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이 이상하다.이건 며칠 동안 모든 회사 직원이 내린 결론이었다.“그제부터 자꾸 사소한 실수를 하셨어.”“맞아. 자꾸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기도 하고.”“아까는 내가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다미 씨라고 부른 거 있지? 난 강아영인데.”양시연은 따뜻한 우유 한잔을 들고 회의실을 지나치다가 그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양시연도 요즘 들어 부승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는데...그게 바로 반우희였다!반우희는 늘 간식 시간이 되면 시간 맞춰 양시연의 주변을 맴돌며 간식을 먹는 낙으로 살았었다.그런데 이 며칠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더니 먼저 말을 걸어도 속이 불편해 간식을 끊었다며 거절했었다.‘참 이상하단 말이지!’반우희는 부승원 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내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그래서 부승원의 비서부터 손을 쓰기로 했다비서는 이상한 점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으나 털어놓은 사람이 없어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시연에게 낮은 소리로 속닥였다.“백 퍼센트 두 사람이 싸운 거예요. 그것도 엄청 크게 다툰 거죠.”“정말요?”양시연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두 사람이 어떻게 다퉈요?”사실상 부승원이 늘 우세를 가지고 반우희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비서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러니까 흥미로운 거죠. 우리 변호사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 일이면 아주 큰 일 아니겠어요?”그리고 비서는 주변을 살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어쩌면 아주 민망한 일인지도 몰라요. 변호사님이 실수한 거라 그렇게 당당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그 말에 양시연은 점점 호기심이 깊어져 갔다.오후 시간, 사람이 드물 때를 틈타 양시연은 길 가던 반우희를 잡아 사무실로 끌었다.“어어! 이러시면 안 돼요!”반우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기회를 보아 도망가려 했으나 양시연이 임신한 걸 생각해 결국 얌전히 끌려갔다.“시연 언니 왜 그래요?”양시
“내가 돈만 많았어도 회사 때려 치고 더 좋은 사장 아래에서 일했을 거예요.”반우희가 양시연에게 했던 말을, 양시연은 바로 냉큼 부승원에게 고자질을 했다.부승원은 그 옆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하던 일을 멈췄다.양시연은 예민하게 그 변화를 캐치했다.“부 대표님, 소감이 어떠신가요?”그리고 농담 섞인 목소리로 부승원을 취재하듯 물었다.부승원은 슬쩍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본인이 할 일이나 완성하시죠.”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누가 진짜 회사 대표인 거야!’사실 부승원이야말로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부승원은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반우희에게 키스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날 아침, 부승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써도 연차를 쓸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일단 해야 할 일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회사를 나갔다.그러나 회사에서 반우희를 마주치는 순간 부승원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반우희는 아예 부승원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더니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갔다.예전에는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애용하던 반우희였지만 부승원이 안에 탄 걸 확인하고 얌전히 사람으로 꽉 찬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올랐다.이렇게 선을 긋는 반우희를 보며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던 결심은 눈 녹듯 사라져 갔다.결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참 웃긴 상황이었다.어쩌다가 반우희와 대화하는 일에 결심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그리고 냉전이 시작된 것도 참 이상했다. 첫 만남에 대화를 망설이자 그 뒤의 만남은 더 어색해졌고 입을 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반우희가 자신을 피한 첫날엔 그냥 체면을 구겼다고만 생각했다.그러나 두 번, 세 번... 반우희가 자신을 피하는 차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부담이 생겼다. 부승원은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
다시 사무실.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떼를 썼다.“아 더는 못 먹겠어요.”사실 양시연은 몇 입 삼키지도 않고 못 먹겠다고 했고 연정훈은 인내심을 가지고 입가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말 들어. 몇 입만 더 먹자.”‘그래...’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음식을 삼켰다.그런데 연정훈이 또 계란찜을 떠서 건네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정말 못 먹어요. 턱 끝까지 음식으로 찬 것 같아요.”연정훈은 더 이상 양시연을 재촉하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그때 마침 지인이 찾아와 연정훈에게 인사를 걸었다.그 사람은 바로 루나, 부승원이 뽑아온 젊은 여성 직원이자 연정훈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어머 선배님이 이렇게 다정하신 분이셨어요? 직접 사모님 식사 챙기러 오신 거예요?”