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서는 한참 동안 긴 침묵이 흘렀다.양혁수가 먼저 도발했다.“왜 그래요 형? 아쉬워요?”“형이 포기하지 못할까 봐 내가 더 초조해요.”“난 안시연과 결혼할 거예요.”“입만 열면 허풍은.”양혁수가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형한테 허풍을 치겠어요? 내일 아침 9시 구청에서 만나요. 안시연이 오면 바로 혼인신고서 작성할 거예요.”안시연이 참다못해 외쳤다.“도련님!”“나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양혁수는 여전히 농담 섞인 말투였다.“내일 혼인신고서 작성하려는데 올래?”안시연은 심호흡하며 말했다.“이런 농담 다시 하지 마세요.”“농담 아니야.”양혁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오기만 해. 그럼 결혼하자.”안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그 말에 심장이 절로 쿵쿵 뛰었다.“형. 어떻게 생각하세요?”양혁수가 연정훈에게 재차 물었다.안시연 손을 잡았던 손의 힘이 풀리고 연정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일 아침 9시, 내가 직접 바래다줄 테니 자신 있으면 제시간에 오든지.”양혁수가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절대 늦지 않을게요!”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안시연은 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연정훈이 너무 힘을 준 건지 손자국이 빨갛게 남았다.안시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대표님, 저도 독립적인 생명체라고 생각되는데요.”‘왜 내 혼인은 제 멋대로 결정하고 아침 일찍 바래다준다고 하는 거야?’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 역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애써 기분을 억눌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또 네가 기뻐할 줄 알았지.”‘결혼이 간절해 내가 아니면 양혁수를 찾아갈 줄 알았어.’안시연은 고개를 돌렸다.“기뻐하든 아니든 그건 제 일이 구요. 제 혼인도 저만 결정할 수 있어요.”연정훈이 침묵했다.한참 조용하던 차 안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안경을 벗어 앞으로 내던졌다.“양혁수가 결혼하자는 말이 진심
안시연은 억울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차 안에서 둘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같은 방에 있어도 두 사람은 서로를 공기처럼 여겼다.안시연은 옆방에서 자겠다고 마음먹고 이불과 베개를 챙기며 물었다.“오늘 할 거예요? 안 하면 잘래요.”그 말투는 듣는 이의 화를 돋웠다. 마치 내일 양혁수가 무조건 구청에서 자신을 기다릴 거라고 단정하는 말투였다.연정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일이면 제수가 될 사람한테 그러면 내가 뭐가 되겠어?”“...”안시연은 이불을 안고 몸을 돌렸고 옆방으로 돌아가 펑 하고 문을 닫았다.연정훈도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고 손목시계를 풀어 탁자에 내리쳤다.내일 아침 9시, 12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하지만 연정훈은 조금도 급한 마음이 없었다.내일 아침 대체 누가 체면을 구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그러한 생각에 잠긴 채로 방을 걷다가 연정훈은 실수로 탁자 모서리에 다리를 찍었다.우당탕!갑자기 들려오는 소란에 안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방을 나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다시 마음을 고쳐 자리에 앉았다.어차피 이런 일로 연정훈의 목숨이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악독한 마음을 먹은 사람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안시연은 이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잠이나 자자!’...양씨 저택.양민아는 서킷장에서 양혁수를 만나지 못해 내내 전전긍긍했다.자유로운 성격의 양혁수가 정말 엉뚱한 짓이라도 한다면 양민아 본인도 연루될 게 뻔했다.급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양혁수는 보이지 않았다.양씨 본가는 경인 시에 있었으나 최근에는 경남 쪽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양지원이 자주 집을 비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러니 남매마저 집을 비우면 본가는 방치될 것이다.“아가씨.”집사가 양민아에게 인사를 올렸다.양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도련님은요?”“큰아씨의 서재에 계십니다.”양지원은 거의 반백 살이 되어가도 집사는 그녀를 큰아씨라고 불렀다.양민아는 이미 적응이 된 터라 대
