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읍”‘조심해!’안시연은 몸부림치며 양혁수에게 알려주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칼이 몸을 찌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들려왔다.양혁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칼을 휘두른 상대는 한 번으로 부족했는지 칼을 빼 들고 또 한 번 더 찌르려 했다.양혁수는 고통을 참으며 상대의 손을 내리쳤고 다시 몸 다툼이 생겼으나 양혁수는 힘에 부쳤다.그렇게 칼이 다시 그의 복부를 찌르려는 순간 안시연은 끝내 차로 끌려갔다.“가자!”“빨리 가!”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도록 차 문이 굳게 닫혔다.안시연은 문을 열려고 몸통으로 들이박았으나 맞은편의 남자에 뺨을 맞고 말았다.입가가 찢어지고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으나 안시연은 바로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양혁수를 바라봤다.바닥에 쓰러진 양혁수를 내버려두고 방금까지 몸 다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 양혁수 주변을 둘러쌌다.흐릿한 시야에서 왠지 이승우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다.그리고 차량은 주차장을 벗어났다.안시연의 코를 막은 수건에 약물이 묻어 있었고 약효가 올라오자 그녀는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눈이 감기고 그녀는 오직 단 한 사람만 떠올랐다.연정훈.살려줘.세상이 온통 하얀색이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안시연이 눈을 번쩍 떴다.눈을 떠보니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사납게 생긴 어느 사내가 깨어난 안시연을 보며 손에 쥔 물컵을 내려놓았다.“빨리 철수 형님 모시고 와.”안시연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철수 형님이라는 지칭에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자 텅 빈 방에는 안시연이 묶여있는 의자와 그녀 맞은편의 소파밖에 없었다. 창밖으로는 오직 나무 한 그루만 보였다.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파편이 되어 떠오르고 안시연은 점점 두려움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내가 납치된 건가?’방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안시연이 깜짝 놀라 얼어붙
연명걸은 이철수를 죽이지 못해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연명걸은 예전과는 달리 괴팍해진 모습으로 소리쳤다.“미쳤어? 안시연을 납치하려고 양혁수를 칼로 찔러?”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양혁수는 양석진 의원의 조카였다!이철수도 사건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표정을 구겼다.“그 녀석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먼저 덤벼들었어요!”그러자 연명걸이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벗어 던졌다.젠장! 젠장!이철수와 한 배를 탔으니 연명걸도 같이 연루될 가능성이 컸다.“정보는 이미 연정훈에게 흘렸으니 저 여자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려면 제가 시킨 대로 할 겁니다.”이철수의 말에 연명걸이 냉소를 터뜨렸다.‘멍청한 녀석. 안시연만 잡고 있으면 뭐든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양혁수를 칼로 찔렀으니 하느님에게 빌어도 내버릴 목숨이었다.연명걸이 차가운 얼굴로 이철수에게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연정훈에게 딜을 할겁니다. 조건은 날이 밝기 전까지 주식을 모두 넘기는 것입니다.”연명걸은 이철수의 멍청한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넌 네 목숨보다 주식이 더 중요해?”이철수는 야비한 얼굴로 말했다.“양혁수를 찔렀으니 당연히 한국에서는 지낼 수 없겠지요. 그러니 도망갈 퇴로를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주식만 넘어오면 제가 저가로 대표님께 되팔겠습니다.”연명걸이 침묵했다.이철수도 완전히 멍청한 건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너무 순진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0분 안으로 이 별장은 벌써 표적이 되었다!연명걸이 찾아온 것도 미리 계획된 것이었으며 사건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었다.그러니 이철수가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연명걸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철수는 시한폭탄이 되었으니 이철수의 손을 빌려 주식을 쥐고 연정훈과 양석진의 손을 잡고 다시 이철수를 처리하면 되었다!두 눈을 감고 고민하다가 결정한 연명걸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넌 안시연에게 손 떼. 내가 직접 연정훈이랑 딜 할 테니!”“빨리!”안시연은 1분 1초가
