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혁수가 자신을 왜 찾는지 뻔히 알면서 묻는 연정훈이 미웠다.자신은 연정훈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이렇게 줄행랑을 친 건데 비아냥거리다니.“그 자리에서 선물 받으려 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계획을 망친 거예요.”안시연이 그의 말에 되받아쳤다.교수님.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호칭이었다.그런데 오늘 그의 말에 대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연정훈은 코웃음 치며 그녀의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열려고 했다.“내가 괜한 짓을 했나 보네.”그런데 안시연이 빠르게 몸을 돌려 그의 손을 막았다.두 눈이 마주쳤다.“왜 선물 필요 없어?”“...”할말을 잃은 안시연이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당황해하는데 누군가 문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문이 심하게 흔들렸고 한 번 더 걷어차면 열릴 것 같았다.그래서 문 쪽으로 감히 몸도 기대지 못하고 연정훈이 무언가 해주길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연정훈은 덤덤하게 안시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시연은 연정훈과 더 이상 말다툼할 겨를이 없었고 양혁수가 두 번 문을 걷어차기 전에 손을 잡고 빠르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는 몸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녀에게 이끌려 아래층으로 뛰었다.계단은 어두컴컴했고 안시연은 그의 손을 꼭 잡고 허겁지겁 뛰었다.뛰는 내내 연정훈은 안시연의 호흡 소리와 옅은 불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긴 머리에 정신이 팔렸다.양혁수 그 “미친놈”이 정말 연정훈 앞에서 고백한다면 안시연은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 생각이었다.그래서 연정훈과 숨이 차게 달려 아래층까지 내려왔으나 다른 층의 문은 잠겨 있었다.그러나 다행히 1층 문은 열려있었다.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과 거의 동시에 위층의 문이 펑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마 누군가 강제로 걷어차 열어진 것 같았다.안시연은 조금도 지체하지 못하고 연정훈을 이끌고 또 뛰기 시작했다.그런데 더는 참지 못한 연정훈이 자리에 뚝 멈춰 섰다.“왜 뛰는 거야!”안시연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숨이 너무 가빠 말 대신 손을 휘휘 저었다.
다행히 안시연이 빠르게 통화를 종료했다.그러나 숨을 돌리기도 전에 양혁수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이번에는 안시연이 움직이기 전에 연정훈이 먼저 수신 버튼을 누르고 길옆에 차를 세웠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얼굴을 힐긋 살폈다.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 등을 기대며 안시연과 시선을 마주했다.“얘기해.”“...”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양혁수는 정말 안시연에게 숨 쉴 구멍도 남겨주지 않을 생각인 듯싶었다.“안시연?”안시연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저예요.”양혁수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야?”“운전 연습이 끝나서 이만 돌아가 보려고요.”“위치 보내줘. 내가 바래다줄게.”“이미 차에 탔어요.”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나 피하는 거야?”“아니에요.”“내가 연정훈의 앞에서 상품을 건네 그 사람 체면이 구겨질까 봐 그래?”안시연은 양혁수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입 좀 다물어.’연정훈의 눈치를 살피며 안시연이 말했다.“도련님, 상품은 도련님이 챙기세요. 그렇게 의미 있는 물건은 직접 소장하셔야죠.”양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상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네가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고. 그런데 요즘 생각 정리를 마친 게 있어서 직접 얼굴 보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안시연의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전에 나한테 시집와도 되냐고 물었잖아. 생각해 보니 안될 건 없더라고.”???‘내가 언제 그런 걸 물었다고 그래?’눈을 커다랗게 뜬 안시연이 연정훈을 살폈다.연정훈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고 있었다.“도련님, 그런 장난하지 마세요. 제가 언제 그런 말을?”“네가 아니라고 해도 난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양혁수는 점점 더 대담한 소리를 했다.“어때? 양씨 부인하고 싶은 마음 있어?”안시연은 머릿속이 윙윙 울리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양혁수가 뱉은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구별한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오늘 밤 죽었다는 생각뿐이었다.입을 열려는데 귓가에 차가운
