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공기는 3초 동안 얼어붙었다.양시연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도망가려 몸을 움직였다.그러나 연정훈의 품안에서 도망갈 구멍은 없었고 어느새 두 손이 잡히고 다리까지 포획된 채로 키스가 이어졌다.“읍!”도망은커녕 호흡까지 뺏겨버렸다.병원에서의 키스는 감히 키스라고 불리울 수도 없었다.강렬한 키스는 양시연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양시연이 고개를 돌리려 하면 연정훈이 손을 뻗어 턱을 잡고 입을 벌리게 했다. 입술을 할짝이고 깊게 감아오는 바람에 양시연은 온 몸에 짜릿짜릿 전율이 울렸다. 양시연은 어느새 이성을 잃고 힘이 스르르 풀려버렸다.양시연이 반항할 의지가 없어 보이자 연정훈은 잡았던 손을 놓고 겁없이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그 사이 양시연의 입술에서 잠시 멀어져 이마 위로 거친 숨소리를 늘어놨다. 그리고 콧등, 볼, 귀, 쇄골까지 키스를 이어갔다.양시연은 연정훈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콩닥콩닥거렸다.연정훈은 절대 틈을 보이지 않고 양시연을 점점 더 옭아맸다. 그래서 양시연은 연정훈이 오늘을 위해 오랫동안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닌 지 의심이 갔다.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쳐든 채로 키스를 순순히 받아드렸다.“정훈 씨...”그 소리에 연정훈도 두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을 몸으로 느꼈다.“왜?”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고 양 손을 연정훈의 어깨 위로 올렸다. 그리고 살짝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나랑 약속했잖아요... 음...”말이 끝나기도 전에 쇄골에서 짧은 고통이 찾아왔다.연정훈은 고개를 들어 다시 양시연의 콧등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동안 날 애달게 한 거로 아직 부족해?”양시연은 온 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고 나른한 얼굴로 연정훈을 노려보며 말했다.“누가 애달게 했다고... 그래요?”“널 건드리게도 하지 못하게 했잖아.”“그건...”“안된다는 말은 하지마.”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고 양시연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
“안돼...”방안에는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곧 뜨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에 두 사람은 온몸이 바짝 긴장되었다.이젠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를 살짝 깨무는 것으로 반항을 포기했다.너무 오랫동안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보니 처음 관계를 가진 그날만큼이나 긴장이 되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저 눈을 뜨면 눈 앞의 전등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키스는 쉴 새 없이 몰려왔고 숨이 벅찬 양시연이 밀어내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연정훈 이 나쁜 자식! 풀에 죽은 강아지 모습을 연기한 늑대가 따로 없어! 이러다가 정말 복상사라도 나면 어떡해!’몇 년 동안 닿지 못해 급한 연정훈의 마음을 알겠으나 양시연은 정말 이러다가 죽지 않을 까 걱정이 되었다.과거 연정훈과 처음 만났던 시절에도 이렇게 급했던 적은 없었다. 양시연은 초반에만 반항이라는 걸 시도했고 그 뒤로는 연정훈의 페이스에 겨우 맞춰갈 뿐이었다.그리고 현재, 두 손목은 연정훈의 목에 감겨 있었고 입술을 잡혀 먹힐 것처럼 키스를 하고 있었다.양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이제 몸도 제 것이 아닌 것 같고 마치 연정훈과 한 몸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다시 눈을 뜨자 두 사람은 자세를 바꿔 양시연이 연정훈의 위로 올라갔다.연정훈의 호흡 소리에 맞춰 양시연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러다가 연정훈이 한 손으로 양시연의 머리를 감싸쥐고 또 다른 한 손으로 턱을 쥔 채로 키스를 이어갔다. 그렇게 둘은 또 한 몸이 되었다.겨우 끝나가나 싶었는데 다시 불씨가 보이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가슴팍을 꼬집었다.갑작스러운 고통에 연정훈이 앓는 소리를 냈다.그리고 그 틈을 타 양시연은 빠르게 연정훈의 품에서 떨어졌다.그렇게 허둥지둥 도망을 가다가 방의 전등이 꺼졌다.하지만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연정훈은 정확하게 양시연을 찾아 다시 품에 꽉 껴안았다.양시연은 살짝 인상을 구긴 채로 머리를 굴려 가볍게 연정훈을 밀어냈다.이미 한바탕 체력을 써버린 터라
