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훈이 말했다.“그쪽도 아주 어수선한 상황인데 네가 지금 찾아가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안시연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며 거짓인지 진실인지 판단하려 했다.아직도 공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시연이 또 물었다.“정말 무사한 거 맞죠?”“그래.”연정훈은 믿지 못하는 안시연을 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쉬고 몸이 괜찮아지면 만날 수 있게 해줄게.”“왜 이틀이나 기다려야 해요?”안시연은 다시 불안해했다.“난 지금도 괜찮아요. 들킬까 걱정되면 간호사인 척 보러 갈게요.”연정훈은 말문이 막혔다.생사가 오가는 순간 함께 있었던 사람이니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그러니 안시연이 양혁수를 걱정한다고 해서 불편하지는 않았다.안시연이 두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연정훈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자리를 마련해 볼게.”그 말에 안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혁수를 만날 생각에 안도한 게 아닌 그 말 한마디에 양혁수가 정말 살아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가장 걱정되던 일을 내려놓자 안시연은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그러자 연정훈이 다급하게 의사를 불러왔다.“지금 온몸이 아프대요!”연정훈은 질타하는 말투로 말했다.의사는 조심스럽게 언어 선택을 하며 진통제를 주사하겠다고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통제가 투여되자 안시연이 점점 편안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연정훈은 여전히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안시연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할까 노심초사했다.그렇게 안시연은 또 깊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공복은 몸에 좋지 않았다.의사의 의견에 따라 연정훈은 간이 적게 들어간 음식을 준비해 왔다.잠에서 깬 안시연은 먹는 둥 마는 둥 몇 술을 입에 넣었다.연정훈은 내내 그녀만 챙겼고 그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정훈 씨는 안 먹어요?”안시연이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밤을 새웠더니 입맛도 사라졌다. 하지만 담배 생각이 간절해 몇 대 피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별로 배고프지 않아.”안시연은 핼쑥해진 그의 얼굴을
부승희는 일부러 이 질문을 했다.병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이승우는 부승희에게 연정훈을 위해 좋은 말 많이 하라며 언질을 줬었다.안시연은 예상대로 밥을 먹는 내내 연정훈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그리고 부승희의 질문에 고개를 숙여 애꿎은 국만 뒤적였다.“몰라요.”“시연 씨도 몰라요?”“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연정훈 씨는 바쁜 사람이고 나한테 일일이 보고하는 건 너무 번거롭잖아요.”부승희는 한숨이 절로 나갔다.역시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대화를 아직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부승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이번에는 정훈이 오빠 탓이 커요. 시연 씨 옆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죠.”안시연이 뚝 멈춰 섰다.부승희는 안시연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돌렸다.“아니죠. 이철수가 마음먹었으니 어떻게든 기회를 노렸을지도 모르겠네요.”“아닌가?”부승희는 또 말을 고쳤다.“그래도 정훈 오빠 탓이에요. 연회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철수를 폭행하지 않았다면 이철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예요.”안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 없었다.부승희는 그녀의 밥에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속에 담아둔 걸 모두 정훈 오빠한테 풀어요.”안시연이 입을 삐죽였다.“상대는 연정훈인데 제가 어떻게 그래요.”“왜 안 돼요? 정훈이 오빠가 시연 씨를 얼마나 아끼는데.”안시연은 국을 한 입 삼키며 대답하지 않았다.“안 믿는구나?”부승희가 안시연을 슬쩍 살폈고 안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승희 씨도 좀 먹어요.”부승희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래서 젓가락을 내려두며 말했다.“이철수가 죽은 건 알아요?”안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철수 이름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부승희가 목소리를 낮췄다.“이철수가 지은 죄가 있으니 죽어 마땅하지만 이씨 가문이 양주에서 지위를 생각하면 뒤처리가 좀 까다롭게 되었어요. 게다가 이철수뿐만 아니라 연명걸도 실종되었거든요.”안시연이