“안시연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20분 안으로 주식 넘겨줄 테니까.”“이철수한테 전해. 양혁수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살고 싶으면 안시연 건드리지 말라고!”연명걸은 연정훈의 흥분한 목소리에 안심할 수 있었다.역시 안시연은 연정훈에게 꽤 중요한 사람이었다.연명걸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나와 이철수가 어떤 사이인데 그건 해줄 수 있죠. 이철수는 그쪽이 체면을 구긴 것에 화가나 안시연에게 화풀이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양혁수를 다치게 할 계획은 없었는데 지금은 양씨 가문의 보복이 두려워 빨리 현금 챙겨 해외로 도망가려고 생각하고 있어요.”주식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건 자신의 리스크를 덜기 위해서였다.연정훈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안시연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쪽과 이철수는 똑같은 결말을 맞을 겁니다.”연명걸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뭐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통화는 종료되었다.그 통화는 양주시의 어느 경찰국에서 이뤄졌다.핸드폰을 내려놓은 연정훈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연정훈이 양주시로 막 도착했는데 이승우의 연락을 받았고 바로 안시연의 일을 전해 들었다.그래서 경찰국으로 달려가 상황을 진두지휘했다.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경찰서 서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전투복 차림인 주정민이 합계였다.양주시에서 벌어진 사건에 서장은 잔뜩 당황한 얼굴이었으며 연정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연정훈의 시선은 오직 주정민에게 닿았다.“언제쯤 구할 수 있어요?”주정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이미 주변을 포위했고 1시간을 넘긴다면 이 옷 벗겠습니다”!연정훈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한시 빨리 안시연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같이 가시죠.”연정훈의 말에 주정민이 고개를 돌렸다. 이런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었다.“네, 알겠습니다.”주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피해자를 구하고 옆을 지킬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그렇게 다정하게 챙길 시간은 없습니다.”별
펑!안시연은 의자가 뒤로 넘어가도록 발버둥 쳤다.허리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그녀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 버렸고 입이 막혀 있는 탓에 소리 지를 기회도 없었다.이철수는 욕을 지껄이며 그녀의 옆으로 주저앉으려 했다.그때 소란을 들은 연명걸이 빠르게 달려와 방문을 열었다.현장을 목격한 연명걸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이철수를 발로 뻥 차버렸다.이철수는 바닥으로 쓰러졌고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바로 달려들었다.연명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와 몸 다툼을 이어갔다.쓰러진 안시연은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보이지 않는 어둠이 그녀를 잡아먹고 있었다.그때.펑!갑자기 여러 차례 굉음이 들려오더니 뜨거운 액체가 안시연의 목 언저리와 옆선에 튀었으며 시야를 흐리게 했다.숨을 들이쉬면 온통 피비린내가 느껴졌다.안시연은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수건을 꺼냈다.정신을 차리자, 자기 얼굴에 튄 액체가 피였다는 걸 깨달았고 안시연은 온몸이 덜덜 떨렸다.“시연아!”“나야, 연정훈!”연정훈...안시연은 얼마 남지 않는 이성을 되찾고 흐려진 눈을 비벼 앞에 선 사람을 쳐다봤다.연정훈.정말 연정훈이었다!안시연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의 목을 꽉 껴안았다.그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연정훈은 누구보다도 이성적이었다.못 본 사이 핼쑥해진 그녀의 얼굴과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주정민이 달려왔을 때 연정훈은 한 손으로 안시연을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 권총을 이철수의 몸으로 겨누고 있었다.“형!”주정민이 빠르게 다가와 총을 빼앗아 들었다.“형, 손 더럽히지 마요!”“제가 할게요!”주정민은 연정훈 눈의 살기를 보며 절로 소름이 돋았다.다행히 주정민이 제시간에 도착했다.그는 연정훈의 실제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절대 연정훈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서 안시연을 보며 머리를 굴렸
