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석진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늦게 와서 죄송해요. 방금까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나요?”양지원은 냉큼 수저를 내려두고 고자질하려 했다.그러나 맞은편의 연정훈이 한 발 더 빨랐다.“제가 정인 그룹에 손을 떼기 전 14조 자금을 기부 단체에 처리해야 하는데 할아버지께서 시연이가 하길 바라십니다.”“...”표세연이 살짝 연정훈을 노려보았다.‘지금 네 할아버지의 고자질을 하는 거야?’양지원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웃기는 녀석이네.’연재혁은 머리가 지끈거렸고 양홍두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연호민은 침묵을 유지했다.한참 주변을 힐끗거리던 양시연은 결국 연정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의 체면을 보기 좋게 구기는 모습에 이상할 정도로 속이 시원했다.양석진은 아주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연정훈은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자선 사업이 그러하듯 신경 써야 할 일이 많고 압력이 많다보니 시연이가 하기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요.”연호민은 숨을 들이마시었다.양석진이 입꼬리를 올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개인 자선 사업으로 보았을 때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지.”자리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양시연이 자선 사업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해도 양석진은 아니었다.양석진은 양지원의 앞접시에 고기를 올려두며 말했다.“하지만 압력이 있어야 성장을 하는 법이지. 네가 시연이를 많이 아끼는 건 나도, 지원이 이모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시연이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니야. 시연이도 이제 이런 사업에서 역량을 키우고 경험을 쌓아야 할 나이이지. 그동안은 기회가 없었지만 이런 기회가 생긴 이상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다른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연호민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미소를 머금은 연호민이 양시연에게 말했다.“네 삼촌 말이 맞아. 좀 힘든 일이긴 해도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법이니까.”양시연은 양석진의 눈치를 살폈다
식사하는 내내 가장 마음이 불편해진 건 표세연이었다.어린 시절부터 양지원과 오랜 친구 사이였던 표세연은 양지원과 양석진의 사이를 의심해 본 적이 없던 게 아니었다.하지만 양지원이 결혼을 하고 양석진이 독신으로 지내는 걸 보며 차츰 생각을 접었었다.그러나 방금 양석진의 행동에 머리가 펑 하고 터지는 것만 같았다.표세연이 몰래 남편 연재혁에게 눈짓했다.‘방금 봤어요?’연재혁은 표세연의 앞접시에 요리를 올리며 말했다.“이게 맛이 좋네요. 먹어봐요.”‘조용히 해!’어쩔 수 없이 표세연은 아들 연정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아들, 봤어?’연정훈은 무표정으로 표세연의 앞접시에 음식을 올렸다.“엄마, 이것도 맛이 참 좋아요.”‘묻지 마세요.’“...”심호흡하던 표세연은 양시연과 시선이 마주쳤다.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다가 빠르게 고개를 숙여 고기를 입에 넣었다.‘저한테도 묻지 마세요.’그러자 표세연은 심장이 벌렁거렸다.드디어 길고 긴 저녁 식사가 끝나고 두 가문은 긴 인사를 뒤로하고 각자 헤어지기로 했다. 표세연은 바로 연정훈에게서 ‘내부 소식’을 듣고 싶었지만 연정훈은 장모님 챙기기에 바빴다.이희영은 빠르게 다른 손님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래서 양시연 일행이 있는 부근에는 인적이 뚝 끊기고 오가는 차량 하나 없었다.양홍두와 양씨 가문 가족을 배웅하고 양시연도 따라 차에 오르려 하자 연정훈이 양시연의 손목을 잡았다.“왜요?”양시연이 고개를 돌렸다.‘뭐야?’연정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반대 편의 차량 문이 벌컥 열렸다.양지원과 양석진이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연정훈은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일찍 쉬어.”양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걱정하지 마요. 정훈 씨도 일찍 쉬어요.”그리고 양시연은 망설임 없이 잡힌 손을 빼내고 빠르게 차에 올랐다.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양석진과 양지원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커다란 몸집의 연정훈이 오늘따라 작
