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말은 대체로 신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연정훈의 대답은 완벽에 가까웠다. “나는 너와 항상 이렇게 있고 싶어.”연정훈이 가문에서의 압박을 느끼거나 최근 여러 일을 겪으며 안시연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혼과 미래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그들은 서로를 깊이 좋아하며 연애하고 있었다.어느 날 안시연이 결혼을 원하고 연정훈이 원치 않으면 안시연은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미래의 선택이 현재의 결정을 바꿀 수는 없다.적어도 지금 안시연은 연정훈이 진심으로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괜찮다.‘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사랑을 즐기자.’연정훈과 함께 야식을 먹고 난 후, 안시연은 러그 위에 앉아 기분 좋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안시연의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보았다.[외상 환자를 위한 레시피]말하지 않아도 이것은 양혁수를 위해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연정훈은 질투를 감추고 물었다.“양혁수는 지금 어때?”안시연은 말했다.“상처가 아직 아프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대요. 꽤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요.”“양혁수가 너에게 말했어?”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속으로 비웃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두 번 바라보며 고의로 떠보았다.“양혁수가 너를 위해 그렇게 큰 고생을 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당연히 혁수 씨에게 감사하죠.”안시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동안 저를 위해 목숨을 걸어준 사람은 없었어요. 그날 사실 혁수 씨는 떠날 수도 있었는데 저를 구하려다가 다치게 된 거예요.”연정훈은 양주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자책감에 사로잡혔다.안시연을 위험에 처하게 둬서는 안 됐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양혁수가 안시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연정훈 역시 할 수 있었다.안시연의 눈에 담긴 죄책감과 감사의 감정을 본 연정훈은 결국 질문을 참지 못했다.“내가 없었다면 너는 양혁수에게 마음이 끌렸을까?”안시연은 잠시 멈칫했다.어떻게
연정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별일 아니야. 그냥 두 명의 협력사를 만났을 뿐이야.”“그럼 왜 내 메시지는 안 읽었어요?”연정훈은 잠시 멈칫했다.안시연은 그를 살피며 물었다.“가기 전, 운동장에서 전화 한 통 받았었죠? 누가 건 거예요?”‘역시 여자는 사랑에 빠지면 셜록 홈즈가 된다더니...’연정훈은 심리전의 고수답게 절반의 진실을 말했다.“소현주한테서 온 전화였어.”안시연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럼 그날 현주 씨를 만나러 간 거예요?”“아니야.”안시연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 확인하려 했지만 연정훈의 얼굴은 너무도 평온해 한 치의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잠시 실망했으나 안시연은 동시에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만약 그날 연정훈이 소현주를 만나러 갔다면, 자신이 납치된 그 순간에 그와 소현주가 함께 있었다면 차마 용납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연정훈은 그녀의 의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되레 물었다.“그날 아침, 부승희랑 룸 안에서 무슨 얘기 했는지 기억나?”안시연은 금세 기억이 떠올랐다.그녀가 부승희와 나눈 대화를 그들이 엿들었을 것이라 부승원이 경고한 적이 있었다.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화났어요?”“조금.”연정훈의 말은 사실이었다.그녀가 자신을 이승우와 비교하며 때가 되면 떠날 준비를 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상처받았다.마침 그때 소현주 쪽에서 일이 터졌다는 전화가 온 것이다.안시연은 설명했다.“그 전날 정훈 씨가 현주 씨의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날 대하는 게 차가워졌어요.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다음 날 또 이승우 씨가 어떤 여자랑 같이 있는 걸 보고 기분이 더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부승희 씨랑 얘기할 때 그냥 승희 씨 말에 맞춰서 말했을 뿐이에요.”연정훈은 내심 후회했다.그날 소현주의 전화를 받은 게 실수였다.그 감정이 그녀에게까지 번져 이런 문제를 일으킨 것이니 말이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들어 올려 품에 앉혔다.“지금도 떠날 생각 있어?”
