때 해줄 거예요.”양시연이 차분하게 말했다.소현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고 그녀는 양시연을 증오하는 눈빛으로 째려봤다.양시연은 경호원에게 소현주를 풀어주라고 지시하였다.“양시연 씨, 도대체 뭐 하려고 그러는 거죠?”소현주가 침대 옆에 의지해 간신히 일어나면서 물었지만 양시연은 설명하지 않았고 대신 경호원에게 말했다.“소현주 씨에게 휴대폰을 주세요.”‘휴대폰이라니.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거야.’소현주는 더 이상 고민할 겨를도 없이 휴대폰을 덥석 잡았고 마치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은 듯했다.“메일을 한 번 열어봐요.”양시연이 그녀에게 말하자 소현주는 그녀를 힐끔 보았고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양시연은 여유롭게 소현주에게 물었다.“그동안 당신과 통신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또 누가 당신 대신 연정훈 씨의 질문에 답했는지.”이 말을 듣자 소현주는 이미 양시연이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손에 든
소현주는 이메일을 열자마자 두 장의 사진을 확인했고 양시연은 연이어 몇 장의 사진을 더 보냈다.사진을 찍는 양시연의 동작이 반복될 때마다 소현주의 온몸은 마치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말도 안 돼.”소현주는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양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이 이메일 양시연 씨가 일부러 나를 괴롭히려고 다른 사람한테서 얻은 거죠?”소현주는 자신과 대화를 나눈 사람 그리고 연정훈의 질문에 답한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절대 양시연일 리 없었다고 생각했다.양시연은 소현주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던 듯 잔잔히 웃으며 손으로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소현주 씨뿐만 아니라 나도 믿기 어려운 일이에요.”“가식 떨지 마요.”소현주는 그녀의 말을 끊고 억눌린 감정을 더는 참지 못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양시연 씨일 리가 없어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그녀의 단호한 부정 속에는 절망과 무너진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양시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연정훈 씨는 아직 몰라요.”소현주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시연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곧 알게 될 거예요.”양시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연정훈 씨와 진심으로 소통했던 사람은 나였고 결국 정훈 씨가 사랑하고 곁에 남길 선택한 사람도 나예요. 소현주 씨의 의심은 틀리지 않았어요. 사실 나에겐 이메일을 살 능력도 있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말하면 연정훈 씨는 무조건 믿을 테니까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훈 씨는 나라는 걸 알았을 때 기꺼이 믿으려고 할 거예요. 정훈 씨가 얼마나 놀라고 기뻐할지 전 이미 상상이 가거든요.”“닥쳐!”소현주는 비명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냈고 행동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방 안을 서성이며 옷과 머리를 마구잡이로 잡아 뜯던 소현주는 기진맥진한 끝에 침대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소란이 커지자 간호사가 문을 두드렸다.양시연은
‘불가능해.’양시연은 연정훈과 수없이 얽혀 있었던 소현주를 더 이상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막을 생각이었고 소현주의 절박한 부탁도 양시연은 그냥 무시했다.양시연은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소현주가 살고 싶다면 알아서 처신하는 게 소현주에게도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병원을 나오자마자 양시연은 임성원에게 모든 절차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라고 지시했다.차에 올라타자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녀는 불룩해진 배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아기야. 이제 집에 가자. 바보 같은 아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차가 출발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 연정훈은 이미 집에 있었다.그는 방금 접대를 마치고 돌아온 듯 약간 술에 취한 상태로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양시연을 기다렸다.양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연정훈의 뒤로 다가가 귀를 살짝 꼬집었다.연정훈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고 성숙하고 근엄한 표정 사이로 미묘한 놀라움이 흘러나왔다.그가 오후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양시연은 차갑게 굴었는데 돌아왔을 때 그녀의 태도가 달라져 있어 그는 의아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순수하고 어리숙한 눈빛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연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 두 걸음 빠르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안았다.“어디 갔다 왔어?”양시연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임성원 씨가 말 안 했어요?”연정훈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물어봤는데 아주 단호하게 알 필요 없다고 하더라고.”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말도 안 돼요. 당신 부하가 감히 당신한테 그렇게 말해요?”“예전엔 내 부하였지. 지금은 당신 사람이 되었으니 나한테도 눈치 주는 게 당연한 거지.”연정훈은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고 양시연은 콧소리를 내며 식탁에 앉아 오렌지 하나를 들어 그의 손에 쥐여줬다.“빨리 까줘요. 우리 아가가 먹고 싶대요
