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에 세 번이나 찔려 오늘 새벽에 수술실에서 나왔어요.”부승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의리 하나는 죽여주네.”부승원이 말했다.“이제 양주가 떠들썩해지겠네요.”그 생각만 하면 주정민은 욕이 입언저리에 맴돌았다.“말도 마세요. 아버지가 하룻밤 사이에 늙어버렸다니까요. 최소 보름은 잠 다 잤다고 보면 돼요.”이철수 부하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시연을 데려가지 못하더라도 양혁수에게 손찌검해서는 안 되었다.양석진 의원은 이 나이 먹도록 싱글이었고 오직 양혁수 조카 하나뿐이었다.정권을 이어받을 몇 명의 후보 중 한 명이 양석진이었다. 그런데 그의 조카가 양주에서 칼에 찔렸다니, 세상이 뒤엎어진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세 명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맞은 편에서 두 명이 걸어왔다. 그중 한 명은 부승희도 아는 사람인 진수빈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정장 차림에 굳은 얼굴, 보기만 해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부승원은 그 사람이 바로 연정훈의 부하이자 자주 얼굴을 보이지 않는 임성원이라는 걸 알아보았다.임성원은 그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고 겁 없이 안시연 병실 문을 두드렸다.모든 사람이 그쪽으로 고개를 빼 들고 상황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리고 임성원이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가 입을 딱 벌렸다.“대박.”그리고 부승원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오빠, 저 사람 누구야?”이승우가 앞다투어 대답했다.“누구긴, 특급 탐정, 연정훈이 숨겨둔 오른팔.”부승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옆에 선 진수빈을 향해 농담을 날렸다.“그럼, 비서님은 잘릴 위기?”진수빈이 쓴웃음을 지었다.“부승희 씨, 차라리 짤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네요.”“왜요?”진수빈이 한숨을 내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임성원 씨가 도착하고 흥성 그룹 연 대표가 사라졌어요.”“네? 사라지다니요?”진수빈이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부승희는 깜짝 놀라다가 1초 후 알아차렸다.“정
양혁수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소식에 임유정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날이 밝고 연명걸도 연락을 받지 않자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철수가 이미 죽었으니 그녀가 USB를 훔쳐 간 사실이 들통나도 가짜 장부는 숨길 수 있었기에 연명걸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가짜 장부 사건만 잘 숨긴다면 이철수의 범죄 동기는 연정훈에 대한 사적 감정이었고 임유정은 발을 뺄 수 있었다.그래.그럼, 아무 문제도 없어.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하지만 2시간 전, 연명걸은 벌써 잡혀갔고 임성원 부하의 고문 아래 1시간도 되지 않아 이철수의 범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백했다.더구나 이철수는 사건 발생 후 연정훈에게 주식을 요구했으니 연정훈도 이상을 눈치채고 있었다.벨벨.핸드폰이 진동하자 임유정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펑!이어 굉음이 들려왔다.별장 대문이 부서지고 임유정은 그제야 손을 덜덜 떨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이 끊기고 임건식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정아...”임건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 사람들이 방을 쳐들어왔고 그녀를 소파에서 끌어당겼다.“아빠! 아빠! 살려주세요!”방안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임유정만이 그곳에서 증발되었다.핸드폰 넘어 임건식이 애타게 불렀다.“유정아! 임유정!”그러나 대답은 없었다....안시연은 긴 잠에서 깨어났고 삭신이 쑤셨다. 특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기억이 파도처럼 머릿속을 파고들고 이철수가 자신의 뺨을 내리치고 벨트를 풀던 징그러운 장면이 떠올랐다.그러자 위에서 음식물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몸이 머리보다 빨리 움직여 휴지통을 찾았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베개 위로 토해버렸다.진이 빠진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다가 뒤로 쓰러질 뻔했고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단단히 받쳐줬다.연정훈이 그녀를 안아 들고 휴지로 입가를 닦아줬다.“우웩...”또 속이 메슥거리더니 두 번째로 구토했다.고개를 숙이자 토사물이 연정훈의 손등에 묻은 게 보였다.
