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검은색 벤틀리 뒷좌석에서.차 안의 어두운 불빛 때문에 남자의 허리춤을 휘감고 있는 여자의 희고 부드러운 다리가 어렴풋이 보였다.간지럽고 야릇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안시연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튕기면서 눈앞의 사람이 빨리 끝내길 바랐다.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읍!”안시연이 고통의 신음을 내뱉었고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몸짓을 멈추었다.“처음이야?”안시연은 몸을 불태우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잇따라 허전한 기분이 들더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더 단단히 감아 들었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연정훈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그는 여자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긴장 풀어.”차 안의 온도가 급상승했다.정신은 흐릿했지만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했다.안시연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더니 어금니를 깨물고는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았다.그녀는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만 했다.두 달 전, 그녀는 주지혁의 팔짱을 끼고 성진대학교 동문 모임에 참석했었다. 연정훈은 성진대학교의 우수 졸업자 겸 학부 특임 교수로서 그 동문 모임에 참석했는데 두 사람에게 선남선녀라며 칭찬했던 적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주지혁은 바람을 피워 곧 명문 가문 아가씨와 결혼한다.그리고 그녀는 연정훈의 아래에 누워 그가 순결을 앗아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경인시에서의 연씨 가문은 권력이 대단했다.연정훈은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갑자기 교수직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정인 그룹을 맡았다.그리고 지금의 그는 경인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사람들 앞에서는 번듯해 보이더니 이런 일을 할 때는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안시연을 사정없이 괴롭혔다.안시연은 하마터면 그의 차에서 숨이 멎을 뻔해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일이 끝난 후, 그녀는 옷을 꼭 껴안고는 힘이 풀린 채
안시연은 경찰서에 세 시간의 취조를 받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는데, 이때 주지혁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다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지혁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요. 굳이 내 인생을 망칠 생각인가요?”그 8억은 분명 그가 그녀에게 직접 전화해 빼내라고 한 것이다.주지혁은 그녀의 분노를 예상했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시연 씨,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안 되었어요.”“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안 꺼내면 당신이 어떻게 조이현 씨를 안을 수 있겠어요?”안시연이 비꼬며 말했다.주지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이 뻔뻔스럽게 말했다.“나 다음 달에 이현이와 약혼해요. 하지만 난 이현이를 사랑하지 않아요. 시연 씨, 3년만 기다려요. 3년 뒤면 내가 이혼하고 꼭 시연 씨와 결혼할게요.”안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럼 3년 동안 나는 어떡하라고요.”“외국으로 유학 보내줄게요.”뻔뻔스럽네!명문 가문 출신인 조이현과 결혼은 해야겠고, 또 그 돈으로 안시연을 ‘내연녀’로 만들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염치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안시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지만 난 이미 다른 남자와 잤어요.”주지혁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농담은 하지 마요. 나 화나게 만들면 시연 씨에게 좋을 것 없어요.”안시연이 심호흡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나 찾으러 와요. 내가 시연 씨 외국 보내줄게요.”“꿈 깨요!”주지혁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시연 씨, 만약 내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시연 씨는 돈의 행방을 모두 찾아내는 것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8억이면 시연 씨 감옥에서 10년 갇히고도 더 남아요. 시연 씨가 감옥에 들어가면 누가 외할머니를 돌보겠어요?”안시연에게 힘이 남아돌았다면 진작 그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다.‘내가 정말
안시연은 그제야 연정훈 눈빛의 의미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그녀는 빠르게 거울 앞을 지나 옷을 벗고는 욕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다 씻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욕실 안에는 남성 가운 하나밖에 없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을 떠올렸는데 그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는 가운을 입고 문을 열고는 조심스럽게 연정훈을 불러보았다.“연 교수님?”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빠르게 나가 데스크에 전화해 옷을 부탁하려고 했다.침대에 앉아 이제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정이슬이 그녀에게 보내준 스크린샷이었다.“시연아, 무슨 일이야? 전민준에게 부탁하러 간 거 아니었어? 왜 싸우게 된 거야? 그 새끼가 단톡방에서 너 꽃뱀이라며 욕하고 있어.”안시연이 단톡방을 확인하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정이슬의 말대로 전민준은 그녀에게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거짓말에 사람들은 그에게 위로도 건넸다.