연정훈은 잠시 눈을 붙이려고 했으나 잠에 들 수 없었다.안시연은 멀지 않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사건의 전말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양혁수를 만날 시간을 기다렸으며 두 사람 사이 대화는 없었다.얼마 후 연정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병실 밖을 나가 의사에게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았다.안시연은 연정훈이 뭘 삼키는지 알지 못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안시연이 묻지 않자 연정훈은 더 속상해졌다.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자신이 뭘 두려워하는지는 연정훈 본인이 더 잘 알았다.새벽이 되고 안시연이 연정훈을 깨웠다.“양혁수 보러 가요.”“...”연정훈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음에도 부하를 시켜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고개를 돌리자 안시연은 벌써 옷을 갈아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안시연은 양혁수가 정말 만나고 싶었다.연정훈은 말없이 그녀와 함께 시립 병원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양혁수가 있는 병실은 벌써 경호원으로 층층이 둘러싸였다.연정훈은 미리 양석진에게 부탁했고 양지원이 쉬러 간 틈을 타 면회를 할 수 있었다.양혁수는 수술 후 정신을 차렸으나 면회는 한 번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안시연이 안으로 들어가고 연정훈은 문밖을 지켰다.밤이 깊어지고 양지원마저 떠나면 양혁수는 긴 밤을 홀로 견뎌야 했다.그러다가 들려오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누군가가 걸어오며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이렇게 등장할 사람은 안시연을 제외하고 없었다.양혁수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았다. 몸이 멀쩡했다면 벌써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안시연은 그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움직이지 마요.”양혁수는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었으나 잘생긴 외모는 여전했다. 안색이 창백할 뿐이지 모든 게 잘 정돈된 모습이 누군가 정성껏 보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양혁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괜...찮아?”안시연은 부어오른 눈가와 긁힌 상처를 보여주며 말했다.“겨우 이 정도뿐이에요.”“이게 겨우...야?”“안 아파요.”“
안시영는 양혁수의 어깨를 가볍게 안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요.”양혁수가 입꼬리를 올렸다.“말로만 하면 재미없지.”양혁수가 고개를 돌려 안시연을 바라보았다.“난 또 뽀뽀라도 하는 줄 알았네. 근데 마침 아직 양치를 못 한 게 떠올라 이번에는 패스하자고 말하려고 했어.”안시연이 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침대에 누워있어도 입만 살았네요.”“내가 아무한테나 다 이러는 줄 알아? 널 제외하고는 우리 엄마한테만 이런다고. 대체 여자들은 눈물을 저장하는 공간이 따로 있는 건지 선배가 오기 전까지도 눈물을 펑펑 쏟고 갔어. 산소 호흡기까지 달고 있는 내가 달래줘야 한다니, 참.”“그럴 줄 알았다면 좀 더 늦게 올 걸 그랬네요.”“아니, 선배가 귀찮다는 의미는 아니야.”그는 시계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계속 안 자고 선배 오기만 기다렸어.”“내가 올거라고 생각했어요?”“마음이 통한 거지.”안시연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말하기도 힘겨워하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그럼 쉬고 있어요. 다 나으면 또 올게요.”“내가 다 나으면 보러 올 이유가 없을 텐데?”“...”“나한테 갚는다면서!”“그럼...”“매일 보러 와.”어려운 부탁은 아니었으나 안시연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양혁수가 병실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왜? 연정훈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아니요.”안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오늘도 연정훈 씨가 직접 데리고 와줬어요.”“선심 쓰셨네.”양혁수는 기회다 싶어 이렇게 말했다.“아 몰라 몰라. 선배는 반드시 매일 나 보러 와야 해. 밥 먹을 수 있게 되면 직접 요리도 해줘야 한다고. 안 그러면 그냥 치료 안 받고 확 죽어버릴 거야.”장난이었지만 듣는 안시연은 마음이 무거웠다.“그런 소리마요.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잖아요.”“그럼 선배는?”안시연은 어이가 없었다.“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그리고 연정훈 씨에게 잘 말해볼게요.”양혁수는 입을 삐죽 내밀었으