연정훈이 말했다.“그쪽도 아주 어수선한 상황인데 네가 지금 찾아가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안시연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며 거짓인지 진실인지 판단하려 했다.아직도 공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시연이 또 물었다.“정말 무사한 거 맞죠?”“그래.”연정훈은 믿지 못하는 안시연을 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쉬고 몸이 괜찮아지면 만날 수 있게 해줄게.”“왜 이틀이나 기다려야 해요?”안시연은 다시 불안해했다.“난 지금도 괜찮아요. 들킬까 걱정되면 간호사인 척 보러 갈게요.”연정훈은 말문이 막혔다.생사가 오가는 순간 함께 있었던 사람이니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그러니 안시연이 양혁수를 걱정한다고 해서 불편하지는 않았다.안시연이 두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연정훈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자리를 마련해 볼게.”그 말에 안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혁수를 만날 생각에 안도한 게 아닌 그 말 한마디에 양혁수가 정말 살아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가장 걱정되던 일을 내려놓자 안시연은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그러자 연정훈이 다급하게 의사를 불러왔다.“지금 온몸이 아프대요!”연정훈은 질타하는 말투로 말했다.의사는 조심스럽게 언어 선택을 하며 진통제를 주사하겠다고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통제가 투여되자 안시연이 점점 편안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연정훈은 여전히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안시연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할까 노심초사했다.그렇게 안시연은 또 깊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공복은 몸에 좋지 않았다.의사의 의견에 따라 연정훈은 간이 적게 들어간 음식을 준비해 왔다.잠에서 깬 안시연은 먹는 둥 마는 둥 몇 술을 입에 넣었다.연정훈은 내내 그녀만 챙겼고 그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정훈 씨는 안 먹어요?”안시연이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밤을 새웠더니 입맛도 사라졌다. 하지만 담배 생각이 간절해 몇 대 피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별로 배고프지 않아.”안시연은 핼쑥해진 그의 얼굴을
부승희는 일부러 이 질문을 했다.병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이승우는 부승희에게 연정훈을 위해 좋은 말 많이 하라며 언질을 줬었다.안시연은 예상대로 밥을 먹는 내내 연정훈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그리고 부승희의 질문에 고개를 숙여 애꿎은 국만 뒤적였다.“몰라요.”“시연 씨도 몰라요?”“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연정훈 씨는 바쁜 사람이고 나한테 일일이 보고하는 건 너무 번거롭잖아요.”부승희는 한숨이 절로 나갔다.역시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대화를 아직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부승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이번에는 정훈이 오빠 탓이 커요. 시연 씨 옆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죠.”안시연이 뚝 멈춰 섰다.부승희는 안시연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돌렸다.“아니죠. 이철수가 마음먹었으니 어떻게든 기회를 노렸을지도 모르겠네요.”“아닌가?”부승희는 또 말을 고쳤다.“그래도 정훈 오빠 탓이에요. 연회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철수를 폭행하지 않았다면 이철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예요.”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 없었다.부승희는 그녀의 밥에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속에 담아둔 걸 모두 정훈 오빠한테 풀어요.”안시연이 입을 삐죽였다.“상대는 연정훈인데 제가 어떻게 그래요.”“왜 안 돼요? 정훈이 오빠가 시연 씨를 얼마나 아끼는데.”안시연은 국을 한 입 삼키며 대답하지 않았다.“안 믿는구나?”부승희가 안시연을 슬쩍 살폈고 안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승희 씨도 좀 먹어요.”부승희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래서 젓가락을 내려두며 말했다.“이철수가 죽은 건 알아요?”안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철수 이름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부승희가 목소리를 낮췄다.“이철수가 지은 죄가 있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이씨 가문이 양주에서 지위를 생각하면 뒤처리가 좀 까다롭게 되었어요. 게다가 이철수뿐만 아니라 연명걸도 실종되었거든요.”안시연이
연정훈은 잠시 눈을 붙이려고 했으나 잠에 들 수 없었다.안시연은 멀지 않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사건의 전말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양혁수를 만날 시간을 기다렸으며 두 사람 사이 대화는 없었다.얼마 후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병실 밖을 나가 의사에게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이 뭘 삼키는지 알지 못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안시연이 묻지 않자 연정훈은 더 속상해졌다.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자신이 뭘 두려워하는지는 연정훈 본인이 더 잘 알았다.새벽이 되고 안시연이 연정훈을 깨웠다.“양혁수 보러 가요.”“...”