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가 자신을 왜 찾는지 뻔히 알면서 묻는 연정훈이 미웠다.자신은 연정훈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이렇게 줄행랑을 친 건데 비아냥거리다니.“그 자리에서 선물 받으려 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계획을 망친 거예요.”안시연이 그의 말에 되받아쳤다.교수님.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이었다.그런데 오늘 그의 말에 대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연정훈은 코웃음 치며 그녀의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열려고 했다.“내가 괜한 짓을 했나 보네.”그런데 안시연이 빠르게 몸을 돌려 그의 손을 막았다.두 눈이 마주쳤다.“왜 선물 필요 없어?”“...”할말을 잃은 안시연이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해하는데 누군가 문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문이 심하게 흔들렸고 한 번 더 걷어차면 열릴 것 같았다.그래서 문 쪽으로 감히 몸도 기대지 못하고 연정훈이 무언가 해주길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연정훈은 덤덤하게 안시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시연은 연정훈과 더 이상 말다툼할 겨를이 없었고 양혁수가 두 번 문을 걷어차기 전에 손을 잡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는 몸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에게 이끌려 아래층으로 뛰었다.계단은 어두컴컴했고 안시연은 그의 손을 꼭 잡고 허겁지겁 뛰었다.뛰는 내내 연정훈은 안시연의 호흡 소리와 옅은 불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긴 머리에 정신이 팔렸다.양혁수 그 “미친놈”이 정말 연정훈 앞에서 고백한다면 안시연은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 생각이었다.그래서 연정훈과 숨이 차게 달려 아래층까지 내려왔으나 다른 층의 문은 잠겨 있었다.그러나 다행히 1층 문은 열려있었다.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과 거의 동시에 위층의 문이 펑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마 누군가 강제로 걷어차 열어진 것 같았다.안시연은 조금도 지체하지 못하고 연정훈을 이끌고 또 뛰기 시작했다.그런데 더는 참지 못한 연정훈이 자리에 뚝 멈춰 섰다.“왜 뛰는 거야!”안시연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숨이 너무 가빠 말 대신 손을 휘휘 저었다.
다행히 안시연이 빠르게 통화를 종료했다.그러나 숨을 돌리기도 전에 양혁수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이번에는 안시연이 움직이기 전에 연정훈이 먼저 수신 버튼을 누르고 길옆에 차를 세웠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힐긋 살폈다.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 등을 기대며 안시연과 시선을 마주했다.“얘기해.”“...”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양혁수는 정말 안시연에게 숨 쉴 구멍도 남겨주지 않을 생각인 듯싶었다.“안시연?”안시연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저예요.”양혁수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운전 연습이 끝나서 이만 돌아가 보려고요.”“위치 보내줘. 내가 바래다줄게.”“이미 차에 탔어요.”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나 피하는 거야?”“아니에요.”“내가 연정훈의 앞에서 상품을 건네 그 사람 체면이 구겨질까 봐 그래?”안시연은 양혁수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입 좀 다물어.’연정훈의 눈치를 살피며 안시연이 말했다.“도련님, 상품은 도련님이 챙기세요. 그렇게 의미 있는 물건은 직접 소장하셔야죠.”양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상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네가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고. 그런데 요즘 생각 정리를 마친 게 있어서 직접 얼굴 보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안시연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전에 나한테 시집와도 되냐고 물었잖아. 생각해 보니 안될 건 없더라고.”???‘내가 언제 그런 걸 물었다고 그래?’눈을 커다랗게 뜬 안시연이 연정훈을 살폈다.연정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도련님, 그런 장난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그런 말을?”“네가 아니라고 해도 난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양혁수는 점점 더 대담한 소리를 했다.“어때? 양씨 부인하고 싶은 마음 있어?”안시연은 머릿속이 윙윙 울리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양혁수가 뱉은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구별한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오늘 밤 죽었다는 생각뿐이었다.입을 열려는데 귓가에 차가운