인생살이 29년 차 연정훈은 처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둔기로 머리를 세게 한 통 맞은 것 같았다.수면 유도제 때문에 정신이 흐린 것도 맞지만 크게는 안시연의 질문에 화가 났다.하지만 이 사건의 최대 책임자인 연정훈은 화를 낼 입장이 되지 못했고 안시연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연정훈은 안시연을 많이 아꼈기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이번 사건이 꽤 커져 버려 양씨 가문 사람들이 직접 병원을 지키고 있어. 만나려면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그런데 이미 약속을 잡아버렸어요.”“...”연정훈은 눈을 찔끔 감았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었다.“최대한으로 노력해 볼게.”“네.”안시연은 아주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정훈이 덮어준 이불을 다시 휙 내렸다.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연정훈은 눈에 담았다.그래서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갔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연정훈이 먼저 손을 뻗어 안시연을 품에 안았다.“연정훈 씨가 안고 있으면 내가 너무 불편해요.”그는 바로 팔을 빼고 얌전히 그녀의 허리 위로 손을 올렸다.예전의 연정훈이었다면 이렇게 쌀쌀맞은 안시연에게 다시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잠시 뜸을 들인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시연아.”다정하게 부르는 이름에 안시연은 갑자기 납치되었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만 떠오르면 온 세상에 혼자 그곳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러자 주르륵 흐르는 눈물이 조용히 베개를 적셨다.“나한테 화 많이 났어?”연정훈의 질문에 안시연은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답했다.“아니에요.”연정훈이 한숨을 내쉬다가 말했다.“미안해.”“...”그러자 안시연은 눈물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눈물을 쏟아냈다.“뭐, 뭐가 미안해요. 내가 오히려 빚진 거죠. 날 살려줬잖아요.”오기를 부리는 안시연은 끝내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연정훈도 목이 따끔거렸으며
연정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안시연이 이제 연정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렸다.가만히 누워 안시연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달래려 몸을 일으킨 연정훈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너무 흥분한 그녀는 속에 담아둔 모든 걸 입 밖으로 내고 있었다. 안시연은 호흡이 가빠지고 안색도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연정훈은 일단 침착하게 침대에서 내렸다.그리고 티슈를 챙겨 안시연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그러나 안시연은 고개를 돌렸고 울음을 삼키며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연정훈은 오늘을 이렇게 넘겨 보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래서 침대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안시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그러나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연정훈은 그녀를 더 꽉 안았다.두 사람의 체격 차이에 안시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안시연은 손을 뻗어 연정훈의 어깨며 등이며 내리쳤다.연정훈은 묵묵히 그녀의 분노를 받아주며 안시연이 진이 빠지자 말없이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다 내 잘못이야. 널 두고 가는 게 아니었어.”안시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연정훈의 셔츠는 벌써 안시연의 눈물로 흠뻑 젖어버렸다. 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또 눈물이 쏟아졌다.‘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기나 할까?’‘또 연정훈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는 알까?”안시연은 너무 무서웠다. 연정훈이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까 무서웠고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할까 두려웠다.“나쁜 자식.”“나쁜 놈.”“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어느새 안시연은 입 밖으로 욕을 꺼냈다. 한바탕 화를 내고 나니 힘이 풀려 저도 모르게 또 연정훈을 꽉 껴안았다. 그녀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또 연정훈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인 것처럼 꽉 껴안았다.연정훈은 자신을 의지하는 안시연을 느끼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고개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안시연은 흐느끼며 그의 품에 기댔다.병실 안은 어느