양민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누구랑?”양혁수는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스트레칭하더니 솔직하게 말했다.“안시연.”양민아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빠르게 양혁수의 앞으로 걸어갔다.“너 미쳤어?”양혁수는 이런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으며 말했다.“내가 안시연이랑 결혼하면 연정훈을 뺏을 사람도 없으니 너한테도 좋은 거잖아.”“그거랑은 다르지!”양민아는 목소리를 높였다.“네 아내면 양씨 가문 안주인이잖아!”양혁수가 이렇게까지 미친 녀석일 줄은 몰랐다.양혁수는 두 손을 머리 뒤로 베고 말했다.“왜? 안시연이 네 머리 꼭대기에 설가봐 그래?”양민아는 두 눈을 꼭 감았다.양민아는 안시연에게서 연정훈을 빼앗아 연씨 가문 사모가 되길 바랐었다. 양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었으므로 양지원이 아직 자신을 아낄 때 하루빨리 더 든든한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그러나 그 대가가 안시연을 올케라고 불러야 하는 거라면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는가?‘그깟 안시연이 뭐라고?’그 생각에 양민아는 심호흡하며 양혁수를 설득하려 했다.“어떻게 결혼을 해? 안시연은 연정훈의 사람이잖아!”“다 생각이 있어.”양혁수는 다리를 탁자 위로 올리고 천천히 말했다.“신혼 선물이나 준비해 둬.”양민아는 심장이 철렁했다.양혁수는 정말 진심인 듯싶었다.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다시 도장으로 향했다.양혁수는 양민아보다 한발 빠르게 도장을 손에 쥐었다.“시간이 많이 늦었고 내일 아침 혼인신고 작성하러 가야 하니 누나와의 대화는 여기까지.”양혁수는 여유롭게 몸을 일으켜 방으로 돌아갔다.“정말 결혼하게?”양민아가 마지막으로 물었다.양혁수가 몸을 돌리고 대답했다.“백 퍼센트 진심.”“양혁수, 결혼은 장난이 아니야.”양혁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래서?”‘장난? 그게 다 뭐라고.’‘결혼해도 이혼할 수 있지 않은가?’양민아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안시연을 알고 지낸 지 겨우 며칠이라고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첫눈에 반해 모든 걸 걸고 싶어진다는
안시연은 사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그런데 새벽 6시경 깨어나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양혁수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일어났어?]안시연은 잠이 순식간에 확 깨었다.양혁수는 도장을 챙긴 사진을 찍어 보냈다.[전남친 꼭 데리고 와. 증인 서달라고 하자.]“...”안시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양혁수가 안시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 맞았다. 게다가 이 사건은 제대로 양혁수의 도파민을 자극한 게 분명했다.결혼?양혁수는 두려울 게 없었다. 서로 안 맞으면 이혼하면 그만이었다.안시연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젯밤 연정훈과 말다툼했던 자신을 원망했다.‘이제 어떡하면 좋아?’‘그냥 도망갈까? 아예 가지 마?’그때 방 밖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연정훈도 일어난 건가?’안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다. 연정훈도 일찍 일어난 거라면 도망갈 기회가 없어졌다.한참 제자리에 앉아 고민하다가 연정훈이 구경거리를 보러 일찍 일어난 게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어휴. 일단 가보자. 그리고 기회를 찾아 양혁수를 거절하는 거야.’‘기세는 절대 지면 안 돼!’긴 한숨을 내쉰 안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옷을 골랐다.아침 7시.평소 이 시간에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모닝 운동을 할 때도 있었다.그러나 오늘 아침 안시연은 일찍 주방으로 들어가 1인분의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연정훈은 커피를 내리고 창가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보이지 않는 접전이 시작되고 아무도 고개 숙일 생각하지 않았다.연정훈은 기분이 언짢았다.오늘 안시연이 입은 새 원피스는 연정훈의 카드를 긁은 거였다.게다가 메이크업까지 한 걸 보아 안시연이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딸칵!연정훈은 실수로 커피 스푼을 컵 안으로 떨어뜨렸다.안시연은 그 인기척에 말없이 입을 삐죽였다.연정훈이 몰래 출근했다면 안시연은 모르는 척 없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그런데 돌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끝까지 해보자는 게 틀림없었다.‘대체 왜 양혁수가 내가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하는 거지?’안시연도
양씨 가문.양혁수는 기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고 차키를 챙겨 집 밖으로 향했다.그런데 현관을 나서자마자 검은색 링컨 네비게이터가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양혁수는 잠시 멈춰서서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창수 삼촌, 여긴 어쩐 일이세요?”중년 남자는 반듯한 셔츠 차림에 우아하고 기품이 넘쳐 보였다. 양석진의 곁에서 정치 일을 오랫동안 도왔으니 양씨 집안의 아랫사람 앞에서도 위엄이 넘쳤다.“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축하하러 왔습니다.”양혁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누구 입이 싼 지 벌써 삼촌한테까지 말을 전했나 봐요?”양창수는 표정 한번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러니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군요?”“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뱉은 이상 책임을 져야죠. 더구나 저는 성인 남성인데요.”“그래요. 그 말엔 삼촌도 동의하셨답니다. 하지만 양혁수 씨는 양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혼인을 그렇게 성급히 하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고 삼촌이 대신 확인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삼촌이...”