차 안에서는 한참 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양혁수가 먼저 도발했다.“왜 그래요 형? 아쉬워요?”“형이 포기하지 못할까 봐 내가 더 초조해요.”“난 안시연과 결혼할 거예요.”“입만 열면 허풍은.”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형한테 허풍을 치겠어요? 내일 아침 9시 구청에서 만나요. 안시연이 오면 바로 혼인신고서 작성할 거예요.”안시연이 참다못해 외쳤다.“도련님!”“나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여전히 농담 섞인 말투였다.“내일 혼인신고서 작성하려는데 올래?”안시연은 심호흡하며 말했다.“이런 농담 다시 하지 마세요.”“농담 아니야.”양혁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오기만 해. 그럼 결혼하자.”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그 말에 심장이 절로 쿵쿵 뛰었다.“형. 어떻게 생각하세요?”양혁수가 연정훈에게 재차 물었다.안시연 손을 잡았던 손의 힘이 풀리고 연정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일 아침 9시, 내가 직접 바래다줄 테니 자신 있으면 제시간에 오든지.”양혁수가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절대 늦지 않을게요!”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안시연은 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연정훈이 너무 힘을 준 건지 손자국이 빨갛게 남았다.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표님, 저도 독립적인 생명체라고 생각되는데요.”‘왜 내 혼인은 제 멋대로 결정하고 아침 일찍 바래다준다고 하는 거야?’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애써 기분을 억눌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또 네가 기뻐할 줄 알았지.”‘결혼이 간절해 내가 아니면 양혁수를 찾아갈 줄 알았어.’안시연은 고개를 돌렸다.“기뻐하든 아니든 그건 제 일이 구요. 제 혼인도 저만 결정할 수 있어요.”연정훈이 침묵했다.한참 조용하던 차 안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안경을 벗어 앞으로 내던졌다.“양혁수가 결혼하자는 말이 진심
안시연은 억울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둘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같은 방에 있어도 두 사람은 서로를 공기처럼 여겼다.안시연은 옆방에서 자겠다고 마음먹고 이불과 베개를 챙기며 물었다.“오늘 할 거예요? 안 하면 잘래요.”그 말투는 듣는 이의 화를 돋웠다. 마치 내일 양혁수가 무조건 구청에서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단정하는 말투였다.연정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일이면 제수가 될 사람한테 그러면 내가 뭐가 되겠어?”“...”안시연은 이불을 안고 몸을 돌렸고 옆방으로 돌아가 펑 하고 문을 닫았다.연정훈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고 손목시계를 풀어 탁자에 내리쳤다.내일 아침 9시, 1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하지만 연정훈은 조금도 급한 마음이 없었다.내일 아침 대체 누가 체면을 구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그러한 생각에 잠긴 채로 방을 걷다가 연정훈은 실수로 탁자 모서리에 다리를 찍었다.우당탕!갑자기 들려오는 소란에 안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방을 나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 자리에 앉았다.어차피 이런 일로 연정훈의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악독한 마음을 먹은 사람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안시연은 이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잠이나 자자!’...양씨 저택.양민아는 서킷장에서 양혁수를 만나지 못해 내내 전전긍긍했다.자유로운 성격의 양혁수가 정말 엉뚱한 짓이라도 한다면 양민아 본인도 연루될 게 뻔했다.급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양혁수는 보이지 않았다.양씨 본가는 경인 시에 있었으나 최근에는 경남 쪽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양지원이 자주 집을 비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러니 남매마저 집을 비우면 본가는 방치될 것이다.“아가씨.”집사가 양민아에게 인사를 올렸다.양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도련님은요?”“큰아씨의 서재에 계십니다.”양지원은 거의 반백 살이 되어가도 집사는 그녀를 큰아씨라고 불렀다.양민아는 이미 적응이 된 터라 대
양민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누구랑?”양혁수는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스트레칭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안시연.”양민아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빠르게 양혁수의 앞으로 걸어갔다.“너 미쳤어?”양혁수는 이런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으며 말했다.“내가 안시연이랑 결혼하면 연정훈을 뺏을 사람도 없으니 너한테도 좋은 거잖아.”“그거랑은 다르지!”양민아는 목소리를 높였다.“네 아내면 양씨 가문 안주인이잖아!”양혁수가 이렇게까지 미친 녀석일 줄은 몰랐다.양혁수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베고 말했다.“왜? 안시연이 네 머리 꼭대기에 설가봐 그래?”양민아는 두 눈을 꼭 감았다.양민아는 안시연에게서 연정훈을 빼앗아 연씨 가문 사모가 되길 바랐었다. 