차 안에서는 한참 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양혁수가 먼저 도발했다.“왜 그래요 형? 아쉬워요?”“형이 포기하지 못할까 봐 내가 더 초조해요.”“난 안시연과 결혼할 거예요.”“입만 열면 허풍은.”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형한테 허풍을 치겠어요? 내일 아침 9시 구청에서 만나요. 안시연이 오면 바로 혼인신고서 작성할 거예요.”안시연이 참다못해 외쳤다.“도련님!”“나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여전히 농담 섞인 말투였다.“내일 혼인신고서 작성하려는데 올래?”안시연은 심호흡하며 말했다.“이런 농담 다시 하지 마세요.”“농담 아니야.”양혁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오기만 해. 그럼 결혼하자.”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그 말에 심장이 절로 쿵쿵 뛰었다.“형. 어떻게 생각하세요?”양혁수가 연정훈에게 재차 물었다.안시연 손을 잡았던 손의 힘이 풀리고 연정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일 아침 9시, 내가 직접 바래다줄 테니 자신 있으면 제시간에 오든지.”양혁수가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절대 늦지 않을게요!”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안시연은 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연정훈이 너무 힘을 준 건지 손자국이 빨갛게 남았다.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표님, 저도 독립적인 생명체라고 생각되는데요.”‘왜 내 혼인은 제 멋대로 결정하고 아침 일찍 바래다준다고 하는 거야?’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애써 기분을 억눌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또 네가 기뻐할 줄 알았지.”‘결혼이 간절해 내가 아니면 양혁수를 찾아갈 줄 알았어.’안시연은 고개를 돌렸다.“기뻐하든 아니든 그건 제 일이 구요. 제 혼인도 저만 결정할 수 있어요.”연정훈이 침묵했다.한참 조용하던 차 안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안경을 벗어 앞으로 내던졌다.“양혁수가 결혼하자는 말이 진심
안시연은 억울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둘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같은 방에 있어도 두 사람은 서로를 공기처럼 여겼다.안시연은 옆방에서 자겠다고 마음먹고 이불과 베개를 챙기며 물었다.“오늘 할 거예요? 안 하면 잘래요.”그 말투는 듣는 이의 화를 돋웠다. 마치 내일 양혁수가 무조건 구청에서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단정하는 말투였다.연정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일이면 제수가 될 사람한테 그러면 내가 뭐가 되겠어?”“...”안시연은 이불을 안고 몸을 돌렸고 옆방으로 돌아가 펑 하고 문을 닫았다.연정훈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고 손목시계를 풀어 탁자에 내리쳤다.내일 아침 9시, 1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하지만 연정훈은 조금도 급한 마음이 없었다.내일 아침 대체 누가 체면을 구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그러한 생각에 잠긴 채로 방을 걷다가 연정훈은 실수로 탁자 모서리에 다리를 찍었다.우당탕!갑자기 들려오는 소란에 안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방을 나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 자리에 앉았다.어차피 이런 일로 연정훈의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악독한 마음을 먹은 사람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안시연은 이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잠이나 자자!’...양씨 저택.양민아는 서킷장에서 양혁수를 만나지 못해 내내 전전긍긍했다.자유로운 성격의 양혁수가 정말 엉뚱한 짓이라도 한다면 양민아 본인도 연루될 게 뻔했다.급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양혁수는 보이지 않았다.양씨 본가는 경인 시에 있었으나 최근에는 경남 쪽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양지원이 자주 집을 비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러니 남매마저 집을 비우면 본가는 방치될 것이다.“아가씨.”집사가 양민아에게 인사를 올렸다.양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도련님은요?”“큰아씨의 서재에 계십니다.”양지원은 거의 반백 살이 되어가도 집사는 그녀를 큰아씨라고 불렀다.양민아는 이미 적응이 된 터라 대
양민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누구랑?”양혁수는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스트레칭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안시연.”양민아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빠르게 양혁수의 앞으로 걸어갔다.“너 미쳤어?”양혁수는 이런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으며 말했다.“내가 안시연이랑 결혼하면 연정훈을 뺏을 사람도 없으니 너한테도 좋은 거잖아.”“그거랑은 다르지!”양민아는 목소리를 높였다.“네 아내면 양씨 가문 안주인이잖아!”양혁수가 이렇게까지 미친 녀석일 줄은 몰랐다.양혁수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베고 말했다.“왜? 안시연이 네 머리 꼭대기에 설가봐 그래?”양민아는 두 눈을 꼭 감았다.양민아는 안시연에게서 연정훈을 빼앗아 연씨 가문 사모가 되길 바랐었다. 양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었으므로 양지원이 아직 자신을 아낄 때 하루빨리 더 든든한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그러나 그 대가가 안시연을 올케라고 불러야 하는 거라면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그깟 안시연이 뭐라고?’그 생각에 양민아는 심호흡하며 양혁수를 설득하려 했다.“어떻게 결혼을 해? 안시연은 연정훈의 사람이잖아!”“다 생각이 있어.”양혁수는 다리를 탁자 위로 올리고 천천히 말했다.“신혼 선물이나 준비해 둬.”양민아는 심장이 철렁했다.양혁수는 정말 진심인 듯싶었다.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다시 도장으로 향했다.양혁수는 양민아보다 한발 빠르게 도장을 손에 쥐었다.“시간이 많이 늦었고 내일 아침 혼인신고 작성하러 가야 하니 누나와의 대화는 여기까지.”양혁수는 여유롭게 몸을 일으켜 방으로 돌아갔다.“정말 결혼하게?”양민아가 마지막으로 물었다.양혁수가 몸을 돌리고 대답했다.“백 퍼센트 진심.”“양혁수, 결혼은 장난이 아니야.”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서?”‘장난? 그게 다 뭐라고.’‘결혼해도 이혼할 수 있지 않은가?’양민아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안시연을 알고 지낸 지 겨우 며칠이라고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첫눈에 반해 모든 걸 걸고 싶어진다는