연정훈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음에도 부하를 시켜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고개를 돌리자 안시연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안시연은 양혁수가 정말 만나고 싶었다.연정훈은 말없이 그녀와 함께 시립 병원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양혁수가 있는 병실은 벌써 경호원으로 층층이 둘러싸였다.연정훈은 미리 양석진에게 부탁했고 양지원이 쉬러 간 틈을 타 면회를 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수술 후 정신을 차렸으나 면회는 한 번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안시연이 안으로 들어가고 연정훈은 문밖을 지켰다.밤이 깊어지고 양지원마저 떠나면 양혁수는 긴 밤을 홀로 견뎌야 했다.그러다가 들려오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누군가가 걸어오며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이렇게 등장할 사람은 안시연을 제외하고 없었다.양혁수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몸이 멀쩡했다면 벌써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안시연은 그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움직이지 마요.”양혁수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었으나 잘생긴 외모는 여전했다. 안색이 창백할 뿐이지 모든 게 잘 정돈된 모습이 누군가 정성껏 보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양혁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괜...찮아?”안시연은 부어오른 눈가와 긁힌 상처를 보여주며 말했다.“겨우 이 정도뿐이에요.”“이게 겨우...야?”“안 아파요.”“
안시영는 양혁수의 어깨를 가볍게 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요.”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말로만 하면 재미없지.”양혁수가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난 또 뽀뽀라도 하는 줄 알았네. 근데 마침 아직 양치를 못 한 게 떠올라 이번에는 패스하자고 말하려고 했어.”안시연이 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침대에 누워있어도 입만 살았네요.”“내가 아무한테나 다 이러는 줄 알아? 널 제외하고는 우리 엄마한테만 이런다고. 대체 여자들은 눈물을 저장하는 공간이 따로 있는 건지 선배가 오기 전까지도 눈물을 펑펑 쏟고 갔어. 산소 호흡기까지 달고 있는 내가 달래줘야 한다니, 참.”“그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늦게 올 걸 그랬네요.”“아니, 선배가 귀찮다는 의미는 아니야.”그는 시계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계속 안 자고 선배 오기만 기다렸어.”“내가 올거라고 생각했어요?”“마음이 통한 거지.”안시연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말하기도 힘겨워하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그럼 쉬고 있어요. 다 나으면 또 올게요.”“내가 다 나으면 보러 올 이유가 없을 텐데?”“...”“나한테 갚는다면서!”“그럼...”“매일 보러 와.”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으나 안시연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양혁수가 병실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왜? 연정훈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아니요.”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오늘도 연정훈 씨가 직접 데리고 와줬어요.”“선심 쓰셨네.”양혁수는 기회다 싶어 이렇게 말했다.“아 몰라 몰라. 선배는 반드시 매일 나 보러 와야 해. 밥 먹을 수 있게 되면 직접 요리도 해줘야 한다고. 안 그러면 그냥 치료 안 받고 확 죽어버릴 거야.”장난이었지만 듣는 안시연은 마음이 무거웠다.“그런 소리마요.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잖아요.”“그럼 선배는?”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그리고 연정훈 씨에게 잘 말해볼게요.”양혁수는 입을 삐죽 내밀었으
인생살이 29년 차 연정훈은 처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둔기로 머리를 세게 한 통 맞은 것 같았다.수면 유도제 때문에 정신이 흐린 것도 맞지만 크게는 안시연의 질문에 화가 났다.하지만 이 사건의 최대 책임자인 연정훈은 화를 낼 입장이 되지 못했고 안시연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많이 아꼈기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이번 사건이 꽤 커져 버려 양씨 가문 사람들이 직접 병원을 지키고 있어. 만나려면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그런데 이미 약속을 잡아버렸어요.”“...”연정훈은 눈을 찔끔 감았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최대한으로 노력해 볼게.”“네.”안시연은 아주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정훈이 덮어준 이불을 다시 휙 내렸다.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연정훈은 눈에 담았다.그래서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갔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연정훈이 먼저 손을 뻗어 안시연을 품에 안았다.“연정훈 씨가 안고 있으면 내가 너무 불편해요.”그는 바로 팔을 빼고 얌전히 그녀의 허리 위로 손을 올렸다.예전의 연정훈이었다면 이렇게 쌀쌀맞은 안시연에게 다시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잠시 뜸을 들인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시연아.”다정하게 부르는 이름에 안시연은 갑자기 납치되었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만 떠오르면 온 세상에 혼자 그곳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러자 주르륵 흐르는 눈물이 조용히 베개를 적셨다.“나한테 화 많이 났어?”연정훈의 질문에 안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했다.“아니에요.”연정훈이 한숨을 내쉬다가 말했다.“미안해.”“...”그러자 안시연은 눈물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눈물을 쏟아냈다.“뭐, 뭐가 미안해요. 내가 오히려 빚진 거죠. 날 살려줬잖아요.”오기를 부리는 안시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연정훈도 목이 따끔거렸으며
