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원이 이상하다.이건 며칠 동안 모든 회사 직원이 내린 결론이었다.“그제부터 자꾸 사소한 실수를 하셨어.”“맞아. 자꾸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기도 하고.”“아까는 내가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다미 씨라고 부른 거 있지? 난 강아영인데.”양시연은 따뜻한 우유 한잔을 들고 회의실을 지나치다가 그 대화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양시연도 요즘 들어 부승원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은 또 한 명 있었는데...그게 바로 반우희였다!반우희는 늘 간식 시간이 되면 시간 맞춰 양시연의 주변을 맴돌며 간식을 먹는 낙으로 살았었다.그런데 이 며칠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더니 먼저 말을 걸어도 속이 불편해 간식을 끊었다며 거절했었다.‘참 이상하단 말이지!’반우희는 부승원 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내 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그래서 부승원의 비서부터 손을 쓰기로 했다비서는 이상한 점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으나 털어놓은 사람이 없어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양시연에게 낮은 소리로 속닥였다.“백 퍼센트 두 사람이 싸운 거예요. 그것도 엄청 크게 다툰 거죠.”“정말요?”양시연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두 사람이 어떻게 다퉈요?”사실상 부승원이 늘 우세를 가지고 반우희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비서는 살짝 웃음을 터뜨리더니 양시연을 향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러니까 흥미로운 거죠. 우리 변호사님 일상에 변화를 일으킨 일이면 아주 큰 일 아니겠어요?”그리고 비서는 주변을 살피며 한마디를 더 보탰다.“어쩌면 아주 민망한 일인지도 몰라요. 변호사님이 실수한 거라 그렇게 당당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요.”그 말에 양시연은 점점 호기심이 깊어져 갔다.오후 시간, 사람이 드물 때를 틈타 양시연은 길 가던 반우희를 잡아 사무실로 끌었다.“어어! 이러시면 안 돼요!”반우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기회를 보아 도망가려 했으나 양시연이 임신한 걸 생각해 결국 얌전히 끌려갔다.“시연 언니 왜 그래요?”양시
“내가 돈만 많았어도 회사 때려 치고 더 좋은 사장 아래에서 일했을 거예요.”반우희가 양시연에게 했던 말을, 양시연은 바로 냉큼 부승원에게 고자질을 했다.부승원은 그 옆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하던 일을 멈췄다.양시연은 예민하게 그 변화를 캐치했다.“부 대표님, 소감이 어떠신가요?”그리고 농담 섞인 목소리로 부승원을 취재하듯 물었다.부승원은 슬쩍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본인이 할 일이나 완성하시죠.”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대체 누가 진짜 회사 대표인 거야!’사실 부승원이야말로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이튿날 잠에서 깬 부승원은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반우희에게 키스했던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날 아침, 부승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근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써도 연차를 쓸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일단 해야 할 일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회사를 나갔다.그러나 회사에서 반우희를 마주치는 순간 부승원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반우희는 아예 부승원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더니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갔다.예전에는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애용하던 반우희였지만 부승원이 안에 탄 걸 확인하고 얌전히 사람으로 꽉 찬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비집고 올랐다.이렇게 선을 긋는 반우희를 보며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던 결심은 눈 녹듯 사라져 갔다.결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참 웃긴 상황이었다.어쩌다가 반우희와 대화하는 일에 결심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그리고 냉전이 시작된 것도 참 이상했다. 첫 만남에 대화를 망설이자 그 뒤의 만남은 더 어색해졌고 입을 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반우희가 자신을 피한 첫날엔 그냥 체면을 구겼다고만 생각했다.그러나 두 번, 세 번... 반우희가 자신을 피하는 차수가 많아질수록 점점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부담이 생겼다. 부승원은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