연정훈은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루나는 연정훈에게 짧은 인사를 하려고 찾아왔으나 연정훈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계속 승원이랑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네. 전공 선배이잖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시연을 바라보았다.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연정훈이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눈치챘다.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놓더니 사무실을 나서며 루나에게 말했다.“마침, 부탁할 일이 있는데 지금 좀 들어줄 수 있을까?”“선배님, 말씀만 하세요. 뭐든지 들어드릴게요.”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커피를 들고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그리고 루나는 연정훈을 따라나섰다.양시연의 사무실은 과거 연정훈이 지냈던 공간이었고 너무 큰 공간 탓에 연정훈과 루나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은 굳이 두 사람을 따라가지 않았고 침착하게 기다렸다.그때, 연정훈의 말을 들은 루나는 갑자기 흥분에 겨워 눈을 반짝이더니 곧 마른기침하더니 금색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이건 좀 너무하지 않을까요?”연정훈이 말했다.“네가 수고 좀 해줘. 정말 성사되면
‘쳇. 대시하면 하는 거지 뭐.’‘정말 연애하면 여자만 고생하는 거야. 흥.’‘하루 종일 잔소리만 하고 문제 틀렸다고 얼굴에 엑스나 그을 사람이라고!’‘다투면 무시하고 냉전이나 할거고 키스하고도 아닌 척 모르는 체할 거야.’반우희는 꾸역꾸역 파이를 입에 넣고 방금 들은 정보를 소화했다.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 기분이 더러웠다.그래서 아마도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부대끼는 거라 여겼다.‘그래. 틀림없이 그런 거야.’반우희가 자기 암시를 하고 있을 때 사무실 안의 부승원은 루나를 향해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그리고 풍성한 꽃다발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루나 씨, 이번 일은 교수님 얼굴을 봐서 한번 넘어가 주는 거야. 그런데 또 한 번 이렇게 멍청한 일을 한다면...”“절대 없을 겁니다!”루나는 맹세했다.“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그러자 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만 나가봐.”“넵!”루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분고분 방을 나섰다.그리고 루나가 밖으로 나서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했다.루나는 더 활짝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기를 시작했다.“네. 저녁 10시 창가 자리로 예약해 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벌써 두 사람이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그리고 두 시간도 되지 않아 회사 내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사실 예전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부연의 설명을 붙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 잠잠해질 때까지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늘따라 짜증이 치솟고 자꾸 반우희가 마음에 걸렸다.반우희는 늘 가십거리에 예민했고 이런 일을 가장 먼저 전해 들었다.반우희와 키스를 한 사건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는데 회사 직원과 스캔들이 터진다면 반우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눈에 뻔했다.‘아니지. 내가 왜 반우희 걱정을 해?’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요즘 들어 반우희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똑똑똑.노크 소리
‘나쁜 놈!’‘공공장소에서 스킨십이라니!’‘며칠 전엔 나랑 키스하고 오늘엔 다른 여자랑 스킨십을 해?’엘리베이터에 오른 반우희는 커피를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이 시뻘게지고 있었다.“난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선남선녀인데 두 사람 능력도 좋잖아요.”‘어울리긴 개뿔!’반우희는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다.‘그게 뭐가 중요해? 부승원이 나한테 키스를 했지 저 사람한테 한 것도 아니잖아.’‘부승원 개자식. 날 유혹하고 키스할 때는 언제고, 다른 사람이랑 엮기다니.’‘에라이 퉤.’“우희 씨?”같이 있던 직원이 점점 굳어가는 반우희를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서러움을 감추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괜찮아. 괜찮아.’‘어차피 내 것 아니었고 줘도 안 가져.’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반우희는 불만을 담아 쿵쿵거리며 밖을 걸었다.다른 한편 아래층.부승원은 세게 힘을 주어 루나를 내쳤고 루나는 쓰레기통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부승원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팔려 루나는 안중에도 없었다.비서는 좌수석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마른기침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다.그때.핸드폰이 진동했고 비서는 반우희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비서 언니, 저 그 알바 그만두지 않을래요! 오늘도 청소하러 갈게요!]비서는 눈을 반짝였다.[정말요?]반우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물었다.[그동안 알바비는 언제 주시는 거예요?]그 내용에 비서는 웃음이 나갔다.이런 상황에서도 돈만 걱정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오늘 업무 끝나는 대로 보내 드릴게요!][좋아요!!!]연속 세 개의 느낌표는 반우희의 벅찬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비서는 문자를 보내고 서둘러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바라봤다. 그런데 부승원은 잔뜩 얼굴을 굳히고 있었고 루나는 덤덤하게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대표님,