“그래서 구청은 양혁수 씨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삼촌이 대신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양혁수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삼촌이 경인에 있는 거예요?”“경인에 없어도 큰아씨 전화 한 통이면 어디에 있어도 달려오실 겁니다.”“...”‘젠장. 삼촌을 잊어버렸잖아.’중얼거리는 양혁수 주변으로 양창수가 데려온 사람들이 둘러쌌다.“도련님, 죄송하게 되었습니다.”구청으로 가는 차 안은 적막했다.진수빈은 갑작스레 막장으로 치달은 시나리오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차선을 바꿔 추돌 사고를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기사가 진수빈에게 그럴 기회를 줄 리가 없었다.뒷자리의 연정훈과 안시연은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구청에 커플들이 쌍쌍이 들어섰으나 양혁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연정훈은 두 눈을 감고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의 침묵이 바늘이 되어 자신을 콕콕 찌르
안시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이만 도망가기로 결심했다.저녁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연정훈이 유치하게 자신을 놀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그래서 구청 사무실을 빙 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조용한 정원까지 다다르자 정장에 가죽 구두를 신은, 척 보아도 정치 인사 같은 두 사람이 보였다.안시연은 일부러 피해 걸었지만 두 사람은 안시연 앞에서 멈춰 섰다.“안시연 씨 맞으시죠?”둘 중 한 명이 물었다.안시연이 경계를 하며 물었다.“그쪽은...”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두 남자는 길을 비켜서며 말했다.“양 대표님이 안시연 씨를 위층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자리에 굳었다.‘설마 양지원?’양혁수의 장난이 결국 양지원의 귀에까지 들어갔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양혁수가 오늘 이 자리에 오지 못한 건 아마 양지원이 손을 본 것 같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건지 직접 자신을 만나러 온 것 같았다.안시연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저는 양 대표님을 만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요. 오해는 도련님한테서 전해 들으시길 바라요.”두 사람은 안시연의 말을 무시한 채로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모시는 제스처를 했다.“이곳으로 모시겠습니다.”안시연은 전에 양지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조금 차가운 사람 같았으나 인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잠시 생각해 보니 양혁수의 일에 양지원이 어머니로서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상할 점은 아니었다.게다가 구청에서 큰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그러니 위층에서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려고 했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걸었다.3층으로 올라가자 오래된 대리석 바닥이 보이고 조용하고 여유로운 사무실 분위기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가장 안쪽 방 밖으로 5~6명의 경호원이 보였다.안시연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양지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는데... 갑자기 뒤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깜짝
당황한 안시연은 얼빠진 듯 연정훈을 쳐다보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정훈이 여전히 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감을 느끼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바깥은 햇빛이 눈에 부셨다.안시연이 나오는 것을 보고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수빈이 얼른 내려서 맞이했다.“안시연 씨, 대표님은요?”안시연은 그를 보고도 놀란 가슴이 가라앉지 않았다.그녀는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3층에요. 일이 좀 있어요.”진수빈은 그녀를 차에 태웠다.안시연은 얼빠진 상태로 뒷좌석에 탔다.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을 보니 땀이 흥건했다.진수빈은 연정훈이 없는 틈을 타서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려 했다.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안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진 비서님은 양 의원을 본 적이 있어요?”진수빈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방금 차에 탄 사람이 양 대표님 아니었어요?”