이미 지난 지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아이까지 생겼는데 양시연은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그냥 오늘처럼 농담으로 꺼내는 경우는 있었다.두 사람은 한참 속닥거리며 대화를 주고받았고 이제 흥미를 잃은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와인잔을 내려두고 양시연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여기에도 사람이 꽤 많네요.”“다들 볼일이 있나 보지. 우린 숨만 돌리고 다시 올라가자.”양시연은 연정훈의 뒤를 따랐고 호기롭게 행사장을 나서는 연정훈을 보며 왠지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게 느껴졌다.“처음 만났을 땐 정훈 씨가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계속 무게만 잡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이 먹고 점점 더 유치해지는 것 같은데요.”연정훈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꽤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앞으로 나이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말자.”“뭐예요? 화났어요?”“그래.”양시연은 웃음이 터졌다.“언제 나이에 그렇게 신경을 썼다고 그래요?”연정훈은 몸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예쁜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말하면 완전 실례라는 거 알지?”양시연은 바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이젠 나이 얘기하면 서운할 나이가 됐다는 말이네요.”양시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정훈 씨 생일 지나면 서른 네살이네요.”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정훈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연정훈은 말문이 막혀버렸고 양시연을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양시연은 꾹 참던 웃음이 터졌고 연정훈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남자는 마흔이 넘으면 성숙한 와인이라는데 정훈 씨는 아직 한창 청춘이니까 벌써 속상해하지 마요.”연정훈은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고 양시연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양시연은 자연스레 연정훈의 품에 안겼다.“그러면 머리가 다 헝클어진다고요.”“내가 다시 빗겨줄게.”“됐거든요. 저번에 립스틱 발라준다고 했다가 끊어졌잖아요.”양시연은 입을 삐죽였으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연정훈의 품에 꼭
행사가 끝나고 애프터 파티가 시작되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샴페인을 연거푸 비우고 양시연은 몰래 내용물을 주스로 바꿨다. 그러나 연정훈은 여전히 와인으로 채웠다.양시연이 몰래 연정훈에 말했다.“연 대표님 오늘 기분이 꽤 좋은가 봐요?”그러자 연정훈이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왠지 오늘이 우리 결혼식보다 더 결혼식 같은 느낌이 들어.”양시연은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의 연정훈은 양시연에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았고 양시연은 결혼식 당일 양혁수의 일까지 알게 되었으니 오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응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연정훈이 그걸 지금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양시연은 주스를 한 모금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식 그날 나도 열심히 했잖아요.”연정훈이 이어 질문을 던졌다.“왼쪽 방향 가르마, 누구인지 알아?”양시연이 힐끔 보다가 대답했다.“정훈 씨 외숙부요.”연정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양시연은 자신이 없어졌다. 그날 결혼식에서 인사를 건넨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저기 파란색 넥타이를 매고 가르마를 한 사람이 외숙부야.”양시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을 살폈다.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양시연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아, 그쵸. 저는 정훈 씨가 저 사람 물어보는 줄 알고 답한 거예요. 같은 방향에 가르마 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정훈 씨 질문이 잘못됐네요.”연정훈이 차가운 시선으로 양시연을 바라봤다“사실 뻥이야. 첫 번째 그 사람 외숙부 맞아.”“...”양시연은 혀를 차며 몰래 연정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양시연의 손을 잡으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그러니까 결혼식 당일 넌 진심이 아니었던 거야. 내 외숙부가 어떻게 생긴 건지 아직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아니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데 정훈 씨가 장난한 거잖아요.”“네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면 내 꾀에 속았을까?”양시연