이승우가 부승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눈치 없긴. 안시연 씨 마음속엔 연정훈밖에 없거든.”“그게 뭐? 정훈 오빠 마음속에 안시연 씨는 있고?”“그래. 그게 문제이긴 하지.”이승우는 연정훈을 슬쩍 밀어내며 말했다.“어쩔 수 없이 네가 양보해야겠다. 두 사람이 죽고 못 사는데 네가 놔줘야지.”연정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무섭게 이승우를 노려보았다.이승우는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부승희는 콧방귀를 끼며 안시연을 보러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가 떠나고 이승우가 바로 진지한 얼굴로 연정훈에게 물었다.“지금은 무슨 상황인 거야?”“시간이 필요하대.”“아니. 너랑 안시연 씨가 무슨 상황이냐고!”이승우는 어이가 없어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연정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그러자 이승우가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지금 내가 보기엔 안시연 씨와 양혁수 사이 언젠가 불이 붙어도 전혀 놀랍지 않은 상황이야.”연정훈은 심장이 철렁했다.그리고 안시연이 이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날 밤이 다시 떠올랐다.과거 소현주의 배신에 연정훈은 역겨운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안시연이 자신을 떠나고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부승희 말도 틀린 건 아니야.”이승우가 다시 말을 돌렸다.“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 아니야? 네가 뭐 안시연 씨를 좋아하거나 그러진 않았잖아.”연정훈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누가 그래?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이승우는 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눈을 반짝이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자! 방금 한 말 다시 해봐.”“...”이승우는 카메라를 켜고 그의 얼굴을 촬영했다.“안시연 씨가 얼마나 좋은지 말해봐. 소현주랑 비교하면 얼마나 차이가 있어?”연정훈이 핸드폰을 퍽 밀치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소현주랑 비교하지도 마.”이승우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안시연이 소현주랑 비교할 수도 없는 거야. 아니면 소현주가 안시연이랑 비교할 수도 없는 거야?”“...”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
저녁에.연정훈은 안시연을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양씨 가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양석진의 오른팔인 양창수만 병원에 있었다. 양창수는 안시연을 막지 않았고 대신 시간만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큰아씨께서 곧 저녁을 가져오실 겁니다.”안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이미 양혁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와. 나 배고파 죽겠어.”안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혁수 씨, 점심 안 먹었어요?”“먹기는 뭘 먹어. 오늘은 내가 새 삶을 살며 처음 먹는 식사잖아.”그제야 안시연은 양혁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안시연이 준비한 만두는 속이 거의 없고 반죽도 흐물거려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양혁수는 만두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네가 직접 만든 거야?”안시연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맞아요.”양혁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안시연을 바라봤다. “사실은 배달 음식이에요.”안시연이 결국 고백했다.양혁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배달 음식이면 어때.”양혁수는 입을 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한 입만 먹여줘.”안시연은 뒤돌아 밥상을 찾으며 양혁수 혼자 먹기를 바랬다.“내 손에 힘이 없어서 먹을 수가 없어!”양혁수가 투덜댔다.“제가 그릇을 들고 있을게요. 혁수 씨는 숟가락으로 드시기만 하면 돼요.”“그럼 안 먹어.”안시연은 어이없었다.“...”병실 밖.양창수는 유리창 넘어 병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채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안시연 씨께서 먹여 줄까요?”연정훈은 침묵했다.“...”연정훈은 병실 안을 보지 않았다.하지만 양창수는 연정훈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네. 먹여 주네요.”연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양창수의 이런 태도는 이제 익숙해진 연정훈에게 더 이상 놀라운 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연정훈은 양석진의 짓궂은 유머 감각까지 알게 될 정도였다.안시연 때문에 양혁수가 칼을 맞았으니, 당연히 양지원이 안시연을 탐탁지 않게 여길 줄 알았지만
처음 하는 뽀뽀도 아니었고 양혁수도 이젠 깜짝 놀라지는 않았다. 단지 헛웃음을 내뱉고 시선으로 무언가의 경고를 날릴 뿐이었다.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단 말이에요.”“...”‘그게 중요해?’양혁수가 혼을 내려고 자세를 고쳐 앉자, 변여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요.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봐요. 변태라는 거 인정할게요.”그러자 양혁수는 화를 내기는커녕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꼬맹이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야.”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글쎄요.”그리고 소파에 편히 기대앉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오빠 앞에서만 이래요. 