안시연은 사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그런데 새벽 6시경 깨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양혁수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일어났어?]안시연은 잠이 순식간에 확 깨었다.양혁수는 도장을 챙긴 사진을 찍어 보냈다.[전남친 꼭 데리고 와. 증인 서달라고 하자.]“...”안시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양혁수가 안시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 맞았다. 게다가 이 사건은 제대로 양혁수의 도파민을 자극한 게 분명했다.결혼?양혁수는 두려울 게 없었다. 서로 안 맞으면 이혼하면 그만이었다.안시연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젯밤 연정훈과 말다툼했던 자신을 원망했다.‘이제 어떡하면 좋아?’‘그냥 도망갈까? 아예 가지 마?’그때 방 밖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연정훈도 일어난 건가?’안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다. 연정훈도 일찍 일어난 거라면 도망갈 기회가 없어졌다.한참 제자리에 앉아 고민하다가 연정훈이 구경거리를 보러 일찍 일어난 게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어휴. 일단 가보자. 그리고 기회를 찾아 양혁수를 거절하는 거야.’‘기세는 절대 지면 안 돼!’긴 한숨을 내쉰 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옷을 골랐다.아침 7시.평소 이 시간에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모닝 운동을 할 때도 있었다.그러나 오늘 아침 안시연은 일찍 주방으로 들어가 1인분의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연정훈은 커피를 내리고 창가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보이지 않는 접전이 시작되고 아무도 고개 숙일 생각하지 않았다.연정훈은 기분이 언짢았다.오늘 안시연이 입은 새 원피스는 연정훈의 카드를 긁은 거였다.게다가 메이크업까지 한 걸 보아 안시연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딸칵!연정훈은 실수로 커피 스푼을 컵 안으로 떨어뜨렸다.안시연은 그 인기척에 말없이 입을 삐죽였다.연정훈이 몰래 출근했다면 안시연은 모르는 척 없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그런데 돌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끝까지 해보자는 게 틀림없었다.‘대체 왜 양혁수가 내가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는 거지?’안시연도
양씨 가문.양혁수는 기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고 차키를 챙겨 집 밖으로 향했다.그런데 현관을 나서자마자 검은색 링컨 네비게이터가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양혁수는 잠시 멈춰서서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창수 삼촌, 여긴 어쩐 일이세요?”중년 남자는 반듯한 셔츠 차림에 우아하고 기품이 넘쳐 보였다. 양석진의 곁에서 정치 일을 오랫동안 도왔으니 양씨 집안의 아랫사람 앞에서도 위엄이 넘쳤다.“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축하하러 왔습니다.”양혁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누구 입이 싼 지 벌써 삼촌한테까지 말을 전했나 봐요?”양창수는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러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군요?”“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뱉은 이상 책임을 져야죠. 더구나 저는 성인 남성인데요.”“그래요. 그 말엔 삼촌도 동의하셨답니다. 하지만 양혁수 씨는 양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혼인을 그렇게 성급히 하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고 삼촌이 대신 확인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삼촌이...”“그래서 구청은 양혁수 씨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삼촌이 대신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양혁수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삼촌이 경인에 있는 거예요?”“경인에 없어도 큰아씨 전화 한 통이면 어디에 있어도 달려오실 겁니다.”“...”‘젠장. 삼촌을 잊어버렸잖아.’중얼거리는 양혁수 주변으로 양창수가 데려온 사람들이 둘러쌌다.“도련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구청으로 가는 차 안은 적막했다.진수빈은 갑작스레 막장으로 치달은 시나리오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차선을 바꿔 추돌 사고를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기사가 진수빈에게 그럴 기회를 줄 리가 없었다.뒷자리의 연정훈과 안시연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구청에 커플들이 쌍쌍이 들어섰으나 양혁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연정훈은 두 눈을 감고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침묵이 바늘이 되어 자신을 콕콕 찌르