까드득.반우희는 쿠키를 입안 가득 넣으며 창가에서 아래층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오가는 차 한 대 없자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늘에는 운 좋은 줄 알아. 부승원!’그리고 발을 쿵쿵 구르며 테이블에 모아둔 간식 쓰레기를 정리했다.그런데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뭐야!’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금까지 기세등등한 모습은 사라진 채로 황급히 간식 쓰레기를 감췄다.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반우희는 입안 가득 쿠키를 문 채로 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간식을 가렸다.부승원은 집 안에 반우희가 있을 거라고 먼저 예상하고 있었기에 첫 만남에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반우희를 보며 걱정하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다행이야. 간식을 먹고 있는 거면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몰라.’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어 등 뒤로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반우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고 부승원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로 등 돌려 루나에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루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래층은 춥잖아요.”“차 안에 히터 틀어져 있어.”“말도 마요. 시트 냄새 때문에 멀미 나요.”그리고 루나는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우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말했다.“어머 어린 친구가 집에 있었네요?”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우희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아, 맞다.”“우리 회사 우희 씨 맞죠?”반우희는 서서히 표정을 굳히고 루나를 바라봤다.‘그래서 뭐! 나 반우희인데 어쩔래!’부승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나가 또 이런 말을 했다.“회사에서 도우미도 찾아준 거예요?”부승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알바일 뿐이야.”“아, 도우미 알바?”“...”부승원은 반우희 머리 위로 검은색 구름이 떠 있는 게 보
“돈 주세요!”반우희의 말에 루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 이유 없이 저를 해고하는 거면 배상해 주셔야죠. 세 배 금액으로!”“...”“빨리요!”반우희는 굳은 얼굴로 루나를 재촉했다.‘그래. 돈은 주면 그만이지. 빨리 우희 씨 자극해 두 사람 관계에 불이 붙게 하는 게 우선이야.’루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로 가방에서 한 묶음의 현찰을 꺼냈다. 그 금액이 족히 200만 원은 되어 보였다.“가져가요.”루나는 거의 던지다시피 돈을 건넸고 정말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연기를 했다.반우희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다시 한번 심호흡했다.‘어때? 화나지? 빨리 날 욕하고 부승원한테도 퍼부어!’“지금 그 금액으로 날 거지 취급해요? 시급이 20만 원이고 한 달에 8번 근무였는데 200만 원이 아니라 2,000만 원은 주셔야죠!”‘뭐야? 이게 아닌데?’반우희는 화를 내며 입고 있던 앞치마를 의자 위로 휙 벗어 두었다.“현금이 없으면 수표라도 주세요! 빨리요!”루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그래도 이번 연기에 누군가 모두 책임질 거라 했기에 불을 더 붙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그래서 수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자, 여기 2,000만 원. 됐죠?”방금보다 더 과한 연기와 액션이었다.하지만 반우희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가방을 챙겨와 루나가 보는 앞에서 현찰과 남은 간식을 챙겼다.‘그만두라고 하면 누가 아쉬워할 줄 알고?’‘변태 사장, 나도 싫어!’‘퉤.’반우희는 간식을 쓸어 담으며 또 루나를 흘겨보았다.‘정말 끼리끼리 잘 만났어.’루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이 상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반우희가 먼저 부승원에게 찾아가는 계획에 실패했다면 부승원이 먼저 다가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루나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만 나가봐요. 참, 쓰레기도 가지고 내려가세요.”반우희는 가방을 척 메고 표독스럽게 루나를 노려보며 문으로 향했다.‘그래. 간다. 가!’루나는 입을 삐죽거리는 반우희를 몰래 살폈다. 다른
부승원은 급하게 아래층으로 달려갔으나 반우희는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일단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큰 소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197만 원... 198만 원...”“2만 원이나 부족하잖아!”“나쁜 사람. 어떻게 이 돈도 떼먹냐!”반우희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돈을 움켜쥐고 표정을 구겼다.공돈이 생긴 건 좋은 일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빴다.반우희는 몇 년 전 부승원이 했던 말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때 부승원은 자신의 신분으로 부승원을 넘보는 건 사서 고생을 하는 일이라 했었다.하지만 반우희는 단 한 번도 부승원을 넘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잘생긴 얼굴을 가끔 구경이나 했을 뿐이었다.그리고 매일 독설만 날리는 사람을 좋아할 리도 없지 않은가?‘그런데 부승원은 왜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고 키스도 마음대로 하는 걸까?’‘술이 면죄부야?’‘변태!’