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시티의 정원 계단 아래 양시연은 문을 여는 연정훈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끊임없는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들어와.”연정훈은 문턱에 서서 짧게 말했다.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적시며 그의 깊고 무거운 시선을 마주했다.“내일 다시 올게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연정훈은 문을 약간 열어 둔 채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손에 든 가방끈을 꽉 쥐었다. 머릿속이 점점 더 흐릿해졌다. 술기운도 거의 사라졌고 강렬한 향도 없었는데 왜인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그녀는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갔다. 연정훈의 시선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듯 눈길을 떼지 않았다.문턱을 넘는 순간 양시연은 작게 말했다.“나비를 불러 주세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시연은 문 안으로 들어섰고 연정훈과 다시 마주쳤다. 연정훈의 눈빛은 더 이상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눈빛 속엔 포식자가 덫에 걸린 사냥감을 응시하는 듯한 냉정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양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정훈의 공격 기세가 느껴지자 양시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도망가려 했다.그러나 이미 늦었다.연정훈은 단숨에 그녀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그리고 한 손으로 문을 거칠게 닫았다. ‘쿵’하고 닫힌 문이 내는 소리와 함께 양시연은 대문에 등을 기댔고 옆에는 연정훈의 강한 팔이 벽처럼 양시연을 가로막았다.그 순간 호숫가에서 키스가 생생하게 떠올랐다.연정훈의 몸에서 풍기는 담배 향이 은은히 코끝을 파고들었다. 그 향기는 양시연의 신경을 일깨우며 온몸 깊숙이 파고들어 짜릿한 전율을 일으켰다.양시연은 그제야 그 향기가 만들어낸 치명적인 효과를 깨달았다.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했지만, 연정훈은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단 한 번의 눈빛 교환만으로도 양시연은 그가 자신을 향한 욕망에 불을 지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정훈은 겉으로는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연정훈의 키스는 모든 자제심을 잃은 것처럼 뜨겁고 거칠었다.양시연은 온몸이 긴장
양시연의 손은 제압당한 채 연정훈의 장난스러운 손길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가 부드럽게 양시연의 몸속을 파고들어 결국 심장까지 전해졌다.심장은 겁날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귓가에는 연정훈의 짜증 나는 위협의 목소리가 압박하듯 들려왔다.“대답해.”‘대답은 무슨!’양시연은 짧게 신음을 흘리며 연정훈의 품 안에서 몸을 두 번 비틀었다.“일단 날 놓아줘요.”연정훈은 양시연의 귓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놓아주는 대신 한 손을 자유롭게 풀어 양시연의 셔츠 단추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하나, 둘. 연정훈의 손가락이 양시연의 쇄골을 스치자 양시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연정훈의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한여름에 거실엔 에어컨이 켜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격렬한 분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땀이 흘러내렸고 양시연의 등은 연정훈의 가슴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 접촉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연정훈은 건조한 침을 삼키며 목젖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 번째 단추를 풀고 나서 양시연의 가슴에 맺힌 땀을 느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손가락을 살짝 구부려 양시연의 가슴골에 맺힌 땀방울을 부드럽게 닦아냈다.미끄러운 느낌과 미세한 마찰감에 양시연은 가늘게 숨을 들이켰다.연정훈은 손을 들어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손가락에 맺힌 물방울을 양시연에게 보여주며 일부러 과시하듯 행동했다.양시연은 그를 욕하고 싶었지만, 숨조차 쉴 틈이 없었다.연정훈은 천천히 손을 양시연의 셔츠에 문지르며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양시연의 속옷 주위를 서서히 따라가며 위협적으로 다가갔다.“네가 말했지. 정인을 너에게 줄 테니 나랑 결혼하자고. 기억나?”연정훈이 오래된 얘기를 꺼내자 양시연은 깊게 숨을 두 번 들이쉬며 얼굴을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필요 없어요. 놓아줘요!”“필요 없다 하면 끝이야?”연정훈은 양시연의 가슴을 밀치고 한 손을 두 사람 사이로 넣어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양시연의 속옷 고리
양시연은 몸을 일으켜 삼키며 계속해서 침을 삼켰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연정훈은 양시연의 길을 막았다. 연정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며 벨트를 천천히 풀어냈다.양시연이 몸을 틀어 피하려 하자 연정훈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잡아 침대 중앙으로 밀어 눕혔다.양시연이 고개를 들자 그의 무릎이 침대에 눌려 두 다리가 양시연의 몸 양옆으로 벌어져 있었고 연정훈은 몸을 구부려 한 손은 양시연의 얼굴 옆에 댔다.고개를 돌린 양시연의 시선 끝에 떨어진 벨트가 보였다. 금속 버클이 코끝 가까이서 반짝였다.양시연은 가죽 특유의 미세한 냄새와 연정훈 옷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이 어우러져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익숙하면서도 강렬한 그의 향기였다.