“그래서 결국 얼마나 있는지 알아냈어요?”그 뒤로 며칠 뒤,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반우희에게 물었다.반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라니까요.”“왜 그렇게 생각해요?”“변호사님은 그렇게 해서 제 관심을 끄려는 거예요. 돈으로 유인해서 옆에 묶어두려고!”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반우희는 자신이 아주 넘쳐 보였다.“실은 변호사님 저 엄청 좋아해요. 그래서 이렇게 머리 굴리는 거예요.”양시연은 엄지척을 하며 말했다.“그래요. 우희 씨 말이 맞아요. 승원 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그렇죠? 히히.”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벌써 코끝이 시려오는 겨울이 다가왔다. 그리고 양시연은 반우희에게서 좋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벌써 반우희도 결혼을 한다니. 넓은 사무실에 앉아 있던 양시연은 주변을 살펴보며 이 모든 게 정말 꿈만 같다고 생각했다.오늘 아침 기획팀에서 연말 행사 계획안을 반우희에게 제출했었다. 거액의 기획 금액 옆으로 반우희의 사인을 보며 반우희도 정말 많이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연정훈이 문자를 보내왔다.[신혼여행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했어?]양시연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애교를 가득 담아 답장했다.[이렇게 바쁜데 언제 여행을 간다고 그래요.][부승원 시켜.]양시연은 빵 하고 터졌다.‘역시 못 말린다니까.’양시연은 사실 몇 가지 여행지를 찾아두긴 했으나 자세한 일정표를 작성하지는 않았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 연정훈과 상의를 하고 결정할 생각이었다.행사는 설 연휴가 끝나고 바로 시작되었고 이건 양시연이 몸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복귀하는 행사였기에 모든 게 완벽하길 바랐다.연정훈은 미리 시간을 비워두어 양시연의 옆자리를 지켰다.넓고 화려한 강당에 수많은 사람이 자리를 채웠다.양시연은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갔고 빼곡하게 앉은 사람들을 쭉 훑다가 연정훈에게로 시선을 고정했
반우희는 한참 조잘거렸으나 부승원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부승원은 두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그러자 반우희는 서운한 듯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그때, 부승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하자.”반우희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결혼이요?”부승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박!’반우희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했고 그 모습을 보며 부승원은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그래서 반우희의 귓불을 매만지며 말했다.“나랑 사법 고시 넘기기로 약속한 거 기억해?”반우희는 입을 삐죽였다.“이번 해는 안 될 것 같은데요...”“다음 해는?”“다음 해는 꼭 넘을 게요!”“그래도 못 넘기면 어떻게 할 거야?”“그러면... 변호사님 닮은 아기 안 낳을 거예요.”“...”“어때요?”반우희는 부승원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깜빡였다.“이 정도 벌칙이면 되겠죠?”부승원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반우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그래. 뭐 심한 벌칙이긴 하네.”‘히히.’반우희는 바로 입꼬리를 올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퐁퐁 뛰었다.부승원은 반우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우희야.”부승원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반우희는 얌전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평소에 늘 성까지 붙여 반우희라고 깐깐하게 부르던 부승원이 다정하게 부른 게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그래서 앞으로 다가가 부승원의 이마를 매만지며 아픈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부승원의 이마가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부승원은 반우희의 손을 잡고 뜨거운 온도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사실 부승원은 늘 반우희 혼자 들떠 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심심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었다.반우희는 부승원이 과음을 한 탓이라 생각해 앞으로 다가가 빤히 쳐다봤다.“삼촌?”그 호칭에 부승원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리고 반우희를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부승원은 침을 꿀꺽 넘겼고 다시 두 눈을 뜨니 눈가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반우희는 표세연이 준비한 선물을 채애정에게 건넸다.마음속으로 감탄했다. 반우희는 겉으로 덜렁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꽤 분별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연씨 가문을 배경으로 삼을까 봐 걱정했던 것 같다. 들어올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가 준비한 선물만 건넸고 식사 후 모두가 흩어진 뒤에야 차분하게 표세연이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어머님, 이 선물은 저희 엄마께서 드리는 거예요.’