욕실에서 물소리가 부드럽게 퍼지고 있었다. 양시연은 큰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고 연정훈은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샤워하고 있었다.조명이 은은하게 빛나 욕실은 아늑하면서도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양시연은 물줄기를 마사지 모드로 바꾸고 물의 부드러운 압력에 몸이 노곤해지며 마치 물속에 녹아드는 듯했다.그런데 뒤에서 갑자기 샤워 소리가 멈췄다.타일 위에 맨발이 닿는 소리가 하나씩 울릴 때마다 양시연의 심장도 덩달아 쿵쿵 뛰었다.얼마 후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연정훈은 이미 가운을 걸치고 축축한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서 있었다.그는 양시연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뭐 마실래?”“...물 주세요.”“알겠어.”연정훈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자 양시연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잠시 뒤 욕조 끝에 몸을 기대고 있던 양시연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른한 눈길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연정훈은 물 한 잔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양시연이 손을 내밀어 받으려 했지만 그는 물을 건네지 않고 욕조 옆의 검은색 모던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앉았다.그 의자는 욕조와 가까운 곳에 있어 팔을 살짝 뻗으면 욕조 가장자리에 닿을 거리였다. 연정훈은 물잔을 들어 양시연의 입가에 가져다 댔고 컵 안에는 빨대가 꽂혀 있었다.몇 시간 전 병원에서 자신이 연정훈을 이렇게 챙겼던 기억이 스쳤다. 그땐 오히려 양시연이 연정훈을 쥐락펴락하며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터였다.‘쯧.’그녀는 불만스러운 마음에 눈을 감고 빨대를 꽉 물었다. 예상치 못하게 컵 안에는 달고 시원한 꿀물이 담겨 있었다.양시연은 반쯤 마시고 빨대를 빼낸 뒤 욕조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었다.연정훈은 컵을 거두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양시연을 바라보며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딱 그 순간 양시연은 연정훈의 눈빛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아차렸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참다 못한 그녀는 손으로 물을 퍼 올려 그의 얼굴에 튀겼다.연정훈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여전히
새벽 침실에서 양시연은 이불 속에 엎드려 온몸을 파묻고 있었다.입안엔 가글 후 남은 민트 향이 맴돌았지만 여전히 연정훈의 느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얼굴은 계속 화끈거렸고 내내 식지 않았다.‘연정훈, 이 뻔뻔한 인간’연정훈은 그녀의 등 뒤에서 이불이 들추어지더니 뒤에서 양시연을 안았다.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싫다는 듯 앞으로 몸을 조금 더 움직여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그러나 연정훈은 팔에 살짝 힘을 주어 양시연을 단단히 끌어안았고 양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정훈 씨는 안 더워요? 나 잘 거예요!”‘귀찮아 죽겠네’“안고 자고 싶어.”“싫어요. 나 혼자 잘래요.”“알았어.”연정훈은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한 뒤 손으로 머리를 가슴 쪽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양시연은 당황했다.???양시연은 불만스럽게 이불 속에서 몸을 불편하게 꿈틀댔다.그러자 연정훈은 몸을 돌려 익숙하게 그녀를 제어했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잡더니 그대로 입술을 덮쳤다.“음...”양시연의 어깨가 긴장한 듯 움츠러들었다. 입술은 연정훈의 키스에 마비되는 듯했고 머릿속에는 조금 전의 기억들이 또다시 떠올랐다. 연정훈을 밀어내려 했지만 손은 어느새 그의 손에 잡혀 그의 가슴 위에 올려졌다.연정훈의 심장 박동이 손바닥에 느껴지자 양시연의 마음도 미세하게 흔들렸고 자연스레 힘이 빠져 손이 그의 가슴 위에 고정됐다.그와 몇 번이나 키스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연정훈에게서 떨어졌을 땐 양시연은 이미 숨이 가빠 있었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그를 발로 툭툭 찼다.연정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잘래. 안 잘래?”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시연이 싫다고 하면 또 괴롭힐 게 분명했다.“조금만 풀어줘요...”양시연의 말투는 다소 부드러워졌다.연정훈은 기분이 좋아진 듯 양시연을 품에 안고 다시 누웠다. 양시연이 등을 돌리든 말든 상관없이 꼭 끌어안고 한 팔은 그녀의
양시연은 연정훈이 계속 쳐다보는 게 불편해서 눈을 흘기며 잠시 후 거울을 조금 돌렸다.뒤에서 연정훈은 작은 소리로 살짝 웃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웃어? 뭐가 웃긴 거지?’양시연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손길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끝에 머리를 조금 남긴 채 묶고는 일어섰다.“나 먼저 내려갈게요.”양시연이 연정훈에게 통보하자 연정훈이 말했다.“아주머니에게 잔치국수 한 그릇 만들어 달라고 해줘.”양시연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누가 정훈 씨 말을 전해주겠다고 했나요? 게으른 사람은 배고프면 참아야죠.”연정훈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래.”양시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먼저 내려갔다.주방은 한창 바쁠 때였다. 양시연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은 간식을 몇 가지 주문한 후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잔치국수를 야채 많이 넣고 하나 만들어 주세요.”