양시연은 눈을 꽉 감고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양시연이 저항을 멈추자 연정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연정훈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옆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너를 웃게 하려고 삼촌한테 큰소리도 들었어. 아직 부족해?”양시연은 이를 악물며 눈을 떴다.“내가 도와줄 때 이미 말했잖아요. 이 일로 결혼 문제를 거래할 생각 없다고요.”“나는 거래하려는 게 아니야.”“그러면 지금 뭐 하는 거예요?”양시연은 화가 나서 얼굴을 돌렸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두 사람의 코끝이 가볍게 스쳤다.두 사람의 호흡이 엉키며 공기마저 희미해진 듯했다.연정훈은 미소를 띠며 몸을 살짝 들어 올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난기 어린 눈빛이 스쳐 갔다.“내가 지금 뭐 하는 것 같아?”“정훈 씨는...”“너를 기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연정훈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양시연은 어이없었다.“...”양시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자존심 때문에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날 놔달라니까요!”말이 끝나자 양시연은 연정훈의 입술을 조심스레 깨물었다.연정훈은 여유롭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널 풀어주면 네가 날 더
연정훈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양시연을 침대에 기대도록 손짓하며 양시연을 편히 눕혔다.하지만 양시연은 몸을 움츠린 채 경계하듯 그를 노려보았다.연정훈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었다.양시연은 이불을 확 던져 다시 그의 손에 돌려주며 속으로 생각했다.‘누가 이걸 달랬다고.’연정훈은 잠깐 침묵했다.“...”‘이 고집. 지원 이모랑 똑같네.’“왜 말을 멈췄요?”양시연이 먼저 날카롭게 그를 몰아붙였다.연정훈은 침대의 반대편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와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자칫 또 화를 낼까 싶어서였다.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소현주는 정신병원에 있어.”양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정훈 씨, 참 대단하네요. 전 여자친구가 정신병원에 갔는데도 이렇게 신경 써주는 남자라니.”“내가 신경 쓴 거 아니야. 소현주는 그냥 일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어. 관리도 다른 환자들과 다를 게 없고 보호자는 소현주의 친척이야.”하지만 양시연은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겨보며 믿지 않았다.연정훈은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사실 소현주가 지금도 신주병원에 있는지조차 난 몰라.”양시연은 비웃으며 쏘아붙였다.“그럼 알아보면 되겠네요. 이제 아무도 정훈 씨가 소현주 씨 걱정하는 걸 막을 사람 없잖아요. 찾아가서 확인해 보세요. 아니면 아예 같이 병원에 입원해도 되고요.”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이마를 짚으며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양시연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 정도였다. 이 몇 년간 어떻게 수련했는지 궁금했다.양시연은 그가 다가오려 하자 병아리처럼 몸을 움츠렸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연정훈은 그 모습에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굳이 소현주랑 함께 입원할 필요는 없어. 난 소현주와 헤어진 순간부터 다시 얽힐 생각이 없었으니까.”양시연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쳇.”양시연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연정훈은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게 말을 이어
연정훈은 반박하지 않았다.이 모든 일이 결국 자신이 자초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양시연에 대한 감정을 더 일찍 깨닫지 못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조금만 더 빨리 솔직해졌더라면 이렇게까지 오해가 깊어지진 않았을 것이다.“우리가 함께했던 그 시절 나의 잘못이야. 그건 인정해.”양시연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억눌린 울분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정말 당신이 잘못을 인정한다면 이번 한 번은 그냥 너그럽게 넘어가 줘요. 이 모든 건 내가 공짜로 얻은 행운이라고 치고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줘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그건 별개의 문제야.”양시연은 어이없었다.“...”‘쳇!’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아 침대 머리맡에 기대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연정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정훈 씨가 잘못을 인정하고 나한테 잘해주면 내가 정훈 씨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그런 뜻은 아니야.”“근데 정훈 씨 행동 논리는 그런 뜻으로 보여요!”“아니라고.”이번에는 연정훈이 반박했다.“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건 네가 내게 돌아오길 바라는 거지 네가 나한테 고마워하길 바라는 게 아니야. 네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 내 진심을 왜곡하고 개념을 바꿔치기하는 거야.”양시연은 침묵을 지켰다.“...”논리로 전직 교사와 대화하려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양시연은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곧장 물었다.“정훈 씨는 계속 소현주 씨랑 헤어진 뒤로는 다시 엮일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어요. 맞죠?”“응.”“거짓말하지 말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마치 치명적인 약점을 잡은 듯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그의 성한 다리를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는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자신이 또 어떤 실수를 했는지 곰곰이 떠올렸다.양시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턱을 치켜들었다.“그해 내가 운