혼인 신고를 마쳤다고 해도 양시연과 연정훈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연정훈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결혼 준비는 계속 이어지고 초반에는 양시연도 무리 없이 출근과 결혼 준비를 같이 준비했지만, 후반에는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모든 정신을 결혼 준비에 쏟았다.결혼식은 아주 심플한 야외 결혼식을 선택했다. 거기에 양가 부모님의 말씀 같은 모든 절차는 생략되었다.“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과정에서 정훈 씨 할머니를 뵈어야 하는데 한 번뿐인 결혼식에서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아요.”양시연의 말에 양지원은 당연히 동의했다.웨딩드레스는 빠르게 경인시로 배송이 되었다. 맞춤 제작은 1년 6개월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고 기다리고 싶지 않았던 양시연은 차라리 작지 않은 금액의 드레스를 선택해 자신의 몸에 맞도록 2차 수선을 하기로 했다.이번 결혼식의 묘미는 식전까지 신랑은 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처음 보는 신랑의 벅찬 마음을 위한 이벤트라 할 수 있었다.그래서 웨딩드레스는 양씨 저택으로 배송을 받았다.양시연은 디자인이 꽤 마음에 들었다.양지원은 여러 드레스 모델을 직접 살피고 있었다. 양시연보다 디테일에 더 신경을 쓰는 양지원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정훈이가 신경 많이 썼나 보네. 짧은 시간 안으로 이렇게 좋은 퀄리티 드레스를 찾은 걸 보면.”양시연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메이크업을 받을 준비를 했다.솔직히 말한다면 양시연도 조금 감동을 받았다.연정훈이 결혼 준비에 많은 신경을 쏟은 게 곳곳에서 티가 났다. 많은 디테일은 양시연의 상상을 초월했다.사실 그동안 양시연은 우리가 결혼하게 된다면 정말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연정훈을 향한 마음은 예전처럼 불타오르지 않는데 연정훈은 아직도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현재 연정훈의 정성을 보면 조금 불만이 동반되기도 했다. 왠지 몇 년 전에 소홀했던 부분을 채워주려 노력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양지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왔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우리가 제 흉을 보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양지원의 농담 섞인 말투에 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아마도 웨딩드레스가 마음에 드는지 물어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그래. 그럼 천천히 얘기 나누고 있어. 엄마는 아래층에 내려가 있을게.”“네.”양지원이 떠나고 핸드폰 배터리가 바닥난 양시연은 패드로 바꿔 보이스 톡을 진행했다.그리고 소리를 키우고 도우미를 불러 웨딩드레스를 벗으며 대화를 이어갔다.연정훈이 물었다.“마음에 드는 드레스는 있어?”“네. 있어요.”양시연이 말을 이었다.“그럼 정훈 씨는 결정했어요?”“나야 뭐 기본 정장이지.”“신경 쓸 게 많지 않아 좋겠네요.”“그래. 너만 예쁘면 돼.”두 사람은 왠지 노부부같이 심심한 대화를 이어갔다.도우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드디어 웨딩드레스를 벗은 양시연은 편하게 자리에 앉아 국수를 한 입 넣으며 연정훈과 대화를 이어갔다.“배고파? 뭘 그렇게 급하게 먹는 거야?”양시연이 참지 못하고 톡 쐈다.“웨딩드레스 환복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요? 거의 갑옷이 따로 없어요. 얼마나 무거운지 여러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절대 시도도 못 해요.”연정훈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래?”“네! 정장만 고르면 되는 정훈 씨가 참 부럽네요. 뭘 입어도 잘 어울릴 테니까요. 그냥 전날 밤 잠만 푹 자면 컨디션 최상이 되고 헤어만 손질하면 완성이잖아요.”양시연은 갑자기 연정훈의 칭찬을 늘려놨고 연정훈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이건 어쩔 수가 없어. 내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드레스를 포기할 수도 없잖아.”“에이 됐어요. 어떻게 힘든 일은 하나도 손에 대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몇십억이 되는 웨딩드레스인데 한 번만 참아보죠.”양시연은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연정훈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몇십억이라고?”“네...”“왜 그렇게 싼 걸 골랐어?”“...”연정훈은 생각보다도 더 진심이었다.“클래