[걸레 같은 년은 나도 싫어. 그 와중에 보답 없이 부탁하는 것 좀 봐. 퉤!]안시연은 이 보름 동안 불행의 시간을 보냈다.그녀에게 도움을 베푼 사람이 있기는커녕 지금 단톡방에서 또 이런 비난을 받고 있으니, 그녀는 분노가 끓어올랐고, 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 코끝이 찡했다.“옷은 이따가 누가 가져다줄 거야.”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제야 연정훈이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다는 걸 발견했다.‘뭐야? 왜 소리를 안 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연정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느긋하게 말했다.“난 대답했는데 당신이 못 들은 거야.”그 말인즉 자기 탓이 아니라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발목에서 고통이 몰려와 그녀는 작은 신음을 뱉고 다시 침대에 주저앉게 되었다.연정훈
안시연이 얼어붙었다.잠깐 생각하고서야 그의 뜻을 알아챘다.어제는 그녀의 첫날밤이었고 연정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러니 그의 뜻은 전에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는지 물어보는 것이었다.안시연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는데 그녀는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와 잠자리를 가져본 사람은 연정훈밖에 없었다.주지혁이 바람피우기 전 두 사람의 스킨십은 포옹과 키스에 그쳤고, 잠자리는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그녀는 경험도 없어 이런 얘기가 꺼내질 때마다 어색한 마음이 들곤 했다.연정훈이 또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녀는 겨우 대답했다.“습관 되지 않아서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사실이었다.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맑은 눈을 가진 그녀였기 때문이다.“넌 참 착한 여자야.”연정훈이 덤덤하게 뱉은 말에 안시연은 입술을 꽉 물었다.방금까지 단톡방에서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받은 불공평한 대우까지 떠오르니 그의 말에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분명 그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녀를 비난하곤 했다.연정훈이 무심하게 말을 뱉고는 약을 다 바른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안시연이 서둘러 몸을 뒤로 뺐는데 허벅지 사이로 약간의 고통이 전해졌다.어젯밤의 부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연정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리를 모을 때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포착했다.“다리에도 상처가 있어?”그 얘기를 듣자, 안시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니요.”그녀의 눈가, 그리고 코끝이 빨개졌다.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마치 비바람 속에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 같았다.연정훈이 한 발짝 다가서자, 안시연은 몸을 더 뒤로 뺐다.“안시연.”연정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뒤에 있는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연정
안시연은 테이블 위에 누워있었는데 마침 주인을 기다리는 정교한 선물 같았다.연정훈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는 달콤한 입술을 맛보면서 다른 한 손으로 여자가 입고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가는 허리에 달라붙어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사실 아까 병풍을 사이 두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부터 그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탐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안시연은 전민준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연정훈은 목덜미를 물어뜯자, 안시연은 온몸에 전율이 퍼지는 것 같았다.점점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와 손길,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클을 푸는 남자를 보며 안시연은 얼굴이 빨개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어두운 불빛 아래 뭔가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젖은 눈을 크게 뜨고는 빛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의 형체를 똑똑히 보려고 했다.연정훈 손에 낀 반지였다.그것도 약지에 끼어 있었다.순간 뜨겁게 달아오르던 안시연의 몸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대충 세어보니 연정훈도 거의 서른 되는 나이였다.명문 가문의 후계자라면 이 나이에 진작 결혼했을 텐데 말이다.“집중해.”남자는 여자의 귓불을 깨물며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다리를 꽉 잡아 벌리려고 하자 안시연이 갑자기 몸을 뒤로 빼며 남자를 밀어냈다.“안 돼요!”연정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욕망으로 타올랐다.그는 안시연이 그에게 도움을 부탁할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이 조건을 내세울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그는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물론 상처 난 부위를 피해 잡았다.그리고 그녀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힘으로 제압했다.안시연이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그의 입술을 피했다.연정훈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숨을 헐떡이고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왜 그래?”“결혼하셨잖아요!”안시연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지혁이 바람피워서 마음고생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연녀’라는 존재를 싫어했다. 그래서 절대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 생