이런 생각을 하며 반우희는 고개를 숙여 움켜쥔 돈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짜증 나.’‘어떻게 돈으로 사람을 내칠 수 있냐?’“그래. 돈 많아서 참 좋겠네... 짜증 나!”눈물이 추위에 빨개진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고,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눈앞에 남성 구두가 보였다.반우희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부승원은 소나무 근처를 지나가다가 익숙한 토끼 모자가 보였고 작게 몸을 웅크린 토끼가 돈을 한 장 한 장세며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잔소리해도 제대로 듣지 않던 녀석이 낯선 사람이 하는 말엔 곧이곧대로 듣고 무턱대고 집을 박차고 나가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반우희의 코며 손등이며 빨갛게 부어오른 게 보였고 눈시울까지 붉어진 게 보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그렇게 눈이 마주치고 반우희가 먼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든 돈을 가방 안으로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하고 반우희의 옆으로
‘한 통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통 세 통은 뭐지?'양시연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한 채로 연정훈과 소현주의 다른 이메일들을 열었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그중 절반이 그녀가 익숙한 주제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숨을 참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N.S와의 통신을 열어 하나씩 비교하기 시작했고 주제부터 내용까지 높은 중복도를 발견했다.‘뭐지?’양시연은 화면 앞에서 멍하니 멈춰 서 있었는데 갑자기 시선이 N.S라는 두 글자에 떨어졌다.옛날에 양민아가 소현주의 영어 이름은 Nancy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Nancy.Su! 내가 예전에 통신한 사람은 소현주 씨였다는 말인가?’‘이건 말도 안 돼. 너무 황당하잖아.’양시연은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해서 과거에 보냈던 첫 번째 이메일과 연정훈과 소현주가 주고받은 첫 번째 이메일을 찾아봤다. 모두 일치했다.‘온라인 연애? 하. 헛소리.’양시연은 충격을 받았고 곧 분노로 바뀌었다.결국 소현주는 그녀와 연정훈 사이에서 말을 전하는 역할이었고 연정훈과 소현주의 인연은 그녀가 맺어준 셈이었다.양시연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고 일어섰다가 책상 앞에서 걸어 다녔다.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우연인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소현주가 양시연의 메일을 통해 연정훈에게 답장을 보냈고 연정훈과 대화를 나눈 후 연애를 하고 다시 한 바퀴 돌아서 결국 연정훈과 다시 만났다.‘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양시연은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다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남은 이메일들을 하나씩 열어봤고 한 통씩 읽을 때마다 답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나니 점심시간이 지나버렸고 휴게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은 채 본능적으로 화면을 닫았다.연정훈은 잠을 자고 나서 훨씬 상쾌해 보였다.양시연은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그녀는 소현주와의 ‘온라인 연애’에 질투를 느꼈지만 결국 그와 통신한 건 바로 자
연정훈이 말했다.“인생이 단지 첫 만남 같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소현주의 이미지는 나중에 무너졌어. 처음 편지를 주고받았던 정 때문에 계속 신경을 썼던 것 같아. 게다가 처음엔 소현주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었잖아.”양시연은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러면 결국 정말 온라인 연애를 한 거네요.”연정훈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런 변질된 일로 질투하지 마. 당신이 찝찝하지 않아도 내가 더 찝찝해.”연정훈이 말했다.“내가 질투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너는 절대 잘못이 없어.”그는 마치 부드러운 솜처럼 아무리 세게 때려도 무슨 소용인가 싶을 만큼 무력하게 반응했다.양시연은 아무리 화가 나도 결국 그에게 화풀이하고 싶지 않았다.사건은 임성원에게 맡기고 두 사람은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연정훈이 양시연의 마음을 달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아침이 되자 양시연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고 거울 속 부은 눈을 보며 어제 그렇게 감정에 휩쓸린 걸 후회했다.연정훈은 그녀에게 더 쉬라고 했지만 양시연은 일이 없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할 것 같다며 출근하기로 했다.아침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정인으로 데려다주었고 점심시간이 되자 다시 그녀를 보러 왔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바쁜 걸 알기에 말했다.“나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 하루에 몇 번씩 오지 않아도 돼요.”연정훈은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와서 네가 괜찮은 걸 확인해야 오후에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어.”양시연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함께 점심을 먹은 뒤 양시연은 연정훈을 휴게실로 데려가 잠시 눈을 붙이게 했다.연정훈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던 양시연은 잠이 오지 않아 허리를 매만지며 사무실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일에 몰두하면 잡생각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고요가 찾아오자 다시 사소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맞은편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양시연은 문득 연정훈이 예전에 자신에게 이