안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안겨 천천히 소파에 눕혀졌다.연정훈의 손을 베개 삼아 기대어 그와 깊은 애정이 담긴 키스를 나눴다.“어딜 가든... 그건 제 자유예요.”“넌 못 가. 한번 가볼 수 있나 해봐.”연정훈은 안시연의 귓불을 살며시 입에 물고 빨았다.그러자 안시연은 얇게 신음소리를 흘렸고 날씬하고 곧은 다리가 그의 다리를 스치고 있었다.“이건 너무 억지잖아요.”“다른 건 몰라도 이건 억지여도 돼.”그는 안시연의 셔츠 단추를 풀며 부드러운 입맞춤을 아래로 이어갔다.안시연은 연정훈의 머리를 감싸며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집어넣었다.몸은 점점 뜨거워졌지만 차가운 공기가 살짝 스쳤다.연정훈은 담요를 꺼내 자신과 안시연 위로 덮었다.속박은 하나씩 풀렸고 안시연은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 몸을 살짝 웅크리더니 위에 달린 크리스털 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벌려 숨을 내쉬었다.아직 아래층에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부끄러워 몸이 붉어졌고 손톱은 연정훈의 어깨에 꽉 박혀 있었다.곧 안시연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연정훈은 안시연의 양옆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왜 그래?”“위층으로 가요.”안시연은 그의 어깨를 잡고 조심스럽게 아래층 계단 입구를 쳐다보며 말했다.“만약 누가 올라오면 어떡해요?”“안 와.”“그래도... 만약에요.”안시연은 그의 품에 숨으며 장난스럽게 투덜댔다.“누가 보면 다 정훈 씨 탓이에요.”“알았어. 내 탓으로 할게.”연정훈은 모든 걸 받아들이며 그녀의 턱을 잡고 피하지 못하게 했다.가볍게 신음소리를 내며 안시연은 도무지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 두 손으로 연정훈의 가슴을 밀었다.마치 위층으로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결국 연정훈은 그녀의 고집에 지고 말았다.그는 안시연의 목에 강하게 입을 맞추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까탈스럽긴.”안시연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뭐가 까탈스럽다는 거야. 내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유혹을 걸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쳤다.안시연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어 조용히 연정훈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연정훈이 살짝 움직이자 안시연은 가볍게 소리를 내며 그의 팔을 붙잡아 그가 떠나지 못하게 했다.모든 것이 끝난 후의 달콤한 순간, 안시연은 적당히 그에게 의지했고 연정훈은 기꺼이 받아들였다.그는 안시연을 안아 깨끗이 씻기고 나서 침대로 돌아왔다.여전히 안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베고 그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그녀가 마음을 놓자 연정훈도 마음이 놓였다.침대 옆 탁상 등이 꺼지고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잠들었다....경인의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고 하늘도 맑아졌다.안시연은 집에서 한동안 요양한 후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고 운전 연습도 재개했다.이 시기는 유난히 평온했다.모든 걱정이 마치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듯했다.그녀와 연정훈 사이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고 심지어 최미란을 보러 병원에 갈 때도 소현정을 보지 않았다.안시연의 주변에는 연정훈과 최미란이 있었고 가끔 부승희의 초대에 응해 함께 식사하는 일상이 이어졌다.이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나중에 이 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꾼듯해 믿기지 않았다.첫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그날, 안시연은 운전 연습을 마치고 차장 밖에서 이승우를 만났다.이승우는 막 부승원을 만나고 연정훈을 만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연정훈이 거절했다는 것이다.“잘됐네요. 타세요. 시연 씨가 있으면 정훈이도 내 약속 거절 못 할 거예요.”안시연은 망설였다.“정말로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가서 확인해봐야 해요.”“뭘 확인해요. 걘 분명 집에 가서 시연 씨랑 따뜻한 방에 같이 누워있으려는 거예요.”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이승우의 말은 늘 이렇듯 대처하기 어려웠다.마침 부승희에게도 전화가 와서 이승우와 함께 가자고 했다.그들은 겨울의 첫 소고기 전골을 먹기로 했고 한우빈이 최고급 술을 협찬해줬다고 했다.거절할 수 없었는지라 안시연은 결국 이승우의 차에 올라탔다.