호텔 로비에서.연정훈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샤워를 마쳤고 다른 양복으로 갈아입은 후였다.김세연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임유정이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잡지 속의 주얼리를 가리키며 김세연과 얘기를 나눴다.연정훈이 걸어오자, 임유정은 바로 그를 발견했다.“정훈 씨.”그 말에 김세연도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로 샤워한 사실을 알아차렸다.하지만 아들이 체면도 지켜줘야 했으니, 김세연은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왜 이제야 내려와? 나랑 유정이가 너 거의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연정훈이 덤덤한 얼굴로 소파 위에 앉고는 말했다.“데스크에서 약혼녀가 왔다고 하던데요. 약혼녀와의 첫 만남이니까 제대로 꾸미고 내려와야죠.”김세연이 의아한 얼굴을 보이고는 임유정에게 고개를 돌려다.임유정의 얼굴에 홍조가 띠더니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약혼녀? 데스크가 그래?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김세연은 그녀의 연기를 간파하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연정훈을 보며 말했다.“데스크에서도 너랑 유정이가 선남선녀로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이런데도 기회 안 잡고 뭐 해?”임유정의 얼굴이 더 빨개지더니 그녀는 김세연의 팔을 끌어안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님.”김세연이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연정훈을 흘겨봤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았는데도 임유정이 연기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그는 김세연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너 집에 안 들어온 지 몇 달이나 됐잖아. 전화해도 계속 건성건성 대답하고. 유정이랑 밥 먹다가 네가 이곳에 묵고 있다는 걸 알았어. 아니면 엄마가 아들 얼굴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즘 바빠서요.”“핑계는.”김세연은 아들 얼굴 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임유정을 보며 말했다.“오늘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어. 대신 네 엄마에게 안부도 물어
안시연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주지혁에게 준 집 열쇠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탁’ 소리와 함께 불이 켜졌다.멀지 않은 곳에 양복과 구두로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주지혁이었다.남자는 천생 배우라더니 주지혁도 다를 것 없었다.잘생긴 그는 평소 안시연에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지금 음침한 얼굴빛을 드러내 안시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안시연이 그를 쫓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전민준 만나러 갔어요?”그는 분명 단톡방 내용을 봤을 것이다.안시연이 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와 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누굴 만나든 당신과 상관없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나가죠? 열쇠는 여기 두고요.”불같이 화를 내는 안시연을 보더니 주지혁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자기에게도 이렇게 모질게 구는데 전민준 같은 인간에게 자존심을 굽혔을 리가 있을까?“시연 씨 일이니까 당연히 신경 써야죠.”안시연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주지혁이 한발 앞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 한쪽을 버리고는 여세를 몰아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이거 놔요!”안시연이 소리를 질렀다.주지혁은 강세로 그녀를 밀어붙이며 소파에 눕혔다.“출국하는 거, 고민해 봤어요?”안시연이 발버둥 치더니 분노의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요!”주지혁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는데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빨갛게 물든 그녀의 입술을 발견해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다른 사람과 키스했어요?”안시연이 멈칫했다.곧이어 복수했다는 쾌감이 들어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네, 키스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리도 가졌죠.”주지혁은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하지만 고집스러운 안시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설득했다.‘나의 시연 씨는 절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어.’자신의 추측에 힘을 실으려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시연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안시연은