주삿바늘이 안시연의 팔을 찌르고 그녀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 안시연을 보며 연정훈은 가슴이 찢겼다. 그래서 그녀를 꽉 껴안아 그녀가 몸부림치다가 자신을 다치지 못하게 했다.진정제가 투여되고 의사는 작은 소리로 약효가 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린다고 언질을 주고 병실을 나섰다.안시연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흐릿한 시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가에 물린 듯한 상처를 발견했다.손을 뻗어 그의 입가를 어루만지고 싶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제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에 안시연이 또 공포를 느꼈다.연정훈은 점차 진정되고 있던 안시연이 또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두려워하자 손등을 토닥였다.“무서워하지 마. 지금 진정제 투여 중이고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해.”그의 목소리에 안시연은 점차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리고 두 눈이 감길 때까지 연정훈을 눈에 담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이 깊은 잠이 들 때까지 다독였고 쌕쌕 숨을 쉬는 그녀를 보며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어 간호사를 불러 검사를 이어가도 된다고 전했다. 그는 안시연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여러 검사실을 오갔다.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세 시간이 지나갔다.연정훈은 그녀를 병실에 눕히고 직접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닦았다.옷은 얼룩지고 피부는 긁히고 멍들었으며 연정훈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빨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연정훈은 분노가 들끓었다. 아까 그렇게 쉽게 이철수의 목숨을 앗아가는 게 아니었다!안시연이 잠에 들었음에도 연정훈의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몸을 닦고 나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왔다.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연정훈은 그녀 혼자 두고 떠난 게 후회되어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성산에 가지 않았다면, 아니 그녀를 홀로 양주에 두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연정훈...”침대에 누워있던 안시연은 꿈속에서도 그의 이름을 외쳤다.연정훈은 침대에 앉아 그녀를
“칼에 세 번이나 찔려 오늘 새벽에 수술실에서 나왔어요.”부승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의리 하나는 죽여주네.”부승원이 말했다.“이제 양주가 떠들썩해지겠네요.”그 생각만 하면 주정민은 욕이 입언저리에 맴돌았다.“말도 마세요. 아버지가 하룻밤 사이에 늙어버렸다니까요. 최소 보름은 잠 다 잤다고 보면 돼요.”이철수 부하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시연을 데려가지 못하더라도 양혁수에게 손찌검해서는 안 되었다.양석진 의원은 이 나이 먹도록 싱글이었고 오직 양혁수 조카 하나뿐이었다.정권을 이어받을 몇 명의 후보 중 한 명이 양석진이었다. 그런데 그의 조카가 양주에서 칼에 찔렸다니, 세상이 뒤엎어진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세 명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맞은 편에서 두 명이 걸어왔다. 그중 한 명은 부승희도 아는 사람인 진수빈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정장 차림에 굳은 얼굴, 보기만 해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부승원은 그 사람이 바로 연정훈의 부하이자 자주 얼굴을 보이지 않는 임성원이라는 걸 알아보았다.임성원은 그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네고 겁 없이 안시연 병실 문을 두드렸다.모든 사람이 그쪽으로 고개를 빼 들고 상황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열리고 임성원이 안으로 들어갔다.부승희가 입을 딱 벌렸다.“대박.”그리고 부승원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오빠, 저 사람 누구야?”이승우가 앞다투어 대답했다.“누구긴, 특급 탐정, 연정훈이 숨겨둔 오른팔.”부승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옆에 선 진수빈을 향해 농담을 날렸다.“그럼, 비서님은 잘릴 위기?”진수빈이 쓴웃음을 지었다.“부승희 씨, 차라리 짤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네요.”“왜요?”진수빈이 한숨을 내쉬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임성원 씨가 도착하고 흥성 그룹 연 대표가 사라졌어요.”“네? 사라지다니요?”진수빈이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부승희는 깜짝 놀라다가 1초 후 알아차렸다.“정