연정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안시연이 이제 연정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렸다.가만히 누워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달래려 몸을 일으킨 연정훈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너무 흥분한 그녀는 속에 담아둔 모든 걸 입 밖으로 내고 있었다. 안시연은 호흡이 가빠지고 안색도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연정훈은 일단 침착하게 침대에서 내렸다.그리고 티슈를 챙겨 안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안시연은 고개를 돌렸고 울음을 삼키며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연정훈은 오늘을 이렇게 넘겨 보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안시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그러나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연정훈은 그녀를 더 꽉 안았다.두 사람의 체격 차이에 안시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안시연은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어깨며 등이며 내리쳤다.연정훈은 묵묵히 그녀의 분노를 받아주며 안시연이 진이 빠지자 말없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다 내 잘못이야. 널 두고 가는 게 아니었어.”안시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연정훈의 셔츠는 벌써 안시연의 눈물로 흠뻑 젖어버렸다. 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또 눈물이 쏟아졌다.‘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기나 할까?’‘또 연정훈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는 알까?”안시연은 너무 무서웠다. 연정훈이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까 무서웠고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까 두려웠다.“나쁜 자식.”“나쁜 놈.”“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어느새 안시연은 입 밖으로 욕을 꺼냈다. 한바탕 화를 내고 나니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또 연정훈을 꽉 껴안았다.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또 연정훈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인 것처럼 꽉 껴안았다.연정훈은 자신을 의지하는 안시연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고개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안시연은 흐느끼며 그의 품에 기댔다.병실 안은 어느
양지원이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링거를 손에 꽂은 채로 잠이 든 양석진이 보였다.양지원은 인상을 팍 찌푸렸고 고개를 휙 돌려 양창수를 바라봤다.“...”양창수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한테 그러지 마세요. 의원님이 아픈 건 아가씨 때문이 더 커요. 아무 말도 없이 떠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까 홧김에 약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단 말이에요.”그리고 주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오후에 달인 약을 벌써 세 번이나 데웠는데, 한 모금도 드시지 않았어요.”“그냥 꾸역꾸역 먹게 할 수는 없었어요?”양창수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세상에! 아가씨, 저 위에 누운 사람이 제 친형인 줄 아세요?”“...”양창수가 놀리듯 말했다.“정말 제 친형이라고 해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아가씨가 아닌 제 말을 들을 것 같아요?”“꾸역꾸역 먹게 하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죠.”양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리고 양석진을 힐끗 바라보다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약을 다시 내와요.”“네!”양창수는 빠르게 그곳으로 향했다.양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양창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잠깐만요.”양창수가 고개를 돌리자 양지원이 물었다.“저 사람 저녁은 먹었어요?”“아직 드시지 않았어요.”양지원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오빠가 밥을 안 먹는다고 손 놓고 있었던 거예요?”양창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불가능하다는 시늉을 했다.양지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녁부터 준비해 줘요!”양창수는 미소를 지은 채로 서둘러 움직였다.‘무료하던 일상이 드디어 생기가 돌겠네.’양지원은 조심스레 방으로 돌아갔으나 문을 열고 보니 양석진이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그리고 양지원을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양지원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가까이에 앉은 양지원을 확인하고 양석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입을 여니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언제 왔어?”양지원은 대