채애정은 원래 기분이 좋았지만 선물을 받고 부승원이 결혼과 출산에 대해 언급한 것을 떠올리며 얼굴에 미소가 더욱 커졌다. 그녀는 반우희의 손을 잡고 문밖까지 배웅했다.그녀는 돌아와 선물을 열어 보았고 그 안에 담긴 것에 놀랐다.그것은 비취 구슬로 엮인 목걸이였으며 색상과 품질 모두 뛰어났다.그녀는 표세연과 오랜 인연이 있었지만 표세연이 이렇게 진심으로 반우희에게 대해줄 줄은 몰랐다. 첫 번째 만남인데도 이렇게 귀중한 선물을 주다니 진짜 딸이 있는 집안은 다르구나 싶었다.‘쯧.’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부승원은 반우희와 함께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고 전화를 받고 몇 번 응답했다.“주는 거면 그냥 받으세요. 그냥 며느리의 감사한 마음으로 생각하세요. 그 외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반우희는 말의 끝에 귀를 기울였다.부승원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리자 반우희가 살짝 웃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은근히 올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부승원은 술을 많이 마셔서 입에서 술 냄새가 섞인 숨이 나왔다. 반우희는 그의 얼굴에 살며시 얼굴을 비비며 다가갔다.부승원은 반우희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살짝 맞댔다.“오늘 저녁 맛있었어?”“맛있었어요. 당신 집에 요리사 정말 요리를 잘하시네요.”부승원은 그녀의 코끝에 입술을 가볍게 대며 말했다.“앞으로 여기서 살면 매일 너에게 요리해 줄 거야.”반우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험 삼아 말해 보았다.“왜 내가 그 집에
거실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반우희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지만 마침 부승원이 그녀의 옆에 나타났다.그녀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감싸며 뒤로 숨으려 했지만 한 아줌마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잘됐네요. 이렇게 되면 호칭 바꾸는 용돈 안 줘도 되고 돈 아끼는 셈이네요.”반우희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부형석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때 채애정이 다가왔다.부승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우희를 살짝 끌어냈다.“우리 엄마는 본 적 있잖아. 와서 인사해.”반우희는 순간 얼어붙었다.“...”입이 떨어지지 않다가도 결국 힘겹게 말을 꺼냈다.“...어머니, 안녕하세요.”부승희는 혀를 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왜 차별 대우하는 거예요? 우리 엄마 차례에서 용돈을 받을 생각이라도 했어요?”웃음이 터졌다.반우희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부승원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부승원이 그녀를 붙잡고는 부승희를 노려보았다.부승희는 사람들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끝났네요. 우리 오빠가 나한테 눈빛으로 압박을 주고 있어요.”다시 한번 웃음이 퍼졌다.부승원은 동생들의 농담을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승희야, 앞으로 조심해. 오빠는 이제 아내가 생겼으니까 아마 너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부승희는 한숨을 쉬며 익숙한 듯 말했다.“괜찮아요. 오빠는 여자친구가 없어도 저한테 신경 안 썼어요.”채애정은 부승희를 힐끔 보며 나직이 말했다.“너 오빠가 신경 안 쓴다고? 그런 말 하지 마.”부승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엄마, 오빠가 우희 씨한테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예전에 나한테 잘해줬다고 생각하긴 어려울걸요.”모두 자연스럽게 다시 부승원과 반우희에게 시선을 돌렸다.반우희는 부승원의 곁에 꼭 붙어 있었고 부승원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없이도 모든 걸 전하는 듯했다.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느끼며 움찔했지만 부승원이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말했다.“반우희는 아직 어리니까 다들 너무 괴롭히지
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손을 자신이 가슴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사기 친 거 아니에요. 부승원 씨가 나한테 뽀뽀하면 심장이 쿵쾅거려서 긴장한 나머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거든요. 이게 바로 ‘독을 독으로 다스린다’는 거죠. 이해되죠?”부승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럼 내가 너에게 뽀뽀하면 네가 긴장한다면서 왜 딸꾹질은 안 해?”“몰라요. 아마 이게 전설 속의 신체 본능인가 봐요. 내 딸꾹질마저도 오빠를 좋아하나 봐요.”부승원은 어이없었다.“...”그는 입꼬리를 억지로 눌러 내리며 그녀를 평가했다.“거짓말을 참 잘 꾸며내는군.”“에휴. 결국 안 해 주겠다는 거네요.”반우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내 심장은 계속 날뛰게 놔두셔야죠. 당신 집에 도착하면 언제 딸꾹질이 터질지 몰라요. 창피당하는 건 감수해야죠. 어차피 부승원 씨가 내 곁에 있으면 어떤 고생이든 할 수 있어요.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시를 읊조리듯 감상에 젖었다.그러더니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던 찰나 눈앞의 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응?’반우희는 1초 만에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얼른 다가가 자기 입술을 가리켰다.“여기.”부승원은 눈가에 웃음을 머금으면서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반우희를 가까이 끌어당기며 손으로 그녀의 귀를 가볍게 잡아당겼다.“‘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못 들어봤어?”반우희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난 기회를 잡았을 때 밀어붙여야 한다는 말만 배웠어요.”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어휴. 참 똑똑하긴 하지.’마침 그때 근처에 한 대의 차가 멈춰 섰다.반우희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있는데 부승원이 그녀의 귀를 한 번 더 꼬집으며 말했다.“나의 할아버지예요.”‘네?’반우희는 순간 자세를 바로잡고 마치 사열을 받는 군인처럼 반듯이 섰다.부승원은 그런 그녀
