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은 그저 한 번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양시연이 손을 빼자 그는 바로 놓아주었다.사람들 앞에서는 그녀와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연결이 있음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그들은 천 회장과의 자리에서 두 시간을 보낸 뒤 앞뒤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옆의 홍천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한우빈과 이승우 일행이 모임을 하고 있었고 양시연의 직원들도 옆방에서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술자리의 격식 있는 분위기와 달리 이승우 일행의 방은 한층 더 텐션 높은 축제 분위기였다. 문을 열자마자 어두운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독립된 클럽처럼 음악과 대화가 어우러져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방 안 공기에는 호르몬이 충돌하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양시연은 그 안에 있으면서도 어지럼증을 느꼈다.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기에 취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양시연은 방 안에 퍼져 있는 독특한 향기가 평범하지 않음을 알아챘다.다행히 위험한 물질은 아니었고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자 금세 제정신이 돌아왔다.멀리 보이는 커다란 도박 테이블 위에는 높은 금액의 베팅이 오가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테이블의 숫자들을 바라보며 양시연의 머릿속에는 최근 며칠간 다룬 자금들이 스쳐 갔다.순간 피가 뜨겁게 끓는 기분이 들었다. 흥을 돋우는 향기보다도 돈과 권력의 유혹이 그녀를 더 강렬히 자극했다.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양시연은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연정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치 하늘을 뒤집고 비를 내리는 듯 이 자리에 있는 다른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그가 도박 테이블에 앉아 능숙하게 판을 이끄는 모습은 운조차도 그의 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그래서인지 방 안의 여성들은 그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양시연은 다시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았다.그러나 실수로 손이 연정훈의 허벅지 위에 닿았다.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양시연의 손바닥이 차가움과
양시연은 깊게 숨을 내쉬며 연정훈을 바라봤다.“정훈 씨, 정말 능숙하네요. 여자들한테 이런 질문 많이 해봤나 봐요.”연정훈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답했다.“아니. 너한테만 물어봤어.”“...”연정훈은 여전히 양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양시연은 침을 삼키며 가로등 불빛 아래 또렷이 드러난 그의 입술에 시선이 멈췄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날 강남 시티에서 연정훈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고 키스했던 순간이 떠올랐다.거칠고 강렬했던 그 키스는 마치 자신을 온전히 삼켜버리겠다는 듯한 감각을 남겼다.그런데도 지금 양시연은 자신이 그 강렬함을 다시 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바라지도 않았다.연정훈은 전 남자친구였고 관계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충동이 단지 일시적인 생리적 반응일 뿐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양시연은 더 이상 연정훈을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런 충동은 단지 생리적 욕구일 뿐이었다.‘안 돼. 이건 위험해.’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아꼈다. 연정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잠시 후 그는 조용히 담배 한 갑을 사러 갔다.양시연은 이들이 재회한 이후 그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처음 목격했다.담배 끝에서 작은 불빛이 희미하게 빛났고 연정훈의 얇은 입술 사이에 담배가 물려 있었다. 연정훈이 연기를 내뿜을 때마다 보여주는 여유만만한 눈빛과는 달리 시선은 그녀에게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지속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정훈은 담배를 더 깊이 빨아들였다. 연정훈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졌고 마치 니코틴으로 양시연에 대한 억눌린 욕망을 진정시키려는 듯 보였다.양시연은 그 시선이 자신을 휘감는 기분에 숨이 막힐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연정훈은 담배의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신 뒤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는 천천히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양시연은 여전히 느긋하게 앉아 있었지만, 반응할 새도 없이 연정훈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뒤를 감싸며 창문 밖으로 양
강남시티의 정원 계단 아래 양시연은 문을 여는 연정훈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들어와.”연정훈은 문턱에 서서 짧게 말했다.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적시며 그의 깊고 무거운 시선을 마주했다.“내일 다시 올게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연정훈은 문을 약간 열어 둔 채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손에 든 가방끈을 꽉 쥐었다. 머릿속이 점점 더 흐릿해졌다. 술기운도 거의 사라졌고 강렬한 향도 없었는데 왜인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그녀는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갔다. 연정훈의 시선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듯 눈길을 떼지 않았다.문턱을 넘는 순간 양시연은 작게 말했다.“나비를 불러 주세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시연은 문 안으로 들어섰고 연정훈과 다시 마주쳤다. 연정훈의 눈빛은 더 이상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눈빛 속엔 포식자가 덫에 걸린 사냥감을 응시하는 듯한 냉정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정훈의 공격 기세가 느껴지자 양시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도망가려 했다.