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빠르게 거울 앞을 지나 옷을 벗고는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다 씻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안에는 남성 가운 하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을 떠올렸는데 그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는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연정훈을 불러보았다.“연 교수님?”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빠르게 나가 데스크에 전화해 옷을 부탁하려고 했다.침대에 앉아 이제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정이슬이 그녀에게 보내준 스크린샷이었다.“시연아, 무슨 일이야? 전민준에게 부탁하러 간 거 아니었어? 왜 싸우게 된 거야? 그 새끼가 단톡방에서 너 꽃뱀이라며 욕하고 있어.”안시연이 단톡방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정이슬의 말대로 전민준은 그녀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거짓말에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도 건넸다.[걸레 같은 년은 나도 싫어. 그 와중에 보답 없이 부탁하는 것 좀 봐. 퉤!]안시연은 이 보름 동안 불행의 시간을 보냈다.그녀에게 도움을 베푼 사람이 있기는커녕 지금 단톡방에서 또 이런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녀는 분노가 끓어올랐고, 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코끝이 찡했다.“옷은 이따가 누가 가져다줄 거야.”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제야 연정훈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뭐야? 왜 소리를 안 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느긋하게 말했다.“난 대답했는데 당신이 못 들은 거야.”그 말인즉 자기 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발목에서 고통이 몰려와 그녀는 작은 신음을 뱉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게 되었다.연정훈
안시연이 얼어붙었다.잠깐 생각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어제는 그녀의 첫날밤이었고 연정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그의 뜻은 전에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안시연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는데 그녀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와 잠자리를 가져본 사람은 연정훈밖에 없었다.주지혁이 바람피우기 전 두 사람의 스킨십은 포옹과 키스에 그쳤고, 잠자리는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는 경험도 없어 이런 얘기가 꺼내질 때마다 어색한 마음이 들곤 했다.연정훈이 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습관 되지 않아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사실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맑은 눈을 가진 그녀였기 때문이다.“넌 참 착한 여자야.”연정훈이 덤덤하게 뱉은 말에 안시연은 입술을 꽉 물었다.방금까지 단톡방에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받은 불공평한 대우까지 떠오르니 그의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분명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녀를 비난하곤 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말을 뱉고는 약을 다 바른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안시연이 서둘러 몸을 뒤로 뺐는데 허벅지 사이로 약간의 고통이 전해졌다.어젯밤의 부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연정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리를 모을 때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포착했다.“다리에도 상처가 있어?”그 얘기를 듣자, 안시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그녀의 눈가, 그리고 코끝이 빨개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마치 비바람 속에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 같았다.연정훈이 한 발짝 다가서자, 안시연은 몸을 더 뒤로 뺐다.“안시연.”연정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뒤에 있는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연정
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에는 잿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다음 날 다시 출근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졸업하자마자 주지혁의 회사에 입사했던 안시연은 주지혁이 정한 ‘사내 연애 금지' 규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지혁의 제안대로 비밀 연애를 승낙했다. 하지만 안시연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재무팀 주임 자리를 꿰찼다.다시 회사에 돌아왔더니, 주지혁이 일부러 그녀를 재무팀 주임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재무팀 보조직으로 발령 냈다.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은 모두 그녀가 주지혁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주지혁이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고 몰래 트집을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사흘이 지나자, 안시연은 이미 피곤함에 찌들대로 찌들었다.업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힐끔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다름 아닌 조이현이 회사로 방문한 것이었다.안시연은 기회를 노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저기요, 이리 좀 와보실래요?”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안시연은 밖에 있던 주지혁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네, 조이현 씨.”그러자 조이현이 다짜고짜 물었다.“혹시 그쪽이 안시연 씨인가요?”“네, 그렇습니다.”조이현은 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짐 챙겨서 나오세요. 주 대표님과 저를 따라 외근 좀 다녀오셔야겠어요.”말을 마친 조이현은 안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각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클라이언트와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선 주지혁은 안시연이 조이현을 따라 나