안시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얼굴에는 잿빛이 감돌았다. 그렇게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후, 다음 날 다시 출근했다. 더 이상의 선택지가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수술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졸업하자마자 주지혁의 회사에 입사했던 안시연은 주지혁이 정한 ‘사내 연애 금지' 규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주지혁의 제안대로 비밀 연애를 승낙했다. 하지만 안시연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 재무팀 주임 자리를 꿰찼다.다시 회사에 돌아왔더니, 주지혁이 일부러 그녀를 재무팀 주임 자리에서 끌어내렸고 재무팀 보조직으로 발령 냈다.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료들은 모두 그녀가 주지혁에게 미움을 샀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 때문에 주지혁이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고 몰래 트집을 잡아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사흘이 지나자, 안시연은 이미 피곤함에 찌들대로 찌들었다.업무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한숨 돌리려던 때, 사무실 입구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힐끔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다름 아닌 조이현이 회사로 방문한 것이었다.안시연은 기회를 노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저기요, 이리 좀 와보실래요?”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안시연은 밖에 있던 주지혁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감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네, 조이현 씨.”그러자 조이현이 다짜고짜 물었다.“혹시 그쪽이 안시연 씨인가요?”“네, 그렇습니다.”조이현은 안시연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짐 챙겨서 나오세요. 주 대표님과 저를 따라 외근 좀 다녀오셔야겠어요.”말을 마친 조이현은 안시연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같은 사무실 동료들은 각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안시연은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갔다.클라이언트와 통화를 마치고 뒤돌아선 주지혁은 안시연이 조이현을 따라 나
반우희는 열심히 문제를 풀고 마침내 수영장에 갈 기회를 얻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수영장 쪽으로 몰려갔다.연정훈과 양시연의 집에는 지하에 거대한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전체가 수영장으로 꾸며져 있었다.날씨는 아직 쌀쌀했지만 수영장의 물 온도는 조절할 수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양시연은 이곳에서 여유롭게 수영을 즐겼다.수영장에 모인 사람 중 루나를 포함한 여자 임원들은 모두 미모와 능력이 뛰어난 여성들이었으며 수영에도 능숙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등장하자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휘파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사람들이 많아지자 누군가 수영 경기를 제안했다.처음엔 여자들만 물에 들어갔고 경기 방식은 단순했고 수영 방법에 상관없이 끝까지 도달하면 되는 것이었다.남자들은 구경하며 흥미롭게 지켜봤고 한우빈이 출발 신호를 맡았다.호루라기 소리가 울리자 동시에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고 주변에서는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양시연은 수영장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비롯해 모든 이들의 시선은 반우희에게 쏠렸다.반우희는 개헤엄을 꽤 잘했고 다른 사람들처럼 화려한 비키니가 아닌 끈이 달린 나시와 반바지 스타일의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하얗고 통통한 몸매는 키 크고 늘씬한 여성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경기는 치열했고 두 번의 왕복 끝에 반우희는 루나와 동점을 기록했다.“반우희 씨, 정말 대단하네요.”양시연이 칭찬했다.반우희는 밝게 웃으며 수영장 라운지로 헤엄쳐 올라왔다.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의 시선은 부승원에게 향했다.양시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반우희는 은근히 부승원의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부승원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반우희를 잡아 올렸다.“올라와서 좀 쉬어.”반우희는 몸을 가볍게 뛰어 라운지에 올라와 부승원 옆에 앉았고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에 기대며 이야기를 나눴다.이승우와 몇몇 남자들도 물속으로 뛰어들어 다양한 방식으로 놀며 내기를 시작했고 상품을 걸며 분위기를 띄웠다.수영장 라운지에서는 연
양시연은 모연준의 사건이 부승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그 이야기를 꺼내며 부승희는 한탄하듯 말했다.“사실 저는 모연준 씨가 꽤 마음에 들었어요. 결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실수했죠.”모연준의 전 여자친구이자 첫사랑인 그녀는 모연준이 어려운 시기에 빠졌을 때 사라졌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나 온갖 방법으로 그를 술에 취하게 만들고 하룻밤을 보낸 뒤 임신했다는 사실을 양시연은 이제야 알았다.“모연준 씨도 솔직한 편이에요. 그 첫사랑에 대한 감정이 조금 남아 있다고 했죠. 그렇지 않았다면 그 하룻밤을 그렇게 확실히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가 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모연준 씨는 당황해서 아이를 지우라고 했는데 그 여자는 끝내 지우지 않고 시간이 지나 찾아와 문제를 만들었어요.”부승희는 손을 들며 단호하게 말했다.“어쨌든 난 참을 수 없어요. 모연준 씨가 무릎 꿇고 사과해도 그건 안 될 거예요.”하지만 모연준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한 후 그는 부승희를 찾아와 선택권을 줬고 부승희가 헤어지자고 하자 깔끔히 사라졌다.그날 부승희는 모연준에게 여러 차례 뺨을 때렸지만 그는 반격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부승희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이야기를 마치며 부승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여자도 결국 얻은 건 없을 거예요. 모연준 씨가 그 여자에게 감정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거든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승희 씨가 그렇게 단호하게 헤어진 거군요?”부승희는 턱을 치켜들며 대답했다.“그 여자가 내 사람을 건드렸다면 절대로 쉽게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모연준 씨가 만약 그 여자에게 감정이 남아 있었다면 내가 그 둘을 죽도록 괴롭혔을 거예요. 그 여자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 두지 않았겠죠.”‘눈에는 눈 이에는 이.’부승희의 인생 원칙은 분명했다. 억울하게 당하지 않고 원한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양시연은 부승희의 말에 손뼉을 쳤다.“그러면