“오늘 운전 연습은 어땠어?”연정훈이 묻자 안시연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코치님이 내가 엄청 빨리 늘고 있다고 하셨어요. 아마 한 번에 면허 딸 수 있을 거예요.”“어느 코치?”“전에 그 코치요.”“내일 사람 시켜서 바꾸라고 해야겠네.”안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왜요?”“필기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도 너한테 빨리 늘었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좋은 코치겠어?”연정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안시연은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건 단순 실수였어요!”이 말에 연정훈은 살짝 웃었고 안시연은 그의 팔을 붙잡으며 계속 말했다.“게다가 밤에 연습하게도 안 해주잖아요. 난 낮에 일도 해야 하는데 이 정도 속도면 정말 빠른 거예요!”연정훈이 안시연의 밤 운전 연습을 금지한 이유는 그녀가 밤에 연습을 하고 나면 집에 와서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리기 때문이었다.그러면 그와 함께할 시간이 없어지니 참기 힘들었다.사실은 이런 이유였지만 연정훈은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밤에 연습하는 건 효율이 안 좋지. 다음날 업무에도 영향이 갈 거고.”“그리고 밤에 너 수업 있잖아.”안시연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오늘 밤엔 이미 수업 예약했어요. 꼭 다 들을 거예요.”그러더니 연정훈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연정훈은 너무도 쉽게 수락했다.“알았어, 너는 서재에서 공부해. 난 침실에서 기다릴게.”“...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그래서 지금 일부러 나한테 암시하는 거야?”“아니거든요!”두 사람이 방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안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어보니 부승희와 그 친구들뿐만 아니라 낯선 얼굴들도 몇몇 보였다.연정훈이 들어가자 모두 그를 보며 인사했고 안시연에게는 형수님이라며 인사했다.안시연은 아직 그런 호칭이 익숙하지 않아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예전에는 연정훈이 안시연을 데려와도 사람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안시연을 공손하게 대하고
사람들은 이승우가 반우희를 아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녀가 이승우의 ‘애인’인 줄 알았고 다들 한 목소리로 ‘우희 씨’라고 부르며 반우희에게 잠시 앉아 놀다 가라고 권했다.“아니요. 저 아직 일해야 해서요.”반우희는 자신의 명찰을 가리키며 거절했다.누군가 이승우에게 농담을 던졌다.“너 남자로서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우희 씨가 이렇게 고생하는데.”이승우는 부승원의 쪽을 힐끗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에이 그럴리가. 우희 씨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네.”그는 뒤돌아 세 개의 선물 가방을 들어 반우희와 그녀의 동료들에게 주었다.반우희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감사합니다, 도련님!”그녀는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떠났고 그 과정에서 부승원을 쳐다보지 않았다.반우희가 나가자 방안은 다시 떠들썩해졌고 아무도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이 방 안에 있는 도련님들은 미인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반우희와 같은 앳된 얼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안시연은 이승우가 부승원 옆으로 가서 무언가를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내심 궁금해하며 그쪽을 계속 쳐다보았다.그러다 고개를 든 이승우가 안시연이 몰래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윙크를 보냈다.안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승우한테 그렇게 뚫어져라 볼만한 데가 있나?”연정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안시연은 입가를 닦고는 그의 얼굴 옆에 바싹 붙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정훈 씨는 궁금하지 않아요?”“그 여자애 말이야?”“네!”“궁금하지 않아.”“...”연정훈은 그녀가 궁금해하는 표정을 보고 꿀 고구마 한 조각을 안시연의 입에 넣으며 말했다.“이승우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 자기가 알아낸 거 있으면 와서 너한테 말해줄 테니까.”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그 사이, 이승우는 부승원에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고 부승원은 짜증이 났는지 바로 화장실로 가버렸다.방 밖은 고요했고 안은 따뜻했다.부승원은 복도 모퉁이
반우희는 그날 밤의 구체적인 기억을 말할 수 없었다.부승원이 자신을 끌어안고 키스하며 귓가에 숨을 내쉬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그때 반우희는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부승원은 그야말로 외모도 출중한 사람이었다.반우희에게 대해 부승원은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었다.그토록 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머리가 둔한 건 그렇다 쳐도 감정적으로도 둔해서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참 답답한 사람이야.’ “우리 사이 여기까지야. 돈은 다시 돌려보내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냥 네가 억울한 손해를 본 거로 할 거야.”그는 냉정하게 말했다.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저... 돈 충분히 있어요. 더 받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부승원은 그녀의 말을 정정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말했다.“더는 법률 사무소에 이력서 넣지 마. 네 학력과 수준으로는 법률 사무원은커녕 잡일 할 자리도 없을 거야.”반우희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꿈같은 헛된 생각을 그만두고 돈을 잘 관리해 학업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그래야 생활이 나아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그녀의 자질로는 변호사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반우희 같은 성격으로 변호사가 된다면 변호사 업계에 재앙이 될 것이었다.이 부분에서만큼은 반우희의 얼굴이 붉어졌다.고아원에서 자란 그녀는 자신과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더 빨리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특성화고를 선택했다.하지만 1년 내내 이력서가 거절당하고 학력 차별을 겪으며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다.변호사가 되는 건 그녀의 꿈이었지만 부승원에게는 그 꿈이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나중에 사법시험에 꼭 합격할 거예요...”“사법시험 합격해도 넌 변호사가 되지 못할 거야.” 소녀는 고개를 떨궜다.그녀는 손을 뒤로 모으고 손가락을 힘겹게 꼬았다.“알겠어요...”부승원은 반우희가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너무 가혹한 말을 한 건 아닌지