소현주는 이곳에 갇힌 채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병은 반은 실제였고 반은 그녀가 만들어 낸 망상이었으며 때때로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누군가 그녀에게 연정훈과 양시연이 결혼했다는 말을 전한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그것이 소현주의 악몽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일지도 몰랐다.양시연의 얼굴이 몇 년 전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그녀의 또렷이 커진 배를 보자 소현주는 온몸을 떨며 그 아이가 분명히 연정훈의 아이일 것이라고 확신했다.‘나는 이렇게 초라한 몰골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데 연정훈은 밖에서 양시연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며 아이까지 가졌구나.’잠시 침묵하던 소현주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달려들며 그녀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소현주를 제압하며 쉽게 저지했다.“당신이 감히 여길 어딜 들어와요? 감히 여길 오다니. 죽여버릴 거예요.”양시연은 허리를 짚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아 경호원들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눈짓한 후 담담히 말했다.“내가 누군지 기억하는군요. 지난 몇 년 동안 저를 꽤 미워하셨나 보네요.”소현주는 독이 서린 눈빛으로 양시연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독사가 먹잇감을 노리는 것처럼 서늘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소현주 씨가 이렇게까지 몰락한 게 전부 제 탓이라고 하시려는 건가요?”“당연히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만 없었더라면 연정훈이 나를 이렇게 버리지는 않았을 거예요.”‘역시 현실을 부정하며 여전히 환상 속에서 살고 있군.’“제가 없었다고 해도 소현주 씨가 연정훈 씨에게 숨겼던 진실이 영원히 묻힐 거로 생각하셨나요?”양시연의 말에 소현주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굳어졌다.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높였다.“내가 뭘 숨겼다는 거예요? 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어요. 연정훈이 마음을 바꾼 건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그 말을 하면서 소현주는 마치 자신이 말한 것을 믿는 듯했다. 소현주의 눈에 핏
양시연은 퇴근 전에 부승원과 몇 가지 업무를 논의하려고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불은 켜져 있었는데.’양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반우희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어렴풋이 짐작했다.‘하. 됐어. 내일 다시 얘기하자.’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한 후 연정훈이 아직 업무를 끝내지 못한 것을 알았고 그녀는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휴게실의 바닥에는 남녀의 옷들이 애매하게 흩어져 있었다.반우희는 커다란 눈을 뜨고 가쁜 숨을 내쉬며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없는지 귀를 기울였다. 이내 조용함을 확인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개를 돌리자 부승원의 단단한 몸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부승원의 어깨와 가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열기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서로의 체온이 그대로 전달되었다.반우희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숨을 고르고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았다. 부승원은 그녀를 살짝 제지하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적당히 해.”반우희는 몸에 퍼지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맞은 부위의 얼얼함을 느끼며 얼굴이 붉어진 채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부승원은 숨을 고르고 반우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너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네?”그는 그녀의 얼굴을 장난스럽게 꼬집자 반우희는 입을 삐쭉 내밀며 그의 허리를 살며시 끌어안고 나지막이 불평했다.부승원은 그녀의 작은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으며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을 억누르고는 이불을 살며시 끌어 올려 반우희의 몸을 감쌌다. 그는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휴게실에서는 준비가 안 돼 있어.”반우희는 자신이 준비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또 한 번 가볍게 맞았다.“부끄러워할 줄 모르네.”‘바보.’휴게실 안에서 반우희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살짝 내밀며 침묵했다.‘부끄럽지 않다니. 당신은 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반우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드러운 입술이 다
‘응?’반우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제야 깨달았다.“당신 장서진 말하는 거예요?”부승원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반우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매장에 손님이 많지 않아서 그냥 장서진에게 매출 좀 올려준 것뿐이에요.”“돈 많네.”“제가요? 전 돈 없어요.”반우희는 팔짱을 끼고 부승원의 품에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장서진 아니었으면 돈 쓰지도 않았을 거예요.”반우희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부승원은 더 이상 말없이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렇구나 너 참 의리 있네.”반우희는 고개를 힘껏 끄덕인 후 부승원에게 입을 맞추려 했지만 그는 일부러 고개를 들어 피했다.‘응? 왜 그래?’반우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보였다.그녀는 부승원과 눈을 마주쳤고 그는 차갑고 깊은 눈빛으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반우희는 가끔 생각이 빠르게 전개되곤 했는데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부승원의 목을 감싸며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당신 질투하는 거예요?”부승원은 침묵했다.“...”“착각이야.”‘히히. 맞았구나. 질투하는 거야.’그녀는 기쁨에 차서 계속 부승원의 몸에 밀착하며 연속으로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당신과 연 대표님처럼 장서진과 나는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장서진에게는 아무 감정도 없어요.”부승원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반우희가 그를 가로막으며 빠르게 덧붙였다.“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만 좋아해요. 그러니 질투하지 마요.”부승원은 아무 말 없이 반우희를 바라보았다.“...”감정이 조금 가라앉았고 부승원은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기분이 좋았고 감동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반우희는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입술을 깨물었고 그의 귀를 살짝 잡고 조용히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작은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는데 가질래요?”부승원은 얼굴을 돌리며 거의 참지 못할 표정을 빠르게 조정한 후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