다시 사무실.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떼를 썼다.“아 더는 못 먹겠어요.”사실 양시연은 몇 입 삼키지도 않고 못 먹겠다고 했고 연정훈은 인내심을 가지고 입가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말 들어. 몇 입만 더 먹자.”‘그래...’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음식을 삼켰다.그런데 연정훈이 또 계란찜을 떠서 건네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정말 못 먹어요. 턱 끝까지 음식으로 찬 것 같아요.”연정훈은 더 이상 양시연을 재촉하지 않고 수저를 내려놓았다.그때 마침 지인이 찾아와 연정훈에게 인사를 걸었다.그 사람은 바로 루나, 부승원이 뽑아온 젊은 여성 직원이자 연정훈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었다.“어머 선배님이 이렇게 다정하신 분이셨어요? 직접 사모님 식사 챙기러 오신 거예요?”연정훈은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루나는 연정훈에게 짧은 인사를 하려고 찾아왔으나 연정훈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계속 승원이랑 연락하고 지냈던 거야?”“네. 전공 선배이잖아요.”연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시연을 바라보았다.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연정훈을 보며 양시연은 연정훈이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눈치챘다.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놓더니 사무실을 나서며 루나에게 말했다.“마침, 부탁할 일이 있는데 지금 좀 들어줄 수 있을까?”“선배님, 말씀만 하세요. 뭐든지 들어드릴게요.”연정훈은 내색하지 않고 커피를 들고 창가 자리로 걸어갔다.그리고 루나는 연정훈을 따라나섰다.양시연의 사무실은 과거 연정훈이 지냈던 공간이었고 너무 큰 공간 탓에 연정훈과 루나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은 굳이 두 사람을 따라가지 않았고 침착하게 기다렸다.그때, 연정훈의 말을 들은 루나는 갑자기 흥분에 겨워 눈을 반짝이더니 곧 마른기침하더니 금색 머릿결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이건 좀 너무하지 않을까요?”연정훈이 말했다.“네가 수고 좀 해줘. 정말 성사되면
‘쳇. 대시하면 하는 거지 뭐.’‘정말 연애하면 여자만 고생하는 거야. 흥.’‘하루 종일 잔소리만 하고 문제 틀렸다고 얼굴에 엑스나 그을 사람이라고!’‘다투면 무시하고 냉전이나 할거고 키스하고도 아닌 척 모르는 체할 거야.’반우희는 꾸역꾸역 파이를 입에 넣고 방금 들은 정보를 소화했다.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계속 기분이 더러웠다.그래서 아마도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부대끼는 거라 여겼다.‘그래. 틀림없이 그런 거야.’반우희가 자기 암시를 하고 있을 때 사무실 안의 부승원은 루나를 향해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그리고 풍성한 꽃다발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루나 씨, 이번 일은 교수님 얼굴을 봐서 한번 넘어가 주는 거야. 그런데 또 한 번 이렇게 멍청한 일을 한다면...”“절대 없을 겁니다!”루나는 맹세했다.“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그러자 부승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만 나가봐.”“넵!”루나는 배시시 웃으며 고분고분 방을 나섰다.그리고 루나가 밖으로 나서자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집중했다.루나는 더 활짝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연기를 시작했다.“네. 저녁 10시 창가 자리로 예약해 주세요.”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벌써 두 사람이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졌다.그리고 두 시간도 되지 않아 회사 내에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사실 예전의 부승원이었다면 절대 부연의 설명을 붙이지 않고 시간이 지나 잠잠해질 때까지 내버려뒀을 것이다.하지만 오늘따라 짜증이 치솟고 자꾸 반우희가 마음에 걸렸다.반우희는 늘 가십거리에 예민했고 이런 일을 가장 먼저 전해 들었다.반우희와 키스를 한 사건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는데 회사 직원과 스캔들이 터진다면 반우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눈에 뻔했다.‘아니지. 내가 왜 반우희 걱정을 해?’부승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요즘 들어 반우희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똑똑똑.노크 소리