안시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이만 도망가기로 결심했다.저녁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연정훈이 유치하게 자신을 놀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그래서 구청 사무실을 빙 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조용한 정원까지 다다르자 정장에 가죽 구두를 신은, 척 보아도 정치 인사 같은 두 사람이 보였다.안시연은 일부러 피해 걸었지만 두 사람은 안시연 앞에서 멈춰 섰다.“안시연 씨 맞으시죠?”둘 중 한 명이 물었다.안시연이 경계를 하며 물었다.“그쪽은...”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두 남자는 길을 비켜서며 말했다.“양 대표님이 안시연 씨를 위층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 굳었다.‘설마 양지원?’양혁수의 장난이 결국 양지원의 귀에까지 들어갔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양혁수가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한 건 아마 양지원이 손을 본 것 같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건지 직접 자신을 만나러 온 것 같았다.안시연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저는 양 대표님을 만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요. 오해는 도련님한테서 전해 들으시길 바라요.”두 사람은 안시연의 말을 무시한 채로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모시는 제스처를 했다.“이곳으로 모시겠습니다.”안시연은 전에 양지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조금 차가운 사람 같았으나 인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잠시 생각해 보니 양혁수의 일에 양지원이 어머니로서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상할 점은 아니었다.게다가 구청에서 큰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그러니 위층에서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려고 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걸었다.3층으로 올라가자 오래된 대리석 바닥이 보이고 조용하고 여유로운 사무실 분위기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가장 안쪽 방 밖으로 5~6명의 경호원이 보였다.안시연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양지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뒤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깜짝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연정훈의 품에서 턱을 치켰다.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의 콧등에 짧게 키스하고 말했다.“이젠 일어나. 우리 시내 구경이나 가자.”양시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빨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 급해.”연정훈은 잠시 표정을 굳힌 채로 말을 이었다.“그러는 넌 양혁수 보러 온 거잖아. 마침 시간도 되겠다 온 김에 나도 양혁수 보러 갈까 봐.”양시연이 눈을 부릅 떴다.‘삐진 거 참 오래도 가네.’“나보고 잘 삐진다고 그러더니, 정훈 씨야말로 삐돌이네요.”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이 너무 신경이 쓰인 연정훈은 행여나 두 사람이 따로 만날 까 안절부절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연정훈은 오늘 양혁수의 앞에서 깨소금을 볶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참 속 보이네.’하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양혁수는 네 오빠잖아. 그러니 보러 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참나. 그럼 혁수더러 형님이라고 부르던가요.”연정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나쁘지 않은데?”“...”양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정훈을 살짝 밀어냈다.“빨리 일어나서 옷 좀 챙겨줘요. 나도 씻어야겠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줬고 빠르게 옷을 챙겨 돌아왔다. 그리고 그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이 직접 옷을 입혀주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았다.하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잘 알았다. 연정훈에게 맡겨버린다면 아마도 또 한바탕 사달이 날 것이다.어젯밤 일이 있은 뒤로 양시연은 많이 뻔뻔해졌고 연정훈의 앞에서 당당하게 옷을 갈아입었다.갈아입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두 다리가 흐물거리고 허리가 엄청 시큰거렸다.그러자 연정훈이 빠르게 양시연을 부축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보다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지금 정훈 씨도 멀쩡한 척하는 거죠? 사실은 엄청 피곤한데 말이에요.”“...”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을 끌어안고 직접 화장실로 데려갔다. 양시연을 내려놓은 연정훈은 또