부승원은 외투를 벗고 단단히 묶인 넥타이를 풀며 깊은 눈길로 반우희를 바라보았다.“몇 문제나 풀었어?”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세 문제요.”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여 소매 단추를 풀고 침대 머리맡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반우희는 그가 또 자신에게 비효율적이라며 잔소리를 할까 봐 재빨리 변명했다.“나 샤워했어요. 안 그랬으면 벌써 다 풀었죠.”‘허세가 장난 아니구나.’사실 샤워를 하지 않았어도 반우희는 느긋하게 꾸물거렸을 게 뻔했다.부승원은 그녀의 의도를 꿰뚫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세수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워 잠시 쉬었다.반우희는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 장난기 어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조심스럽게 그의 침대로 올라탔다.부승원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녀의 차가운 종아리가 자기 다리에 닿는 순간 그녀가 그의 셔츠 하나만 걸친 걸 떠올렸고 분명 이번에도 장난을 칠 거로 생각했다.점점 대담해지는 그녀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그는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려 반우희를 외면했다.반우희는 몸을 일으켜 얼굴을 들이밀며 장난스럽게 다가왔고 부승원은 비록 그녀를 보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연정훈의 휴게실에 샤워하러 오며 개인 세면용품까지 챙겨 와 자신의 의도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는 태도를 드러냈다.‘정말 어리석군.’부승원은 목이 약간 메면서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이내 숨을 고르고 반우희의 작은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조용히 가서 네 숙제나 해.”반우희는 이를 악물며 불평을 흘렸다.“흥. 안 할래요.”이내 부승원의 곁에 바짝 다가가 그를 꽉 안았다.“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부승원은 속으로 흐뭇하면서도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이 가시지 않아 기분이 상했고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것을 꾹 참았다.하지만 예
이메일에서 큰 비밀을 발견한 양시연은 마음의 고통이 반쯤 가시고 일하는 데도 한결 힘이 났다.부승원과 함께 일한 지 꽤 되었지만 그는 드물게 양시연에게 대표다운 면모가 보인다고 긍정적인 평가했다.양시연은 내심 콧방귀를 뀌며 웃음을 지었다.“방금 반우희 씨가 커피를 잔뜩 사서 들고 올라오는 걸 봤어요. 꽤 통 크네요.”양시연의 말을 듣고 부승원은 잠시 멈칫했다.‘반우희가 접대?’“다른 사람 심부름으로 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일부러 신비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아니요. 반우희 씨가 사비로 산 거예요.”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양시연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부승원을 바라보았고 그는 그녀를 한번 훑어보았다.‘할 말 있으면 말해.’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속삭였다.“반우희 씨가 자기 친구를 아래층 커피숍에 소개해 줬거든요. 그 커피숍 직원들은 커피를 많이 팔면 보너스를 받는다고 하더라고요.”부승원은 곧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반우희는 친구에게 고객을 끌어준 셈이었다.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다가 문득 양시연의 눈빛을 보고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반우희 씨가 소개한 친구 장서진 씨라는 남자 맞죠?”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고 양시연은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정답이에요.’부승원은 얼굴에 아무런 변화 없이 고개를 숙여 서류를 계속 보았고 양시연은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마음속으로 비웃었다.저녁 해가 지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그때 연정훈에게서 저녁에 술자리가 있어 양시연을 데리러 갈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양시연은 정리가 안 된 일정이 있었고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저도 야근이에요.]연정훈은 양시연의 화가 다 풀렸는지 확신하지 못한 듯 드물게 머리를 쓰담하는 귀여운 캐릭터 이모티콘을 보냈는데 그 대상은 배가 볼록 나온 임산부였다.“바보 같으니.”양시연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작게 중얼거린 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한편 밖에서는 반우
‘한 통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통 세 통은 뭐지?'양시연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한 채로 연정훈과 소현주의 다른 이메일들을 열었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그중 절반이 그녀가 익숙한 주제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숨을 참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N.S와의 통신을 열어 하나씩 비교하기 시작했고 주제부터 내용까지 높은 중복도를 발견했다.‘뭐지?’양시연은 화면 앞에서 멍하니 멈춰 서 있었는데 갑자기 시선이 N.S라는 두 글자에 떨어졌다.옛날에 양민아가 소현주의 영어 이름은 Nancy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Nancy.Su! 내가 예전에 통신한 사람은 소현주 씨였다는 말인가?’‘이건 말도 안 돼. 너무 황당하잖아.’양시연은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과거에 보냈던 첫 번째 이메일과 연정훈과 소현주가 주고받은 첫 번째 이메일을 찾아봤다. 모두 일치했다.‘온라인 연애? 하. 헛소리.’양시연은 충격을 받았고 곧 분노로 바뀌었다.결국 소현주는 그녀와 연정훈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역할이었고 연정훈과 소현주의 인연은 그녀가 맺어준 셈이었다.양시연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고 일어섰다가 책상 앞에서 걸어 다녔다.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우연인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현주가 양시연의 메일을 통해 연정훈에게 답장을 보냈고 연정훈과 대화를 나눈 후 연애를 하고 다시 한 바퀴 돌아서 결국 연정훈과 다시 만났다.‘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양시연은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다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남은 이메일들을 하나씩 열어봤고 한 통씩 읽을 때마다 답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니 점심시간이 지나버렸고 휴게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 본능적으로 화면을 닫았다.연정훈은 잠을 자고 나서 훨씬 상쾌해 보였다.양시연은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그녀는 소현주와의 ‘온라인 연애’에 질투를 느꼈지만 결국 그와 통신한 건 바로 자