그러나 이미 늦었다.연정훈은 단숨에 그녀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그리고 한 손으로 문을 거칠게 닫았다. ‘쿵’하고 닫힌 문이 내는 소리와 함께 양시연은 대문에 등을 기댔고 옆에는 연정훈의 강한 팔이 벽처럼 양시연을 가로막았다.그 순간 호숫가에서 키스가 생생하게 떠올랐다.연정훈의 몸에서 풍기는 담배 향이 은은히 코끝을 파고들었다. 그 향기는 양시연의 신경을 일깨우며 온몸 깊숙이 파고들어 짜릿한 전율을 일으켰다.양시연은 그제야 그 향기가 만들어낸 치명적인 효과를 깨달았다.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연정훈은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단 한 번의 눈빛 교환만으로도 양시연은 그가 자신을 향한 욕망에 불을 지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정훈은 겉으로는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연정훈의 키스는 모든 자제심을 잃은 것처럼 뜨겁고 거칠었다.양시연은 온몸이 긴장
양시연의 손은 제압당한 채 연정훈의 장난스러운 손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가 부드럽게 양시연의 몸속을 파고들어 결국 심장까지 전해졌다.심장은 겁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귓가에는 연정훈의 짜증 나는 위협의 목소리가 압박하듯 들려왔다.“대답해.”‘대답은 무슨!’양시연은 짧게 신음을 흘리며 연정훈의 품 안에서 몸을 두 번 비틀었다.“일단 날 놓아줘요.”연정훈은 양시연의 귓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놓아주는 대신 한 손을 자유롭게 풀어 양시연의 셔츠 단추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하나, 둘. 연정훈의 손가락이 양시연의 쇄골을 스치자 양시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연정훈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한여름에 거실엔 에어컨이 켜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격렬한 분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땀이 흘러내렸고 양시연의 등은 연정훈의 가슴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 접촉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연정훈은 건조한 침을 삼키며 목젖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 번째 단추를 풀고 나서 양시연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느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양시연의 가슴골에 맺힌 땀방울을 부드럽게 닦아냈다.미끄러운 느낌과 미세한 마찰감에 양시연은 가늘게 숨을 들이켰다.연정훈은 손을 들어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손가락에 맺힌 물방울을 양시연에게 보여주며 일부러 과시하듯 행동했다.양시연은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숨조차 쉴 틈이 없었다.연정훈은 천천히 손을 양시연의 셔츠에 문지르며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양시연의 속옷 주위를 서서히 따라가며 위협적으로 다가갔다.“네가 말했지. 정인을 너에게 줄 테니 나랑 결혼하자고. 기억나?”연정훈이 오래된 얘기를 꺼내자 양시연은 깊게 숨을 두 번 들이쉬며 얼굴을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필요 없어요. 놓아줘요!”“필요 없다 하면 끝이야?”연정훈은 양시연의 가슴을 밀치고 한 손을 두 사람 사이로 넣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양시연의 속옷 고리
양시연은 몸을 일으켜 삼키며 계속해서 침을 삼켰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연정훈은 양시연의 길을 막았다. 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며 벨트를 천천히 풀어냈다.양시연이 몸을 틀어 피하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아 침대 중앙으로 밀어 눕혔다.양시연이 고개를 들자 그의 무릎이 침대에 눌려 두 다리가 양시연의 몸 양옆으로 벌어져 있었고 연정훈은 몸을 구부려 한 손은 양시연의 얼굴 옆에 댔다.고개를 돌린 양시연의 시선 끝에 떨어진 벨트가 보였다. 금속 버클이 코끝 가까이서 반짝였다.양시연은 가죽 특유의 미세한 냄새와 연정훈 옷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이 어우러져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면서도 강렬한 그의 향기였다.양시연은 눈을 꽉 감고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양시연이 저항을 멈추자 연정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연정훈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너를 웃게 하려고 삼촌한테 큰소리도 들었어. 아직 부족해?”양시연은 이를 악물며 눈을 떴다.“내가 도와줄 때 이미 말했잖아요. 이 일로 결혼 문제를 거래할 생각 없다고요.”“나는 거래하려는 게 아니야.”“그러면 지금 뭐 하는 거예요?”양시연은 화가 나서 얼굴을 돌렸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두 사람의 코끝이 가볍게 스쳤다.두 사람의 호흡이 엉키며 공기마저 희미해진 듯했다.연정훈은 미소를 띠며 몸을 살짝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어린 눈빛이 스쳐 갔다.“내가 지금 뭐 하는 것 같아?”“정훈 씨는...”“너를 기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연정훈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시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자존심 때문에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날 놔달라니까요!”말이 끝나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술을 조심스레 깨물었다.연정훈은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널 풀어주면 네가 날 더