양혁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돌아가지 않아도 난 엄마 아들이잖아요.”양지원이 침묵했다.사실 예전부터 양혁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했었다. 그때의 양지원은 오히려 걱정이 없었으나 그 일 이후로 양혁수가 행여나 멀어질까 걱정이 많아졌다.“이제 시연이 결혼도 하고 정훈이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놓아줘. 나랑 다시 돌아가면 좋은 아이로 소개해 줄게.”양혁수는 할 말이 없었다.“이제 헤어질 시간도 다 되어가는데 아픈 구석 좀 그만 찔러요.”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가지 않는 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에요.”“그럼 나 때문에 그래? 내가 네 친 엄마가 아니라서 이제 같이 지내고 싶지 않은 거야?”“...”양혁수는 목이 따끔거려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고개를 드니 양지원의 눈시울도 붉어진 게 보였다. 마음이 약해진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다가가 직접 눈가의 눈물을 닦아줬다.“왜 그래요? 울지 마요. 내가 엄마 싫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예전의 양지원은 이런 눈물로 매달리는 행위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꾸 눈물이 많아졌다.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살짝 돌려 눈물을 닦더니 투덜대기 시작했다.“너처럼 배은망덕한 녀석이 제일 싫어.”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몇 달만 지내다가 돌아갈게요. 나더러 한강시 본부를 맡으라고 했었잖아요.”“정말?”“왜 그런 거로 거짓말하겠어요.”양지원은 바로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푹 쉬어.”그때 양지원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양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통화하러 떠났다.양혁수는 소파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손을 들어 손 틈 사이로 햇빛을 바라보고 있는 양혁수는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었지만 왠지 심장 한편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튿날 아침, 양시연은 멕하든을 떠났다.양석진의 건강 문제에 그들은 세운시로 향했다.양시연은 예전에 두 번 정도 세운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래?”식사를 마치고 양혁수는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에 기대 양시연에게 말을 건넸다.양시연은 새로 산 캐리어를 확인하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린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뭐가 지독하다고 그래? 아주 예의 바르구먼. 뭐.”양혁수가 표정을 찌푸렸다.“어휴. 말을 말자. 너처럼 눈먼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짝이지.”양시연은 미소만 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양혁수가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 얘기를 꺼낸다는 건 어느 정도 받아드렸다는 걸 의미했다. 이제 앞으로 사이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양시연이 캐리어를 내려 두고 물었다.“정말 경인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 거야?”“안 돌아가. 경인이 뭐가 좋다고?”양혁수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로 말했다.“경인은 한강시나 여기보다도 못해.”양시연은 대답이 없었다.양시연은 경인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양시연이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게 경인에 있었다.하지만 양혁수에게 있어...아무 걱정 없이 지냈던 곳이 바로 한강시였다.“멕하든은 날씨도 좋고 살기 좋은 곳이야. 백호도 널 좋아하고 잘만 하면 혁수 넌 변씨 가문에 장가가서 편하게 살지도 모르겠네.”양시연의 농담에 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그런 말 마. 백호가 자꾸 날 잡고 놔주지 않아서 행여나 정말 날 좋아하나 무섭단 말이야.”양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양혁수가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밝은 불빛 아래에 서 있던 양시연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눈에 담았다.“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넌 우리 여사님이랑 같이 귀국해. 그리고 저 눈꼴 사나운 녀석도 빨리 데리고 가버려.”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양시연을 바라보지 않은 채로 손을 휘휘 저었다.“우린 다음에 또 보자.”“응.”그 말을 뒤로 하고 양혁수는 양지원을 찾아갔고 양시연은 캐리어를 끌고 연정훈에게로 갔
연정훈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변여름은 눈을 깜빡이다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띵.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양지원이 미리 사람을 시켜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변여름이 가져온 음식까지 큰 한 상을 차렸다.양지원은 가장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양시연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연정훈과 양시연이 자리를 찾아 앉고 변여름과 양혁수는 그 맞은 편에 앉았다.양지원이 잔을 들고 말했다.“자 다들 맛있게 먹어요.”이어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연정훈은 침착하게 잔을 들었으나 양혁수는 요란하게 양시연과 변여름과 시선을 마주하고 활짝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양지원의 잔에도 건배했다.드디어 점심 식사가 시작되었다.포크와 나이프의 소리만 이따금 들려오는 이 식사 자리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양지원이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이 회복되면 여기에 남을 생각이니?”