양시연과 연정훈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뒤로 양혁수는 자주 집을 비웠다. 차라리 사무실에서 잠을 자거나 출장을 다녔다.양지원을 비롯한 다른 가족 성원들도 무슨 이유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하지만 양시연은 그 뒤로 양혁수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양혁수가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문밖의 양혁수는 반팔에 롱 팬츠를 매치했고 아주 편한 옷차림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양혁수가 물었다.“웨딩드레스 고르는 거야?”양시연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맞아...”“이미 골랐어?”“응.”그리고 몸을 돌려 중간의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양혁수의 시선이 새하얗고 화려한 웨딩드레스에 멈춰 섰다. 시선을 돌린 양혁수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쁘지 않네.”양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짧은 침묵이 찾아오고 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해외 지사에 문제가 생겨서 직접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그래서 결혼식은 아마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양시연은 마음이 복잡했다.양혁수와 진정한 가족이 되고 싶었지만, 결혼식에 양혁수가 온다면 왠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양혁수가 자진해서 참석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건 어쩌면 좋은 일일 수도 있었다.“얼마나 걸리는지 엄마한테는 말했어?”“뭘 그런 것까지 말하겠어.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난 너랑 다르게 해외에서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넌 하나도 걱정되지 않지만 엄마가 걱정돼서 그래. 네가 인사도 없이 떠나면 엄마가 보고 싶어 할 거야.”“그건 일리가 있네.”양혁수가 혀를 '쯧' 하고 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조금 있다가 얘기 잘할게.”“그래...”대화가 중단되고 양혁수는 양시연를 안아주고 싶어 망설였다.그때.쨍그랑 소리가 들려왔다.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양시연의 뒤로 들려왔다.몸을 돌려 확인했으나 등 뒤로 사람이 없었고 패드의 화면을 확인한
양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해외에 볼일이 있어서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대요.]연정훈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이 말을 하는 양시연은 실망한 건지 아니면 정말 덤덤한 건지 추측했다.양시연과 양혁수가 해외에서 찍혔던 영상은 이미 모두 지웠지만 한번 본 것만으로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그래서 양시연에게 두 사람이 정말 사귀었던 건 아닌지, 아니면 양혁수에게 한 번이라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는지 묻고 싶었다.그러나 입가까지 올라온 말을 또 꾸역꾸역 삼켰다.어차피 양시연의 미래는 자신과 함께였으니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아쉽게 됐네.]연정훈이 답장을 했다.하지만 양시연은 양혁수가 핑계를 대고 서로를 위해 참석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양시연이 농담으로 이렇게 문자 보냈다.[다행히 결혼식 절차를 많이 생략했기 망정이지 오빠 자리가 빈다고 배우라도 찾아 앉힐 뻔했네요.]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말투에 연정훈은 긴장하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그래서 계속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말했다.[우리 시연이 한 수 앞을 내다보네.]양시연이 피식 웃으며 겸손을 떨었다.[과찬이네요.]결혼식의 세부적인 사항을 결정하고 양시연은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연정훈에게 자선 사업에 대한 정보를 구했다.연정훈은 이러한 정보를 양시연에게 알릴 때만큼만 주도권을 가지는 기분이 들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온 연정훈은 영준을 찾아 간식을 먹였다.마침 핸드폰 너머의 양시연도 정보를 찾아보며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그렇게 간만에 두 사람은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연정훈은 진심을 다해 가르치고 양시연은 열심히 듣고 있었다.저녁 11시가 되고 양시연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오늘은 이만하고 이제 쉬어.”양시연이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들어 양시연은 자꾸 몸이 피곤하고 저녁 11시만 되면 잠이 쏟아졌다.영상 통화 배경은 어느새 안방으로 변하고 양시연은 몇 초 만에 파자마로 갈아입고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이목구비로 보았을 때 모연준의 시원시원한 인상은 유럽 쪽의 혈통이 아닌지 의심이 갔다.