“마음대로 말해요. 난 더 이상 신경 안 써요.”양시연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어차피 정훈 씨랑 결혼할 마음 없으니까요.”연정훈은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양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연정훈을 힐끗 쳐다보고는 모든 걸 꿰뚫어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정훈 씨가 정인을 나한테 넘긴다고 해서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아요? 당신 속셈은 너무 뻔해요.”연정훈은 억울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잠시 침묵하던 그는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됐다. 이렇게는 대화가 안 통하겠군.’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몸을 이완했다. 다리를 꼬고 양시연 맞은편에 편히 기대앉은 그는 차분히 물었다.“그래서 내가 뭘 노린다는 건데?”양시연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요즘 몇 년 안에 관직에 오르려는 생각 하고 있죠?”“그런 셈이지.”양시연은 비웃음을 흘렸다.“흥!”그러고는 고개를 홱 돌리며 연정훈을 흘겨보았다.“그러면서도 아무 속셈이 없다고요?”연정훈은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예전엔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했던 사람이 이제는 권력을 노리고 있는 거죠. 정인 그룹은 더 이상 당신에게 필요 없으니까 나를 이용해서 털어내려는 거고요. 그러고 나서는 다시 날 집에 끌어들여서 양손 가득 챙기겠다는 계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의 단호한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그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자 양시연은 자신이 제대로 간파했다고 확신한 듯 미소를 지었다.“내 말이 맞죠?”“...”연정훈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정인을 네가 원해서 준다는데 내가 이걸 계산적으로 이용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해?’“이미 말했잖아. 정인 그룹은 네 소유가 된다고.”“정훈 씨랑 결혼하면요? 아이가 생기면요? 결국 정인 그룹은 정훈 씨 아이한테 넘어가는 거 아니에요? 내가 바보로 보
“연정훈 씨!”“하...그만 하세요...”“음...음...”방에서는 부끄러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다행히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알파카 두 마리가 침실 주위를 맴돌며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침대에 앉아 있던 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기대고 있었지만, 옷은 이미 흐트러져 있었다. 양시연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셔츠의 단추는 풀어졌고 속옷도 흐트러져 있었다.양시연은 한 손으로 흘러내리려는 셔츠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연정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연정훈의 힘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연정훈의 오른손은 지금 순간 악행을 벌이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철저히 지배당했다.미세한 소리가 양시연을 부끄럽게 만들었지만, 온몸에 퍼지는 쾌감은 그녀로 하여금 삶의 행복을 온전히 느끼게 했다.양시연은 한 송이의 꽃처럼 연정훈의 지배하에 천천히 피었다.‘기분이 좋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어깨에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천천히 양시연의 주의를 흩트렸다. 연정훈의 움직임은 그녀가 자극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을 바라보았고 흐릿해진 시선은 초점을 잃은 듯했다.연정훈은 갑자기 멈췄다.양시연은 가볍게 소리를 냈다.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만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다시 누우라고 하고 무릎으로 고정하자 그녀의 그녀의 다리가 살짝 벌어졌다.연정훈이 셔츠를 벗는 모습을 보자 양시연은 심장이 빨리 뛰었다.그는 다시 입맞춤을 시작했다. 양시연의 손을 잡은 채 연정훈의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양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밀치며 말했다. “안돼요! 정훈 씨, 그만 멈춰요!”‘멈추라니!’연정훈은 양시연이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스스로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양시연의 손을 강제로 움직이게 했다.양시연은 눈을 꼭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그런데 다음 순간 가슴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양시연이 피하려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양시연은 힘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우리 집에 가서 뭐 하시려는 거예요?”“청혼 하려고.”양시연은 코웃음을 치며 쓴웃음을 지었다.“가세요. 엄마 집에 있어요.”‘엄마가 정훈 씨를 잡아먹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연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9시 정각에 너희 집에 갈게.”양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망설였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괜히 걱정되었다.