방 안 분위기가 차츰 진정되었고 양시연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눈을 감고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녀 곁을 지키며 조용히 물었다.“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양시연은 눈을 뜨며 옅은 창백함이 감도는 얼굴로 말했다.“배가 두 번 정도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어요. 아기한테 영향이 간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양시연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고 연정훈은 지금 그녀의 상태를 우선시했다. 집에 손님들이 있었지만 망설임 없이 의사를 불렀다.의사가 도착하자 부승희와 몇몇 손님들도 양시연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다행히도 의사는 금방 진찰을 마쳤고 임신부의 정서적 동요로 인해 불편함이 생긴 것이며 아기에게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다.이 말을 들은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늦게 나타난 반우희는 세 아이를 데리고 양시연을 찾아왔다.희주는 맨 뒤에 서서 망설였지만 양시연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그 사진들은 합성된 거야. 언니가 이미 확인했으니까 걱정하지 마.”그 말을 듣고 나서야 희주는 안도하며 어른인 척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내가 뭐랬어요? 형부는 드라마 속 나쁜 남편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잖아요.”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언니한테 보여주지 말 걸 그랬어요.”양시연은 그들이 비록 어리지만 분명히 고민한 끝에 그녀와 더 가까운 관계인 자신이 속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생각했다.그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진 양시연은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의사의 말로 모두가 안심했지만 양시연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손님들은 차례로 자리를 떠났다.저택은 다시 고요해졌고 가정부들은 조용히 집 안을 정리했다.밤이 되자 양시연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정훈이 음식을 들고 와 몇 입이라도 먹으라며 권했지만 양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 마음이 상해서 먹고 싶지 않아요.”연정훈은 양시연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히고 침대 헤드에 기대도록 했다.“좋은 엄마가 되고 싶
양시연과 연정훈은 오랫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앞뒤로 위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며 속으로 추측을 시작했다.“싸운 걸까요?”거실의 분위기는 점점 냉랭해졌다.그 옆에서 세 명의 어린아이도 조용하게 있었다. 동준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순수한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승주와 희주는 상황을 감지한 듯 말수가 줄고 표정이 어두워졌다.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사람들은 각자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으며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용히 자기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위층에서 양시연과 연정훈은 비록 서로 소리 내어 다투지는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양시연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사진을 보낸 사람이 마치 과거에 양민아가 연정훈에게 자신과 양혁수의 에든베타 영상을 보낸 것처럼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이라 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전 연인의 친밀한 사진을 보고 차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소현주를 극도로 싫어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신경 쓰는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소현주와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거짓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양시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를 등진 채 말없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고 감정이 격해져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이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소현주가 연정훈과 친밀했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위산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결국 양시연은 급히 일어나 욕실로 향했고 연정훈은 그녀를 따라갔다.그녀가 토하는 모습을 보며 연정훈의 마음은 무너지는 듯 아팠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의