연정훈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양시연을 침대에 기대도록 손짓하며 양시연을 편히 눕혔다.하지만 양시연은 몸을 움츠린 채 경계하듯 그를 노려보았다.연정훈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었다.양시연은 이불을 확 던져 다시 그의 손에 돌려주며 속으로 생각했다.‘누가 이걸 달랬다고.’연정훈은 잠깐 침묵했다.“...”‘이 고집. 지원 이모랑 똑같네.’“왜 말을 멈췄요?”양시연이 먼저 날카롭게 그를 몰아붙였다.연정훈은 침대의 반대편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자칫 또 화를 낼까 싶어서였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소현주는 정신병원에 있어.”양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정훈 씨, 참 대단하네요. 전 여자친구가 정신병원에 갔는데도 이렇게 신경 써주는 남자라니.”“내가 신경 쓴 거 아니야. 소현주는 그냥 일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어. 관리도 다른 환자들과 다를 게 없고 보호자는 소현주의 친척이야.”하지만 양시연은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겨보며 믿지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사실 소현주가 지금도 신주병원에 있는지조차 난 몰라.”양시연은 비웃으며 쏘아붙였다.“그럼 알아보면 되겠네요. 이제 아무도 정훈 씨가 소현주 씨 걱정하는 걸 막을 사람 없잖아요. 찾아가서 확인해 보세요. 아니면 아예 같이 병원에 입원해도 되고요.”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이마를 짚으며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양시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 정도였다. 이 몇 년간 어떻게 수련했는지 궁금했다.양시연은 그가 다가오려 하자 병아리처럼 몸을 움츠렸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연정훈은 그 모습에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굳이 소현주랑 함께 입원할 필요는 없어. 난 소현주와 헤어진 순간부터 다시 얽힐 생각이 없었으니까.”양시연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쳇.”양시연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연정훈은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게 말을 이어
연정훈은 반박하지 않았다.이 모든 일이 결국 자신이 자초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양시연에 대한 감정을 더 일찍 깨닫지 못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조금만 더 빨리 솔직해졌더라면 이렇게까지 오해가 깊어지진 않았을 것이다.“우리가 함께했던 그 시절 나의 잘못이야. 그건 인정해.”양시연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억눌린 울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정말 당신이 잘못을 인정한다면 이번 한 번은 그냥 너그럽게 넘어가 줘요. 이 모든 건 내가 공짜로 얻은 행운이라고 치고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줘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그건 별개의 문제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쳇!’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아 침대 머리맡에 기대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연정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정훈 씨가 잘못을 인정하고 나한테 잘해주면 내가 정훈 씨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그런 뜻은 아니야.”“근데 정훈 씨 행동 논리는 그런 뜻으로 보여요!”“아니라고.”이번에는 연정훈이 반박했다.“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건 네가 내게 돌아오길 바라는 거지 네가 나한테 고마워하길 바라는 게 아니야. 네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 내 진심을 왜곡하고 개념을 바꿔치기하는 거야.”양시연은 침묵을 지켰다.“...”논리로 전직 교사와 대화하려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양시연은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곧장 물었다.“정훈 씨는 계속 소현주 씨랑 헤어진 뒤로는 다시 엮일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어요. 맞죠?”“응.”“거짓말하지 말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마치 치명적인 약점을 잡은 듯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그의 성한 다리를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는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자신이 또 어떤 실수를 했는지 곰곰이 떠올렸다.양시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턱을 치켜들었다.“그해 내가 운
“마음대로 말해요. 난 더 이상 신경 안 써요.”양시연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차피 정훈 씨랑 결혼할 마음 없으니까요.”연정훈은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연정훈을 힐끗 쳐다보고는 모든 걸 꿰뚫어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정훈 씨가 정인을 나한테 넘긴다고 해서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아요? 당신 속셈은 너무 뻔해요.”연정훈은 억울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잠시 침묵하던 그는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됐다. 이렇게는 대화가 안 통하겠군.’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몸을 이완했다. 다리를 꼬고 양시연 맞은편에 편히 기대앉은 그는 차분히 물었다.“그래서 내가 뭘 노린다는 건데?”양시연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요즘 몇 년 안에 관직에 오르려는 생각 하고 있죠?”“그런 셈이지.”양시연은 비웃음을 흘렸다.“흥!”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리며 연정훈을 흘겨보았다.“그러면서도 아무 속셈이 없다고요?”연정훈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예전엔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했던 사람이 이제는 권력을 노리고 있는 거죠. 정인 그룹은 더 이상 당신에게 필요 없으니까 나를 이용해서 털어내려는 거고요. 그러고 나서는 다시 날 집에 끌어들여서 양손 가득 챙기겠다는 계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의 단호한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그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자 양시연은 자신이 제대로 간파했다고 확신한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이 맞죠?”“...”연정훈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정인을 네가 원해서 준다는데 내가 이걸 계산적으로 이용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해?’“이미 말했잖아. 정인 그룹은 네 소유가 된다고.”“정훈 씨랑 결혼하면요? 아이가 생기면요? 결국 정인 그룹은 정훈 씨 아이한테 넘어가는 거 아니에요? 내가 바보로 보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