부승희는 모연준에 팔짱을 끼고 방 안의 사람들을 일일이 소개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도 모르게 모연준과 이승우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외모와 가문을 놓고 보면 모연준은 이승우와 큰 차이가 없었다.그러나 양시연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하는 모연준은 아주 차가웠고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그러자 방 안의 온도마저 내려갔다.직전에 방을 찾은 이승우는 선물도 주고 짧은 인사를 나누는 내내 옆자리의 직원들까지 하하호호 웃게 만들었다.부승희의 취향 변화가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난 먼저 나가 있을게요. 내가 필요하면 불러요.”부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스태프는 부승희와 안면이 있는지 농담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승희 씨는 성격이 활발하고 남자 친구분은 진중한 성격이라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겠네요.”부승희는 스태프를 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그런 셈이죠. 연준 씨랑 있으면 이상하게 침착해지더라고요.”옆자리의 다른 사람이 말을 걸었다.“당연하지. 네 나이를 생각해 봐. 다행히 연준 씨를 만나고 드디어 좀 차분해졌네.”“그렇네요.”양시연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난번 만남에서도 부승희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아무리 뜨거운 사랑도 결국 결말은 똑같다.양시연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런데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했다.연정훈이 문자를 보내왔다.[준비는 다 되어가?][네.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요.][사람을 시켜 먹을 것 좀 보냈어.]양시연이 빠르게 문자를 했다.[여기에도 음식 많아요. 따로 보낼 필요 없어요.][네가 긴장할까 봐 그래. 뭐라도 먹으면 긴장이 덜 되지 않겠어?]양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정훈 씨 집에서 직접 만든 블루베리 시럽이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우리 엄마가 계속 말하던데.][보내줄게.][그럼 있다가 먹어볼게요.][그래.]연정훈이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배고프면 꼭 먹어. 화장실 다녀오
양지원은 양시연의 앞에서 양석진을 ‘아버지’라 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고 이것저것 재고 싶지 않았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잔뜩 기대되는 듯 눈을 반짝였다.결혼 이틀 전은 양시연이 양씨 저택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잠이 든 시간까지도 창가에서 양석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양석진은 새벽 늦게 돌아왔는데 손에는 두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하나는 두리안 케이크고, 다른 하나는 과일 케이크였다.두리안 케이크는 당연히 양지원의 것이었다.양시연은 모둠 과일 케이크를 받아쥐고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내가 무슨 과일을 좋아하는지 몰라 이것저것 다 들어있는 거 사신 거죠?”양석진은 양지원의 맞은편에 앉아 그 농담을 받았다.“이걸로 만족해. 원래 네 엄마 입맛대로 둘 다 두리안 케이크로 사려고 했어. 그런데 창수 삼촌이 네가 이틀 뒤 결혼한다고 잘 챙겨주라고 하더라고.”양시연은 입을 삐죽였다.“자. 내가 잘라줄게.”양석진이 살짝 몸을 기울여 양시연의 손에서 케이크 나이프를 뺏어갔다.양시연은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네 엄마는 이 가게 케이크를 참 좋아해.”“오래된 가게잖아요.”양석진은 큼지막하게 케이크를 잘랐고 모든 딸기를 양시연 몫의 위로 올렸다.양시연은 두 손으로 케이크를 받았다. 마치 어린 시절 높은 시험 점수를 받고 외할머니에게 칭찬을 바라는 기분과 같았다.양석진은 케이크를 먹지 않았다. 대신 의자에 몸을 기대고 편히 앉아 양시연을 바라봤다.“천천히 먹어.”양시연은 한 입 크게 입에 넣다가 머쓱해졌다.양석진이 다정하게 물었다.“저녁 적게 먹은 거야?”“엄마가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서요.”“너도 같이하게?”양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너무 열심히 다이어트해서 옆에 있는 나도 밥이 잘 넘어가지 않더라고요.”양석진이 입꼬리를 올렸다.그렇게 부녀는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세운시에서 경인시까지 거리도 먼데 매일 이렇게 오가면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겠어요?