‘나쁜 놈!’‘공공장소에서 스킨십이라니!’‘며칠 전엔 나랑 키스하고 오늘엔 다른 여자랑 스킨십을 해?’엘리베이터에 오른 반우희는 커피를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이 시뻘게지고 있었다.“난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선남선녀인데 두 사람 능력도 좋잖아요.”‘어울리긴 개뿔!’반우희는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었다.‘그게 뭐가 중요해? 부승원이 나한테 키스를 했지 저 사람한테 한 것도 아니잖아.’‘부승원 개자식. 날 유혹하고 키스할 때는 언제고, 다른 사람이랑 엮기다니.’‘에라이 퉤.’“우희 씨?”같이 있던 직원이 점점 굳어가는 반우희를 보며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반우희는 입을 삐죽이며 서러움을 감추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괜찮아. 괜찮아.’‘어차피 내 것 아니었고 줘도 안 가져.’띵.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반우희는 불만을 담아 쿵쿵거리며 밖을 걸었다.다른 한편 아래층.부승원은 세게 힘을 주어 루나를 내쳤고 루나는 쓰레기통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하지만 부승원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팔려 루나는 안중에도 없었다.비서는 좌수석에 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마른기침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했다.그때.핸드폰이 진동했고 비서는 반우희가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다.[비서 언니, 저 그 알바 그만두지 않을래요! 오늘도 청소하러 갈게요!]비서는 눈을 반짝였다.[정말요?]반우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물었다.[그동안 알바비는 언제 주시는 거예요?]그 내용에 비서는 웃음이 나갔다.이런 상황에서도 돈만 걱정하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오늘 업무 끝나는 대로 보내 드릴게요!][좋아요!!!]연속 세 개의 느낌표는 반우희의 벅찬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비서는 문자를 보내고 서둘러 고개를 돌려 부승원을 바라봤다. 그런데 부승원은 잔뜩 얼굴을 굳히고 있었고 루나는 덤덤하게 메이크업 수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쩍 부승원을 떠보았다.“부 대표님,
까드득.반우희는 쿠키를 입안 가득 넣으며 창가에서 아래층을 살피고 있었다.그런데 오가는 차 한 대 없자 반우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늘에는 운 좋은 줄 알아. 부승원!’그리고 발을 쿵쿵 구르며 테이블에 모아둔 간식 쓰레기를 정리했다.그런데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뭐야!’반우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방금까지 기세등등한 모습은 사라진 채로 황급히 간식 쓰레기를 감췄다.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반우희는 입안 가득 쿠키를 문 채로 빠르게 문 앞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간식을 가렸다.부승원은 집 안에 반우희가 있을 거라고 먼저 예상하고 있었기에 첫 만남에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그런데 입안 가득 우물거리는 반우희를 보며 걱정하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다행이야. 간식을 먹고 있는 거면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닐지도 몰라.’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어 등 뒤로 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선배님.”반우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고 부승원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두 눈을 감은 채로 등 돌려 루나에게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루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래층은 춥잖아요.”“차 안에 히터 틀어져 있어.”“말도 마요. 시트 냄새 때문에 멀미 나요.”그리고 루나는 제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반우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말했다.“어머 어린 친구가 집에 있었네요?”루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반우희가 누구인지 떠올리는 시늉을 했다.“아, 맞다.”“우리 회사 우희 씨 맞죠?”반우희는 서서히 표정을 굳히고 루나를 바라봤다.‘그래서 뭐! 나 반우희인데 어쩔래!’부승원을 향해 고개를 돌린 루나가 또 이런 말을 했다.“회사에서 도우미도 찾아준 거예요?”부승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알바일 뿐이야.”“아, 도우미 알바?”“...”부승원은 반우희 머리 위로 검은색 구름이 떠 있는 게 보
“돈 주세요!”반우희의 말에 루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 이유 없이 저를 해고하는 거면 배상해 주셔야죠. 세 배 금액으로!”“...”“빨리요!”반우희는 굳은 얼굴로 루나를 재촉했다.‘그래. 돈은 주면 그만이지. 빨리 우희 씨 자극해 두 사람 관계에 불이 붙게 하는 게 우선이야.’루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로 가방에서 한 묶음의 현찰을 꺼냈다. 그 금액이 족히 200만 원은 되어 보였다.“가져가요.”루나는 거의 던지다시피 돈을 건넸고 정말 모욕감을 줄 수 있는 연기를 했다.반우희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다시 한번 심호흡했다.‘어때? 화나지? 빨리 날 욕하고 부승원한테도 퍼부어!’“지금 그 금액으로 날 거지 취급해요? 시급이 20만 원이고 한 달에 8번 근무였는데 200만 원이 아니라 2,000만 원은 주셔야죠!”‘뭐야? 이게 아닌데?’