안시연이 침묵하자, 진수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양혁수가 함부로 하다가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안시연이 더 놀랄까 봐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계시니 오해를 풀 수 있을 겁니다.”안시연은 힘없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심장이 계속 쿵쾅거리고 있다.전국 남자들의 발언권 순위를 매긴다면 양석진은 단연 10위권에 들 것이다.그녀는 양지원도 만난 적이 있는데, 거리감은 느꼈지만 긴장감이나 공포감은 없었다.연정훈의 경우, 학창 시절의 기억이 있어서 다시 만난 후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였음에도 두려운 감정은 없었다.하지만 양석진은 다르다. 그녀는 사무실 문밖에 서 있을 때 다리까지 나른해졌다.그녀는 눈을 감고 아직 거기 있는 연정훈을 생각했다.연정훈도 양석진에게는 손아랫사람인데 불리하지 않을까?안시연은 삐져서 이렇게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이 좀 후회됐다.한참 지나도 연정훈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했다.죽
구청.위층 사무실에서 비서가 연정훈을 보내자마자 양석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았다.“지원아.”전화기 저편에서 양지원은 변함없는 남자의 덤덤한 목소리에 코끝이 찡했다.사실 최근 몇 년 그녀는 그에게 거의 전화를 하지 않았다.양혁수가 허튼짓을 하는데 미처 돌아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부탁한 것이다.그녀는 책상 앞에 앉은 채 전화가 연결되자 손가락으로 전화선을 감았다.“오빠, 오늘 신세 많이 졌어요.”“응.”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외마디 대답이었다.양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다음에 집에 오면, 제가 직접 요리해서 대접할게요.”“내가 죽어야 시간이 나서 제사상이라도 차려주겠지.”“...”그동안 항상 그를 피했고, 그가 집에 돌아오면 출장을 갔던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오빠는 지금 바쁘잖아요? 제가 어떻게 시간을 뺏겠어요?”그녀의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 말이 없었다.잠시 후 남자가 입을 열었다.“내가 총통부 근처에 묵고 있으니 도착하면 사람을 내려보낼게.”“저는 아마...”“오늘 나한테 신세 진 거 갚는다고 생각해.”양석진은 그녀의 말을 중도에 잘랐다.양지원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또 한참 침묵이 흘렀다.잠시 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저녁 8시까지 갈게요.”“기다릴게.”-연정훈의 한마디에 안시연은 안도감이 들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오후에야 양혁수에게서 전화가 왔다.“미안해요. 당분간 선배님과 결혼할 수 없어요.”안시연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혁수 씨, 부탁인데 다시는 이 얘기를 꺼내지 말아요. 저는 박복한 사람이라 이러다가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아요.”“...”“제가 안 가서 연정훈이 비웃던가요?”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아니다.차에서 내릴 때 위로의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전화기 저편에서 양혁수가 코웃음을 치며 연정훈을 음흉하다고 욕했다.“그 사람이 혁수 씨에게 무슨 짓을 했어요?”“말로는 시연 씨를 보내준다고 하
양혁수는 그녀가 갑자기 대담해진 것에 깜짝 놀랐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변여름, 내려가.”변여름은 말을 듣지 않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살며시 쓸어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그의 어깨를 감쌌다.그녀가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양혁수는 어지러운 머리를 억지로 참고 그녀를 몸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그녀의 몸에 닿자 손바닥이 부드러운 감촉에 젖어들었다.그는 마치 번개에 맞은 듯 머리가 하얘졌다. 손에 힘이 빠졌다.‘젠장. 이 꼬맹이 속옷도 안 입었어.’양혁수는 변여름이 꽁꽁 싸맨 옷차림을 보고 적어도 선을 지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허세를 부린 것이었다.목을 감싼 변여름은 이미 그의 반응을 예상한 듯 조급해하지 않고 마치 요정처럼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양혁수는 변여름의 팔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며 진짜 화가 난 척 말했다.“계속 선을 넘으면 나 진짜로 화 낼 거야.”그 말을 듣고 변여름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을 감싼 손이 약간 풀렸다.양혁수는 속으로 안도하며 변여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그는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그녀를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지만 변여름은 갑자기 그를 공격하며 손을 꽉 잡고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양혁수는 멍해졌다.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 몸을 뒤로 짚으며 눈을 크게 떴다.변여름은 그에게 강제로 키스할 뿐만 아니라 양혁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능숙하게 두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감싸 안았다. 양혁수가 놀란 틈을 타서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전례 없는 경험에 양혁수는 숨이 가빠지고 두피가 저릿저릿했다.변여름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찔렀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렸지만 저항할 힘이 없었다.양혁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키스를 피하면서 손에 힘을 주어 변여름을 밀어내려고 했다.변여름은 양혁수가 자신에게 주먹을 쓰지 않을 것을