안시연은 부승희가 진심으로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언젠가 내가 정말 가정이 필요하고 아이가 갖고 싶어지면 그때 정훈 씨에게 물어볼 거예요. 나랑 결혼 할 거냐고.”부승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결혼 안 하겠다고 하면요?”그러자 안시연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헤어지고 다음 사람을 찾으면 되죠?”부승희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술잔을 들어 안시연과 부딪치며 말했다.“시연 씨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시연 씨한테 집 한 채 선물할게요. 축하 선물로.”이 말에 안시연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내가 못할 것 같아요?”부승희는 안시연 옆에 기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열정이 식어가면서 점점 사라져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깊이 사랑에 빠지죠.”그러더니 안시연을 돌아보며 물었다.“시연 씨는 어떤 쪽인 것 같아요?”안시연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그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그저 지금은 눈앞의 순간을 즐기며 살고 있을 뿐인데 이게 과연 인생을 현명하게 즐기는 걸까? 아니면 서서히 자신을 침몰시키고 있는 걸까?그날이 오면 과연 안시연은 단호하게 이 관계를 끝낼 수 있을까?부승희는 안시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일어나 음식을 가지러 갔다.샴페인 잔을 비우자 살짝 들뜬 기분이 들었고 안시연의 가슴 속에 남아있던 불안감도 조금 가시는 듯 했다.그때 이승우가 사람들을 불러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고 했다. 그들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그런 밤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안시연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할래?”그러자 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우린 집에 가요. 이미 늦었고 나 수업도 들어야 해요.”“수업?”이승우는 그 말을 듣고는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어떤 수업이요? 우리 연 교수님이 직접 가르쳐주는 수업인가?”사람들은 금
고원석, 허윤미의 결혼 20주년 파티에 초대합니다.초대받은 사람: 양석진, 양지원.초대장에 적힌 글씨를 제대로 확인한 양지원은 고개를 들어 침대까지 걸어온 양석진을 바라보았다. 링거는 어느새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두 사람 결혼한 지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어요?”“꽤 됐어.”양석진이 양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나이가 몇인지는 잊은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고원석과 허윤미는 양지원의 친구 중에서도 몇 안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였다.부부는 한 사람은 사업으로 잘 나가고 한 사람은 교단에 서 있는 일을 했다. 아이도 둘씩이나 낳고 그동안 안 좋은 소식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초대장을 내려놓은 양지원은 한참이나 침묵했다.어느새 양석진은 직접 링거 바늘을 뽑았고 어느새 양지원의 옆자리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양석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초대장을 건네받은 양석진도 기분이 참 묘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오랜 세월 양석진은 고원석을 따로 만나지 않았는데 너무 행복한 두 사람을 보면 부러워 배가 아플까 만나지 못했다.“며칠 뒤가 식인데 바쁘지 않으면 같이 참석하자.”양석진의 말에 양지원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년필의 먹이 다 떨어진 걸 보며 직접 먹을 챙겨주었다.양석진은 원래 말수가 적었고 양지원마저 조용하자 방안은 적막이 맴돌았다. 양석진은 말없이 냉장고로 걸어가 딸기를 꺼내 씻었다.양지원은 이런 양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런데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여 목이 메었다.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결혼 20주년에도 파티를 하면 이제 환갑에는 얼마나 크게 한 상 차리려고 그런대요?”“...”“정말 너무 과시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이 겸손해야지.”양지원이 계속 투덜거렸다.양석진은 씻은 딸기를 양지원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양지원은 딸기를 먹으며 자꾸 양석진을 힐끗거렸다.“오빠는 두 사람 부러워요?”양석진이 잠시 멈칫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그냥 그래.”양지원은 입을