정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오빠만 보면 달라붙고 싶은 걸 어떡해요.”“그러는 오빤, 내가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에요?”막아서는 사람이 없자 변여름은 점점 겁 없이 질문을 이어갔고 양혁수는 며칠 전 밤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별생각 없어.”“정말요?”“그래.”퉁명스러워 보이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피식 웃더니 제 스마트 워치를 벗어 양혁수의 손목에 채우려 했다.“뭐 하는 거야?”“뽀뽀 한 번만 더 하고 오빠 심박수 체크해보면 안 돼요?”양혁수는 바로 손을 빼냈으나 변여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체구로 보았을 때 변여름은 당연히 양혁수의 상대가 아니었고, 계속 매달리는 변여름에 양혁수는 양손을 꽉 잡아 포획해 버렸다.“자꾸 까불래?”손목이 잡혔지만, 변여름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양혁수를 간지럽혔다.양혁수는 새우처럼 파닥거리기 시작했고 변여름은 웃음이 터졌다. 양혁수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변여름은 점점 더 과하게 움직여 양혁수의 몸을 가로 탔다.참다못한 양혁수는 아예 변여름의 손을 잡아 벽으로 가두었다.“그만해.”양혁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간지러움에 숨이 찬 것도 있었지만 자꾸 기어오르는 변여름에 속수무책이라 그런 것도 있는 것
양혁수는 지금껏 변여름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변여름은 얼마든지 자신의 제가 했던 말을 뒤엎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럼, 네 말대로면 시연이도 현실이 상상보다 더 좋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그러자 변여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오빠, 계속 그러면 나 정말 질투할지도 몰라요.”“술 마셔 자제력이 떨어진 오빠를 질투에 눈먼 내가 뭐 어떻게 하려면 어쩌려고 그래요?”“...”변여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우울함이 반으로 줄었다.그리고 변여름이 뜨개질 거리를 찾아 다시 양혁수의 옆자리에 얌전히 앉았다.하얀 피부는 투명할 정도였고 가까운 거리에 양혁수는 변여름의 긴 속눈썹까지 보였다.“부모님이 연락이 온 거야?”양혁수의 질문에 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빨리 집으로 돌아오라 재촉하진 않으셔?”“아니요. 그것보다 오빠 어디까지 꼬셨는지 궁금해하시던데요.”양혁수는 머리가 지끈거렸고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가족들한테 날 좋아하는 사실은 언제 밝힌 거야?”“성인이 되는 날 에요.”그리고 변여름을 한 마디 덧붙였다.“오빠네 나라 법에 따른 성인이던 해에요.”“...”‘뜬금없는 곳에서 꼼꼼하긴.’“몇 해 동안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더니 그동안 부모님 사업 돕고 있었어?”변여름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5년 동안 아빠를 위해 일하면 앞으로 가문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을 받았거든요.”“그럼 넌 앞으로 뭘 하고 싶은데?”“의학이요.”변여름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답했다.양혁수는 나쁘지 않은 계획이라 생각했다. 변여름처럼 똑똑한 사람이 의사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그때, 변여름이 스웨터를 내려두고 말했다.“낮에 교수님이 연락을 하셔서 언제 한강시에 돌아올지 물었어요.”사실, 양혁수는 예전에 변여름한테 지도교수한테 연락하겠다고 겁을 줬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변여름이 그걸 은근히 떠보는 말투로 흘리자 양혁수는 못 들은 척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콩깍지?양혁수의 추억 속 에든베타는 분명히 따듯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밖을 돌아다니며 느낀 건 에든베타는 사실 흐린 날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술잔을 내려놓은 양혁수가 변여름에게 물었다.“빙 둘러 말하더니 지금 나한테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은 사실 내가 꾸며낸 허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양혁수는 무표정이었고 기쁨도 슬픔도 읽히지 않았다.이에 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추억은 아름다운 거죠. 근데 그게 왜 허상이겠어요?”“다른 사람 눈에 별로 일 순 있어도 오빠한테 아름다운 거면 아름다운 추억인 거예요.”양혁수는 말없이 변여름을 바라봤고 변여름은 더 차분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한 여자의 가장 예쁜 순간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마음속에 제일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건 원치 않아요.”“내가 에든베타의 쓸쓸함을 봤다고 해서 과거의 그 사람이 별로가 되어버리는 건 아니야.”“당연하죠.”변여름이 미소를 지었다.“요즘 시연 언니 만나봤어요?”“뭐, 나이가 든 시연이가 과거와 달라졌을 것 같아?”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시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건 있어요. 시연 언니는 오빠와 4분의 1이 넘는 인생을 같이했고 오빠의 인생에서도 시연 언니는 이미 중요한 사람이 되었겠죠. 그러니 달라진 외모는 오빠한테 큰 타격이 없을 거예요.”양혁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 마신 컵을 돌려줬다.“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야?”“오빠가 과거를 직시하는 거요.”변여름은 옆에 내려둔 인형을 안아 들고 양혁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시연 언니가 과거에 예뻤고 지금도 예쁘다고 하지만, 오빠는 아직도 시연 언니만 보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양혁수의 표정이 굳어갔다.“그게 왜 그렇겠어요.”양혁수가 대답이 없어도 변여름이 말을 이었다.“과거의 시연 언니가 50점이었다면 지금 더 완벽해진 시연 언니는 거의 80점에 달하겠죠. 하지만 오빠 마음속에 심어진 시연 언니는 추억 속에서 점점 미화가 되어 100점이 아니라 만