양시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뭔데?”희주는 양시연의 손을 잡고 작은 방으로 이끌었고 잠시 고민한 후 침대 위에서 한 묶음의 엽서를 꺼냈다.희주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승주 오빠가 언니가 아기를 가진 상태라 화내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언니가 모르면 더 속상해할까 봐 저희끼리 의논했거든요...”말을 끝낸 희주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고 양시연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대체 뭔데 그래?”희주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손에 든 것을 양시연에게 내밀었고 양시연은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고 훑어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얼굴빛이 변했다.그것은 엽서가 아니라 사진 묶음이었고 사진 속 장면들을 본 순간 양시연의 손이 떨리고 몸이 굳어졌다.희주는 양시연의 표정을 살피며 상황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고 두 손을 어찌할 바 모르며 만지작거렸다.“언니 이 사진...저희 몇 장만 봤어요. 함부로 다 보지는 않았어요.”양시연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녀는 희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알았어. 희주, 고마워.”희주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으로 양시연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혹시... 오해일 수도 있어요. 아 맞아요.”그러더니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승주 오빠가 그러는데 이 사진들이 조작된 걸 수도 있대요.”양시연은 살짝 미소 지으며 희주의 어깨를 다독였다.“알겠어. 먼저 가서 놀아.”희주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방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양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고 의자에 앉아 허리를 살짝 짚은 뒤 사진들을 한 장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첫 번째 사진에는 연정훈이 잠들어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고 소현주는 핸드폰을 들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추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었다.이 사진 한 장만으로도 희주 같은 어린아이조차 불륜을 떠올릴 법했으니 양시연이 불쾌함을 느낀 것도 충
점심 무렵까지 놀다 보니 사람들도 지쳐 절반 정도의 손님들은 객실로 가서 휴식을 취했고 여전히 에너지를 발산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반우희 집안의 세 아이뿐이었다.양시연은 연정훈 옆에 기대앉아 몇몇 임원들과 함께 업계 대기업들의 권력 교체 뒤에 숨겨진 작전들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입이 심심해졌다. 그녀는 술 창고에 여 아주머니가 만든 과일 원액이 생각나 직접 가지러 가기로 했고 연정훈은 그녀가 걱정되어 동행하기로 했다.“겨우 몇 걸음밖에 안 되잖아요.”양시연이 말하자 연정훈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내가 집에 있을 땐 나랑 같이 가. 내가 집에 없을 땐 혼자 수영장이나 술 창고에 가지 마.”양시연은 현재 배가 커져 있어 혹시라도 넘어지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필요 없어요...”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뒷문에 도착했고 연정훈이 문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양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확인한 후 여 아주머니의 손자인 탁승호라는 걸 알고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승호 오빠.”탁승호는 양씨 가문 사람이라 연정훈도 그를 예우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배경은 깨끗했다.“방금 창고에 신선한 식자재를 채워 넣고 오는 길에 뒷마당에서 몇몇 아이들이 우체통을 열려고 애쓰는 걸 봤어요. 그래서 열쇠를 찾아주려고 했어요.”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그 우체통은 녹슬었을 텐데 아직 열릴 수나 있을까요?”“괜찮아요. 안 열리면 자물쇠를 교체하고 조금만 다듬으면 보기에도 좋을 거예요.”“네. 수고하세요.”탁승호는 서른 정도로 보이는 투박한 남자로 성격도 순박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금세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연정훈과 양시연에게 길을 내어주고 두 사람이 지나가자 조용히 거실로 들어갔고 매우 얌전하게 있었다.양시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연정훈과 함께 술 창고로 내려갔다.그녀는 과일 원액을 금세
부승희는 양시연에게서 옷을 빌려 입고 나오던 중 마침 부승원과 반우희를 마주쳤다.‘반우희 씨는 피부가 정말 하얗고 통통하네.’부승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순간 참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부승원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반우희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반우희 씨, 가슴이 진짜 풍만하시네요.”반우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듯 가슴을 감쌌다.‘이 여자 변태인가?’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어 부승원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다. 그러더니 반우희를 옆으로 끌어당겨 속삭이듯 물었다.“우리 오빠가 만져본 적 있어요?”반우희는 당황했다!반우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승희를 바라봤다.‘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 거야?’부승원은 반우희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부승희가 불쾌한 말을 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얼굴을 굳히며 객실 문을 열었다.“일단 들어가서 샤워하고 옷부터 갈아입어.”반우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부승희의 손에서 재빨리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방 밖에서는 남매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부승희는 두 손을 뒤로 모으며 부승원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부승원도 수영을 한 듯 드물게 정장을 벗고 수영복만 입은 모습이었다.반우희는 친오빠마저 그냥 두지 않으며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오빠 가만히 서 있지 말고 들어가. 절호의 기회잖아.”부승원은 침묵했다.“...”이승우는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아까 이승우랑 같이 있었냐?”‘쳇.’수비가 되지 않자 공격으로 돌리는 것은 정말 규칙을 지키지 않는 치사한 수법이었다.부승희는 콧방귀를 끼고 대답 없이 자리를 떠났고 부승원은 그런 그녀를 보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방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반우희가 샤워를 마친 후인지 그녀의 옷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모습은 전혀 여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부승원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들었지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잠시 후 반우희가 목욕