“오빠, 내가 다른 건 도와줄 거 없어요?”농담 섞인 양지원의 목소리가 양석진의 등 뒤로 들려오고 옅은 숨소리가 귀에 걸렸다.양석진은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자신의 아픈 틈을 타 목숨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양석진은 심호흡하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양지원의 손을 잡았다.양석진이 살짝 힘을 주자 양지원은 휙 하고 양석진의 앞에 서게 되었다.하이힐을 신고 있던 양지원은 휘청대다가 변기 위로 풀썩 앉아버렸다.고개를 든 양지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양석진이 그 앞을 가려 일어서지 못하게 막았다.그렇게 전세가 역전되었다.양지원은 심장이 쿵쿵 뛰었고 평온하지만 의미심장한 그 눈빛을 보며 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 항복 자세를 취했다.시선이 다시 마주치고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양시연은 침을 꿀꺽 삼키다가 살며시 양석진의 바지춤을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양석진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입술에 닿고 또 온몸을 훑어내렸다.양석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장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양지원은 후회가 되었다. 이어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양석진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하고 한 손으로 양지원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병에 걸려 창백해진 안색이었으나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 양지원은 그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래서 몸의 힘을 풀고 양석진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뭐 하는 거예요?”“네 생각에는?”양지원은 바짝 긴장되었다.“...”“네가 나한테 물었잖아. 다른 건 도울 게 없냐고.”양석진이 물끄러미 양지원을 바라봤다.‘다른 건...’양지원도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생각이 되고 얼굴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서 괜히 소리를 높이며 양석진의 복부를 슬쩍 밀었다.“양석진!”기세가 기울어질 때마다 양지원은 양석진을 성까지 붙여 불렀다.양석진은 양지
양석진은 아직 링거가 남아 있었고 양지원은 작은 테이블을 찾아 침대에 내려두고 음식을 하나하나 옮겼다.“의사가 뭐래요?”양지원은 음식을 짚어주며 물었다.“평범한 감기이지 뭐.”“그런데 이렇게 오래 가는 거예요?”“나이를 먹어서 그래.”걱정이 많아 보이는 양지원을 보며 양석진은 농담하듯 말했다.“양창수가 뭐라고 했는데?”“나 때문에 화병 난 거라고 하던데요?”양석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가능성도 있지. 내일 의사가 오면 혹시 화병 때문은 아닌지 다시 검진해 보라고 할게.”“...”양석진이 아픈 걸 보아 양지원은 말없이 양석진을 보살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군밤을 까기 시작했다.양석진은 음식을 딱히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으나 그중에서 군밤을 제일 좋아했다.오래전 양석진이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시절, 가장 맛있던 음식이 바로 길거리 음식점 할아버지가 주던 군밤이라고 했다.“밥 먹고 까.”양석진의 말에도 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밤을 예쁘게 까서 앞접시에 내려놓았다.“난 배불렀어요. 이따가 또 먹으면 돼요.”양지원은 이미 밥 한 그릇을 비웠기에 양석진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양지원은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방안은 다시 정적이 맴돌고 양석진이 마지막 한술까지 비우자 양지원이 직접 테이블을 치웠다.늘 보살핌을 받던 양지원이 누군가를 보살피려다 보니 어딘가 조금 어설펐다.모든 걸 마치고 양지원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양석진은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창수 씨 부를까요?”“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양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석진을 부축해 침대에서 내려오게 하고 링거를 들고 화장실로 가 걸어주었다.그러나 이 모든 걸 마친 뒤에도 양지원은 화장실에서 버티고 나가지 않았다.“...”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다시 말을 반복했다.“나 혼자 할 수 있어.”양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양지원은 양석진의 잠옷
양석진이 제대로 자리에 앉고 양지원이 탕약을 건넸다.양석진이 한꺼번에 탕약을 들이켜자 양지원은 저도 모르게 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이 다 마시기 전에 양창수를 시켜 물을 따르게 했다.양창수는 물을 따르고 양지원의 등 뒤로 가만히 서 있었다.양지원은 물을 건네받고 또 양석진을 도와 물을 마시게 했다.양지원이 진지한 얼굴로 물을 들이켜는 걸 바라보던 양창수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나 마침 양석진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양창수는 바로 고개를 돌려 마른기침했다.양석진이 물까지 모두 들이켰고 양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랍에는 사탕이 있었고 양지원은 빠르게 우유 맛으로 골라 양석진의 입에 넣었다.그러자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창수는 여전히 그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양석진은 입에 사탕을 문 채로 이렇게 말했다.“아예 의자를 찾아와 앉아서 구경하는 게 어때?”“...”‘아가씨 오니 난 이제 찬밥 신세라는 거지?’‘치사해서 안 봐.’양창수는 떠나기 전 양지원에게 저녁 식사를 할 위치를 알려주었다.양지원은 바른 자세로 앉아 대답했다.“알겠어요.”양창수가 떠나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양석진은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아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켰다.다시 눈을 뜨니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양지원이 보여 미소가 번졌다.“비행기에서 저녁 먹은 거야?”“네. 먹었어요.”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돌린 채로 말했다.“기분이 좋으니 기내식도 너무 맛있게 느껴져서 2인분이나 먹었는걸요.”양석진이 미소를 지었다.“메뉴가 뭐였는데?”“너무 많아서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요!”그러나 그 말이 끝나자마자...꼬르륵...양지원은 빠르게 복부에 힘을 주어 소리를 멈추게 했다.고개를 돌리니 양석진이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양지원은 이를 꽉 깨물었고 귀 끝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정말 도움이 하나도 안되네!’양석진은 고개를 틀어 감히 양지원의 앞에서 웃지 못했다.정말 웃음을 터뜨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