“지금은 차가워 보이지 않는 거야?”양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한층 내려와서 평범한 사람처럼 보여서 그냥 그래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연정훈은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지금 너는 내 아내인데 내가 너한테 도도하게 대할 이유가 뭐 있어?”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그의 앞에 가서 사무실 책상에 기대며 마치 진지하게 말하듯 말했다.“난 당신의 차가운 모습이 꽤 좋아요. 멋져 보이고 뭔가 걷잡을 수 없어 보여요.”그 말이 끝나자마자 연정훈은 양시연을 자기 무릎에 앉혔고 그녀의 허리를 받쳐주며 손바닥이 허리 옆에 닿도록 하고 익숙하게 장난을 치며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귓불에 닿았다.“지금 차갑지 않아서 안 좋아하는 거야?”양시연은 앙탈을 부리며 연정훈의 품에 숨었고 몇 번의 짧은 순간 만에 연정훈은 뜨겁게 달아올랐다.양시연이 임신한 이후로 연정훈은 본래 차분하게 지냈고 축적된 감정이 많았기에 그녀가 입으로 자꾸 그를 도발하는 바람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그녀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걸 알게 되자 바로 뻔뻔하게 애교를 부렸다.“좋아요. 당신의 어떤 모습도 전 다 좋아요.”연정훈은 그녀가 이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회사 일은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두 다리를 그의 허리 옆에 벌려서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며 일어섰다.이 자세에서 양시연은 곧 이어질 상황을 떠올렸고 양시연은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아직 의사가 말한 시간이 아니잖아요.”연정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양시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웃었고 그녀는 연정훈이 오래 참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양시연은 두 손으로 연정훈의 얼굴을 감싸며 그의 얼굴에 입맞춤하며 마지막으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연정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한 뒤 숨이 거칠어졌다.“이건 네가 먼저 말한 거야. 내가 강요한 게 아니야.”“그럼 할래요? 안 할래요? 조금만 기다리면 후회할지도 몰라요.”그녀는 도도하게 말했고 연정훈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침실로 가지
“당신 빨리 봐요. 우희 씨가 부승원 씨에게 몰래 입을 맞추고 있어요.”옆에서 양시연이 연정훈에게 귓속말을 건네자 연정훈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유치하긴. 그저 입 맞췄을 뿐인데.”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내밀며 슬쩍 쳐다본 뒤 상황을 보고했다.“부승원 씨가 우희 씨에게 입을 맞추고 손도 잡으려는 것 같아요.”연정훈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리자 그 순간 부승원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연정훈은 침묵했다.“...”양시연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부승원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정훈에게 말했다.“심심했어?”연정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콜라를 한 모금 마셨고 다행히 영화가 곧 시작되었다.그의 관심은 드디어 양시연에게로 돌아갔고 그는 양시연에게 살짝 기대어 앉으며 그녀가 영화 내용을 공유해주기를 기다렸다.부승원은 반우희를 힐끗 쳐다보았다. 부승원은 그녀는 커다란 눈으로 화면을 응시하며 한 손은 그의 손목에 얹고 다른 손으로는 팝콘을 계속 집어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양시연이 준 티켓은 최신 SF 영화로 화면은 화려했지만 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시끄러워 부승원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그는 반우희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연정훈이 자꾸 부승원을 놀리자 반우희는 영화를 시작한 뒤로 그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영화의 자극적인 장면이 지나갈 때마다 반우희는 감탄하며 부승원의 손목을 잡고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부승원은 그녀의 손에 시선을 두었고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펼쳐 천천히 깍지를 잡았다.반우희는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영화에 집중하던 시선을 떼고 꽉 잡힌 손을 본 뒤 다시 부승원을 쳐다보았고 부승원은 화면을 응시한 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반우희는 입술을 오므리고는 마음속으로 설렘을 느꼈고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 부승원에게 조금 더 가까이 기울여 팝콘을 먹었다.부승원은 반우희가 가까워지는 느낌을 감지하고 미소를 지었다.부승원은 더 이