반우희는 화를 내며 입고 있던 앞치마를 의자 위로 휙 벗어 두었다.“현금이 없으면 수표라도 주세요! 빨리요!”루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그래도 이번 연기에 누군가 모두 책임질 거라 했기에 불을 더 붙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그래서 수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자, 여기 2,000만 원. 됐죠?”방금보다 더 과한 연기와 액션이었다.하지만 반우희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가방을 챙겨와 루나가 보는 앞에서 현찰과 남은 간식을 챙겼다.‘그만두라고 하면 누가 아쉬워할 줄 알고?’‘변태 사장, 나도 싫어!’‘퉤.’반우희는 간식을 쓸어 담으며 또 루나를 흘겨보았다.‘정말 끼리끼리 잘 만났어.’루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이 상황에 맞춰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반우희가 먼저 부승원에게 찾아가는 계획에 실패했다면 부승원이 먼저 다가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루나는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이만 나가봐요. 참, 쓰레기도 가지고 내려가세요.”반우희는 가방을 척 메고 표독스럽게 루나를 노려보며 문으로 향했다.‘그래. 간다. 가!’루나는 입을 삐죽거리는 반우희를 몰래 살폈다. 다른
부승원은 급하게 아래층으로 달려갔으나 반우희는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일단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큰 소나무 옆을 지나가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197만 원... 198만 원...”“2만 원이나 부족하잖아!”“나쁜 사람. 어떻게 이 돈도 떼먹냐!”반우희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고 돈을 움켜쥐고 표정을 구겼다.공돈이 생긴 건 좋은 일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나빴다.반우희는 몇 년 전 부승원이 했던 말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때 부승원은 자신의 신분으로 부승원을 넘보는 건 사서 고생을 하는 일이라 했었다.하지만 반우희는 단 한 번도 부승원을 넘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잘생긴 얼굴을 가끔 구경이나 했을 뿐이었다.그리고 매일 독설만 날리는 사람을 좋아할 리도 없지 않은가?‘그런데 부승원은 왜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고 키스도 마음대로 하는 걸까?’‘술이 면죄부야?’‘변태!’이런 생각을 하며 반우희는 고개를 숙여 움켜쥔 돈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짜증 나.’‘어떻게 돈으로 사람을 내칠 수 있냐?’“그래. 돈 많아서 참 좋겠네... 짜증 나!”눈물이 추위에 빨개진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고,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눈앞에 남성 구두가 보였다.반우희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부승원은 소나무 근처를 지나가다가 익숙한 토끼 모자가 보였고 작게 몸을 웅크린 토끼가 돈을 한 장 한 장세며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잔소리해도 제대로 듣지 않던 녀석이 낯선 사람이 하는 말엔 곧이곧대로 듣고 무턱대고 집을 박차고 나가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니 반우희의 코며 손등이며 빨갛게 부어오른 게 보였고 눈시울까지 붉어진 게 보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그렇게 눈이 마주치고 반우희가 먼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모든 돈을 가방 안으로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부승원은 길게 심호흡하고 반우희의 옆으로
“너의 여동생이 나를 좋아한다고.”그는 다시 한번 부승원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부승원은 무엇이든 능숙하게 해내는 사람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내가 이 말을 듣는 이유는 나를 시험해 보려는 거야? 혹시 나중에 너희가 헤어지면 내가 너랑 사이가 나빠질까 봐 확인하려는 거야?”“이승우 미리 말해둘게. 나는 분명히 너랑 사이가 틀어질 거야. 난 여동생 하나밖에 없어. 네가 부승희를 다치게 하면 친구로서도 끝이야. 두 집안은 다시는 엮이지 않게 될 거야.”‘이거 봐. 얼마나 독하냐.’이승우는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감정을 즉시 진정시켰다.그녀는 다름 아닌 부승희였고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승희에게 만큼은 상처를 줄 수 없었다.‘넘겨버리자. 어린 소녀의 마음은 언젠가 변할 수도 있어.’부승희가 이승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그는 이런 이유로 자신을 안심시키며 긴장을 풀려고 했지만 그런데도 아쉬움이 밀려왔다. 왜냐하면 혹시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이승우는 부승원의 말을 듣고 그 시점부터 부승희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마음을 과소평가했다. 그녀는 그가 멀리해도 결국 자신에게 다가오는 방법을 찾았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 사이의 거리는 좁혀졌다.