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양지원이 있으니 연정훈이 간다고 한들 좋은 일이 생길 리 없었다.‘흥.’연정훈은 욕실로 가서 욕조에 물을 채운 뒤 다시 침대 옆으로 와 양시연을 자연스럽게 안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이 귀찮았다.“집에 가서 씻을게요!”연정훈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양시연은 속으로 미칠 것 같았다.지금은 그와 다툴 기운도 없고 끈적거리는 몸이 너무 불편했다. 연정훈은 아까 끝까지 하지 않았으니 욕실에서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욕실 문이 닫히자 양시연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나가세요. 씻을 거예요.”연정훈은 대답 대신 그녀를 욕조 안으로 들어 올렸다.“내가 씻겨줄게.”그는 수건을 그녀의 머리 위에 부드럽게 올렸다.“난....”연정훈은 샤워 헤드를 켜서 부드러운 물줄기를 양시연의 땀에 젖은 얼굴 위로 흘렸다.양시연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아. 정훈 씨는 정말 귀가 먹었나? 점점 더 짜증 나네!’그러나 연정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따뜻한 물과 섬세한 손길로 그녀를 조심스레 씻겨주었다.몸에 닿는 적당한 힘과 온기에 그녀는 점점 졸음이 밀려오는 듯했다.눈을 반쯤 감은 채 참지 못하고 물었다.“정훈 씨, 혹시 몇 년 동안 마사지 샵에서 근무했어요?”연정훈은 어이없었다.“...”밤새 그들은 엉뚱한 대화를 이어가며 얼떨결에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양시연은 이불을 모두 차지했고 연정훈은 화내는 대신 다른 이불을 꺼내 덮었다.밤은 고요했고, 양시연은 술에 취한 몸이 한층 편안해지며 달콤한 잠에 빠져
오성호가 죽자 양혁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모든 걸 혼자 감당할 거로 생각했다.누군가 그에게 ‘네가 악몽 꿀까 봐 걱정돼’, ‘슬플까 봐 걱정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 안에서 일어난 미세한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그날 밤 변여름은 마치 작은 수호신처럼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켰다.그는 처음으로 마음속 어딘가에 기대어도 된다는 감정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미세한 소리를 들으며 전보다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잠들었다.해가 막 떠오르려는 새벽에 오성호는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양혁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장 간단한 절차로 화장을 준비했다.며칠 전 한강시에서 오래된 집사가 찾아왔다. 겉으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양혁수는 양지원이 그를 대신해 장례를 챙기도록 보낸 거로 생각했다.이틀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고 그는 유골함을 집에 임시로 안치한 뒤 며칠 후 한강시로 옮길 준비를 했다.설날이 다가오자 양지원이 전화를 걸어 어디서 보낼지 물었다.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는 북적이는 곳을 즐겼지만 요즘은 성격이 한층 차분해져 설날에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꺼렸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한강시로 모셔 함께 명절을 보내거나 그가 경인으로 가는 편이 가장 편하고 좋았다.하지만 올해는 곁에 변여름이 있었다.그녀는 설날을 특별히 챙기지 않는 집안 출신이라 굳이 집에 갈 필요도 없었다.양혁수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갈지 결정하지 못했고 일단 양지원에게 말을 돌렸다.그는 변여름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노지혜가 끼어들었다.“그쪽에서는 설날이 큰 행사예요. 진짜 사귀는 여자 친구라면 데려가야죠.”변여름이 알아본 바로는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여자 친구들도 대부분 설날에는 자기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집에 가는 게 귀찮았고 이번만큼은 양혁수가 자신을 데려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상황이
변여름의 한마디에 양혁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가슴에 가득 찼다.그가 이를 악물자 변여름은 진심 어린 아쉬움이 스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70점은 너무 적어요. 내가 오빠한테 키스 몇 번 더 할 테니 80점으로 올려줄 수 있어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변여름은 그의 등 뒤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끈적하게 달라붙는 상큼한 레몬 맛 엿처럼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양혁수는 도무지 그녀를 떼어낼 수 없어 결국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들어 올렸다.변여름은 놀란 숨을 삼키며 그를 꼭 껴안았고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그의 얼굴에 바싹 닿아 있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변여름을 흘겨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은 59점이야.”‘푸. 80점을 바라다니.’변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잽싸게 다가가 양혁수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60점이면 좋아요. 80점까지는 욕심내지 않을게요.”양혁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코웃음을 흘렸다.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변여름은 그의 옆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늘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크고 작은 사고도 잦았다. 하지만 어떤 성취보다 지금 이 남자의 마음을 얻는 일이 더 벅차고 소중했다.그가 몇 점을 주든 그녀는 그저 기뻤다.양혁수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곁눈질로 그녀를 슬쩍 바라보았다.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목에 닿는 그녀의 힘은 마치 목줄 같았다. 양혁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이 골칫덩이를 정말 떼어낼 수 없겠어.’하지만 떼어내고 싶지도 않았다.그가 화서시에 온 이유는 오성호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지만 오성호가 바로 죽지 않아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 며칠은 우울했지만 그 뒤로는 일주일 넘게 변여름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함께 먹고 함께