양혁수가 말했다.“네가 날 좋아하는 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그러면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도 좋아하게 될 거야.”양혁수는 마침내 변여름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반박했다.변여름은 고개를 저었다.“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노지혜 씨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 때문에 오빠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거라고요. 노지혜 씨는 오빠를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저의 오빠만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오빠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오빠만 바라보니까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제 눈에는 오빠밖에 안 보여요.”양혁수는 침묵했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또다시 변여름의 고백 타임이 되어버렸네.’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 무사히 떠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침묵 속에서 변여름이 그에게 물었다. “오빠, 오늘 오빠 옆에서 잠들어도 돼요? 내일이면 떠나잖아요. 오빠가 절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또 붙잡으면 오빠가 화낼 테니까 그냥 조용히 옆에 있을게요. 내일 아침 꼭 웃으며 오빠를 보내드릴게요.”양혁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변여름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에는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했는데도 오빠는 나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것 같아요. 떠날 땐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겠죠. 전에 했던 건방진 말들은 모두 허세였어요. 나도 사람이에요. 아무리 기다려도 답을 받지 못하면 슬퍼질 수밖에 없어요. 오빠가 화내는 것도 정말 싫어하는 것도 다 싫어요. 그리고 이번엔 오빠를 붙잡을 자신이 없어요. 오빠, 에든베러로 가는 거죠? 거기에는 오빠와 양시연 언니의 추억이 있잖아요.”말을 마치자 그녀는 한순간에 기운이 빠진 듯 축 처졌고 머리 위에는 걷히지 않는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했다.양혁수는 사랑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알았기에 그녀의 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변여름은 항상 양혁수에게 변백호를 놀리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그 농담 속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단지 그녀가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변백호에게 미친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양혁수는 알지 못했다.변백호는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고 그녀의 많은 행동은 변백호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분명 전에는 모두 ‘비정상’이었는데 변백호가 한 번 외출하고 오더니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변여름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씨 가문의 가풍에 싫증을 느꼈는지 다음 날 떠난 것을 변여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아침 일찍 양혁수는 가방을 메고 혼자 외출했고 그 흰 고양이도 데려갔다.변여름이 맨발로 방에서 뛰쳐나왔을 때 복도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변백호는 혼자 창가에 서서 아래층을 깊게 응시하고 있었다.그녀는 변백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변백호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변여름은 조용히 작은 발판을 옮겨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변백호를 안고 변백호처럼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그의 모습이 마당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봤다. 흰 고양이가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고 부드러웠다.그녀는 변백호에게 물었다.“다시 올 거예요?”그들의 모국어는 라틴어였고 평소 집에서 대화할 때도 라틴어를 썼다.변백호는 그녀에게 대답했지만 한국어로 말했다.“왜 돌아와? 네가 고양이를 괴롭히는 걸 보려고?”변여름은 의문스러웠다.???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변백호의 심정을 이해했다. 친구가 없던 기묘한 소년이 친구를 데려왔는데 결국 그 친구가 자기 가족이 모두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창피했을 것이다.다행히 양혁수는 나중에 변백호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추억에서 벗어나 변여름은 양혁수에게 물었다.“그 흰 고양이는 어떻게 됐어요?”양혁수는 말했다.“내가 집으로 데려가서 집사에게 맡겼어. 재작년에도 잘 지내고 있었어.”“다행이네요.”그녀가 안도하는 것을 듣고 양혁수는 그녀를 여