“거짓말...”“나랑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면서...”“그냥 내 얼굴이랑 몸만 좋았던 거잖아요...”정신은 흐릿해지고 땀으로 온몸이 젖어갔다. 그리고 양시연의 두 볼도 붉게 물들었으며 두 사람은 이따금 대화를 이어갔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양시연이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그래서 양시연을 달래며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졌다.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시연은 이제 손가락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연정훈의 팔을 베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기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안아 들고 샤워를 하러 갔다. 다시 침대로 돌아오고 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제 화해하는 거로 어때?”‘화해?’‘무슨 화해?’양시연이 머리를 굴리다가 연정훈이 과거 연애 시절을 가리킨다는 걸 깨달았다.“풉...”그래서 웃음이 터졌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정신이 흐릿할 때 서둘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서서히 잠이 들었고 어느새 연정훈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꿈 깨요...”연정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은 양시연을 꼭 껴안고 고개를 숙여 이마에 키스를 했다.몇 시간 뒤면 해가 뜰 시간이었지만 연정훈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버리고, 소현주 사건도 말해줬으니 이제 마음이 편했다.그래서 잠에 들지 않고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되었다.아침.양시연이 눈을 떴을 때, 연정훈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맞은편 소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시선이 마주치고 양시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고백이 떠오른 양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등을 휙 돌려버렸다.그러자 입꼬리를 올린 연정훈이 노트북을 내려 두고 양시연의 등 뒤로 앉았다. 이어 몸을 숙여 양시연의 목에 키스를 했다.입술의 말캉한 촉감이 유난히 선명했다.양시연은 두 눈을
“꼭 그렇게 날 상처 줘야겠어?”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양시연을 바라봤다.그러자 양시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이건 모두 정훈 씨가 자초한 거예요.”“삼촌이 정말 깨어나지 않았다면 정훈 씨는 평생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로 살았을 텐데.”그리고 양시연이 몸을 돌려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어디 보자. 설마 지금도 바보인가?”“...”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속수무책이었고 양시연이 내키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양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고작 이런 말로 내 믿음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 마요. 소현주 씨를 제외하고 정말 다른 사람은 없어요? 난 믿을 수가 없는걸요. 그때 호텔에서...”양시연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아주 익숙해 보였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날 놀리는 거야? 내가 뭐가 익숙해 보였다고 그래.”“...”“네가 멍청한 거지.”‘어쭈?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양시연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어쨌든 모두 정훈 씨 탓이에요. 어떻게 교수씩이나 돼서 수업 듣던 학생한테 마음을 품을 수 있어요?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연정훈은 과거에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그러자 연정훈은 이불을 위로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의 위로 올라타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했다.시선이 얽히고 연정훈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어 양시연의 귓불에 키스하며 말했다.“나한테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양시연은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연정훈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래서 양손으로 연정훈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는데 머릿속에는 그동안 연정훈과 함께 지내던 추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었다. 처음 만남을 이어가던 그 시절 연정훈은 너무 양시연을 몰아붙여 양시연을 힘들게 했었다.양시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아요? 정훈 씨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자 양시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내 말이 맞죠?”“...”양시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자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나랑 소현주는 가벼운 교제였지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어.”양시연은 믿지 않았다.“결혼 얘기까지 오갔다면서 해본 적 없다고요?”“없어.”연정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훑었다.그러나 진실이 어찌 되었든 이젠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이불을 쭉 당겨 등을 돌려 누웠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양시연을 품에 넣었고 양시연은 팔꿈치로 연정훈의 복부를 가격했다.