양혁수는 목을 가다듬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지었다.“...조금?”‘응?’변여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더니 이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실험실의 연구자처럼 엄정한 표정을 지었다.“조금이면 몇 퍼센트쯤 되는 건가요?”양혁수는 잠시 생각했다.변여름은 계속해서 추궁했다.“만점이 백 점이면 조금은 몇 점쯤 될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고 방금의 말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너무 높게 말하면 선을 넘을 것 같고 너무 낮게 말하면...’양혁수는 변여름의 얼굴에 스친 심각한 표정을 보고 그 생각을 떨쳐냈다. 너무 낮게 말했다간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래도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점수를 입에 올렸다.“60점.”‘60점밖에?’변여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순간 멈칫했다.‘너무 낮았나?’그가 서둘러 말을 수습하려던 찰나 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를 악문 채 감정을 눌러 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60점은 좀 적어요. 다시 말해줄 수 있어요?”‘네?’그녀는 가볍게 말했지만 양혁수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동시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변여름은 예전에 연기를 참 잘했는데 요즘은 점점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에든베타에 있을 때부터 그를 부려 먹더니 이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마음대로 휘두르려 드는 것이다.‘하하. 말도 안 돼.’지금 그녀는 감히 그의 머리 위에서 놀아보겠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고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60점이면 많아.”그는 눈빛을 바꾸며 마지못해 후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50점 정도인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변여름은 한 발짝 다가와 그의 발끝에 그녀의 발끝을 겹쳤다.양혁수는
키스는 쉽지만 그것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졌다.입술을 떼자 양혁수는 웃고 있는 변여름의 눈과 마주쳤고 그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그녀에게 완전히 휘둘릴 것 같았다.역시 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이번에는 오빠가 먼저 키스한 거죠?”“...”“사실 처음이 아니잖아요. 에든베타에서도 오빠가 갑자기 나를 안고 키스했잖아요.”“...”“왜 일어나요?”‘왜? 너를 피하려고.’양혁수는 도망치고 싶었다.변여름은 그를 따라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양손을 느긋하게 등 뒤로 모은 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오빠, 인정 안 할 거예요?”양혁수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핥고는 억지로 말했다.“네가 몇 번이나 키스했는데 내가 따지기라도 했어?”변여름이 말했다.“따져요. 난 인정할게요.”양혁수는 어이없었다.“...”그는 그녀를 쳐다보고 입술을 깨물었다가 갑자기 틈을 찾아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변여름은 재빨리 움직여 그의 품에 안기며 꽉 껴안았다.양혁수는 그녀의 턱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것은 아니었지만 아픔보다는 놀란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그는 침을 삼키고 그녀의 한숨 소리를 들었다.“오빠, 그러면 안 돼요. 내가 키스하게 했잖아요...”양혁수의 얼굴이 빨개졌고 오랫동안 바른 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악당 역할은 서툴렀다.갑자기 키스해 놓고 인정하지 않으려니 좀 어색했다.양혁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폼을 잡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내가 인정 안 한다고 했어?”변여름은 1초 만에 고개를 들었다.“응?”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큰 진전이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양혁수는 전에 변여름을 꼬마 변태라고 부르며 지능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그 말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았다.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득을 보게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변여름은 그에게 물었다.“오빠, 진짜 인정할 거예요?”양혁수는 마음속으로 변여름이 어디까지 나아가려는지 알 수 없어 불