양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었으므로 양지원이 아직 자신을 아낄 때 하루빨리 더 든든한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그러나 그 대가가 안시연을 올케라고 불러야 하는 거라면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그깟 안시연이 뭐라고?’그 생각에 양민아는 심호흡하며 양혁수를 설득하려 했다.“어떻게 결혼을 해? 안시연은 연정훈의 사람이잖아!”“다 생각이 있어.”양혁수는 다리를 탁자 위로 올리고 천천히 말했다.“신혼 선물이나 준비해 둬.”양민아는 심장이 철렁했다.양혁수는 정말 진심인 듯싶었다.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다시 도장으로 향했다.양혁수는 양민아보다 한발 빠르게 도장을 손에 쥐었다.“시간이 많이 늦었고 내일 아침 혼인신고 작성하러 가야 하니 누나와의 대화는 여기까지.”양혁수는 여유롭게 몸을 일으켜 방으로 돌아갔다.“정말 결혼하게?”양민아가 마지막으로 물었다.양혁수가 몸을 돌리고 대답했다.“백 퍼센트 진심.”“양혁수, 결혼은 장난이 아니야.”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서?”‘장난? 그게 다 뭐라고.’‘결혼해도 이혼할 수 있지 않은가?’양민아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안시연을 알고 지낸 지 겨우 며칠이라고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첫눈에 반해 모든 걸 걸고 싶어진다는
안시연은 사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그런데 새벽 6시경 깨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양혁수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일어났어?]안시연은 잠이 순식간에 확 깨었다.양혁수는 도장을 챙긴 사진을 찍어 보냈다.[전남친 꼭 데리고 와. 증인 서달라고 하자.]“...”안시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양혁수가 안시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 맞았다. 게다가 이 사건은 제대로 양혁수의 도파민을 자극한 게 분명했다.결혼?양혁수는 두려울 게 없었다. 서로 안 맞으면 이혼하면 그만이었다.안시연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젯밤 연정훈과 말다툼했던 자신을 원망했다.‘이제 어떡하면 좋아?’‘그냥 도망갈까? 아예 가지 마?’그때 방 밖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연정훈도 일어난 건가?’안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다. 연정훈도 일찍 일어난 거라면 도망갈 기회가 없어졌다.한참 제자리에 앉아 고민하다가 연정훈이 구경거리를 보러 일찍 일어난 게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어휴. 일단 가보자. 그리고 기회를 찾아 양혁수를 거절하는 거야.’‘기세는 절대 지면 안 돼!’긴 한숨을 내쉰 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옷을 골랐다.아침 7시.평소 이 시간에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모닝 운동을 할 때도 있었다.그러나 오늘 아침 안시연은 일찍 주방으로 들어가 1인분의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연정훈은 커피를 내리고 창가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보이지 않는 접전이 시작되고 아무도 고개 숙일 생각하지 않았다.연정훈은 기분이 언짢았다.오늘 안시연이 입은 새 원피스는 연정훈의 카드를 긁은 거였다.게다가 메이크업까지 한 걸 보아 안시연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딸칵!연정훈은 실수로 커피 스푼을 컵 안으로 떨어뜨렸다.안시연은 그 인기척에 말없이 입을 삐죽였다.연정훈이 몰래 출근했다면 안시연은 모르는 척 없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그런데 돌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끝까지 해보자는 게 틀림없었다.‘대체 왜 양혁수가 내가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는 거지?’안시연도
양씨 가문.양혁수는 기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고 차키를 챙겨 집 밖으로 향했다.그런데 현관을 나서자마자 검은색 링컨 네비게이터가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양혁수는 잠시 멈춰서서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창수 삼촌, 여긴 어쩐 일이세요?”중년 남자는 반듯한 셔츠 차림에 우아하고 기품이 넘쳐 보였다. 양석진의 곁에서 정치 일을 오랫동안 도왔으니 양씨 집안의 아랫사람 앞에서도 위엄이 넘쳤다.“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축하하러 왔습니다.”양혁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누구 입이 싼 지 벌써 삼촌한테까지 말을 전했나 봐요?”양창수는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러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군요?”“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뱉은 이상 책임을 져야죠. 더구나 저는 성인 남성인데요.”“그래요. 그 말엔 삼촌도 동의하셨답니다. 하지만 양혁수 씨는 양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혼인을 그렇게 성급히 하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고 삼촌이 대신 확인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삼촌이...”