“알겠습니다.”양시연은 주방에서 나왔고 거실에는 햇살이 적당하게 들어와 있었다.그녀는 기분이 좋았고 잠시 나비를 보러 돌아다녔다. 그 후 식탁에 앉아 음식을 기다렸으며 연정훈은 곧바로 내려왔다.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연정훈은 면을 먹고 양시연은 그녀가 주문한 디저트를 먹었다.처음에는 서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양시연은 어젯밤의 일을 계속 생각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일부러 연정훈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중간에 연정훈은 연속해서 그녀의 음식을 세 번이나 집어 갔고 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째려봤다.연정훈은 얼굴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그녀의 그릇에서 음식을 집어 갔다.양시연은 참지 못하고 식탁 아래에서 연정훈의 다리를 발로 찼다.그는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그녀가 쉽게 차도록 만들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연정훈의 진지한 얼굴을 마주쳤고 낮은 목소리로 디스했다.“정훈 씨, 진짜 유치하네요.”연정훈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말했다.“너만큼 유
대낮의 키스 장면에 놀란 가정부들은 하나둘 도망쳤고 양시연은 이 상황이 너무 창피해 얼굴이 화끈거렸다.서재로 들어와 문이 닫히자마자 연정훈이 그녀를 문에 밀어붙였고 양시연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둘 사이를 막았다.“정훈 씨, 진짜 좀 자제할 수 없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붉어진 얼굴과 화난 눈빛을 보며 태도를 살짝 고쳐 잡았다. 그는 그녀에게서 물러나며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난 아무것도 안 했어.”“아무것도 안 했다고요?”양시연은 연정훈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가정부들이 놀라서 도망갔잖아요.”연정훈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그건 가정부들이 멘탈이 약한 거겠지.”양시연은 기막혀 쏘아붙였다.“그건 당신이 너무 뻔뻔해서 그렇거든요!”“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대낮에...대낮엔 집에서 와이프랑 키스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기가 막힌 웃음이 터진 양시연은 연정훈을 밀어내며 두 손을 얼른 뒤로 감추고 문에 기대섰다.“헛소리하지 말아요. 나 아직 당신이랑 따질 게 남았거든요.”연정훈은 그녀의 손길에 두 발짝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입꼬리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양시연은 손을 빼려 했지만 이미 연정훈에게 끌려 그의 책상 앞으로 갔고 이내 의자에 눌러 앉혔다.그녀는 곧바로 일어서려 했지만 연정훈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양시연의 앞을 막았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양시연은 그를 노려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눈빛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양시연은 손가락으로 연정훈을 가리키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어젯밤 규칙 어긴 거 맞죠?”연정훈은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어겼지.”양시연은 뭐라고 더 말하려 했으나 이미 할 말을 잃은 채 입만 벙긋거렸다.그는 그녀의 이마에 흩어진 앞머리를 슬며시 넘기며 부드럽게 물었다.“그래서 날 어떻게 벌
서재의 소파 옆에는 옷들이 흐트러져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어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렸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입가에 가볍게 달라붙었다.방금 침대에서 벗어났는데 어느새 다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책상 위 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연정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양시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듬는 데만 열중했다.양시연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화 좀 받아요. 계속 울리잖아요.”연정훈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들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시간 없어.”“뭐예요.”양시연은 연정훈의 어깨를 툭 치며 투덜거렸다.“할 일도 없잖아요...”게으름을 피우는 게 뻔했지만 연정훈은 태연하게 말했다.“좀 쉴래. 하던 거 마저 하자.”양시연은 당황했다!‘연정훈 씨 정말 이렇게까지 목말라 있었단 말이야?’그녀가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자 연정훈은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의 코를 살짝 찔렀다.“힘들어?”양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고 더 이상 그를 노려보는 것도 지쳤다.