그는 계속해서 심리적인 방어를 하고 선을 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부승희에게 끌려 점점 그 궤도에서 벗어났다.언제부터였을까 부승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승우가 제일 먼저 알아챘고 그녀를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서 그녀의 집 앞에 걸어놓고 싶었다.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점점 혼란스러워졌지만 부승희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비밀로 남게 되었다.그녀의 사랑은 뜨겁고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하늘로 올라가며 떨어질 때조차 빛을 발하고 있었다.이승우는 점점 혼란스러워지며 갈등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녀의 좋은 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미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을
부승희가 술에 취했을 때 꼭 해변에 가서 조개를 줍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부승원은 무심한 오빠답게 그녀를 데려가서 재우기로 결심했지만 조개를 주러 가자는 제안에는 절대로 응할 생각이 없었다.“됐어. 내가 데려갈게.”그는 습관적으로 말을 꺼냈고 그동안 몇 년간 부승희의 엄마처럼 엉망이 된 상황을 얼마나 처리했는지 모른다.하지만 해변에 도착한 후 부승희는 두 개만 줍고 나서 그만 돌아가자며 이승우에게 업혀 가자고 했다.부승희가 해변에 앉으려 하자 금방 입은 새 옷이 망가질 것 같아 이승우는 머리가 아픈 듯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알았어. 업어줄게. 정말 넌 대단하다.”부승희는 기뻐하며 이승우에게 등을 돌리라고 한 후 그의 등에 올라탔다.“그만 얌전히 있어.”이승우는 그녀가 술에 취해 얌전히 있지 않는 걸 알기에 그런 말을 하며 허리를 굽혀 등을 두드렸다.“조심히 엎어. 너무 세게 움직이면 내가 바다에 던져버릴 수도 있어.”부승희는 몇 번 찡얼대며 결국 조심스럽게 그의 등에 올라탔고 그사이에 계속해서 그가 버틸 수 있을지 물었다.“나 좀 뚱뚱한데...”‘뚱뚱하다니? 어디가?’부승희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엎으니 생각보다 가벼워서 놀랐다.“부승희 집에서 학대당해?”“응. 맞아.”그녀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오빠에 관한 일상적인 악성 소문을 퍼뜨렸다.“우리 오빠는 밥도 안 주고 항상 나를 학대해.”이승우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냐?”“응. 진짜 힘들어.”“나중에 네 오빠한테 말할게. 집에서 못 살겠다며 우리 집으로 와. 우리 엄마도 딸을 원하고 계셔. 우리 집에서는 절대 너한테 그런 일 없을 거야.”그는 말을 이어갔지만 부승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부승희? 잠들었어? 자지 마. 집에 가서 자야지 감기 걸린다.”“안 자.”부승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안 자면 됐어.”그는 그녀가 피곤한 걸 알기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한
여름의 해는 일찍 떠올랐고 다섯 시가 넘으면 창밖에서 이미 밝은 빛이 비쳤다.이승우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닫고 부승희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다시 한번 그녀를 엿보게 되었다.그 해 그녀를 만나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희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대방은 괜찮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 부승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마치 지난 세월의 일처럼 느껴졌고 그때는 오늘 같은 일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제 부승희는 이승우의 곁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다.전주로 온 지 반년이 넘었고 부승희는 항상 일을 성실히 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 미팅이 없으면 정성스럽게 화장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어린 시절의 ‘거침없음'과 닮아서 그는 그녀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사실 부승희는 거의 서른이 되었고 이승우도 이미 서른을 넘었다.기억 속에서 반짝이던 그 시절이 이제는 1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승우가 어렸을 때 부승희에 대한 첫인상은 친구 집의 말 안 듣는 어린 동생이었고 조금 더 커서는 둥글둥글하게 생긴 성깔이 있는 소녀였다.부승희가 이승우에게 몰래 입맞춤했을 때 그는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신경 쓰게 되었다.그때 이승우는 매우 당황했으며 함께 농구나 수영할 때를 빌미로 부승원에게 그녀를 좀 타일러 달라고 간접적으로 물어봤지만 부승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너는 그냥 평범하고 인품도 평범하고 부승희는 아직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너한테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거니 너무 생각하지 마.”‘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부승원은 이승우보다 두세 살 많았고 이전에는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부승원은 연정훈처럼 공부에 몰두한 타입으로 일찍 대학에 진학했다.그래서 부승희의 초등학교 시절은 친오빠가 돌보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처음에는 친구 집의 동생을 돌보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부승희가 자신에게 관