“그래서 구청은 양혁수 씨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삼촌이 대신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양혁수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삼촌이 경인에 있는 거예요?”“경인에 없어도 큰아씨 전화 한 통이면 어디에 있어도 달려오실 겁니다.”“...”‘젠장. 삼촌을 잊어버렸잖아.’중얼거리는 양혁수 주변으로 양창수가 데려온 사람들이 둘러쌌다.“도련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구청으로 가는 차 안은 적막했다.진수빈은 갑작스레 막장으로 치달은 시나리오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차선을 바꿔 추돌 사고를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기사가 진수빈에게 그럴 기회를 줄 리가 없었다.뒷자리의 연정훈과 안시연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구청에 커플들이 쌍쌍이 들어섰으나 양혁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연정훈은 두 눈을 감고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침묵이 바늘이 되어 자신을 콕콕 찌르
안시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이만 도망가기로 결심했다.저녁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연정훈이 유치하게 자신을 놀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그래서 구청 사무실을 빙 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조용한 정원까지 다다르자 정장에 가죽 구두를 신은, 척 보아도 정치 인사 같은 두 사람이 보였다.안시연은 일부러 피해 걸었지만 두 사람은 안시연 앞에서 멈춰 섰다.“안시연 씨 맞으시죠?”둘 중 한 명이 물었다.안시연이 경계를 하며 물었다.“그쪽은...”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두 남자는 길을 비켜서며 말했다.“양 대표님이 안시연 씨를 위층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 굳었다.‘설마 양지원?’양혁수의 장난이 결국 양지원의 귀에까지 들어갔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양혁수가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한 건 아마 양지원이 손을 본 것 같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건지 직접 자신을 만나러 온 것 같았다.안시연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저는 양 대표님을 만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요. 오해는 도련님한테서 전해 들으시길 바라요.”두 사람은 안시연의 말을 무시한 채로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모시는 제스처를 했다.“이곳으로 모시겠습니다.”안시연은 전에 양지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조금 차가운 사람 같았으나 인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잠시 생각해 보니 양혁수의 일에 양지원이 어머니로서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상할 점은 아니었다.게다가 구청에서 큰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그러니 위층에서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려고 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걸었다.3층으로 올라가자 오래된 대리석 바닥이 보이고 조용하고 여유로운 사무실 분위기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가장 안쪽 방 밖으로 5~6명의 경호원이 보였다.안시연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양지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뒤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깜짝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양시연은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창밖의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을지 생각했다.조수석에 앉은 반우희가 부승원에게 전화를 걸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나 지금 어디 있는지 맞혀봐요.”승주는 질색하며 대꾸했다.“정말 오글거리네요.”양시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반우희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감추고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부승원과 대화를 이어갔다.양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하자 몇 분 전 연정훈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그녀의 안부를 물었고 함께 좋은 소식도 전해왔다.양시연은 배를 가만히 쓸어내리며 잔잔한 만족감을 느꼈다.“오늘 밤은 야근하지 말아요...”앞좌석에서 반우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양시연은 장난삼아 그녀를 놀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차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지만 강한 충격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운전자는 급히 핸들을 틀었고 단순한 차선 변경이 아니라 차량이 갑자기 속력을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무슨 일이에요?!”