여전히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녀는 결국 연정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는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전화선 좀 뽑아줄래요? 너무 시끄러워요.”연정훈도 괜찮다고 생각한 듯연정훈은 가볍게 양시연의 허리를 두드리더니 일어나서 전화선을 뽑아버렸다.양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당연히 전화를 받을 줄 알았는데 돌아온 연정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다시 안았다.“혹시 급한 일일지도 몰라요.”“급한 일이어도 상관없어.”“하지만...”“지금은 네 옆에만 있고 싶어.”양시연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느려지며 진정되었고 그녀의 입가에는 작게 미소가 번졌다. 무의식적으로 연정훈의 목을 감싸 안았다.사실 그녀도 원하고 있었다.어젯밤 이후 모든 것이 그녀가 예상했던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버렸으며 상황이 고요해지자 양시연의 머릿속
어차피 양시연도 민지연에게 복수한 적이 있었으니까 민지연이 사과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가 민지연에게 사과를 요구한 것은 가문 안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려는 전략이었다. 그렇게 해야 앞으로 누군가 양시연을 괴롭히러 오는 일이 없을 것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으려 했고 오히려 표세연을 집에 남겨 식사하라고 권유했다.표세연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하. 밥은 뭔 밥이야. 안 먹었는데 이미 배불러.’그런데도 신혼 부부의 좋은 관계를 보고 표세연도 기뻐한 듯했으며 집을 나설 때 양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보니까 예전에 그 점쟁이가 정말 맞춘 것 같아. 연정훈이 반지를 끼면 정혼자를 만날 거라고 했잖아. 봐 결국 널 만났네.”양시연은 그 반지를 처음 봤을 때 연정훈이 이미 결혼한 줄 의심했었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표세연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연정훈이 없을 때 양시연에게 몇 마디 중요한 말을 했다.연정훈의 업무는 거의 마무리되었고 연말 전에 임명이 될 것이라고 했으며 양시연의 귀에 어떤 기업의 이름을 귀띔해 주었다.“정인 그룹은...”“그래서 네가 회사에 자주 가서 익숙해지고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해.”표세연은 말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고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예의 바르게 그녀를 배웅했다.그날 밤 양시연은 이제 본격적인 일이 다가오므로 먼저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려고 했다.“내일 출발해서 양혁수 보러 가려고요.”그 말을 들은 연정훈은 책상 뒤에서 잠시 멈칫했고 잠시 후 연정훈은 고개를 들어 양시연을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며칠 갈 거야?”“바로 돌아올게요. 양혁수가 괜찮은지 보고 올게요.”“응.”양시연은 연정훈을 두 번 쳐다봤고 그가 별다른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자 다시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잠시 후 연정훈이 일어나 물을 마시러 갔을 때 양시연은 연정훈의 뒤에서 그를 안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양지원이 집에 있는 탓에 양혁수는 변여름에게 더 조심스러워졌다.화서시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맞출 만큼 가까워졌지만 집으로 돌아온 순간 그는 그녀의 손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는 가장 먼저 양지원에게 밥그릇을 건넸다.변여름은 젓가락을 가만히 깨물며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렸다.식탁에 앉은 양혁수는 입을 다물거나 아니면 양지원이 눈빛으로 놀려대지 않도록 일부러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양지원은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가 일부러 찾아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하나는 오성호 문제로 힘들어할 아들이 걱정돼서였고 다른 하나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가 어디까지 진전됐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오랜 세월 동안 양혁수는 한강시에 홀로 있었고 양지원은 그런 아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수없이 많은 여자를 소개해 줬지만 단 한 번도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양시연은 그녀에게 소중한 딸이었고 양혁수 역시 다르지 않았다.만약 연정훈이 없었다면 두 아이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인연이 아닌 하늘의 장난일 뿐이었다.그러던 중 나타난 변여름은 친한 가문의 딸일 뿐만 아니라 양혁수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녀는 기뻤지만 양혁수가 또다시 그 기회를 흘려보낼까 걱정스러웠다.두 사람 사이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혁수야.”“네?”양혁수가 고개를 들었다.“게살 좀 발라줘.”순간 그는 어리둥절했다.‘갑자기?’예전에는 이런 사소한 부탁들을 곧잘 들어주곤 했지만 마지막으로 게살을 발라준 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집에서 식사할 때면 새우나 게 같은 음식은 늘 손질된 상태로 나왔는데 오늘따라 이상했다.양혁수가 양지원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고 하는 수 없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고 도구를 들었다.변여름은 그가 이런 일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는 능숙했고 그의 손끝에서 게 껍데기는 깔끔