여섯 시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집으로 돌아왔다.주방에 있던 변여름은 인기척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그래서 주방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양혁수를 불렀다.외투를 벗던 양혁수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이것도 변여름이 예상했던 시나리오이긴 했으나 이런 양혁수를 바라보는 건 너무 마음이 아팠다.“오빠, 빨리 와서 앉아요. 밥 다 됐어요.”양혁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식탁 앞으로 걸어왔다.변여름은 부지런히 반찬 여섯 가지와 국 하나를 완성했다.“우리 두 사람뿐인데 이렇게 많이 할 필요없어.”“많지 않아요.”변여름이 양혁수의 밥 위로 반찬을 올려주며 말했다.“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기운이 빠졌을 거예요. 오빠는 양식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밖에서 뭘 사 먹지도 않았을 거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누가 그래? 내가 양식 별로 안 좋아한다고?”“오빠잖아요.”변여름이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전에 우리 오빠한테 여기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고 엄청나게 투덜거렸으면서.”“뭐. 그렇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야.”양혁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갓 튀긴 돈가스를 한 점 입에 넣었다.집 안에는 향기로운 음식 향이 가득했고 두 사람의 도란도란 얘기 소리와 이따금 들리는 웃음소리가 집안을 따뜻하게 데웠다.양혁수는 배가 아주 고팠던 건지 밥을 평소보다도 많이 비웠다.낮에 밖에서 겪었던 쓸쓸함은 어느새 변여름의 온기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샤워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변여름이 술잔을 세팅하고 있었다.“네가 산 거야?”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오후에 사람을 시켜서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양혁수는 변여름이 만들어준 칵테일도 마셔봤기에 변여름의 솜씨를 인정했다.“네 마음대로 한잔 만들어줘.”변여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양혁수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화려한 손놀림의 변여름을 바라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오
얼떨결에 기차에 탄 양혁수는 왠지 뾰로통했다.이건 양혁수의 추억 여행이었으나 변여름이 양혁수보다도 에든베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들었으며 본인과 양시연 사이의 이야기도 속속히 꿰고 있는 것 같았다.역에 도착하자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양혁수는 추위에 절로 몸이 움츠러지고 옷매무새를 다시 여몄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옆에서 한껏 과장하여 감탄하고 있었다.“여기 너무 예쁜데요?”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에든베타의 눈밭은 양혁수가 다녔던 여행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그런데 변여름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그래서 오빠가 이곳에서 시연 언니를 좋아하게 됐나 봐요.”“나였어도 시연 언니한테 반했겠다.”“...”방금까지 센치하던 기분이 또 와장창 깨져버렸다.오늘 일정에도 마중을 온 사람이 있었고 변여름은 아예 지낼 곳을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마을로 골랐다.“거긴 여행객이 많아서 남은 방이 많지 않을 거야.”양혁수가 넌지시 말하자 변여름은 패드로 남은 방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남은 방이 없긴 하지만 오빠가 그곳을 많이 그리워할 테니 기사더러 빙 둘러대려고 하려고요. 오빠 추억 여행 좀 하게요.”“...”양혁수가 싸늘한 표정으로 변여름을 바라봤다. 이젠 변여름이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는 게 확신이 들었다.용산 거리를 지나쳐 눈이 뒤덮인 에든베타 건축물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이 분위기에 알맞은 노래를 틀어 양혁수가 한껏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했다.그러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양혁수가 든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아, 추워 죽겠네.’그때, 양혁수와 양시연이 함께 지냈던 집을 지나치게 되었고 주변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으며 여행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양혁수는 눈을 반짝이며 그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고 왠지 이 집이 몇 년 전보다 많이 낡았고 정원도 생각보다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억 속의 집은 늘 해가 잘 들고 넓은 곳이었는데