“만약 그분들이 둘째를 낳으면 네가 사랑을 덜 받게 되면 어떡해?”양시연은 어이없어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양시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연정훈의 느슨해진 표정과 눈가에 번지는 웃음을 보고서야 그의 속뜻을 깨달았다.‘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참지 못하고 연정훈의 팔을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정훈 씨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연정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곁눈질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너무 예민하구나?”양시연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그에게 몸을 기울여 말했다.“당신 연기가 너무 좋아서 그렇죠. 당신이 반대한다고 생각해서 깜짝 놀랐어요. 우리 아빠의 행동이 정훈 씨에게 방해가 될까 봐 걱정했어요.”연정훈은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 속 좁네.”양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정훈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뒤 말했다.“알겠어요. 내가 오해했네요. 사과할게요.”연정훈은 콧방귀를 뀌면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됐어. 이제 얘기하지 마. 기분이 안 좋으니까.’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석으로 가서 연정훈의 품에 파고들었다.“삐지지 말고 둘째 얘기를 해볼까요?”연정훈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둘째 얘기를 왜 해? 첫째도 없잖아.”“아이고.”양시연은 그의 얼굴을 손끝으로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전부 저의 책임은 아니지 않나요?”연정훈은 의자를 조금 눕히며 한 손을 머리 뒤에 놓고 말했다.“내가 책임까지 져야 하는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했어.”“힘쓴다고 다 잘한 거는 아니죠. 밭에서 곡식이 자라지 않으면 씨앗이 잘못된 걸 수도 있잖아요.”양시연은 그를 응수하며 말하자 연정훈은 눈썹을 살짝 들어 양시연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말투가 점점 더 거침없어졌다.양시연은 연정훈의 시선에 살짝 민망해지며 방금 자신이 한 말이 꽤 세게 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양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연정훈의 품에 엎드리며 말했다.“어쨌든 밭에는 문제가 없어요.”
양시연이 양홍두의 서재에서 나올 때 가지고 들어갔던 그릇은 이미 모두 비어 있었고 양지원의 방 앞을 지나자 양지원은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음식 뚜껑을 열어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정말로 음식을 안 먹는 줄 알았는데.’양시연은 양지원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진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양시연은 음식을 가정부에게 맡기고는 양지원과 같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때 웨딩드레스를 남겨둔 게 다행이에요.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그들은 문을 닫고 이야기하며 분위기가 한층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다.양지원은 숄을 걸치고 소파 옆에 앉아 차를 마시며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이었고 양시연은 다가가서 물었다.“아빠가 어떻게 프러포즈 했어요?”양지원은 잠시 말없이 웃고 손을 들어 양시연의 이마를 가볍게 밀어냈다.“프러포즈? 우리가 너희들처럼 어린애들인 줄 알아?”양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결혼해 달라는 말이 없었어요?”양지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없었어. 석진 씨가 결혼할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괜찮겠다고 했어.”양시연은 놀라며 대답했다.“정말요? 나는 엄마가 결혼식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았어요.”양지원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아름다운 얼굴에 시간이 쌓아온 평화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어떤 말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양지원은 다소 충동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양석진의 흰머리 한 올이 그녀의 모든 망설임을 씻어버렸고 반생을 자제해온 양지원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당연히 이해할 수 없죠.”그녀는 소파에 기대며 턱을 괴고 말했다.“저는 그런 엄청난 남자에게 몇십 년 동안 사랑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요.”양지원은 양시연을 한 번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연정훈이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양시연은 대답했다.“그건 다르죠. 정훈 씨는 아빠처럼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설령 그 자리에 오른