연정훈이 말했다.“인생이 단지 첫 만남 같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소현주의 이미지는 나중에 무너졌어. 처음 편지를 주고받았던 정 때문에 계속 신경을 썼던 것 같아. 게다가 처음엔 소현주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었잖아.”양시연은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러면 결국 정말 온라인 연애를 한 거네요.”연정훈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변질된 일로 질투하지 마. 당신이 찝찝하지 않아도 내가 더 찝찝해.”연정훈이 말했다.“내가 질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너는 절대 잘못이 없어.”그는 마치 부드러운 솜처럼 아무리 세게 때려도 무슨 소용인가 싶을 만큼 무력하게 반응했다.양시연은 아무리 화가 나도 결국 그에게 화풀이하고 싶지 않았다.사건은 임성원에게 맡기고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연정훈이 양시연의 마음을 달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아침이 되자 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고 거울 속 부은 눈을 보며 어제 그렇게 감정에 휩쓸린 걸 후회했다.연정훈은 그녀에게 더 쉬라고 했지만 양시연은 일이 없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할 것 같다며 출근하기로 했다.아침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정인으로 데려다주었고 점심시간이 되자 다시 그녀를 보러 왔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바쁜 걸 알기에 말했다.“나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 하루에 몇 번씩 오지 않아도 돼요.”연정훈은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와서 네가 괜찮은 걸 확인해야 오후에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어.”양시연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함께 점심을 먹은 뒤 양시연은 연정훈을 휴게실로 데려가 잠시 눈을 붙이게 했다.연정훈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양시연은 잠이 오지 않아 허리를 매만지며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일에 몰두하면 잡생각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고요가 찾아오자 다시 사소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맞은편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양시연은 문득 연정훈이 예전에 자신에게 이
방 안 분위기가 차츰 진정되었고 양시연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눈을 감고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 곁을 지키며 조용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양시연은 눈을 뜨며 옅은 창백함이 감도는 얼굴로 말했다.“배가 두 번 정도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어요. 아기한테 영향이 간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양시연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고 연정훈은 지금 그녀의 상태를 우선시했다. 집에 손님들이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의사를 불렀다.의사가 도착하자 부승희와 몇몇 손님들도 양시연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다행히도 의사는 금방 진찰을 마쳤고 임신부의 정서적 동요로 인해 불편함이 생긴 것이며 아기에게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이 말을 들은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늦게 나타난 반우희는 세 아이를 데리고 양시연을 찾아왔다.희주는 맨 뒤에 서서 망설였지만 양시연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그 사진들은 합성된 거야. 언니가 이미 확인했으니까 걱정하지 마.”그 말을 듣고 나서야 희주는 안도하며 어른인 척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내가 뭐랬어요? 형부는 드라마 속 나쁜 남편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요.”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언니한테 보여주지 말 걸 그랬어요.”양시연은 그들이 비록 어리지만 분명히 고민한 끝에 그녀와 더 가까운 관계인 자신이 속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생각했다.그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 양시연은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의사의 말로 모두가 안심했지만 양시연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손님들은 차례로 자리를 떠났다.저택은 다시 고요해졌고 가정부들은 조용히 집 안을 정리했다.밤이 되자 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정훈이 음식을 들고 와 몇 입이라도 먹으라며 권했지만 양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마음이 상해서 먹고 싶지 않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히고 침대 헤드에 기대도록 했다.“좋은 엄마가 되고 싶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랫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앞뒤로 위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며 속으로 추측을 시작했다.“싸운 걸까요?”거실의 분위기는 점점 냉랭해졌다.그 옆에서 세 명의 어린아이도 조용하게 있었다. 동준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순수한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승주와 희주는 상황을 감지한 듯 말수가 줄고 표정이 어두워졌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으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용히 자기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위층에서 양시연과 연정훈은 비록 서로 소리 내어 다투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양시연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사진을 보낸 사람이 마치 과거에 양민아가 연정훈에게 자신과 양혁수의 에든베타 영상을 보낸 것처럼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전 연인의 친밀한 사진을 보고 차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소현주를 극도로 싫어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신경 쓰는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소현주와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거짓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양시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를 등진 채 말없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고 감정이 격해져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이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소현주가 연정훈과 친밀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위산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결국 양시연은 급히 일어나 욕실로 향했고 연정훈은 그녀를 따라갔다.그녀가 토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의 마음은 무너지는 듯 아팠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