변여름은 잠깐만 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커다란 베개를 양혁수 옆에 두고 몸을 기대었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살짝 묻은 채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녀가 곁에서 잠든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양혁수는 이미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들었다.“오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요?”양혁수는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응...”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었겠지.”“아니에요.”변여름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그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아니라고? 내가 변백호랑 뉴성에 놀러 갔을 때 변백호가 널 데리고 왔잖아.”“저희 오빠랑 혁수 오빠가 처음 만나고 오빠를 집에 데려다줄 때 우리가 만났어요.”변여름이 바로잡았다.양혁수는 기억이 났다.놀란 표정으로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진지하게 되물었다.“그때 네... 네 살?”“거의 그렇죠.”‘정말 대단해. 그때 일을 다 기억하다니.’양혁수는 깊이 회상했다.그해 갓 성인이 된 그는 양지원과 함께 뉴성에서 열린 한국 상회의 파티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변백호와 불편한 일이 있었다.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를 싫어하는 사이였다.하지만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려던 순간 마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밖으로 나가 확인했을 때 그는 피투성이가 된 변백호를 발견했고 변백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열여덟 살의 소년은 정의감이 넘쳐흘렀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양혁수는 변백호를 구한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변여름을 보았다.그는 변씨 가문에 머물렀고 변씨 가문의 사람들은 변백호를 구해준 것에 감사하며 귀빈으로 대접했다.해가 질 무렵 그는 뒷정원을 거닐다가 정교한 인형 같은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변여름은 너무 귀여워서 마치 꿈속에서 그리던 여동생 같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니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은 조용했다.양혁수는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일 떠날 준비를 하려고 전화를 걸려 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는 문을 열었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래떡 베개였다. 하얀색 베개가 변여름의 품에 안겨 있었고 크기는 거의 그녀의 키와 같았다.변여름은 고개를 살짝 들어 먼저 눈을 보였다.“오빠.”그녀는 긴 원피스 잠옷을 입고 겉옷은 작은 재킷을 입어서 긴 소매로 몸을 꽁꽁 싸맸다.양혁수는 술을 마셔서 머리가 띵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기를 맡자 오장육부가 맑아지는 듯했으며 꽤 기분이 좋았다.그는 이마를 눌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오빠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요?”시간이 늦었고 양혁수는 그녀를 경계하며 입을 열어 거절하려 했지만 변여름이 말했다.“잠깐만요. 오빠는 내일 떠나잖아요. 오빠랑 얘기 좀 하고 싶어요.”그녀는 품에 안은 베개를 꽉 껴안았고 양혁수는 베개가 눌린 주름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 갈등을 느꼈다.그녀를 달래지 않으면 내일 그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양혁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옆으로 돌려 변여름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양혁수는 가정부에게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녀에게 영화를 틀어주었다. 음식은 따로따로 들어왔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단둘이 있는 시간이 끊어졌다.침대 끝 쪽 카펫에 앉아 그는 변여름과 나란히 앉았다.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고 맞은편에는 변여름이 선택한 추리 영화가 나왔다.처음에는 그는 변여름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그는 계속 멕하든에 머물며 변여름과 함께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방 안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시 졸았다.짧은 잠 동안 그는 꿈꾸었고 꿈속에는 피뿐이었다.