변여름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요? 나만 버리고 먼저 국내로 돌아갈 생각이세요?”양지원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얘 좀 봐. 내가 여기에 머문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어?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걸?”“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엄마가 귀국하려다가 다시 돌아온 진짜 이유를 말해볼까요?”“...”양지원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어? 널 사랑하고 아끼니까 다시 돌아온 거지.”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양혁수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양혁수는 큼지막한 고기를 입에 넣다가 맞은 편의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연정훈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양혁수에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그러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양혁수는 아예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의미예요? 내가 정말 영영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니죠?”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어젯밤 잠은 잘 잤어?”다른 사람들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연정훈의 품에서 턱을 치켰다.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의 콧등에 짧게 키스하고 말했다.“이젠 일어나. 우리 시내 구경이나 가자.”양시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빨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 급해.”연정훈은 잠시 표정을 굳힌 채로 말을 이었다.“그러는 넌 양혁수 보러 온 거잖아. 마침 시간도 되겠다 온 김에 나도 양혁수 보러 갈까 봐.”양시연이 눈을 부릅 떴다.‘삐진 거 참 오래도 가네.’“나보고 잘 삐진다고 그러더니, 정훈 씨야말로 삐돌이네요.”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이 너무 신경이 쓰인 연정훈은 행여나 두 사람이 따로 만날 까 안절부절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연정훈은 오늘 양혁수의 앞에서 깨소금을 볶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참 속 보이네.’하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양혁수는 네 오빠잖아. 그러니 보러 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참나. 그럼 혁수더러 형님이라고 부르던가요.”연정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나쁘지 않은데?”“...”양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정훈을 살짝 밀어냈다.“빨리 일어나서 옷 좀 챙겨줘요. 나도 씻어야겠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줬고 빠르게 옷을 챙겨 돌아왔다. 그리고 그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이 직접 옷을 입혀주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았다.하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잘 알았다. 연정훈에게 맡겨버린다면 아마도 또 한바탕 사달이 날 것이다.어젯밤 일이 있은 뒤로 양시연은 많이 뻔뻔해졌고 연정훈의 앞에서 당당하게 옷을 갈아입었다.갈아입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두 다리가 흐물거리고 허리가 엄청 시큰거렸다.그러자 연정훈이 빠르게 양시연을 부축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보다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지금 정훈 씨도 멀쩡한 척하는 거죠? 사실은 엄청 피곤한데 말이에요.”“...”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을 끌어안고 직접 화장실로 데려갔다. 양시연을 내려놓은 연정훈은 또
“거짓말...”“나랑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면서...”“그냥 내 얼굴이랑 몸만 좋았던 거잖아요...”정신은 흐릿해지고 땀으로 온몸이 젖어갔다. 그리고 양시연의 두 볼도 붉게 물들었으며 두 사람은 이따금 대화를 이어갔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양시연이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그래서 양시연을 달래며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졌다.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시연은 이제 손가락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연정훈의 팔을 베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기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안아 들고 샤워를 하러 갔다. 다시 침대로 돌아오고 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제 화해하는 거로 어때?”‘화해?’‘무슨 화해?’양시연이 머리를 굴리다가 연정훈이 과거 연애 시절을 가리킨다는 걸 깨달았다.“풉...”그래서 웃음이 터졌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정신이 흐릿할 때 서둘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서서히 잠이 들었고 어느새 연정훈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꿈 깨요...”연정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은 양시연을 꼭 껴안고 고개를 숙여 이마에 키스를 했다.몇 시간 뒤면 해가 뜰 시간이었지만 연정훈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버리고, 소현주 사건도 말해줬으니 이제 마음이 편했다.그래서 잠에 들지 않고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되었다.아침.양시연이 눈을 떴을 때, 연정훈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맞은편 소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시선이 마주치고 양시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고백이 떠오른 양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등을 휙 돌려버렸다.그러자 입꼬리를 올린 연정훈이 노트북을 내려 두고 양시연의 등 뒤로 앉았다. 이어 몸을 숙여 양시연의 목에 키스를 했다.입술의 말캉한 촉감이 유난히 선명했다.양시연은 두 눈을