“나 건드리지 마요!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뒤로 하고 다시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뽀뽀하고 달래도 효과가 없었다.그러자 연정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공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양시연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예요?”“더 자세하게 알려줄게.”“...”양시연은 궁금했지만 겉으로는 질색하며 말했다.“누가 듣고 싶대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말해줄 필요 없어요.”연정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은 드디어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고 연정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소현주는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공휘를 만났었다. 사실 이것도 순화해서 한 말이지, 소현주는 아주 많은 남자들과 돈으로 된 만남을 이어갔다.그러니 성폭행으로 몰아간 영상은 진짜와 거짓이 동시에 존재했다.소현주는 연정훈과 같이 지내며 과거가 들킬까 걱정이 많았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 유학을 변명으로 해외에서 여러 번 회복 수술도 받았다.공휘 주변에는 널린 게 여자였고 소현주에게는 이미 질려버린 터였다. 그러나 연정훈의 여자가 된 소현주를 보며 다시 관심이 생겼다.이 얘기를
양시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양혁수랑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누가 너희 정원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양민아에게 동영상을 넘겼어. 그리고 양민아는 그 영상을 내 할머니에게 보여줬고.”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할머니가 또 정훈 씨한테 보여줬겠네요?”“그래.”양시연이 길게 심호흡했다.“나랑 혁수는...”연정훈이 말을 잘랐다.“영상 속에서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잠이 들었어. 길고양이 길 강아지들을 같이 목욕도 시키고 양혁수는 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널 껴안기도 했어.”연정훈은 머릿속에서 가장 크게 남아 있던 그 영상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정원의 수도가 터진 날, 두 사람은 흠뻑 젖어버렸고 양혁수가 널 끌어안았어.”양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고 양시연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려놨다.“그건... 그건 끌어안은 게 아니라 그냥...”하지만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때는 생각이라는 걸 내려놓고 편히 지내다 보니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냥 물놀이하려는 본인을 막아서는 양혁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잡았다.“지금 나한테 연인 사이였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잖아요. 혹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관계를 가지진 않았는지 궁금한 거고요.”이 말을 하는 양시연은 양민아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애매모호한 영상을 짜집기해서 보낸 양민아는 이런 사단을 만들고자 작정을 한 것 같았다.연정훈이 한숨을 내쉬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엔 그게 궁금했어.”“그럼 지금은요?”“내가 괜한 생각을 했다고 생각해. 너한테 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아.”“...”양시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연정훈을 살짝 노려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그걸 아는 사람이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어디에서
포장을 뜯는 소리가 귓가에 스치듯 들렸고 양시연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몸을 살짝 들어 올려 연정훈의 귀에 대고 대답했다.“딱 조금만 더...”“...”“너 너무 우쭐대지 마.”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양시연의 귀 끝에 닿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양시연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고 단단히 허리를 감싸 안았다.“안 우쭐대면 네가 더 좋아할 만한 거로 보답할게.”양시연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손끝에서부터 힘이 풀려 움직임이 서툴러졌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었고 결국 모든 게 마무리됐다. 잠시 이어진 적막 속 이불 아래에서 부드러운 움직임이 일렁였다.“음...”타국에서의 밤은 그렇게 은밀히 막을 올렸다....새벽 뜨겁고 아찔했던 방 안은 마침내 고요를 되찾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며 몽롱한 기운 속에서 허리 아래로 전해지는 묘한 무력감을 느꼈다.감각이 아스라이 흩어지던 그 순간 양시연은 자신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연정훈이 몸을 떼어내는 부드럽고 세심한 움직임은 양시연의 온몸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고 양시연의 얼굴은 불꽃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을 열고 천천히 무언가를 정리했다.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 그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고 연정훈은 조심스레 양시연을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연정훈은 그녀를 가슴 위에 편안히 눕히고 단단한 팔로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의 물을 들어 양시연의 입가에 가져다 두어 모금 먼저 마시게 하고 남은 물을 천천히 마셨다.양시연은 서서히 기운을 되찾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순간 막혀있던 사고의 흐름이 갑자기 뚫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훈 씨, 갑자기 오게 된 이유가 정말로 나 보고 싶어서예요?”연정훈은 그녀를 꼭 안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길을 피하며 조심스레 물