부승희는 떠날 때 마음속에 분노를 가득 품고 떠났으며 정확히 말하자면 이승우와 사귀지 않았지만 그와 모호한 관계를 여러 번 이어왔다.부승희는 속으로 둘이 결국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다.결국 이승우는 진정한 사랑이라 여긴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녀는 해외로 떠날 때 마음속으로 이승우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돌아와서는 모연준과 함께하며 학업과 커리어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로 인해 이승우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우에 대한 미움은 여전히 부승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처음에는 모든 환상이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승우가 모연준을 대신해 싸워주던 그날 밤 사실 그가 부승희를 위해 싸운 것이었음에도 그녀는 마음 깊이 숨겨왔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이승우가 대체 누구길래 얼굴도 두껍게 나서서 자신을 대신해 싸운다고 하는지 의문스러웠다.이승우가 부승희를 대신해 싸운 것은 결국 그녀에게 창피함을 안겨준 셈이었고 마치 자신이 이승우보다 못한 사람을 찾았다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부승희는 이승우의 머리를 때린 후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 그저 이승우가 알아서 멀리 떨어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두 가문 간의 인연을 생각해 어느 정도 체면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그런데 하하.’그때 이승우는 웃으며 부승희의 허리를 감싸 안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부승희 나는 다른 것을 바라는 게 아니야. 내가 너를 도와서 상황을 풀어줄게. 돈을 벌어서라도 이렇게 쌀쌀맞게 굴지 말고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사이잖아.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우정이라도 남아 있잖아. 네가 예전에 나와 사귀지 못해서 마음에 담고 있다면 마음이 너무 좁은 거 아니야?”“마음이 좁다고? 감히 이런 말투로 나를 말하다니. 내가 이승우에게 용기를 준 건가?’“어때?”이승우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내가 너의 부하가 되어줄 기회를 줄래? 네가 어디를 지시하면 내가
이승우는 다리를 뻗어 부승희를 부드럽게 끌어올려 무릎 위에 앉혔고 그 일련의 동작은 마치 미리 설정된 것처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루어졌다.심지어 부승희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는 동작까지 예상한 듯 그는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아 등 뒤로 제압했다.‘이런.’부승희는 속으로 짧게 욕을 내뱉었지만 체면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단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이승우를 응시했다.“이거 무슨 뜻이지?”“실수였어.”이승우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여 부승희의 다리를 살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부승희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이승우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허리가 아프네. 좀 주물러 줄래?”그 말을 하며 그녀는 이승우의 무릎 위에서 일부러 몸을 살짝 비틀었고 이승우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정말로 주물러줘도 화 안 낼 거야?”“화날 리가 있겠어? 네가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걸 아는데.”이승우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억누르려 애썼다.‘이승우가 좋은 마음으로?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부승희는 허리가 아프다고만 했을 뿐 정확히 어디가 아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승우도 따지지 않고 그녀의 손을 풀어주며 따뜻한 손바닥으로 천천히 허리를 주물렀다.그는 부승희의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잡담을 나누는 이 순간을 만끽했다.만약 부승희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승우의 목덜미를 살짝 꼬집지 않았다면 그 순간은 더 완벽했을 것이다.부승희의 손톱은 정교하게 네일 아트를 한 상태였고 살짝만 꼬집었을 뿐인데도 이승우는 목덜미에 뻐근한 고통을 느꼈다.참다못해 깊은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피해내던 이승우를 보며 부승희는 만족스러운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기분 좋지?”이승우는 어금니를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좋아.”‘정말 한심하군.’부승희는 이승우를 흘겨보았다. 그의 손이 허리 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뜨거운 온기가 점점 더 신경 쓰였다.참다못한 부승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손을 들자마자 또다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