“꼭 그렇게 날 상처 줘야겠어?”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양시연을 바라봤다.그러자 양시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이건 모두 정훈 씨가 자초한 거예요.”“삼촌이 정말 깨어나지 않았다면 정훈 씨는 평생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로 살았을 텐데.”그리고 양시연이 몸을 돌려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어디 보자. 설마 지금도 바보인가?”“...”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속수무책이었고 양시연이 내키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양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고작 이런 말로 내 믿음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 마요. 소현주 씨를 제외하고 정말 다른 사람은 없어요? 난 믿을 수가 없는걸요. 그때 호텔에서...”양시연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아주 익숙해 보였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날 놀리는 거야? 내가 뭐가 익숙해 보였다고 그래.”“...”“네가 멍청한 거지.”‘어쭈?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양시연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어쨌든 모두 정훈 씨 탓이에요. 어떻게 교수씩이나 돼서 수업 듣던 학생한테 마음을 품을 수 있어요?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연정훈은 과거에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그러자 연정훈은 이불을 위로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의 위로 올라타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했다.시선이 얽히고 연정훈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어 양시연의 귓불에 키스하며 말했다.“나한테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양시연은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연정훈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래서 양손으로 연정훈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는데 머릿속에는 그동안 연정훈과 함께 지내던 추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었다. 처음 만남을 이어가던 그 시절 연정훈은 너무 양시연을 몰아붙여 양시연을 힘들게 했었다.양시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아요? 정훈 씨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자 양시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내 말이 맞죠?”“...”양시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자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나랑 소현주는 가벼운 교제였지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어.”양시연은 믿지 않았다.“결혼 얘기까지 오갔다면서 해본 적 없다고요?”“없어.”연정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훑었다.그러나 진실이 어찌 되었든 이젠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이불을 쭉 당겨 등을 돌려 누웠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양시연을 품에 넣었고 양시연은 팔꿈치로 연정훈의 복부를 가격했다.“나 건드리지 마요!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뒤로 하고 다시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뽀뽀하고 달래도 효과가 없었다.그러자 연정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공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양시연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예요?”“더 자세하게 알려줄게.”“...”양시연은 궁금했지만 겉으로는 질색하며 말했다.“누가 듣고 싶대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말해줄 필요 없어요.”연정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은 드디어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고 연정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소현주는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공휘를 만났었다. 사실 이것도 순화해서 한 말이지, 소현주는 아주 많은 남자들과 돈으로 된 만남을 이어갔다.그러니 성폭행으로 몰아간 영상은 진짜와 거짓이 동시에 존재했다.소현주는 연정훈과 같이 지내며 과거가 들킬까 걱정이 많았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 유학을 변명으로 해외에서 여러 번 회복 수술도 받았다.공휘 주변에는 널린 게 여자였고 소현주에게는 이미 질려버린 터였다. 그러나 연정훈의 여자가 된 소현주를 보며 다시 관심이 생겼다.이 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