연정훈은 양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가끔은 양시연을 든든히 지원하며 그녀가 정인 관리에 빠르게 익숙해지도록 도왔다. 부부는 바쁘지만 충실한 나날을 보냈다.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겨울이 들어선 뒤 양시연은 바쁜 일정을 보내며 반 달 동안이나 양씨 가문에 들르지 못했다.어느 날 저녁 그녀는 평소처럼 강남시티로 돌아와 남편 연정훈과 저녁을 먹으려 했지만 여 아주머니에게서 양홍두가 집에서 화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현재 양씨 가문에는 양홍두와 양지원만 함께 살고 있었고 양시연이 기억하기로 양홍두는 양지원에게 심하게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양시연은 급히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고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진 것을 느꼈다.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몇 마디를 속삭였고 그 말을 듣고 양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혼인 신고요?”집사는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쉿'하는 제스처를 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너무 화가 나셔서 아예 저녁도 안 드셨어요.”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그럼 우리 엄마는요?”집사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보이다가 말했다.“짐작이 가시죠?”“분명 저녁은 드셨겠죠.”집사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회장님께서 화를 내셔서 안 드시니까 큰아가씨가 음식을 자기 방으로 몽땅 가져가서 영화 보면서 다 드셨답니다.”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정말 양지원다운 행동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집사에게 음식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후 양홍두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집사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시연이 돌아온 목적은 화해를 시키기 위함이었다.양시연은 음식을 들고 양홍두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양홍두는 대나무 의자에 반쯤 기대어 누워 있었고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발소리를 들은 양홍두는 눈을 뜨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왔구나.”양시연은 음식을 내려놓으며 서둘러 양홍두를 부축했다.“여 아주머니가 말하자마자 바로 달려왔어요.”양홍두는 그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부승원은 바로 확답하지 않았고 승주와 희주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어색한 기운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결국 부승원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길이 많이 안 겹쳐.”희주가 재빠르게 물었다.“부 삼촌은 어디에 사세요?”부승원이 간략히 주소를 말하자 희주는 곧바로 대꾸했다.“결국 경인에 사시는 거잖아요.”“응.”“그럼 같은 경인인데 같은 방향 맞잖아요!”승주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고 부승원은 잠시 말을 잃었다.“...”그들에게는 ‘같은 방향’이라는 개념이 참 신선한 해석이었다.그때 짐 정리를 끝낸 반우희가 셋이서 몰래 뭐라고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다가왔고 그녀는 두 꼬마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그만해. 이미 늦었으니 부 변호사님 보내드려야지.”승주는 반우희를 보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누나는 옆에서 놀고 있어요. 우리는 부 삼촌과 이야기 좀 더 나눌 거니까.”부승원은 침묵했다.“...”‘이 집에서 누가 진짜 어른인지 모르겠군.’반우희는 부승원의 난처한 얼굴을 알아차렸고 시간도 너무 늦었기에 직접 승주와 희주를 방으로 돌려보내려 했다.“가서 자. 내일 토요일에 모임 있지 않아?”승주는 매우 초조해하며 반우희가 자신의 계획을 망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하려고 했다. 부승원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꼬리만 살짝 움직이며 그저 이 아이들이 재미있다고 느꼈다. 반우희는 그들을 쫓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끝내는 그들의 고집에 부딪혀 결국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먼저 부승원을 보내기로 결심했다.부승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어두운 복도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차는 멀리 주차되어 있었고 만약 반우희가 배웅한다면 그녀는 다시 이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와야 했다. 그것을 생각하자 부승원은 뒤돌아 반우희를 한 번 보며 말했다.“여기 있어. 난 혼자 갈게.”하지만 반우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따라나설 기세였다. 부승원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도 급히 멈춰 서며 그의 등에 거의 부딪힐 뻔했다.“문 닫고 얼른