반우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양시연은 충격에 숨이 턱 막혔고 안전벨트에 강하게 되감기면서 배에 묵직한 압박감이 몰려왔다.운전석에서 운전사가 다급하게 외쳤다.“차가 이상해졌어요. 갑자기 통제가 안 되면서 옆 차와 부딪쳤습니다!”“그...그러면 빨리 멈춰야죠.”승주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양시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고통을 참았다.“맞아요. 얼른 갓길에 세우세요!”“멈출 수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운전사의 한마디에 차 안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고 양시연을 포함한 모두의 손발이 차갑게 굳었다.승주와 반우희는 창백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꽉 움켜쥔 채 마치 목소리를 잃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양시연은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연정훈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동시에 반우희에
큰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연씨 가문의 본가에서 표세연이 전화를 받았다.“좋아. 알았어.”양시연은 2층에 서서 표세연의 기쁜 목소리를 들으며 대충 짐작했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표세연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괜찮아. 연정훈의 아버지가 다 해결했어.”‘아이고.’“맞아. 오늘 양석진 씨께서 모습을 보이셨대.”표세연이 덧붙였다.양시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되었음을 실감했다.그녀는 연정훈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후속 처리할 일이 남아 있는 듯했다.집에서 기다릴까 했지만 마침 반우희가 세 아이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도 차라리 반우희를 태우고 연정훈을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너무 서두르지 마. 연정훈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표세연이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양시연은 신경 쓰지 않고 배를 살짝 받치며 계단을 내려갔다.“마침 답답했는데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싶어요.”“알았어. 네가 답답해할 줄 알았어.”표세연은 결국 운전사를 불러 그들을 밖으로 데려가 바람을 쐬게 했다.주차장에서는 세 아이가 여러 차를 구경하고 있었고 반우희가 좋아하는 마이바흐는 승주도 탐을 내는 차였다.“아니면 우리 이 차를 타고 나갈까요?”양시연이 제안했다.“그래도 돼요?”반우희와 승주가 동시에 묻자 양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아싸.”탁승호는 없었고 표세연이 정해준 운전사는 오랫동안 일해온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안전을 위해 희주와 동준은 다른 차에 태웠다.반우희는 마이바흐의 조수석에 앉았고 승주는 양시연과 함께 뒷좌석에 올랐다.“나도 이제 출세했네요. 마이바흐를 타보다니.”양시연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운전사에게 차를 출발하라고 지시했다.출발!...단 15분만에 양원 그룹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누구도 그 전화의 내용을 직접 듣진 못했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결과는
“괜찮아요. 반우희 씨는 그냥 한 번 올라가서 볼 거예요. 탁승호 씨는 차 시동 켜고 조수석에 앉아요. 우희 씨가 잠깐이나마 만족할 수 있도록 해줘요."양시연이 웃으면서 말했다.탁승호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네.”반우희는 기분 좋게 차에 올라탔고 양시연은 차 밖에서 앉아 있었으며 실내는 시원하게 느껴졌다.탁승호는 계속해서 옆에서 지켜보았고 반우희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그의 눈빛이 다소 불친절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마음대로 만지지 않았다.그녀가 차에서 내리자 양시연은 웃으면서 물었다.“마음에 들어요?”“네. 마음에 들어요.”“사법시험 끝나면 부승원 씨에게 차 한 대 사달라고 해요.”반우희는 진지하게 한숨을 쉬었다.“시연 언니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물어보길래 차 한 대 선물해 줄 생각인 줄 알았어요.”양시연이 일어나서 반우희 코를 살짝 쥐었다.“욕심쟁이네요.”반우희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그때 또 한 번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반우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제 곧 폭우가 올 것 같아요.”“그럴 것 같네요.”...양원 그룹 회의실에서 6시가 다 되어가지만 사람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회의라지만 사실 중요한 사항은 이미 끝났고 남은 건 윗사람들의 연설뿐이었다.회의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고 그의 말 속에는 일부 얌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5분 전 누군가가 또다시 창고에서 발생한 사고를 언급했다.“지금까지 사망자 가족은 아직 보상안을 받지 못했습니다.”이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책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보상안이 나올 수 있나요?”“우리는 어쨌든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누군가 말했다.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죠. 사람들의 입이 무섭죠.”정 회장은 표원정의 의견을 지지했고 그는 이미 조재민과 얽히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회장과 연정훈과 대립 중이었다.이 회장은 그를 한 번 쳐다본 후 웃을 듯한 표정으