이승우는 어이없다는 듯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부승희는 두 팔을 가슴 앞에서 꼬고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이제 불만 없지?”이승우는 힘없이 대답했다.“없어. 얌전히 있을게.”부승희가 콧방귀를 뀌며 문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느긋하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 잘 자.”이승우도 그녀가 피곤하다는 걸 알기에 더 붙잡지 않고 조용히 바라봤다.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온 듯했고 부승희는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왜 그래?”“용 박사가 그러는데 두 시간 후에 네 체온을 다시 재야 한대.”“너 그냥 가. 내가 알아서 잴게.”‘됐어.’이승우의 무심한 말투를 들어보니 스스로 체온을 잴 가능성은 없었다.부승희는 얼굴을 한 번 문지르며 한숨을 쉬더니 거실로 나가 담요를 집어 들었고 그런 다음 다시 방으로 돌아와 그의 침대 옆 안마의자에 몸을 묻었다.“사람을 돕기로 했으면 끝까지 도와야지. 아무튼 네가 완전히 나으면 내게 보답하는 거 잊지 마.”이승우는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 그냥 옆방 가서 자. 의자에서 자면 불편할 거야.”“시끄러워. 잔소리 그만해.”부승희는 자세를 조금 조정한 후 안마의자를 뒤로 젖혔다.“이거 꽤 편하네. 침대보다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이승우는 입을 열려다 부승희가 눈을 감는 걸 보고는 말을 삼켰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는 옆으로 누운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1초 2초... 많은 시간이 흘렀다.부승희는 중간에 눈을 떴다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방금 만든 사골곰탕이 떠오르며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고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날카롭게 말했다.“뭘 봐? 안 자고?”“이제 잘 거야.”“안 자면 뒤돌아. 나 쳐다보지 마.”그녀가 말하자마자 이승우는 바로 눈을 감았다.‘쯧.’부승희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다시 눈을 감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사골곰탕은 성산시를 대표하는 음식이었고 이승우의 어머니는 성산시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력 요리가 되었다.물론 어쩌면 그녀가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요리는 이것 하나뿐일지도 몰랐다.들리는 이야기로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던 이승우의 아버지가 바로 이 요리에 마음과 입맛을 빼앗겼다고 한다.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작은 뚝배기에 담긴 국물을 남김없이 비우고는 팔짱을 낀 채 여운을 곱씹었다.부승희는 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고 얼른 눕기나 하라고 했고 그는 순순히 다시 누웠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잠시 후 그는 몸을 돌려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에 앉아 있는 부승희를 바라봤다.“부승희, 너 이거 영상 보고 배운 거 아니지?”“...”“먹어보니까 알겠어. 꽤 잘 만들었더라.”“...그냥 타고난 거야.”“누구한테 배운 거야?”이승우가 갑자기 그렇게 묻자 부승희는 순간 멈칫했다.“내가 먹고 싶어서 배운 거야. 문제 있어?”“그럴 리가 없는데.”그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갈 기세를 보이자 부승희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내가 진실을 말하면 너 충격받고 쓰러지지 않을 자신 있어?”이승우는 눈을 깜빡였다.“왜?”“정말 알고 싶어?”“말해 봐.”부승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해외에 있을 때 배웠어.”해외라는 단어가 나오자 이승우의 경계심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부승희는 무심한 얼굴로 그에게 잔인한 소식을 전했다.“모연준 씨, 할머니가 성산시 사람이야. 모연준 씨도 이 요리를 엄청 좋아했어. 그래서 우리가 연애할 때 내가 일부러 배워서 해줬지.”‘푹.’마치 가슴 한가운데 칼이 꽂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이승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부승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봤다.“이제 만족해?”‘굳이 물어보고는.’이승우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참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부승희가 그의 어깨를 눌러