반우희는 부승원이 거절할 줄 알았지만 그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녀는 멍해졌다.‘뭐지. 이 상황은?’승주는 반우희가 품에 든 가방을 받아 들고 앞장서며 물었다.“누나가 말했던 케이크는 다 가져왔어요?”반우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꾸했다.“아까는 ‘그냥 받은 음식은 안 먹는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더라?”승주는 당당하게 대답했다.“그건 질투 나서 그런 것을 못 알아들었어요? 지식인은 원래 질투가 많거든요. 질투할수록 더 교양 있어 보이는 거라고요.”반우희는 어이가 없었다.“...”부승원은 뒤에서 걸으며 미소를 살짝 지었다. 희주와 동준은 양옆에 붙어 얌전히 말을 걸었고 승주뿐만 아니라 이 두 아이도 수다스러운 타입이라 대화의 주제가 끊기지 않았다.내내 조용할 틈이 없었고 위층에서 갑자기 누군가 창문을 열며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승주, 지금 몇 시인데! 좀 조용히 해라!”승주는 고개를 들고 즉시 외쳤다.“알았어요. 귀가 정말 밝으시네요.”부승원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는데 말한 사람은 한 노인인 것을 보고 부승원은 침묵했다.“...”노인은 승주의 태도에 익숙한 듯 창문을 덜컥 닫아버렸다.승주는 부승원에게 약간 미안한 듯 웃으며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면서 노인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걸 암시하듯 눈짓을 보냈고 부승원은 별말 없이 끄덕이며 그의 행동에 동조했다.앞쪽에서 반우희는 이상하게 생각했다.‘부승원 씨가 왜 이렇게 승주에게 친절하지? 승주가 사랑스러운가?’그들은 우르르 집 안으로 들어갔고 반우희는 부승원을 대체 어떤 걸로 대접해야 할지 고민했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테이블 위에는 천 원짜리 레몬 토닉워터가 한 잔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제야 깨달았다....“부 삼촌, 편하게 앉으세요.”승주는 부승원을 맞이하며 레몬워터를 들고 탁자 근처로 갔고 승주는 전혀 거리낌 없이 레몬워터를 즉석에서 뜯어 주전자에 전부 부어버렸다.부승원은 침묵했다.“...”그 주전자는 아마 차를 끓이는 주전자였던 것
반우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둔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예의상 ‘괜찮아요’라고 할 법도 한데 반우희는 눈을 반짝이며 바로 차에 올랐다.‘공짜 차! 완전 땡큐지!’“감사합니다! 변호사님!”반우희는 가방을 뒷좌석에 두고 빠르게 좌수석에 올라탔다.이건 송민재 변호사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상사의 차를 탈 때에는 뒷좌석에 앉는 게 실례라는 것 말이다.반우희는 차에 올라 조심스레 문을 닫고 또 부승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부승원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휘휘 저었다.그렇게 차량은 정인 그룹을 빠져나갔다.부승원은 자꾸 백미러를 통해 반우희를 힐끔거렸는데 반우희는 아주 태연하게 각도를 뒤로 젖히고 편하게 등을 기대앉았다.평소 반우희에게 깐깐하게 대하지 않고 편하게 대했다면 아주 차 안을 샅샅이 훑어봤을지도 몰랐다.부승원은 이미 반우희네 집을 여러 번 다녀왔었고 내비게이션도 돌리지 않았다. 게다가 반우희도 차에 올라 주소를 알려주지도 않았다.‘정말 다시 봐도 멍청해.’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 반우희는 여러 번 입을 열어 분위기를 풀려 했으나 부승원의 얼굴이 너무 차가워 보여 하려던 농담을 몇 번이고 삼켰다.그래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반우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부승원은 더 어이가 없어졌다.이제 차 안의 분위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마른기침했다.“아, 죄송해요. 갑자기 웃긴 얘기가 떠올라서 못 참았어요.”그리고 고개를 돌려 부승원에게 물었다.“변호사님한테 들려드릴까요?”“그럴 필요 없어.”“넵.”‘쳇. 차갑긴.’반우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몸을 좌석에 말아 넣고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몰라도 차가 멈춰서자 반우희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도, 도착한 거예요?”“그래.”반우희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부승원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저도 모르게 입구에 어린아이들이 있지는 않을까 찾았다
연정훈이 추파를 던지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두 볼을 꾹꾹 찔렀다.“앞으로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돼요.”양시연이 명령하듯 말하자 연정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가끔은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어.”“마실 수는 있지만 너무 정직하게 주는 대로 받아먹지 말고 가끔은 힘든 척 쉬기도 하란 말이에요.”연정훈은 자세를 바로 세우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해봤다.“그럼, 무슨 핑계로 마시지 말까?”양시연이 고개를 들어 연정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때 연정훈이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임신 준비 중이라고 할까?”“...”양시연은 당황하다가 바로 얼굴을 붉히고 연정훈의 등을 내리쳤다.“장난하지 말고요!”연정훈은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 술을 마셔 불그스름하진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다.“나 장난 아니고 진심이야. 다른 직원이 나한테 이런 이유를 대면 나도 술을 권하기는 어렵거든.”양시연이 허리를 꼬집으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언제 동의했어요?”연정훈은 바로 양시연을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두 사람은 침대에 풀썩 누웠고 양시연은 숨을 몰아쉬다가 연정훈의 턱을 치켰다.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연정훈의 마음이 읽혔다. 그래서 먼저 연정훈에게 키스했다.입술이 맞닿고 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잡고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양시연과 함께 샤워실로 향했다.정인 그룹.부승원은 가장 마지막으로 회사를 나섰다.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었다.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가려는데 회의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그곳으로 걸어가서 보니 다름 아닌 반우희였다.반우희는 큰 박스에 양시연이 저녁에 사준 야식과 간식을 담고 있었다. 허겁지겁 박스에 담으며 또 어디론가 전화하고 있었다.“내일 친구들이랑 소풍 간다며? 누나가 간식 가지고 갈게. 사람들이 거의 먹지도 않았어.”“먹다 남긴 거 아니야. 그리고 너 2만 원짜리 케이크 먹어본 적 있어? 먹어보고나 말해.”“...”통화