밤 열두 시 반.양혁수는 침대 왼쪽 끝에 누웠고 오른쪽엔 변여름이 누워 있었다.아까 변여름은 대화를 하자며 양혁수를 기어코 침대에 데리고 왔다.평소에 말수가 적은 변여름이었지만 대화를 이어가야 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수다스러울 수 있었다.지금도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최근에 봤던 아재 개그를 알려주고 있었다.“너 예능도 봐?”양혁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일반적으로 제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라면 예능 많이 보잖아요.”또 자신을 일반적인 소녀로 묶으려 애쓰는 모양이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왜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변여름의 대화에 꽤 흥미가 생겼기에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래. 무슨 아재 개그인데? 너무 썰렁하면 안 들어줄 거야.”변여름이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딸기가 회사에 잘리면 뭐가 되는지 알아요?”양혁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백수.”“아니요. 딸기시럽이요.”양혁수는 한참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왜?”변여름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딸기가 실업했으니까 딸기시럽이죠!”“...”양혁수는 썰렁함에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그 어떤 개그보다도 자신을 웃기려 애쓰는 변여름이 가장 재밌게 느껴졌다.“나 다른 아재 개그도 알아요.”변여름은 은근슬쩍 양혁수에게 다가갔고 거의 딱 붙기 직전이었다.양혁수는 재빨리 이를 발견하며 변여름을 다시 원위치로 밀었다.“자꾸 선 넘으면 네 방으로 확 던져 버리는 수가 있어.”양혁수가 변여름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대화하자며 데려와 놓고 자꾸 수작 피울래?”변여름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이불을 고쳐 덮었다.“너무 멀어서 오빠한테 잘 들리지 않을까 봐 그랬죠.”“나 겨우 서른이야. 이 정도 거리에서 듣지 못할 정도 아니거든?”“오빠 귀가 먹는다고 해도 난 오빠 옆에 있을 거예요.”변여름은 시도 때도 없이 플러팅을 했고 양혁수는 거의 무감각해졌다.“그만해.”양혁수는 이불을 쭉 당겨 변여름의 얼굴을 가렸다.
양혁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변여름이 마침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에 나타나 줬다는 것이었다.화로의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실에서 변여름과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양혁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이렇게 마음을 놓고 지낼 수 있는 기분은 스물다섯이 넘은 뒤로 다시 느낄 수가 없었다.스물다섯 전의 양혁수는 출생의 비밀도 몰랐고, 양시연을 만나지도 못했으며 총으로 제 친어머니를 쏴 죽이는 일도 겪지 않았다.변여름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해 주고 아무 이유 없이 옆을 지켜주는 걸 보며, 어쩌면 변여름이라면 최악의 모습을 들켜도 떠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자 양혁수도 변여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대체 뭔지 고민하게 되었다.‘내가 정말 여름이를 좋아하는 건가? 아닌데...’결국 양혁수는 본인이 변여름의 아낌없는 사랑에 점점 응석받이가 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시간이 차츰 흐르고 변여름의 뜨개질도 점점 스웨터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정말 밤을 새우기라도 할까 봐 밤 열한 시가 되자 서둘러 변여름을 제지하며 잠을 잘 시간이라 다독였다.변여름은 아까 호박죽을 끓였고 양혁수를 시켜 가스레인지를 끄고 두 그릇 떠오라고 부탁했다.양혁수가 고분고분 두 그릇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는데 변여름이 제 방에서 꼬물거리는 게 보였다. 옆방의 변여름 침대에 베개 하나가 사라졌고 그건 양혁수의 침대 위에서 다시 포착되었다.‘쯧. 또 시작이군.’양혁수의 발걸음 소리에 변여름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몸을 돌려 호박죽을 받아쥐었다.그리고 테이블로 걸어가 겉으론 침착한 얼굴을 하고 한 입 떠먹었다.양혁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똑똑 두드리다가 또 제 침대를 가리켰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변여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빠랑 같이 자려고요.”“꿈도 꾸지 마. 얼른 베개 들고 네 방으로 돌아가.”“새벽에 몰래 오빠 방으로 기어들어 오는 건 너무 변태 같잖아요.”그 말에 양혁수는 웃음이 터졌다.