영화관 밖에서 반우희는 QR코드로 팝콘과 콜라를 받았다. 아직 입장도 하기 전에 팝콘은 이미 반쯤 사라진 상태였다.사람들이 많아지자 부승원은 반우희를 자기 곁으로 살짝 끌어당기며 팔로 보호하듯 감싸 안고 장난스럽게 말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팝콘 다 먹어버리겠네.”그의 말에 반우희는 웃으며 팝콘 두 알을 집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괜찮아요. 또 사면 되죠. 저 곧 월급날이잖아요.”그녀는 마치 돈 걱정 따위는 할 필요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는 사이 앞쪽 줄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반우희는 폴짝폴짝 뛰며 신나게 외쳤다.“우리 차례다.”팝콘을 먹던 손을 멈추고 부승원의 팔짱을 풀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입장 후 조명이 점차 어두워지자 반우희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었다.“7열 13번 좌석...어디지?”그녀는 중얼거리며 자리를 찾다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저기다.”부승원은 반우희의 손에 이끌려 자리로 향했다. 두 사람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손을 잡고 서로 가까이 붙은 채 걸음을 옮겼다.7열에 다다랐을 때 부승원은 앞쪽을 바라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점점 가까워질수록 앞줄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부승원은 걸음을 멈췄고 뒤돌아본 사람은 다르면 아닌 연정훈이었다.시선이 마주치자 부승원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했지만 연정훈은 여유로운 얼굴로 콜라를 내려놓으며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렸다.“우연이네.”부승원은 침묵했다.“...”반우희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했고 연정훈 옆에 있던 양시연이 고개를 내밀어 반우희에게 손을 흔들었다.“우희 씨, 안녕하세요.”반우희는 밝게 웃으며 대답하려다 자신들이 비밀 연애 중임을 떠올렸다. 손을 잡은 게 들킬까 싶어 손을 떼려는 순간 양시연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애써 손을 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반우희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해결책을 찾는 동안 부승원은 이미 마음을 다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손을
[이기적인 부승원 씨.]부승원은 반우희가 설정한 이름을 보고 순간 말을 잃었고 반우희는 눈썹을 까딱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어때요? 특별하죠?”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날 비꼬는거거야?”“누가 변호사님이 맨날 날 괴롭히래요.”“그건 네가 맨날 실수하니까 그런 거지.”부승원은 반우희를 내려다보며 차분히 답했다. 하지만 반우희는 이제 그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근데 변호사님은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엄격하지 않잖아요. 왜 저한테만 이렇게 엄청 엄격한데요?”반우희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살짝 억울한 표정을 지었고 부승원은 반박하지 않았다.최근 들어 그는 자신이 반우희에게 약간 유치한 장난기를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학창 시절 그는 친구들이 괜히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관심을 끌려고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놀리는 행동을 하던 모습을 보며 비웃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신이 그런 쓸데없는 장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연애는 연애고 일은 일이지. 앞으로 네가 또 실수하면 난 계속 지적할 거야.”부승원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반우희는 ‘흥’하고 소리를 냈지만 진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계속 지적하세요.” ‘다음에 내가 당신한테 키스할 땐 물어버릴 거야.’부승원이 그녀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분명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점심시간은 짧았고 다행히 아무도 사무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반우희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부승원은 그녀가 일찍 일어났을 거라 짐작하며 잠시 쉬라고 달랬다.소파에 누운 반우희는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잠들기 전 부승원에게 말했다.“저녁에 우리 영화 보러 갈까요?”‘영화?’부승원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학창 시절에도 그는 누구와 영화를 보러 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영화 관람 경험은 오롯이 부승희와 함께한 것뿐이었고 그것도 부승희가 마땅히 같이 갈 사람이 없을 때 억지로 끌고 간 경우였다.“좋아.”부승원이 단번에 동의하자 반우
“수정했어요.”반우희는 휴대폰을 다시 건넸고 부승원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물었다.“그럼 나를 뭐라고 저장했어?”반우희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안 알려줄 거예요.”반우희는 말하면서 다시 가까이 다가갔다.“저에게 키스해 주면 알려줄게요.”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정말 웃고 싶었다.반우희는 그를 유혹하려 했지만 사실 그게 그에게는 오히려 달콤한 유혹임을 알지 못한 채였다.부승원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긴 척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지만 분명 자신을 키스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술에 취해 강제로 키스했던 일이 떠올랐고 술에 취하면 진짜 마음이 드러나는 법이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입술을 두 번 스치듯 훑으며 서서히 가까이 다가갔고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부승원의 몸이 잠시 경직됐다.‘반우희...’반우희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며 그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더 가까이 다가가 혀로 그의 입술 사이를 살짝 훑었다.그 후 반우희는 부승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감싸며 셔츠 끝자락을 잡았다.“내가 변호사님한테 저장한 이름은 아주 특별해요. 키스해 주면 알려줄게요.”부승원은 생각했다. ‘저장한 이름이 특별하지 않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를 할 수 없는 거야?’