양시연이 시선을 돌리자 주지혁은 바로 헤드 라이터를 꺼버렸다.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주지혁은 운전석에 앉아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았는데 양시연은 차갑게 시선을 거두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두 차량은 다른 방향에 세워졌고 현재는 각도가 비스듬히 붙어 있었다.양시연은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빠르게 차를 빼내 검은색 벤츠와 스치듯 지나쳤다.이제 레스토랑 골목을 벗어나자 뒷자리에서 연정훈이 부스럭거리며 일어났다.양시연은 그 소리에 웃음이 터졌다.“뭐해요?”“양 대표님 운전 실력이 깔끔하네요.”연정훈의 말에 양시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운전을 이어갔다.“영광인 줄 알아요. 정훈 씨도 예전처럼 굴었으면 주지혁 씨랑 똑같은 결말이었을 거예요. 언감생심 나랑 결혼할 수 있었겠어요?”연정훈은 두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마. 나 술 마셔서 지금 예민하단 말이야.”“예민하면 눈 감고 잠이나 자요.”굳이 말을 걸다니 연정훈도 참 웃겼다.연정훈은 잠이 오지 않았고 계속 꾸역꾸역 양시연에게 주지혁을 만난 기분이 어떤지 인터뷰했다.양시연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있는 동안 대답을 이었다.“기분이요? 보면 짜증 나긴 한데 원망까지는 아니에요.”몇 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어 과거의 사소한 일은 이제 기억할 가치가 없었다.하지만...양시연이 다시 운전대를 잡고 백미러로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했다.“그 사람들 한 패거리죠?”“똑똑하네.”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 해도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이동하면 한 패거리라는 건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정호덕 회장님은 부이사장님이고, 이 회장님은 함께 자리하지 않은 걸 보아 다른 패거리인가 보죠?”“이 회장님은 우리 아버지 대학교 시절 룸메이트야.”‘아, 그렇군.’양시연은 드디어 안심되었다.열심히 분석하는 양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다시 주지혁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제 양시연에게 주지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강남
양시연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정호덕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우리가 연 대표 잡아먹을까 봐 걱정 한 거예요? 아니면 연 대표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날 까 걱정 한 거예요?”양시연은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방금 회장님께서 우리 남편 인기가 많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네요.”“그건 방금 양시연 씨를 만나기 전 제 생각이지요. 양시연 씨가 이렇게 미모의 여성인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연 대표가 아무리 능력이 좋고 인기가 많다고 해도 집에 미모의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한테 시선이 가겠습니까?”정호덕의 말에 양시연은 살풋 미소를 터뜨렸다.‘참.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네.’정호덕 회장님은 연정훈의 상사로 연정훈과 호형호제를 한다고 해도 연정훈에게 깎듯이 예의를 차리지는 않았다.그러나 양시연에게는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그리고 양시연은 그 이유가 양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늦어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제 기회가 되면 우리 집으로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 꼭 오시길 바랍니다.”양시연의 말에 정호덕이 바로 대답했다.“시간만 된다면 얼마든지요.”연정훈은 그제야 입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양시연의 손을 잡고 떠났다.차에 오른 뒤 양시연은 연정훈의 기분이 꽤 좋은 걸 눈치챘다.‘쯧. 유치하긴.’‘어쩐지 아까 차에 오르지 않고 꾸물거리더니. 시간 맞춰 주지혁한테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구나.’두 사람의 뒤로 정호덕 무리는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소를 지운 정호덕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시작했다.“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타고난 팔자는 다 다르지요. 예전에는 여자들이 시집을 잘 가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편히 산다던데 우리 남자들도 다 똑같아요. 연 대표 능력도 좋지만 좋은 처가를 만난 것도 능력이에요.”그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조재민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