의사는 곧 도착했다.“보통 감기일 것 같아요. 여름에 온도 차가 심하니 감기 걸리기 쉽습니다.”부승희는 그 큰 웅덩이를 떠올리며 아마도 이승우가 병에 걸린 이유는 그 물 때문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둘 다 바쁘고 세 끼도 불규칙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아프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다.“그러면 일단 열 내릴 수 있도록 수액 놔주세요.”그녀가 말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준비하고 이승우에게 수액을 놓아주었다.새벽 4시 이승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부승희는 그의 안마의자에 기대어 졸며 지켜보고 있었다.“좀 어때?”“토할 것 같아.”“다 토했잖아? 아까 상황 보니까 이제 더 이상 토할 게 없을 것 같던데?”부승희가 앉은 자세로 물었다.이승우는 대답했다.“토할 게 없으니까 더 힘들어.”“좀 더 지나고 안 나아지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다줄게.”부승희가 말했다.“응...”부승희는 다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이승우는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조금 기운을 차려서야 말할 힘이 생겼다.“우리 이렇게 보면 서로 의지하는 그런 느낌이네.”이승우는 또 말장난을 쳤다.“난 아니야. 난 전주에 온 뒤로 아픈 적 없잖아. 그런데 너는 두 번째 아니야?”부승희는 혀를 차며 말했다.“난 정말 두려워. 창업이 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질까 봐.”“그건 안 되지. 아직 너와 결혼도 못 했는데.”부승희는 그의 말을 반박하려고 했지만 이승우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됐어.’“그러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네가 해줄 거야?”“내가 한 걸 너 먹을 수 있어?”“당연하지. 독약이라도 먹을 거야.”‘쳇.’부승희는 핸드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너도 시켜줄게. 기다려.”시간이 너무 늦었고 경인에 있는 게 아니어서 주문해도 비싼 배달 음식만 가능했고 부승희는 메뉴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고르고 있었는데 맘에 드는 메뉴가 없었다.결국 그녀는
학생 시절 이승우는 누구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그보다 몇 년 선배인 연정훈과 부승원도 인기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승우를 압도할 수 없었다.가문이 좋고 외모도 뛰어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그였기에 어디서든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경인국중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여학생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이승우가 누구와 사귀고 누구와 헤어졌는지 모두가 빠르게 큰 화제가 되었다.하지만 그 해 운동회 이후 학교 내에서 매우 비정상적이고 중2병 같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부승희가 이승우의 진정한 사랑이며 두 집안은 이미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승우는 반항적이라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결국 마음속에서는 부승희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해 부승희는 1등은커녕 완주조차 가까스로 할 뻔했다.그때 그녀를 비웃던 그 남자아이는 화를 삼키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그녀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위해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부승희의 리듬이 깨졌고 마지막 한 바퀴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부승희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끝났어. 큰 망신이야. 이승우가 치어리더를 데리고 곡 올 텐데.’이승우는 곧 치어리더를 데리고 올 줄 알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허풍을 떨었다고 생각한 듯 치어리더도 친구들도 없이 혼자만 왔다.마지막 한 바퀴는 그가 그녀와 함께 달려줬다.장거리 달리기는 본래 인기가 없는 종목이었지만 마지막 한 바퀴에서 그들 둘만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날의 가장 큰 화제가 되었다.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학교 웹사이트에서 그들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본 순간이었다. 물론 다양한 추측들이 터무니없고 바보 같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계속 그 사이트를 들여다보며 심지어 다른 계정을 만들어 그 열기를 즐기려 했다.숨이 가쁘고 죽을 것 같았을 때 그는 여유롭게 그녀의 옆에서 달리며 리듬에 맞춰 숨을 쉬고 괜찮다고 달리지 못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10월의 오후는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다.운동장도 덥