양시연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양혁수는 그녀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마음 한구석이 살짝 쓰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하다니 다행이었다.“이제 곧 출산인데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요즘 같은 때는 한 발짝 덜 움직이는 게 안전한 법이야.”양혁수가 걱정스레 말했다.“어쩜 정훈 씨랑 하는 말이 똑같아?”“연정훈 씨랑 나를 비교하지 마. 난 그 사람이랑 상종도 안 해.”양시연은 웃음을 터뜨렸다.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화 너머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변여름이야?”“응. 변백호가 볼일 있어서 왔는데 변여름도 같이 따라왔어. 한강시에 한 번도 안 와봤다길래 데리고 놀러 왔지.”“잘됐네.”“혹시 처리할 일 있으면 말해. 너희가 직접 움직이기 어려운 건 내가 대신 해줄게.”전화를 끊기 전 양혁수가 덧붙였고 양시연은 그의 배려가 고마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저녁 무렵 반우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세 아이를 데리고 복숭아를 따러 갔다가 양시연에게도 좀 가져다주고 싶다고 했다.마침 무료하던 참이라 양시연은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아이들이 도착하자 집안 분위기가 한층 활기차졌다.표세연은 특히 동준이가 작은 몸집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만화 캐릭터 같다며 귀여워했다.양시연과 반우희는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반우희는 대게를 한입 베어 물며 무심히 말했다.“요즘 다들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벌써 이틀이나 부승원 씨 얼굴을 못 봤네요.”“내가 없으니 많이 힘들겠죠.”양시연이 말하자 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답했다.“그게 아니라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진 않았는데 요즘은 뭔가 이상해요.”양시연은 부승원이 왜 바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반우희를 달래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오늘 부승원 씨의 생일이에요. 이따가 그
이전에는 민수희가 있었기 때문에 표세연은 민씨 가문의 기생충 같은 사람들을 참을 수 있었지만 민수희가 떠나고 나서는 이제 조금도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요즘 마음도 편치 않아 누구에게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참이었다.그때 민지연이 버릇없이 덜컹거리며 들어오는 것을 본 표세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때렸다.‘팍!’양시연은 위층에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동 소리를 듣고 급히 문을 열였다. 그곳에서는 어린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방미선은 아마도 체면이 상했는지 표세연에게 기어이 몇 마디 반박하며 말했다.“혹시 갱년기 아니야?”“갱년기? 너야말로 갱년기야!”“나는 곧 손자를 볼 거야. 갱년기는 이미 다 지나갔다고.”민지연과 방미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본 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표세연은 화가 나서 말이 거칠어졌다.“앞으로 너희는 이 집에 다시 발 들이지 마. 어머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이 집엔 민씨는 없어. 정인은 이미 내 며느리와 함께 성을 바꿔서 양씨가 되었어. 만약 돈을 원하고 손자 행세를 하려면 양씨 가문에 가서 해.”“사모님.”가정부들은 놀라서 표세연에게 말을 그만하라고 했지만 표세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덧붙였다.“내가 하나만 말해줄게. 우리 사부인 성격이 나보다 더 안 좋아. 가서 손자 행세하고 싶으면 절이라도 소리 크게 내서 해.”방미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당장이라도 화병이 날 듯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고 욕을 하려 했지만 자신이 남의 집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이빨을 꽉 깨물며 참았다. 그런 다음 표세연에게 정신과 약을 먹으라고 권한 후 떨리는 손으로 민지연을 끌고 나갔다.가정부 중 한 명은 원래 표세연을 말리려 했지만 방미선의 말을 듣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저희 사모님은 건강하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민지연 씨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표세연은 한바탕 화풀이를 끝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