집사가 창문을 여는 순간 계단에 앉아 있는 양혁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쯧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엉덩이가 안 차가운지 몰라.’아래층에서 변여름은 스스로 제안한 낭만을 즐기려 분위기를 내보려 했지만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후회했다.“오빠, 우리 들어가요.”양혁수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낭만은 벌써 끝난 거야?”변여름이 말했다.“...엉덩이 안 차가워요?”양혁수는 물론 알고 있었다. 앉자마자 속으로 거친 말이 먼저 떠올랐다.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절대 앉지 않았겠지만 정원 풍경이 제법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곧장 들어가지 않고 차고에 들러 방석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변여름이게 건넸다.엉덩이는 보호했지만 변여름은 다시 양혁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핫초코를 마셨고 그녀 역시 말없이 그와 함께 따뜻한 시간을 나눴다.잠시 후 온몸이 데워진 양혁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소리를 들은 변여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오빠, 기분 좀 나아졌어요?”양혁수는 그녀가 죽어가는 친아버지를 보고 마음이 복잡할까 봐 일부러 자신을 찾아온 것임을 알아챘다.‘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진심을 받을 수 있을까.’그는 속으로 꽤 흐뭇했지만 양지원을 제외하고도 어떻게 누군가가 그것도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그는 변여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렇게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 힘들지 않아?”“힘들지 않아요.”변여름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마치 오래 준비했던 듯 담담히 말했다.“내가 오빠 좋아하잖아요.”양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내가 뭐가 좋아?”변여름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오빠가 양혁수여서요.”순간 양혁수의 마음은 멍해졌다.변여름은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오빠가 양혁수인 이상 전 계속 좋아할 거예요.”흔들리는 마음을 숨기려 그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정원은 고요했고 언제부터인가 그
변여름은 남자를 유혹할 때 감정을 자극하는 전략에 집중했다.그녀의 이해력과 용기를 보면 오토바이를 배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양혁수는 각 부분의 기능만 설명해 주면 그녀는 곧바로 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변여름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설명을 다 들은 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어려워요. 오빠는 어떻게 이렇게 잘해요? 이것도 다 알고… 그래도 오빠가 태워줘요. 안 그러면 저, 넘어질까 봐 무서워요.”양혁수는 침묵했다.“...”그는 변여름이 순진하고 귀여운 척 연기할 때마다 마치 덩치 큰 남자가 억지로 애교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능숙하긴 한데 그런 애교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여름은 작은 가방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그의 주머니에서 털실 장갑을 꺼냈다.“난 오빠가 장갑 안 낄 줄 알았어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끈 장갑을 목에 걸고 장갑을 낀 뒤 손뼉을 쳐가며 그 따뜻함을 느꼈다.양혁수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따뜻하게 옷을 챙겨 입은 걸 알아차렸다.목도리가 높게 올라와 작은 코를 가렸고 머리에는 털실 모자를 썼으며 짧은 울 코트와 스커트 세트에 검은색 이너와 롱부츠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멍청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순진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지닌 그녀를 보며 그는 듬직한 남자가 애교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고 생각했다.“모자 벗고 헬멧 써.”그가 말하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 끝에 달린 털 방울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날리는 머리카락을 눌러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모자를 벗겼다.변여름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역시나 양혁수는 직접 그녀에게 헬멧을 씌워줬다.마스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스크를 위로 올렸다.그러자 양혁수는 다시 그녀의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주며 말했다.“나중에 차 타고 가면 얼어 죽을 거야. 함부로 벗지 마.”‘네.’그
오성호가 한창 잘나가던 시절에도 양혁수는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지 않았다. 하물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죽음을 앞두고 짧게 마주한 이 순간엔 더욱 그랬다.묘지 이야기가 끝나자 부자 사이에는 말 한마디조차 스며들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았다.오성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지금 자신의 아이를 보고 있는 건지 단지 피를 나눈 존재를 바라보는 건지 아니면 양혁수를 통해 잊힌 과거를 떠올리며 전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건지 모른다.양혁수는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오성호가 양지원을 만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성호는 한참 뒤 남아 있는 힘을 다 짜내 그에게 물었다.“네 엄마는...잘 지내니?”양혁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씀하신 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오성호가 웃자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고 그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조용해졌다.양혁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다른 부탁은 없어요?”오성호는 양혁수가 떠나려는 기척을 느끼고 다시 눈을 떠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날씨가 추워...빨리... 집에 가...”양혁수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익숙했지만 지금 이 사람의 마지막 두 마디가 진심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성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본 뒤 돌아섰다.서로 30년 넘게 부자로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몇 마디 말뿐이었다.문을 닫으려던 순간 양혁수는 침대에 누운 이가 힘겹게 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 밖으로 나서자 마치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달빛 아래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듯했다.양혁수는 계단에 멈춰 서서