“대략 몇 명 정도 와요?”“많지 않아.”“...”“오십에서 육십 명 정도?”반우희는 놀랐다.‘...?’‘오십에서 육십 명이면 거의 결혼식 아니야?’반우희는 애써 이건 별일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반우희는 큰 장면을 못 본 것도 아니고 경기도 내 저명한 가문들도 여러 번 드나들었는데 심지어 연정훈도 오빠라고 부를 정도다.‘괜찮아 사소한 일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녀는 결국 불면증에 시달렸다.‘아.’반우희는 양시연을 찾아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시부모님을 뵐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물었다.양시연은 잠시 기억을 되새겼다. 그 당시 그녀가 처음 표세연을 만났을 때 표세연은 그녀에게 나가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 뒤 그녀가 다시 돌아와 표세연을 만났을 때 표세연은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이런 경험은 공유하기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결혼식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만났었고 심지어 연정훈의 외가 쪽과도 몇 번밖에 마주하지 않았다.하지만 독특한 민씨 가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녀에게 꽤 친절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걱정 마요. 아무도 우희 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다들 우희 씨한테 잘해줄걸요?”“왜요?”“부승원 씨가 우희 씨를 좋아하니까요.”양시연은 핵심을 짚었다.시부모 문제도 두 집안 간의 문제도 결국 부부 문제로 귀결되며 대부분의 갈등은 내부에서 비롯된다.반우희는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 말이 꽤 일리 있다고 느꼈고 그리고는 히히 웃으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맞아. 부승원 씨가 나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자자.’반우희가 부씨 가문에서 식사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표세연은 미리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건조하게 성사된 의형제 관계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반우희는 점점 표세연의 마음에 들었다.아침이 되자 승주는 일찍 일어나 희주와 동준을 끌고 와 반우희가 옷을 고르는 걸 지켜봤다.부승원이 도착했
부승희는 사업 이야기를 하러 부승원을 찾았고 대화가 끝난 뒤 자연스럽게 함께 저녁을 먹었다.반우희는 대화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지 않았다.“승희 씨, 전주에 가서 돼지를 키우게 되는 거예요?”부승희는 반우희의 말을 정정했다.“축산업 회사를 설립하는 거예요.”“어떤 가축을 기르려고요?”“돼지.”“그럼 결국 승희 씨가 돼지를 기르는 거네요?”부승희는 어이없었다.“...”반우희의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다른 것도 키워요.”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네...”반우희는 생각에 잠겼다.부승희는 장난기 가득한 성격이지만 돈 버는 일에는 진지했으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창업을 시도해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부승원은 부승희가 가져온 사업 계획서를 신중하게 검토한 후 말했다.“지금 네 자본 규모가 너무 작아.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좀 투자할 수는 있지만 정식으로 투자를 받는 건 어려울 것 같아.”“얼마나 투자할 수 있어?”“600억에서 천억 정도. 시험 삼아 해보자.”“그럼 충분하네. 이전에 투자한 것까지 합치면 6천억 정도 되겠어.”반우희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실례지만 '억'이라는 단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부승희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어쨌든 '만'은 아니겠죠.”반우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세상에 그러니까 억이라는 거야?’반우희는 자신이 꽤 부자라고 생각했지만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재벌가의 창업은 억 단위로 시작하는 건가?’부승희는 부승원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사이 반우희는 침묵 속에서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손을 들었다.부승희와 부승원은 반우희를 바라보았고 반우희는 히히 웃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저기 혹시 나도 같이할 수 있을까요?”부승원은 놀랐다.부승희는 재미있어하며 반우희를 놀렸다.“우희 씨는 얼마나 투자할 거예요?”반우희는 손가락 하나를 펴며 그들의 말투를 따라 했다.“200억 정도 어때요?”부승희는 반우희를 보며 웃었다.“우희 씨 현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