사실 양혁수는 변여름이 허예나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차 안에서 심심했던 그는 무심코 몇 마디 물었고 변여름은 처음에는 대답하려 했지만 그의 질문이 계속되자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오빠 혹시 허예나 같은 스타일 좋아해요?”“어떤 스타일?”“착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양혁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잡아 조심스럽게 얼굴을 돌렸다.변여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여름이보다 더 착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이 있어?”변여름은 순간 멍해졌다.자신이 착하거나 여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양혁수는 그녀를 ‘우리 여름이’라 불렀다. 그 순간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듯 느긋하게 시트에 기대어 웃음을 터뜨렸다.변여름이 얼굴을 숙여 식어가는 열기를 숨기자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질투쟁이.”그는 혀를 찼다.“내가 허예나랑 같이 지낸 적도 없는데 걔가 착하고 여성스럽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착하긴...너랑 붙어 다니며 사기나 치고 말 몇 마디로 사람 현혹해서 네 돈까지 빼갔잖아.”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아니에요. 허예나 씨는 사람을 말로 속이거나 현혹하지 않아요. 언제나 진실만 말해요.”허예나는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했다.양혁수는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기분 좋게 집에 도착한 그는 마치 익숙한 일인 양 가정부 앞에서 자연스럽게 변여름의 손을 잡고 문을 열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앞쪽에서 일부러 낸 듯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양혁수가 시선을 돌리자, 장난기 어린 양지원의 눈빛이 그와 마주쳤다.‘!’양지원은 그들의 손을 흘긋 본 뒤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돌아왔구나?”양혁수는 다소 불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거기 일은 다 끝났어요.”“
‘어. 신발 끈 풀렸네.’변여름은 빨대를 문 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묶어주는 양혁수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양혁수가 한쪽 신발 끈을 묶고 일어서려 하자 변여름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이쪽도 풀렸어요.”양혁수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신발 끈 한 번 묶어줬을 뿐인데 이젠 완전히 맛 들였나? 나 부려 먹는 재미라도 붙였나 보지?’그는 다른 쪽 신발 끈도 풀어 더 단단히 묶어주었다.그가 일어서자 변여름은 곧바로 그에게 레몬티를 건네며 말했다.“오빠, 날씨 추워요. 오빠도 좀 마셔요.”양혁수는 빨대를 살짝 물고 한 모금 마신 뒤 차에 기대어 담담히 말했다.“너희 집에 전화했어. 설날에 안 간다고.”변여름은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양혁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말을 이었다.“어차피 너희 집은 설날 크게 챙기지도 않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어.”그는 늘 핵심을 돌려 말했고 변여름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끄는 걸 싫어했다.그녀는 조용히 차에서 내려 그의 앞에 섰다.서로의 눈이 마주쳤고 양혁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왜?”변여름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오빠, 나를 한강시에 데려가 줄 거예요?”양혁수는 웃음을 참듯 입술을 다물고 그녀를 곁눈질로 바라봤다.“나와 같이 한강시에 가서 설 보내고 싶어?”“...”변여름은 드물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끝내 표정을 풀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손을 들어 그녀의 두 볼을 잡고 좌우로 살짝 흔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한강시에 안 데려가면 널 여기 두고 가야 하잖아. 근데 너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데. 또 한강시까지 쫓아와서 날 잡아먹을지도 몰라.”변여름은 예전에도 세 번 미래에 대해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첫 번째는 그가 진실을 알기 전날 그녀가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고 두 번째는 그가 멕하든을 떠나던 날 비행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