부승희는 반쯤 잠든 채 중학교 2학년 때의 운동회를 떠올렸다. 반의 여자아이들은 좀처럼 참가하려 하지 않았지만 최소 인원 규정 때문에 결국 제비를 뽑아야 했고 운 나쁘게도 반우희가 장거리 달리기에 걸리고 말았다.그때 그녀는 그렇게 날씬하지 않았고 뛰는 모습도 예쁘지 않았다. 반에서 한 남학생이 그녀를 좋아해서 온갖 방법으로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부승희가 관심을 주지 않자 그는 점점 비난으로 태도를 바꿔갔다.“부승희, 너 요즘 살찐 거 알아? 뛰는데 다리가 출렁거리더라.”‘헛소리.’부승희는 원래 기가 센 성격이라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들을 이끌고 학교 후문으로 갔다. 그리고 그 멍청이를 붙잡아 제대로 본때를 보여줬다.하지만 그 남자애의 말은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녀는 다리가 좀 두꺼운 편이라 달리기도 빠르지 않아서 아마 꼴찌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경인국중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건물은 연결되어 있었고 고등학교는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중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고등학생들이 구경하러 오곤 했다.그때 부승희는 만약 이승우가 친구들을 데리고 구경 왔을 때 내가 통통한 몸으로 뒤에서 헉헉거리며 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창피할까 하고 생각했다.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방과 후 운동장에서 연습하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다만 대회가 임박했을 때도 그녀는 별로 살이 빠지지 않았고 달리기 속도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어느 날 밤 부승희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관중석에 혼자 앉아 있었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종아리 살을 꼬집어 보니 왠지 우울했다.부승희는 내일 이승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의자가 톡톡 두드려졌고 고개를 돌려보니 위쪽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이승우였다.그는 농구부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아마 방금 훈련을 마친 듯했다. 그는 웃으며 위에서 쪼그려 앉았고 여느 때처럼 가벼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이게
부승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나설 필요 있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부르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그들을 혼내줘야지.”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먼저 이승우의 집으로 가자고 지시했다.이승우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더러워서 자꾸 의자에 기대는 것도 불편해하며 집까지 몸이 경직되어 갔다.두 사람은 같은 층에 살고 있었고 부승희도 이승우의 집에 함께 들어갔다.이승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승희가 전화를 걸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삼촌, 일 처리가 너무 미흡해요. 저 사람들 분명히 범죄 조직과 연관이 있어요. 잡을 생각은 없으신가요?”그는 부승희 앞에 다가가서 수건을 던지고 그녀에게 전화를 넘기라고 신호를 보냈다.부승희는 귀찮아했지만 기꺼이 전화를 넘겨주었고 막 전화를 건네려던 찰나 부승희는 이승우가 잠옷 바지만 입고 상반신을 벗고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부승희는 그를 두 번 보고는 소파로 옮겨갔다.이승우는 전화를 한 뒤 몇 마디를 주고받고 전화를 끊고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네. 그들을 좀 혼내줘요. 너무 과하게 하진 말고.”“과하게 하지 말라니. 그 사람들이 나를 돼지 사육사라고 불렀어.”부승희가 끼어들었다.이승우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다.“알아서 하세요. 하지만 선을 지켜야 합니다.”그리고 전화를 끊었다.부승희는 소파에 기대면서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정말 어이없어.’부승희는 경인에서 제멋대로 하지는 못했고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은 없었다. 원주에서 사기를 당하고 이제는 전주에서 몇 명의 깡패 같은 택시 기사들까지 쫓아왔다.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 사람들이 확실히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 같아. 아니면 어떻게 감히 우리한테 이런 일을 벌였겠어?”그녀는 자신과 이승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그들 뒤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몰라.”이승우는 부승희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하며 그녀 옆에 앉아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그들도 우리가 누구인지 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