부승원은 무심코 반우희의 허리를 감싸며 손을 그녀의 뒤로 보내어 그녀를 더욱 품 안으로 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며 차갑고도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조금 더 낮게.”부승원은 명령을 내리자 반우희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품에 엎드려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그 자세는 순종적인 매력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부승원은 마치 그동안 억눌려온 본능이 이제 반우희에게서 풀려날 순간이 온 것처럼 느껴졌다.그의 얼굴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턱을 잡은 손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반우희는 가볍게 신음하며 부승원의 허리에 있던 손을 더 꽉 쥐었고 부승원은 고개를 숙여 얇은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닿게
부승원는 멍해졌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그의 입술에 묻은 단맛을 가볍게 훔쳐 갔다.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용기를 내어 그에게 키스하려고 했다.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몸은 멈추지 않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얇은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와 선명한 실루엣이 부승원의 감각을 자극했고 불필요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애써 억눌렀다.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오려던 순간 부승원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위험한 행동을 조용히 차단했다.반우희는 당황한 기색 없이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살짝 적셨고 여전히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부승원은 얇게 다문 입술과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교육적인 어조로 말했다.“뭘 하려는 거야?”그러나 반우희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코끝을 비비며 천진난만하게 속삭였다.“당신한테 키스하려고요.”“...”“변호사님한테 키스하고 싶어요.”돌직구 같은 고백을 내뱉은 그녀는 자신도 즐거운 듯 해맑게 웃으며 덧붙였다.“사람들이 연애하면 다 키스도 하잖아요. 게다가 변호사님 전에 저한테 키스하셨잖아요. 그땐 보상까지 요구했는데 이번엔 그냥 하면 돼요. 제가 허락했으니까요.”부승원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순간 침묵했다.“...”‘부승희 바보인가? 세상에. 이런 식으로 들이대는 사람이 어디 있어?’그는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꼈지만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려 애써 냉정을 유지했고 반우희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회사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부승원은 말을 끝낸 후 반우희가 겁을 먹었을까 조금 후회가 들었다.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반우희는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고 부승원의 코끝에는 그녀의 은은한 향기가 가득했고 품 속의 촉감도 더욱 뚜렷해졌다.게다가 반우희는 자세를 바꾸더니 그의 다리 위에 양다리를 벌리고 앉아
부승원은 반우희가 갑자기 나타나자 속으로는 기뻤다.눈이 마주쳤을 때 부승원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는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밖에 아무도 없어요. 저 몰래 온 거에요.”반우희는 고개를 들어 부승원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고 부승원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점심은 먹었어?”그 말을 듣자 반우희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아직 안 먹었어요.”그러더니 뒤에 숨겨 둔 디저트를 꺼내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변호사님과 같이 먹고 싶어서 가져왔어요.”부승원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깃털로 간질이는 듯 따뜻했지만 목젖을 가볍게 움직이며 평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난 낮에 바쁘니까 너 스스로 잘 챙겨 먹어야지. 굳이 나 기다릴 필요 없어.”반우희는 그의 태도에 살짝 불만스러웠다. 특유의 솔직한 성격답게 디저트를 든 채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먹으려고 온 게 아니라 변호사님을 보러 온 거에요. 아침에 말도 못 해서 조금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변호사님은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반우희는 커다란 눈으로 부승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진심을 전했다.부승원도 그녀가 보고 싶었고 어젯밤 내내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전까지 반우희를 그렇게 깊이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녀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아침 내내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고 조금씩 자제력을 회복하는 듯했지만 반우희가 직접 찾아와 보고 싶다고 말하자 모든 노력이 무너져 내렸다.부승원은 겉으로는 무심한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보고 싶었어.”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조는 다소 평온해서 진정성이 덜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다른 여자라면 금세 서운해할 만한 순간이었지만 반우희는 달랐다. 부승원이 ‘보고 싶었다’고 말한 그 자체로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다.반우희는 부승원의 손을 잡아 소파 쪽으로 끌고 가 앉히더니 그의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