남편이라는 단어는 사실 꽤 진지한 단어였지만 연정훈은 그 단어마저 가볍게 만들어버렸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차라리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끝내 연정훈을 ‘남편’이라 부르지는 않았다.연정훈이 다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양시연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녀의 눈빛은 애교와 질책이 섞여 있었다.“당신, 교수잖아요. 제대로 된 지식인이라면서 왜 맨날 이런 이상한 짓만 배워오는 거예요?”연정훈이 그녀의 손을 떼려 하자 양시연은 연정훈을 째려보며 손에 더 힘을 주었다.“멀리까지 와서 나 괴롭히려고 온 거예요?”연정훈은 목젖이 살짝 움직이며 양시연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의 눈빛은 점점 깊어져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양시연은 마음속으로 흐뭇해하며 손을 내려놓고 연정훈의 입술에 상을 주듯 가볍게 입 맞췄다.“말 잘 들어요. 먼저 저녁 먹고 다 먹으면 샤워해요.”연정훈이 무언가 대꾸하려던 순간 양시연이 말을 끊었다.“비행기에서 씻었다고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살짝 웃으며 한 번 더 연정훈의 입술에 입맞춤하고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장난스레 속삭였다.“씻었으면 조금 있다가 저랑 같이 샤워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정훈의 숨소리가 깊어졌고 곧바로 강렬한 입맞춤이 이어졌다.“알겠어. 밥부터 먹자.”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의 반응에 흡족해했다.집에서 가져온 음식은 양지원 쪽에 있었지만 양시연은 굳이 가져오지 않고 새로 한 상을 주문했다. 그녀는 옆에 앉아 연정훈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가리키는 음식마다 그는 더 많이 먹었다.조용한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재회로 인한 설렘이 잦아들고 따스한 온기가 가득 차올랐고 3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연정훈의 아내로서 그의 곁에 앉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연정훈은 그녀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포크로 감자를 찍어 그녀의 입에 가져다
“내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보고 싶었죠. 그런데...”양시연이 부드럽게 말을 하던 중 연정훈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려 키스했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자 양시연은 잠시 놀라 눈을 감고 앓는 소리를 냈다.곧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벌려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서두르지 않는 그들의 키스는 부드럽고 길게 이어졌고 키스가 끝나자 양시연은 살짝 헐떡이며 촉촉해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두 볼이 붉게 물든 양시연은 발끝을 들어 연정훈의 목에 팔을 감고 손끝으로는 연정훈의 귀를 장난스럽게 간지럽히며 속삭였다.“이렇게 빨리 온 거 보면 전화 끊자마자 바로 비행기 표 예매한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여 아주머니가 반찬 준비하시는 걸 기다렸어.”양시연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듯했지만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걱정스레 물었다.“저녁은 먹었어요?”“비행기에서 먹었어.”“뭘 먹었는데요?”연정훈은 대답하려다 순간적으로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양시연이 그의 귀를 잡으며 말했다.“거짓말하지 마요.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진수빈 씨가 정훈 씨랑 같이 왔는데 방금 막 배달을 시키더라고요.”연정훈은 침묵했다.“...”그가 들킨 후 민망한 듯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하려 하자 양시연은 웃으며 그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낮게 말했다.“장난치지 말고요. 우선 뭘 좀 먹고 씻고 푹 쉬어야 해요.”“안 피곤한데.”“그러면 정훈 씨...아!”양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갑작스럽게 들어 올렸고 그는 몇 걸음 만에 침대로 다가가 양시연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몸을 기울였다.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편히 누웠지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았다.그녀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며 장난스럽게 입을 내밀었다.“나 보고 싶었다는 게 이런 거였어요?”‘뭐야. 온통 엉큼한 생각뿐이라니.’연정훈은 전화를 받은 뒤 감정이 북받쳐 단숨에 이곳으로 달려왔다.비행기에서도 그녀에 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