화로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려오고 거실에는 그 소리를 제외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양혁수는 도라미 인형을 베개 삼아 누워 맞은편에서 열심히 뜨개질하고 있는 변여름을 바라봤다.“너 정말 뜨개질할 줄 알아?”변여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뜨개질하는 방법 다 익혔고 생각보다 쉬워요.”그리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쏘아붙였다.“오빠, 도라미 베개로 쓰지 마요!”양혁수는 상체를 살짝 들며 말했다.“좀 쓴다고 안 망가져.”그러자 변여름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를 보였고 양혁수를 혀를 차며 어쩔 수 없이 인형을 머릿밑에서 빼냈다.변여름은 그제야 다시 자리에 편하게 기대 다시 뜨개질에 집중할 수 있었다.“오늘 밤을 새우면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정말?”양혁수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이건 굵은 실이라 빠르거든요.”꽤 전문가처럼 느껴지는 말투에 양혁수는 긴가민가해졌다.그래서 그 옆에 앉아 모바일 게임을 하며 변여름의 완성품을 기다렸다.변여름은 스웨터 말고 먼저 목도리를 뜨려고 했는데 양혁수는 변여름이 스웨터를 만드는 줄만 알고 이렇게 비아냥거렸다.“이게 스웨터라고? 왜 이렇게 네모난 거야?”“스웨터는 너무 어려워서 담요로 바꾼 건가?”그리고 양혁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여름아, 오빠가 하나 조언해 줄까? 차라리 담요 두 장 만들어. 그다음에 가위로 옷 모양으로 자르고 테두리만 꿰매면, 그러면 그게 스웨터잖아.”“...”변여름은 처음으로 양혁수가 말이 많다고 느껴졌다.“담요를 그렇게 자르면 실이 다 풀린다고요!”“본드로 붙이면 되지.”“...”‘정말 못 말려.’양혁수가 말이 많아진 건 꽤 진지해 보이는 변여름의 모습이 조금 웃기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변여름은 무언가 집중할 때면 연구 실험을 하듯 한껏 굳은 표정이었는데 뜨개질할 때도 그 표정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그리고 양혁수도 변여름이 목도리를 뜨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회색 실을 보아하니 본인의 몫으로 뜨고 있는 것
고작 인형 하나 받았다고 변여름의 입이 귀에 걸렸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혁수의 옆에 찰싹 달라붙던 변여름은 어느새 인형을 들고 뛰어다니며 평범한 소녀처럼 사진 찍기에 바빴다.양혁수는 변여름이 찍은 사진을 아마 노지혜에게 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진을 찍고 변여름은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 도라미를 눕히고 얇은 이불까지 덮어줬다.“오빠, 저녁에 먹고 싶은 거 있어요?”변여름의 관심사가 다시 양혁수로 돌아오고 있었다.양혁수는 베란다에 앉아 국내 회사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양혁수가 변여름의 질문에 대충 대답을 하자 변여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했다.옷을 든든히 입고 출입문 앞에 선 변여름을 보고 양혁수가 불러세웠다.“어딜 가려고?”“마트요.”“이렇게 추운 날에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오빠가 소갈비찜 먹고 싶다면서요. 그건 양파가 꼭 들어가야 하는데 집에 없어요.”양혁수는 아까 일에 정신이 팔려 본인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도 잊었고 소갈비찜에 양파가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있는 재료로 만들어 먹으면 돼.”“안 번거로워요. 마트가 멀지도 않고요.”고집 피우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나 양파 별로 안 좋아해.”“그러면 빵가루 사와 내일 빵 구워줄게요.”‘쯧. 어떻게든 나가겠다는 생각이군.’양혁수는 성큼성큼 걸어가 변여름의 목도리를 풀어 헤쳤고 고개를 숙인 채로 타이르듯 말했다.“집 밖에선 어른 말 들어야 한다고 네 오빠가 안 가르쳤어?”변여름은 순수 무구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고 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심심하면 책 보거나 드라마 봐. 교수님이랑 프로젝트 의논을 하든지. 왜 종일 나 뭐 먹일 건지만 고민하고 있어?”“책이나 드라마, 그리고 프로젝트 의논을 해서는 오빠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잖아요.”양혁수는 목도리를 아예 훌렁 잡아당겨 소파에 곱게 눕혀진 도라미 위로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