양혁수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소식에 임유정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날이 밝고 연명걸도 연락을 받지 않자 점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철수가 이미 죽었으니 그녀가 USB를 훔쳐 간 사실이 들통나도 가짜 장부는 숨길 수 있었기에 연명걸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가짜 장부 사건만 잘 숨긴다면 이철수의 범죄 동기는 연정훈에 대한 사적 감정이었고 임유정은 발을 뺄 수 있었다.그래.그럼, 아무 문제도 없어.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하지만 2시간 전, 연명걸은 벌써 잡혀갔고 임성원 부하의 고문 아래 1시간도 되지 않아 이철수의 범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백했다.더구나 이철수는 사건 발생 후 연정훈에게 주식을 요구했으니 연정훈도 이상을 눈치채고 있었다.벨벨.핸드폰이 진동하자 임유정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펑!이어 굉음이 들려왔다.별장 대문이 부서지고 임유정은 그제야 손을 덜덜 떨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이 끊기고 임건식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정아...”임건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 사람들이 방을 쳐들어왔고 그녀를 소파에서 끌어당겼다.“아빠! 아빠! 살려주세요!”방안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임유정만이 그곳에서 증발되었다.핸드폰 넘어 임건식이 애타게 불렀다.“유정아! 임유정!”그러나 대답은 없었다....안시연은 긴 잠에서 깨어났고 삭신이 쑤셨다. 특히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기억이 파도처럼 머릿속을 파고들고 이철수가 자신의 뺨을 내리치고 벨트를 풀던 징그러운 장면이 떠올랐다.그러자 위에서 음식물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몸이 머리보다 빨리 움직여 휴지통을 찾았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베개 위로 토해버렸다.진이 빠진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다가 뒤로 쓰러질 뻔했고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단단히 받쳐줬다.연정훈이 그녀를 안아 들고 휴지로 입가를 닦아줬다.“우웩...”또 속이 메슥거리더니 두 번째로 구토했다.고개를 숙이자 토사물이 연정훈의 손등에 묻은 게 보였다.
연정훈이 말했다.“그쪽도 아주 어수선한 상황인데 네가 지금 찾아가는 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해.”안시연은 그를 가만히 쳐다보며 거짓인지 진실인지 판단하려 했다.아직도 공포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시연이 또 물었다.“정말 무사한 거 맞죠?”“그래.”연정훈은 믿지 못하는 안시연을 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쉬고 몸이 괜찮아지면 만날 수 있게 해줄게.”“왜 이틀이나 기다려야 해요?”안시연은 다시 불안해했다.“난 지금도 괜찮아요. 들킬까 걱정되면 간호사인 척 보러 갈게요.”연정훈은 말문이 막혔다.생사가 오가는 순간 함께 있었던 사람이니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그러니 안시연이 양혁수를 걱정한다고 해서 불편하지는 않았다.안시연이 두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자 연정훈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자리를 마련해 볼게.”그 말에 안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양혁수를 만날 생각에 안도한 게 아닌 그 말 한마디에 양혁수가 정말 살아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가장 걱정되던 일을 내려놓자 안시연은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그러자 연정훈이 다급하게 의사를 불러왔다.“지금 온몸이 아프대요!”연정훈은 질타하는 말투로 말했다.의사는 조심스럽게 언어 선택을 하며 진통제를 주사하겠다고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통제가 투여되자 안시연이 점점 편안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연정훈은 여전히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안시연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할까 노심초사했다.그렇게 안시연은 또 깊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공복은 몸에 좋지 않았다.의사의 의견에 따라 연정훈은 간이 적게 들어간 음식을 준비해 왔다.잠에서 깬 안시연은 먹는 둥 마는 둥 몇 술을 입에 넣었다.연정훈은 내내 그녀만 챙겼고 그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정훈 씨는 안 먹어요?”안시연이 연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밤을 새웠더니 입맛도 사라졌다. 하지만 담배 생각이 간절해 몇 대 피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별로 배고프지 않아.”안시연은 핼쑥해진 그의 얼굴을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