한을 품고 죽은 사람처럼 한 쌍의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양혁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란스러운 어둠 속에서 변여름의 연이은 부름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졌다.변여름은 먹던 것을 멈추고 편의점 직원에게 우산을 빌려 길 건너 차 쪽으로 향했다.“내가 운전할게.”양혁수가 말했다.변여름은 그를 거절했다.“오빠는 그냥 앉아 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좋아요.”“눈은 이제 괜찮아.”“그래도 술 마셨잖아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고작 백 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데.’양혁수가 말을 멈추는 사이 변여름은 이미 우산을 펼쳐 문을 열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맹렬하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변여름의 작은 몸은 역풍을 맞으며 비바람 속에서 무기력해 보였다. 마치 바람이 세게 불면 바로 날아갈 것 같았다.우산이 거추장스러워지자 중간쯤 왔을 때 그녀는 우산을 접고 재빨리 차 쪽으로 뛰어갔다.그녀가 차에 오르자 양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뒤에서 직원이 외국어로 한참을 부르지만 양혁수는 반응하지 않았고 직원은 어설픈 영어로 다시 소리쳐서 문을 닫으라고 했다.마침내 변여름은 차를 편의점 문 앞에 대었다.그녀가 다시 내려서 그를 데려오려는 것을 보고 양혁수는 먹지 않은 음식들을 모두 포장해 들고 나왔다.변여름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자신의 차 문을 닫고 그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두 사람은 모두 차에 탔다.구운 바나나와 구운 고구마의 달콤한 냄새가 좁은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양혁수는 변여름이 꽤 많이 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뒷좌석에 놓았다.“돌아가서 따뜻하게 데워 먹어.”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변여름은 그에게 기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안경을 벗고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었다.“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요. 내가 데리러 갈게요.”변여름은 한숨을 쉬며 마치 양혁수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양혁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작 물 몇 방울뿐이야.”변여름은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닦아주었
양혁수는 술을 조금 마신 탓에 졸음이 밀려왔다.몽롱한 가운데 그는 마치 경인처럼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를 떠올렸다. 한때 홀로 그곳을 여행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고 용산 거리의 눈 내린 풍경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변여름이 갑자기 그를 불렀고 졸음은 한순간에 흩어졌다.“구운 바나나?”“네. 달콤해요.”양혁수는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사자.”“그럼 제가 사러 갈게요.”변여름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었다.양혁수는 귀찮아 차에서 내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가 차 앞을 돌아 지나가는 순간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 둘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편의점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길이 넓어 변여름은 거의 반대편까지 다다랐다. 돌아서서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살짝 놀랐다.양혁수는 코트를 여미며 그녀 옆을 지나쳤다.“멍하니 뭐 해? 더 늦으면 네 구운 바나나 다 팔릴지도 몰라.”“괜찮아요.”변여름은 그를 따라잡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저긴 늦게까지 구워요.”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밖에서는 이미 달콤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구운 고구마도 팔았는데 꿀 시럽 같은 것을 곁들여 양혁수에게는 다소 낯선 맛이었다.하지만 졸음은 어느새 사라졌고 변여름과 함께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변여름은 드물게 어린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높은 의자에 앉아 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 입씩 맛보며 천천히 음식을 나눠 주었다.“앞에 식당이 하나 더 있어요. 오빠랑 노지혜 씨랑 자주 가는 곳인데 다음엔 오빠도 같이 가요.”변여름이 양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양혁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그는 변여름의 집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그녀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양혁수는 손을 뻗어 힘주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나를 데려간다고? 네가 나를 데려갈 필요 있어? 이 도시는 십 년 전에 네 오빠랑 다 돌아다녔어.