“나 혼자 가면 돼.”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끈 달린 장갑을 꺼내 들며 말했다.“알아요. 그냥 장갑 가져다주려고요.”양혁수는 장갑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고 침잠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렸다.“나가서 끼면 돼.”“분명히 거짓말이에요.”변여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끝내 그를 다그치지 않고 장갑을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겼다.그녀는 그를 배웅하며 갑자기 물었다.“주차장에 오토바이 있던데 내가 타도 돼요?”“오토바이 탈 줄 알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하지만 배울 수 있어요.”“배울 필요 없어.”양혁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이며 말했다.“추운 날 오토바이 타면 귀 얼어서 떨어질지도 몰라.”변여름은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나중에 오빠가 가르쳐줘요.”“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자.”양혁수는 계단을 내려갔다.차에 타기 전 창밖 너머로 변여름이 손을 흔들며 목에 무언가를 거는 시늉을 하자 양혁수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오성호가 입원한 곳은 조용한 곳에 자리한 개인 병원이었고 밤 9시가 넘자 주변은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았다.저택에서 병원까지는 잠깐이었지만 병원 밖에서 병실까지는 20분이나 걸렸다.양혁수는 정원을 지나 사람 하나 없는 긴 복도를 걸었고 부드러운 조명이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개인 정원에 도착했다. 그 사이 그는 오성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그러나 병상에 누워 있는 오성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양쪽 볼은 부어 있었으며 눈은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응시한 채 공허했다.소리를 들은 오성호는 낡은 자루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여 문 쪽을 바라보았다.양혁수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스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곧 사그라졌고 낯선 이를 보는 듯한 평온만이 남았다.“왔구나...”그가 입을 열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를 거슬리게 할 만큼 거칠고 불쾌한 소리
변여름은 스웨터와 목도리 장갑 한 켤레를 챙겨 왔다.양혁수가 스웨터를 걸쳐보니 몸에 맞았고 목도리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하지만 그는 끈 장갑을 들어 올리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여름아, 이런 장갑은 아이들이 잃어버릴까 봐 쓰는 거잖아.”변여름은 말없이 그러나 단호하게 장갑 끈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오빠, 평생 오빠를 위해 장갑을 떠줄 거지만 내가 뜬 장갑은 소중하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요.”“...”양혁수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착용은 할 수 있겠지만 끈만큼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털실 장갑은 별로 따뜻하지 않아. 보온성은 가죽 장갑이 훨씬 낫지.”그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이 고개를 들었다.“그러면 끈을 가죽끈으로 바꿔줄게요.”양혁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됐어. 됐어.’두 사람은 한참을 고집스럽게 맞서다가 결국 다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기분이 좋았던 그는 결국 변여름의 달콤한 설득에 넘어가 담요 뜨는 법까지 배우게 되었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시범을 보여달라며 매우 긴 부분은 늘 여름이 대신 떠주곤 했다.“곧 설날이네요.”조용하던 틈에 변여름이 말을 꺼내자 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오빠, 저희 화서시에 가요.”양혁수의 손이 멈췄다....양혁수는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오성호에게 호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다른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부성애가 필요할 나이였지만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양지원이 준 사랑이 넘쳐흘렀기에 ‘아버지’라는 감정의 빈칸조차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혈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고도 무서운 것이었다. 오성호가 아무리 끔찍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분명 양혁수의 친아버지였다.그리고 생사의 경계 앞에서 누구도 완전히 무심할 수는 없었다.결국 양지원은 오성호를 죽이지 못했다. 대신 화서시에 가둬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양혁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오성호를 찾아가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