“실험하다 실수로 손을 살짝 베었어요.”변여름이 말했다.양혁수는 속으로 그녀가 요 며칠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실험에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과일은 더 자르지 않아도 돼. 굳이 나를 위해 요리할 필요 없어.”그가 차분히 말하자 변여름은 잠시 멈칫했다.그의 차가운 말투를 듣자 그녀는 또다시 그가 거절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변여름의 마음은 때론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가끔은 무너질 때도 있었다.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과일을 입에 넣으며 평소처럼 혼자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양혁수는 그녀 곁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일단 손에 난 상처부터 낫게 해. 네가 해준 밥 몇 끼쯤 안 먹어도 괜찮으니까.”변여름은 의아했다.‘응?’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퍼지는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고개를 돌리니 그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변여름은 손에 쥔 것을 내려놓고 양혁수를 따라 뛰어갔다....멕하든의 겨울은 비교적 따뜻했다.양시연이 첫눈 사진을 공유했을 때 양혁수는 이미 한 달 넘게 변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두 번만 더 치료받으면 눈 위의 흉터를 완전히 지울 수 있을 터였다.밤이 되자 변여름은 이미 차를 준비해 두었고 밖에서 뛰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오빠, 이제 출발할까요?”양혁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변여름이 건네준 겉옷을 받아 들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양혁수는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요즘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자주 착용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거침없고 활기찬 모습은 많이 사라졌고 안경을 쓰니 더욱 편안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했다. 마치 느긋한 귀공자처럼 보였다.변여름은 그에게 말을 걸려고 했지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고 원인을 찾으려 애썼다.차에 타자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조용했다.찰리의 개인 병원은 규모가 크지 않았고 낮에는 꽤 바빴지만 요즘 밤에는 양혁수만을
양지원이 양혁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양혁수의 어이없고 짜증 섞인 불평을 듣고 한참을 웃다가 멈췄다.“백호 한 말도 틀리지 않아. 네가 꼬시는 능력은 있는데 차버리는 건 못하겠어?”양혁수는 할 말을 잃었다.그는 온갖 생각을 해봤지만 도대체 자신이 어떤 점에서 변여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됐어요.”양지원이 말했다.“그냥 휴가라고 생각하고 좀 있어. 요 몇 년 동안 너무 심심하게 살았잖아. 이참에 좀 짜릿한 일을 겪어봐.”“차라리 심심한 게 나아요.”양지원은 속으로 혀를 찼다.양지원과 양혁수는 전화를 끊었고 양혁수는 대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아 계속 머리를 앓았다.그는 벌써 사흘 더 있었지만 변여름은 마치 껌딱지처럼 그를 따라다녔다.이때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목이 마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물을 찾았다. 손으로 컵을 만지려는 순간 컵이 이미 그의 손 아래로 밀려왔다.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변여름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컵을 들어 익숙하게 빨대를 물고 한 모금 마셨다.이 엉터리 컵도 변여름이 그를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었다. 분홍색 큰 개구리 모양이었고 버튼을 누르면 뚜껑이 항상 ‘탁’하고 튀어나왔다.변여름은 그의 눈이 불편하니까 이 컵을 쓰면 물을 쏟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오빠, 나는 이미 찰리 선생님과 약속을 잡았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가요.”변여름이 말했다.그의 눈은 다친 곳이 나아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었지만 흉터가 남아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했다.양혁수는 말했다.“저녁에 갈 필요 없어. 오후에 갈 거야.”변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과일을 깎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빠는 셋째 오빠와 오후에 골프 치기로 했잖아요? 골프 치고 샤워하면 시간이 늦어질 거예요.”양혁수는 침묵했다.‘잊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눌렀다.양혁수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양지원은 특별히 지시해 일로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는